우동은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음식이다. 일본에는 헤이안 시대, 당에서 유학하던 승려가 일본으로 돌아가 우동 만드는 법을 전했다고 한다. 그때 이후 우동은 지금까지 일본에서 사랑받는 음식이다. 전근대시기 한국의 국수는 주로 메밀로 만들었다. 조선시대까지 밀국수 요리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우동이란 말은 일본어로,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 일본인과 중국인이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각각 만들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청요리집에서 우동은 가장 싼 메뉴였다. 오늘날 자장면의 위치를 그 당시 우동이 차지하고 있었다. 청요리집에서는 우동 한그릇만 시켜도 주위와 분리된 독방을 제공하였으므로 조선 사람들 중 청요리집에 가서 우동을 시켜 먹는 사람이 있었다. ‘본적을 충북 영동군 매곡면 광전리에 두고 현재 김천 본정에 있는 김갑동(33)은 지난 30일 오전 1시경에 김천 대화정 덕화원지점이라는 요리점에 젊은 남자 둘에게 난타를 당하고 현금도 빼앗겼는데 김갑동은 지난 30일 오전 1시 열차로 자기 모친을 전송키 위하여 우동을 사서 대접하려고 전기 덕화원지점으로 들어가 방문을 열었던 바 젊은 남자 2명이 여자 1명을 데리고 있던 바 일어나며 김갑동을 끌어가 난타한 것이다.’(『동아일보』1927.10.04.)
우동은 배달도 했다. 청요리집에서 우동값은 대략 10~30전 사이였다. 1930년 풍년으로 곡가가 떨어지자 각지의 경찰서는 시내의 음식점 주인들에게 음식값을 낮출 것을 권고하였는데, 리원지역에서는 중국우동 20전 받던 것을 15전으로 내렸다. 김천지역에서는 10전 받던 우동 값을 8전으로 하였다. 천내리에서는 30전 받던 것을 15전, 보령 대천에서는 20전 받던 것을 15전, 이천에서는 15전 받던 것을 10전 받았다.
우동은 호떡집에서 파는 메뉴이기도 했다. 밀가루로 만드는 음식이므로 호떡과 같이 판매한 듯하다. 1937년 중국과 일본 사이에 지나사변이 일어나자, 경성부의 청요릿집 80%가 폐업을 하고, 중국인들이 대거 중국으로 돌아간다. 이에 따라 청요릿집의 우동이나 호떡집의 우동은 거의 사라진다.
일본인 음식점에서도 우동은 가장 싼 음식이었다. 가쓰오부시를 우려낸 국물에 대파만 고명으로 얹은 가께우동이 가장 싼 메뉴로 10전 정도 하였다. ‘다만 10전만 가진 사람은 할수 없이 일본 우동집으로 가서 식성에 맞지 아니하는 가께우동이나 가께소바를 사먹게 된다.’(『동아일보』1928.11.27. 「음식점 매매단위 저하가 필요하다」)는 신문기사는 가께우동이 호떡과 함께 그 당시 가장 싼 외식메뉴였던 것을 보여준다. 가께우동은 기차역에서도 팔았다.
이렇게 청요릿집과 일본인 음식점에서 파는 우동 이외에 ‘우동집’이라는 가게가 있었다. 우동집은 명칭만 들으면 우동가게 같지만 실상은 우동을 안주로 술을 파는 술집이었다. 우동집에서는 호객행위와 손님접대를 위해서 젊은 아가씨를 고용했다. 우동집에서 일했던 아가씨의 경험담이 기사에 나와있다.
... 옥희를 믿고 따라가보니 동관에 있는 00식당이었습니다. 여러 무리들은 나를 꾀어 우동집 계집애로 만들었습니다. 어머님 모르게 낮에는 잠자고 밤에는 화장을 하고 노랑저고리, 남치마를 입고 식당앞 문에서 오고가는 소년을 꾀어 돈을 뺏는 악마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천진한 소년들은 우리의 미모에 팔리어 집에서 돈을 훔쳐다 이곳에 쓰고 갑니다. 나는 이러한 악마의 도구가 되어 삼시는 먹고 월급은 7원이었습니다. 한달 지나고 보름 후 엄마께 발각이 되었습니다.
(『동아일보』1929.11.15. 「직업부인이 되기까지 편모(偏母)를 위하여」)
우동집은 도시부터 농촌까지 전 조선에 퍼졌는데 ‘음주는 전 조선으로 유행하여 심산궁곡에 들어가도 속칭 우동집이라는 술파는 집이 있고 반드시 젊은 계집애가 웃음을 팔아서, 일없는 청년이 그리로 모여든다.’고 개탄(『동아일보』1930.11.17 「휴지통」)하는 글이 실리기도 했다. 해방 후에도 술을 파는 우동집은 계속 운영되었다. 빈대떡이나 우동 등이 한 가게에서 술안주로 합쳐지고 술을 같이 파는 가게로 변화하였다.
수원 깡우동은 수원 영통구 먹자골목의 한 골목에 있다. 지금은 체인점도 몇군데 있지만 이곳이 본점이다. 학창시절,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먹자골목 근처의 학원에 곧장 가곤 했는데, 생각해보면 항상 터줏대감처럼 그 골목을 지키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빠르게 바뀌는 다른 가게들과는 달리, 살짝 낡은 외관과 촌스러운 간판을 가지고 늘 그 곳에 서 있는 깡우동.
학원이 끝나고 나오는 10시쯤에는 얼굴이 빨간 어른들이 가게 앞에서 아이처럼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친구들과 항상 “우리 나중에 어른이 되면 저기서 술 먹자”며 우정을 다짐하곤 했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던 그 해 겨울, 친구들과 함께 모여 그곳에서 우동 한 그릇에 소주 한 잔을 마시며 각자의 미래를 그렸다. 아이러니 하게도 깡우동은 갓 스무 살이 되는 아이들이 포부를 얘기하기에는 너무 오래된 냄새가 가득했던 그런 곳이었다. 오히려 40대쯤 되는 아저씨들이 퇴근 후에 우동과 소주 한잔을 즐기며 과거를 돌아보기 좋았던 곳이라 하는 것이 맞겠다. 그럼에도 깡우동에서 술을 먹던 빨간 얼굴의 어른들을 보고 자란 우리는, 마치 그 곳에서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들곤 했었다.
이 오래된 가게에는 메뉴가 4개뿐이다. 7000원 짜리 우동과 어묵, 8000원 짜리 어묵우동, 그리고 가장 비싼 18000원 짜리 어묵탕이 전부이다. 사실 이 가격을 들으면 ‘어? 우동치고는 조금 비싼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6000원, 그리고 더 이전에는 5000원이면 우동을 먹을 수 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가격도 같이 올라 우동치고는 조금 비싼 가격이 되었다. 하지만 뜨끈한 우동 국물을 한 입 마시는 순간 가격에 대한 생각은 눈 녹듯이 사라진다.
우동과 어묵은 순한맛, 중간맛, 매운맛을 선택할 수 있는데 양념장으로 매운맛을 조절 해주시기 때문에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사람은 순한맛으로 주문한 뒤에 양념을 추가하는 것도 깡우동을 즐길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깡우동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국물이다. 깡우동만의 양념장, 쑥갓, 유부, 파 등이 들어간 이 국물은 추운 겨울에는 단단히 얼어버린 몸을 녹여주고, 더운 여름에는 더위로 지친 몸에 활력을 주며 이열치열이 무슨 의미였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국물은 술을 마시고 있지만 해장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게 만들기 때문에 사실 술안주로 최고다. 양념장이 들어가지만 짜지 않고 속이 뻥 뚫리는 이 국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시 이곳을 찾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깡우동의 면은 다른 우동집보다 얇고 쫄깃한 편인데 우동국물을 가득 머금은 유부와 면을 함께 먹으면 입 안이 우동향으로 가득해진다. 그리고 어떤 메뉴를 시켜도 항상 그 위에 쑥갓이 듬뿍 올라가 있어 향이 일품이다. 반찬은 단무지밖에 없지만 깡우동과 단무지의 조합을 먹고 있으면 다른 반찬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 오래된 가게의 또 다른 매력은 바로 인테리어다. 깡우동 내부의 벽은 노랗게 바랜 신문지로 덮여 있는데, 오래된 가게임을 증명하듯이 그때 그 시절하면 떠오르는 사건들부터‘인력구함’처럼 소소한 기사들까지 크고 작은 사건들이 가득하다. 우동 한 그릇에 우리 사회를 다시 읽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물론, 늘 함께 간 사람들과의 대화에 집중하며 우동을 먹느라 벽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신문은 그냥 벽지처럼 느껴지긴 한다.
신문지로 가득한 벽에 둘러싸여 동그란 스텐 식탁과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친구, 가족, 애인과 특별할 것 없는 얘기를 하며 우동 한 그릇, 소주 한 잔 먹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집의 가장 큰 매력이며 10년이 넘도록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