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하남시 감이동의 옛 이름이 ‘널무니’이다. 널무니는 남한산성의 서문 밖에 있는 마을이다. 널무니에서 태어난 천민 출신의 ‘서흔남(徐欣男)’이 병자호란 당시에 전령으로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와 관련한 설화가 전한다.
조선시대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인조는 대궐을 떠나 피신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인조는 신하들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할 것을 결심하고, 대궐을 나섰다. 그러나 이미 청나라 군사들이 한양 근처에 잠복하고 있었다. 인조가 남대문을 벗어나기도 전에 청나라 군사들은 지금의 마포 앞 한강인 양천강(陽川江)을 건넜다. 인조는 피난길이 막혔다는 소식을 듣고, 강화도로 피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가는 도중에도 전세가 불리하다는 소식으로 인해, 겁을 먹은 수행원과 군졸들이 하나 둘씩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인조는 얼마 남지 않은 신하들을 함께 사공도 없는 나룻배로 송파강(松城江)을 건넜다. 송파강은 건넜지만, 날이 어두워지고, 눈까지 내려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인조는 걷기 조차 힘들어 신하들의 등에 번갈아 업혀가며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남한산성이 보이는 곳에 이르러서는 인조도 신하들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이 지쳐 있었다. 이 때 나무를 한 짐 지고 산을 내려오는 나무꾼 한 사람을 만났다. 나무꾼은 자청해서 “제가 임금님을 업고, 남한산성으로 올라가겠습니다.”라고 나섰다. 인조는 너무나 다급한 상황이라 나무꾼의 등에 업혀 남한산성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그 나무꾼이 바로 ‘서흔남’이다. 남한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험하고, 잡목은 우거져 길을 찾기도 힘들었다. 거기다가 눈이 내려 빙판길이 되었다. 서흔남은 짚신을 신어서 더욱 미끄러웠다. 산을 오르고, 거기다가 빙판길을 올라야 해서 계속해서 미끄러지기만 하고, 발에서는 피가 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흔남은 인조를 업고 남한산성에 도착하였다. 남한산성에 도착한 인조는 서흔남을 불러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서흔남은 말을 못하고 가만히 있다가, “임금님의 곤룡포를 갖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옆에 있던 신하들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서흔남을 꾸짖었다. 그러나 인조는 미소를 지으며 곤룡포를 서흔남에게 주었다. 집으로 돌아간 서흔남은 평생 동안 곤룡포를 소중히 여겼다. 그러고 시간이 흘러 병석에 눕게 되자, 자신이 죽거든 곤룡포를 함께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고, 자식들도 유언에 따라서 곤룡포를 함께 묻어주었다고 한다.
서흔남은 노비로 있으면서 기와 잇기와 대장간 일을 하였다고 한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이 청나라 군사들에게 포위되자, 성 밖과 모든 소식이 끊어졌다. 성 안팎 소식을 전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데 아무도 지원을 하지 않았다. 그 때 서흔남이 자청하여 적진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허름한 옷을 걸치고, 한자로 쓴 왕의 유지(諭旨: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던 글)를 노끈으로 꼬아 옷으로 얽어매고, 손에는 깨진 쪽박을 들고 적진으로 들어갔다. 일부러 병든 걸인처럼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구걸을 하였다. 또한 청나라 군사들이 먹을 것을 주면, 손을 쓰지 않고 입으로만 먹으며, 그 자리에서 똥을 누어 의심을 피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로 다니며 인조의 유지를 전했다고 한다.
서흔남은 병자호란에서의 공으로 천인의 신분을 벗고, 훈련주부(訓鍊主簿)와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 받은 역사적 실존인물이다. 현재 서흔남의 묘비는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소재해 있다. 위와 같은 설화를 통해서 서흔남의 임금을 향한 충성심과 병자호란에서의 역할 등을 알 수 있다. 곧 서흔남이 벼슬을 제수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화를 통해서 전승한다.
경기도 하남시 배알미동(拜謁尾洞)의 도미나루[都彌-渡迷津]는 백제 개루왕의 도미설화에 유래를 두고 있는 지명이다. 이곳에는 팔당댐이 들어서기 전 바다같이 넓은 나루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다나루’ 또는 ‘바대이’이라 불렀다. 그리고 나룻가에는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는 당(堂)집이 여덟 군데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덟 개의 당집이 있는 곳이라 하여 팔당(八堂)이라 불렀다고 한다. 바로 이곳 배알미리 동쪽에 도미나루가 있다. 도미나루는 『삼국사기』 열전에 그 사연이 전한다.
도미(都彌)는 백제 사람이다. 비록 벽촌의 작은 백성이지만 자못 의리를 알고 있었다. 그 아내는 아름답고도 절행이 있어 당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개루왕이 이 말을 듣고 도미를 불러 말했다. “무릇 부인의 덕은 정조를 지켜 순결함이 제일이지만, 만일 어둡고 사람이 없는 곳에서 좋은 말로 꾀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 드물 것이다.” 도미가 대답했다. “사람의 정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아내 같은 사람은 죽더라도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입니다.” 왕이 이를 시험하려고 일이 있다 하여 도미를 머물러 두게 하였다.
그리고 가까운 신하 한 사람에게 왕의 의복과 말과 종자를 빌려주고 밤에 그 집에 가게 했다. 먼저 사람을 시켜 왕이 온다고 알렸다. 왕이 와서 그 부인에게 일렀다. “내가 오래전부터 너의 아름다움을 듣고 도미와 장기내기를 하여 이기었다. 내일은 너를 데려다 궁인(宮人)으로 삼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네 몸은 나의 것이다.” 그러면서 도미의 처를 범하려 하였다. 그러자 도미의 처가 말하였다. “국왕에겐 망령된 말이 없습니다. 내가 감히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까. 청하건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소서. 나는 옷을 고쳐 입고 들어가겠습니다.”
도미의 아내는 물러와 한 시자(侍者)를 단장시켜 방에 들어가 수청을 들게 하였다. 뒤에 왕이 속은 것을 알고 크게 노하였다. 이에 도미를 죄로 얽어 두 눈을 빼고 사람을 시켜 끌어내어 작은 배에 싣고 물 위에 띄워 보냈다. 그리고 도미의 아내를 끌어들여 강제로 상간하려 하자 도미의 아내는 말했다. “지금 남편을 잃어버렸으니 오로지 홀몸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대왕을 모시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어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월경으로 온몸이 더러우니 다른 날 깨끗이 목욕하고 오겠습니다.” 왕이 이 말을 믿고 허락하였다.
도미의 아내는 그 길로 도망하여 강 어귀에 이르렀으나 배가 없어 건너갈 수 없었다. 도미의 아내는 하늘을 우러러 통곡을 하였다. 그러자 홀연 한 척의 배가 물결을 따라오는 것을 보았다. 그 배를 타고 천성도(泉城島)라는 섬에 이르러, 그의 남편 도미를 만났다. 도미는 아직 죽지 않고 있어 둘은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 땅에 이르렀다. 고구려 사람들이 불쌍히 여기며 옷과 먹을 것을 주어 구차스럽게 살면서 객지에서 일생을 마치었다.
옛날 하남의 두미강에는 사람들이 살고, 농사도 지을 만큼 커다란 ‘당정섬’이 있었다. 물과 가까이 있다 보니 건강과 안전을 기원하는 ‘당’이 있는 ‘정자’가 있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 ‘당정섬’이다. 당정섬 주민들은 배를 타고 학교도 다니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하지만 1925년 을축년 큰 장마로 집이 떠내려가고 지붕위로 뱀까지 피신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당정섬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윗마을로 이주하게 되었고, 그 마을이 바로 더우개 마을이다. 그 후 당정섬은 한강종합개발로 섬에 있던 모래들이 서울로 옮겨지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옛 신문기사에 실린 당정섬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엄청난 차이가 날 정도로 큰 섬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오랜 시간 동안 두미협에서 내려오는 고운 모래들이 쌓이고 쌓여 다시 작은 섬을 이루었고, 그 섬은 다시 ‘당정섬’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비록 옛날처럼 사람이 살지는 않지만 자연을 그대로 품어 새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특히 하남 당정섬의 장관은 겨울철에 볼 수 있다. 겨울이면 천연기념물 제 201-2호인 큰고니가 시베리아에서 4천 km나 떨어진 하남 당점섬으로 날아온다. 또 다른 천연기념물인 참수리, 흰꼬리수리를 비롯해 휜뺨검둥오리, 흰죽지, 호사비오리, 해오라기 등 40여종의 다양한 철새들이 찾아와 풍부한 먹이들을 먹으며 겨울을 보낸다.
그래서 당정섬에선 매년 겨울철이 되면 ‘고니학교’가 문을 연다. 아이들과 가족들이 철새 탐조대에 설치된 필드스쿠프를 이용해 새들을 관찰할 수 있다. 또 강이 풀리고 따뜻한 봄이 되면 4월에는 잉어들의 산란장소가 되기도 한다. 많은 잉어들이 어도를 따라 산란을 하러 오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녀들과 살아있는 자연 교육을 할 수 있다.
대홍수라는 자연의 재해로 시련을 겪고, 한강종합개발이라는 사람들의 욕심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두미협에서 부드럽게 내려온 모래들이 쌓이고 쌓여 시간이 다시 자연을 치유한 모습만으로도 대견한 섬이다. 어렵고 힘든 시련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모습을 다듬고 만들다 보면 언젠가는 더 소중한 존재로 세상과 더불어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섬 같다. 자연과 시간의 치유의 힘을 보여주는 섬이 바로 당정섬이다.
해발 209.8m 이성산에 있는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이성산은 춘궁동, 초일동, 광암동의 분기점으로 남쪽으로 넓은 평야 지대는 남한산성에서 뻗어 내려온 금암산과 객산 등으로 둘러싸인 분지와 서쪽으로는 아차산일대와 풍납토성, 몽촌토성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둘레 1,665m의 요새지이다. 2000년 9월 16일 사적 제422호로 지정되었다. 경기 하남시 춘궁동 산36번지 외 일대이다.
이성산성은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에서 북쪽방향으로 내려오는 줄기와 만나 길게 맥을 형성하는 금암산의 줄기에 접해 있으며, 남쪽은 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들이 있으나 북쪽은 작은 구릉만 있어 한강 주변지역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남한산성의 연주봉에서 북쪽으로 뻗어 나간 금암산(해발 313m)에서 다시 북쪽으로 뻗어 약 40m정도 낮아지면서 거의 단락되었다가 다시 불쑥 솟아서 이성산이 되고, 다시 북쪽으로 뻗어 나가면서 183m의 고지가 되었다가 점차 낮아졌다. 성벽은 해발 100m 이상을 감싸안은 석축으로 거의 무너진 상태이나 그 자취가 대체로 잘 남아 있다.
성벽은 해발 209.8m인 주봉을 중심으로 남쪽의 능선을 따라 축조하여 부정형의 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이다. 성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곳곳에 평평하고 넓은 땅이 조성되었다. 성 내부 면적은 약 128,890㎡이다. 성벽의 안쪽에는 5m 정도의 도로를 두어 병사들의 이동이 쉽도록 하였으며 성벽은 자연지형을 따라 굴곡을 주었다. 성이 급격히 꺾인 부분에는 별도의 치를 설치하였는데 치의 길이는 3.4m, 너비는 2.5m에 달하여 길이보다 너비가 넓게 축조하였다. 성에는 북쪽, 서남쪽, 동쪽, 남쪽에 문지로 보이는 곳이 있는데, 이 중 남문이 정문 역할을 했을 것이다. 동문지도 확인되었는데 사다리를 올라가야 하는 현문식 구조이며 문지 바닥에는 수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성벽은 2차에 걸쳐 축조되었다. 1차 성벽을 쌓고 일정기간이 지난 후 성벽이 무너지게 되자 1차 성벽의 바깥쪽으로 약 3.8m 지점에서 새로운 성벽을 덧붙여 쌓았다. 두 성벽은 쌓은 시점이 다르기 때문에 축성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 1차성벽은 비교적 옆으로 길쭉하고 정교하지 않은 성돌로 퇴물림 쌓기를 하지 않고 거의 수직에 가깝게 쌓았다. 2차 성벽은 기단부를 조성한 후 바닥에 큰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표면과 모서리를 정교하게 다듬은 폭 30cm 내외인 옥수수알 모양의 성돌로 정교하게 쌓아 올렸는데 퇴물림쌓기를 하여 1차 성벽에 비하여 성벽의 경사가 완만한 것이 특징이다.
성내의 가장 중요한 시설인 집수시설로는 두 군데의 저수지가 확인되었으며 남문지 쪽의 저수지는 2차에 걸쳐 축조되었음이 밝혀졌다. 발굴된 건물지는 9개소이며 초석이 일부 노출되었거나 건물지가 확실한 것을 포함하면 최소한 15개소 이상의 대형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의 면적은 장방형의 경우 대략 80-90평 정도이고 다각형 건물은 20-30평 정도이다. 건물지 중에는 8각, 9각, 12각 등 다각형 건물지가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 중 동서로 대칭을 이루는 8각 건물과 9각 건물은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단과 사직단으로 추정된다.
성내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대체로 6-8세기 경 신라토기류와 기와류가 주종을 이룬다. 이로 보아 6세기 중엽 신라가 한강 하류지역을 장악하고 설치한 신주의 읍치성으로 축성되었다가 이후 7세기 중엽 한산주의 읍치성으로 기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