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평택시 포승면 만호리(晩湖里)는 아산만방조제 조금 못 미쳐 있고, 원효 대사가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닫게 된 수도사(修道寺)가 있는 남양만방조제도 만호리 못 미쳐 원정리에 있다. 만호리는 한자로 늦을 만(晩)자 호수 호(湖)자를 쓰는데, 지명이 끼친 영향이 있다고 한다.
경기도 평택시 포승면 만호리는 대정(大井), 만지(晩池), 느지 또는 만호(晩湖)라 부르는 지명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일까 1973년에 준공된 아산만방조제가 옆에 있으나 호수에 조금 못 미치는 마을이 되었다.
만호리 옆에는 원정리라는 마을이 있고, 이곳에는 1974년에 준공된 남양방조제가 있다. 이 역시 만호리에서 조금 못 미치는 곳이다. 아울러 원정리에는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깨달은 원효대사의 이야기가 서려 있는 수도사가 있다. 깨달음을 얻은 해골의 물에도 조금 못 미쳤으니 지명 참 대단하다. 이 절은 650년 신라 제 28대 진덕여왕 때 원효와 의상 두 대사가 함께 수도하러 당나라로 가는 길에 배를 기다리며 하룻밤 묵게된 절이다. 이때 원효대사는 밤중에 목이 몹시 말랐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절 뒤로 갔더니 그곳에는 바가지가 있는데, 그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시니 매우 시원하였다. 마른 목을 축이고 원효대사는 기분 좋게 잠을 청했다. 아침이 되어 어젯밤 마신 물이 생각나서 절 뒤로 가 보았다. 그런데 그곳에는 하얀 해골에 물이 담겨 있었다. 깜짝 놀라고 매스꺼웠다. 그러면서 방금까지도 맛있었던 물이 해골에 담긴 걸 보고 매스꺼워진 것을 보고, 모든 이치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원효대사는 먼 당나라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의상대사만 당나라로 수행을 떠났다. 그때 원효(元曉)가 당나라로 가다가 해골에 괸 물을 먹고 크게 깨달아 이런 글을 지었다.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갖가지 법이 멸한다(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
세상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이다. 원효대사는 부처님의 말씀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직접 실현하였다. 늦지만 깨달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좋겠는가.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차탄리(車灘里)는 수레여울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이다. 이곳은 차탄리라는 지명처럼 수레와 철마가 멈추어 섰고, 북쪽을 바라보며 고향을 향해 망제를 지내는 슬픈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고종황제와 순종황제가 일제의 강점에 비극으로 살다가 돌아가셔 선비들이 산에 올라 망제를 지내기도 했다. 수레가 여울에 빠져 원이 죽은 마을 차탄리에는 이런 유래가 전하고 있다.
차탄리는 수레 차(車)자에 여울 탄(灘)자를 쓴다. 수레여울이라고 우리말로 부른다. 옛날 한 원님이 있었다. 원님은 직접 고을의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수레를 타고 고을을 돌았다. 백성들을 돌아보며 민정을 살피던 원님이 탄 수레가 지금의 태봉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수레를 끌던 마부가 아차 실수를 하는 바람에 수레가 언덕으로 미끄러져 깊은 여울에 휩쓸려 갔다. 원님은 수레와 같이 여울 속으로 빨려들어 죽고 말았다. 이후 사람들은 원님이 수레를 타고 가다가 여울에 빠져 죽은 곳이라 하여 수레여울이라 불렀다. 이것이 나중에 차탄리로 변했다.
차탄리와 어울려 불리는 또 하나의 지명이 망곡산(望哭山)이다. 임금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멀리서 곡을 하는 산이라는 뜻이다. 그 주인공은 일제강점기 때 비극적인 삶을 살다가 돌아가신 고종황제와 순종황제이다. 1919년 1월 22일 고종황제가 승하하고, 이어서 1926년 4월 26일 순종황제 마저 자주독립의 염원을 풀지 못하고 승하하였다. 차탄리의 선비들과 백성들은 서울에 직접 가지는 못해도 마을 뒷산에 올라 임금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통해했다. 훗날 사람들은 그 산을 망곡산이라 했다. 망곡공원이 있어 생생하게 그 현장을 말해주고 있다.
차탄리 옆에는 연천군 신서면 신탄리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에 철도중단지점이 있는데, 휴전선과 약 9.5km쯤 떨어져 있으며, 남한에서 최북단에 위치한 기차역이다. 서울서 원산까지 오가던 경원선이다. 신탄리를 지나 철원의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명사십리가 펼쳐진 원산까지 지금이라도 당장 달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우연일까? 차탄리에서 수레가 여울에 빠져 멈추고, 경원선은 남북분단으로 멈추었고, 망곡산은 북녘을 바라보며 고향이 그리워 통곡하는 산이 되었다.
경기도 부천시 괴안동(槐安洞)은 마을에 있는 서낭목으로 인해 생긴 지명이다. 괴안동은 한자로 홰나무 과(槐)를 쓰고 편안할 안(安)자를 쓰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홰나무를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당산목(堂山木)으로 여겼다. 이는 우리의 오랜 전통이 깃든 마을신앙으로, 자기 마을을 수호해 주고 마을사람의 건강, 재복, 안녕, 풍요 등을 주관하는 신을 상정하여 특정 장소에서 매년 마을제사를 지냈다. 산신제, 서낭제[성황제(城隍祭)], 거리제, 장승제, 솟대제 등이 대표적이다. 이때 당집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바위나 나무와 같은 자연적인 상징물에 신이 깃들었다고 믿고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부천시 괴안동도 이 같은 경우인데 마을형성 유래와 함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경기도 부천시 괴안동은 고얀리라고도 부르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서울시 구로구 오류동과 인접해 있다. 이 마을은 조선조 중엽 충청도 맹산골에서 목민관을 지냈던 안동 권 씨가 정착해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원래의 고얀리는 부천동여중 동편 고갯길 너머에 있었는데 웃고얀리 중고얀리 아랫고얀리로 나눈다. 이 고얀리에는 오래전부터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이 느티나무는 마을을 수호해 주는 마을의 당산목이었다. 해마다 한 번씩 봄이 되면 제물을 차려 고사를 올렸다. 그러면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 그리고 갖가지 소원을 빌었다. 이 나무에 매년 치성을 올리지 않으면 질병과 횡액이 마을에 돌았기 때문에 정성을 들여 고사를 치렀다. 마을의 안녕을 빈다고 하여 괴안리(槐安里)라 했는데, 발음이 변하여 고얀리가 되었다고 한다.
마을에서 이 나무에 치성을 드리지 않거나 나무를 훼손하면 재앙이 닥쳤다. 구한말 대원군이 섭정할 때였다. 조정에서 이 나무를 잘라 대포를 싣는 수레바퀴를 만들었다. 그 때문에 이 오래된 나무의 신이 노해서 대원군의 말로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겠지만 당산목에 대한 고얀리 사람들의 믿음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고얀리 마을의 느티나무 당산목 고사는 나무가 없어지면서 광복 후에는 소나무에서 음력 10월 초 하루에 지냈다. 이 고사도 태풍으로 나무가 부러져서 중단되었고, 그 후 마을제사는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마을이름으로만 마을제사를 지냈다는 유래와 함께 남아있을 따름이다.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와 월곶면 조강리의 경계에 있는 애기봉(愛妓峰)은 평안감사와 기생 애기의 사랑에 얽힌 사연으로 생긴 지명이다. 애기봉은 쑥갓머리산의 정상으로 해발 143m의 높이에 있는 산봉우리이다. 한강 하류의 경계를 두고 북한 땅과 마주 보는 곳이다. 그 거리가 3km에 불과하여 눈으로 쉽게 북한을 바라볼 수 있다. 이곳에는 애기봉의 유래가 된 평양감사와 기생 애기에 얽힌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가 전한다.
1636년 12월 병자년, 청나라 태종은 병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이 전쟁을 병자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병자호란이라 한다. 이때 평안감사와 감사가 사랑하는 기생 애기(愛妓)가 살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평안감사는 전쟁에 참여해야 했고, 애기는 어쩔 수 없이 평안감사와 떨어져야 했다. 처음엔 떨어지지 않으려 감사를 따라 갔다. 그러다가 도중에 평안감사가 청나라 군대에 잡혀가고 말았다. 감사와 생이별을 한 애기는 하성면 가금리와 월곶면 조강리 경계에 있는 쑥갓머리산에 올라 임 가신 북녘 땅을 향해 임을 부르며 애타게 기다렸다. 그러나 호병에게 끌려간 평안감사는 돌아오지 않았고, 애기는 그만 병이 들었다. 병이 들어 죽게 된 애기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임을 볼 수 있는 쑥갓머리산 정상에 묻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애기의 유언대로 애기의 시신을 쑥갓머리산 정상에 묻고, 그 봉우리를 애기의 이름을 따서 애기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에 있는 피흘리고개와 3천병마골[三千兵馬谷]은 임진왜란 때 여인의 재치로 왜군을 무찔러 생긴 지명이다. 조남동에 가면 ‘피흘리고개’와 ‘3천병마골’이라고 부르는 지명이 있다. 조남동은 수암면(秀岩面) 조남리였는데, 수암면은 고려 충렬왕 때 안산 김 씨의 시조 김은부(金殷傅)가 이 고을의 동북쪽 높이 430m쯤 되는 수리산 최고봉을 수암봉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하였다. 바로 이곳에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 전투와 관련한 유래를 가진 지명이 있다.
임진왜란 때 한 노파가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 이야기가 있다. 그 노파는 전쟁의 병화로 자식을 잃고 자진하여 의병으로 관군에 가담하여 싸웠다. 그때 신립 장군은 현 조남동 남왕마을 서쪽 삼천병마골에서 병사들과 진을 치고 있었고, 왜군들은 현 피흘리고개에서 진을 치고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두 진영은 서로 상대의 사정을 파악하여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한 노파가 나서며 자신이 해 보겠다고 했다. “장군님, 제가 적의 동태를 살피고 오겠습니다.” “아니, 할머니가 어찌 적의 동태를 살핀단 말이요?” “적 진지에 쳐들어가려면 적이 잠자고 있는 틈을 노리는 게 상책이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렇지.” “제가 적진지에 가서 소리를 칠 것입니다. 제가 ‘다자귀야’라고 소리치면 적의 군사들이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니 공격을 하십시오. 그러나 제가 ‘더자귀야’라고 소리치면 여기 그대로 진을 치고 있으십시오.” 노파는 그렇게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적진으로 들어갔다.
적진지에 들어간 노파는 적들 사이에서 작은 목소리로 “다자귀야, 더자귀야!”하고 불렀다. 그 소리를 들은 적의 병사가 나와 노파를 붙잡았다. “어디 사는 누구인데 이 밤중에 누굴 찾느라 시끄럽게 구느냐?” “사실 제 아들이 둘 있는데, 첫째는 다자귀고, 둘째는 더자귀입니다. 둘 다 전쟁터에 끌려갔는데 생사를 알 수 없어 찾으러 다니는 중입니다."하고 노파 고하자, 병사는 “이봐요. 모두 고단해서 옷을 벗고 잠을 자고 있는데, 소리 지르지 마세요. 우리 병사들 중엔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소. 나도 곧 잠 좀 자야겠소.” 이렇게 설명해주고 노파를 밖으로 내보낸 후 자러 들어갔다. 그러자 노파는 울음을 터트리며 더 큰 소리로 신립 장군이 있는 곳으로 향해 소리를 쳤다. “다자귀야, 다자귀야, 다자귀야!” 신립 장군은 노파의 말을 듣고, 적진지 병사들이 잠을 자고 있음을 알고 총 공격을 했다. 덕분에 신립 장군은 적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그때 적들이 죽어 흘린 피가 고갯마루에서 냇물을 이루었다고 해서 이 고개를 ‘피흘린고개’라 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피흘리고개’로 불려졌다. 그리고 신립 장군이 진을 쳤던 곳은 ‘삼천병마골’이 돠었다. 노파도 그 싸움에서 죽었는데, 신립 장군은 그 노파를 위하여 산제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천진암은 조선시대에 지은 암자의 이름으로, 지금은 인근의 계곡과 산기슭 일대도 천진암이라 부르고 있다. 도로명 주소도 천진암로(天眞庵路)로 명명되었다.
원래는 이곳에 천진암(天眞庵)이라는 절이 있었는데,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이 절에 숨어들었다. 스님은 스스럼없이 젊은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때 이곳에서 천주교 교리를 익혔던 주인공은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형제와 권철신, 권일신 형제, 그리고 이승훈, 김원성, 이벽 등이었다. 이 당시 이벽을 제외하고는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20대 안팎의 젊은이들이었다. 새로운 학문에 대한 열정이 누구보다도 강하게 끓어오르는 나이였다. 이들은 천진암에서 내어준 방에서 천주교 관련 강학과 기도수련을 하였다.
이벽은 20대의 청춘들에게 천주교의 원리를 강하게 전파하면서 모임을 이끌어 나갔다. 천주교에서는 7일을 기준으로 주일로 삼아 기도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정확히 날짜를 잘 몰라 나름대로 기도 날짜를 정했다. 일주일을 단위로 하되 한 달을 이레, 열나흘, 스무하루, 스무여드레로 나누었다. 그 날을 천주공경일로 전해서 예배를 드렸다. 당시의 상황이 변기영 신부가 지은 노랫말에 나온다.
눈 속의 겨울 밤 촛불 아래 지새는데
선학(仙鶴)의 봄바람에 넋이 타던 어진 이들
빙천(氷泉)에 혼을 씻고 몸 꿇어 손 모으니
기도소리 들리네 천진암에서
찬미소리 울리네 천진암에서
선비들이 모이네 천진암으로
노랫말에 당시 젊은이들이 어떻게 천주교를 전파해 갔는지가 잘 드러난다. 이렇게 시작된 천진암은 천주교의 성지가 되어 수만명의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 지역을 이르는 땅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 살장(殺將)터는 몽고 장수 살리타이를 죽여 부른 지명이다. 아곡리 마을 입구에 토성(土城)으로 된 옛 성터가 남아 있고, 성의 북쪽에 살장터 또는 장사(將死)터라고 부르는 자연지명이 있다. 원래 이곳에는 처인성(處仁城)이 있는데, 용인의 옛 지명과 관련이 있다. 용인(龍仁)은 용구현(龍駒縣)과 처인(處仁)부곡이 있었다. 이를 조선 태종 때 두 곳을 합하여 앞뒤 글자를 따서 만들었다. 이 성에서 용인의 군사들이 몽고군을 무찔렀고, 그때 이곳에서 몽고 장수 살리타이가 죽었다.
고려 고종 19년(1232) 12월이었다. 몽고는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침략해 왔다. 그때 몽고군의 장수는 살리타이[撤體塔]였다. 이때 몽고는 고려를 두 번씩이나 침범해 왔는데, 살리타이는 송악을 점령하고 그 기세를 몰아 용인까지 점령해 왔다. 당시 처인성에서는 승병(僧兵)과 민병(民兵) 등 소수의 군대가 지키고 있었다. 살리타이 군대는 10만이 넘는 터라 이 작은 토성을 가볍게 보았다. 그러나 처인성 내에 있는 병사들은 자발적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싸우는 의병들로 그 기세가 대단했다. 몽고군은 이 성을 함락시키려고 물밀 듯이 밀어붙였다.
그때였다. 처인성에서는 살리타이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정확하게 살리타이의 눈을 향했고, 살리타이는 그 화살을 피하지 못하고 화살은 정통으로 눈을 관통했다. 살리타이는 갑자기 말에서 떨어지며 죽었다. 그러자 우리 군사들은 성문을 열고 나가서 혼란에 빠진 몽고군을 급습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쟁으로 몽고군은 더이상 싸우지 못하고 본국으로 달아났다. 그 당시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한 사람은 승병장 김윤후(金允侯)였다. 김윤후는 아곡리 북편에 있던 절의 승려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살리타이가 김윤후의 화살을 맞고 쓰러져 죽은 곳을 그때부터 살장터, 또는 장군이 죽은 곳이라 하여 장사(將死)터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김윤후(金允侯)는 생몰연대가 미상이다. 그는 백현원에서 수도하던 중이었다. 처인성에 몽고군이 밀려오자 김윤후는 불경 대신에 칼과 화살을 잡았다. 김윤후는 적이 쳐들어오자 화살을 날려 몽고 장수 살리타이를 죽여 성문에 그 목을 걸었다. 그 공으로 고려 고종은 김윤후에게 상장군을 내렸으나 사양했다. 그 뒤 충주산성 방호별감이 되었다. 몽고가 또 쳐들어왔다. 이때 김윤후는 관노의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그들을 독려해서 싸움에서 또 이겼다. 고려 원종 때 추밀원 부사 등의 벼슬을 지내다가 물러났다.
경기도 하남시 배알미동(拜謁尾洞)의 도미나루[都彌-渡迷津]는 백제 개루왕의 도미설화에 유래를 두고 있는 지명이다. 이곳에는 팔당댐이 들어서기 전 바다같이 넓은 나루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다나루’ 또는 ‘바대이’이라 불렀다. 그리고 나룻가에는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는 당(堂)집이 여덟 군데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덟 개의 당집이 있는 곳이라 하여 팔당(八堂)이라 불렀다고 한다. 바로 이곳 배알미리 동쪽에 도미나루가 있다. 도미나루는 『삼국사기』 열전에 그 사연이 전한다.
도미(都彌)는 백제 사람이다. 비록 벽촌의 작은 백성이지만 자못 의리를 알고 있었다. 그 아내는 아름답고도 절행이 있어 당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개루왕이 이 말을 듣고 도미를 불러 말했다. “무릇 부인의 덕은 정조를 지켜 순결함이 제일이지만, 만일 어둡고 사람이 없는 곳에서 좋은 말로 꾀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 드물 것이다.” 도미가 대답했다. “사람의 정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아내 같은 사람은 죽더라도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입니다.” 왕이 이를 시험하려고 일이 있다 하여 도미를 머물러 두게 하였다.
그리고 가까운 신하 한 사람에게 왕의 의복과 말과 종자를 빌려주고 밤에 그 집에 가게 했다. 먼저 사람을 시켜 왕이 온다고 알렸다. 왕이 와서 그 부인에게 일렀다. “내가 오래전부터 너의 아름다움을 듣고 도미와 장기내기를 하여 이기었다. 내일은 너를 데려다 궁인(宮人)으로 삼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네 몸은 나의 것이다.” 그러면서 도미의 처를 범하려 하였다. 그러자 도미의 처가 말하였다. “국왕에겐 망령된 말이 없습니다. 내가 감히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까. 청하건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소서. 나는 옷을 고쳐 입고 들어가겠습니다.”
도미의 아내는 물러와 한 시자(侍者)를 단장시켜 방에 들어가 수청을 들게 하였다. 뒤에 왕이 속은 것을 알고 크게 노하였다. 이에 도미를 죄로 얽어 두 눈을 빼고 사람을 시켜 끌어내어 작은 배에 싣고 물 위에 띄워 보냈다. 그리고 도미의 아내를 끌어들여 강제로 상간하려 하자 도미의 아내는 말했다. “지금 남편을 잃어버렸으니 오로지 홀몸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대왕을 모시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어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월경으로 온몸이 더러우니 다른 날 깨끗이 목욕하고 오겠습니다.” 왕이 이 말을 믿고 허락하였다.
도미의 아내는 그 길로 도망하여 강 어귀에 이르렀으나 배가 없어 건너갈 수 없었다. 도미의 아내는 하늘을 우러러 통곡을 하였다. 그러자 홀연 한 척의 배가 물결을 따라오는 것을 보았다. 그 배를 타고 천성도(泉城島)라는 섬에 이르러, 그의 남편 도미를 만났다. 도미는 아직 죽지 않고 있어 둘은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 땅에 이르렀다. 고구려 사람들이 불쌍히 여기며 옷과 먹을 것을 주어 구차스럽게 살면서 객지에서 일생을 마치었다.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고문리(古文里)와 재인폭포(才人瀑布)는 줄을 잘 타는 재인의 죽음과 관련된 지명이다. 보개산과 한탄강이 어우러지는 빼어난 경관으로 사시사철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재인폭포는 높이 18.5m, 폭 30m의 폭포로, 연천군의 대표적인 명승지로 이름나 있다. 재인과 관련한 이야기는 두 가지가 전해진다.
옛날 이곳에 줄타기를 잘하는 재인(才人)이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 재인의 아내를 탐한 고을 사또가 계략을 꾸몄다. 폭포 아래에서 잔치를 베풀고, 폭포 양옆으로 줄을 매고 재인으로 하여금 줄을 타게 한 후 재인이 줄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사또가 미리 숨겨놓은 부하가 줄을 끊도록 하였다. 사또의 계략대로 재인은 줄을 타다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뒤 사또는 재인의 아내를 불러 수청을 들도록 하였다. 재인의 아내는 사또가 남편을 죽게 만들고 자신을 탐하는 것을 알고, 수청을 드는 척하다가 사또의 코를 힘껏 꽉 깨물었다. 그 후부터 재인이 줄을 탔던 폭포를 재인폭포라 하고, 그의 아내가 사또의 코를 문 마을이라 해서 코문리라 했다. 코문리는 세월이 지나면서 고문리로 변하였다.
조선조 영조 때에 편찬된 『차지도서』(1765)의 연천현 산천조에 전하는 내용이다. 재인폭포는 연천 관아에서 동쪽으로 20리 거리인 원적사(圓寂寺)에 있다. 양쪽으로 벽이 우뚝 서 있고 수십 길 높이에서 물이 흘러 떨어진다. 옛날에 줄을 잘 타는 재인이 있었다. 하루는 마을 사람과 재인이 폭포 아래에서 즐겁게 놀았다. 마을사람 중 아내가 몹시 아름다운 사람이 있었다. 재인은 폭포 양쪽에 줄을 매고 건너갈 수 있다고 장담을 했다. 그것을 믿지 못한 마을사람은 자기 아내를 걸고 내기를 했다. 잠시 후 재인은 벼랑 사이에 줄을 매고 외줄을 타기 시작했다. 춤과 기교를 부려가며 줄을 지나가는 모습이 마치 평지를 지나가는 듯했다. 이에 아내를 뺏기게 된 마을 사람은 마음이 다급해서 줄을 끊었다. 재인은 줄에서 떨어져 수십 길 아래 구렁에 부딪혀 죽었다. 이 일로 이 폭포를 재인폭포라 부르게 되었다.
평택시 서탄면 금암리(金岩里)는 을묘왜변(乙卯倭變)에 순국한 한온(1511~1555)의 충절에서 생긴 지명이다. 금암리에 가면 한온(韓蘊)의 충절을 기려 세운 한온장군 충신정문이 있다. 그 입구 현판에는 “철장석선 일심순국(鐵腸石膳 一心殉國)”라 쓰여 있다. 이를 번역하면, “창자는 쇠붙이와 같고 쓸개는 돌과 같아라. 한마음 나라에 바쳤도다.”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쇠 철자에서 금(金)을 따고, 돌 석(石)자에서 바위 암(岩)을 따서 금암리라는 지명이 생겼다. 또 금암리에는 북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변해서 금암이 되어 지금의 금암리가 되었다고도 한다. 을묘왜변과 금암리에 얽힌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평택은 ‘평택섶길’이라는 걷기 길을 개발해서 시민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그중에 8코스인 ‘황구지길’이 있다. 이 길은 황구지교에서 지위역에 이르는 12.4km의 길이다. 이 길은 금암리를 지나가는데,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한온장군 충신정문을 만나게 된다. 정려문 앞에 가면 현판이 있고, ‘철장석선 일심순국(鐵腸石膳 一心殉國)’이라 쓰여 있다. 즉 ‘창자는 쇠붙이(金)와 같고 쓸개는 돌(石)과 같아라. 한마음 나라에 바쳤도다.’라는 뜻이다. 이 글은 후세 사람들이 한온 장군을 한마디로 표현한 구절이다.
한온 장군은 지금의 평택시 서탄면 금암리에서 탄생했다. 20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38세에는 전라도 장흥부사로 임명되었다. 장흥에 부임한 한온은 백성들의 생활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피폐해져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 장흥보다 이웃 고을이 더욱 흉년에 고생을 하고 있음을 보고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이때 을묘왜변(1555년)이 일어나 장흥 달량진(達梁鎭)에 왜선 70여 척이 쳐들어왔다. 이에 한온은 방어를 하는 한편, 조정에 파발을 보내 위급함을 알렸다. 조정에서는 절도사 원적을 보내 한온을 돕게 하였으나 원적은 포로가 되어 죽었다. =
한온 자신은 죽 한 그릇으로 하루의 끼니를 때우면서 병사들에게는 밥을 먹였다. 그렇게 하면서 적과 대항해서 싸웠다. 한온이 적과 싸우던 중 칼이 부러져 맨몸으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한온의 용맹을 두려워하던 왜적은 그의 시체를 갈갈이 찢어 성벽에 걸어 까마귀밥이 되게 하였다. 왜적은 한온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싸움을 하기 전에 미리 상소문을 만들어서 조정에 보냈다. 한온은 여색을 좋아하고 주민을 괴롭혀 재산을 모은다는 가짜 내용을 보낸 것이다.
조정에서는 상소만 믿고 그를 처벌하기로 결정을 했다. 그때 이율곡이 한온의 성품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한온의 처벌을 극력 반대하고 직접 현지에 내려가 조사하기로 했다. 율곡이 장흥에 내려가 보니 달량포구는 이미 왜적의 손에 들어가고 한온의 시체는 날짐승의 밥이 된 사실을 모두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조정에 보고했더니, 상감은 눈물을 흘리며 한온의 넋을 위로하고, 한온의 충성과 백성에 대한 사랑을 널리 알리게 하고, 교시를 내려 병조판서로 추증을 하였다.
경기도 과천시 관문동(官門洞)은 과천고을의 관문이 있어서 생긴 지명이다. 또 서울로 들어갈 때 첫 번째 문세(門稅)를 내던 곳이기도 하다. 1986년 1월 1일 관문리에서 관문동으로 바뀌었으나 행정관리는 중앙동에서 하고 있다. 1986년 이전 관문동의 역사적 변천을 보면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군내면 지역이었고, 1914년에는 시흥군 과천면 관문리(官門里)였고, 1982년 경기도 과천지구출장소 북부지소의 관할이었다. 관문동이 생긴 내력이 당시의 교통과 지역 텃새와 관련하여 전하고 있다.
경기도 과천에서 남태령이라는 고개만 넘으면 한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과천은 중요한 관문 중의 하나였다. 대한제국시절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삼남지방 사람들이 한양으로 들어가려면 다섯 번의 문을 통과하며 문세(門稅)를 내야 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이 과천의 관문동이었다. 과천 동헌 앞에서 아전에게 문세를 냈는데, 수탈 명분이 어이가 없었다. 사또가 있는 동헌인데 말에서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건방지게 담뱃대를 물고 지나갔기 때문에, 가죽신을 신고 지나갔기 때문에 세금을 내야 한다는 구실을 들었다. 그 때문에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현감이면 다 과천 현감이냐?”고 볼멘소리를 낼 정도로 과천현감은 관문세로 금방석에 앉았다는 소문이 자자했었다.
두 번째는 남태령고개를 넘을 때 병정들이 도적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지나가는 여행객에게 고개넘이 돈을 뜯어냈다. 참고로 남태령은 원래 여우고개였는데,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으로 가는 길에 고개 이름을 묻자 차마 여우라는 말을 입에 담기 어려워 이방 변 씨가 삼남대로로 통하는 길이라고 하여 남태령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세 번째는 노량진에서 서울로 강을 건너는데 뱃삯 말고 나루를 건너는 세금이라고 하여 도진세(渡津稅)를 받았다.
네 번째는 남대문에서 문지기에게 바치는 세이다. 다섯 번째는 육조(六曹)에 들어가면 별감이나 사령에게 의당 바치게 되는 예전(例錢)이었다. 모두 적법한 세금이 아니었고, 정의롭지 못한 당시 사회구조를 말하고 있어 몹시 씁쓸하다. 이처럼 옛날 한양으로 들어갈 때마다 통과세를 내야 하던 관문동에 지금 정부과천청사가 들어와 있으니 격세지감이다. 정부과천청사는 1975년 서울시 인구분산 계획에 의하여 과천시 관문동에 정부제2청사가 착공되어 1986년 이후 들어섰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어비리는 어비울이란 마을에서 유래했다. 어비울(魚肥鬱)은 강이 넓어 고기가 살찐다는 뜻으로 쓰였다. 한편으로는 마을에서 도랑을 파다가 황금빛 물고기가 뛰어나왔다는데서 어비울이 되었다고도 한다. 지금 어비울이 있던 마을은 대부분 1971년 완공된 이동저수지 속에 묻혔다. 이 저수지는 어비울(어비리)저수지라고도 부른다. 저수지 가에는 어비울비각이 있고, 그 안에 “魚肥洞遺跡地永世不忘碑”(어비동유적지영세불망비)가 서 있다. 불망비 뒤에는 “魚湖八景(어호 팔경)”이라 하여 이곳의 8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기록해 놓았다. 성륜봉의 아침햇살, 수선대에 비친 밝은 달, 탁영정에 모인 친구들, 석우천에 드리운 낚시, 용강에 지는 해, 방목리 마을의 점심 짓는 연기, 금단사의 새벽 종소리, 갈마산의 비취색이 그것이다. 용인시에서는 이동저수지에서 보는 낙조(落照)가 서해의 낙조보다 이름답다고 홍보를 하고 있으며, 그 저수지에는 수많은 낚시꾼들이 낚시를 드리워 살찐 고기를 낚고 있다. 어비울에는 대한제국 당시 친일내각을 세웠다가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인해 친로내각에 의해 제거당한 어윤중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대한제국 시절 1895년에는 일제에 의해 단발령(斷髮令)과 변복령(變服令)이 강제로 시행되고, 일본 자객에 의해 민비(후에 명성황후)가 시해되어 왕비의 몸은 일제에 의해 몰래 불살라졌다. 그리고 이듬해 초에는 아관파천이 일어나 친로세력에 의해 친일내각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때 친일내각의 중심세력이었던 김홍집이 피살되고 민심이 흉흉해졌다. 탁지부 대신을 맡았던 어윤중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고향인 충청도 보은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고 여인들이 타는 가마로 위장을 했다. 어윤중은 주막에 들러 여장을 풀었다. 그러면서 주모에게 이곳 마을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주모는 어비울이라 말했다. 어윤중은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고기가 살찐다는 어비(魚肥)울을 고기가 슬피 운다는 어비읍(魚悲泣)으로 잘못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윤중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급히 행장을 챙겨서 이웃마을로 옮겨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어윤중의 신분을 알아차린 마을의 장정들에게 붙잡혔다. 어윤중은 지금 이동저수지의 수문이 만들어진 강변에서 몽둥이로 무참히 살해당하였고, 시체는 장작더미에 올려 불살라졌다. 어비울은 이동저수지가 들어서면서 물속으로 들어가고, 어비울에 살던 사람들은 언덕 위로 이주하였다. 지금의 어비리가 된 마을이다. 어윤중이 죽은 후 밤에 어비울 강변에 가면 “어탁지! 어탁지!”하고 귀신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어윤중(魚允中, 1848~1896)은 대한제국 시절 벼슬을 하였다. 개혁안을 제출하는 등 많은 일을 행하였다. 간도가 우리 땅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1894년에 갑오경장 내각이 수립되자 김홍집 내각과 박정양 내각에서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이 되어 재정·경제 부문의 대개혁을 단행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고 친일내각이 붕괴되었으며, 김홍집이 민중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어윤중은 자신이 농민들로부터 지지를 얻고 있었으므로 고향으로 가서 피란하는 것이 안전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고향인 충청북도 보은으로 내려가다가 용인의 어비울을 지날 때 산송문제(山訟問題)로 개인적인 감정을 품은 사람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는 정순왕후의 무덤 사릉(思陵)이 있는 곳이다. 사릉은 생각 사(思)자에 무덤 능(陵)자를 쓴다. 정순왕후가 남편인 단종과 헤어져 64년간 오로지 ‘단종을 생각하며 밤낮으로 공경함이 발랐다’하고, ‘지나간 일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한다’라는 뜻으로 사릉이라 했다.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으로 17살과 18살의 어린 왕과 왕비는 생이별을 해야 했다. 그 사연을 따라가 본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는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의 무덤 사릉이 있어 지어진 지명이다. 사릉에 가면 주변에 소나무가 아름답게 서 있다. 소문에 의하면 이 소나무는 양무장군의 묘인 준경묘(濬慶墓)가 있는 삼척에서 가져와 심은 금강송이라 한다. 금강송은 아름드리 곧게 자라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사릉 주변의 소나무는 모두 한곳으로 향하고 있다. 곧게 위로 자란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이것은 18살에 홀로 되어 영월에 있는 임을 그리다가 여생을 마친 정순왕후의 심회를 알고 나무들이 단종이 있는 영월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운에 살다간 왕비의 슬픈 사연을 소나무도 알았을까? 그 때문에 1999년 사릉에서 재배된 묘목을 단종의 무덤인 영월 장릉에 옮겨 심어서 단종과 정순왕후가 그간의 그리움을 풀고 애틋한 정을 나누도록 했다. 이 소나무를 사람들은 정령송(精靈松)이라 했다. 죽은 영혼이나마 함께 하기를 바라는 우리의 마음이다.
삼촌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사건을 계유정난이라 한다. 그때 단종의 나이 17살 그리고 왕비의 나이 18살이었다. 혼인해서 4년을 살았고,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 왕비는 영월로 떠나는 단종을 영도교까지 나와서 배웅했다. 당시 궁궐의 여인이 나올 수 있는 곳이 이곳까지였다 한다. 영도교에서 헤어진 두 사람은 이승에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영도교를 일러 ‘영원히 이별하는 다리’라 부르기도 했다. 정순왕후는 이후 신분이 격하되어 관비로까지 전락했다. 신숙주가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니, 얼마나 치욕스럽게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세조는 자신이 한 일이지만 신숙주의 언행에 너무 놀라 “신분은 노비지만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정순왕후는 혼자된 왕실의 여인들이 사는 정업원에서 생활했는데, 스님이 되어 머물렀다는 얘기도 있다. 세조가 집을 지어주고자 하나 끝까지 사양하고 시녀들이 동냥을 해 온 밥으로 끼니를 이었다. 생계를 이으려고 제용감에서 심부름하던 시녀의 염색 일을 도와 자줏물을 들이는 일을 했다. 훗날 정순왕후가 염색을 하던 골짜기를 자줏골이라 했고, 샘물은 자주동샘(紫芝洞泉)이라 불렀다. 그때 정순왕후가 단종의 억울한 죽음에 명복을 빌며 빨래를 하면 자연히 자주색으로 염색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렇게 임을 잃은 지 64년이 지난 82세에 세상을 떠나 지금의 사릉에 묻혔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식사동(食寺洞)은 공양왕(1345~1394)이 이곳에서 어떤 절의 밥을 얻어먹으면서 피신생활을 해서 지어진 지명이다. 관련된 지명으로 대궐고개, 어침(御寢), 박적[밥절]골이 있다. 식사동은 고양군 구이면(九耳面) 식사리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구이면에서 원당면(元堂面)으로 되었다가 1996년 일산구 관할이 되었고, 2005년 일산동구에 포함되었다. 이곳에는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에 얽힌 지명유래가 전하고 있다.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고려가 망하자 왕비와 함께 개성 궁궐을 빠져나와 도망을 했다. 도망을 가다가 지금의 고양시 식사동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날이 저물어 사방이 어두침침하여 길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마침 가까운 곳에 인가가 있어 불빛을 보고 찾아갔다. 찾아가 보니 그곳은 민가가 아니고 절간이었다. 공양왕 일행은 절에 들어가 숨겨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절에서는 도와는 주되 어려움을 표했다. “이곳은 인적이 번잡하여 임금을 모실 수 없으니 동쪽으로 10리쯤 가서 누각에 계시면 저희들이 매일 수라를 갖다 드리겠습니다.” 공양왕 일행은 하는 수 없이 절을 떠나 지금 대궐고개라 부르는 곳에서 하룻밤 노숙을 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나중에 이곳을 임금이 머문 고개라 하여 ‘대궐고개’, 임금이 머물러 잠을 잤다고 하여 ‘어침(御寢)’이라 불렀다. 어침은 또 ‘날이 어두침침’하다고하여 어침이라 했다는 얘기도 있다. 공양왕 일행은 이곳에서 피해 있으면서 절에서 날라다 주는 음식으로 끼니를 이었다. 이 때문에 훗날 이곳 지명이 밥 식(食)자에 절 사(寺)자를 써서 식사리(食寺里)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밥을 나르던 스님이 이곳에 당도해 보니 임금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스님은 왕의 일행을 찾아다녔다. 그때 공양왕이 평소 귀여워해 주던 청삽살개 한 마리가 스님 일행을 인근에 있는 연못으로 이끌었다. 삽살개는 연못으로 가더니 물속을 들여다보며 자꾸 짖어대더니 갑자기 물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 스님 일행이 이상하게 여기고 연못의 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연못의 물을 다 퍼내니 그 안에는 옥새를 껴안고 왕과 왕비가 함께 죽어 있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연못에 빠져 목숨을 마친 것이었다. 스님 일행은 연못에 빠져 죽은 왕과 왕비의 시신을 꺼내 인근에 좋은 장소를 택해 묻어 주었다. 이것이 나중에 사적 제191호로 지정된 고릉(高陵), 곧 공양왕릉이다. 왕릉 앞에는 개 모양의 돌로 된 상[石像]이 있는데, 이는 왕의 시신을 발견하게 해주고 주인을 따라 죽은 충견(忠犬)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경기도 상면 태봉리는 중종 또는 영창대군의 태를 봉안했다는 태비(胎碑)와 태봉산(胎封山)이 있다.
이 때문에 마을이름을 태봉골[胎封谷] 또는 태봉리(胎封里)라 한다. 태비(胎碑)의 글자를 새긴 제목은 아지비(阿只碑)라 한다. 이 비는 현재 마을 어귀 500여m 아래에 있는데, 원래 위치에서 옮긴 것이다.
태비는 일반적인 태실비(胎室碑)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비좌의 앞면에는 2개의 안상이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단판의 연잎이 새겨져 있다. 비각의 높이는 94cm이며 두께는 18cm이다. 새겨진 글자의 크기는 4.5cm이다. 그 내용은 “아지비(阿只碑) 앞면: 황명만력삼십(皇明(萬)曆 三十…). 뒷면: 만력삼십사년칠월이십팔일립(萬曆三十四年七月二十八日立)”이라 했다. 중간에 글자가 보이지 않아 누구의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이 비의 주인공이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가평의 자연과 역사]에 의하면, 태비에 새겨진 연도가 1606년(선조39)이므로 이때 태어난 사람은 영창대군이 확실하다고 했다. 연도가 일치하므로 선조의 정비(正妃) 소생 영창대군이라고 했다. 한편, [가평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에 의하면 이 태비가 영창대군의 태를 묻은 비라 단정할 수 없으므로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둔다고 했다. 주민들에 의하면 1970년대 아지비를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우면서 앞뒤가 바뀌었다고 한다. 아지비의 경우 앞면은 출생일시를 뒷면은 태를 묻은 일자를 기록하고 있다. 가평군 상색리에도 태실이 있는데, 이는 태봉리의 것보다 114년 전인 1492년 9월 7일에 태를 묻었다. 그래서 태봉리의 태는 영창대군의 것이고, 상색리의 태는 중종의 태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태봉리의 태비 명문(銘文)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태비가 있는 것은 분명하므로 태봉리의 명칭은 태비에서 유래하였다. 태봉이라는 지명은 전국 곳곳에 있다. 이는 왕실에서 아기가 새로 태어나면 태를 소중하게 여겨 전국의 길지(吉地)를 택해서 묻었기 때문이다. 조선조의 경우 관상감(觀象監)과 선공감(繕工監)에서 이를 맡아 처리했는데, 장소의 선택과 일자와 관리까지 철저히 하였다. 이 때문에 태를 묻은 곳은 길지로 알려졌고, 그 지역을 태를 봉한 곳이라 하여 태봉이라고 이름하였다. 가평군 상면 태봉리도 왕실의 태를 봉안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하천1리 솔틀마을에 얽힌 지명유래 이야기이다. [가평군지]에 그 전문이 전하고 있는데, 원 제목은 <산신령이 내려준 솥>이라 했다. 전통적인 효부에 얽힌 지명유래담으로 교훈이 되고 있다. 조선시대 청평면 하천리 어느 마을에 남편을 일찍 여읜 젊은 아낙네가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한 집에 식구라고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둘이었는데 시아버지가 기력이 쇠하여 일을 할 수 없으므로 며느리 혼자서 살림을 꾸려나갔다. 며느리는 밤낮 열심히 일을 했지만 워낙 가난하여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모아 근근이 목숨을 이어갔다. 이렇게 어려운 살림이지만 며느리는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시아버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며느리가 피곤하여 일찍 잠이 들었는데, 꿈에 산신령을 만났다. 산신령은 “네 효성이 지극하여 내 너에게 뭔가를 주려 한다. 집 뒷산에 큰 소나무가 있는 것을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소나무 앞에 작은 바위가 있다. 그 바위 앞을 파 보아라.” 날이 밝자 며느리는 삽을 들고 산신령이 일러준 나무를 찾아 뒷산으로 올라갔다. 이른 새벽이라 며느리의 치맛자락에 이슬이 채었다. 며느리는 산신령이 일러준 소나무 앞 작은 바위를 발견하고 삽으로 땅을 파 내려갔다. 그런데 아무리 파내어도 돌멩이만 나올 뿐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파다가 며느리는 실망을 하여 그냥 돌아가려고 했다. 그렇게 집으로 향해 막 돌아서려는데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며느리는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다시 땅을 더 파 내려갔다. 그러자 삽날에 뭔가 걸리는 소리가 났다. 며느리는 삽을 손에서 놓고 손으로 땅을 조심스럽게 헤쳐 보았다. 그 속에서 무쇠 솥이 하나 나왔다. 며느리는 솥을 파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시아버지는 표정이 밝아지면서 한 마디 이야기를 했다. “하늘이 내린 선물이다. 네 효성이 하도 지극하여 하늘이 너에게 내린 선물이구나.”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솥을 앞에 놓고 정성스럽게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며느리는 시아버지 생신에 쓰려고 간직해 두었던 쌀을 꺼내 밥을 지었다. 밥이 끓고 뜸이 들어 솥뚜껑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향긋한 밥 냄새와 함께 기름이 반지르르하게 흐르는 밥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이밥이었는지 몰랐다.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마냥 고맙고 즐겁기만 하였다. 산신령이 일러준 솥을 파 온 후로 이 집은 살림이 계속 나아졌다. 이 소문은 금방 마을에 퍼졌고, 고을 원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원은 이 이야기를 듣고 며느리가 효성이 지극하여 산신령이 내려준 선물이라며 이 집에 더욱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마을이름을 솔틀[鼎谷]이라 지어 주었다. 솔틀이라는 마을이름은 지금도 전해져 가평군 청평면 하천1리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 지명유래는 지극한 효행 덕분에 복을 받는 이야기이다. 며느리의 지극한 효행이 산신령의 도움을 얻게 하였고, 아울러 고을원의 도움도 얻을 수 있었다. 가족구성원의 역할과 마을공동체의 역할까지 모두 일러주는 지명유래담이다.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이화리는 가평읍에서 10리가량 떨어진 북한강가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에는 염창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염창(鹽倉)은 나룻배들이 소금을 실어 보관하던 창고를 말한다. 이 염창마을의 지명 유래담이다. [가평군지]에 '은혜 갚은 원혼'이라는 제목으로 전하는 이야기다.
옛날 가평읍에 황 씨가 살았다. 황 씨의 조상을 모신 선영(先塋)은 염창 마을 근처에 있었다. 황 씨가 선영에 가려면 장승 고개를 넘어야 했다. 어느 날 황 씨는 기르는 소에게 먹이를 주려고 선영이 있는 산에 가서 꼴을 베었다. 황 씨가 꼴을 한 짐 베어놓고 조상의 묘소를 살피러 갔다 왔더니 누군가가 자신의 꼴짐을 지고 장승 고개를 오르고 있었다. 황 씨는 그를 따라 급히 장승 고개로 올라갔다. 장승 고개에 올라보니 꼴을 지고 온 사람이 꼴짐을 게워놓고 쉬고 있었다. 그런데 꼴을 지고 올라온 사람은 놀랍게도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이었다. 황 씨는 그 여인에게 말을 건넸다. “부인은 뉘시온데 이토록 고마운 일을 하시었소. 우리 집이 저 아래이니 같이 가서 저녁이나 들고 가시지요?” 그런데 여인의 말이 의외였다. “저는 이 고개에 사는 여우인데 내일이면 백 살이 됩니다.” 황 씨는 갑자기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면서 간신히 입을 뗐다. “그런데 왜 힘들게 남의 짐을 지고 오셨소?” “부탁을 드리려고요.” “무슨 부탁인지요?” “이 고개 밑에 가면 여인의 시신이 묻혀 있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묻지 못해 발이 밖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 시신을 잘 묻어주십시오.” 황 씨가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보니 꿈이었다. 황 씨가 자신의 꼴짐을 작대기로 게워놓은 채 고개 위 서낭당 앞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황 씨는 혹시나 해서 꿈속에서 여인이 알려준 장소로 가 보았다. 과연 그곳에 여인의 시신이 아무렇게나 흙으로 덮여 있는데, 두 발이 흙 밖으로 나와 있었다. 황 씨는 그 시신을 정성껏 잘 묻어주었다. 그리고 절을 하며 제사까지 지내 주었다. 그 일이 있은 지 한참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황 씨는 선영으로 성묘를 가다가 장승 고개 위에서 쉬게 되었다. 쉬면서 보니 무언가가 길 옆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다가가 자세히 보니 번쩍이는 물건은 금으로 만든 화로였다. 황 씨는 금화로를 가지고 선영으로 가서 벌초를 하고 선영 밑의 마을에 가서 화로주인을 찾았다. “이 화로 주인 있소? 이 화로 누구 것이오?” 그렇게 소리치며 마을을 돌아다녔지만 화로의 주인이라고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황 씨는 화로의 주인이 나서지 않자, 화로를 팔아 부자가 되었다. 가평에서 황 부자로 이름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나중에 황 씨가 살던 마을을 황천골이라 하였고, 그의 선영 아래 염창마을은 이화리라 하였다. “이 화로 누구 것이오?”라고 황 씨가 외쳤다고 해서 ‘이화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마을공동체의 훈훈한 정을 담은 내용이다. 후일담에 이화리는 이화낙지형(梨花落地形)의 명당이어서 이곳에 묘를 쓰면 훌륭한 인재가 나온다는 이야기도 보태어졌다. 마을 사람들이 자기 마을에 더 좋은 의미를 부여하려 했던 마음이 느껴지는 이야기다.
돌아우는 경기도 가평군 상면 상동리 서리골에 있는 마을이다. 서리골 남쪽 서리산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언양 김 씨 집성촌이다. 이곳에는 약 30여 채의 집이 있고, 돌이 많은 지역이다. 온돌집의 바탕을 이루는 구들장에 대한 전설이 마을 이름 유래담과 함께 전하고 있다. 이야기는 [가평군지]와 [가평의 지명과 유래]에 함께 전하고 있다.
먼 옛날 한 노인이 있었다. 그 노인은 젊어서 여러 고을을 떠돌다가, 마침내 나이 들어 상동리(霜洞里)에 도착하였다. 노인은 편히 여생을 보낼 적당한 곳이라 여겨 상동리에 정착하기로 결심하고, 집을 지으려고 했다. 산에서 나무를 베어 며칠 밤을 지새우며, 기둥과 서까래를 만들어 집의 골격을 세웠다. 그리고 흙을 이겨 벽을 붙이고 미장을 해 나갔다. 집은 이제 그 형태를 다 갖추었다. 방구들을 만들어 허리를 따뜻하게 데울 일만 남았다. 구들장만 깔면 집이 완성되는데, 몇 날 며칠을 온 산을 돌아다녀 봐도 구들장으로 사용할 만한 넓적하고 얇은 돌이 눈에 띄지 않았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구들장을 구할 수 없자, 노인은 다 지은 집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나 심각하게 갈등했다. 노인은 짐을 챙겨 떠나면서 역마살이 낀 자신의 운명이 너무도 가혹하다고 느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손자들의 재롱을 낙으로 삼고 여생을 가족들과 편하게 보낼 나이인데, 자신은 방랑벽으로 가족들과도 헤어지고 고향에도 갈 수 없고, 겨우 정착하려던 상동리(霜洞里)마저 등지게 되니 한탄스러웠다.
노인이 높은 벼랑에 올라가 목숨을 버리려고 하던 찰나, 노인 앞에 산신령이 나타났다. 산신령은 "내 너의 살아온 인생역정이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죽는다면, 그대는 평생 떠돌아다니다가 결국 객사한 목숨이 될 것이다. 죽어서도 그 영혼이 정착하지 못하고, 영원히 인간 세상을 배회할 것이니라. 내 너의 심정을 헤아려 여기 구들장을 주노라.”하고 사라졌다. 노인은 산신령의 도움으로 얻은 구들장을 짊어지고 내려와 이미 만들어 놓은 집 방바닥에 깔아 드디어 집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그때부터 떠돌지 않고, 밭을 경작하고 산나물을 캐면서 죽을 때까지 그 집에서 편안히 살았다 한다.
이 이야기는 전통적인 산신령 이야기로 ‘돌아우’라는 마을이 사람이 정착해서 살만한 곳이라는 의미를 담아 전승되고 있다. 아울러 뭔가 뜻을 세워 일을 하면 누군가 도와줘서 일을 이룰 수 있다는 교훈도 주고 있다. 이 밖에 다른 돌아우 전설이 또 하나 전한다. '불기골'이라는 제목의 지명설화로, 마을에 여래사라는 절이 있어 불기골이라 했다. 선비가 길을 가다가 짐승에게 물려 죽기 전에 상복을 입고 있던 처자가 돌아오라고 “선비님 돌아우”라 불렀다는 데에 유래담이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兩水里)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지점이다. 양수리 인근 남양주시 와부읍 송촌리 운길산에는 수종사(水鍾寺)라는 절이 있다. 수종사는 세조 임금이 지은 절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고, 당대 대문장가들이 수종사의 전망을 찬양한 시도 전해오고 있다.
양수리는 본래 이수두(二水頭)라 했고, 우리말로 ‘두물머리’, ‘두물리’ 등으로 불렀다. 강원도 태백시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이 이곳에서 합류하여 한강을 이뤄 서해로 흘러든다. 남한강과 북한강 ‘두 물이 모인다’고 해서 ‘두 물머리’, ‘이수두’, ‘양수리’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 세조임금은 1458년 신하들을 거느리고 금강산 구경을 다녀오다가 두물머리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난데없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세조임금은 잠을 깨서 신하들에게 종소리가 나는 부근을 조사하게 하였다. 한참 후 신하들은 부근에 바위굴이 있음을 보고했다. 바위굴에는 18나한(羅漢)이 해맑은 웃음을 띤 채 있었다. 그리고 굴 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암벽을 울려 마치 종소리처럼 들려왔다. 세조임금은 그 소리가 참 아름답게 들렸다. 이에 세조임금은 이곳에 절을 짓고 물과 종소리를 뜻하는 ‘수종사(水鍾寺)’라 이름하였다.
수종사에 오르면 남한강과 북한강의 양강(兩江), 경안천(京安川)과 곤지암천(昆池岩川)의 양천(兩川)을 볼 수 있어 전망이 매우 좋다. 조선조 초기 대학자였던 서거정(徐居正)은 수종사를 일러 ‘동방 사찰 중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라 찬양했다. 양녕대군도 수종사에 가끔 들러 그 경치를 감상했다고 한다. 서거정이 <수종사를 찬양한 시>가 있으니 감상해 보자.
가을이 오매 경치가 구슬퍼지기 쉬운데
묵은 밤비가 아침까지 계속하니 물이 언덕을 치네
하계(下界)에서는 연기와 티끌을 피할 곳이 없건만
상방(上方, 절) 누각은 하늘과 가지런하네
흰 구름은 자욱한데 누구에게 줄거나
단풍잎이 휘날리니 길이 아득하네
내 동원(東院)에 가서 참선 이야기 하려 하니
밝은 달밤에 괴아한 새 울게 하지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