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點谷面) 구암리(龜岩里)는 산간마을이다. 능선 사이사이 좁은 평지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구암(龜岩)이라는 지명은 마을 뒷산 산등성이에 거북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거북바우’ 또는 ‘구암’이라고 부르고 있다 한다. 자연마을로는 실바우, 신현[또는 새터], 부처목이[또는 부처매기, 부처미이] 등이 있다. ‘실바우’는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앞산 어귀에 바위가 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시루떡을 층층이 쌓아올린 모양이라 하여 ‘시루바위’ 또는 ‘실바우’라고 부른다. 한자로는 시루 증(甑), 바위 암(岩)을 써서 ‘증암동’이라고도 부른다. ‘신현(新峴)’은 새로운 땅이란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우리말로는 ‘새터’라고도 한다. ‘부처목이’라는 독특한 지명과 관련하여서는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이여송(李如松, 1549~1598)은 조선 출신 이영(李英)의 후손으로 중국 명나라의 장수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방해어왜총병관(防海禦倭總兵官)으로 임명되어 조선으로 파병되었다. 43,000명의 명나라 군사를 이끌고 참전을 하긴 했지만 당시의 그는 조선으로 출병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한 까닭에 평양성을 함락한 후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화의(和議) 교섭(交涉)에만 주력하다가 조선 승려 유정(劉綎)의 부대만 남기고 결국 명나라로 되돌아갔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어느 날이었다. 이여송은 자신의 조선 출병이 조선 사신의 계략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몹시 화가 난 그는 계략을 꾸민 사신을 쫓아 말을 달렸다. 경북 의성군 점곡면 어느 마을에 이르렀을 때였다. 달리던 말이 갑자기 멈칫하고 그 자리에 서더니 부르르 떨며 그만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고삐를 당기고 채찍을 휘둘러도 말은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는 바람에 이여송은 눈앞에서 사신을 놓치고 말았다. 기이한 노릇이라 생각한 이여송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길 동쪽 거북 모양 바위 위에 돌로 만든 아기 부처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상황이 석불의 조화 때문이라 여긴 이여송은 차고 있던 긴 칼을 빼어 들었다. 그리고는 석불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렸다. 석불의 목이 베어지자 신기하게도 말이 기운을 차리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이여송은 깊은 산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서 산의 혈까지 끊어 버렸다고 한다. 이후 이 마을은 이여송이 베어 버린 석불이 목이 잘린 채로 내동댕이쳐졌다 해서 ‘목 없는 부처가 있는 고개 너머 마을’이란 뜻으로 ‘부처목이’ 또는 ‘부처매기’, ‘부처미이’라고 불렀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부처가 있는 산 고개 너머 마을’, 또는 ‘부처가 있는 산의 목’이라는 뜻으로 ‘부처목이’라 불리었다고도 전한다. 1973년 도난당해 없어지기 전까지는 목이 없는 석불이 구암리에 있었다고 한다.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에 있는 피흘리고개와 3천병마골[三千兵馬谷]은 임진왜란 때 여인의 재치로 왜군을 무찔러 생긴 지명이다. 조남동에 가면 ‘피흘리고개’와 ‘3천병마골’이라고 부르는 지명이 있다. 조남동은 수암면(秀岩面) 조남리였는데, 수암면은 고려 충렬왕 때 안산 김 씨의 시조 김은부(金殷傅)가 이 고을의 동북쪽 높이 430m쯤 되는 수리산 최고봉을 수암봉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하였다. 바로 이곳에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 전투와 관련한 유래를 가진 지명이 있다.
임진왜란 때 한 노파가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 이야기가 있다. 그 노파는 전쟁의 병화로 자식을 잃고 자진하여 의병으로 관군에 가담하여 싸웠다. 그때 신립 장군은 현 조남동 남왕마을 서쪽 삼천병마골에서 병사들과 진을 치고 있었고, 왜군들은 현 피흘리고개에서 진을 치고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두 진영은 서로 상대의 사정을 파악하여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한 노파가 나서며 자신이 해 보겠다고 했다. “장군님, 제가 적의 동태를 살피고 오겠습니다.” “아니, 할머니가 어찌 적의 동태를 살핀단 말이요?” “적 진지에 쳐들어가려면 적이 잠자고 있는 틈을 노리는 게 상책이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렇지.” “제가 적진지에 가서 소리를 칠 것입니다. 제가 ‘다자귀야’라고 소리치면 적의 군사들이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니 공격을 하십시오. 그러나 제가 ‘더자귀야’라고 소리치면 여기 그대로 진을 치고 있으십시오.” 노파는 그렇게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적진으로 들어갔다.
적진지에 들어간 노파는 적들 사이에서 작은 목소리로 “다자귀야, 더자귀야!”하고 불렀다. 그 소리를 들은 적의 병사가 나와 노파를 붙잡았다. “어디 사는 누구인데 이 밤중에 누굴 찾느라 시끄럽게 구느냐?” “사실 제 아들이 둘 있는데, 첫째는 다자귀고, 둘째는 더자귀입니다. 둘 다 전쟁터에 끌려갔는데 생사를 알 수 없어 찾으러 다니는 중입니다."하고 노파 고하자, 병사는 “이봐요. 모두 고단해서 옷을 벗고 잠을 자고 있는데, 소리 지르지 마세요. 우리 병사들 중엔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소. 나도 곧 잠 좀 자야겠소.” 이렇게 설명해주고 노파를 밖으로 내보낸 후 자러 들어갔다. 그러자 노파는 울음을 터트리며 더 큰 소리로 신립 장군이 있는 곳으로 향해 소리를 쳤다. “다자귀야, 다자귀야, 다자귀야!” 신립 장군은 노파의 말을 듣고, 적진지 병사들이 잠을 자고 있음을 알고 총 공격을 했다. 덕분에 신립 장군은 적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그때 적들이 죽어 흘린 피가 고갯마루에서 냇물을 이루었다고 해서 이 고개를 ‘피흘린고개’라 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피흘리고개’로 불려졌다. 그리고 신립 장군이 진을 쳤던 곳은 ‘삼천병마골’이 돠었다. 노파도 그 싸움에서 죽었는데, 신립 장군은 그 노파를 위하여 산제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 살장(殺將)터는 몽고 장수 살리타이를 죽여 부른 지명이다. 아곡리 마을 입구에 토성(土城)으로 된 옛 성터가 남아 있고, 성의 북쪽에 살장터 또는 장사(將死)터라고 부르는 자연 지명이 있다. 원래 이곳에는 처인성(處仁城)이 있는데, 용인의 옛 지명과 관련이 있다. 용인(龍仁)은 용구현(龍駒縣)과 처인(處仁)부곡이 있었다. 이를 조선 태종 때 두 곳을 합하여 앞뒤 글자를 따서 만들었다. 이 성에서 용인의 군사들이 몽고군을 무찔렀고, 그때 이곳에서 몽고 장수 살리타이가 죽었다.
고려 고종 19년(1232) 12월이었다. 몽고는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침략해 왔다. 그때 몽고군의 장수는 살리타이[撤體塔]였다. 이때 몽고는 고려를 두 번씩이나 침범해 왔는데, 살리타이는 송악을 점령하고 그 기세를 몰아 용인까지 점령해 왔다. 당시 처인성에서는 승병(僧兵)과 민병(民兵) 등 소수의 군대가 지키고 있었다. 살리타이 군대는 10만이 넘는 터라 이 작은 토성을 가볍게 보았다. 그러나 처인성 내에 있는 병사들은 자발적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싸우는 의병들로 그 기세가 대단했다. 몽고군은 이 성을 함락시키려고 물밀 듯이 밀어붙였다.
그때였다. 처인성에서는 살리타이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정확하게 살리타이의 눈을 향했고, 살리타이는 그 화살을 피하지 못하고 화살은 정통으로 눈을 관통했다. 살리타이는 갑자기 말에서 떨어지며 죽었다. 그러자 우리 군사들은 성문을 열고 나가서 혼란에 빠진 몽고군을 급습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쟁으로 몽고군은 더 이상 싸우지 못하고 본국으로 달아났다. 그 당시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한 사람은 승병장 김윤후(金允侯)였다. 김윤후는 아곡리 북편에 있던 절의 승려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살리타이가 김윤후의 화살을 맞고 쓰러져 죽은 곳을 그때부터 살장터, 또는 장군이 죽은 곳이라 하여 장사(將死)터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김윤후(金允侯)는 생몰연대가 미상이다. 그는 백현원에서 수도하던 중이었다. 처인성에 몽고군이 밀려오자 김윤후는 불경 대신에 칼과 화살을 잡았다. 김윤후는 적이 쳐들어오자 화살을 날려 몽고 장수 살리타이를 죽여 성문에 그 목을 걸었다. 그 공으로 고려 고종은 김윤후에게 상장군을 내렸으나 사양했다. 그 뒤 충주산성 방호별감이 되었다. 몽고가 또 쳐들어왔다. 이때 김윤후는 관노의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그들을 독려해서 싸움에서 또 이겼다. 고려 원종 때 추밀원 부사 등의 벼슬을 지내다가 물러났다.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은 두 가지 유래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산청(山淸)·수청(水淸)·인청(人淸)에서 유래했다하고, 또 하나는 도교신(道敎神)인 태청(太淸)·상청(上淸)·옥청(玉淸)의 삼청성신(三淸星辰)을 모신 삼청전(三淸殿)이 있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산도 맑고, 물도 맑고, 사람도 맑다는 좋은 의미를 지닌 마을 이름이다. 게다가 최고의 도교신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삼청동에 가면 누구나 신선이 된 기분이었으리라. 서울에서 경치 좋기로 이름난 북악산 자락에 있는 마을이었으니 말하지 않아도 그 멋이 스스로 다가온다. 삼청공원과 약수터가 있어 서울 인근의 사람들이 많이 찾는 명소이기도 했다.
일찍이 병자호란 때 중국에 맞서 싸우자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폈던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삼청의 골짜기 그윽하고 넓은데, 푸른 잔디 흰 돌 사이엔 맑은 시냇물이 흐르네.”라고 삼청동을 노래했다. 『열하일기』로 유명한 명문장가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젊은 시절 울분을 달래고자 친구들과 삼청동 대은암(大隱巖)에 올라 찬 바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술을 마셨다고 한다. 기록 상 1758년 12월 14일이니 얼마나 추운 날씨였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도 한 잔 술과 마음을 같이 하는 친구들이 있었으니 신선된 기분이었으리라. 대한제국 말 일제에 의해 국토가 유린되고 백성들은 살기 힘들 때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써서 암울한 현실을 통곡했던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은 <유삼청동기(遊三淸洞記)>를 썼다. 삼청동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나서 “여름철에도 서늘한 기운이 감돌아서 해마다 한 여름이면 서울 장안의 선비와 아낙네들이 모여들어 서로 어깨를 비빌 정도이다.”라 했다.
전쟁이 없고 평화로운 시절에 선비들은 맑은 산을 찾아 그 순서를 매기기를 즐겨 했다. 그때 선비들은 일 삼청(一三淸), 이 인왕(二仁王), 삼 쌍계(三雙溪), 사 백운(四白雲), 오 청학(五靑鶴)이라 했다. 아무래도 서울에서 가깝고 경치 좋고 놀기 좋은 곳이니 제일로 쳤겠지만, 어쨌든 삼청동은 최고의 산청(山淸) 장소로 꼽혔다. 삼청동 계곡의 물은 맑기로 유명했다. 도교사원 삼청전(三淸殿)이 있어 도교신께 제사를 올릴 때 쓰던 옥수(玉水)가 있었다. 이 옥수는 사람들이 주로 마시고 떠가던 서울 최고의 약수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북청물장수들은 이곳에서 물을 길어 서울 곳곳으로 날랐다. 여름날 더위를 피해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원인도 물 덕분이 아니겠는가. 수청(水淸)의 의미가 아름답게 새겨진다. 서울 사람들의 유람터이면서 신선이 되고자 찾던 장소였으니, 삼청동은 세속에서 묻은 때를 씻던 인청(人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는 공직자의 기강을 바로잡는 감사원이 삼청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힘들게 했던 5공화국의 비극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1980년 5월 그 서슬 퍼런 모습의 국보위(國家保衛非常對策委員會)가 삼청동에 있었고, 애매한 젊은이들 목숨을 빼앗은 삼청교육대(三淸敎育隊)가 이곳 지명을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는 정순왕후의 무덤 사릉(思陵)이 있는 곳이다. 사릉은 생각 사(思)자에 무덤 능(陵)자를 쓴다. 정순왕후가 남편인 단종과 헤어져 64년간 오로지 ‘단종을 생각하며 밤낮으로 공경함이 발랐다’하고, ‘지나간 일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한다’라는 뜻으로 사릉이라 했다.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으로 17살과 18살의 어린 왕과 왕비는 생이별을 해야 했다. 그 사연을 따라가 본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는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의 무덤 사릉이 있어 지어진 지명이다. 사릉에 가면 주변에 소나무가 아름답게 서 있다. 소문에 의하면 이 소나무는 양무장군의 묘인 준경묘(濬慶墓)가 있는 삼척에서 가져와 심은 금강송이라 한다. 금강송은 아름드리 곧게 자라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사릉 주변의 소나무는 모두 한곳으로 향하고 있다. 곧게 위로 자란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이것은 18살에 홀로 되어 영월에 있는 임을 그리다가 여생을 마친 정순왕후의 심회를 알고 나무들이 단종이 있는 영월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운에 살다간 왕비의 슬픈 사연을 소나무도 알았을까? 그 때문에 1999년 사릉에서 재배된 묘목을 단종의 무덤인 영월 장릉에 옮겨 심어서 단종과 정순왕후가 그간의 그리움을 풀고 애틋한 정을 나누도록 했다. 이 소나무를 사람들은 정령송(精靈松)이라 했다. 죽은 영혼이나마 함께 하기를 바라는 우리의 마음이다.
삼촌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사건을 계유정난이라 한다. 그때 단종의 나이 17살 그리고 왕비의 나이 18살이었다. 혼인해서 4년을 살았고,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 왕비는 영월로 떠나는 단종을 영도교까지 나와서 배웅했다. 당시 궁궐의 여인이 나올 수 있는 곳이 이곳까지였다 한다. 영도교에서 헤어진 두 사람은 이승에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영도교를 일러 ‘영원히 이별하는 다리’라 부르기도 했다. 정순왕후는 이후 신분이 격하되어 관비로까지 전락했다. 신숙주가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니, 얼마나 치욕스럽게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세조는 자신이 한 일이지만 신숙주의 언행에 너무 놀라 “신분은 노비지만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정순왕후는 혼자된 왕실의 여인들이 사는 정업원에서 생활했는데, 스님이 되어 머물렀다는 얘기도 있다. 세조가 집을 지어주고자 하나 끝까지 사양하고 시녀들이 동냥을 해 온 밥으로 끼니를 이었다. 생계를 이으려고 제용감에서 심부름하던 시녀의 염색 일을 도와 자줏물을 들이는 일을 했다. 훗날 정순왕후가 염색을 하던 골짜기를 자줏골이라 했고, 샘물은 자주동샘(紫芝洞泉)이라 불렀다. 그때 정순왕후가 단종의 억울한 죽음에 명복을 빌며 빨래를 하면 자연히 자주색으로 염색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렇게 임을 잃은 지 64년이 지난 82세에 세상을 떠나 지금의 사릉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