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석공주가 원효를 기다려 산에 막을 치고 살았던 양산시 산막동

    경상남도 양산시 산막동(山幕洞)은 법(法)으로 정(定)한 동(洞)인 법정동이다. ‘산막’이라 불려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산막리’가 되었다. 그러다 1996년 양산읍이 양산시로 승격하면서 ‘산막동’이 되었다. 현재는 행정 운영의 편의를 위하여 설정한 행정구역인[이를 ‘행정동’이라고 한다] ‘삼성동(三城洞)’의 관할 아래에 있다. ‘산막(山幕)’이라는 지명과 관련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양산 호계리 마애불 이미지
    양산 호계리 마애불
    양산 호계리 마애불 이미지
    양산 호계리 마애불


    양산시에는 웅상읍(평산동, 소주동)과 상북면·하북면의 경계에 천성산(千聖山)이라는 명산이 있다. 원효대사가 당나라에서 건너온 천여 명의 스님에게 화엄경을 설법하여 그들 모두를 성인이 되게 한 곳이라 ‘천성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산막동은 이 천성산 기슭에 자리 잡은 산골 마을이다. 마을 남쪽 산등성이를 넘어가면 원효대사가 수도했던 반고굴(磻高窟)이 있다. 반고굴은 큰 바위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람 10여 명 정도가 기거할 수 있는 넓이다. 현재에도 온돌을 놓았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 바위의 남쪽 면에는 통일신라 시대의 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이를 양산 호계리 마애불(梁山虎溪里磨崖佛)이라고 부른다. 


    본디 화랑이었던 원효는 빛나는 공을 세워 황찰서당이라는 직위까지 지냈던 인물이었다. 그러던 중 스물아홉이 되었을 때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반고암에서 숨어 지내며 수행을 해 도를 깨우치고 이후 명성을 드날리게 되었다. 원효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가 신라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 마침 태종 무열왕의 딸이기도 했던 요석공주가 원효를 사모했다. 하지만 원효는 오로지 불도를 닦고 중생을 돌보는 데만 관심을 둘 뿐 공주에게는 전혀 눈을 돌리지 않았다. 바짝바짝 애닳아하던 요석공주는 꾀를 내었다. 


    요석공주가 원효를 기다려 산에 막을 치고 살았던 양산시 산막동

    하루는 원효가 문천교(蚊川橋)라는 다리를 지나고 있었다. 마주 오던 한 남자가 원효를 밀어 강물에 빠뜨렸다. “아이고 스님, 괜찮으십니까? 어서 제 손을 잡으시지요.” 남자는 원효의 손을 잡아 물 밖으로 이끌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딴생각을 하고 가다가 그만……. 이런 옷이 다 젖어버리셨군요. 저를 따라오십시오. 옷을 말리고 조금 쉬셔야겠습니다.” 원효가 대답할 틈도 없이 남자는 원효를 이끌었다. 원효를 물에 빠뜨린 이는 실은 궁궐의 일을 보던 궁리(宮吏)였다. 궁리는 흠뻑 젖은 원효를 데리고 궁궐로 들어가 요석공주에게 안내했다. 요석공주와 하룻밤을 보낸 원효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성을 빠져나와 반고굴로 돌아가 다시 수행에 정진했다. 그 얼마 후, 공주는 태기가 있었고 열 달 후 아들을 낳았다.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가 신라의 위대한 학자 설총(薛聰)이다. 그렇게 떠난 원효는 요석공주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아들을 낳고 아무리 기다려봐도 원효로부터 소식 한 점 들려오지 않자, 요석공주는 몹시 애가 탔다. 급기야 어린 설총을 데리고 지금의 산막동에 와서 막을 치고는 머물며 원효를 만나고자 했다. 이후 요석공주가 산에 막을 치고 살았다 하여 이 마을을 ‘산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왕건 대신 죽은 신숭겸을 기린 지묘사가 있던 대구 지묘동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智妙洞)은 법정동으로서의 이름이며, 행정동으로는 공산동으로 불린다. 자연마을로는 가사골·동변(東邊)·새터, 서변(西邊) 등이 있으며 그 외의 자연지명으로는 개찻골·다릿골 등의 골짜기, 꼬부랑재·나팔재 등의 고개, 왕산(王山) 등의 산이 있다. 지묘동(智妙洞)이라는 이름은 지묘사(智妙寺)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묘사가 건립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왕건 대신 죽은 신숭겸을 기린 지묘사가 있던 대구 지묘동
    왕건 대신 죽은 신숭겸을 기린 지묘사가 있던 대구 지묘동


    후삼국 시대의 이야기다. 후백제의 왕이었던 견훤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로 진격했다. 신라의 경애왕(景哀王)은 고려의 원병을 청했으나, 고려군이 오기도 전에 경주는 함락되었으며 견훤의 압력에 경애왕은 결국 자결을 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고려 왕건은 고려의 정예 군사 5천 명을 끌고서 직접 경주로 출격하였다. 뒤늦게 신라에 도착한 왕건은 견훤의 군사를 치기위하기 이들이 돌아가는 길목인 팔공산[대구광역시와 영천시, 군위군 부계면(缶溪面), 칠곡군 가산면(架山面)에 걸쳐 있는 산] 동수(桐藪)라는 지역에 군사를 대기시켰다. 이 때 견훤의 군사는 경주에서 약탈한 보물을 수레에 가득 싣고 포로로 붙잡은 재상이며 관리와 기술자 들을 끌고서 후백제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공산 동수 지역에 이르렀을 때 견훤의 군사는 기다리고 있던 왕건 군사들의 공격을 받았다. 곧 둘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졌고 밀고 밀리는 접전 끝에 오히려 먼저 공격을 한 왕건의 군사들이 견훤의 군사들에 포위되기에 이른다. 전세는 급격하게 기울어지면서 왕건의 목숨마저 위태로워졌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앞으로 나선 것은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추대했던 신숭겸이었다. 그는 주군인 왕건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계략을 내놓았다. 왕건과 옷을 바꾸어 입고 앞서 전투를 지휘하며 왕건인 척 후백제군을 속이자는 것이었다. 신숭겸의 의견은 받아들여졌고 그는 두려움 없이 후백제군을 맞았다. 그러나 결국 현재 표충사[表忠祠,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 있는 1607년 건립된 신숭겸을 추모하기 위한 사우] 앞 순절단 자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신숭겸이 죽자, 견훤의 군사들은 그가 왕건인 줄 알고 머리를 잘라 갔다. 신숭겸의 희생 덕분에 왕건은 무사히 탈출하여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싸움을 공산전투(公山戰鬪)라고 부른다.

    표충단 이미지
    표충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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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충단

    그 후, 본진으로 다시 돌아온 왕건은 신숭겸의 시신을 찾고자 애를 썼다. 하지만 머리가 없어 어느 시신이 신숭겸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왼쪽 발에 북두칠성 모양의 점을 보고서야 그 시신이 신숭겸인 줄 알았다고 한다. 왕건은 신숭겸의 죽음을 몹시 슬퍼했다. 그는 신숭겸의 머리를 나무로 깎아 만들어 성대하게 장사를 지내주었으며, 그의 집안에는 후한 보답을 함으로써 그의 충절을 기리고자 했다. 신숭겸의 동생인 신능길과 아들 신보장에게 원윤(元尹)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또한 신숭겸이 전사했던 장소에 지묘사(智妙寺)와 그 주변에 미리사(美理寺)라는 절을 지어 그 죽음을 추모했다. 지묘사가 있던 자리에 현재의 표충사가 세워졌다. 당시 세워진 지묘사에서 ‘지묘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 봉황이 내려앉았다가 쫓겨가버린 진주 봉강리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集賢面) 봉강리(鳳降里)는 대부분이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지내천(池內川)’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아랫골, 새몰, 원동, 배실 등이 있다. ‘아랫골’은 아래쪽에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새몰’은 1955년에 면사무소를 신축한 마을이라 하여 붙은 명칭이며, ‘원동(院洞)’은 원님이 서재에 다녀갔다고 해서 이름 지어졌다. ‘배실’이라는 지명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세 갈래로 뻗은 배나무 가지가 가리키는 자리마다 명당이 되었다고 해서 ‘배실’이라고 불렀다는 설과, 어느 해 큰 비가 내려 마을이 물에 잠기면서 뒷산이 배(船)처럼 보였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봉황새 봉(鳳) 자에 내릴 강(降) 자를 쓰는 ‘봉강리’는 말 그대로 봉이 날아와 앉았다 하여 봉황골(鳳凰谷), 또는 봉강골(鳳降谷)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봉황이 내려앉았다가 쫓겨가버린 진주 봉강리

    지금은 봉강마을이라 불리는 곳에 어느 날 커다란 봉황 한 마리가 날아왔다. 마을을 휘휘 둘러보던 봉황은 좋은 자리를 찾아 둥지를 짓기 시작했다. 정성을 들여 아늑한 보금자리를 마련한 봉황이 알을 낳으려고 할 때였다. 마침 한 할머니가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평소 심술궂기로 소문이 자자한 이 할머니는 알을 낳으려는 봉황을 보자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 “훠이~ 이놈의 새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느냐. 훠이~ 저리로 썩 가버려라!” 할머니의 고함에 깜짝 놀란 봉황은 푸드덕 날아올랐다. “이놈의 새, 썩 가버려라!” 할머니가 계속 소리를 지르자, 봉황은 애써 마련해둔 둥지를 그대로 두고는 진주 방향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봉강마을을 떠난 봉황은 훨훨 날아 지금의 상봉동(上鳳洞)에 다시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조용하고 아늑한 자리를 골라 둥지를 틀고 그곳에서 알을 낳았다. 마을 사람들은 봉황이 날아와 알을 낳았다 하여 그곳을 ‘봉알자리’라고 불렀다. ‘봉알자리’는 지금의 상봉동동(上鳳東洞)에 있는 봉란대(鳳卵臺)이다. 한편 봉황을 쫓아내 버린 봉강마을 사람들은 뒤늦게 그 잘못을 알고는 후회를 했다. 그리하여 마을 이름은 봉이 날아와 내려앉았던 곳이라는 뜻으로 ‘봉강’이라고 이름 붙이고 봉황의 자취를 기억하고자 했다. 봉강마을은 지금 집현면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지만, 만약 그때 당시 봉황이 봉강에서 알을 낳고 새끼를 길렀다면 지금보다 더 잘 사는 마을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마을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한편, 봉란대에 관해서는 진양 강씨들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고려 시대 진주 지역을 중심으로 진양 강씨들이 세를 키우고 있던 때의 이야기이다. 강구만(931~975년)이라는 이의 집 뒤에 기이하게 생긴 바위가 있었다. 큰 바위 위에 작은 바위가 얹혀 있는 모양으로 봉황의 모습을 닮았다 하여 사람들은 ‘봉바위’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강씨 문중의 흥성함이 이 바위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했다. 이후 후손인 강흥(1010~1122년)의 시대에 이르러서 그 세력이 꼭대기까지 이르자, 이지원이라는 사람이 이들을 모함했다. 그는 사람을 시켜 몰래 봉바위를 부숴버리도록 했다. 그러자 그 바위 속에서 흰 돌 네 개가 나왔는데, 이를 깨뜨리니 새빨간 피가 철철 흘렀다고 한다. 이후 강씨 문중에서는 날아가 버린 봉을 다시 불러 앉히기 위해 지금의 ‘봉알자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 까치로 변해 신라군을 염탐하던 계선공주가 죽은 경주 작원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乾川邑) 건천리(乾川里)는 평평한 땅이 많은 농촌 마을이다. 마을 가운데로 대천이 흐르며, 동쪽으로는 사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건천[乾川, 거치내, 건치내], 고지[高旨, 고짓말], 작원(鵲院) 마을 등이 있다. ‘건천’은 ‘마른 시내’라는 뜻이다. 마을 옆 내가 흐르는 땅이 물빠짐이 심해 물이 고이지 않는 까닭에 늘 가뭄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건천’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고지’는 200여 년 전 월성 최 씨가 개척한 마을이라고 한다. 이후 최 씨 문중이 일가를 이루고 살았는데, 이에 양반이 살았다 하여 높을 고(高)에 뜻 지(旨)를 써서 ‘고지’라 불리게 되었다. ‘작원’이라는 지명과 관련해서는 신라 장군 김유신과 백제 공주 계선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까치로 변해 신라군을 염탐하던 계선공주가 죽은 경주 작원


    신라 29대 무열왕 때의 일이다. 각간 김유신 장군이 오만 명의 군사를 인솔하여 백제 정복 길에 나섰다. 왕성을 나와 삼십 리 정도 진군했을 때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김유신과 그의 군사들은 근방의 성에서 하룻밤 묵어가고자 진을 친 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때 서쪽에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풍기는 까치 한 마리가 홀연히 날아와 진영의 상공을 빙빙 한참을 돌았다. 그러더니 진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던 대장기(大將旗) 끝에 앉는 것이었다. 이를 본 군사들은 불길한 징조라 여겨 웅성웅성 혼란스러워졌다. 김유신은 이 광경을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빼 들고 천둥 같은 목소리로 까치를 향해 외쳤다. “네 이 노옴!” 김유신의 호령이 하늘과 땅에 쩌렁쩌렁 울리자 까치는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 그러더니 아름다운 여자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너는 누군데 이런 요망한 술수를 쓰는 것이냐?” 김유신의 추호 같은 물음에 여자는 일어나 앉아 김유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백제 공주 계선이오.” 계선공주는 당시 삼국의 여러 공주 중에서도 미모가 빼어나기로 유명했고  그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검술과 신술을 배워 그 능력 또한 출중하다고도 알려져 있었다. 마침 백제왕은 김유신이 오만 군사를 이끌고 백제 땅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 큰 근심에 싸여 있었다. 이에 계선 공주는 도술을 부려 까치로 변해 신라군의 진지로 날아와 염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유신 또한 보통의 능력이 아니었던 까닭에 까치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계선 공주는 정체가 탄로 난 것에 원통해 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런 까닭으로 이곳을 까치 작(鵲)을 써서 ‘작성’이라고 불렀고, 마을 이름은 ‘작원’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는 김유신이 까치로 둔갑한 계선 공주의 정체를 알아채고 화살을 쏘아 떨어뜨렸으며, 이에 공주가 눈물을 흘리며 엎드려 빌었다고도 전해진다. 작성은 선덕여왕 때 반월성을 본떠 흙으로 쌓은 부산성(富山城)을 쌓기 전까지는 서라벌을 방비하는 중요한 요새였다고 한다.

  • 김성미가 단종을 생각하며 홀로 늙어간 구미시 오로동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오로리는, 마을 뒤로는 백마산이, 위쪽으로는 감천이, 아래로는 대망천이 흐르며 앞쪽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진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형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오로[올고개, 오을고개, 오로촌], 가자골[가좌곡(加佐谷)], 장대걸[감천변(甘川邊)], 아름마, 양지뜸, 웃마, 음지뜸, 큰곡, 하만 등이 있다. 그 중 ‘오로(吾老)’라는 지명과 관련하여서는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먼저, 올고개 밑에 있어 붙은 이름이라는 말이 있다. 그와 함께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키고자 했던 김성미의 이야기, 심온의 아들을 거둔 강거민에 관한 이야기가 전한다.


    김성미가 단종을 생각하며 홀로 늙어간 구미시 고아읍 오로동


    세조 4년(1458년),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귀양을 갈 때의 일이다. 당시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김성미(金成美)는 불의의 현실 앞에서 세상에 뜻을 잃고 말았다. 그는 벼슬을 버리고 자신의 사위인 이맹전(李孟專)과 함께 지금의 오로마을로 내려왔다. 스스로 호를 오로제(吾老齊)라고 지은 뒤 남은 생은 단종을 그리워하며 살다가 삶을 마감했다. 김성미는 매일같이 뒷산에 올라가 단종이 유배를 간 영월 쪽을 향하여 울며 절을 했다고 하는데, 나중 사람들은 그 골짜기를 ‘진학곡’이라 불렀다. 훗날 김성미의 지극한 충절에 감복한 사람들이 그가 살던 마을을 일러 ‘홀로 늙어간다’는 뜻의‘오로동’이라 이름하며 기렸다는 것이다.


    ‘오로동’이라는 이름의 유래와 관련한 또 다른 이야기는 강거민(康居敏)이라는 사람과 관련이 있다. 옛날 오로동에는 황 씨, 이 씨, 강 씨, 심 씨의 네 성씨가 살았다고 한다. 그중 황 씨, 이 씨, 심 씨는 다른 지방으로 이주를 해서 세를 넓혔다. 하지만 강거민은 자신의 일가가 다른 마을로 나가 사는 것을 반대했다. “나는 늙어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살겠다.”며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마을에 ‘오로(吾老)’란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오로’라는 지명에 얽힌 강거민과 관련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강거민은 슬하에 딸만 있고 아들이 없어 늘 아쉬워했다. 세종의 장인이었던 청송 심씨 심온(沈溫)이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역모를 꾸몄다는 누명으로 집안이 풍비박산되자 일가붙이들은 각자 살길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심온의 아들인 심회(沈澮)는 어린 나이였던 까닭에 유모에게 안겨 겨우 몸을 피할 수 있었는데, 그곳이 마침 강거민의 삼밭이었다. 


    아들이 없던 강거민은 어린 심회를 거두어 수양아들로 길렀다. 강거민의 따뜻한 보살핌 아래 심회는 영특하게 자라났다. 훗날 심온의 죄가 결백함이 드러나자 심온의 가문은 복권할 수 있었고 이에 그의 아들 심회 역시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다. 훗날 심회는 영의정까지 올랐다고 한다. 관직에 나아간 그는 양부(養父)인 강거민에게 벼슬하기를 누차 권했다. 그러나 강거민은 극구 사양하면서 ‘나 홀로 이곳에서 늙어가겠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곳을 ‘오로동’이라고 일컫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왕건을 쫓아 견훤이 왔던 동네, 대구 안지랑이

    ‘안지랑이(또는 안지랭이)’는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6동 앞산공원 입구, 안일사(安逸寺) 일대의 골짜기를 부르는 말이다. 지명의 연원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크게 두 종류로 정리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왕건과 견훤 사이에 있었던 전투에서 비롯했다는 설이며 또 하나는 안지랑이의 신비한 물과 관련한 설이다. 


    왕건을 쫓아 견훤이 왔던 대구 안지랭이


    먼저, 왕건과 견훤의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927년(고려 태조 10년) 대구 팔공산에서 고려 태조 왕건의 군대와 후백제 견훤의 군대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를 공산전투라고 한다. 왕건은 공산전투에서 크게 패한 후 홀로 도망치던 중, 안지랑이골에 위치한 안일암(또는 안일사라고 부른다)에 이르러 몸을 숨겼다. ‘안일암’이라는 이름은 당시 도주하던 왕건이 이 절에서 석 달 동안 편히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편 견훤은 도망친 왕건이 안일암에 몸을 숨기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안지랑이골까지 뒤쫓아왔다. 마침 왕건 역시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안일암으로부터 500m 가량 위쪽에 위치한 큰 굴로 피신했다. 


    왕건이 굴에 숨자 어디선가 왕거미가 나타나 굴의 출입구에 거미줄을 쳤다고 한다. 덕분에 견훤의 군사들이 굴을 지나쳐 왕건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왕건은 이 굴에서 3일 간을 머무르며 견훤과 그의 군사들이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이 때 왕건이 숨었던 큰 굴은 왕이 머물렀다 해서 ‘왕굴’이라고 불린다. 왕굴 바로 아래에는 장군들이 머물렀다 해서 ‘장군굴’이 있으며, 또 그 밑에는 장군들이 마신 샘이 있는데 이를 일러 ‘장군수’라고 부른다. 견훤이 왕건을 쫓아왔다 돌아간 후, 사람들은 왕지렁이의 후손이라 전해지는 견훤이 왔다간 골짜기라고 해서 이 일대를 ‘왕지렁이’라 불렀다. 이 말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훗날 ‘안지랑이’로 굳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또 다른 이야기로는 왕이 앉았다 간 자리라고 해서 ‘안지랑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안지랑이 골짜기의 신비한 물과 관련한 지명 유래는 다음과 같다. 안지랑이 계곡의 물이 맑고 깨끗하며 철분이 많아 부스럼, 헌디, 두드러기 등의 피부병이 금방 나을 정도로 효험이 좋았다고 한다. 좋다는 온갖 약을 다 썼는데도 고치지 못한 병도 안지랑이 계곡에서 씻은 후 말끔하게 나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백 리 밖에서도 가마까지 타고 와 이 물에서 몸을 씻고 가기도 했을 정도로 물의 효험은 이름이 났다. 심지어는 앉은뱅이도 이 곳 물을 마시고 일어섰다고 하는데, 그 말에서 유래하여 안지랑이로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견훤에게 쫓기던 왕건도 바위 틈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시고 기운을 차렸다고 한다. 이 외에도 이 동네가 예로부터 앉아서 물 맞고 앉아서 비 맞고 앉아서 놀기 좋다는 뜻에서 ‘안지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는 안지랑이 물이 좋아서 그런 것인지 물안개가 피어서 그런 것인지 대구 중심가에서 안지랑이 쪽을 보면 아지랑이가 가득 피어난 것처럼 보여 ‘안지랑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도 있다.

  • 견훤이 지렁이가 되어 숨은 안동 진모래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一直面) 원호리(遠湖里)는 머무리, 향교골, 장사리 등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머무리는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까닭에 물이 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멈물’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향교골은 약 150년 전에 김윤한(金潤漢)이란 선비가 개척한 마을로 향교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장사리라는 지명과 관련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견훤이 지렁이가 되어 숨은 안동 진모래


    먼저, 견훤과 관련한 이야기가 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지렁이의 화신이라고 일컬어진다. 지렁이로서의 능력은 특히 전쟁 중에 빛을 발했다. 그는 모래땅에 진을 치고 있다가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지렁이로 변해 모래 속으로 재빨리 들어가 버렸다. 까닭에 상대편으로서는 그를 물리치기가 여간 어려운 노릇이 아니었다. 이야기는 왕건과 견훤이 안동에서 벌인 전투에서 시작한다. 훗날 고려의 개국공신이 된 삼태사[김행, 김선평, 장정필]가 왕건을 도와 지금의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에 진을 치고 견훤의 군대와 대적할 때였다. 이번에도 견훤은 동쪽 낙동강변 긴 모래톱에 진을 쳤다. 곧 두 진영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밀고 밀리는 싸움이 수십 번에 걸쳐 계속되었지만 승패는 쉽게 결정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견훤이 싸움에서 불리해질 때마다 모래 속으로 기어들어 가니 왕건과 그의 군사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끝이 나지 않는 전투에 왕건의 군사들은 하나둘 지쳐가기 시작했다. 사기를 잃어가는 군사들 앞에서 현묘한 계책을 내놓지 못한다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고민 끝에 삼태사들이 기가 막힌 전략을 내놓았다. 냇물을 막아 못을 만들고 못 속에 소금을 잔뜩 풀어 짠물을 만들어 놓기로 한 것이다. 삼태사의 계획대로 왕건의 군사들은 냇물을 막아 짠물을 만들었다. 얼마 후, 두 진영 사이에 다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왕건의 군사들이 무섭게 몰아치자 불리해진 견훤은 이번에도 지렁이로 둔갑하더니 모래 속으로 재빨리 숨어버렸다. 이때를 노리고 있던 삼태사는 군사들에게 못물을 터뜨리도록 명령했다. 못이 터지면서 짠물이 순식간에 모래땅으로 스며들었다. 온몸을 조여오는 짠물에 지렁이로 변한 견훤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기어 나온 견훤은 그 길로 퇴각해 안동에서 도망을 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견훤이 지렁이가 되어 숨은 안동
    안동 호반나들이길 이미지
    안동 호반나들이길

    이 때 삼태사가 막았던 냇물은 소금물이 흘렀다고 해서 ‘간수내’로 부르다, 오랜 세월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지금은 ‘가수내’로 불린다고 한다. 가수내가 활처럼 둥글게 감싸 흐르는 ‘가수내마을’은 현재 서지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기도 하다. 한편, 견훤이 진을 쳤던 마을 앞 낙동강 변은 모래톱이 길다 해서 ‘진몰개’ 혹은 ‘진모래’, 한자로는‘장사리(長沙里)’로 불렸다. 하지만 1976년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모래톱은 수몰되었다. 견훤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삼태사를 모신 사당은 현재 안동 시내에 있다. 장사리와 관련한 또 다른 이야기로는 이기주(李氣周)라는 선비와 관련이 있다. 그가 이 곳으로 들어와 마을을 새로이 개척하면서 사래가 긴 밭을 만들었다 해서 장사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 태조 왕건의 꿈 해몽을 잘 해줘서 받은 왕밭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이기 위해 황산벌에 진을 치고 있을 때였다. 왕건은 피곤하여 잠깐 눈을 감고 있다가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서 왕건이 큰 가마솥을 머리에 쓰고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짊어지고 물속에 들어갔다. 그러자 닭이 요란스럽게 울면서 수만 채의 집에서 방망이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태조 왕건은 꿈이 하도 괴이하여 주변의 참모들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한 참모가 “전하, 주변에 용한 무당이 있습니다. 그 무당을 불러서 꿈 해몽을 들어보시면 어떠할까 합니다!” 이에 태조는 무당을 데려오기보다는 직접 가서 듣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무당을 만나서 꿈 해몽이나 한 번 들어보자꾸나!”라고 말을 한 후 몇 명의 참모를 거느리고 무당이 살고 있는 논산시 부적면 부인리로 찾아갔다. 

    태조 왕건의 꿈 해몽을 잘 해줘서 받은 왕밭
    태조 왕건의 꿈 해몽을 잘 해줘서 받은 왕밭

    무당집 앞에 다다른 태조와 참모는 그 집 앞에 사람이 나와 있는 걸 보고 직감적으로 무당임을 알았다. 무당 또한 귀한 분이 자신의 집에 오고 있음을 알고 미리 나와 마중을 하였다. 무당은 태조를 맞이하면서 “이렇게 누추한 소인의 집까지 방문해주셔서 무한한 영광입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이에 태조는 “그대가 꿈 해몽을 잘한다고 해서 찾아왔노라!”라고 얘기를 하자, 무당은 “재주가 뛰어나지는 않습니다만 최선을 다해 풀이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하고 태조와 일행을 집안으로 모셨다. 무당에게 꿈 이야기를 하자 무당은 "전하, 등에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셨다는 것은 임금 왕(王)자를 가리키는 것이고, 머리에 가마솥을 쓰시고 물속으로 들어가신 것은 왕관을 쓰시고 용좌에 앉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닭의 울음소리는 전하의 인품이 고고하고 높아 많은 사람이 따름을 말하는 것이고, 수만 채의 집에서 방망이 소리를 낸 것은 등극이 가까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라고 해몽을 했다. 


    곧 후삼국 통일을 이루면서 등극할 것이라는 무당의 말을 들은 태조 왕건은 미소를 띠었고, 함께 간 참모들 또한 자신들이 장차 통일된 나라를 이끌 임금을 모시고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다. 그리고 후백제의 견훤군과 오랜 싸움에 지친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무당의 말에 큰 용기와 희망을 얻은 태조 왕건과 그의 참모들은 진영으로 돌아와 무당의 꿈 해몽을 부하들에게도 전했다. 부하들도 자신의 꿈인 양 신이 났다. 태조 왕건은 이 기세를 모아 진격명령을 내려 후백제군을 크게 물리치고 후삼국의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왕건은 이번 싸움의 승리는 꿈 해몽을 해준 무당의 공이 크다고 생각하고 무당에게 ‘부인’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그리고 그에 대한 상으로 무당에게 밭을 하사하였다. 이에 주변 사람들은 왕이 무당에게 상으로 준 밭이라 하여 ‘왕밭’ 또는 ‘왕전’이라 불렀는데, 왕밭은 현재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 왕전리를 이른다.

  • 태종의 둘째 공주가 살았던 서울 소공동

    서울시 중구 소공동은 조선조 태종의 둘째 공주가 살던 곳이어서 소공동(小公洞)이 되었다. 처음에는 ‘작은 공줏골’로 불렀는데, 이를 한자로 바꾸면서 소공동, 소공주동이라 부르다가 소공동으로 굳어졌다. 중구 남대문로2가, 소공동, 을지로1가에 걸쳐 있는 마을이었다. 


    공주가 살던 공줏골, 파란의 역사 속에서 남은 지명 소공동

    태종과 원경왕후 민 씨는 둘째 공주를 낳았다. 태종은 예쁜 공주를 보며 바르게 크라고 경정공주(慶貞公主, 1387~1455)라 불렀다. 아버지 태종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이지만 왕족인지라 사람들은 경정공주가 사는 곳을 작은 공주가 사는 곳이라 하여 ‘작은 공줏골’이라 불렀다. 공주가 크면서 자태가 빼어나 소문은 명나라까지 들어갔다. 명나라에서는 태종의 작은 공주를 명나라 왕자와 혼인을 시키려 하였다. 이에 태종은 얼른 조준의 아들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 후 경정공주는 1남 4녀를 두었다. 이후 ‘작은 공줏골’이 한자로 바뀌어 소공동이 된다. 세월이 흘렀지만 사람들은 작은 공주가 살던 곳을 계속 소공동이라는 지명으로 사용했다. 

    태종의 둘째 공주가 살았던 서울 소공동

    선조 16년(1583)에 이곳에 다시 궁을 화려하게 지었다. 선조의 셋째 아들 의안군(義安君)이 살 집을 마련해 준 것이다. 그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서울은 왜적의 손에 넘어갔고, 왜적은 의안군의 집을 자신들의 진지로 사용했다. 왜군 장수 우끼다 히데이에가 거처했다.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하면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왜적을 쫓아내고 이곳을 차지하였다. 이곳은 이후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 되어 남별궁(南別宮)이라 불렀다. 1897년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고치고 황제를 칭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삼 층의 화강암으로 둘레를 두른 환구단(圜丘壇)을 세웠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대왕을 태조고황제로 추존하고 제사를 올렸다. 이후 1901년에는 이곳에 황궁우(皇穹宇)라는 8당을 세우고 그 안에 태조고황제의 위패를 모시고, 동쪽에는 돌북으로 된 석고단(石鼓壇)을 세웠다. 이 단은 관과 민간의 유지로 고종황제의 성덕을 찬양하기 위하여 세운 것인데, 중국 주(周)대에 선왕(宣王)의 공덕을 새긴 석고문(石鼓文)을 본떠서 지은 것이다. 1913년 환구단이 헐리고 이곳에는 호텔이 들어섰다. 소공동의 지명을 통해 우리는 세월은 변하고, 변하는 세월은 역사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 창왕과 영창대군이 죽은 강화 살창리마을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살창리(殺昌里)마을이 있다. 강화도 견자산 고려궁지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강화도 말로 ‘살채이’라고도 하는데, 이 마을은 고려의 창왕(昌王)과 조선의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살해된 마을이다. 그들은 죽을 당시 각각 10살과 7살이었다.  


    우왕의 아들 창왕이 죽은 살창리마을

    고려 말 우왕이 폐위되고 새로운 왕을 세우게 되었다. 그때 “마땅히 그 전 왕의 아들을 왕으로 세워야 합니다.”란 이색의 주장에 따라 전(前) 왕의 아들, 즉 우왕의 아들 창(昌)이 왕으로 등극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의 자손이 아닌 중 신돈의 자손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 때문에 창왕을 평민으로 강등시켜 강화로 귀양을 보냈다. 그때 창왕의 나이 겨우 10살이었다. 창왕은 그렇게 귀양을 간 것도 모자라 신하에게 죽임을 당한다. 훗날 사람들은 이곳에서 창왕이 살해당했다고 해서 죽일 살(殺)자애 창성할 창(昌)자를 써서 살창리(殺昌里)라 부르게 되었다. 우왕은 신돈의 비첩 반야의 소생이라 하여 죽음에 이르게 된다. 죽음 직전 우왕은 자신이 신돈의 자식이 아니라 왕 씨의 소생임을 밝힌다. 겨드랑이에 난 비늘을 보이면서 “너희들은 보아라. 내가 용의 후손인 왕 씨임을….”이라고 자신을 죽이려는 관리들에게 말을 했다. 그럼에도 결국 우왕은 죽임을 당했다. 그가 용의 아들이라고 했던 것은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이 용왕의 딸과 결혼하여 왕건의 아버지를 낳았다는 설화에서 비롯한 것이다. 


    창왕과 영창대군이 죽은 강화 살창리마을


    7살 영창대군의 죽음과 살창리

    조선 광해군에게는 이복동생 영창대군이 있었다. 광해군 재위 때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무고를 받고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영창대군은 당쟁의 희생양이었던 셈인데, 당시 대북파와 소북파의 다툼이 있었다. 영창대군은 당시 7살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대북정권의 명령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은 방에다 영창대군을 가두고 밖에서 문을 잠근 후 온돌방에 불을 계속 지폈다. 영창대군은 뜨겁다고 살려 달라고 어머니를 부르면서 나오려고 했다. 얼마나 애를 쓰고 문을 긁어댔으면 영창대군의 손톱이 다 빠졌다고 한다. 결국 영창대군은 좁은 방에서 죽고 말았다. 그 후 관가에서는 영창대군이 죽은 사실을 입 밖에 내지 못하게 하였다. 그 당시의 상황이 강화도 민요에 나온다. “살채이 묻거들랑 대답을 마오.”라는 구절인데, 영창대군 살해 사건은 아주 큰 정변이었다. 영창대군을 불에 달구어 죽인 음력 2월 9일을 전후하여 강화도에는 비가 내리는데, 이는 영창대군의 억울한 죽음에 하늘도 울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이때 오는 비를 강화도에서는 ‘살창우(殺昌雨)’라 한다.

  • 의병장 조헌의 가족이 피난했던 인천 율도

    인천광역시 서구 원창동 율도(栗島)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려다 죽은 후율(後栗) 조헌(趙憲, 1544~1592)과 깊은 관련이 있는 섬이다. 조헌은 미래를 읽을 줄 알았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알고 가족이 피신할 곳을 율도에 미리 마련하였다. 이 일로 조헌의 호를 따 율도라는 지명이 생겼다.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을 대비해 율도를 개간한 조헌 

    조헌은 중봉(重峯)이라는 호가 유명하지만, 후율(後栗)이라는 호도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일이다. 조헌이 볼일이 있어 한양에 다녀오면서 떠꺼머리총각인 김 총각을 데리고 왔다. 조헌은 김 총각을 자신의 옆에다 두고 친자식처럼 극진히 보살폈다. 글도 가르쳐주면서 뒷바라지를 했다. 그리고 그 마을에 사는 어느 집 딸에게 중매를 하여 장가도 들였다. 조헌과 김 총각의 장인은 김 총각에게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돈을 대 주었다. 김 총각은 그 돈을 가지고 어디론가 장사를 한다면서 떠나갔다 오기를 몇 차례 반복하였다. 조헌이 김 총각에게 장사를 시킨 것은 한갓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조헌은 나라에 큰 난리가 날 것을 미리 알고 김 총각을 시켜 대처를 한 것이다. 김 총각을 율도에 보내서 섬을 몰래 개간하고 집을 짓고 살 터전을 마련했던 것이다. 김 총각은 율도에 와서 바다를 막아 논을 일구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밭을 만들었다. 그리고 안전한 곳에 집 두 채를 지었다. 


    의병장 조헌의 가족이 피난했던 인천 율도
    의병장 조헌의 가족이 피난했던 인천 율도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헌은 온 가족을 이끌고 율도로 들어갔다. 가족들은 율도에서 피난 살도록 하고 자신은 육지로 나와 의병을 규합하여 왜군과 맞서 싸웠다. 율도에는 당시 조헌의 가족과 김 총각의 처가 가족도 함께 살았다. 조헌은 승병 영규의 의병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자했다. 조헌은 전사하였지만, 그 가족들은 무사히 임진왜란을 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율도에는 지금도 조헌 집안의 산소가 있고, 그 아래에는 김 총각네 가족의 산소가 있다. 아마도 임진왜란을 피해 율도에 들어와서 오랫동안 그곳에서 대를 이어 살았던 것일 게다. 조헌이 흠모한 이이의 호가 율곡(栗谷)이었고, 조헌이 그에 영향을 받아 후율(後栗)이라는 호를 썼다. 훗날 사람들은 이 호를 따 이 섬을 율도(栗島)라 불렀다.

  • 병자호란의 아픔이 담긴 서울 홍제동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동은 홍제원에서 온 이름이다.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에는 공무여행자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역원을 설치해 운영하였다. 이를 역원제(驛院制)라고 하는데, 그 중 홍제원이 이곳에 있었기에 홍제원의 이름을 따 홍제동이라 칭하였다. 홍제원은 무악재를 넘으면 바로 나온다. 그래서 중국의 사신들이 머물면서 입성을 할 때 옷을 갈아입기도 했다. 홍제동은 1895년 북서 연은방 홍제원계 내동, 1911년 경성부 은평면 홍제원동,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홍제내리, 1936년 경성부 홍제정, 1943년 서대문구 홍제정, 1946년 서대문구 홍제동으로 바뀌었다. 


    병자호란의 슬픔을 간직한 홍제동 

    홍제동에는 병자호란과 관련한 아주 슬픈 사연이 전하고 있다.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에서 1637년 1월까지, 2달에 걸쳐 청나라가 조선을 침입해서 싸운 전쟁이다.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당한 힘든 싸움이었다. 그 당시 청군에게 수모를 당할 것을 염려하던 벼슬아치의 부녀들이 모여 앉아 “만약 청병을 만나 수모를 받게 되면 차라리 자결을 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때 김유의 부인 이 씨는 “그때 가봐야 알 일이지.”라며 말했다. 이참판 부인이 이 씨 부인을 비난하며 “사대부집 부인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소?” 했다. 세월이 지나 정말 청나라 군사가 물밀 듯이 밀려와서 부녀자들을 능멸하기 시작했다. 이때 이 씨 부인을 나무라며 사대부집 부인의 절개를 얘기했던 이 참판 부인은 순순히 절개를 굽혀 청병의 능멸을 당했다. 


    이 씨 부인은 끝까지 정절을 지키다가 청병에게 화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참판 부인을 향해 ‘말만 앞세운 정절’이라 하였다. 전쟁 중에 수많은 여인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그 가운데 심양으로 끌려갔던 조정 사대부집 여인들이 서울로 돌아왔다. 이 여인들은 이미 청나라 병사들에게 더럽혀진 몸이 되었다. 나라에서는 이 여인들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뾰족한 방도가 없어 인조 임금이 영을 내렸다. “홍제원의 냇물[지금의 모래내]에 목욕을 하고 서울로 들어오면 정절에 대해 묻지 않겠노라. 앞으로 그 여인들의 정절을 논하는 자가 있으면 엄단 하겠노라.” 그래서 여인들은 모래내에서 몸을 씻고 들어왔다. 

    병자호란의 아픔이 담긴 서울 홍제동
    병자호란의 아픔이 담긴 서울 홍제동

  • 영조의 지극한 어머니 사랑이 깃든 서울 궁정동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은 육상궁동(毓祥宮洞)에서 궁(宮)자를 따고 온정동과 박정동에서 정(井)자를 따 합하여 지은 이름이다. 청와대 옆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조 영조(英祖) 임금이 자신의 생모인 숙빈(淑嬪) 최(崔) 씨의 신위(神位)를 모시려고 육상궁동(毓祥宮)이란 사당을 지었다. 육상궁은 기를 육(毓)자에 상서로울 상(祥)자를 써서 자신을 낳은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사랑을 나타냈다. 육상궁은 조선의 왕을 낳았지만 왕비에 오르지 못한 후궁 7명의 신위를 모신 궁전이다. 칠궁(七宮)으로도 불리는데, 1966년 3월 22일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옛날 이곳에는 육상궁동, 동곡, 온정동, 신교, 박정동이란 작은 마을 몇 개가 있었다. 이것을 1914년 4월 1일 지명을 개정하면서 궁정동이란 지명이 생겼다.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로 경성부 관할구역이 되고, 경기도고시 제32호로 동명칭이 개정될 때 경성부 궁정정(宮井町)으로 일본식 지명이 되었다.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해 구제도(區制度)가 생기면서 종로구가 신설되어 종로구 궁정정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서울시헌정과 미군정법령 제106호에 의하여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정’이 ‘동’으로 되어 궁정동으로 바뀌었다. 

     

    영조가 생모를 모시려고 지은 육상궁

    지명의 생성 근원은 정말 여러 가지이다. 궁정동은 사당이 있던 터에서 비롯했다. 물론 임금이 만든 사당이니 소문날만 하지만 우리 주변에도 재궁동이란 지명이 많은데, 이런 지명은 모두 사당이 있거나 마을제사를 지내는 곳이란 뜻이다. 궁정동이란 마을이름은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 씨의 사당을 지은 데서 유래했다. 육상궁을 지은 유래가 전하고 있다. 영조 임금은 생모의 신위를 모실 사당을 짓고자 호조판서에게 명을 내렸다. 그러면서 기둥과 문, 모양 등을 종묘와 조금도 다름없이 짓도록 하였다. 명을 받은 신하는 영조의 생모 사당을 임금의 신위를 모신 종묘와 똑같이 지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고심을 한 끝에, 사당 터를 평지보다 조금 낮게 하고는 건물을 종묘의 치수와 같이하였다. 영조가 준공 때 나와 보니 사당이 낮아 보이고 종묘와 다른 크기로 보였다. 그래 영조는 신하를 향해 “네가 감히 내 뜻을 어기느냐?”하고 호통을 쳤다. 신하는 “한 치도 어김없으니 재어 보십시오.”라고 아뢰었다. 그래 재어보니 치수가 한 치도 어그러지지 않아서 더이상 내색을 하지 못했다.


    영조의 지극한 어머니 사랑이 깃든 서울 궁정동
    영조의 지극한 어머니 사랑이 깃든 서울 궁정동


    그 대신 영조는 친히 어머니 신주를 사당이 아닌 종묘에 모시려고 나섰다. 그러자 승지가 차마 임금의 앞을 가로막지는 못하고 땅에 엎드려 임금의 발뒤꿈치를 입으로 당기며 만류하였다. 아무리 임금의 생모지만 정실 왕비가 아닌 후궁을 종묘에 모신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영조는 신하를 향해 소리쳤다. “너는 어미도 없느냐?” 신하는 대답했다. “전하께선 일국의 제왕으로서 사사로이 생모의 정을 못 잊어 종묘사직의 체통을 돌보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영조는 물러났다. “오냐, 내가 졌다.” 그러면서 신주를 안고 돌아서며 용안에 눈물을 지었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육상궁이 지어졌고, 후궁으로 왕자를 낳은 6개의 궁묘를 이곳에 합하여 칠궁(七宮)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육상궁이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육상궁동이라 했고, 이것이 훗날 궁정동이라는 지명으로 바뀌었다. 

     

    장기집권을 종식시킨 대통령안가

    지금 궁정동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마을이 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고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술을 마시다가 시해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같은 궁정동이지만 지명유래와 대통령안가와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1979년 이후 우리 역사에서 궁정동과 대통령안가는 함께 가야할 숙명이 되었다. 

  • 어윤중의 죽음을 예견한 용인 어비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어비리는 어비울이란 마을에서 유래했다. 어비울(魚肥鬱)은 강이 넓어 고기가 살찐다는 뜻으로 쓰였다. 한편으로는 마을에서 도랑을 파다가 황금빛 물고기가 뛰어나왔다는데서 어비울이 되었다고도 한다. 지금 어비울이 있던 마을은 대부분 1971년 완공된 이동저수지 속에 묻혔다. 이 저수지는 어비울(어비리)저수지라고도 부른다. 저수지 가에는 어비울비각이 있고, 그 안에 “魚肥洞遺跡地永世不忘碑”(어비동유적지영세불망비)가 서 있다. 불망비 뒤에는 “魚湖八景(어호 팔경)”이라 하여 이곳의 8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기록해 놓았다. 성륜봉의 아침햇살, 수선대에 비친 밝은 달, 탁영정에 모인 친구들, 석우천에 드리운 낚시, 용강에 지는 해, 방목리 마을의 점심 짓는 연기, 금단사의 새벽 종소리, 갈마산의 비취색이 그것이다. 용인시에서는 이동저수지에서 보는 낙조(落照)가 서해의 낙조보다 이름답다고 홍보를 하고 있으며, 그 저수지에는 수많은 낚시꾼들이 낚시를 드리워 살찐 고기를 낚고 있다. 어비울에는 대한제국 당시 친일내각을 세웠다가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인해 친로내각에 의해 제거당한 어윤중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어윤중의 죽음을 예견한 용인 어비리

    어윤중의 죽음과 “어탁지! 어탁지!”

    대한제국 시절 1895년에는 일제에 의해 단발령(斷髮令)과 변복령(變服令)이 강제로 시행되고, 일본 자객에 의해 민비(후에 명성황후)가 시해되어 왕비의 몸은 일제에 의해 몰래 불살라졌다. 그리고 이듬해 초에는 아관파천이 일어나 친로세력에 의해 친일내각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때 친일내각의 중심세력이었던 김홍집이 피살되고 민심이 흉흉해졌다. 탁지부 대신을 맡았던 어윤중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고향인 충청도 보은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고 여인들이 타는 가마로 위장을 했다. 어윤중은 주막에 들러 여장을 풀었다. 그러면서 주모에게 이곳 마을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주모는 어비울이라 말했다. 어윤중은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고기가 살찐다는 어비(魚肥)울을 고기가 슬피 운다는 어비읍(魚悲泣)으로 잘못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윤중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급히 행장을 챙겨서 이웃마을로 옮겨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어윤중의 신분을 알아차린 마을의 장정들에게 붙잡혔다. 어윤중은 지금 이동저수지의 수문이 만들어진 강변에서 몽둥이로 무참히 살해당하였고, 시체는 장작더미에 올려 불살라졌다. 어비울은 이동저수지가 들어서면서 물속으로 들어가고, 어비울에 살던 사람들은 언덕 위로 이주하였다. 지금의 어비리가 된 마을이다. 어윤중이 죽은 후 밤에 어비울 강변에 가면 “어탁지! 어탁지!”하고 귀신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어윤중(魚允中, 1848~1896)은 대한제국 시절 벼슬을 하였다. 개혁안을 제출하는 등 많은 일을 행하였다. 간도가 우리 땅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1894년에 갑오경장 내각이 수립되자 김홍집 내각과 박정양 내각에서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이 되어 재정·경제 부문의 대개혁을 단행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고 친일내각이 붕괴되었으며, 김홍집이 민중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어윤중은 자신이 농민들로부터 지지를 얻고 있었으므로 고향으로 가서 피란하는 것이 안전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고향인 충청북도 보은으로 내려가다가 용인의 어비울을 지날 때 산송문제(山訟問題)로 개인적인 감정을 품은 사람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용인 어비울 비각 이미지
    용인 어비울 비각
    용인 어비울 비 이미지
    용인 어비울 비

  • 공양왕이 절에서 밥을 얻어먹은 고양시 식사동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식사동(食寺洞)은 공양왕(1345~1394)이 이곳에서 어떤 절의 밥을 얻어먹으면서 피신생활을 해서 지어진 지명이다. 관련된 지명으로 대궐고개, 어침(御寢), 박적[밥절]골이 있다. 식사동은 고양군 구이면(九耳面) 식사리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구이면에서 원당면(元堂面)으로 되었다가 1996년 일산구 관할이 되었고, 2005년 일산동구에 포함되었다. 이곳에는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에 얽힌 지명유래가 전하고 있다. 


    절에서 날라다 주는 밥을 얻어먹다 죽은 공양왕의 최후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고려가 망하자 왕비와 함께 개성 궁궐을 빠져나와 도망을 했다. 도망을 가다가 지금의 고양시 식사동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날이 저물어 사방이 어두침침하여 길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마침 가까운 곳에 인가가 있어 불빛을 보고 찾아갔다. 찾아가 보니 그곳은 민가가 아니고 절간이었다. 공양왕 일행은 절에 들어가 숨겨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절에서는 도와는 주되 어려움을 표했다. “이곳은 인적이 번잡하여 임금을 모실 수 없으니 동쪽으로 10리쯤 가서 누각에 계시면 저희들이 매일 수라를 갖다 드리겠습니다.” 공양왕 일행은 하는 수 없이 절을 떠나 지금 대궐고개라 부르는 곳에서 하룻밤 노숙을 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나중에 이곳을 임금이 머문 고개라 하여 ‘대궐고개’, 임금이 머물러 잠을 잤다고 하여 ‘어침(御寢)’이라 불렀다. 어침은 또 ‘날이 어두침침’하다고하여 어침이라 했다는 얘기도 있다. 공양왕 일행은 이곳에서 피해 있으면서 절에서 날라다 주는 음식으로 끼니를 이었다. 이 때문에 훗날 이곳 지명이 밥 식(食)자에 절 사(寺)자를 써서 식사리(食寺里)라 부르게 되었다. 

    공양왕이 절에서 밥을 얻어먹은 고양시 식사동
    공양왕이 절에서 밥을 얻어먹은 고양시 식사동

    그러던 어느 날 밥을 나르던 스님이 이곳에 당도해 보니 임금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스님은 왕의 일행을 찾아다녔다. 그때 공양왕이 평소 귀여워해 주던 청삽살개 한 마리가 스님 일행을 인근에 있는 연못으로 이끌었다. 삽살개는 연못으로 가더니 물속을 들여다보며 자꾸 짖어대더니 갑자기 물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 스님 일행이 이상하게 여기고 연못의 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연못의 물을 다 퍼내니 그 안에는 옥새를 껴안고 왕과 왕비가 함께 죽어 있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연못에 빠져 목숨을 마친 것이었다. 스님 일행은 연못에 빠져 죽은 왕과 왕비의 시신을 꺼내 인근에 좋은 장소를 택해 묻어 주었다. 이것이 나중에 사적 제191호로 지정된 고릉(高陵), 곧 공양왕릉이다. 왕릉 앞에는 개 모양의 돌로 된 상[石像]이 있는데, 이는 왕의 시신을 발견하게 해주고 주인을 따라 죽은 충견(忠犬)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고려 공양왕릉 이미지
    고려 공양왕릉
    고양 공양왕 왕릉

  • 영창대군의 태를 봉안했다는 가평 태봉리

    경기도 상면 태봉리는 중종 또는 영창대군의 태를 봉안했다는 태비(胎碑)와 태봉산(胎封山)이 있다. 

    이 때문에 마을이름을 태봉골[胎封谷] 또는 태봉리(胎封里)라 한다. 태비(胎碑)의 글자를 새긴 제목은 아지비(阿只碑)라 한다. 이 비는 현재 마을 어귀 500여m 아래에 있는데, 원래 위치에서 옮긴 것이다. 

    영창대군의 태를 봉안했다는 가평 태봉리
     


    태비는 일반적인 태실비(胎室碑)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비좌의 앞면에는 2개의 안상이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단판의 연잎이 새겨져 있다. 비각의 높이는 94cm이며 두께는 18cm이다. 새겨진 글자의 크기는 4.5cm이다. 그 내용은 “아지비(阿只碑) 앞면: 황명만력삼십(皇明(萬)曆 三十…). 뒷면: 만력삼십사년칠월이십팔일립(萬曆三十四年七月二十八日立)”이라 했다. 중간에 글자가 보이지 않아 누구의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이 비의 주인공이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가평의 자연과 역사]에 의하면, 태비에 새겨진 연도가 1606년(선조39)이므로 이때 태어난 사람은 영창대군이 확실하다고 했다. 연도가 일치하므로 선조의 정비(正妃) 소생 영창대군이라고 했다. 한편, [가평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에 의하면 이 태비가 영창대군의 태를 묻은 비라 단정할 수 없으므로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둔다고 했다. 주민들에 의하면 1970년대 아지비를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우면서 앞뒤가 바뀌었다고 한다. 아지비의 경우 앞면은 출생일시를 뒷면은 태를 묻은 일자를 기록하고 있다. 가평군 상색리에도 태실이 있는데, 이는 태봉리의 것보다 114년 전인 1492년 9월 7일에 태를 묻었다. 그래서 태봉리의 태는 영창대군의 것이고, 상색리의 태는 중종의 태라고 하고 있다. 

    태봉리 전경
    태봉리 전경
    중종 태비의 이지비
    중종 태비의 이지비

    이처럼 태봉리의 태비 명문(銘文)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태비가 있는 것은 분명하므로 태봉리의 명칭은 태비에서 유래하였다. 태봉이라는 지명은 전국 곳곳에 있다. 이는 왕실에서 아기가 새로 태어나면 태를 소중하게 여겨 전국의 길지(吉地)를 택해서 묻었기 때문이다. 조선조의 경우 관상감(觀象監)과 선공감(繕工監)에서 이를 맡아 처리했는데, 장소의 선택과 일자와 관리까지 철저히 하였다. 이 때문에 태를 묻은 곳은 길지로 알려졌고, 그 지역을 태를 봉한 곳이라 하여 태봉이라고 이름하였다. 가평군 상면 태봉리도 왕실의 태를 봉안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휘어진 칼날에 서려 있는 장군의 정신, 이중로 장군 환도

    돌로 만든 칼에서 철로 만든 칼까지

    칼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된 무기이다. 칼의 손잡이 길이, 칼집의 유무, 칼날의 모양에 따라서 도(刀), 검(劍) 등으로 구분되어 불리기도 했다. 청동기 시대에는 돌을 날카롭게 갈아 만든 마제석검을 사용했으며, 철기시대부터는 철을 이용해 검을 만들었다. 이후에는 철을 제련하는 방법이 다양해지며 더욱 단단하고 날카로운 칼을 제작할 수 있었다. 칼은 전투용으로 꾸준히 사용되었으나 고려시대에 화약무기가 발달함에 따라 호신용, 의장용, 의식용의 성격을 갖기도 하였다.


    용도와 크기에 따라 다르게 불린 칼

    칼을 구분할 때 칼날이 양쪽에 있으면 검(劍), 한쪽에만 있으면 도(刀)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칼의 명칭은 재료, 용도, 크기, 형태 등에 따라 구체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크기에 따라 장도(長刀), 단도(短刀), 대도(大刀) 등으로 구분되며, 형태와 장식에 따라 환도(環刀), 월도(月刀), 칠성검(七星劍), 운검(雲劍)으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칼은 이처럼 복합적인 기준에 따라 이름 붙여졌다.


    칼집에 고리를 단 칼, 환도(環刀)

    이중로장군 환도
    이중로장군 환도(사진출처:경기도박물관)

    조선시대에는 칼자루가 짧으며 칼날이 한쪽에만 있는 칼을 대부분 환도라고 불렀다. 환도라는 명칭에 대하여 세 가지 의견이 있다. 첫 번째 1813년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 펴낸 『융원필비(戎垣必備)』에 따르면 환도(環刀)는 몸에 달고 다니기(佩用) 편하도록 칼집에 고리[環]를 단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 번째 칼날이 휘어 둥근 모양이기 때문에 환도라고 부른다는 의견과 세 번째 칼날과 칼자루 사이에 끼우는 칼방패가 둥근 모양이라 환도라 부른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조선 전기에 환도는 칼날이 곧고 짧았으며,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의 군례(軍禮)에서 설명하는 환도는 칼방패가 없었다.


    조선 전기의 칼의 특징을 살펴보았을 때, 첫 번째 의견에 따라 환도라 불린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날이 한쪽에만 있는 칼을 운검(雲劍), 패도(佩刀), 패검(佩劍)이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운검은 왕을 호위하는 신하가 갖추는 칼로써 칼의 장식에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적으로는 환도와 같은 형태이다. 그리고 패도와 패검은 '차고 있는 칼'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환도를 허리춤에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패도와 패검 또한 환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시대에 따라 크기와 모양이 변한 환도

    이중로장군 초상화
    이중로장군 초상화(사진출처:경기도박물관)



    조선 전기의 환도는 대체로 길이가 짧고 칼날이 곧은 편이었다. 문종(文宗) 때 기병용(騎兵用) 환도는 칼날의 길이를 1척 6촌(약 48cm)로 정하고, 보병용(步兵用) 환도는 칼날의 길이가 1척 7촌 3푼(약 54cm)으로 규정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을 겪은 후에 환도의 길이가 길어지고 칼날의 끝부분도 곡선형을 띠게 되었다. 정조(正祖) 14년(1790)에 편찬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따르면 환도 칼날의 길이는 3척 3촌(약 108cm), 칼자루의 길이는 1척(약 33cm)이었다.


    이후 조선시대 말에는 환도의 길이가 다시 짧아지면서 칼날의 길이가 2척이 되지 않는 50cm 정도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환도는 시기에 따라 길이와 형태가 다양하게 변하였다.


    그럼에도 환도는 가장 기본적인 전투용 무기이자 개인이 항상 소지하고 다니는 호신용 무기였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 특징이었다.






    검신(檢身)만 남아 있는 이중로 장군의 환도

    이중로 장군의 환도는 현재 검신이라 불리는 칼날만 남아 있어 칼자루나 칼집의 특징을 알 수 없다. 칼날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휘어져 있으며 한쪽 칼날만 날카롭게 만들어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칼날과 칼자루 사이에 둥근 칼방패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환도가 최소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칼자루가 없기 때문에 칼날과 칼자루를 결합하는 슴베의 형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중로 장군 환도는 칼자루와 칼날을 결합하는 슴베에 하나의 고정 못을 박아두는 형태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이중로

    이중로(李重老)는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 장단부사(長湍府使) 이서(李曙) 등과 함께 1623년 인조반정을 일으켰던 인물 중 한 명이다. 이중로는 인조반정의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錄勳)되었고 청흥군(靑興君)에 봉해지기도 했다. 이후 광해군이 강화도에서 머물게 되자 강화부윤(江華府尹)에 임명되었다. 1624년에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사망하였고 사망한 후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이중로 장군 환도는 칼날만 남아있어 원래 형태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많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중로 장군 환도는 조금 투박해 보이지만 조선시대 가장 널리 사용되었던 환도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에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