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읍남리는 평지에 자리 잡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 오개골, 말루, 공석, 오시골, 가진재, 토일 등이 있다. ‘오개골[오계골(五桂谷) 또는 오개곡(五個谷)]’은 옛날에 이 마을에 계수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이라는 설과 다섯 개의 골짜기가 합쳐진 곳에 있어 붙은 이름이라는 설이 함께 전한다. ‘말루’는 곡식의 분량을 재는 도구인 ‘말’에 ‘다락’이라는 뜻의 한자어 ‘루(樓)’로 이루어진 말이라고 추정 가능하다. 옛날 이 마을에 큰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수확을 해서 쌓아놓은 곡식이 다락같이 높았다고 해서 말 두(斗)에 다락 루(樓)를 써서‘두루(斗樓)’라고 불리다가 훗날 ‘말루’로 바뀌었다고 한다.
‘공석마을’은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세금을 쌀로 내던 시절, 울진 지역에서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쌀을 이 마을에서 배에 실어 당시 관찰사가 있던 강릉으로 보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시골[오로실골(五老室谷) 또는 오로곡(五老谷)]’은 마을 앞산이 고려장터라 하여 ‘혼자 늙어가는 거처’라는 뜻으로‘오로실곡’이라 불리다가 ‘오시골’로 바뀌었다 한다. ‘가진재’는 화전민들이 정착해서 이루어진 마을이다. 물이 풍족해 식수로 쓰기는 물론, 농사짓기에도 유리하고 농토 역시 기름져 여러 모로 가진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라 한다. ‘토일(吐日)’은 ‘해를 토하다’라는 뜻으로 지명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토일마을에는 정몽주의 후손인 연일 정씨(延日鄭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정확히는 정도(鄭渡)라는 사람의 후손들로, 그는 조선 세조 때 경기도 용인에서 울진읍 토일마을로 가장 먼저 옮겨와 정착했다. 정도는 단종 때 승의랑부위(承議郞副蔚)의 벼슬을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 올랐던 계유정난 때 증조할아버지였던 정보(鄭保)가 반대파로 몰려 경북 영일로 유배된다. 당시 정도는 그 화가 자신에게도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나아가면 위태하니 물러나서 편안히 지냄과 같지 못하다”는 말과 함께 울진읍 토일마을로 들어와 숨어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연유로 이 마을은 본디 물러날 퇴(退), 숨을 일(逸)을 써서 ‘퇴일(退逸)’이라고 불렀으나 이후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토일(吐逸)’로 바뀌었다고 한다. 정도가 들어와 살게 된 이후 당시 예천 사람이던 임긍(林兢)이라는 이도 들어와 정착을 하며 마을이 자리를 잡고 규모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후 마을 이름은 ‘해를 토하다’의 ‘토일(吐日)’로 바뀌었는데, 그 이유는 해가 뜰 때의 서광(瑞光)이 마치 해를 토하는 듯 하였기 때문이다. 토일 마을은 해가 뜨고 지는 시각에 따라‘상토일(上吐日), 중토일(中吐日), 하토일(下吐日)’로 나뉜다. ‘상토일’은 해가 가장 먼저 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며, ‘중토일’은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이 상토일과 하토일의 중간쯤 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세 개 마을의 연합 회의가 주로 중토일에서 열린다고 한다. ‘하토일’은 상토일과 중토일의 가장 아래쪽, 계곡의 하구에 위치하여 해가 뜨고 지는 것도 가장 늦어서 붙은 이름이다.
부산광역시 수영구 민락동(民樂洞)은 수영구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민락(民樂)’이라는 지명에 대해서는 세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먼저, ‘여민동락(與民同樂)·여민해락(與民偕樂)’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그것이다. 이 말은 ‘임금이 백성과 함께 즐기다’는 뜻으로, 이 동리의 경치가 무척 아름다워 임금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또 다른 유래는 조선 시대 수군과 관련이 있다.
당시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조선 시대에, 각 도의 수군을 통솔하는 일을 맡아보던 정삼품 외직 무관]가 군사들을 호령할 때 진산(鎭山)에서 군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이 군악이 연주된 곳이 지금의 민락동이라는 데서 붙여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세 번째는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이름을 붙였다는 설이 그것이다. 민락동에는 보리전과 널구지라는 자연마을이 두 개가 있다. 보리전은 백산 북쪽에 있는 마을로 다른 말로 덕민동(德民洞)이라고 불렸으며 널구지는 백산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평민동(平民洞)이라고 불렸다. 1914년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평민동과 덕민동을 합쳤는데, 이 때 두 마을의 백성이 함께 즐거이 사는 동네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민락동’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한편 민락동의 자연마을인 널구지와 보리전의 지명에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널구지’는 ‘늘구지’ 또는 ‘너구지’ 등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평평하고 넓다는 말인 ‘판곶(板串)’을 뜻한다. 이 근방의 지형이 산자락 아래에서 바닷가 또는 수영강 쪽으로 넓은 들이 펼쳐져 있는 까닭에 그로부터 유래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보리전’이라는 지명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하나는 조선시대 경상좌수영 아래에 있던 포이진(包伊鎭)이라는 이름에서 비롯했다는 견해이다. ‘포이진’이라는 지명이 구전되는 과정에서 보리전으로 음이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매를 대신해서 맞던 당시의 풍습과 관련 있다.
수영구에는 “보리 양식을 지고 매 맞으러 간다.”는 매품팔이 관련 속담이 전한다. 조선 시대 좌수영이 있던 당시, 마을 사람들이 법을 어겨 곤장을 맞아야 한다면 좌수영 관아로 가야했다. 관아 근처에는 늘 매품을 파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가진 것 없는 살림에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하다 보니 죄인을 대신해서 매를 맞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업이 생긴 것이다. 매품을 파는 사람들은 대개 열흘이나 보름치의 보리를 싸들고 와서 수영교 아래에서 매 맞을 차례를 기다렸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열흘을 꽉 채워 기다려야만 매를 맞을 수 있기도 했지만, 운이 좋다면 여러 날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매를 맞을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먹으려고 싸들고 온 보리가 남았을 것이니, 매품 파는 이들이 남은 보리를 인근 사람들에게 팔고 가기 위해 보리전을 벌였다. 이와 같은 연유로 이 동리를 ‘보리전(또는 보리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봉호리(蓬壺里)는 고기를 가둔다는 뜻으로, 호수 호(湖)자를 병 호(壺)자로 바꾸어 생긴 지명이다. 이 마을 인근에는 고성에서 유명한 오음산(五音山)과 팔음(八音)이라는 마을도 있다. 고성에서는 매년 수성제(守城祭)를 지내는데 수성은 신라시대 고성을 일컫던 이름이다. 신라시대 고성의 주변에 설악산과 금강산이 둘려 있어서 외부에서 침입할 수 없을 정도로 요새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또 봉호리가 있는 간성(杆城)은 고성의 중심지역으로 그 의미도 수성과 같다.
봉호리 옆으로는 설악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북천이라는 내가 있다. 북천은 봉호리를 휘감아 돌아 마을의 젖줄 역할을 한다. 강이 흐르므로 그 주변에는 쑥[蓬]이 많이 자랐다. 호수 옆에 쑥이 많이 자라므로 마을이름을 쑥 봉(蓬)자에 호수 호(湖)자를 써서 봉호리(蓬湖里)라 했다. 그 때문인지 이 마을에는 고기 어(魚)자를 쓰는 어 씨들이 번창을 했다. 그렇게 어 씨들이 살았는데, 어느 때부터 윤(尹) 씨들이 이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윤 씨들은 부지런히 해서 차츰 살림이 피고 어 씨들보다 점점 더 잘살게 되었다. 그런데 윤 씨들이 생각해 보니 그동안 어 씨들이 잘 살았던 것은 마을 이름 때문이라 여겼다. 호(湖)자가 호수라는 뜻이기 때문에 물고기 어(魚)자를 쓰는 어 씨들이 호수에서 노니며 살아가기 때문에 부유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다. 윤 씨들은 어 씨들보다 더 잘 살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내길 어 씨는 물고기이기 때문에 호리병에 가두면 될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윤 씨들은 마을이름의 호수 호(湖)를 병 호(壺)자로 바꾸어서 사용했다. 그래서 지금 봉호리의 한자가 쑥 봉(蓬)자에 병 호(壺)자를 쓰고 있다.
봉호리 옆에는 오음산과 팔음이라는 마을이 있다. 두 지명 모두 소리 음(音)자가 들어간다. 오음산(五音山)은 다섯 마을과 접해 있어 산꼭대기에 오르면 금성, 장현, 적동, 서성, 탑동이라는 다섯 마을의 소리가 모두 들린다. 이 산꼭대기에는 물이 솟는 못이 있어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팔음(八音)은 사통팔달이라 했듯이 팔방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뜻이다. 마을 옆에 건봉사(乾鳳寺)가 있다. 건봉사는 임진왜란 때 유정 스님이 승병을 이끌고 왜군을 무찌른 유명한 사찰이다. 승병에게 밥을 주려고 쌀을 씻을 때 쌀뜨물이 계곡물을 하얗게 물들여 십여 리를 흘렀다고 한다. 바로 이 절에 석가탄신일이 되면 사방팔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때 이 동네를 지나게 되므로 ‘팔방의 소리를 잘 듣는다’라고 해서 팔음마을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