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여섯 번째 임금인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추방되었다. 다시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고, 마침내 1457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한 많고 애달픈 일생을 마쳤다. 단종의 한 많은 삶과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여러 충신들의 충절을 기념하기 위해 영월지역민들이 1967년부터 해마다 단종제를 올리고 있다. 1990년 제 24회에 단종제에서 단종문화제로 명칭을 바꾸어 현재에 이른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단종과 불사이군의 충의를 실천한 사육신과 생육신, 이외의 여러 충신의 정신을 후세에 전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단종문화제는 한식을 중심으로 사흘간 문화제를 개최해왔으나, 현재는 4월 마지막주 금~일요일로 날짜를 고정했다. 첫날에는 단종제향에 앞서 장릉, 창절사, 관풍헌, 자규루, 낙화암, 민충사, 영모전 등 단종 관련 유적지에 등불을 밝히고 육신봉에 봉화를 올리고, 낙화암 강물에도 유등불을 밝힌다. 장릉에서 베푸는 단종제향은 제수, 복식 등 모든 절차를 전통왕릉의식에 따른다. 이때 함께 행하는 가장행렬에는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충신들을 비롯해 단종의 조부인 세종, 부친인 문종, 단종 등으로 분장한 이들이 함께한다. 단종제향은 강원도 무형문화제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이외에 단종의 승하 550년만인 2007년에 영조 국장도감의궤를 참조하여 옛 국장방식을 재현했다. 국장도감의궤에 따르면 왕의 존재를 드높이기 위하여 대규모 호위병사와 깃발, 무기 등을 동원하여 산릉제례 어가행렬도 했는데, 이를 옛 방식 그대로 재현한다. 이러한 유교의례를 보고 참여하는 것은 마치 조선시대로 직접 가있는 느낌을 주며, 직접 경험에 버금가는 간접경험을 하게 한다.
이외에도 1998년도부터는 부대행사로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를 선발한다. 기혼 여성들이 후보로 참여하여 정순왕후와 김빈, 권빈을 선발해 조선시대 왕비의 아름다움을 선보인다. 동강 둔치에서 칡줄다리기, 씨름대회, 힘겨루기 등의 민속행사가 열린다. 칡줄다리기는 영월의 대표 민속놀이로, 칡으로 지름 50㎝, 길이 100m의 칡줄을 만들어, 양편으로 나누어 힘을 겨룬다. 단종문화제는 지역의 문화전통을 체험하는 동시에 영월지역의 문화적 표상이 된 단종과 관련해 조선시대의 국왕 중심의 유교문화를 재현하고 경험하는 장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는 정순왕후의 무덤 사릉(思陵)이 있는 곳이다. 사릉은 생각 사(思)자에 무덤 능(陵)자를 쓴다. 정순왕후가 남편인 단종과 헤어져 64년간 오로지 ‘단종을 생각하며 밤낮으로 공경함이 발랐다’하고, ‘지나간 일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한다’라는 뜻으로 사릉이라 했다.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으로 17살과 18살의 어린 왕과 왕비는 생이별을 해야 했다. 그 사연을 따라가 본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는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의 무덤 사릉이 있어 지어진 지명이다. 사릉에 가면 주변에 소나무가 아름답게 서 있다. 소문에 의하면 이 소나무는 양무장군의 묘인 준경묘(濬慶墓)가 있는 삼척에서 가져와 심은 금강송이라 한다. 금강송은 아름드리 곧게 자라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사릉 주변의 소나무는 모두 한곳으로 향하고 있다. 곧게 위로 자란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이것은 18살에 홀로 되어 영월에 있는 임을 그리다가 여생을 마친 정순왕후의 심회를 알고 나무들이 단종이 있는 영월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운에 살다간 왕비의 슬픈 사연을 소나무도 알았을까? 그 때문에 1999년 사릉에서 재배된 묘목을 단종의 무덤인 영월 장릉에 옮겨 심어서 단종과 정순왕후가 그간의 그리움을 풀고 애틋한 정을 나누도록 했다. 이 소나무를 사람들은 정령송(精靈松)이라 했다. 죽은 영혼이나마 함께 하기를 바라는 우리의 마음이다.
삼촌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사건을 계유정난이라 한다. 그때 단종의 나이 17살 그리고 왕비의 나이 18살이었다. 혼인해서 4년을 살았고,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 왕비는 영월로 떠나는 단종을 영도교까지 나와서 배웅했다. 당시 궁궐의 여인이 나올 수 있는 곳이 이곳까지였다 한다. 영도교에서 헤어진 두 사람은 이승에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영도교를 일러 ‘영원히 이별하는 다리’라 부르기도 했다. 정순왕후는 이후 신분이 격하되어 관비로까지 전락했다. 신숙주가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니, 얼마나 치욕스럽게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세조는 자신이 한 일이지만 신숙주의 언행에 너무 놀라 “신분은 노비지만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정순왕후는 혼자된 왕실의 여인들이 사는 정업원에서 생활했는데, 스님이 되어 머물렀다는 얘기도 있다. 세조가 집을 지어주고자 하나 끝까지 사양하고 시녀들이 동냥을 해 온 밥으로 끼니를 이었다. 생계를 이으려고 제용감에서 심부름하던 시녀의 염색 일을 도와 자줏물을 들이는 일을 했다. 훗날 정순왕후가 염색을 하던 골짜기를 자줏골이라 했고, 샘물은 자주동샘(紫芝洞泉)이라 불렀다. 그때 정순왕후가 단종의 억울한 죽음에 명복을 빌며 빨래를 하면 자연히 자주색으로 염색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렇게 임을 잃은 지 64년이 지난 82세에 세상을 떠나 지금의 사릉에 묻혔다.
숙주나물은 두아채(豆芽菜)라는 이름으로 원나라 때의 문헌인 『거가필용(居家必用)』에 서술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녹두를 깨끗이 씻어서 물에 담가 불린 뒤 항아리에 넣고 물을 끼얹어서 싹이 한 자쯤 자라면 껍질을 씻어내고 뜨거운 물에 데쳐 생강, 소금, 식초, 기름 등을 넣고 무친다"라고 나와 있다. 요리방법이 우리의 숙주나물과 흡사한 점으로 보아 숙주나물은 원나라와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 말에 전래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산림경제』에는 두아채(豆芽菜), 『시의전서』, 『조선 요리 제법』에는 숙주나물,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는 녹두아채(綠豆芽菜) 등 숙주나물은 다양한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다. 숙주나물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조선 시대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숙주(1414~1475)와 관련된 내력이 전한다.
조선 세종 때 신숙주(申叔舟)는 집현전에서 성삼문(成三問)을 비롯한 여러 학자와 학문을 닦았으며 훈민정음(訓民正音) 연구도 도왔다. 세종이 승하하고 즉위한 문종은 병약하여 39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문종의 뒤를 이어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지만 결국 숙부인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하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태를 용납할 수 없었던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들은 단종의 복위를 기도하였으나 거사 전에 발각되어 전원 처형되었다. 이들과 달리 신숙주는 세조 즉위 후에도 세조의 측근으로 정치적 능력을 발휘해 영의정에 오르는 등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백성들은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집현전 학자 출신인 신숙주가 사육신들과는 완연히 다른 행보를 보인 것에 실망하여 미워하기에 이른다. 신의를 져버리고 세조의 측근에서 출세해가는 신숙주를, 다른 나물에 비하여 쉽게 변하는 녹두나물에 빗대어 숙주나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숙주나물은 또한 만두소의 재료로 사용된다. 만두소는 두부, 채소를 짓이겨 함께 섞어서 만든다. 숙주나물도 당연히 짓이겨지게 되는데, 마치 신숙주를 짓이기듯 숙주나물을 짓이겼다고 한다. 요즘 숙주는 나물뿐 아니라 다양한 요리 형태로 쉽게 접하게 되는 식재료이다. 열량은 부족하지만, 숙주의 비타민A의 함량은 콩나물보다 풍부하다.
숙주, 참기름, 다진 마늘, 파, 소금
조리과정조선의 임금 정조는 한양 도성에서 백리 정도 떨어진 현륭원을 매년 한 차례씩 행차했다. 이 때문에 한양에서 경기도 화성의 현륭원에 이르는 길은 효행의 길로 닦아질 수 밖에 없었다. 본래 한양에서 남부지방으로 이동하던 길은 한강을 건넌 후 노량진에서 남태령을 넘어 과천과 수원을 지나는 길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1790년에 첫 행차부터 이용했던 과천을 경유하는 과천길 대신 1795년부터 시흥길을 새로 닦았다. 시흥길은 과천으로 이동하는 길보다 멀었지만, 평지이기 때문에 남태령과 같은 높은 고개를 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었다. 시흥길로 옮기게 된 다른 사연도 전해진다. 장헌세자를 처벌할 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김상로의 형인 김약로의 무덤이 과천에 있기 때문에, 이 무덤을 피하기 위해 과천길을 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안양에 만안교를 축조했고 시흥행궁도 설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시흥은 지금의 경기도 시흥이 아니라 서울특별시 금천구이다. 시흥길과 과천길이 만나는 곳은 안양시 평촌동에 있던 갈뫼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갈산점으로도 불렸으며,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삼남지방으로 가던 길손들이 많이 쉬어 가던 곳이었다.
한강은 배를 연결한 다리를 통해 건넜으며, 그 이남에서는 비교적 규모가 큰 하천을 건너기 위해 새롭게 다리를 부설했다. 한강을 건널 때에는 노량진과 용산나루에 80여 척의 배를 연결해서 배다리를 만들었다.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이동할 때에 안양에 이르러서는 냇물을 건널 수 있는 만안교(萬安橋)를 만들었고, 수원에서 화성으로 이동하는 중간에는 대황교(大皇橋)를 설치하여 하천을 건넜다. 만안교는 1980년 8월에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이동해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으로 이전했다. 대황교는 경기도 수원시와 화성시의 경계 부근에 있었는데, 이 구간을 통과하는 국도 제1호선의 확장 공사 때에 화성시의 현륭원 입구로 옮겨 놓았다.
정조가 화성의 융릉으로 행차하던 구간은 용산나루-배다리-노량나루-장승고개-대방천 다리-대방천들-마장천 다리-문성동(文星洞) 앞길-수성참발소-시흥행궁으로 이어졌다. 시흥행궁에서부터는 국도 제1호선의 노선과 대체로 일치하는 길을 이동했다. 장승고개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있는 고개이고, 대방천교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해당한다. 마장천교는 도림천이고 문성동은 서울특별시 금천구 독산본동이다. 시흥행궁의 위치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5동 831-6번지 일대로 비정된다. 정조는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시흥행궁을 출발해 만안교-안앙참발소-군포천-서원냇다리-청천평-사근평행궁-지지대고개-괴목정교-만석거-영화정-장안문-수원화성으로 이동했다. 안양참발소는 경기도 안양시에, 사근평행궁은 경기도 의왕시 고촌동에 있었다. 지지대고개는 경기도 의왕시와 수원시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고 괴목정교는 지지대고개의 남쪽에 있던 다리이다. 만석거는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에 있는 저수지이다. 영화정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정자동에 있던 정자이고, 장안문은 수원화성의 북문이다. 사근평행궁에서는 낮 시간에 잠시 쉬어갔다. 이 구간은 지금의 국도 제1호선과 일치하지 않는다. 수원시내에서 두 노선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수원시내를 통과하는 지금의 국도 제1호선이 본래의 국도 제1호선 구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성행궁을 출발해 수원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을 지나 현륭원으로 이동했다.
정조는 가마가 지나는 길에 글을 새긴 돌을 이용해 표지석을 길 옆에 세워두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모두 18곳에 표지석이 건립되었다. 표지석이 설치된 18곳은 지지대고개(遲遲峴), 지지대(遲遲臺), 괴목정(槐木亭), 진목정교(眞木亭橋), 만석거(萬石渠), 대유평(大有坪), 관길야(觀吉野), 영화정(迎華亭), 매교(梅橋), 상류천(上柳川), 하류천(下柳川), 황교(皇橋), 옹봉(甕峯), 대황교(大皇橋), 유첨고개(逌瞻峴), 유근다리(逌覲橋), 만년제(萬年堤), 안녕리(安寧里) 등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전국으로 향하던 간선도로가 한양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뻗어 있었다. 6개 방향으로 뻗었던 대로는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던 길이었다. 한양에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가 있는 남부지방으로 향하던 길은 삼남지방으로 가는 길이라는 의미에서 삼남로 또는 삼남대로라 불리기도 했다. 삼남로는 조선시대 육로 교통의 중심축이었으며, 이 길을 통해 삼남지방의 물산이 중앙으로 이동하고 젊은 선비들은 과거를 치르기 위해 한양으로 올 수 있었다. 한양에 접해 있던 경기도를 통과하던 길은 경기도 삼남길이라는 이름으로 근래에 다시 조명되고 있다.
경기도 삼남길 가운데 제2길이 인덕원 옛길이다. 인덕원(仁德院)은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에 있던 숙박 기능을 갖춘 편의시설이었다. 조선시대에 한양에 살던 환관들이 이곳으로 살면서 동네 주민들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데에서 인덕이라는 이름이 생겨났으며, 이 마을에는 여행중인 관리들에게 숙박 기능을 제공하던 원이 있었다. 환관이란 궁중에서 임금을 보좌하던 내시를 일컫는다. 이로 인해 인덕원은 내시마을이라 불리기도 했다.
인덕원은 과천과 안양, 의왕을 잇는 경기 남부의 교통 요지로 매우 유서 깊은 곳이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도 가운데 『해동지도』에는 인덕원평(仁德院坪), 『1872년 지방지도』에는 인덕원천(仁德院川), 『대동여지도』에는 인덕원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에서는 과천현 북쪽의 남태령을 지나 과천을 경유하여 인덕원을 지나면 수원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표기되어 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면서 인덕원에는 자연발생적으로 주막이나 상점들이 등장했다. 인덕원은 조선시대에 사방을 연결하는 주요한 교통 요지였으며, 현대에도 중요한 교통 결절점으로 기능하고 있다. 인덕원 터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인덕원역 6번 출구 근처의 이면도로에 인덕원 터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세조실록』 9권(1457년)에는 인덕원 일대의 지형에 대한 평가가 있다. 인덕원 동쪽에 이르러 주변의 산세를 살펴보니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용과 호랑이의 기운이 자못 아름답다며 풍수상으로도 매우 길지라는 평가를 하였다. 현대의 풍수가들도 인덕원 일대가 배산임수의 길지이며, 부의 기운까지 가진 상업의 요지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인덕원 옛길은 인덕원 터에서 학의천을 지나 백운호수에 이르는 구간을 포함한다.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의 새마을공원 옆에는 인덕원 옛길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인덕원 터 표지석과 인덕원 옛길 표지석은 100여 m 떨어져 있다. 1999년 10월에 설치된 인덕원 옛길 표지석의 뒷면에는 정조가 화성 현륭원으로 능행을 할 때 인덕원에 머무르면서 주변 고을 백성들의 민원을 듣고 그들의 생활상을 보살폈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는 12번의 능행 가운데 6차례에 걸쳐 인덕원 옛길을 따라 이동했다. 『정조실록』 37권(1793년)에는 정조가 현륭원에 가던 길에 과천에서 낮 시간 동안 머물렀으며, 오후에 인덕원 들녘을 지니다 길가에 있던 남성들을 불러서 위로하며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지금 인덕원은 경기도 과천시와 군포시, 수원시 등지로 향하는 도로의 분기점이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북쪽의 시흥군 과천면, 동쪽으로는 시흥군 일왕면, 남쪽으로는 수원군 등지의 교통로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1950년 6.25 전쟁 때만 해도 인덕원 일대는 소나 말이 끄는 마차가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았고 포장도 되지 않아 사람이 다니기도 힘든 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인덕원 사람들이 한양의 영등포나 남대문 등지에 나무를 팔러 가던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인덕원 일대의 주민들이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관악산, 청계산 등지에서 나무 장작을 마련하여 안양이나 영등포의 시장에 팔았다. 소 등에 장작을 싣거나 지게에 짊어지고 밤 12-1시 사이에 인덕원을 출발하면 남태령 고개를 넘어 한양 도성에 도착해 장작을 팔 수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남태령 고갯길의 폭이 넓어지면서 우마차를 이용해 장작을 운송했다.
단종은 1448년(세종 30)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1450년(문종 즉위) 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세자가 되었다. 단종은 12세가 되던 1452년(문종 2) 5월에 문종이 죽자 곧 바로 왕이 되었다. 12살이라는 아주 어린 나이에 왕이 된 단종은 왕이 된 이듬해에 숙부인 수양대군이 일으켰던 정란(靖亂) 때문에 아무런 힘과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왕위를 빼앗기면서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창덕궁 대조전에서 유배 교서를 받은 단종은 한양의 돈화문에서 출발하여 남한강 물길을 거슬러 배를 타고 5일 만에 영월의 입구에 다다랐다. 배에서 내린 단종은 육로를 따라 100리 길을 걸어 청령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이동한 구간이 단종 유배길이다. 유배 생활을 하던 1457년 여름에 비가 많이 내려 서강이 범람하고 청령포가 물에 잠기자 단종은 두어 달 만에 영월 부사의 객사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해 10월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했다.
남한강을 따라 이동할 때에는 경기도 여주시 이포나루에 도착해 강을 건넌 후 샘물에서 물을 마시고 갔다는 데에서 어수정(御水井)이라는 이름을 가진 우물이 생겨났다. 이 우물은 여주시 대신면 상구리에 있으며 향토유적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여주에서 강원도 원주시를 지나 영월군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치악재와 싸리재를 거쳐야 한다. 치악재는 원주 시가지를 지나 신림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며 싸리재는 신림면에서 영월군 주천면으로 가기 위해 넘어야 했던 고개이다. 싸리재는 단종의 유배 행렬이 통과했던 옛길로 잘 알려져 있다. 싸리재를 넘은 행렬은 영월군 주천면에 당도했다. 주천면에서 한반도면을 거쳐 서강이 둘러 휘감는 청령포에 도착한 것이다. 싸리재를 지나 솔치재를 넘어 주천면에 다다르고 주천면에서 군등치를 넘어 한반도면으로 진입했다. 청령포에 진입하기 전에는 배일치라는 고개를 넘었다.
군등치에는 어린 단종의 한이 깊게 서려 있다고 한다. 고갯마루에서 내려다 본 풍경은 매우 아름답지만, 유배길에 올랐던 단종의 슬픔과 한을 이해하면 애잔한 마음이 들 것이다. 군등치는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에서 한반도면 신천리로 이어지는 길로, 서강에 합류하는 평창강의 강변을 깎아지른 듯한 벼랑길로 굽이굽이 이어진다. 이 고개는 단종이 유배길에 넘었던 많은 고개 가운데 가장 험준한 고개였다고 한다. 군등치라는 지명은 호송 책임자였던 왕방연이 노산군인 단종이 올랐으니 군등치(君登峙)라 부르자는 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양에서 영월까지 오는 유배길이 힘들고 피로해 병이 날 만큼 지친 단종은 주천면에 도착하여 느티나무 그늘에서 무더운 삼복더위의 불볕을 피했다. 힘든 길을 이동하던 단종이 이 느티나무의 그늘 아래에서 잠시 쉬어갔다는 데에서 이곳은 느티나무 쉼터로 불리게 되었으며, 공원 입구에는 '쉼터'라고 새긴 표지석이 있다.
주천면에서 군등치를 넘어 청령포로 향하던 영월지방의 유배길은 현대에 와서 3개의 구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단종에게 내린 사약을 직접 들고 가던 신하들이 울부짖으며 걸어갔던 슬픈 통곡의 길, 죽음으로써 단종을 향한 의리를 지키고자 했던 사육신과 금성대군을 비롯하여 잘못된 것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관직을 내 던지고 임금과 의리를 지켰던 생육신의 의지가 담긴 충절의 길, 죽음을 무릅쓰고 임금의 시신을 수습하여 선산에 모셨던 영월의 호장(戶長) 엄흥도가 지켜낸 인륜의 길 등이다.
육로를 통해 청령포까지 이어지던 단종 유배길은 원주시 신림면에서부터 국가지원지방도 88호선의 노선과 대체로 일치한다. 싸리재를 통과하는 구간은 신림터널이 개통되었고 솔치재에는 솔치터널이 뚫렸다. 배일치에는 배일치터널이 통과한다. 지금은 자동차를 타고 서울에서 청령포까지 3시간 정도면 이동할 수 있지만, 어린 단종이 이동했던 유배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백두산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은 강원도 태백 근처에서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룬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상식은 산줄기가 높고 험준할 경우, 그곳은 대체로 산 건넛마을과 행정구역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경상북도 영주시의 북부에는 험준한 백두대간을 넘어 산지의 반대쪽 마을까지를 영주시 행정구역으로 품은 곳이 있다.
소백산 자락에 연결되는 영주시에서 북쪽의 충청북도 단양군으로 넘어가는 길은 크게 3개가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고개는 죽령이다. 죽령의 북쪽은 충청북도이고 반대편은 경상북도이다. 죽령은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소백산 자락을 넘는 대표적인 고갯길이다. 죽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사람들의 통행이 많지 않은 험준한 고개 두 개가 더 있다. 하나는 마구령(820m)이고 다른 하나는 고치령(770m)이다. 이곳 주민들은 마구령을 메기재라 부르고, 고치령을 고치재라 부른다. 『대동여지도』에는 소백산의 동쪽 능선에 각각 마아령(馬兒岺)과 곶적령(串赤岺)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들 두 고개는 예로부터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험준한 고갯길로 유명했으며 경상도·충청도·강원도를 이어주는 매개 역할을 했다. 이들 두 고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사람과 물자가 오가던 길이며, 보부상들의 애환도 안고 있는 영남지방의 옛길이다. 백두대간의 북쪽에 있는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에서 동남쪽으로 도로를 따라가면 마구령을 만나고, 의풍리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면 고치령을 만난다.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는 이들 두 고개보다 조금 더 북쪽을 통과하는데, 도 경계가 마구령이나 고치령보다 험준한 산줄기는 아니다.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의 양백지역에 있는 마구령은 장사꾼들이 말을 몰고 다녔던 고개라는 데에서 이름이 생겨났다. 매기재라는 이름은 고개를 오르내리는 경사가 심해 논을 매는 것처럼 힘들다는 데에서 유래했다.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와 임곡리를 연결하는 마구령 고갯길은 남한강의 큰 하항이었던 단양의 영춘과 영주의 부석장을 오가던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넘던 길이다. 고갯길 남쪽의 봉황산 기슭에는 부석사가 있다. 마구령 북쪽의 남대리는 영남지방에서 유일하게 한강 수계에 포함되는 마을이다. 즉 영주시 입장에서는 험준한 고개 넘은 곳에도 우리 동네가 있는 셈이다.
남대리에서 마구령으로 올라가는 산길의 입구에는 주막거리가 있는데, 이는 영춘 사람들이 부석장을 오갈 때 들러서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예전에는 주막거리에 사람들이 줄을 섰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다녔다. 강원도 영월군의 김삿갓면에 살던 사람들도 마구령을 넘어 부석장으로 가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김삿갓면은 본래 하동면이었다. 주막거리가 있는 마을에는 영춘·하동·부석이라는 지명이 쓰인 푯말이 남아 있었다. 각각 충청도·강원도·경상도의 마을 이름이다.
고치령은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에서 남쪽으로 뻗은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면 만나게 된다. 이 고개는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와 좌석리를 연결한다. 고치령은 태백산이 끝나고 소백산이 시작하는 구간이다. 이 고개는 보부상이나 장을 보러 다니던 백성들만 이용하던 길이 아니었다. 고치령은 단종과 금성대군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이곳에는 태백산 산신령이 된 단종과 소백산 산신령이 된 금성대군을 모신 산신각이 있다.
세종대왕의 아들인 금성대군은 사육신들과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유배지를 떠돌다가 순흥도호부로 옮기면서 고치령과 인연을 맺었다. 단종이 유배되었던 영월과 금성대군이 있던 순흥은 고치령을 사이에 두고 있다. 금성대군이 밀사를 파견하여 영월의 청령포까지 소식을 전했고 조카인 단종이 보고 싶으면 야밤에 청령포에 다녀왔다고 한다. 즉 고치령은 금성대군과 밀사들이 오갔던 비밀의 길이기도 하다. 순흥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으로, 고치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순흥면의 북쪽이 단산면이고 단산면의 북쪽이 부석면으로 연결된다.
고치령 옛길과 마구령 옛길 가운데 마구령 옛길은 자동차 통행이 가능한 도로로 개수되어, 옛길의 정취를 느끼기 쉽지는 않다. 마구령을 넘는 도로는 지방도 제935호선으로 지정되어 있다. 자동차 도로는 여전히 험하고 좁게 만들어져 있어 대형버스의 통행은 불가능하다. 마구령을 넘는 고갯길을 대신해 빠르게 통과할 수 있는 마구령 터널 공사가 2016년부터 시작되었다.
칠성루(七星樓)는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용상리 449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칠성루와 인접해 있는 휴계재사(休溪齋舍)와 함께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74호로 지정되어 있다. 휴계재사의 부속 정자인 칠성루는 용상리 칠성산(七星山) 아래에 있다. 이곳은 옥천전씨(沃川全氏) 영주 입향조인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1425~1521)이 단종이 폐위되자 비분을 참지 못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농사를 지으며 한가롭게 지내던 곳이다. 칠성루는 전희철의 5대손 설월당(雪月堂) 전익희(全益禧:1598~1659)가 전희철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1631년(인조 9)에 지었다고 전한다.
전희철은 본관이 옥천으로, 자는 원명(原明), 호는 휴계이다. 옥천군 문시랑리(文侍郞里)에서 출생하였다. 할아버지는 통례문봉례(通禮門奉禮) 전귀덕(全貴德)이고, 아버지는 부녹사(副錄事) 전례(全禮)이며, 어머니는 상산김씨(商山金氏)로 부정(副正) 김상보(金尙保)의 딸이다. 성품이 본래 강직하고 검약한 생활을 하였다.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세종 20년간(1438)에 무과에 급제하여 사포서별제를 지냈으며, 문종과 단종 때에 사직(司直)을 지냈다. 특히 문종이 공정하고 성실한 국사 처리와 높은 인품을 겸비한 전희철을 총애하여 벼슬이 상장군(上將軍)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벼슬을 버리고 옥천에서 은거하다가 1457년(세조 3)에 가솔을 이끌고 영주 휴천리(休川里)로 옮겨 갔다. 휴천으로 옮겨간 그는 농사일을 하는 한편 당대의 명사이자 천문학자인 김담(金淡:1416~1464) 등과 교유하면서 시를 짓고 춘추를 강명하는 일을 즐거움으로 삼고 지냈다. 그의 호인 휴계도 이때 지은 것이다. 1457년 6월에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단(壇)을 쌓고 밤마다 관대를 갖추어 영월을 향하여 절하며 단종의 평안을 빌었다. 이후 단종의 죽음 소식을 듣고 나서는 3년간 상복을 입고 부모의 상을 치르는 것처럼 지냈다.
죽기 직전에 자손들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지은 시문을 불살랐으며, 자손들에게, “상왕의 능이 영월 동을지(冬乙旨)에 있으니 해마다 한 차례씩은 참배해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중종 연간에 80세 이상의 노인에게 주는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부호군(通政大夫副護軍)에 올랐다. 97세로 타계하여 장수를 누렸으며, 영천군 동쪽 칠성산 용동에 장사지냈다. 김담 외에도 박원효(朴元孝)·김철우(金哲友)·송자윤(宋子淪)·문경동(文敬仝)·이계양(李繼陽) 등과 교유하였다. 전희철의 후손과 영남유림은 단종에 대한 그의 충절을 추모하고자 방산서원(方山書院)을 건립하여 그를 배향하였다.
칠성루란 누각의 이름은 단종 유배와 관련이 깊다. 단종의 유배지 영월(寧越)에는 백월산(百越山)이 있는데, 북극성이 머무는 장소였다. 전희철은 밤마다 의관을 갖추고 북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는데, 북극성을 중심으로 돈다는 뜻이었다. 세월이 흘러 하늘의 운수가 순환하여 단종이 복위되고 여러 신하들이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받드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전희철의 묘소는 멀리 떨어진 영주의 궁벽한 산중에 있어 제사를 받들 순 없지만 그의 정령은 기성(箕星)과 미성(尾星)을 살펴보면서 구름과 무지개를 좇아 태백산 비등곡(飛磴谷)을 왕래할 것으로 후손들은 믿었다. 즉 살아서 칠성(七星)을 받들고 죽어서는 칠성산에 묻힌 전희철의 사적에서 칠성루란 명칭이 유래하였다.
칠성루는 앞쪽에 툇마루와 난간을 두어 누각형식으로 꾸민 건물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기와집이다. 정면 4칸 중 가운데에 2칸 규모의 대청을 놓았고, 그 좌우에 대청으로 연결된 마루 1칸과 반칸 규모의 온돌방이 놓여 있다. 대청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자연석을 2단으로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을 다듬은 덤벙주초를 놓았고, 기둥은 정면 중앙 2칸은 둥근 원주이고 양쪽 끝에는 네모난 각주를 세웠다. 전열주는 앞쪽의 낮은 축대 위에 누하주를 두고 기둥 밖으로는 마루를 돌출시켜 계자각(鷄子脚) 난간을 두른 헌함(軒檻)을 설치하였다. 상부가구는 5량가인데, 이중량 위에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놓아 마루대 및 장혀를 받았는데, 기둥머리 부분의 구조양식이 조선 후기에서도 초기의 양식으로 특이하다. 좌우에 돌다리를 놓아 누각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하였다.
‘칠성루(七星樓)’라는 현판이 칠성루 정면에 걸려 있는데, 1849년(헌종 15)에 제작된 것으로, 누구의 글씨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890년에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1813~1896)가 지은 「칠성루기(七星樓記)」가 걸려 있으며, 이밖에도 후손 전병용(全柄用)이 지은 「칠성루중수운(七星樓重修韻)」과 문사들의 시문이 게시되어 있다. 칠성루 옆에 인접해 있는 휴계재사는 전희철의 묘소에 제향하는 재사로 전희철의 증손인 망일당(望日堂) 전개(全漑)가 1576년(선조 9)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휴계재사 상량문에는 1696년(숙종 22)∼1697년 사이에 건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786년(정조 10)에 전구(全球:1724~1806)가 작성한 「용동재사중수기(龍洞齋舍重修記)」가 휴계재사 마루벽에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1786년에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1890년에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1813~1896)가 지은 「칠성루기(七星樓記)」에 의하면 용산의 산등 아래에 옛날 재사가 있었는데 습기가 차고 비좁았기 때문에 원근의 후손들이 모이기에 좁았다. 그래서 1876년(고종 13)에 묘소 아래로 옮겼다고 한다. 그 후 1886년(고종 23)에 또 그 규모를 넓혀서 그 오른쪽에 땅을 사서 누(樓)를 세워 동서 양쪽에는 방을 만들고 가운에는 당(堂)을 만들었다고 한다. 누에는 ‘칠성루(七星樓)’라는 현판을 달았다.
휴계재사는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이며 평면이 ㅁ자형을 이루고 있는 건물이다. 정면 중앙의 대문칸을 들어서면 안마당이 있고, 그 북쪽에 3통간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각각 방 2칸, 부엌 2칸, 고방 1칸이 대칭적으로 연접 배치되어 있다. 대문칸의 좌우에는 온돌방과 마구간이 각 1칸씩 자리 잡고 있다. 자연석을 다소 높게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을 다듬은 덤벙주초를 놓았으며, 대청 앞면과 뒷면의 중심 칸에는 4개의 높고 둥근 원주를 사용하였고 나머지는 네모난 각주를 세웠다. 대청의 상부가구는 3량가로 대량 위에 제형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얹어서 지붕을 높게 처리하였으며, 양 익사(翼舍)와 문간채의 순으로 맞배지붕의 높이를 낮게 처리하여 외관상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칠성루에는 군수 박용빈(朴容斌:1797~)의 「제칠성루(題七星樓)」라는 칠성루에 대해 읊은 시가 게판되어 있는데, 당시 칠성루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가 있다.
공무 보던 여가 이날에 이 당을 지나가니
숲 기운에 아득함 더하여 이 여름에 대자리가 서늘하네
때늦은 골짜기에 용이 숨어드는 듯 구름 빛 찬연하고
비 갠 봉우리는 옥을 쌓아 놓은 듯 돌에는 향기가 인다
꽃동산엔 도리화 삼춘(三春)이 좋을시고
묘소로 가는 길 따라 소나무 가래나무 백세토록 자랐네
떠나간 후 진흙의 기러기 자취 알 바 아니나
주인과 더불어 한가로이 시 구절 주고받으며 술잔을 드네
박용빈이 군수로서 공무 중 칠성루를 지나다 잠깐 들러 칠성루의 풍광을 묘사한 시이다. 칠성루를 둘러싼 울창한 여름의 숲이 칠성루를 서늘하게 가려주고, 골짜기에는 용이 숨어 있듯 구름 빛이 찬연하고 비 갠 봉우리에는 옥이 쌓여 있는지 돌에서조차 향기가 나는 듯하다고 하였다. 정원에는 꽃이 만발하여 무르익은 봄의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내고, 묘소로 가는 길에는 소나무와 가래나무가 오랜 세월에 큰 키를 자랑하고 있다. 인생은 마치 진흙 위에 앉았다가 떠나가는 기러기 발자취와 같이 허무한 것이지만 지난 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고 지금 이 순간 한가하게 시를 읊어 주인이 술상을 차려 대접한 정성에 보답한다라는 흥취가 담겨 있다.
죽계천은 소백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다가 바위가 병풍처럼 둘려 있는 곳에서 깊은 못을 만들어낸다. “백운동 소(沼)”라 불리는 작은 못이다. 주세붕이 말한 ‘소가 있는 숙수사 옛터’는 바로 이 못을 의미한다. 소 옆에 있었던 숙수사는 통일신라 때 세워진 사찰로 전국에서 참배자들이 찾아오던 거찰이었다. 주세붕이 갔을 때는 이미 불타 없어지고 당간지주만 남아 있었다. 거찰이던 숙수사가 불탄 것은 1457년이었다.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세조로 즉위한 지 3년이 되는 해로, 당시 순흥에는 수양대군의 동생인 금성대군이 유배되어 있었다.
금성대군은 1452년 단종이 즉위할 때 형인 수양대군과 함께 왕을 보필할 것을 약속한 세종의 여섯 번째 아들이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453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위하는 김종서를 제거하고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다른 형제들과 달리 조카 단종의 편에서 모반을 꾀하다 유배되었다. 1455년 수양대군이 결국 왕위를 선양 받게 되자 이듬해인 1456년, 성삼문과 박팽년 등의 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자 금성대군은 순흥으로 이배되었고 단종은 산 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내졌다.
금성대군은 순흥에서 다시 한번 모반을 꾀하였다. 1457년 순흥부 부사로 있던 이보흠(李甫欽)과 모의해 고을의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고을의 선비들에게 격문을 돌려 단종 복위를 계획한 것이다. 하지만 거사 전 관노의 고발로 계획은 무산되었고, 격노한 세조는 관군을 보내 순흥도호부를 혁파하였다. 그때 숙수사도 불타 없어지고, 모반에 참여한 순흥 사림들은 관군의 칼에 목숨을 잃었고 그들의 시신은 숙수사 옆의 소(沼)에 수장(水葬)되었다.
『장릉지(莊陵誌)』는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추방된 단종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그 책에는 모반사건으로 사약을 받기 전 금성대군의 행적이 남겨져 있다. 순흥을 진압한 관군에 의해 안동 감옥에 갇힌 금성대군은 다음날 옷도 입지 않은 채 도주해 버렸다. 온 고을이 발칵 뒤집혀 수색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는데, 얼마 뒤 스스로 걸어와 관아 밖에서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아무리 수가 많아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구나. 우리 임금께서 영월에 계시는데 내가 정말 도망이나 칠 사람 같더냐?” 하였다. 그리고 의관을 정제하고 북향하여 통곡한 뒤 네 번 절하고 사약을 받았다고 한다.
금성대군이 살던 객관 앞에 은행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말라 죽더니 금성대군이 화를 입고 고을도 훼파되었다. 수백 년 뒤에 말라 죽었던 줄기에서 다시 싹이 돋고 제법 무성하게 그늘을 드리웠는데, 금성대군의 신원이 회복되던 시기였다. 금성대군이 순흥부 사족들과 함께 모반을 계획하던 숙수사 터에는 소수서원이 세워졌다. 그리고 소수서원 맞은편에는 금성대군의 충절을 기리는 금성대군신단이 만들어졌다. 한편 죽계천이 흘러내려 가는 영주시 안정면 동촌1리는 ‘피끝마을’이라 불리는데, 죽임을 당한 선비들의 피가 죽계를 타고 10여 리를 흘러 이곳에서 멈추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주세붕은 소가 있는 죽계천 바위에 붉은 글씨로 ‘경(敬)’자를 새겨 넣으면서 원혼을 달래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화양정(華陽亭)은 서울특별시 광진구 화양동 110번지 일대에 있었던 정자이다. 화양정의 내력을 잘 보여주는 기록인 유사눌(柳思訥)이 쓴 「화양정기(華陽亭記)」에 의하면 화양정은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후 말목장으로 만든 넓은 들판의 살곶이벌에 세운 정자이다. 1432년(세종 14) 세종이 낙천정(樂天亭) 북쪽 언덕에 정자를 짓게 하여 목장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사복시(司僕寺)에 명하였다. 유사눌이 『주서(周書)』 가운데 ‘말을 화산 남쪽으로 돌려보낸다[歸馬于華山之陽]’라는 글귀의 뜻에 따라 정자 이름을 화양정(華陽亭)이라 붙였다. 여기서 화산(華山)은 즉 삼각산을 가리키며, 삼각산 남쪽의 양지바른 곳이 화양(華陽)으로, 여기에서 말을 기른다는 뜻이다. 이 지역이 즉 태조 때 점지한 살곶이벌이다. 살곶이벌의 목장의 범위는 동북쪽으로는 아차산 줄기, 북쪽으로는 월릉교 부근의 중랑포(中浪浦), 서쪽으로는 동대문구 답십리동에서 살곶이 다리[箭串橋], 남쪽으로는 한강을 경계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계가 「사복시살곶이목장지도(司僕寺箭串牧場圖)」에 잘 나타나 있다.
세종이 화양에 정자를 지은 목적은 첫째, 군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수단인 말의 양육 상태를 관리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둘째, 수천 마리의 말들이 넓은 들판에서 자연스럽게 뛰어놀게 하여 한편으론 그곳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말들의 경치를 감상하고자 한 뜻도 있었다.
1911년 7월 21일에 화양정에 벼락이 떨어져 정자의 모습은 사라졌으나 당시의 목장 모습을 그린 「진헌마정색도(進獻馬正色圖)」를 통해 화양정의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다. 「진헌마정색도」는 조선시대 전국의 목장을 그린 지도책인 『목장지도(牧場地圖)』에 실려 있다. 이 지도책 첫 장에 나오는 「진헌마정색도」에 보이는 화양정은 사각형 형태의 큰 정자로,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사각형의 돌기둥을 기단 위에 설치하고 정자 위에는 사각형의 나무기둥을 세웠다. 정자에 문을 달지 않은 개방형으로 난간을 둘렀으며,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내부가 100여 칸이 되었다고 하여 무척 큰 정자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화양정은 일명 회행정(回行亭)이라고도 한다. 이와 관련해서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첫째는 조선 초기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준 단종과 관련된 일화이고, 둘째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궁궐에서 쫓겨난 명성황후와 관련된 일화이다. 단종과 관련된 설화는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단종이 1457년(세조 3) 6월 21일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귀양을 떠나는데, 이때 세조가 내시를 화양정까지 보내 노산군을 전송토록 하였다. 노산군이 화양정에 도착하여 잠시 쉬면서 ‘성삼문(成三問)에게 모의를 듣고도 이를 말리지 않았으니 나의 죄다.’라며 눈물을 지었다. 그리곤 화양정에서 쉬면서 입속으로 ‘화양정, 화양정’하고 중얼거리며 다시 돌아올 수 있길 기원하며 귀양길을 떠났다.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영월의 관풍헌(觀風軒)에서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이 노산군이 영월에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정자를 회행정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두 번째 일화는 1882년(고종 19) 6월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상궁 옷으로 갈아입고 창덕궁을 빠져나가 경기도 장호원으로 피신할 때 광나루로 가는 도중에 화양정에서 잠시 쉬어갔다고 한다. 이후에 명성황후가 창덕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자 사람들이 ‘정말 화양정이 회양정이 되었다.’라며 고개를 끄덕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초기에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살곶이벌의 풍경을 「살곶이들판심방[箭郊尋訪]」이라는 기록으로 남기고, 이곳을 서울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 10곳 중 한 곳으로 손꼽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조의 정자 중 화양정 항목에 양성지(梁誠之)가 살곶이벌의 푸른 들판에서 봄소풍을 하며 이곳의 풍경을 기록으로 남겼다.
현재 화양정은 없으나 화양정이 있던 자리에 화양정터 표석이 남아 있다. 그 주변에는 약 700여 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군이 남아 있는데, 화양동느티나무로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양정 일대에는 한양대학교와 건국대학교를 비롯한 수많은 민가와 빌딩들이 들어서 있어 옛 정취를 느낄 수 없다. 다만 조선시대의 목장의 말들이 마셨던 물이 지금 건국대학교에 일감호(一鑑湖)로 남아 있으며, 마조단(馬祖壇) 표석이 한양대 중앙도서관 백남학술자료관 옆 화단에 있다. 마조단은 말의 무병과 말의 번식을 위해 말의 조상에게 기원하던 제단으로 살곶이목장에 있었다. 마조제는 왕실목장인 살곶이목장 뿐만 아니라 전국의 목장에 열렸다. 한양대 앞에 있는 살곶이 다리는 이곳이 왕실목장 살곶이벌이 있었던 흔적의 상징이다. 또한 면목동이나 마장동, 화양동과 같은 지명이 이 일대에 화양정과 말목장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단종의 애달픈 일생을 그린 마당극 형태의 놀이다. 1982년 제16회 단종제(端宗祭) 때부터 재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단종은 열두 살에 아버지를 잃고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된다. 그러나 2년 만에 삼촌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를 떠나는데, 그곳에서도 얼마 살지 못하고 사약을 받은 후 짧은 일생을 마친다. 세조는 죽은 후에도 단종의 육신을 거두지 못하게 한다.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라는 엄명까지 내린다. 결국, 시체가 동강 위에 떠다니는 것을 보고, 엄홍도라는 마을의 관리가 몰래 현재의 장릉(莊陵) 자리에 장사 지내 주었다. 백성들은 앉은 자리마다 단종의 안타까운 죽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고, 그러던 중 단종의 띠를 따져보는 데서부터 놀이가 비롯됐다고 전한다.
1. 단종은 신유생(辛酉生)이니 닭띠다. 닭띠 사람이 말하기를 “닭띠의 운명이 그렇게 기구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이상하다.”라고 하면서 닭띠자랑을 늘어놓는다. “의관을 단정히 하는 것은 예의 덕이요, 어김없이 때를 알리는 것은 믿음의 덕이요,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는 것은 어진 덕이요, 함께 경계하고 지켜내는 것은 지혜의 덕이요,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음은 의로움의 덕이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 말을 긍정하며 단종을 동정한다.
2. 장황한 닭띠 자랑이 지겨웠던 소띠 사람이 “띠는 소띠가 제일이지. 우리는 먹어야 살고, 먹자니, 농사를 지어야 하고, 농사를 짓자니 소의 노력 없이는 할 수 없지. 그뿐인가. 소는 우리에게 고기를 먹게 해주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어디 있겠는가.” 한다.
3. 이때 개띠 사람이 말을 받는다. “개는 집을 지켜주는 것은 물론이요,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기는 개를 따를 동물이 없지. 만약 개의 충성심을 본받았다면 단종도 저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네. 인간은 마땅히 개를 본받아야지.”라고 주장한다.
4. 말띠도 그냥 있지 않는다. “주인 알아보기야 말이 제일이지. 말은 어떠한 경우도 사람을 밟지 않는 의리가 있다네. 그 뿐만 아니라 전쟁터에서 나라를 지키는 데 말의 공을 생각하면 어찌 다른 동물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한다.
5. 그러자 범띠인 사람이 우습다는 듯이 말 참견을 한다. “그야 동물의 왕은 호랑이지, 쥐ㆍ닭ㆍ소ㆍ말 따위가 큰소리 칠 수 있겠나.”
6. 그 말을 듣고 용띠 사람이 점잖게 나선다. “하늘에 있으니 우매한 인간들의 눈에 뜨이지 아니하며, 비를 내려주고 바람을 일으키는 용이 제일 아니겠는가?”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분위기가 무르익어 간다.
영월 띠놀이는 말과 개와 용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세조의 왕위찬탈에 대한 백성들의 비판적 시각을 우화로 엮어낸 민중극이다. 술자리에서 띠놀이를 자주 하게 되면서, 동물 탈을 만들어 쓰고 노래를 부르며 농악에 맞추어 흥겹게 노는 마당놀이로 발전ㆍ계승됐다.
『월중도(越中圖)』는 강원도 영월(寧越)로 유배 간 단종(端宗)의 자취와 충신들의 절의가 깃든 장소를 8폭의 그림으로 제작한 화첩이다. 월중은 옛 영월의 별명이다. 지도의 방식을 따라 산천과 건물을 그려졌고, 각각의 이름도 표시되어 있다. 8폭의 그림 우측 상단에는 해당 지역의 정보도 기록되어 있다. 그림의 내용과 수준을 고려했을 때 왕실에서 보관하고 볼 목적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월중도』 제작은 18세기 단종과 충의와 절의를 지킨 신하들을 복권시키고 이들과 관련된 유적을 정비한 것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숙종은 단종과 충성을 다한 신하들을 복권시켰고, 영조와 정조는 이들의 행적과 관련이 깊은 유적들을 정비하였다. 특히, 정조 15년(1791)에 단종의 유적에 관한 기록이 전반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하였는데, 『월중도』 제작은 대략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2007년 12월 31일 보물 제1536호로 지정되었으며, 가로 33.5cm, 세로 36cm 크기이다.
단종이 유배를 간 강원도 영월 인근에는 단종과 그의 충신과 관련된 여러 일화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중에서도 단종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와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嚴興道)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단종은 수양대군과 주변 인물들의 정세에 밀려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집현적 학자를 비롯한 신하들이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기도 전에 계획이 누설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이 사건으로 이와 관련된 많은 인물들이 사형에 처하였다. 그리고 단종도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1457년 6월에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고 영월로 유배되었다. 이후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다시 강봉되었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에 단종의 죽음과 관련해서 한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어 울적한 회포를 달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신하가 세조의 명을 받아 사약을 가지고 왔다가 차마 단종에게 사약을 전할 수 없어서 청령포 앞 물 위에 사약을 던지고 자신도 빠져 죽었다. 그 이후에도 여러 명의 신하가 단종에게 사약을 전하러 왔다가 같은 방법으로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 연달아 신하가 죽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은 단종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죄 없는 신하들의 아까운 목숨을 잃게 하느니,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낫겠구나.” 그리하여 단종은 더 이상 신하들이 죽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였다.
단종이 죽은 후 사람들은 세조에게 후환을 당할 것이 두려워 아무도 그 시신을 돌보지 않았다. 세조가 어느 사람이든지 단종의 시체를 건드리면 사약을 내린다고 했기 때문이다. 강원도 영월(寧越)의 호장(戶長)이었던 엄흥도만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치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때는 겨울이어서 눈이 많이 내리는 바람에 장례를 치를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하였다. 한참을 헤매고 있던 차에 노루가 한 마리 앉아 있는 곳을 발견했다. 노루는 엄흥도를 보고 놀라서 후다닥 자리를 피해 달아났다. 엄흥도는 노루가 앉아 있던 자리에 눈이 녹아 있는 것을 보고 그곳에서 장사를 치렀다. 이후 숙종이 엄흥도의 충절을 기려 충신으로 봉하였다.
매년 강원도 영월군에서 열리고 있는 단종제례(端宗祭禮)는 전승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 4월 22일에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다. 단종제례는 중종 11년(1516)에 단종의 넋을 위로하고자 우승지 신상(申鏛)이 임금의 명을 받아 제사를 지내면서 시작되었다. 영월군에서는 1967년부터 제1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영월 장릉 일원에서 단종제례를 개최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영월문화재단에서는 일반 시민들에게도 우리고유의 전통문화를 선보이기 위해 단종문화제를 열고 단종국장재현, 산릉제례 어가행렬 등 다양한 체험을 제공하고 있다. 단종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가 폐위를 당하고 영월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후대에 단종이 복권되면서 그와 관련된 행적들이 다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었다. 이렇듯 단종과 관련된 기억들은 『영월도』와 같은 기록물뿐만 아니라 다양한 행사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전해오는 이야기 가운데 도깨비와 관련된 것들이 꽤 있다. 지역마다 나름대로 독특한 유형의 도깨비 이야기가 전해오는 데 영월 지역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히 조선시대 비운의 인물인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오면서 지역사회에 이러한 이야기가 많아졌는데 영월 능마을에 전해오는 이 놀이는 단종을 모티브로 시작되었다.
놀이가 전해오는 능마을은 영월읍 영흥1리와 2리에 위치해 있다. 능마을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능이 있는 마을이며, 그 능의 주인은 바로 단종이다. 숙종 무렵 공식적인 죽음으로 인정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단종의 무덤은 마을 주민들이 암암리에 조정의 눈을 피해 살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마을에 사는 노인이 나무를 하러 산을 찾았다가 나무를 찍으려고 하는데 도깨비들이 몰려왔다. 도깨비들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나무를 베어가려고 하느냐며 노인에게 호통을 쳤다. 그러더니 도깨비들끼리 혹떼기 놀이를 하였다. 이후 노인이 단종의 무덤 근처에서 도깨비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이 마을에 퍼지게 되었다. 특히 마을 주민들은 단종 무덤을 지키기 위해 도깨비들이 그러한 행동을 했다고 믿었다. 결국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능마을도깨비놀이는 이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는데 놀이의 핵심은 도깨비를 통해 조정을 비방하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중단된 능마을도깨비놀이는 마을 어른들의 고증을 거쳐 다시 재현되었다. 해마다 추수가 끝나는 10월 경에 능마을 주민들은 다같이 모여 이 놀이를 즐겨 했는데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단종의 한을 달래기 위해 도깨비들이 그의 무덤을 지켜주었다는 이야기 때문에 무척 각별하게 행해졌다고 한다.
이 놀이는 크게 세 개의 마당으로 진행된다. 첫 번째는 꿈에 관한 이야기다. 지역에 전해오는 유래담과 관련된 것으로 단종의 무덤이 있는 곳에서 노인이 나무를 베려고 하는데 도깨비들이 와서 베지 못하게 한다. 그런 다음 소변을 보고 있는 나무꾼을 도깨비들이 쫓아내는 낸다. 두 번째 마당에서는 제사를 지낸다. 오랫동안 도깨비들에 의해 관리되던 단종의 무덤이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관리를 하게 되면서 더 이상 도깨비들이 필요 없게 되자 그들은 그곳을 떠나면서 공식적으로 제사를 올린다. 세 번째 마당은 제사를 마친 도깨비들이 무덤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모습을 재현해놓았다. 도깨비들은 단종의 무덤 앞에서 도깨비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 노랫말의 내용은 그동안 자신들이 이곳에서 보낸 세월이 담겨져 있다.
일련의 과정이 마무리되면 무덤의 주인인 단종의 혼을 즐겁게 하기 위한 의미로 놀이판을 벌인다. 단종이라는 인물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와 도깨비라는 독특한 대상이 등장하는 이 놀이는 영월 지역의 지역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연유로 2018년 평창동계패럴림픽대회 기간 동안 공연이 되기도 했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는 목내동이 있다. 목내동은 본래 안산이 시로 승격하기 전만 해도 목내리였던 곳이다. 자연마을로는 능안과 배나물 마을이 있었는데, 이 중 능안마을은 단종의 어머니였던 현덕왕후의 소릉이 조성되면서 ‘능안’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안산이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능안마을은 없어졌고, 그 자리에는 반월 공업단지가 들어섰다. 공단 내 일진전기라는 회사의 정문 근처에 관우물 표석이 남아 있다. 관우물은 현덕왕후의 관이 닿았던 자리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그에 관한 현덕왕후의 한이 서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세조가 단종을 죽이려 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세조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났다. 현덕왕후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너는 참으로 악독한 놈이구나. 내 아들의 자리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죽이려고까지 하는구나. 나와 무슨 원한이 그리 깊기에 우리 모자에게 이리 잔인한 것이냐? 이제 내가 네 자식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호통을 치며, 얼굴에 침을 뱉고 사라졌다. 현덕왕후의 섬뜩한 말에 놀라 잠에서 깬 세조는 마음이 뒤숭숭하였는데, 이때 동궁전의 내시가 급히 들어와 “대왕마마, 동궁마마께서 갑자기 매우 위중하게 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세조는 지난밤 꿈에서 현덕왕후가 했던 말이 떠올라 서둘러 동궁전을 향했다. 세조가 도착하기 전에 동궁은 이미 숨이 멈춘 뒤였다. 세조는 크게 슬퍼하며 멍하니 죽은 동궁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세조는 동궁의 죽음이 현덕왕후의 복수라 생각하고, 크게 화를 내며 현덕왕후의 소릉을 파헤치라고 명하였다. 어명을 받은 관리가 인부들과 함께 소릉에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지난밤 소릉에서 여자의 곡소리가 났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은 들은 관리는 왠지 모르게 꺼림칙하였지만 지극한 어명인지라 인부들에게 능을 파라고 지시하였다.
잠시 후 능 안에 관이 보였고, 인부들이 관을 빼내려고 했으나 아무리 힘을 써도 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관리가 세조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는데, 세조는 크게 역정을 내며 “그럼 도끼로 관을 쪼개면 되지 않느냐?”라고 하였다. 인부 하나가 도끼로 관을 내리치려 하자 이번에는 관이 벌떡 일어나더니 스스로 걸어 나왔다. 깜짝 놀란 관리가 다시 보고하자 세조는 관을 불태워버리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불을 붙이려 하는데,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치더니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다. 있는 대로 화가 난 세조는 관을 바다에 버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관리는 관을 먼 바다에 던져 버리게 하였다.
며칠 후 왕후의 관은 파도를 타고 소릉 옆 바닷가까지 떠밀려 왔다. 그 누구도 세조가 무서워 관에 손을 대지 못했다. 그렇게 떠돌던 왕후의 관은 양화나루까지 왔고, 그곳에 사는 순박한 농부가 아무도 모르게 관을 옮겨 양지바른 언덕에 묻어주었다. 그날 밤 농부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길흉을 알려주었고, 이후 농부는 잘 살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중종 때 조광조가 현덕왕후의 복위를 건의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왕후의 관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관원들은 왕후의 관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관의 행방에 대해서 아는 이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관원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내일이 되면 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관을 묻어준 농부의 자손은 왕이 현덕왕후의 관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후환이 두려워 차마 알리지 못하고 있는데, 왕후가 꿈에 나타나 관의 위치를 알려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왕후의 관은 문종의 능이 있는 동구릉으로 이장되었다.
당시 왕과 왕후의 능 사이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그런데 왕후를 모신 뒤 능 사이의 수풀은 모두 말라 죽게 되어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훗날 현덕왕후의 관이 바다에 버려진 뒤 처음 닿은 바닷가는 육지가 되었고, 그 자리에 우물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곳을 관이 닿은 자리라 하여 ‘관우물’이라 불렀다고 한다.
충청북도 보은군 수한면에는 교암리가 있다. 교암리는 수한면의 북쪽에 자리하며, 병풍 같은 산이 둘러있고 마을 앞으로는 냇물이 흐르고 있는 곳이다. 자연마을로는 거먹골, 교암, 새터가 있는데, 이 가운데 교암은 ‘가르침바위’라고도 불린다. 가르침바위는 세조가 속리산으로 향하다가 맞닥뜨리게 바위에서 따온 이름이다. 바위와 마을 이름이 지어지게 된 사연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세조가 선왕이자 조카인 단종을 무참히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세조가 침상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세조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현덕왕후는 단종의 어머니이며, 세조의 형수였다. 현덕왕후를 본 세조는 가위에 눌려 꼼짝을 못 하다가 곧 깨어났다. 얼마나 놀랐는지 몸에 땀이 흥건하였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있던 차에 세조의 맏아들인 도원대군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세조는 아들의 죽음이 꿈에 나타난 현덕왕후가 벌인 일로 믿었다. 화가 난 세조는 즉시 “현덕왕후의 능을 파헤쳐 평민의 무덤처럼 만들도록 하라.”라고 소리쳤다.
그날 밤, 세조의 꿈에 또다시 현덕왕후가 나타났다. 현덕왕후는 세조의 얼굴에 침을 뱉고 분노에 찬 모습으로 노려보다 사라졌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세조의 얼굴에 현덕왕후가 침을 뱉었던 자리가 곪기 시작하였다. 피부병은 얼굴에서 점차 퍼져나가더니 전신으로 번지기에 이르렀다. 의관을 통해 명약을 먹고 치료를 받았으나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세조는 ‘좋다는 약을 써봐도 낫질 않으니 큰 절을 찾아가 부처님께 빌며 쉬어 봐야겠군.’ 하고는 충청북도 보은군의 속리산으로 가기로 하였다. 세조의 행차가 청주를 지나 회인을 거쳐 보은으로 향했다.
세조의 행차가 보은으로 들어서 수한면 교암리를 지날 때였다. 가마로 이동 중이던 세조는 오랜 여정으로 지루함을 달랠 길이 없었다. 길가 풍경을 보다가 우연히 냇가에 있는 큰 바위를 보게 되었다. 그 바위는 장엄한 자태를 뽐내며 냇물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마치 세조를 맞이하는 듯, 품어 안아주는 듯 우뚝 서 자리하고 있었다.
바위를 마주한 세조는 무수한 감정이 떠올라 잠시 가마를 멈추고 바위 앞에 다가갔다. 세조는 ‘이 바위를 보고 있노라니 내가 왕이 되기 위해 무수한 신하들과 조카까지 무참히 살해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후회되는구나.’라며 눈물을 떨구었다. 세조는 바위를 끌어안으며 자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서글퍼하였다. 바위도 역시 세조를 어루만져주며 감싸 안아주는 듯하였다. 바위로부터 위안을 얻은 세조는 “이 바위는 나에게 하늘의 이치를 가르쳐 준 바위로다.”라고 말한 후 다시 속리산으로 향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이 바위를 ‘가르침바위’라고 부르게 되었고, 바위가 있는 그 마을을 가르침바위를 한자어로 바꿔 ‘교암(敎岩)’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단종의 영정인 초상화를 모신 영모전(永慕殿)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다. 단종은 조선 제6대 임금으로 세조에게 왕위를 뺏기고 이곳에 유배되었다. 이에 이 지역 사람들이 단종을 사모하여 오다가 단종이 세조에게 사약을 받고 죽자 모두가 슬퍼하면서 중종 12년에 이 사당을 짓고 단종이 있는 것처럼 공경하였다고 전한다.
영모전은 앞면은 3칸이고, 옆면은 2칸이다. 지붕 옆면이 한자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집 형태이다. 앞면의 가운데 칸에는 초상화를 모셔둔 방이 있고, 그 양쪽 측면과 뒷면은 벽을 설치했다. 앞면에는 장지문을 달아 밝게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앞면 가운데 칸의 뒷부분에 초상을 모셔둔 방을 두고 그 양 측면과 뒷면은 벽을 설치하였으며, 앞면은 장지문을 달아 밝게 처리하였다. 이곳에 모셔져 있는 단종의 초상화인 영정은 충신 추익한과 단종이 함께 그려져 있다. 추익한이 단종께 산포도를 드리는 그림인데, 단종은 백마를 타고 있다. 제사는 매년 음력 10월 24일에 지내고 있다.
이 영모전은 과거에는 영월군 전체를 대표하는 신앙의 장소로 기능하였고, 현재는 영월읍 영흥11리의 서낭당이다. 영월 지역의 성황사는 1792년에 새로 지었고, 어느 시기인지 알 수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단종의 목상을 모셨다. 그러다가 1927년 이계진이 그 목상을 불태우는데, 그 때까지 관에서 설치한 관설 성황사로서의 기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모셔져 있는 추익한과 함께 그려져 있는 단종의 영정은 새로 모신 것이다.
이 영정을 새로 모시면서 윤용구가 ‘영모전’이라는 이름의 편액도 달게 된다. 이 영모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인 1월 2일과 음력 10월 24일에 고사를 지내고 있다. 정월의 행하는 고사는 마을에서 지내고, 10월 24일의 고사는 단종이 승하한 날이라고 해서 영월읍에서 지내고 있다.
서낭고사는 매년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 산신제와 당제의 순서가 그것이다. 제사 음식인 제수는 당주가 마련하고, 헌관은 거의 고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초헌관은 영흥11리 이장이, 아헌관은 군수 혹은 각급 기관장이 맡는다. 종헌관은 참석한 사람들 중에서 깨끗한 사람을 선정하게 된다.
제의 순서는 먼저 당주집에서 제사 음식을 마련하여 영모전으로 가져가는 것에서 시작한다. 영모전에 들어가기 전에 그 입구에 있는 돌계단 아래에서 짚을 태워 부정을 물리게 되는데, 제관들은 이 불을 위로 넘어가야 한다. 당 안에 들어가면 당의 정면 왼편에 제물을 올린다. 제물을 다 올리면 산신제를 지내고 음복을 하게 된다. 뒤이어 대왕제를 위한 제물을 올린다.
대왕제의 제물을 다 올리면 잔을 올리는 헌작을 한 후 절을 2번하고 축문을 읽는 독축을 하고 산신축문과 대왕고축을 태우게 된다. 뒤이어 바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마을소지를 올린다. 다음으로 제관은 제사 음식을 일부를 떼서 잡귀잡신을 한데 풀어먹이는 고시레를 한 다음 상을 물린다. 이렇게 고사가 끝나면 제사를 지낸 사람들은 당주집으로 간다. 당주집에 모인 사람들은 마을 잔치를 벌인다. 서낭고사날이 설 다음 날이기 때문에 어르신들게 세배를 드리게 된다. 마을회의는 이로부터 며칠 뒤에 한다.
영모전은 1개의 제당이지만 여러 가지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먼저 마을 서낭당으로서의 기능을 한다. 다음으로 읍치 성황사로서의 기능도 한다. 마지막으로 추익한을 기리는 재실로서의 기능까지 가지고 있다. 이를 통해 서낭제의 지속과 변화라는 측면에서 이 영흥리 영모전 서낭고사를 중요한 사례라고 하겠다.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상동4리 꽃바우는 각시바위와 삿갓바위의 사이에 위치한다. 꽃바우라는 지명과 관련되어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이 바위틈에는 이른 봄을 시작으로 이름 모를 많은 꽃들이 피어나는데, 그래서 꽃바우라고 한다고 전한다. 이와는 다르게 꽃바우가 각시바위와 신랑바위 사이에 있기 때문에 꽃바우라고 부르게 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이곳의 큰 바위가 꼴뚜서 있기 때문에 꼴뚜바위가 꽃바우로 변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꼴두바우 서낭당은 상동4리 마을의 성황당이면서 상동읍의 대표적인 서낭당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꼴두바우 서낭당을 산신당이라고 했고, 지금도 제당의 정면에는 ‘태백산신각(太白山神閣)’이라고 쓴 편액이 붙여져 있다. 하지만 마을에서는 성황당이라고 부른다. 이 꼴두바우 서낭당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에 이곳에는 주막을 운영하던 가난한 부부가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늙은 스님이 이들 부부에게 찾아와서 자식을 둘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 방법은 꼴두바우에 올라가서 정성으로 치성을 드리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부인은 늙은 스님의 말처럼 꼴두바우에 올라가서 정성스럽게 치성을 드렸다. 문제는 부인이 이렇게 정성을 드리는 것을 그의 시어머니가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구박을 했고, 이 구박을 못이긴 며느리는 죽게 되었다. 그 며느리가 죽자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불쌍하게 생각해서 돌로 그 여자 모습의 꼴뚜각시를 깍았고, 여기에 제사를 지내 주었다는 것이다.
꼴두바우 서낭고사는 음력 1월 1일과 음력 8월 15일에 지내는데,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꼴두바우 서낭당 앞에 짚을 태운다. 그 짚을 타고 넘으면서 부정풀이를 한다. 그리고 나서 제당 벽에 종이와 함께 실 한 타래를 바친 후 제사 음식을 차린다.
제사 음식을 다 차리면 일반적인 유교식 제사로 제사가 진행된다. 잔을 올리고, 절을 2번 한 후 축문을 읽고 다시 잔을 올리고, 절을 2번 하고 소지를 올린 다음 음복을 한다. 이는 ‘헌작-재배-독축-헌작-재배-소지-음복’이다. 소지를 올릴 때는 먼저 축문을 불에 살라 올리는 소지를 한 후 마을 소지와 각 가정별로 소지를 올려주게 된다. 흰 종이를 불에 태워 하늘로 올리는 소지는 흰 종이가 잘 타서 올라가면 그 해 운이 좋고, 그렇지 않으면 좋지 않다고 여긴다. 따라서 소지가 잘 올라가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소지를 올려준다. 서낭고사의 축문은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바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제사 음식으로는 상 하나로 올리는데, 밥인 메 3그릇을 올린다. 먼저 정면의 모신 태백산신령의 몫이 1그릇이고, 그 왼편의 수부신의 몫으로 2그릇을 바친다. 이외에 고사리나 청욱 나물, 콩나물, 시금치 나물을 올리고, 무나 콩나물로 채국을 만들어 올리고, 여기에 고기로 만든 탕을 2그릇, 고등어 3마리, 돼지고기, 세 가지 과일, 포, 막걸리, 팥시루떡 등이 올라간다. 대부분의 제사 음식은 태백산신령 신위에 올리고, 왼편의 수부단에는 밥인 메 2그릇, 세 가지 과일과 포 등의 간단한 음식만 올린다. 제상에 올라가는 술은 과거에는 직접 담았으나 현재는 막걸리를 올리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는 상동광업소에서 서낭고사를 지낼 때 통돼지 1마리에 해당하는 값을 지원하고 있다. 영월과 태백산이 이어지는 지역에서는 마을신으로 단종대왕을 모시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곳 꼴뚜바우에서는 태백산신을 모시고 있다. 따라서 강원도 산신제의 원형을 보존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현 김삿갓면) 내리는 안골이라고도 부른다. 이 내리는 녹전리와 외룡리 사이에 있는 마을인데, 지동 여울 안쪽에 있기 때문에 안골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안골을 한자식으로 쓰게 되면 내리가 되기 때문에 내리로 바뀐 것이다. 지동마을은 내리의 중심지에 해당되는데, 지동이라는 이름은 이 마을 앞에 연못이 있어서 붙여졌다고 한다.
이 하동면 내리 지동마을에는 당이 2개 있었다. 하나는 단종을 모시는 곳으로 숫당 혹은 큰당이라고 부르고, 나머지 한 당은 잡신을 모시는데 안당 혹은 암당이라고 한다. 단종을 모시는 큰당은 마을 저쪽 언덕에 있었고, 안당은 마을 산의 중간 쯤에 있었다. 큰당에서 단종을 모시게 된 이유는 과거 이곳에 단종이 지나갔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사는 정월 대보름인 음력 1월 15일에 이 두 당에서 모두 지냈다.
그런데 1985년에 이쪽으로 길이 새로 나면서 큰당이 안당의 아래쪽으로 옮겨졌는데, 이후 두 당을 모두 없애고는 안당이 있던 곳에 당을 새로 하나 세웠다. 새로 세운 당에 큰 당에서 모시던 단종을 모신다. 현재 당은 시멘트로 다진 바닥 위에 목재로 사면을 만든 후 기와지붕을 얹은 형태인데, 과거에는 지붕이 송판이었고, 그보다 더 이전에는 굴피였다고 한다. 당 안에는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선반이 있고, 그 이에 ‘태백산영신’이라고 쓴 위패가 모셔져 있다. 오른편에는 큰 돌이 있는데, 여기에 고깔을 씌워놨다. 이뿐만 아니라 흰실 또한 걸쳐놨다. 당 안에 모셔져 있는 돌은 과거 큰 당에 있던 돌인데, 마을 사람들은 이 돌을 신이 내린 돌이라고 여긴다.
서낭제의 당주는 과거에는 소나무 대를 내려서 선정했는데, 이 대는 마을 사람들 중에서 대가 잘 내리는 사람이 잡았다. 마을 사람들이 대잡이를 둘러서 쭉 서 있으면 대가 한 사람을 향하게 되고, 그러면 그 사람이 당주가 되었다. 당주는 제의 당일에 뽑았는데, 마을과 가까운 장에서 장을 봤기 때문에 당일날 당주를 뽑아도 제사를 지내는데 무리가 없었다.
서낭제에 필요한 돈은 마을 사람들이 낸 돈으로 충당하고 이 돈으로 유사가 장을 봐서 제사를 지낸다. 제사에 올리는 제물은 가정집에서 제사에 올리는 것과 거의 같은데, 시금치, 도라지 등과 과일, 통포, 조기 등이다. 떡의 경우 시루떡을 올리는데, 서낭제 때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눠먹을 것과 구분해서 따로 떡을 하는데, 세되 정도를 하게 된다. 제사 음식 마련과 관련해서 중요한 점은 고춧가루나 마늘과 같은 매운맛을 내는 것을 넣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치도 일반적인 김치가 아닌 백김치를 가지고 전을 붙이는 것이 특징이다. 제상에 올라가는 닭은 머리를 잘라서 올리고, 상에 올리는 탕에도 조개 등을 넣지 않는다. 이와 함께 제상에 올라가는 돼지는 되도록 웃는 상으로 된 것으로 쓴다. 과거에는 돼지머리가 아니라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썼다. 이때 잡았던 돼지는 검은 돼지였다. 제상에 올리는 술도 과거에는 누룩을 넣지 않고 직접 빚은 것이었는데, 현재는 시장에서 사서 올린다.
지동마을 서낭제에서 제사 음식을 마련하는 사람을 당주라고 하는데, 당주로 뽑히고 나면 지켜야 하는 금기가 많았다고 한다. 현재는 당주집에 금줄도 안치는 등 많은 금기들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초상집은 가면 안되고 부정한 것을 피해야 하며 개고기도 먹으면 안된다. 제상에 올라가는 돼지머리도 당주집에서 삶게 되는데, 이때 돼지의 귀가 안접히고 설 수 있게 삶아야 한다.
서낭제는 과거에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서 2일에 걸쳐 했는데, 지금은 정월 대보름 전날 저녁 7시에 지낸다. 정월 대보름 오후 1시쯤에 마을 사람들은 제사를 지낼 큰당에 왼새끼로 꼰 금줄을 두르고 청소를 하게 된다. 청소 후에는 나무를 하러 가는데, 큰 당 주변에서 불을 지피기 위해서다. 제물 준비가 거의 끝날 무렵인 6시쯤에 다시 모여서 마련한 제물을 당주집으로 옮긴다. 당주집에서 큰당으로 제사 음식을 옮길 때 잡신을 쫓기 위해 엎어놓은 바가지를 밟아서 깨드리고 지나가게 한다. 바가지가 깨지는 소리를 듣고 잡신들이 놀라서 달아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큰당에 도착하면 미리 마련해 둔 나무들로 불을 피우고는 당주집에서 옮겨온 제사 음식을 큰당안에 옮기고는 당 안에 모셔져 있는 큰 돌의 원래 고깔은 벗기고, 새로 접은 고깔을 씌운다. 이것을 단종신에게 새 옷을 입히는 것이라고 한다. 큰 돌에게 새 옷을 다 입히면 제물을 차린다. 그리고 서낭제가 시작된다. 서낭제는 마을 사람이면 누구나 다 참여할 수 있지만 여자들은 참석할 수 없다.
서낭제는 먼저 이장이 향을 피우고 절을 2번 한 후 잔을 올리고 축문을 읽은 후 소지를 올리고, 다시 절을 2번 한 후 음복하는 순서로 이루어진다. 현재는 축문이 없어서 독축은 하지 않고 있다. 소지는 먼저 대동소지를 올린 후 서낭제에 제비를 낸 사람들의 이름을 다 불러주면서 소지를 올린다. 소지까지 끝나면 마을 사람들도 모두 절을 2번 하고 음복을 한다. 그후 그 자리에서 모두 모여 음식을 나누거나 당주집에 가서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한다. 다음날에 다시 당주집에 모이는데, 이날은 서낭제 결산을 한다.
과거 서낭제를 위해 걸립을 했을 때는 무당을 불러왔는데, 이 무당은 걸립을 할 때부터 서낭제가 끝날 때까지 이 마을에서 함께 제의에 정성을 들였다고 한다. 무당이 들어왔을 때 서낭제는 무당은 옆에서 빌어주고, 유사들이 제사를 주관했다고 한다. 영월지역의 마을신으로는 태백산신, 인물신으로 좌정한 단종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이 지동마을 서낭제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