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님이 도의 문을 통과한 속초 도문동과 신흥사

    강원도 속초시 도문동(道門洞)은 자장율사가 도의 문을 통과했다고 붙여진 지명이다. 도문동은 설악산에서 흘러내리는 쌍천을 끼고 있는 마을이다. 양양 낙산사 방면에서 물치를 지나 설악산으로 올라가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살면서 옹기를 구워 팔았다고 해서 잘 알려지기도 했다. 


    자장율사가 통과한 도의 문

    자장율사는 신라시대 스님이다. 어느 날 낙산사 의상대에 올랐다가 자기도 모르게 설악산 쪽으로 발길을 옮기게 되었다. 쌍천의 물길이 시원하게 흘러내리고 가까이 설악산의 위용이 곧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자장율사는 발길도 가볍게 그 지역을 통과하게 되었다. 워낙 산길이라 길을 가는 도중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길을 가다가 지금의 벼락바위 있는 곳을 지나는데 웬 사람이 있길래 길을 물었다. “지금 소승이 지나는 곳이 어디 입니까?” “도문(道門)이라 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길을 알려준 사람은 조금 후 어디론가 사라졌다. 자장율사는 그 흔적을 찾으려 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또 길을 가다가 보니 그 사람이 있었다. 자장율사는 또 길을 물었다. “지금 소승이 지나는 곳이 어디 입니까?” “도문을 지나고 있습니다.” 자장율사는 그렇게 세 번이나 그 사람을 만났고 세 번 다 물으면 도문을 지나고 있다고 했다. 훗날 이곳 지명이 상도문, 중도문, 하도문으로 된 사연이다. 자장율사는 그렇게 설악산으로 향하다가 날이 저물어 잠을 자게 되었다. 그때 어디선가 노루가 나타나서 자장율사 부근을 배회했다. 자장율사는 날도 쌀쌀하고 해서 노루를 불러 목을 베고 하룻밤을 잤다. 훗날 이곳은 노루목이 되었다. 

    스님이 도의 문을 통과한 속초 도문동과 신흥사

    설악산에 올라 자장율사는 좋은 곳을 찾아 향성사라는 절을 짓고 머물렀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서 향성사는 계속 불길에 휩싸였다. 자장율사는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자장율사가 잠을 자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을 했다.“ 이 꼭대기로 올라가 서북방 쪽으로 더 가면 싸리나무가 큰 게 있으니 그 싸리나무가 있는데 절을 지으면 좋을 것이오.” 자장율사가 깨어보니 꿈이었다. 자장율사는 산신령이 시킨 대로 올라가서 절을 지었다. 그리고 신이 점지하여 흥할 절이라 하여 신흥사(神興寺)로 이름을 지었다.

  • “진정한 오징어순대는 바르르한 밥알을 손으로 채워 넣어야”

    도마 위의 칼질 소리가 정겹다. 금방 찐 자줏빛의 오징어순대가 불룩한 배를 자랑하며 누웠다. 오징어는 주변 환경에 따라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어두운 갈색 반점이 있다. 그런데 칼을 대면 흰색으로 변하고 찜통에 찌면 붉은 자줏빛으로 변한다.

    속초중앙시장은 평일에도 오징어순대를 찾는 이들이 줄을 섰다. 이곳 아니면 오징어순대의 제맛을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계란 옷을 입힌 오징어순대는 동해안 어느 횟집에서도 먹을 수 있고 홈쇼핑이나 마트에서도 냉동 오징어순대를 살 수 있다. 그러나 고슬고슬한 밥알이 살아있는 제대로 된 오징어순대를 먹을 수 있는 곳은 전국에서 몇 곳이 안 된다. 그마저도 명성이 높은 두어 식당의 어른들은 급히 다른 세상으로 가셨다.

    속초 오징어순대

    시어머니가 하시던 것을 하는 건데 여기 속초 사람들은 어지간하면 다 해 먹었어요. 저 결혼할 때는 이바지로도 했어요. 요즘에도 이바지로 해 달라고 하는 분들이 찾아와요. 여기는 다른 거는 안 해도 요거하고 문어하고 해가요. 어릴 적에는 찬밥 남으면 오징어가 흔하니까 오징어에 속을 넣어서 쪄갖고 금방 먹으면 맛있었어요. 15분만 찌지요. 더 찌면 질겨져서 맛이 안 나요. 초고추장에 찍어 먹어야지요. 오징어가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오면 수분이 빠져서 줄어들어요. 속이 밀려 나와 그전에 먹는 것이 좋아요.

    오징어에는 타우린(taurine)이 많다. 심장병, 고혈압, 당뇨병에 좋고 동맥경화를 예방한다. 영양 좋은 오징어순대의 맛을 아는 이들에게 새롬맛집은 보고(寶庫)와도 같은 곳이다. 오징어순대를 만드는 일은 손이 많이 간다.

    오징어에 속을 채워 넣는 모습
    오징어에 속을 채워 넣는 모습
    속을 채워 대나무 꼬지로 꿰기
    속을 채워 대나무 꼬지로 꿰기
    속을 채운 오징어순대
    속을 채운 오징어순대

    최금애(여, 육십대 중반)씨는 몸과 마음이 건강한 날이면 밥알이 바르르하게 잘 된다고 한다. 오징어 다리는 몸통과 분리하여 깨끗이 씻어 물기를 빼둔다. 채소를 썰어 넣기 때문에 오징어 속에 물기가 남아 있으면 안 된다. 순대의 속은 꽉꽉 채워도 안 되고 허술하게 채워도 안 된다. 그 안에서 밥알이 삭기 때문이다. 힘들어도 일일이 손을 대어야 맛있다.

    십여 년 이상 오징어의 배를 채운 그녀의 손은 빠르다. 순식간에 오징어 서른 마리의 배를 채워 넣는다. 대나무꼬지로 여미는 솜씨도 기가 막히다. 거기에 마무리는 정갈하고 얌전하다. 오징어순대는 고슬고슬한 밥알과 쫄깃한 오징어 다리가 씹히는 담백한 맛이다. 여기에 초고추장을 살짝 찍으면 반찬 없이 한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

    속초 오징어순대
    속초 오징어순대
    속초 오징어순대
    속초 오징어순대

    오징어에 대한 어원적 풀이는 중국의 옛 문헌에서 두 가지 설이 전한다. 오징어(烏賊魚), 까마귀도둑이라는 해석과 중국어의 魚卽(어즉)의 卽(즉) 자가 賊(적)으로 바뀌었다는 설이다. 오징어는 수심 200~300m의 깊은 바다에서 새우, 게,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고 산다. 밤이 되면 20m 정도의 바다 위로 올라온다. 이러한 오징어가 숲에 사는 까마귀와 바다 위에서 만나는 기회는 흔한 일이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烏魚卽魚(오어즉어)’, ‘까마귀처럼 검은색의 먹물을 가진 물고기’라는 뜻이 설득력이 있다. 대나무의 줄기가 까마귀처럼 검기에 오죽(烏竹)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 도움 주신 분

    '새롬맛집' 최금애(여, 육십대 중반)씨는 며느리와 하루에 700-800개의 오징어순대를 만든다. 가업을 잇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징어의 어획량이 줄어드는 것이 걱정이다.

  • 아버지 묘를 파헤쳐 학이 날아간 속초 노학동

    강원도 속초시 노학동(蘆鶴洞)과 학사평(鶴沙坪) 그리고 양양의 학포리(鶴浦里)가 생긴 지명유래이다. 이곳에는 학사평과 학포리, 그리고 노학동이 생긴 지명유래가 풍수와 관련해 이야기되고 있다. 결국 아들딸의 싸움 때문에 명당을 파헤쳤고, 그때 날아간 학이 앉은 곳이 지명으로 남게 되었다.

    아버지 묘를 파헤쳐 학이 날아간 속초시 노학동과 파명당
    아버지 묘를 파헤쳐 학이 날아간 속초시 노학동과 파명당

    파명당과 학사평

    옛날 아주 친한 친구 세 명이 있었다. 세 명의 친구는 사냥을 즐겨 했다. 어느 날 겨울에 세 사람은 사냥을 나갔다. 산에 올라보니 다른 곳은 모두 눈이 하얗게 쌓였는데 양지바른 한 곳은 눈이 하나도 없었다. 세 사람은 그곳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대화를 했다.“ 아니 다른 곳에는 전부 눈이 있는데, 이곳만은 눈이 녹아 있으니 이건 분명히 명당자리야. 그러니 우리가 이 자리를 그냥 버릴 것이 아니라 우리 셋 중 누가 먼저 죽든지 간에 먼저 죽는 사람이 이 자리에 묻히기다.” 그렇게 약속을 했다. 


    그중 한 사람은 그 산의 주인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몇 해 지나 그 산 주인이 먼저 죽었다. 그러자 그 친구들이 상주에게 말했다. “우리가 묘터 봐 놓은 게 있으니, 그 아버지가 원한 자리고 하니, 그 자리에 묘를 갖다 써야 한다.” 그래서 가족들은 그곳에 묘를 쓰게 되었다. 거기다 묘를 쓰고 나니 점점 가산이 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딸을 낳으면 팔자가 드셌다. 그래 딸들이 점을 쳤는데, 그 묘터가 너무 억세서 남자들은 잘되지만 여자들은 안 된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딸들이 아버지 묘를 옮기자고 했다. 딸들이 그러니 남자들도 동의하고 옮기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묘를 옮기게 되었다. 봉분을 파서 관까지 갔는데 난데없는 학 두 마리가 거기 있다가 날아올랐다. 한 마리는 북쪽을 향해 날아갔는데 지금 학사평(鶴沙坪)에 가서 앉았다. 그 학이 앉은 곳이 모래가 평평하여, 학 학(鶴)자 모래 사(沙)자 평평할 평(坪)자를 써서 학사평이라 불렀다. 그리고 남쪽으로 날아간 학은 양양군 손양면 지금의 학포리에 가서 앉았다. 학이 포구에 앉았다고 해서 학포리(鶴浦里)가 되었다. 나중에 마을을 합칠 때 노동(蘆洞) 또는 노리(蘆里)라는 마을과 학사평의 첫 자를 따서 노학동이 되었다.

  • 금강산으로 들어가려다 멈춘 울산바위

    속초시 설악산에 있는 울산바위

    강원도 속초시 설악산에 울산바위가 있다. 인제군에서 속초시를 잇는 미시령터널을 빠져나가면 오른편으로 웅장한 모습이 보인다. 속초시에서 둘러있는 설악산을 바라보면 전면에 보이는 것이 바로 울산바위다. 울산바위의 이름 유래에 대해서는 그 형상이 '울타리'처럼 생겨서 그렇다는 이야기와 천둥이 칠 때 하늘이 울린다고 해서 ‘천후산(天吼山)’ 혹은 울산바위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울산바위


    울산을 떠나 금강산으로 향하던 울산바위

    그 외에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이것이다. 옛날 조물주가 금강산을 만들 때 경관을 빼어나게 하려고, 전국에서 가장 잘생긴 바위들을 모두 금강산으로 모이게 하였다. 원래 경상남도 울산에 있었던 울산바위도 조물주의 말을 듣고, 고향인 울산을 떠나서 금강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바위 덩치가 워낙 크고 무거워 걸음걸이가 늦다보니 설악산에 도착했을 때, 이미 금강산은 전국에서 모인 잘 생긴 바위들이 다 모여들어 완성이 되었다. 울산바위는 금강산으로 들어가기 위해 고향 울산을 떠나왔기에, 다시 울산으로 돌아갈 체면이 없어서 설악산에 눌러앉고 말았다고 한다.

    금강산으로 들어가려다 멈춘 울산바위


    동자승의 지혜로 세금을 내지 않게 된 신흥사 

    한편, 설악산 유람을 나섰던 울산의 원님이 울산바위 이야기를 듣고, 신흥사[新興寺, 설악산에 있는 사찰] 스님을 찾았다. 울산고을 원님은 스님에게 “울산바위는 울산 고을의 소유이니 신흥사에서 울산바위를 차지한 대가로 셋돈을 내야 한다.”라고 하였다. 신흥사 스님은 셋돈을 내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해마다 울산 고을에서 세를 받아 갔다. 그러던 중 어느 해인가 울산 고을 원님이 세를 받으러 올 때가 되었는데 스님에게 돈이 없어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본 동자승이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하였다. 며칠이 지나 울산 고을 원님이 도착하자 동자승이 “이제부터는 세를 줄 수 없으니, 바위를 울산으로 옮겨가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울산 고을 원님이 “바위를 재로 꼰 새끼로 묶어 주면 가져가겠다.”고 하였다. 동자승은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에서 자라는 풀(草)로 새끼를 꼬아 울산바위를 둘러 놓았다. 그리고는 불을 놓아 재로 꼰 새끼를 만들었다. 이런 황당한 제안을 지혜로 잘 넘긴 동자승 덕분에 울산 고을의 원님은 울산바위를 가지고 가지 못했고, 세를 내라는 말도 더 이상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를 ‘묶을 속(束)’자와 ‘풀 초(草)’자를 써서 '속초(束草)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자연 창조설화인 울산바위 전설

    강원도에서 전승하는 자연창조설화로서의 부래설화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바위가 떠서 날아온 경우, 바위나 산이 이동하다가 멈춘 경우, 바다에 떠돌다 섬이 멈춘 경우 등이다. 울산바위 설화는 두 번째 사례에 해당한다. 이 설화는 울산 등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도 동일하게 전승한다. 울산바위 설화는 바위의 이동과 멈추게 되는 과정, 그리고 해당 지역에 자리 잡게 되면서 원래 있었던 지역과의 세금 부과 문제로 다툼을 벌인다는 '산세 다툼' 등의 화소로 이루어져 있어서 ‘산 이동 설화’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설악산을 올라보자! ‘설악문화제’

    속초지역을 수호하며 백두대간의 중심인 설악산

    설악산은 옛 기록에 ‘설산’ 또는 ‘설화산’이라 하였다. 속초지역을 수호하는 진산이자 신령스러운 신산(神山)으로 신성시되었다. 바위의 색이 희고 여름철까지 눈이 오랫동안 녹지 않아 설산이라 이름붙였다. 설악산은 우리나라 국토의 중간인 동시에 백두대간의 중심이다. 『와유록(臥遊錄)』3 「낙산사기(洛山寺記)」에 의하면 고려 현종(顯宗) 2년(1011)에 거란병이 침입하므로 설악산 동록(東麓)에 성을 쌓고 수호했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축성이 확인되고 축성 형태나 방법, 봉화대, 제단의 흔적이 현재 발견된다. 이처럼 국가를 수호하며 지역의 진산인 설악산에서 매년 가을 산신제와 함께 등반행사를 개최한다. 

    설악문화제 포스터 이미지
    설악문화제 포스터(사진출처:(사) 속초축제위원회)


    산악제 중심에서 문화축제로 발돋움

    설악문화제는 1966년부터 산악제와 체육행사를 중심으로 개최했으나, 30회부터 체육행사를 축소하고 문화행사를 확대하였다. 산악제 중심의 설악제라는 명칭에서, 문화행사를 지향하는 종합형 축제인 설악문화제로 바뀌었다. 산악제는 등산대회를 중심으로 정고평 무명용사비에 헌화하고, 산악인들의 무사고를 기원하며, 등산왕 선발 및 등산 장비를 갖춘 시가 행진 등이 중심 행사였다.


    제18회부터는 전통 민속놀이를 곁들여 문화행사로 탈바꿈했는데, 설악산신, 동해용왕신, 성황신에 대한 제사와 설악대제를 베풀고, 줄다리기 및 6종의 민속경기를 베풀었다. 동대항 운동경기, 전국 규모의 등산대회를 통해 산악인의 참여를 독려했다. 2006년부터는 설악산과 관련된 산촌문화, 동해바다를 근원으로 하는 어촌문화, 청호동의 아바이 마을로 대표되는 실향민문화 등 속초의 사회, 역사, 문화적 형상화를 꾀해 지역민과 관광객이 함께 하는 한마당 축제로 거듭났다.


    산신께 참배하고, 등반대회를 하고, 공연도 하고

    2019년의 설악문화제는 설악산신대제, 산악페스티벌, 설악 아트워크(art walk)로 구분해 개최되었다. 산악대제는 설악대제를 알리는 대북합주를 시작으로, 산신제례, 음복례로 구성된다. 산악인 페스티벌은 설악산악연맹 주도로 2019 설악산 마등령 오르기 대회(백담사입구-백담사-영시암-오세암-마등령-비선대-소공원)가 14㎞ 코스로 열렸다. 상금을 걸고 개최되는 전통있는 대회로 많은 산악인들이 참여해 함께 한다.


    산악인 추모제는 설악산 소공원 내 산악인의 문에서 자유롭게 분향하는 형식으로 개최된다. 산을 오르다 추락하거나 사고로 죽은 산악인들의 영을 위로하는 자리이다. 마지막에는 설악산 마들령 오르기 시상식을 겸해 축하 공연이 열린다. 산악인들을 위한 등산장비 전시회도 열린다. 설악 아트워크는 시민과 함께 하는 전문인 패션쇼와 축하공연으로 이루어진다. 설악문화제를 축하하고, 시민들을 화합의 장으로 이끄는 행사로 꾸며진다.

  • 한국현대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아바이 마을 오징어순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의 서해ㆍ남해ㆍ동해 바다는 각기 생태환경이 달라서 지역에 따라 고유한 해산물이 생산되었다. 수심이 낮고 갯벌이 발달한 서해는 조기ㆍ새우ㆍ꽃게, 청정해역을 자랑하는 남해는 멸치ㆍ갈치ㆍ고등어ㆍ굴, 깊고 푸른 동해는 명태ㆍ대구ㆍ가자미ㆍ오징어 등이 대표적인 해산물이다. 특히 오호츠크해의 한류와 쿠로시마 난류가 만나는 조경수역이 형성된 동해는 한류성 어종과 난류성 어종이 다양하게 분포하여 예로부터 풍부한 어장을 형성하였다.

    속초 아바이마을

    동해안의 대표적인 해산물 중 하나인 오징어는 동해 전 지역에 분포하는 어종이다. 예전에 동해 밤바다에 오징어잡이 어선들이 집어등(集魚燈)을 환하게 밝힌 광경은 동해바다의 장관이었다. 오징어는 한때 전체 해산물 어획량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흔한 어종으로서 동해 어민들의 소득을 올려주는 효자노릇을 했다. 강원도의 묵호항, 주문진항, 속초항 등은 오징어잡이의 최대 어항으로서 과거 이 지역의 경제는 오징어가 견인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값싼 오징어는 서민들의 반찬과 간식, 안주를 모두 해결해 주는 착한 해산물이었다. 육류소비문화가 정착하기 시작한 1980년대 이전에는 고기가 매우 귀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오징어는 갈치, 꽁치, 고등어 같은 싸구려 생선과 함께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오징어에 고추장과 파, 당근, 양파 정도로 근사한 요리가 되었던 오징어볶음은 칼칼하게 매운 맛과 오징어의 쫄깃한 식감이 일품이어서 가장 손쉽게 많이 해 먹는 음식이었다. 처음에는 오징어를 건져먹다가 나중에는 남은 밥에 매운 국물을 쓱쓱 비벼먹는 것은 오징어볶음 먹는 날 식사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오징어는 소주와 맥주의 좋은 친구이기도 했다. 1980년대까지 청년시절을 보낸 세대에게 오징어는 값싼 안줏거리로 기억된다. 그냥 뜨거운 물에 데쳐서 썰어낸 오징어숙회나 오징어볶음은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젊은이들의 소주 안주로 그만이었다. 또 마른 오징어는 주종(酒種)을 가리지 않고 어울리는 간편한 안주로도 많이 찾았다. 최근에서야 상식이 되었지만 오징어가 안주로 적당했던 것은 오징어에는 간의 대사활동에 도움을 주는 타우린 성분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속초 오징어순대

    오징어는 예전에는 국민간식이기도 했다. 시내 극장 앞에 리어카에서 구워 파는 오징어와 땅콩은 영화 관람객의 필수 간식이었다. 심지어 옛날에는 기차 안에서도 오징어를 팔았다. 열차 안에는 홍익회 직원들이 카트를 밀고 다니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 오징어 있어요, 땅콩 있어요” 하며 호객하였다. 오죽하면 “내가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으로 보이냐?”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말이지만 예전에는 자신이 상대방에게 만만하고 하찮게 여겨졌다 느꼈을 때 내뱉는 표현으로 흔한 주전부리였던 오징어에 빗댄 말이다. 


    그렇게 흔해 빠졌던 오징어가 어느샌가 매우 귀하신 몸이 되었다. 동해의 오징어가 씨가 말랐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징어가 ‘금(金)징어’로까지 불리게 된 데는 중국어선의 남획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북한은 유엔과 미국의 경제제재조치를 돌파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자구책을 모색해 왔는데 그중 하나가 동해의 어업권을 중국에 팔아넘긴 것이다. 동지나해에서부터 동해까지 산란하여 부화한 오징어 새끼는 서식에 알맞은 수온을 따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올라가 성장한 후 그곳 바닷물이 차가워질 무렵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7월부터 11월 사이에 동해를 지난다. 이때 대형선단을 동원한 중국 어선들이 함경도에서 강원도 NLL수역까지 오징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마구잡이로 남획을 하는 통에 더 이상 오징어가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된 것이다. 


    강원도 속초시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지닌 고장이다. 뭍으로는 설악산 국립공원이 있고 바다 쪽으로는 푸른 동해바다와 청초호(靑草湖)와 영랑호(永郎湖)라는 큰 석호(潟湖)가 무려 두 개나 있는 바닷가 호수의 도시이기도 하다. 청초호와 영랑호 중간 지점에 위치한 속초항은 동해 최대 어업 전진기지 중 하나이다. 예로부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던 어획물인 오징어와 명태를 이용한 향토음식이 발달하였다.


    오징어를 이용한 속초의 향토음식으로는 오징어회, 오징어회무침, 오징어불고기, 오징어숙회, 오징어회국수 및 말린 오징어가 있다. 특히 속초에는 옛날부터 ‘오징어국수’가 유명하다. 오징어국수는 물회의 일종으로 오징어를 매우 가늘고 얇게 썰어서 양념해 낸 것이 마치 국숫발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또한 오징어살의 단 맛과 매콤하고 짭조름한 양념이 조화를 이룬 오징어젓과 오징어를 쌀밥에 삭혀 톡 쏘는 맛이 일품인 오징어식해도 속초시의 향토음식이다.

    속초 오징어순대

    속초에는 오징어를 이용한 여러 가지 음식 외에 매우 독특한 향토음식이 있는데 바로 오징어순대이다. 오징어로 만든 다른 음식들은 동해안지방에 보편적인데 반해 어찌 보면 오징어순대는 속초시에서 만들어진, 속초를 대표하는 향토음식이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오징어순대는 그 등장배경에 있어서 역사성과 문화성이 깊게 내재되어 있는 음식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속초의 오징어순대는 한국현대사의 가장 드라마틱한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음식이라는 뜻이다.


    속초는 원래 강원도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지역이었으나 해방 후 38선을 기점으로 남북이 분단되었을 때는 북한의 지배하에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 제1군단의 투혼으로 양양, 속초, 간성 등 이전 38선 이북지역을 수복하는 전과를 올리면서 속초는 대한민국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속초는 해방과 분단, 전쟁이라는 불과 몇 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남북을 모두 겪은 역사의 현장이라는 기억을 갖는다. 특히 전쟁 중에 잠시 피난을 내려왔던 함경도 실향민들이 더 이상 돌아가지 못하고 ‘아바이마을’로 불리는 속초시 청호동에 집단으로 거주하게 되면서 속초는 새로운 향토문화를 창달하게 되었다.

    속초 아바이마을
    속초 아바이마을

    오징어순대는 함경도 실향민들의 음식문화와 속초의 오징어와 토산물이 어우러져 생성된 음식이다. 함경도는 우리나라 북단에 위치한 지역으로 매서운 겨울날씨를 대비해 열량과 영양분이 풍부한 순대음식이 발달했다.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아바이순대’와 ‘명태순대’가 유명하다. 지금의 함경북도 지방은 조선초기 세종(世宗)이 6진을 개척하기 이전에는 여진족의 영토였다. 함경도 아바이순대는 함경북도 지방이 조선으로 편입되면서 여진족의 음식문화가 유입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순대는 크게 북방형과 남방형으로 구분한다. 함경도 아바이순대와 같이 여진족의 영향을 받은 순대는 돼지창자에 선지보다 야채와 곡물이 많이 들어가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순대는 추운 지방에서 속을 든든히 채우는 동시에 영양분을 고루 섭취하기 위한 것으로 함경도와 같은 북쪽 지방에 정착했다 하여 ‘북방형’ 순대라고 한다. 반면 제주도와 전라도 지역에는 고려시대 몽골의 영향을 받아 이른바 ‘피순대’라 불리는 선지가 많이 들어간 순대가 정착되었고, 남쪽 지방에 주로 분포한 순대여서 ‘남방형’으로 불린다.


    명태순대는 돼지 내장이 귀했던 함경도 해안지방에서 명태가 많이 나는 겨울에 돼지 내장 대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명태에 속을 채워 만든 순대이다.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함경도 경성도호부(鏡城都護府)와 명천현(明川縣)의 토산물로 ‘무태어(無泰魚)’를 기록하고 있다. 무태어는 명태를 지칭하는 한자이다. 명태 말린 것을 ‘북어’라고 한다. 북어는 원래 ‘북쪽 지방에서 나는 물고기’라는 뜻을 지닌 말로 북쪽 지방은 바로 함경도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명태라는 이름도 명천(明川)의 태씨(太氏)라는 어부가 관찰사에게 바친 맛있는 물고기가 이름이 없어 명천의 ‘명’자와 태씨의 ‘태’자를 따서 명태로 지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속초 오징어순대

    오징어순대의 유래는 두 가지가 전한다. 하나는 한국전쟁 때 순대를 만들 돼지창자를 구하지 못한 ‘아지미’들이 속초에서 흔한 오징어를 이용해서 순대를 만들기 시작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아지미’는 아주머니를 뜻하는 함경도 방언이다. 동해안의 남쪽 지방인 경상도의 ‘아지매’와 발음이 유사한 것도 흥미롭다. 다른 하나는 함경도 실향민이 ‘남바리’를 나가면서 배 위에서 먹을거리로 고향에서 먹던 명태순대에 착안하여 오징어순대를 만든 것이 시초라고 한다. ‘남바리’는 속초에서 오징어가 많이 잡히는 남쪽지방으로 장기간 조업을 나가는 것을 이르는 강원도 방언이다. 두 가지 설을 종합하면 한국전쟁은 물론이고 전후에도 식량사정이 궁핍했던 시절에 돼지창자를 구하기는 당연히 어려웠을테고, 그런 상황에서 함경도 실향민들은 속초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오징어를 이용한 순대를 개발하였던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오징어순대는 오징어의 쫄깃한 식감과 야채의 담백한 맛이 어우러진 별미로 손꼽힌다. 1970년대 설악산 관광 붐이 일어나면서 속초를 찾는 관광객들의 입맛을 사로잡기 시작하면서 속초의 향토음식으로 전국에 알려졌다. 명태순대와 오징어순대처럼 해산물의 속을 채워 만든 순대는 외부에서 전래된 순대문화가 지역특성에 따라 재창조된 동해안 지방의 고유한 향토음식으로서 음식문화사적인 가치를 갖는다. 이외에 강원도 속초시는 함경도 아바이순대가 고스란히 전해진 우리나라 유일의 지역으로 ‘속초 아바이순대’라는 향토음식으로 그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기도 하다.

  • 일본인의 입맛까지 정복한 강원도의 맛, 속초 명란젓

    한국인이 식용하는 물고기 중에 별칭(別稱)이 가장 많은 물고기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한때 ‘국민생선’이라 불릴 정도로 흔했던 물고기였지만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2000년대 이후 주산지인 동해에서 자취를 감춘 ‘명태(明太)’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명태의 별칭으로는 선어(鮮魚) 상태인 ‘생태(生太)’, 명태를 말린 ‘북어(北魚)’, 명태를 얼린 ‘동태(凍太)’, 명태를 반건조한 ‘코다리’, 명태 치어인 ‘노가리’, 설악산의 덕장에서 40일 이상 자연 동결과 해동을 반복하면서 건조되어 노란색을 띠는 황태(黃太) 등이 있다. 북어 살이 보슬보슬해 ‘더덕북어’로도 불리는 황태는 기온, 가공형태, 건조과정 등의 조건에 따라 ‘낙태ㆍ무두태ㆍ백태ㆍ찐태ㆍ통태ㆍ파태’ 등으로 구분된다. 최근 일과 후에 맥주 한 잔 가볍게 할 때 가장 인기 있는 안주로 급부상한 ‘먹태’가 바로 황태를 말릴 때 날씨가 따뜻해져서 색깔이 검게 된 ‘찐태“의 별칭이다.

     

    다양한 명칭을 지닌 명태는 조선시대에는 의외로 16세기 이전만 해도 이름도 없고 잘 알려지지 않은 요즘말로 ‘존재감이 없는’ 물고기였다. 명태를 확인할 수 있는 오래된 문헌으로는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함경도 경성도호부(鏡城都護府)와 명천현(明川縣)의 토산물로 ‘무태어(無泰魚)’를 기록하고 있다. 1777년(정조 1)부터 2년간 경흥부사(慶興府使)로 재직하면서 함경도 지방의 풍토를 기록한 홍양호(洪良浩)의 『북새기략(北塞記略)』 중 ‘공주풍토기(孔州風土記)’에는 두만강 하구의 어선들이 함경남도까지 왕래하면서 출어하여 청어와 대구어는 그물로 잡고 “무태어는 낚시로 잡는다(無泰魚以釣)”는 기록이 확인된다. ‘무태어’는 명태의 다른 이름으로 1884년(고종 21) 황도연(黃度淵)이 편찬한 『방약합편(方藥合編)』에 “북어(北魚)는 명천(明川)에서 산출되는데 곧 무태어(無泰魚)이다”라고 고증한 데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명태 말린 것을 ‘북어’라고 하지만 원래는 ‘북쪽 지방에서 나는 물고기’라는 뜻에서 명태를 지칭하는 다른 이름이었다. 북쪽 지방은 바로 함경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럼 명태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사용하였을까? 현재까지 알려진 기록에 의하면 적어도 17세기 무렵부터는 명태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 1652년(효종 3) 9월 10일 기사에는 궁중에 바치는 음식물의 목록에 규정된 대구알젓 대신 명란젓을 바친 강원도의 담당관원을 엄하게 문책하라는 내용에 ‘명태란(明太卵)’으로 처음 등장한다. 17세기 말 숙종 때의 문신이었던 최창대(崔昌大)가 1691년(숙종 17) 막내 외삼촌 이인엽(李寅燁)과 함께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면서 쓴 ‘수성가(水城歌)’라는 시에도 “어부들이 날마다 명태를 잡아서 쌓인 것이 언덕과 산 같아서 셀 수 없을 정도이다(漁夫日捉明太魚 積如丘山不可數)”는 내용에서도 ‘명태어(明太魚)’가 등장한다. ‘수성(水城)’은 강원도 간성현(杆城縣, 지금의 강원도 고성군)의 옛 별호(別號)이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반에는 명태의 상세한 정보를 언급한 문건이 증가하고 있다. 그중 19세기 이규경(李圭景)이 편찬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북어변증설(北魚辨證說)’에서는 명태의 명칭으로 고지미(膏脂美)ㆍ북어ㆍ명태ㆍ동태(凍太, 여기서는 겨울에 잡은 명태를 말함)ㆍ춘태(春太)ㆍ동명태(凍明太, 지금의 동태) 등을 언급하였다. 명칭이 다양해진 것은 조선전기와는 달리 조선후기에는 명태가 다양하게 이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당시 명태의 용도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매일 반찬으로 쓰인다. 마을의 가난한 백성들은 신령에게 제사를 모실 때 명태 말린 것을 제수로 삼는다. 가난한 선비의 집에서도 제사 때 이것으로 대신한다. 값은 싸지만 귀하게 쓰이는데, 단지 먹기만 하고 그 이름을 모르니 옳겠는가?(爲日用常饌 而閭巷細民 以此爲脯脩享神 儒家貧匱 亦充籩豆 物賤用貴者也 但食之而不識其名 可乎)

     

    조선후기 명태 수요의 증가는 17세기 이후 농업생산력의 발달로 인한 경제력 향상에 따른 식생활 변화의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18세기 말에는 이전 시기에 비해 곡물과 생선 등의 거래가 활발해졌고 그에 따른 어물의 수요도 증가하였다. 한편 18세기 중엽에는 도로와 바닷길 등의 유통망이 정비되면서 동해의 명태는 본격적으로 전국에 공급될 수 있었다. 특히 18세기 말에는 원산에서 강릉을 거쳐 평해, 울산, 부산을 연결하는 뱃길이 새로 열렸는데, 원산의 상인들은 북어를 배에 싣고 충청도 은진의 강경포구까지 운송하여 판매할 정도였다. 전국에 팔려나가는 명태는 북어의 형태로 가공되어 유통되었다.

     

    18세기 이후 일상식품으로 자리 잡게 된 명태는 버릴 것 없는 생선으로 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명태는 국ㆍ구이ㆍ강정ㆍ순대ㆍ식해ㆍ전ㆍ조림ㆍ찌개ㆍ찜 등 다양한 음식으로 이용이 가능한 생선이다. 이에 대하여 18세기 유중림(柳重臨)이 지은 『증보산림경제』 치선(治膳)편에는 명태는 “모두 동쪽과 북쪽 바다에서 나는 것으로 맛 좋은 물고기이다. 탕, 구이, 젓갈 모두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명태의 아가미, 창자와 알은 각기 서거리젓, 창란젓과 명란젓으로 가공되어 김치용 젓갈과 밥반찬으로 사용되었다. 17세기 말 최창대가 강원도 간성의 어부들이 잡은 명태가 쌓인 것이 언덕과 산 같다고 표현할 정도로 명태는 흔한 생선이었지만, 명태알로 담근 명란젓만큼은 귀하게 여겨져서 궁중에서도 명란젓이 대구알젓을 대신하기에 이를 정도였다. 

     

    근현대시기에 들어서는 속초가 명태잡이와 명란젓 생산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1907년 원산에서 어업에 종사하던 일본인 히구치 이츠하(樋口伊都羽)가 강원도 양양에 히쿠치점(樋口店)이라는 명란젓 가공공장을 개설하였다. 그는 당시까지 어민들이 만들어 먹던 명란젓을 상품화하여 ‘멘타이코(明太子)’라는 상품명으로 일본으로 수출하였고 시모노세키항을 통해 일본 전역에 팔려 나갔다. 일본에서 명란젓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수요가 높아지자 이후 일본 상인들이 국내에 진출하여 명란젓 제조업에 종사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명란젓갈

     

    2019년 기준으로 명란젓 소비량에 있어서 일본은 한국보다 10배 이상 높은 명란젓 최대 소비 국가이다. 일본에서 거의 국민식품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보니 일본인들은 ‘멘타이코’가 일본의 오래된 전통음식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1876년(고종 13) 병자수호조규가 체결된 이후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다녀온 김기수(金綺秀)가 남긴 일본 견문록인 『일동기유(日東記游)』에는 일본인이 본래 명태나 명란젓을 식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글이 실려 있다. “우리나라 사람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북어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지금 박물원(博物院)에 설치된 어류[鱗族] 가운데 유독 북어만 보이지 않으니 일본사람들도 ‘없는 것은 북어뿐이라’고 하였다”. 김기수가 일본의 박물관을 견학하면서 어류 박제 전시물을 보고 남긴 소감이다. 글을 통해 일본에서는 명태가 식용 가능한 물고기에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속초시는 1909년 부산에서 원산까지 운항하는 기선(汽船) 융희호(隆熙號)가 대포항을 경유하면서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에는 속초항 개발을 계기로 동해안의 신흥도시로 부상하면서 인구도 급속히 증가하여 1942년 속초읍으로 승격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 후반에는 부산에 이어 전국 제2의 어획고를 올리면서 속초는 우리나라 수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주된 어획 어종은 명태와 오징어였다. 속초는 수산업의 활황에 따라 속초의 명물인 명란젓을 가공하여 수출하였다. 아직 한일관계가 복원되기 이전인 1959년 일본에 명란젓과 성게젓을 수출하였고, 1962년에는 미국에 최초로 ‘코드 피쉬 로우(Cod fish Roe)’라는 상표를 달고 명란젓을 수출하였다.


    속초시는 우리나라 명란젓을 처음으로 외국에 알리고 수출한 전진기지로서의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한때 최고의 어획고를 올렸던 그 많던 명태는 20세기 후반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양생태계의 변화로 말미암아 1990년대 후반부터 감소하기 시작해 2000년대 들어서는 동해안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 명태가 사라진 이후에도 속초시는 비록 이웃집 것이지만 러시아산 수입 명란으로 젓갈 생산의 전통과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 관광업과 수산업이 발달한 속초관광수산시장

    속초는 강원도 동해안 중북부에 위치하고,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관광도시이다. 이곳에 위치한 속초관광수산시장은 예전부터 수산물과 건어물 시장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현재는 인근에 위치한 관광자원과 연계하여 점점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강원도의 대표 시장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속초관광수산시장은 속초종합중앙시장과 속초중앙재래시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중앙 시장상가에는 230개의 점포가 있으며, 주변으로 수산물과 젓갈 골목, 닭전 골목, 청과 골목, 고추 골목, 순대 골목 등과 같은 재래시장과 시장을 찾는 사람들의 쉼터인 빛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속초관광수산시장
    속초관광수산시장

    속초관광수산시장의 형성

    속초장이 언제 형성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조선의 시장』(1941)에 1930년대 양양 지역에는 7개의 장이 있었으며, 이중 속초장은 매월 3일과 8일에 장이 개설되었던 오일장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북쪽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속초장에 자리를 잡고 점포를 만들면서 상설시장이 되었고, 중앙동 지역으로 상권이 이동하면서 속초 중앙시장이라 불렸다. 이후 2006년 전통시장 활성화 사업이 진행되면서 속초관광수산시장으로 이름을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어물시장에서 관광수산시장으로

    속초관광수산시장은 동해에서 많이 잡히는 수산물을 기반으로 전국적으로 수산물과 건어물 시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60~70년대는 ‘마른명태시장’으로 80~90년대는 ‘마른 오징어시장’으로 불렸으며, 건어물을 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였던 시장이었다. 그러나 다른 전통시장처럼 점차 쇠퇴하였다가 2006년 다양한 관광자원과 연계하여 활성화 사업을 진행하면서 다시 활기를 찾고 있다. 또한 시장 내에 다양한 먹을거리를 판매하면서 맛 기행의 명소가 되었다. 속초관광수산시장의 대표 먹거리는 동해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싱싱한 수산물을 비롯해 오징어순대, 아바이순대, 닭강정 등이 있다.


    순대 골목의 오징어순대와 아바이순대

    속초 오징어순대
    속초 오징어순대

    속초관광수산시장의 순대 골목에서 시장의 대표 먹거리인 오징어순대와 아바이순대를 맛볼 수 있다. 오징어순대는 오징어 속에 찹쌀과 다양한 야채를 넣고 푹 삶아낸 것으로 뱃사람들이 바로 잡은 오징어에 밥과 다양한 반찬을 넣어 먹으면서 유래되었다. 한편 아바이순대는 돼지 대창 속에 선지, 찹쌀, 배추 우거지, 숙주 등을 넣고 찜통에 쪄서 만든 것으로 한국전쟁 이후 속초에 정착한 실향민들이 즐겨먹었던 함경도 지방의 전통음식이다.


    속초관광수산시장의 대표 먹거리 닭강정

    속초관광수산시장을 방문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찾는 대표 음식은 닭강정이다. 시장 내에 형성된 닭전 골목에서 판매되고 있는 닭강정은 각 점포마다 특색 있는 재료를 더해 맛을 달리하고 있다. 특히 가마솥에서 바삭하게 튀긴 닭에 초청과 청양고추가 결합된 소스로 버무린 ‘만석닭강정’이 가장 유명하다. 

  • 만선의 꿈, 귀향의 꿈 - 속초 교동 칠성조선소

    해방이 되었을 때 강원도 속초는 38도선 이북이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쪽 땅으로 바뀌었고, 남한에서 최북단 어항(漁港)으로 분류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동해안 정어리 풍어로 특수를 누리기도 했던 속초는 여전히 명태와 오징어가 잘 잡히는 포구였다. 1950년대 초반 함경도와 북한 강원도 실향민들이 만선과 귀향의 꿈을 안고 속초로 몰려들면서 속초 인구는 급속히 증가했다. “명태 마릿수보다 사람 수가 더 많아졌다”는 우스개가 생겨날 정도였다.


    속초시 청호동 ‘아바이 마을’도 1951년 봄 무렵 생겨났다. 고향 땅 밟기를 학수고대하는 실향민들이 청초호 북동쪽 모래사장에 움막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동네가 ‘아바이 마을’이다. 아저씨를 뜻하는 함경도 사투리를 마을 이름으로 내세울 정도로 함경도 출신 실향민이 주로 몰려 사는 동네였다. 1950년 12월 흥남 철수 작전 당시 미군 함정과 상선을 타고 내려온 피란민만 10만 명 가까이 되었다. 고향과 한 발이라도 가까운 속초에 살기를 원한 실향민들은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교동 칠성조선소

    최칠봉 씨는 1952년 청초호 서쪽 호숫가에 조선소를 열었다. 최 씨 역시 함경도 원산(현재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원산) 출신 실향민이었다. 일찍이 목선 만드는 기술을 익힌 최 씨는 형제들과 힘을 합해 호숫가 뻘밭을 매립했다. 오늘날 속초 칠성조선소라 불리는 이곳(강원도 속초시 중앙로 46번길 45)의 원래 간판은 ‘원산조선소’였다. 조선소는 속초의 어업이 점점 더 활기를 띠면서 번창했다.


    1950년대 속초의 어획고는 부산에 이어 전국 2위였다. 1957년에는 명태 오징어 청어가 대풍이었다. 하루 120마리가 잡혔다는 기록도 있다. 1954년 속초에는 500여 척에 이르는 크고 작은 어선이 있었다. 고기잡이배 주문은 계속 들어왔다. 1963년 통계로 속초의 배는 700척으로 늘었다. 당시 속초 인구 5만 명 가운데 1만5,000명이 어부였다.


    1964년 한일협정은 속초 어업에 타격을 주었다.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했던 어업 구역이 12해리(약 22㎞)로 축소되었다. 전관수역 밖이 한·일 공동규제수역이 되면서, 일본의 대형어선이 몰려왔다. 어자원이 고갈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선이 대형화하는 추세도 가속화되었다. 그래도 칠성조선소는 여전히 바빴다. 1960년대에 건조된 무동력선이 1,700여 척이나 되었다고 하니, 칠성조선소 물량도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1968년 어로한계선이 기존보다 5마일 남쪽으로 후퇴했다. 명태 어장은 북쪽 함경북도 청진 앞바다에 주로 형성되었고, 휴전선 근처의 명태도 잡기 어려워졌다. 1971~1973년 속초 등 동해안 어부들은 극심한 흉어기를 맞았다. 1970년 정부가 ‘노가리는 명태 새끼가 아니다’라는 엉터리 해석을 내리면서, 노가리 남획이 이어졌고 명태는 씨가 말랐다. 점점 줄어든 명태 어획고는 2008년 급기야 0에 이르렀다.

    교동 칠성조선조 내부
    교동 칠성조선조 내부

    어획고가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선 또한 목선에서 강화플라스틱 재질의 배로 바뀌었다. 칠성조선소에서 건조되어 청초호 지나 바다로 나가는 고깃배는 급격히 줄었다. 고기잡이 항구로서 속초의 시대가 막을 내렸듯이, 칠성조선소의 전성기도 1970년대를 지나면서 저물었다. 만드는 배는 없어지고, 고장난 배를 수리하는 게 고작인 시대로 접어들었다. 칠성조선소 경영은 2세인 최승호 씨가 맡았다. 최승호 씨는 어선 건조와는 무관한 직업을 갖고 있었으나, 어려움을 겪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조선소를 맡았다고 한다.


    명맥이나 유지하던 칠성조선소는 2013년 3세인 최윤성 씨와 부인 백은정 씨가 이어 받았다. 최윤성 씨는 조소(彫塑) 작가였으나, 운명처럼 배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미국에 가서 레저용 카누와 카약 제작법을 익혀 돌아왔다. 하지만 아직 레저용 배 수요가 많지 않은 터라 최윤성 씨 부부가 칠성조선소 한 귀퉁이에 연 ‘와이 크래프트 보트’는 개점휴업을 벗어나지 못했다.


    칠성조선소는 2017년 여름 더는 배를 건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최윤성 씨 부부는 칠성조선소 내 사택을 ‘칠성조선소 살롱’이라는 카페로 개조했다. 최 씨 3대가 살던 집이다. ‘칠성조선소 살롱’은 관광객이 몰리는 명소가 되었고, 과거 칠성조선소는 2018년 뮤지엄, 오픈 팩토리 등 문화공간으로 바뀌었다. 칠성조선소의 역사는 풍어의 꿈이 넘치던 어향에서 관광도시로 변한 속초의 현대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아바이 마을 역시 고향을 그리는 실향민 어부들의 동네에서 속초에 가면 갯배 타고 꼭 들러봐야 할 장소로 바뀌었다. 아바이 마을은 영화 「만추」(1981년)의 무대이자, 드라마 「겨울동화」(2000년)의 무대로 유명해졌다.


    서쪽에 칠성조선소, 동북쪽에 아바이 마을이 있는 청초호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속초에 살던 황룡과 청룡은 하늘로 올라가기를 소원했다. 여의주를 물고 달빛 정기를 받으면 하늘로 올라갈 있었으나, 이무기가 황룡의 여의주를 훔쳐갔다. 승천 기회를 놓친 황룡이 흘린 눈물은 청초호 북쪽 영랑호가 되었고, 하늘에서 이를 보고 슬퍼한 청룡이 흘린 눈물은 청초호가 되었다는 것이다. 청초호의 밤을 밝히면 하늘길이 열린다는 믿음에 따라 청호동 사람들은 해마다 정월이면 불을 밝히는 전통을 지켜왔다.


    …

    누가 청호동에 와

    새끼줄에 거꾸로 매달린 오징어를 보며

    납작할 대로 납작해진 한반도를 상상한 적은 없는지

    혹시 청호동을 아는지


    이상국 시인의 시 「청호동에 가본 적이 있는지」 마지막 부분이다. 아바이들의 만선의 꿈, 귀향의 꿈이 가득했던 칠성조선소는 문화 명소로 변신하는데 성공했지만, 청룡과 황룡의 슬픔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 속초에 뿌리내린 실향의 맛, 함흥냉면 이야기
    속초의 대표 음식 중 하나로 자리 잡은 함흥냉면. 오늘날 전국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이 냉면은 사실 1950년대 실향민의 아픔과 함께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음식이다. 6·25전쟁 당시, 함경도 출신의 실향민들이 속초에 정착하면서 전래했고, 고향을 그리워하던 사람들의 기억이자 문화유산이 되었다.

    속초 냉면의 역사는 1951년 ‘함흥냉면옥’이 간판을 내걸며 시작되었다. 1973년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함흥냉면은 1·4후퇴 때 월남한 함경도 실향민들이 북녘의 손맛을 재현한 음식이었다. 당시에는 함흥냉면이라는 이름조차 낯설었지만, 고향의 맛을 간직한 덕분에 떠나온 산하를 그리워하던 이들이 속속 모여들며 곧 지역을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다. 현재 함흥냉면옥은 3대째 가업을 이어가며 지금도 속초의 냉면 문화를 지키고 있다.

    1960년대 냉면배달 모습
    1960년대 냉면배달 모습(사진출처:속초문화원)

    메밀이나 녹말을 섞는 다른 지역 냉면과 달리, 속초 함흥냉면은 고구마 전분만을 주재료로 사용한다. 이 점이 다른 냉면과 가장 큰 차별점이며, 특유의 쫄깃한 면발을 만들어내는 비결이다. 면발은 손이 많이 가는 공정을 거쳐서 탄생한다. 고구마 전분을 따뜻한 물로 익반죽해 국수틀에서 뽑아낸 뒤, 끓는 물에 약 5분 정도 삶은 후 찬물에 여러 번 헹구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사리가 완성된다. 냉면의 진가는 육수에서도 드러난다. 소 엉덩잇살을 푹 고아 만드는 육수는 장작불로 1시간 이상 끓여내 깊은 맛을 자랑한다. 이 진하고 시원한 육수 덕분에 속초의 여름은 훨씬 견딜 만했다고 한다.

    속초 함흥냉면은 비빔냉면과 회냉면 두 종류로 나뉘는데, 지역 특성을 반영한 명태회냉면이 특히 유명하다. 함경도에서는 가자미나 가오리, 광어 등을 썼으나, 속초에서는 흔히 잡히던 명태를 사용했다. 양념 또한 특별하다. 고추와 마늘, 생강을 기계로 갈지 않고 전통 방식인 ‘똑딱방아’로 직접 찧어 사용한다. 손은 많이 가지만 재료 본연의 감칠맛과 향이 살아난다. 면발 위에 얇게 썬 회를 넣고 특제 양념장에 무치면, 생선의 비린 맛 없이 담백하고 매콤한 맛이 일품이다.

    이 회냉면은 전국 어디서도 맛보기 힘든 속초만의 음식으로 손꼽히며 점차 속초를 찾는 관광객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오늘날 속초의 냉면집은 수십 곳에 이르지만, 그 뿌리는 모두 1951년의 함흥냉면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함흥냉면옥’에는 과거 유명 배우였던 김희갑을 비롯하여 많은 연예인도 속초에 올 일이 있으면 반드시 들렀다고 한다.

    함흥냉면(명태회냉면)
    함흥냉면(명태회냉면)(사진출처:속초문화원)

    냉면은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실향민들에게는 여름의 더위를 없애주는 별미이자 겨울철 고향을 추억하며 먹던 위로의 음식이었다. 함경도의 맵고 깊은 맛, 고구마 면의 쫄깃함, 진한 육수, 그리고 바다 사람들의 끈질긴 삶이 담긴 이 냉면 한 그릇은 이제 속초라는 도시의 일부가 되었다.우리가 속초에서 냉면을 먹는다는 건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한 시대의 역사를 함께 맛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는 고향을 잃고 바닷가에 정착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문화적 자산이자, 지금도 살아 숨쉬는 실향의 기억이다.

  • 속초 청초호의 청룡과 영랑호의 황룡 이야기

    청초호
    청초호(사진출처:속초문화원)
    청초호
    청초호(사진출처:속초문화원)
    영랑호
    영랑호(사진출처:속초문화원)
    영랑호
    영랑호(사진출처:속초문화원)

    설악의 산줄기와 동해의 파도가 맞닿은 곳, 속초의 호수에는 신비로운 두 용의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옛적, 청초호에는 푸른 비늘을 두른 숫룡 ‘청룡’이 깊은 물 속에 깃들었고, 영랑호에는 황금빛 비늘이 찬란히 빛나는 암룡 ‘황룡’이 살고 있었다. 두 용은 서로의 존재를 알면서도 하늘의 이치와 인간 세상의 눈을 피해 은밀히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믐밤이면 두 호수 밑의 비밀스러운 물길을 따라 서로를 찾아가 깊은 사랑을 나누었고, 그 순결한 정성과 애틋한 보살핌은 땅에 평화와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하늘은 이들의 헌신에 감동하여 특별한 은총을 내렸다. 용의 입에 물린 여의주가 달빛의 정기를 가득 받을 때, 하늘문이 열리고 그 길을 따라 승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청룡과 황룡은 매일 밤 달을 우러러보며 그날만을 기다렸다. 서로의 손을 잡고 하늘로 오르는 순간, 세상은 더욱 빛나리라 믿으며 긴 시간을 인내했다.

    그러던 어느 보름을 앞둔 밤, 마침내 여의주가 달빛의 기운을 받아 찬란히 빛나고 하늘의 문이 열렸다. 청룡과 황룡은 기쁨에 겨워 승천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그 순간, 두 용의 오랜 사랑을 질투한 한 이무기가 나타나 황룡의 여의주를 은밀히 빼앗아 버렸다. 여의주가 사라진 줄 몰랐던 청룡은 홀로 하늘로 솟구쳐 올랐고, 황룡은 승천하지 못한 채 지상에 남겨졌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황룡은 끝없는 슬픔 속에서 영랑호를 지켰다. 그녀의 눈물은 오랜 세월 영랑호의 물을 더욱 맑고 투명하게 했다. 하늘에 오른 청룡 또한 황룡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비가 되어 청초호에 스며들었고, 호수를 푸르고 청명하게 만들었다.

    세월이 흐르자, 이 안타까운 사연을 전해 들은 속초 주민들은 깊은 연민을 느꼈다. 사람들은 하늘에 간절히 기원했다.
    “부디 청룡을 다시 지상으로 보내어 황룡과 재회하게 하소서.”
    주민들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고, 끝내 하늘의 답을 받았다.
    “청초호의 밤을 환히 밝히면 하늘길이 열리고, 그 길로 청룡이 지상으로 내려올 수 있을 것이다.”

    그 후부터 주민들은 청초호의 밤마다 횃불을 밝히고 불꽃을 피워 올리며 하늘길이 열리기를 빌었다. 이 풍습은 훗날 수령이 새로 부임할 때 주민들이 성대한 불꽃놀이로 맞이하는 전통, 이른바 ‘논뫼호 불꽃놀이’로 이어졌다.

    하늘길이 열리고 청룡이 내려왔다
    하늘길이 열리고 청룡이 내려왔다

    주민들의 간절한 염원 끝에 청초호 밤하늘에 불꽃이 수놓아지던 날, 하늘문이 열리며 청룡이 지상으로 내려왔다. 오랜 기다림 끝에 재회한 두 용은 눈물과 환희 속에서 서로를 끌어안았다. 이후 청룡과 황룡은 속초 땅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어 세월을 두고 사람들을 보살피며 재난을 막아주었다. 풍어와 풍년이 이어졌고, 마을은 번영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속초의 산과 바다, 그리고 두 호수에 깃든 신령한 기운은 바로 이 두 용의 헌신적인 사랑과 주민들의 정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청초호와 영랑호는 맑고 청명한 빛을 간직하고 있다. 주민들은 호수의 고요한 물결에서 두 용의 눈물을 떠올리고, 밤하늘에 터지는 불꽃에서 그들의 재회를 기억한다. 이처럼 속초 청룡과 황룡의 이야기는 사랑과 기다림, 그리고 공동체의 간절한 염원이 빚어낸 신화로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 평화와 공동체 희망의 상징, 실향민문화축제 이야기
    이북 실향민의 삶과 문화는 과거의 아픔으로만 남아 있지 않다. 현재를 살아가는 세대에게 뿌리의 기억을 일깨우고, 남북의 경계를 넘어서 미래를 열어가는 소중한 자산이다. 2016년 시작된 ‘전국 이북실향민 문화축제’는 실향민의 슬픔을 달래는 동시에, 사라져가는 실향민 문화를 보존하고 새로운 가치를 발굴하여 확산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2016년 전국 이북실향민 문화축제
    2016년 전국 이북실향민 문화축제(사진출처:속초문화원)
    2016년 전국 이북실향민 문화축제
    2016년 전국 이북실향민 문화축제(사진출처:속초문화원)

    제1회 축제는 속초시가 주최하고 전국이북실향민문화축제추진위원회의 주관 아래 열렸다. 단발적인 기념행사로 끝나지 않기 위해 2017년 제2회부터는 속초축제위원회가 주관하며 체계적 운영 기반을 다졌고, 2021년부터 (재)속초문화관광재단이 전담하여 전국적인 브랜드 축제로 자리 잡았다. 어느덧 2025년 제10회를 맞이하는 이 행사는 전국에서 유일한 실향민 축제로서의 위상을 굳혔다.

    제8회 실향민문화축제 모습
    제8회 실향민문화축제 모습(사진출처:속초문화원)
    제8회 실향민문화축제 모습
    제8회 실향민문화축제 모습(사진출처:속초문화원)

    축제의 방향성은 분명하다. 세대와 지역을 아우르는 화합과 남북 평화 교류의 장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실향민의 역사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제작, 속초 실향민 요리를 소개하는 유튜브 ‘마숩다, 속초’ 운영, 이북 전래 놀이문화 복원 등 콘텐츠 발굴을 병행했다. 학술대회를 통해 실향민 문화의 학문적 토대를 다지는 한편, 메타버스 아바이마을 테마거리와 SNS 채널을 구축해 디지털 세대와의 접점을 넓혔다. 또한 밀키트를 개발하고, 이북의 놀이 전시와 체험장을 운영하며 실향민 문화를 대중 속으로 확산시켰다.

    이러한 과정들이 모여 하나의 실향민 문화 축제로 귀결된다. 코로나19의 영향이 남아있던 2022년에는 온·오프라인을 결합한 하이브리드형 축제가 열렸다. 아바이마을을 주무대로 삼고, 망향탑을 행사장으로 옮겨 세워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였다. 2023년 제8회 축제는 속초 엑스포잔디광장에서 참여형 프로그램 중심으로 개최되었다. 망향제와 지역 문화예술 공연, 대규모 콘서트, 학술 포럼이 이어졌으며 거리 퍼포먼스와 이북5도 무형문화재 축제, 대동놀이까지 다채로운 프로그램 구성이 마련되었다. 실향민 1~2세대가 간직한 애환을 기리면서도 3~4세대와 일반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며 그 가치를 확장한 것이다.

    이 축제는 분단의 현실을 문화적 연대로 풀어낸 평화 교류의 상징이다. 실향민 문화를 기록하고 공유하며 먹거리와 놀이, 예술로 풀어내 잊힐 뻔한 아픔을 공동체적 희망으로 전환한다. 무엇보다 세대 간 단절 없이 젊은 세대도 함께 즐기고 경험하면서 과거와 미래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속초의 바다와 호수, 그리고 아바이마을의 골목마다 서린 실향민의 이야기는 더 이상 과거의 기억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제 속초의 정체성이자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를 상징하는 소중한 자산으로 빛나고 있다. 전국 유일의 실향민축제는 앞으로도 아픔을 치유하고 문화를 확장하며, 미래 세대와 함께하는 살아 있는 이야기로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