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곳곳에는 다양한 이름의 마을들이 있다. 그 마을에는 각각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서로 다른 도시에 똑같은 동 이름이 있는가 하면, 역사적인 한 인물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새로운 지명을 낳기도 했다.
지명의 유래를 유형별로 나누어 그중 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지명들을 살펴보았다.
지명에 얽힌 이야기 중에는 식물보다 동물에 관한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고, 그중에서도 현실에는 없는 상상의 동물 용에 관련된 마을이 많다. ‘룡’이나 ‘용’이 붙은 지명에는 전부 용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있다. 경북 경산시 용성면의 구룡마을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간 전설이 있고, 충남 아산시 배방읍 회룡리는 마을의 수호신 황룡이 다시 돌아온 마을이다. 전북 군산시 고룡동 용당포는 용이 승천하면서 만든 바다이다. 용이 되기 전의 상태를 이무기라고 하는데, 이무기 관련 지명도 있다. 전북 남원시 산내면의 뱀사골은 이무기가 용이 되지 못하고 죽은 골짜기이고, 경남 하동군 진교면은 고관대작의 딸들에게 해코지하는 이무기를 용으로 만들어 화를 면한 마을이다.
용 다음으로 많은 동물은 여우와 호랑이다. 색시로 둔갑한 여우가 죽어 나간 경북 칠곡군 왜관읍 여우골, 꼬리 긴 여우가 고갯짓해서 가르쳐준 마을인 전북 진안군 성수면 외궁리 고미동이 여우와 관련되어 있고, 사냥꾼이 호랑이와 함께 지낸 마을 대전 중구 호동(범골), 호랑이가 물 마시고 춤을 추던 충북 청주시 호무골이 호랑이와 관련되어 있다.
네발짐승만큼이나 새 관련 지명도 많다. 경북 의성군 세촌리 새목골은 새가 많이 모이는 마을이다. 천 마리 닭으로 지네를 없앤 경남 하동군 애치리의 봉계마을, 세 마리의 학이 하늘로 오르면서 생긴 전남 목포시 삼학도, 은혜 갚은 까치들이 살았던 충북 청주시 흥덕구 남촌리 까치말, 은혜 갚은 오리가 살던 경북 청송군 주왕산면 사부실 등 전국 곳곳에 다양한 새 관련 지명이 존재한다.
전국 어느 지역이나 효자동, 효자촌 등의 지명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충효사상을 높이 기렸던 전통문화에 기인하며, 특히 임금과 관련된 ‘충’은 서민과 거리가 있는 덕목이지만 ‘효’는 부모가 있는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덕목이기에 전국적으로 다양한 미담과 설화가 퍼져 있다. 아픈 부모를 위해 시체의 목(알고 보니 산삼)을 잘라 바친 아들(강원도 춘천시 효자동과 거두리), 한겨울에 숭어를 구해온 효자(경남 거제시 연초면 효촌), 호랑이도 감동시킨 효자(경북 포항시 남구 효자동), 뱀알로 아버지의 병을 고쳐드린 달래(전북 고창군 성송면 뱀내골), 개고기가 먹고 싶다는 노모를 위해 호랑이로 둔갑해 개를 잡아 온 아들 (전북 진안군 용담면 범바위), 삼을 캐어 부모님의 병을 고친 오누이(울산시 서부동 삼밭골), 꽃적을 구워 시아버지를 공양했던 며느리(대전 중구 문화동 꽃적마을), 원님의 구슬을 잃어버린 시아버지가 밥을 못 먹고 시름시름 앓자 잉어를 구워드린 정노인의 며느리(전남 나주시 영산강), 잉어를 스스로 뛰쳐나오게 한 효자(충북 음성군 삼성면 이양골) 등 효자, 효녀, 효부의 사연이 다양하고도 많다.
예부터 발복지지(복을 받는 곳)와 금시발복(이번 생에 복을 받는 것)은 모든 사람의 염원이었다. 그래서 마을 지명 중에는 부자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있다. 부자가 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꿈에서 만난 여인이 자기 발을 묻어달라고 하여 시신을 묻고 제사까지 지내준 황씨는 경기도 가평군 이화리에서 황금화로를 얻어 부자가 된다. 스님의 말에 따라 황폐한 억새밭을 일구던 여씨는 금덩이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는 금덩이를 가지지 않고 절에 전해주었고, 여씨가 일군 밭에 사람들이 와서 잘살게 되니 이곳이 광주광역시 광산구 산막동 보화마을이다. 지나가던 지관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묫자리를 잘 써서 부자가 된 김씨도 있다. 김씨는 울산광역시 남구 흥성구만에 청어떼가 몰려와 구만석 부자가 되었다. 이 이야기들은 결국 마음보를 잘 써야 부자가 된다는 교훈을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자라도 마음보를 나쁘게 쓰면 망한다는 교훈이 담긴 지명도 있다. 천석 부자였으나 스님에게 시주하지 않고 편하게 돈 벌 궁리만 했던 부자 서천석은 망했고(충북 청주시 사창동 천석골), 집에 손님이 너무 많이 와서 밥 차리는 게 힘들었던 박수인의 며느리(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입석리)와 홍개(세종시 금남면 홍개터)는 소원대로 손님도 사라지고, 재물도 함께 사라져 집안이 망한다. 이와 반대로 욕심쟁이 부자가 어느 날 깨닫고 돈을 나누어준(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비포) 이야기도 전한다. 결국, 부란 이웃과 나눌 때 영원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들이다.
설화에 따른 지명만큼이나 역사적인 사건에 따른 지명도 많다. 역사적인 사건 중에는 좋은 일도 있지만, 대개는 비극의 현장이 지명으로 남아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우리나라 남쪽 지방에는 왜구의 침략이 잦았다. 고려말 김순의 처 최씨가 왜구의 겁탈을 피해 가슴을 은장도로 도려내고 자결한 곳이 경남 거창군 거창읍 절부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세종시 전동면 미곡리 피숫골에선 왜군들이 피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고,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처녀골에선 결혼을 앞두고 왜군의 침입을 받아 도망가던 순아와 아버지가 죽었다. 반대로 왜군이 죽은 곳도 있다. 경기도 시흥시 3천병마골은 신립장군의 병사들이 숨어있던 곳이고, 맞은 편 피흘리고개는 왜군들이 주둔하다 신립의 병사들에게 대패한 곳이다. 왕위에 올랐다 죽임을 당한 사람만큼 드라마틱한 비극의 주인공은 없을 것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살창리는 고려 창왕과 조선 영창대군의 비극이 서려 있는 곳이다. 고려 우왕의 아들 창왕은 공민왕의 후손이 아니라 신돈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고, 그가 죽은 마을은 창왕이 죽었다 하여 살창리라 불렸다. 오랜 세월이 지나 그곳에서 광해군의 동생 영창대군이 7세 때 죽임을 당하였다. 왕위를 삼촌에게 뺏기고 강원도 영월에 유배 가서 죽은 단종은 그를 그리워하던 사람이 많았으니 그나마 위로가 되었을까? 경기도 남양주시 사릉리는 단종과 혼인했으나 18세 때 헤어지고 82세까지 혼자 살았던 정순왕후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직제학 김성미는 단종이 유배되자 사위와 함께 경북 구미시 고아읍 오로리에 들어와 단종을 그리워하며 살다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