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첨성대 앞마당에서 열리는 '신라소리축제 에밀레전'

    성덕대왕신종의 가치를 알리기 위한 축제 

    신라소리축제 에밀레전 포스터 이미지
    신라소리축제 에밀레전 포스터(사진출처:BBS대구불교방송)


    신라소리축제 에밀레전은 통일신라시대 때 조성된 성덕대왕 신종(일명 에밀레종)을 주제로 축제이다. 성덕대왕신종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범종으로, 국보 제29호이다. 성덕대왕신종은 경덕왕이 부친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든 종으로 혜공왕 때인 771년에 완성되었다. 성덕대왕신종은 한국 최대의 거종(巨鐘)으로서 제작 연대가 확실한 동종으러,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범종을 대표한다.


    성덕대왕신종에는 아기를 공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일명 '에밀레종'이라고도 부른다. 신라소리축제 에밀레전은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우리 방식으로 만들어진 ‘성덕대왕신종’의 가치를 알리고,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2년에 처음으로 개최되었다. 신라소리축제 에밀레전은 BBS불교방송이 주최하고, 문광부와 경상북도 등이 후원하며 매년 10월에 경주 첨성대 잔디광장에서 개최된다.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문화관광축제의 2015년 유망축제이다.

     

    직접 범종을 타종해보자

    신라소리축제 에밀레전은 ‘에밀레 주제관, 무대공연 프로그램, 전시·문화체험마당, 신라 간등회 재연, 전통문화공연’ 등으로 구성된다. 에밀레 주제관에서는 “6개의 신라시대 범종과 모형종 전시를 비롯해 성덕대왕 신종 표면의 기록물인 명문 해석과 문양 설명 등 성덕대왕신종의 특징과 과학성, 주조과정 등을 그림으로 쉽게 풀이해 소개”한다. 무대공연 프로그램으로는 “천년의 울림: 경주시민의 천년의 난타, 천년의 혼 : 경주청소년의 천년의 흥무, 천년의 흥 : 경주시민의 천년의 풍물” 등이 진행된다. 


    전시․문화체험마당 프로그램으로는 ‘신라복 입기 체험, 도자기 풍경만들기 체험, 양초․비누 공예체험, 짚풀공예․솟대 체험, 산야초․꽃차 만들기 체험, 활 만들기 체험, 다도예절․차 생활 예절, 전통 국악기 체험관, 금관․소원 백등 꾸미기, 한지 공예 전시 및 체험, 에코백 만들기 체험, 알록달록 천연염색 물들이기, 처용 문배도 그리기, 야생화 자수, 천연기념물 동경이와 함께, 석고방향제 체험, 사경․서각․탁본 체험, 단청 문양 그리기, 나무를 손으로 향기나게’ 등이 진행된다. 신라 간등회(看燈會) 재현은 “한국 전통 등의 효시인 신라시대 간등(看燈)을 재연하는 행사”이다. “대형 공작등과 용(龍)등, 황룡사 9층 모형탑 등을 비롯한 50여 개의 대형 전통 등이 첨성대와 함께 은은한 야경을 연출”한다. 그리고 6톤 규모의 ‘에밀레 모형종’ 타종을 할 수 있다. 전통문화공연으로는 경북도립국악단의 공연이 있다.

    경주 성덕대왕신종
    경주 성덕대왕신종

    가족 참여형 축제 

    『2015년 문화관광축제 종합평가 보고서』에 의하면, 신라소리축제 에멜레전은 “축제장에 일반적으로 조성되는 먹거리 장터를 조성하지 않아 축제의 주요 프로그램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였으며, “가족단위 방문객이 많았는데 어린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체험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편, “민간(BBS 불교방송)이 주최하는 행사이며, 공공부문(경상북도, 경주시 등)은 지원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하는 문화관광축제로 육성하기 위해서는 “공공부문에서의 역할(예: 프로그램 발굴, 실크로드 경주 등과의 연계성, 홍보 등)을 보다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경주 성덕대왕신종
    경주 성덕대왕신종
    경주 성덕대왕신종
    경주 성덕대왕신종

  • 신라천년 고도 경주에서 오래 이어져온 ‘신라문화제’

    화랑과 원화를 만나다 

    찬란했던 신라문화와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신라문화제의 주요 행사는 화랑과 원화 선발대회로부터 시작된다. 아름답고 덕을 갖춘 현 시대의 젊은 화랑과 원화를 선발하여 문화제의 서제와 현관 안내, 각종 행사 안내에 홍보요원으로 활용한다. 진흥왕 순수비 중 영토확장을 담고 있는 마운령 순수비와 황초령 순수비에 포함된 변제지역 순수 행차 행렬을 재현하는 ‘진흥왕[순수관경] 행차’는 고도 신라를 재현하였다.


    진흥왕 행차와 연계하여 신라를 배경으로 한 영화, 만화, 드라마 등의 캐릭터로 분장하고 퍼포먼스를 펼치는 ‘코스프레 퍼레이드’도 베풀어진다. 한중우호의 숲에는 조명을 설치해 야간에 불빛 축제를 개최하여 볼거리를 선사한다. 천년의 고도로 회귀한 듯한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다. 


    신라문화제 포스터 이미지
    신라문화제 포스터(사진출처:경주시)


    새롭게 창작된 신라의 문화예술 경험 

    신라의 고도인 경주에서 축제 기간 동안 신라문화를 그대로 재현하거나 새롭게 재해석하여 창작한 형태로 즐길 수 있다. 새롭게 창작된 공연으로는 마상무예공연을 비롯해, 창작 음악극 ‘치술성모’, 인형극 ‘동경이 도둑 소탕작전’, 창작오페라 ‘마담수로’, 경주시립신라고취대 공연인 ‘화랑, 풍류로 깨어나다’, ‘덴동어미 화전놀이 마당극' 등이 있다.


    재현된 신라문화 체험은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전통혼례식을 비롯해 신라역사주제관의 전시를 통해 볼 수 있다. 전시관에는 ‘왕가의 식이요법(최초의 음식처방서 식료찬요를 말하다)’을 비롯하여, ‘신라 약선음식 체험(푸드닥터 차은정의 치유반상)’, ‘K-뷰티 화랑 신라시대의 화장법 체험’, ‘신라문화제 변천사 사진 및 소품전시’, ‘임신서기석 조형물 및 화랑이야기’, ‘진흥왕 순수비 사진전시’ 등이 전시된다. 이외에 불국사에서는 신라불교문화 영산대제가 거행되고, 분황사에서는 원효예술제가 베풀어진다.


    민속경연으로 신라의 길쌈 전통을 재현하는 가배[길쌈]놀이를 비롯해 불교무용 바라춤, 풍물경연, 김춘추와 김유신이 즐기던 축국놀이를 재현해 읍면동 대항 경기를 펼치고, 신라 화랑들이 심신단련을 목적으로 수행한 신라검법을 배우는 경연도 실시된다. 문예창작 분야에는 많은 시민의 참여가 가능하다. 신라의 과거제였던 독서삼품과 체험을 통해 운문(시/시조)와 산문 글짓기를 체험하여 신라의 역사를 직접 체험해 보고, 전국시조경창대회, 고운서예 전국 휘호대전에도 참여가능 하다. 


    신라방에서 신라인이 되어볼까

    신라문화제가 열리는 곳곳에는 신라인을 경험할 수 있는 부스가 마련되어 있다. 초가형 부스 25동에 신라인이 거주하는 신라방을 꾸몄다. 신라방에서는 누구라도 신라인이 된다. 경주 브랜드 이사금쌀을 활용해 시민들이 직접 가래떡을 이어갈 수도 있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다채롭게 경험하는 신라문화 체험마당에서 신라인이 될 수 있다. 

  • 알에서 나온 신라 시조 박혁거세

    박혁거세가 탄생한 경주 나정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에는 박혁거세가 탄생한 곳으로 알려진 나정이 있다. 나정은 1975년 사적 제245호로 지정되었으며, 박혁거세를 기리는 비석을 비롯해 팔각건물터, 우물터, 부속건물터 등이 발굴되었다. 박혁거세는 신라를 세운 시조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박혁거세가 탄생하여 신라의 시조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이야기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실려 있으며 「제왕운기」에 약간 언급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삼국유사」에 실린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개한다. 

     

    알에서 나온 혁거세와 계룡에서 난 알영 

    옛날에 진한(辰韓) 땅의 여섯 마을 우두머리들이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의 언덕에 모였다. 그들은 덕이 있는 자를 왕으로 받들어 나라를 세우고자 하였다. 멀리 남쪽을 살펴보니 양산 아랫자락에 있는 나정이라는 우물가에 번개처럼 번쩍하는 기이한 기운이 땅으로 비추고 있었다. 그곳에는 흰 말이 절을 하는 모습으로 엎드려 있었다. 흰 말이 있는 곳을 찾아가 살피니 붉은 알이 하나 놓여있었다. 흰 말은 사람들을 보고 소리 내어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갔다. 붉은 알을 깨뜨리니 남자아이가 나왔다. 모두들 놀랍고 신기하게 여기면서 동천의 물로 깨끗이 씻기니 온몸에서 빛이 퍼져 나왔다. 새와 짐승이 춤을 추고 하늘과 땅이 진동하며 해와 달이 맑고 밝았다. 이로 인해 밝다는 뜻을 가진 혁거세왕(赫居世王) 혹은 불거내왕(弗矩內王)이라 이름을 부르고 위호를 거슬한(居瑟邯)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혁거세왕의 탄생을 축하하며 “이제 덕이 있는 배필을 구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마침 같은 날 사량리 알영이라는 우물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으나 입이 닭의 부리처럼 생긴 것이 특이하였다. 월성의 북천 물로 깨끗이 씻기니 부리처럼 생긴 것이 바로 떨어졌다. 남산 서쪽에 궁실을 세워 두 아이를 받들어 봉양하였다. 남자아이가 알에서 나왔기 때문에 알이 박의 모양과 비슷하여 남자아이의 성을 박씨로 하였다. 여자아이는 태어난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 불렀다. 두 아이가 열 세 살이 되자 혁거세는 왕으로, 알영은 왕후로 삼았으며 나라의 이름을 서라벌이라고 지었다. 왕후가 태어날 적에 계정이라는 우물가에서 태어나서 계림국이라고도 했지만 후에 신라라고 고쳐졌다.


    박혁거세는 61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죽음에 임박하여 하늘에 올라갔다. 그 후 7일 뒤에 죽은 몸이 땅으로 떨어지며 흩어졌다. 이에 왕후가 따라 죽었다. 나라의 사람들은 흩어진 왕의 몸을 합쳐 장사를 치르려고 하였으나 어디선가 큰 뱀이 나와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했다. 할 수 없이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진 몸을 각각 장사를 지내 다섯 개의 능을 만들었다. 뱀의 방해를 받았다고 해서 사릉(蛇陵)이라고도 불렸다. 

     

    씨족사회에서 국가의 탄생, 신라의 건국신화

    이 이야기는 박혁거세와 알영의 탄생담과 나라를 건국하고 왕과 왕후의 죽음까지를 서술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여러 씨족사회가 합쳐져 하나의 나라를 건국하는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혁거세와 알영이 우물이라는 공간에서 같은 날 태어나 배필이 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혁거세와 알영이 각기 왕과 왕후가 되는 조건 중에 공통적으로 덕이 강조되고 있다. 지배 계층의 신적인 능력보다도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간이 더 중요시되는 가치관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결말 부분에 혁거세의 주검이 흩어져 끝내 합치지 못한 점은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이는 다른 건국신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부분이다. 

  • 경주와 밀양을 잇는 부산성

    663년(문무왕 3)에 쌓은 신라 산성으로 주사산성(朱砂山城)이라고도 한다. 주사산·오봉산·오로봉산·닭벼슬산이라고도 불리는 부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골짜기를 따라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성이다. 골짜기 3곳을 감싸고 축성되어 있는데 체성 길이는 약 7.5km이다.

    경주부산성
    경주부산성(사진출처:문화재청)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25호로 지정되었다. 경북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산195-2번지 일대이다.


    부산은 주변에 있는 단석산보다 약간 낮지만 경주 주변에서는 꽤 높은 편에 속한다. 성내 면적은 3,305,785㎡정도로 추정되는 대규모 산성이다. 성외의 지세는 사면 모두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적들이 침입하기 어려운 천험의 지형을 이루고 있지만, 성내는 평탄한 지형이 많고 3개의 계곡에서 흐르는 수량이 풍부하여 거주하기에 적합하다.


    『삼국유사』 효소왕대 죽지랑조에 의하면 죽지랑과 득오곡의 우정을 전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전설을 통하여 경주와 밀양으로 통하는 관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어 교통의 요지였음을 알 수 있다.


    성벽의 축조수법은 가공하지 않은 안산암제 석재로 내외벽을 축조하고 중간에 잡석을 채우는 협축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체성이 대부분이 무너졌지만 일부 구간에서는 높이 2m정도로 비교적 잘 남아 있는 부분도 있다. 곳에 따라서는 후대에 개축하였거나 수축한 부분도 있다.


    『삼국사기』 문무왕조에 의하면 “삼년 춘정월에 남산산성에 긴창고를 만들고 부산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663년(문무왕 3)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 문호왕(문무왕) 법민조에는 “왕은 즉위 초에 남산장창을 설치했다.…… 또한 부산성을 쌓기 시작해 3년만에 마쳤다.”에서 축성연대를 명기하지는 않았으나 문무왕 즉위 초에 쌓았으며, 축성 기간이 3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신라 성곽들이 그 이후에는 폐성이 되었지만, 이 산성만은 조선시대까지 경주 일대를 방어하는 중요한 요새지로 지속되었다.


    성문은 동문지, 서문지, 남문지, 북문지의 4개소가 남아 있으나 남문지를 제외하고는 파손이 심하다. 건물지는 모두 6개소가 남아있다. 망대지 또는 창고지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모두 매몰되었다. 이 중 창고지로 비정되는 ‘산성마을’동족의 건물지는 지금가지도 ‘창터골’로 불려지고 있다. 이외에도 우물 4개소, 못 2개소, 암문지 1개소, 치성 2개소가 남아있다.

  • 신라의 방어 요새, 보은 삼년산성

    보은 삼년산성 전경

    삼년산성은 보은읍에서 동쪽으로 약 2km 떨어진 어암리와 대야리 및 성주리 사이의 해발 325.5m 오정산 위에 산 정상이 우묵하게 들어간 고로봉형으로 쌓은 둘레 약 1,800m의 석성이다. 470년(신라 자비왕 13)에 쌓았으며, 486년(소지왕 8)에 고쳐 세웠다.『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1973년 5월 25일 사적 제235호로 지정되었다. 충북 보은군 보은읍 성주1길 104 (어암리)에 위치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항산성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 시대에는 삼년군(三年郡)․삼년산군(三年山郡)으로 불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으로 불린 듯하다. 문지(門址) 4개소, 곡성(曲城) 7개소, 우물터 5개소와 교란된 수구지(水口址)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널빤지 모양의 납작한 할석을 이용하여 정자(井字)모양으로 , 한 켜는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켜는 세로 쌓기로 축조하여 성벽이 견고하다. 석재는 대개 직육면체이다.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축조하였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아 현존한 것만도 최고 13m에 달하며, 거의 수직으로 쌓여 있다. 이처럼 성벽이 높고 크기 때문에 그 하중(荷重)도 막대하여 성벽을 쌓은 석재와 사이를 메운 쐐기 돌들이 으깨어진 것도 있다.

    보은 삼년산성

    남쪽과 북쪽은 안팎을 모두 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한 내외협축의 방법으로 쌓았다. 문지는 동서남북의 네 곳에 있으나 각기 형식을 달리 하고 있다. 남문은 훗날에 메워서 사용치 않았다. 수구는 지형상 가장 낮은 서쪽 방향으로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동쪽에는 지상에서 약 1m 되는 성벽 부분에 65× 45cm의 5각형 수문이 남아 있다. 한편 7개소의 곡성은 대개 둘레가 25m, 높이 8.3m로서 지형상 적의 접근이 쉬운 능선과 연결되는 부분에 축조하였다.


    또한 우물터로는 아미지(蛾眉池)라는 연못을 비롯하여 5개소의 우물터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이 주위의 암벽에는 옥필(玉筆)․유사암(有似巖)․아미지 등의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데 김생(金生)의 필체로 전해 오지만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다. 1980년 7월 22일 호우로 인하여 서문지에서 발견된 성문에 사용했던 신방석(信枋石)은 우리 나라 고대 축성술의 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성문은 이 성이 축조된 당시와 이후 개축된 시기 및 후대의 것 등 3가지의 초석이 있으며, 문터의 문지방석에 수레바퀴 자국이 남아 있는 첫째 시기의 것은 중심간 거리가 1.65m에 달하는 큰 수레가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1983년의 발굴결과 삼국 시대에서 고려 ·조선시대까지의 토기편과 각종 유물이 출토되어 이 성이 오랫동안 이용되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5세기 후반 신라의 축성 기술을 대표하는 산성으로 주변에는 수천기의 고분군이 있다.

    보은 삼년산성 전경
    보은 삼년산성

    산성의 기초, 벽쌓기, 수문, 정문, 연못 등에서 독특한 방법을 사용한 현존하는 산성중에서 가장 오래된 산성이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와 가까운 서해로 진출하는 길을 모색하던 중 백제와 접경지대이며 전략 교통의 요충지 보은에 난공불락의 전초기지가 필요했다. 벽쌓기는 수직에 가까운 벽면을 구축하고 있으며 토사를 전혀 섞지않고 작은돌을 사이사이에 끼어 넣어서 내부까지 완전한 석축으로 견고하게 구축하는 양면쌓기〔夾築〕공법이다.


    성안의 산꼭대기에서 여러 방면을 바라보면, 큰길이 사면팔방으로 통해 있고 평야가 환하게 내려다보인다. 80년대에는 산성 안에 논이 약 13,200㎡, 밭이 9,900㎡ 있었고 겨울이나 여름철 내내 마르지 않는 샘물이 5개소나 있었다. 그리고 보청천이 꿰뚫어 흐르는 30~40리에 달하는 보은분지는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을 정도로 기름진 인문지리적으로 중요한 장소이다.


    이런 여건 이외에, 백제 쪽에서 신라로 들어가는 목구멍의 위치에 있고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로 나아가 치는 거점이 되어 굳세고 단단한 군사적 방어요새였다. 산성은 남동(325.5m), 북동(300여m), 북서(300여m)의 3개의 봉우리를 중심으로 산봉우리를 따라 이어진 선이 3면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서쪽 한 면이 낮아져 계곡이 된 형국이다.

  • 신라의 성 쌓기 기술이 잘 깃든 단양의 적성산성

    단양 해발 323.7m의 성재산에 돌로 쌓아 만든 산성이다. 신라 진흥왕 때 축성되었으며 둘레가 922m이다. 산성의 평면 형태는 북동에서 남서로 길게 뻗은 산 등을 따라 쌓인 반원형이다. 1979년 7월 26일 사적 제265호로 지정되었다. 충북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3-1번지 일대이다.

    단양 적성산성
    단양 적성산성

    깬돌〔割石〕 및 자연석으로 축조되었는데, 성의 기반을 흙과 돌로 다지고 그 위에 외벽은 자연석으로 고루 쌓았다. 남서쪽 끝의 산봉우리를 기점으로 하여 북동쪽으로 달리는 산등성의 바깥쪽을 돌아 축성되었고, 이 능선의 남쪽 낮은 곳은 밭으로 되어 있다. 북쪽은 남한강과 가파른 절벽의 자연적인 지리 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있다. 성벽의 상태가 가장 좋은 곳은 북동쪽 끝에 일부 남아 있다. 성문터는 남서쪽 끝과 남쪽에서 당고개로 이어지는 능선 쪽, 그리고 남동쪽의 3곳에서 확인되었다. 신라가 한강을 건너기 직전의 전진기지로서 전략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성이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78년 성내에서 적성비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신라와 고구려의 세력관계 변동을 알 수 있다. 비석 외에 삼국시대의 토기조각과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유물도 있어 대략 고려 후기까지 오늘날의 단양지방을 다스리는 읍성의 구실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축성방법이 매우 견고하게 되어있어, 신라의 성 쌓기 기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산성은 단양읍 하방리에서 제천행로를 따라 나가면 산봉우리를 오른쪽으로 끼고 돌게 되는데 이것을 ‘재깟모롱이’라 한다. 산성 위에서 북동쪽으로 멀리 90여 리에는 고구려 장군 온달이 잃은 영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남하한 온달산성이 있는데 이곳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남한강 상류의 굽이굽이가 아득하고, 남쪽으로 5km에 공문성, 15km에 죽령산성이 있으며, 북서쪽 남한강 건너에 가은암석상이 있다. 성산성 안에서 신라적성비가 발견되고, ‘적성’이라는 글자가 3번이나 나와서 성의 이름이 ‘적성산성’으로 밝혀졌다. 이곳은 본래 고구려의 적성현으로 신라가 점령한 다음에도 적성이라고 불렀던 것이니, 이 석성이 곧 신라가 고구려의 적성현을 공략하여 차지한 지방을 다스리며 쌓은 성이라 하겠다.

  • 읍치성으로 사용된 하남 이성산성

    해발 209.8m 이성산에 있는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이성산은 춘궁동, 초일동, 광암동의 분기점으로 남쪽으로 넓은 평야 지대는 남한산성에서 뻗어 내려온 금암산과 객산 등으로 둘러싸인 분지와 서쪽으로는 아차산일대와 풍납토성, 몽촌토성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둘레 1,665m의 요새지이다. 2000년 9월 16일 사적 제422호로 지정되었다. 경기 하남시 춘궁동 산36번지 외 일대이다.

    하남 이성산성 전경
    하남 이성산성 전경(사진출처:문화재청)
    이성산성성벽( 구간)
    이성산성성벽( 구간)(사진출처:문화재청)

    이성산성은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에서 북쪽방향으로 내려오는 줄기와 만나 길게 맥을 형성하는 금암산의 줄기에 접해 있으며, 남쪽은 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들이 있으나 북쪽은 작은 구릉만 있어 한강 주변지역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남한산성의 연주봉에서 북쪽으로 뻗어 나간 금암산(해발 313m)에서 다시 북쪽으로 뻗어 약 40m정도 낮아지면서 거의 단락되었다가 다시 불쑥 솟아서 이성산이 되고, 다시 북쪽으로 뻗어 나가면서 183m의 고지가 되었다가 점차 낮아졌다. 성벽은 해발 100m 이상을 감싸안은 석축으로 거의 무너진 상태이나 그 자취가 대체로 잘 남아 있다.


    성벽은 해발 209.8m인 주봉을 중심으로 남쪽의 능선을 따라 축조하여 부정형의 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이다. 성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곳곳에 평평하고 넓은 땅이 조성되었다. 성 내부 면적은 약 128,890㎡이다. 성벽의 안쪽에는 5m 정도의 도로를 두어 병사들의 이동이 쉽도록 하였으며 성벽은 자연지형을 따라 굴곡을 주었다. 성이 급격히 꺾인 부분에는 별도의 치를 설치하였는데 치의 길이는 3.4m, 너비는 2.5m에 달하여 길이보다 너비가 넓게 축조하였다. 성에는 북쪽, 서남쪽, 동쪽, 남쪽에 문지로 보이는 곳이 있는데, 이 중 남문이 정문 역할을 했을 것이다. 동문지도 확인되었는데 사다리를 올라가야 하는 현문식 구조이며 문지 바닥에는 수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성산성초축벽
    이성산성초축벽(사진출처:문화재청)

    성벽은 2차에 걸쳐 축조되었다. 1차 성벽을 쌓고 일정기간이 지난 후 성벽이 무너지게 되자 1차 성벽의 바깥쪽으로 약 3.8m 지점에서 새로운 성벽을 덧붙여 쌓았다. 두 성벽은 쌓은 시점이 다르기 때문에 축성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 1차성벽은 비교적 옆으로 길쭉하고 정교하지 않은 성돌로 퇴물림 쌓기를 하지 않고 거의 수직에 가깝게 쌓았다. 2차 성벽은 기단부를 조성한 후 바닥에 큰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표면과 모서리를 정교하게 다듬은 폭 30cm 내외인 옥수수알 모양의 성돌로 정교하게 쌓아 올렸는데 퇴물림쌓기를 하여 1차 성벽에 비하여 성벽의 경사가 완만한 것이 특징이다.


    성내의 가장 중요한 시설인 집수시설로는 두 군데의 저수지가 확인되었으며 남문지 쪽의 저수지는 2차에 걸쳐 축조되었음이 밝혀졌다. 발굴된 건물지는 9개소이며 초석이 일부 노출되었거나 건물지가 확실한 것을 포함하면 최소한 15개소 이상의 대형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의 면적은 장방형의 경우 대략 80-90평 정도이고 다각형 건물은 20-30평 정도이다. 건물지 중에는 8각, 9각, 12각 등 다각형 건물지가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 중 동서로 대칭을 이루는 8각 건물과 9각 건물은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단과 사직단으로 추정된다.


    성내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대체로 6-8세기 경 신라토기류와 기와류가 주종을 이룬다. 이로 보아 6세기 중엽 신라가 한강 하류지역을 장악하고 설치한 신주의 읍치성으로 축성되었다가 이후 7세기 중엽 한산주의 읍치성으로 기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만파식적으로 여겨지는 옥피리 보관함, 옥소명

    만파식적으로 여겨지는 옥피리 보관함

    경상북도 경주시 일정로에 있는 국립경주박물관에는 만파식적으로 여겨지는 옥피리와 그 보관함이 있다. 이 옥피리와 보관함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1923년 『개벽』 제38호에 실린 경주지방 소식 글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기사에 의하면 이 피리는 신라의 기물로서 임진왜란 때 병화로 유실되었다가 숙종 재위기에 다시 발견한 것이라 한다. 59.5cm의 크기의 나무함 안쪽으로는 옥피리에 대한 경주부윤(慶州府尹) 이인징(李麟徵)의 글이 새겨져 있다. 또한, 황동으로 만든 자물쇠에는 월성과 안압지 첨성대 등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만파식적의 전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만파식적(萬波息笛)은 신라 시대의 피리로서 설화적 성격이 강하게 부여된 물건이다. 이와 관련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확인된다. 신라의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한 이후, 동해상에 용이 출현했다. 용은 신문왕에게 피리를 주며 이 피리를 불면 나라의 모든 근심이 사라질 것이라고 전하고, 실제 그 피리를 불어 나라의 위기를 여러 차례 구했다고 한다. 또한, 만파식적은 조령(鳥嶺)을 넘어가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거나, 30년에 한 번씩 이를 불 수 있는 사람이 출현한다는 등의 전설이 함께 전한다. 


    숙종 때 다시 찾은 옥피리의 이후 행적   

    만파식적은 그 신기하고 기이한 영험 때문인지 여러 차례 국난을 경험하던 중 점점 출처가 불투명해져 버렸다. 이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임진왜란 중 화재로 타 없어졌다가 숙종(肅宗) 재위기에 다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경주 사람인 김승학(金承鶴)은 경주의 객관(客舘)을 보수하기 위해 담장을 허물다가 이를 발견하고 사사로이 보관하던 중 파손하고 말았다. 훗날 경주 부윤으로 재임하였던 이인징(李麟徵)이 발견하여 보수하는 한편, 이 사건의 경위를 나무 함자에 적어 전한 것이 바로 이 옥피리함이다.

    당시 이인징은 이 옥피리를 신라 시대의 기물(奇物)로 생각하였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그의 글을 보면, 이 옥피리가 조령 고개를 넘어가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속설이 당시 사회에 만연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옥피리와 나무 함자는 경주에 보관하다가 일제 강점기에 국립고궁박물관(당시에는 격을 낮춰 李王家 박물관이라고 부름)으로 이관되었다. 이후 국립경주박물관이 건립되면서 다시 경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옥피리 함자에 담겨 전하는 문화재의 전통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옥피리와 그 함자가 중요한 것은 이 피리가 만파식적인지 아닌지에 달린 것이 아니다. 이 문화자원에 대한 옛 선조들의 인식과 태도가 중요하다. 함자에 새겨진 이인징의 명문과 이후 옥피리의 행적에는 신라 시대로부터 내려온 문화 인식과 경주라는 지역성이 결합한 당대인의 시선이 담겨 있다. 전통이란 시공간을 넘어서 과거의 문화재와 당대의 활용이 절묘한 조화를 이룰 때 수립되는 것이다. 경주 옥피리 함자를 둘러싼 옛 선조들의 이해와 그 속에 축적된 세월의 흔적들은 우리의 문화재가 과거로부터 어떻게 이해되었고 전해오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 신라의 변경을 지키던 기장산성

    기장산성은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서부리 산9-1번지, 대라리 산20-2번지, 철마면 안평리 산112-2번지 일대에 걸쳐있는 해발 350m의 산성산 곧 수령산의 서남쪽 계곡을 감싸고 축성된 포곡식 산성이다. 산성산은 기장의 진산으로 기장 읍내와 이동항, 대변항, 학리항 등 기장 앞바다를 조망할 수 있으며 부산에서 기장을 거쳐 울산에 이르는 교통로의 요지에 있다. 기장산성은 이러한 입지에 따라 동해안 교통로와 왜구의 출몰에 대한 감시를 위하여 고대 삼국시대에 축조되었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고쳐 사용한 기장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산성이다.

     

    신라의 변경을 지키던 기장산성

    기장산성의 축성 연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산성 내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볼 때 부산광역시의 배산성지와 비슷한 시기의 산성으로 추정되며 기장지역에서 가장 빠른 시기에 축성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대 삼국시대의 기장지역은 신라식 지명인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이라 하였는데, 갑화량곡은 국경 또는 변경지역, 변두리 마을이란 뜻으로 곧 신라의 변경지역이라는 의미로 보인다. 기장산성은 그 후 고려시대에 고쳐 쌓아진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 축성되었던 성곽 윗부분에 급히 축성한 것으로 보이는 다소 거칠게 쌓은 성곽이 있다. 그리고 내옹성문 터 등으로 볼 때 조선시대 들어 임진왜란 때나 이후 또다시 고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부산 기장산성
    부산 기장산성(사진출처:문화재청)
    부산 기장산성
    부산 기장산성(사진출처:문화재청)

     

    기장산성의 개방식 성문

    기장산성의 성벽은 윗부분이 대부분 허물어지고 성벽돌이 산기슭을 따라 흩어져 있어 본래의 성벽 모양을 파악할 수는 없다. 성벽은 협축식으로 쌓았으며 전체 둘레는 약 775m, 성벽의 두께는 5m 내외이고 높이는 남아 있는 성벽 기준으로 1~3m 정도이다. 성벽의 서북쪽과 서남쪽, 그리고 동남쪽에 성문터로 보이는 끊어진 곳이 확인되었다. 성문은 개방식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양쪽 성벽을 안팎으로 겹쳐지게 쌓아 바깥에서 안쪽을 볼 수 없게 만든 구조이다. 동쪽 성벽과 북쪽 성벽이 만나는 지점에 성벽 바깥쪽으로 치성을 덧 쌓았고, 성밖 5m 정도 거리에는 너비 10m 정도의 물을 채우지 않은 해자인 황(隍)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성내부의 산 정상 부분에는 넓이 약 10m, 깊이 약 2~3m의 저수지를 만들었고, 연못에서 50m 아래에는 샘물이 있다. 성안에서 출토된 유물인 삼국시대 토기 조각이나 반구형 병형 토기 조각 등의 유물과 개방식 성문으로 볼 때 기장산성은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장 주변의 성곽유적

    기장에는 기장산성 외에도 신라말에 축성된 기장고읍성과 조선시대에 축성된 기장읍성, 두모포진성, 그리고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축성된 죽성리왜성, 임랑포왜성 등이 주변에 산재해 있다. 기장고읍성은 토성으로 기장읍 북쪽 기장향교부근 교리근린공원에 있고, 기장읍성은 기장읍 내에 축성되어 행정·경제·군사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두모포진성은 기장읍 죽성리에 왜구를 방비하고자 축성한 성이며 죽성리왜성 주성리 바닷가 낮은 구릉지에 있고, 임랑포왜성은 장안읍 임랑리 방모산 동남쪽 끝에 있다.


    부산 기장산성
    부산 기장산성(사진출처:문화재청)

  • 충청도와 경상도를 잇는 죽령 옛길

    죽령 옛길은 경상북도 영주시와 충청북도 단양군을 연결하던 옛길이다. 경상도와 충청도를 가로지르는 백두대간을 넘는 길목으로 오래전부터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이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8대 임금이었던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이 부하 죽죽에게 길을 만들라고 명하였고, 158년에 소백산 서쪽의 계곡을 따라 고갯길을 개척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죽령을 통과하는 길 가운데 영주시의 희방사역에서 고갯마루의 죽령 주막에 이르는 구간이 죽령 옛길로 남아 있다.

    영주 죽령옛길
    영주 죽령옛길(사진출처:문화재청)

    이름에는 대나무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만, 죽령 옛길에는 대나무가 없다고 한다. 죽령은 대재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에는 큰 고개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의 흰봉산 도솔봉과 단양군 단양읍에 있는 연희봉 사이의 가장 낮은 산허리를 넘어가는 구불구불한 길이다. 이들 봉우리는 해발고도가 1,300m를 넘을 정도로 험준해서, 죽령 옛길을 개척하는 데에는 5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백두대간은 험준한 산줄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형성한다. 따라서 경상도와 충청도 사람들은 큰 산을 넘어 왕래할 수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죽령 옛길이다. 이 길의 정상부는 해발고도가 689m에 달한다.


    20세기 초 자동차 도로가 개설되기 전까지 죽령 옛길은 경상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 기능을 담당했다.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선비들, 다양한 물건을 짊어지고 나르던 보부상들이 넘나들던 길이었다. 그런데 죽령을 넘으면 ‘죽죽 미끄러진다.’라고 생각해 문경새재를 넘는 선비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 길로 다니던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잘 수 있는 시설인 객점과 마방들이 길목 주요 지점에 설치되었고 아직 주막거리 터는 남아 있다. 과거에는 4개의 커다란 주막거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죽령 옛길 고갯마루에는 장승이 여러 개 세워져 있다. 장승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일부 장승은 특정 지점까지의 거리를 표기해 놓아 이정표의 역할도 했다.

    영주 죽령옛길
    영주 죽령옛길 (사진출처:문화재청)
    영주 죽령옛길
    영주 죽령옛길 (사진출처:문화재청)

    죽령 옛길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내륙지방을 통과하는 중요한 장소였다. 제일 먼저 자동차 도로가 구불구불한 산길을 돌아 개통되었으며, 1940년 5월에는 소백산을 통과하는 중앙선 철도의 죽령 터널이 준공되었다. 1941년에는 죽령을 통과하는 중앙선 철도가 운행을 시작했다. 죽령의 산세가 험하므로 철도는 죽령 구간을 터널로 통과한다. 충청북도 단양과 경상북도 영주 사이의 구간은 경사가 급해, 터널 내에서 철로가 원의 형태로 회전하면서 경사를 이겨내는 루프(loop)식 뙤리굴로 만들어졌다. 2001년 12월에 개통한 중앙고속도로도 죽령 구간은 터널로 통과한다. 중앙선 철도의 죽령 터널은 길이가 4,500m이고, 중앙고속도로의 죽령 터널은 그 길이가 4,600m에 이른다.


    근대 이후 자동차가 다니면서 죽령 옛길을 다니는 통행량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죽령 옛길이 매우 경사가 심한 구간에 자리했으므로 새로운 도로나 철도가 개통될 때에 죽령 옛길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소백산 국립공원에 있는 옛길로 옛길을 따라 흐르는 계곡과 길게 늘어진 나무가 만들어 놓은 터널이 소백산 주요 능선 등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여주는 명승지이다. 2007년 12월 17일 151,115㎡의 면적이 명승 제30호로 지정되었다.

    단양쪽 계곡
    단양쪽 계곡(사진출처:문화재청)
    영주 죽령옛길
    영주 죽령옛길 (사진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