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조대왕 능행차를 시연하는 '수원화성문화제'

    1964년부터 시작된 전통있는 종합축제

    수원화성문화제 포스터 이미지
    수원화성문화제 포스터(사진출처:수원화성문화제추진위원회, 수원시, 수원문화재단)


    수원화성문화제는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의 효심과 부국강병의 원대한 꿈으로 축성된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에서 개최되는 수원을 대표하는 전통문화 관광축제이다. 수원 화성은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천장(遷葬 :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김)하고 화성행궁과 함께 축조한 성곽이다. 수원화성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이다. 수원화성문화제는 “1964년 서울에서 수원으로 이전한 경기도청 청사 신축 기공식날인 10월 15일을 경축하기 위해 이 날을 ‘시민의 날’로 제정하고 화홍문화제(華虹文化祭)”을 개최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1997년 12월에 “수원의 화성행궁(華城行宮)이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위원회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을 계기로 하여 2000년부터는 화성문화제(華城文化祭)로 축제의 명칭을 변경하였다. 수원화성문화제는 수원시가 주최하고, 수원문화재단이 주관하며 매년 10월에 화성행궁, 수원천, 연무대 등 수원화성 일원에서 개최된다.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문화관광축제의 2010년~2012년․2014년․2017년․2018년 유망축제, 2013년․2019년 우수축제이다.

     

    4천여명의 시민이 참여하는 수원행행 

    수원화성문화제는 장소에 따라 열리는 행사가 다르다. 화성행궁․행궁광장에서 열리는 행사로는 ‘개막난장 “품(品)”, 미디어아트 진찬연 “한중록1795”, 정조대왕 능행차 “수원행행(行幸)”, 무예브랜드공연 “야조(夜操)”, 국제자매도시의 밤, 제주문화원 실버 합창단 공연, “정조실감” 토크콘서트, 행궁오솔빛길, 뭔가 좀 색다른 과거시험 보는 날, 행궁 도화서 “그리하라”, 장용영 수위의식, 아름다운 우리 소리, 규장각 책 놀이터, 수원공방체험, 유여택 정오음악회, 고유별다례, 조선별미극장, 수원이와 놀자, 성안 사람들 “기인열전”, 수원화성 상상공작소, 조선핫플레이스, 행궁오락관’ 등이다. 


    이중에서 정조대왕이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행차하던 효(孝)행렬인 정조대왕 능행차 “수원행행”은 4,000명 정도의 인원이 조선시대의 의상과 소품들을 착용하고 참가하여 장관을 이룬다. 행차는 “수원의 초입이라고 할 수 있는 지지대고개에서 출발하여 노송 지역과 장안문(長安門)을 거쳐 팔달문(八達門)”에서 끝난다. 화서문 일원에서 열리는 행사로는 ‘낙성연’이 있고, 시민체험프로그램인 전통 매듭으로 즐기는 즐거움, 정말 쉬운 수원 화성 지도 그리기, 사방팔당 놀이탐방, 석채화 수원화성 그리기, 오늘 내가 주인공이 day, 정조 예술로 품다, 버스킹&프리마켓 등이 열린다. 또한 공연 프로그램도 진행되는데, 달빛가요제, 야~놀자 아~수원화성에서, 오래된 미래, 시민예술 한마당, 함께 부르는 수원아리랑, 재담소리-장대장타령, 조선의 거리악사, 판소리 음악극 정조가, 수원화성축성체험 등이 진행된다. 


    화홍문 일원에서는 수원화성달빛살롱, 굿-Good파티, 환상로드 퍼레이드, 예술 장돌뱅이, 화성과 바람과 빛과 시, 수원등불축제 “정조 미래의 빛” 등이 진행된다. 그 외에 참여 프로그램으로 ‘스탬프투어 “수원화성그리미”, 수원화성 야간투어 프로그램 “수원화성 달레길”, 효의 성곽순례, 수원이의 이동 스튜디오’ 등이 있다. 


    수원화성 장안문
    수원화성 팔달문
    수원화성 팔달문
    수원화성 화서문
    수원화성 화서문

     

    화성행궁, 행궁광장, 화서문, 화홍문 일대가 무대 

    『2017년 문화관광축제 종합평가 보고서』에 의하면, “정조대왕 능행차를 비롯하여 혜경궁 홍씨 진찬연, 무과 재현, 무예브랜드 공연 ‘야조’ 등 수원화성을 주제로 하는 대표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어 역사문화축제로서의 차별성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역사․문화적인 가치를 지닌 “수원화성 일원을 축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어 역사문화축제로서의 장소성과 현장성을 담보하고 있으며, 구도심 일원까지의 축제 공간 확장을 통해 지역과의 연계성을 확대하고” 있다. 그리고 “시민주도형 축제로의 전환을 목표로 시민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시민참여 프로그램 발굴, 시민 참여 분위기 조성, 기부금 모금 활동 등 축제의 기획부터 운영까지 시민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여 축제의 사회적 지속가능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수원화성 북수문(화홍문)

  • 수원 화성의 모든 것, 화성성역의궤

    전국에서 모인 석수 ․ 목수 ․ 미장이 김개놈(金介老味), 임작은놈(林者斤老味), 최큰놈(崔大老味), 유돌쇠(劉乭金), 김순놈(金順老味), 강아지(姜岳只), 방삽사리(房揷士里), 최망아지(崔馬也之), 이바위(李巖回) 같은 인간들의 거친 숨과 진한 땀 그리고 손때가 뭍어 있는 세계문화유산 화성은 공사의 전과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이하 『의궤』)가 있어 더욱 빛을 발한다. 1794년 1월부터 시작된 화성 성역이 끝난 것은 1796년 9월 10일이었다. 그 뒤 10월 15일 낙성연을 벌인 뒤 11월 9일 『의궤』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1800년 정조의 사망으로 금속활자로 간인되어 정식 반포된 것은 1801년(순조 1) 9월이었다. 정조는 화성유수(華城留守) 조심태(趙心泰)에게 이르기를, “화성 공사에 대한 본말을 분명히 알도록 해야 한다”며 『의궤』 편찬을 지시하였다.

    화성성역의궤
    화성성역의궤(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화성성역의궤
    화성성역의궤(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궁궐이나 기타 건물을 지은 후 편찬한 ‘영건도감’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여럿 있으나 축성과 관련한 의궤는 『화성성역의궤』가 유일한 것이다. 이 『의궤』를 살펴보지 않고는 조선시대 고건축의 세부명칭, 재료와 도구 등에 관해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의궤』를 통해서 우리는 당시의 사회상과 경제생활 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의궤』는 권수(卷首) 1권, 본문 6권, 부록 3권을 합하여 총 10권 9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편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권수의 차례는 먼저 택일(擇日)과 항목별 기공 ․ 준공 시일(時日), 조직된 사람 명단 좌목(座目) 그리고 도설(圖說)이다.


    성역은 1793년 12월 11일 책임관리들이 성터를 살피면서 시작되고 1974년 1월 7일 돌 뜨는 공사, 14일 정조가 행차하여 터를 정하고 표지를 세워 공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시설물 중에는 가장 먼저 사대문 터를 닦았고 다음은 도랑치는 일이 시작되었다. 이는 준천과 연못 조성이라는 도시조경의 의미도 있지만, 축성에 쓰일 자갈과 모래, 흙 등을 확보하기 위한 일거양득의 계산된 행위였다. 공사의 총 책임자는 당시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蔡濟恭)이었다. 실무 책임자는 무인 출신 화성유수 조심태 그리고 군사전문가 이유경이 도청에, 후에 『의궤』 간행을 책임진 홍원섭 등이 책응도청에 임명되었다.


    『의궤』 중 가장 압권은 권수 가운데 도설(圖說)이다. 공중에서 항공사진을 찍은 듯한 「화성전도」가 가장 먼저 실리고 50여 개 시설물의 도면이 사실적으로 그려있다. 시설물은 화성의 정문인 장안문부터 시작된다. 장안문의 외도(外圖) ․ 내도(內圖) 그림이 먼저 실리고 장안문의 위치, 세부 시설의 크기, 총안(銃眼) ․ 현안(懸眼)과 같은 구체적인 방어용 시설물에 대한 설명이 곁들여 있다.


    시설물 설명순서는 사대문부터 시작하여 50여 개의 시설물을 거쳐 영화역에서 끝난다. 명물각도(名物各圖)에는 성벽 시설물의 구체적인 명칭, 여러 형태의 벽돌, 건축 자재들의 명칭, 벽돌가마와 그 속에 놓여진 벽돌까지 그려져 있다.

    화성성역의궤
    화성성역의궤(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화성성역의궤
    화성성역의궤(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다음으로는 성역에 동원된 과학 기계의 전도(全圖)와 부분도(部分圖)가 실려있다. 거중기는 물론, 녹로, 각종 수레, 기초다지는 절구, 운반 도구 등 모든 기기(器機)의 그림과 명칭이 실려있다. 끝으로 횃불 훈련하는 연거도, 일을 마치고 음식을 베풀며 잔치하는 호궤도, 공사가 끝난 뒤 낙남헌에서 벌인 낙성연도가 대미를 장식한다.


    권1에는 정약용이 올린 『성설』을 바탕으로 정조가 지은 화성 성역의 지침 「어제성화주략」부터 시작한다. 성터 잡기는 유형원 선생이 『반계수록』에 “수원의 읍치를 평야로 옮겨야 한다”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뜻에 따랐음을 밝히고 있다.


    권2에는 임금이 쓴 어제시, 임금이 내린 음식과 약, 상품, 절목, 고유문, 상량문, 화성기적비문 등이 실려있다.


    권3은 지방에 파견된 관원이 서면으로 올리는 서류 장계와 별단 그리고 이문 등의 공문서가 실려있다.


    권4에는 관청 사이에 오갔던 공문서가 있고 마지막 공장(工匠) 부분이 절정이다. 여기에는 석수(石手) ․ 목수(木手) ․ 미장이〔泥匠〕 등의 이름과 어느 지방 출신, 품을 판 일수, 일한 곳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 보면 전국 각지의 건축가, 예술가, 기술자들이 화성에 몰려든 것을 알 수 있다.


    권5와 6에는 재료별로 그 양과 출산지, 가격 등이 기록되어 있고 시설물별 사용된 재료·양 · 가격 그리고 공임 등이 기록되어 있다. 부편 1· 2 · 3에는 행궁을 비롯한 기타 시설에 대한 내용이다.

  • 아버지 사도세자를 찾아 정조가 다니던 화성효행길

    조선의 임금 정조는 한양 도성에서 백리 정도 떨어진 현륭원을 매년 한 차례씩 행차했다. 이 때문에 한양에서 경기도 화성의 현륭원에 이르는 길은 효행의 길로 닦아질 수 밖에 없었다. 본래 한양에서 남부지방으로 이동하던 길은 한강을 건넌 후 노량진에서 남태령을 넘어 과천과 수원을 지나는 길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1790년에 첫 행차부터 이용했던 과천을 경유하는 과천길 대신 1795년부터 시흥길을 새로 닦았다. 시흥길은 과천으로 이동하는 길보다 멀었지만, 평지이기 때문에 남태령과 같은 높은 고개를 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었다. 시흥길로 옮기게 된 다른 사연도 전해진다. 장헌세자를 처벌할 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김상로의 형인 김약로의 무덤이 과천에 있기 때문에, 이 무덤을 피하기 위해 과천길을 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안양에 만안교를 축조했고 시흥행궁도 설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시흥은 지금의 경기도 시흥이 아니라 서울특별시 금천구이다. 시흥길과 과천길이 만나는 곳은 안양시 평촌동에 있던 갈뫼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갈산점으로도 불렸으며,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삼남지방으로 가던 길손들이 많이 쉬어 가던 곳이었다.

    만안교
    만안교(사진출처:문화재청)
    만안교비
    만안교비(사진출처:문화재청)

    한강은 배를 연결한 다리를 통해 건넜으며, 그 이남에서는 비교적 규모가 큰 하천을 건너기 위해 새롭게 다리를 부설했다. 한강을 건널 때에는 노량진과 용산나루에 80여 척의 배를 연결해서 배다리를 만들었다.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이동할 때에 안양에 이르러서는 냇물을 건널 수 있는 만안교(萬安橋)를 만들었고, 수원에서 화성으로 이동하는 중간에는 대황교(大皇橋)를 설치하여 하천을 건넜다. 만안교는 1980년 8월에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이동해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으로 이전했다. 대황교는 경기도 수원시와 화성시의 경계 부근에 있었는데, 이 구간을 통과하는 국도 제1호선의 확장 공사 때에 화성시의 현륭원 입구로 옮겨 놓았다.


    정조가 화성의 융릉으로 행차하던 구간은 용산나루-배다리-노량나루-장승고개-대방천 다리-대방천들-마장천 다리-문성동(文星洞) 앞길-수성참발소-시흥행궁으로 이어졌다. 시흥행궁에서부터는 국도 제1호선의 노선과 대체로 일치하는 길을 이동했다. 장승고개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있는 고개이고, 대방천교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해당한다. 마장천교는 도림천이고 문성동은 서울특별시 금천구 독산본동이다. 시흥행궁의 위치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5동 831-6번지 일대로 비정된다. 정조는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시흥행궁을 출발해 만안교-안앙참발소-군포천-서원냇다리-청천평-사근평행궁-지지대고개-괴목정교-만석거-영화정-장안문-수원화성으로 이동했다. 안양참발소는 경기도 안양시에, 사근평행궁은 경기도 의왕시 고촌동에 있었다. 지지대고개는 경기도 의왕시와 수원시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고 괴목정교는 지지대고개의 남쪽에 있던 다리이다. 만석거는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에 있는 저수지이다. 영화정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정자동에 있던 정자이고, 장안문은 수원화성의 북문이다. 사근평행궁에서는 낮 시간에 잠시 쉬어갔다. 이 구간은 지금의 국도 제1호선과 일치하지 않는다. 수원시내에서 두 노선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수원시내를 통과하는 지금의 국도 제1호선이 본래의 국도 제1호선 구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성행궁을 출발해 수원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을 지나 현륭원으로 이동했다.


    정조는 가마가 지나는 길에 글을 새긴 돌을 이용해 표지석을 길 옆에 세워두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모두 18곳에 표지석이 건립되었다. 표지석이 설치된 18곳은 지지대고개(遲遲峴), 지지대(遲遲臺), 괴목정(槐木亭), 진목정교(眞木亭橋), 만석거(萬石渠), 대유평(大有坪), 관길야(觀吉野), 영화정(迎華亭), 매교(梅橋), 상류천(上柳川), 하류천(下柳川), 황교(皇橋), 옹봉(甕峯), 대황교(大皇橋), 유첨고개(逌瞻峴), 유근다리(逌覲橋), 만년제(萬年堤), 안녕리(安寧里) 등이다.

  • 환관이 덕을 베풀었다는 인덕원으로 향하던 인덕원길

    정조의 현륭원 행차
    정조의 현륭원 행차(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전국으로 향하던 간선도로가 한양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뻗어 있었다. 6개 방향으로 뻗었던 대로는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던 길이었다. 한양에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가 있는 남부지방으로 향하던 길은 삼남지방으로 가는 길이라는 의미에서 삼남로 또는 삼남대로라 불리기도 했다. 삼남로는 조선시대 육로 교통의 중심축이었으며, 이 길을 통해 삼남지방의 물산이 중앙으로 이동하고 젊은 선비들은 과거를 치르기 위해 한양으로 올 수 있었다. 한양에 접해 있던 경기도를 통과하던 길은 경기도 삼남길이라는 이름으로 근래에 다시 조명되고 있다.


    경기도 삼남길 가운데 제2길이 인덕원 옛길이다. 인덕원(仁德院)은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에 있던 숙박 기능을 갖춘 편의시설이었다. 조선시대에 한양에 살던 환관들이 이곳으로 살면서 동네 주민들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데에서 인덕이라는 이름이 생겨났으며, 이 마을에는 여행중인 관리들에게 숙박 기능을 제공하던 원이 있었다. 환관이란 궁중에서 임금을 보좌하던 내시를 일컫는다. 이로 인해 인덕원은 내시마을이라 불리기도 했다.


    인덕원은 과천과 안양, 의왕을 잇는 경기 남부의 교통 요지로 매우 유서 깊은 곳이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도 가운데 『해동지도』에는 인덕원평(仁德院坪), 『1872년 지방지도』에는 인덕원천(仁德院川), 『대동여지도』에는 인덕원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에서는 과천현 북쪽의 남태령을 지나 과천을 경유하여 인덕원을 지나면 수원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표기되어 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면서 인덕원에는 자연발생적으로 주막이나 상점들이 등장했다. 인덕원은 조선시대에 사방을 연결하는 주요한 교통 요지였으며, 현대에도 중요한 교통 결절점으로 기능하고 있다. 인덕원 터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인덕원역 6번 출구 근처의 이면도로에 인덕원 터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세조실록』 9권(1457년)에는 인덕원 일대의 지형에 대한 평가가 있다. 인덕원 동쪽에 이르러 주변의 산세를 살펴보니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용과 호랑이의 기운이 자못 아름답다며 풍수상으로도 매우 길지라는 평가를 하였다. 현대의 풍수가들도 인덕원 일대가 배산임수의 길지이며, 부의 기운까지 가진 상업의 요지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인덕원 옛길은 인덕원 터에서 학의천을 지나 백운호수에 이르는 구간을 포함한다.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의 새마을공원 옆에는 인덕원 옛길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인덕원 터 표지석과 인덕원 옛길 표지석은 100여 m 떨어져 있다. 1999년 10월에 설치된 인덕원 옛길 표지석의 뒷면에는 정조가 화성 현륭원으로 능행을 할 때 인덕원에 머무르면서 주변 고을 백성들의 민원을 듣고 그들의 생활상을 보살폈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는 12번의 능행 가운데 6차례에 걸쳐 인덕원 옛길을 따라 이동했다. 『정조실록』 37권(1793년)에는 정조가 현륭원에 가던 길에 과천에서 낮 시간 동안 머물렀으며, 오후에 인덕원 들녘을 지니다 길가에 있던 남성들을 불러서 위로하며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지금 인덕원은 경기도 과천시와 군포시, 수원시 등지로 향하는 도로의 분기점이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북쪽의 시흥군 과천면, 동쪽으로는 시흥군 일왕면, 남쪽으로는 수원군 등지의 교통로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1950년 6.25 전쟁 때만 해도 인덕원 일대는 소나 말이 끄는 마차가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았고 포장도 되지 않아 사람이 다니기도 힘든 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인덕원 사람들이 한양의 영등포나 남대문 등지에 나무를 팔러 가던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인덕원 일대의 주민들이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관악산, 청계산 등지에서 나무 장작을 마련하여 안양이나 영등포의 시장에 팔았다. 소 등에 장작을 싣거나 지게에 짊어지고 밤 12-1시 사이에 인덕원을 출발하면 남태령 고개를 넘어 한양 도성에 도착해 장작을 팔 수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남태령 고갯길의 폭이 넓어지면서 우마차를 이용해 장작을 운송했다.

  • 일한만큼 받는 화성건설의 성과급제

    화성 건설에서 특별히 강조해야 할 사항은 임금 지불 방식에서 날품팔이들에게 성과급제를 시행한 것이다. 이는 하루에 일정 액수를 정하여 임금을 지불하는 일당제가 아니고 짐을 옮긴 거리와 크기 그리고 회수에 따라 차등 지급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정조와 다산 정약용이 화성 건설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진행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은 비용 절약의 방법으로 정조에게

    한 걸음마다 표시하는 나무를 세워 3,600단으로 나누고, 그 다음 인부를 모집하여 개울의 자갈을 지고와 1단을 채우는데 따라 품삯을 얼마씩 준다면, 그들은 자신이 계산하여 많이 져 나를 수록 이익이 많을므로 힘껏 일을 하여 며칠 안되어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날품을 주는 것과 비교하면 비용이 절약되고 공정도 빠를 것입니다

    이라고 건의하자 정조 또한 맞장구를 쳤다.

    품삯을 날짜로 계산해서 주지 않고 짐을 단위로 해서 거리의 원근을 헤아려 차등을 둔다면 강한 자는 넉넉히 백전을 취할 것이요 약한 자도 제 한 몸 가리기에는 족할 것이다.

    화성 건설에서 모군들의 노임 지불방식은 날품이나 날짜로 계산하여 주는 소위 ‘일당제’가 아니고 윗글의 표현 그대로만 보면 정량을 많이 져 나르고 원근을 헤아려 차등을 두는 도급제적 성과급제로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 하루에 2전 5푼 정도 일당에 해당하는 임금을 지불하였다. 2전 5푼이란 쌀 1가마에 5냥으로 치면 20일 정도 일하면 쌀 1가마를 살 수 있는 당시로써는 엄청난 일당이었던 것이다.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에 도성을 쌓았는데 화성 건설이 되기 약 400년 전이었다. 화성 건설에서의 일꾼 부리는 방식은 한양도성을 쌓을 때 사람을 부리는 방식과는 아주 판이하게 달랐다. 한양도성을 쌓을 때는 사람들이 강제로 동원되었다.

    그러다 보니 농사일이 바쁜 계절을 피해 주로 겨울철과 가을에 공사할 수밖에 없었다. 1396년(태조 5) 각도의 민정(民丁) 11만 8천 76명을 모아 도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1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이르러 또 민정 7만 9천 4백 31명을 모아서 8월 13일에 일을 시작하여 9월 그믐날에 일을 끝냈다.

    1422년(세종 4년)에는 태종의 명으로 성을 수축하여 흙으로 만든 토성(土城)을 모두 돌로 바꾸었는데, 8도의 군사 총 32만 2천 4백 명을 모아,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에 마쳤다.

    조선 초기 강제로 동원되어 일을 하던 방식에서 화성 건설 시 돈을 주는 방식으로 변화된 것은 보다 세상이 발전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자본주의적’인 사회로 변화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임금 지불방식이 월급에서 일당 지급으로 변화된 것은 이중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먼저 이는 조선 중기까지의 강제부역보다는 더 진전된 노임 지불방식인 반면 노동조건과 노동강도가 더욱 가혹해진 것을 의미한다.

    화성 건설의 노임 지불방식에서 봉건적 유제도 남아 있었다. 즉 하루 정식화되어 있는 노동량을 어기는 담가군(擔架軍)을 곤장으로 다스리도록 한 것이다. 이는 ‘경제 외적 강제’의 봉건적 관행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 영화도의 중심 영화역

    영화역은 정조 때에 서울의 양재역을 1796년 8월 29일 수원으로 이전한 후 영화역으로 이름을 고친 역으로, 한양에서 충청도로 이어지던 영화도를 관할하던 찰방역이었다. 정조는 팔달산 기슭에 수원 화성을 만들고 새롭게 건설된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경제의 활성화를 강조했다.


    조선 시대에 수원 화성이 나름 대규모로 개발되었음에도 부근에는 이렇다 할 역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 화성으로 이르는 길이 쉽지 않은 상태였다. 수원 화성이 축조되고 수원이 삼남 지방으로 이어지는 요충지로 부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의 북쪽이 다소 취약했기 때문에 화성의 북문(장안문) 밖에 역관과 영화역을 설치했다고 한다. 영화역은 수원 화성 축조 이후 한양의 남쪽에 있던 역참의 중심이 되었으며, 화성으로 인구를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양재역의 관사와 관원 뿐만 아니라 역참에 속한 주민들 모두를 이주시켰다고 한다.


    영화역은 손님을 맞이한다는 의미이며, 1796년 수원 화성이 축조된 이후 정조가 이곳을 찾아 ‘꽃을 맞이한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또는 수원에서 한양으로 가는 사람과 한양에서 수원으로 오는 사람들을 수원 화성에서 맞이한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영화역이 가지는 의미와 중요성으로 인해 사람들은 영화역을 모든 역 가운데 우두머리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장안문 근처에 사람이 드물게 사는 빈터를 골라 역참터를 마련하고 기존의 양재역을 이곳으로 이설한 후 영화역이라고 이름 붙였다. 영화역이 새롭게 만들어진 후 역 주변은 우편 기능을 수행하는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섰으며 화성 안에서 바라다보면 하나의 커다란 관촌을 이루었을 정도로 규모가 큰 역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따르면, 영화역은 수원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長安門) 바깥 길의 동쪽 1리 지점으로 옮기면서 영화역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와 동시에 양재도라는 명칭을 영화도로 개편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영화역으로부터 명칭이 생겨난 지금의 수원시 영화동은 과거 영화역이 있던 곳이 아니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영화역의 구체적인 모습을 담고 있는 『화성성역의궤』, 『영화역도(迎華驛圖)』 등을 토대로 살펴보면, 영화 역은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수원시 영화동 일부와 그 북쪽의 조원동 일대에 자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역의 위치는 영산공원(마장산, 역마산)과 거북 시장 근처라는 의견이 있다. 또는 영화초등학교 사거리 근처가 영화역의 자리라는 견해도 있다. 마장산(馬場山) 또는 역마산(驛馬山)이라는 이름은 영화역의 북쪽에서 말들이 풀을 뜯어 먹었다는 데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영화역은 약 100년 동안 운영되었다. 그러나 다른 역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흐르면서 역정이 문란해짐에 따라 점차 유명무실해졌다. 영화역이 자리했던 수원 화성의 북문 밖은 여전히 서울과 수원을 오가는 주요한 교통요지로 기능하고 있다.

  • 화성 축조를 위한 재료는 어디서 왔을까?

    숙지산, 여기산, 팔달산에서 채취한 돌로 건설한 화성

    화성 건설에서 돌은 숙지산과 여기산 두 산에 각각 2곳, 권동에 1곳 등 모두 다섯 군데에서 채취하였다. 그러나 공사 중 팔달산에서도 석맥을 발견하여 서쪽 성은 제자리에서 캔 돌을 사용하여 돌을 캐낸 곳은 모두 6곳이 된 셈이다. 그중에서 숙지산 돌은 8만 1,100덩이, 여기산 돌은 6만 2,400여 덩이, 권동의 돌은 3만 200여 덩이, 팔달산 돌은 1만 3,900여 덩이 등 모두 28만 7,600여 덩이가 축성에 소요되었다. 석맥이 있는 논과 밭은 국가에서 매입하고 이곳에 석수를 투입하여 돌을 떠내었다. 석맥을 잘 골라 결을 살펴 정으로 구멍을 파고 밤나무나 물푸레나무를 박고 물을 부어 나무가 팽창하는 힘으로 돌을 떠내었다.


    돌 뜨는 일은 석수 1명과 조역 1명이 1패가 되어 진행되었다. 돌 뜨는 데는 정철과 강철 그리고 숯, 쇠가죽, 생칡, 청태목이 필요하였다. 돌을 뜬 다음에는 이를 다듬어 그 크기를 줄여 운반하였다. 돌을 운반하는 데는 여러 운반도구가 활용되었는데 유형거 11량, 대거 8량, 평거 76량, 동거 192량, 발차 2량, 썰매, 굴림판 등이 사용되었다. 수레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숫돌같이 판판한 도로[治道]가 필요하였다. 운반된 돌은 어느 수레 몇 채가 몇 덩어리를 운반했는지, 담기로 운반한 것은 몇 담기가 몇 덩이를 운반했는지에 대해 매일 작업일지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돌 표면에 각각 길이와 넓이, 부석소 이름, 편수와 석수의 성명을 써 넣어 이를 기준으로 건별 기록을 작성하도록 하고 돌 값을 지불하였다.

    수원화성 동암문

    목재는 국가에서 관리하던 재목을 베어 오거나 사오는 두 가지 방식으로 조달하였다. 먼저 국가에서 관리하던 안면도 · 장산곶 · 강원도 지역에서의 조달은 직접 베어내어 운반하였다. 안면도에서는 방풍림을 베어내었는데 치수대로 베어 내 포구로 끌어내고 충청수사가 관할하는 수영의 방·병선은 물론 각 읍진의 방·병선 총 30척에 나누어 1,000주를 발송하였다. 안면도에서 수원부의 구포까지 운반하는 기일은 2일이 걸렸으며, 30척에 달하는 배의 재목은 2월 9일부터 시작하여 3월 3일까지 1달이 채 안 되는 기간에 모두 실어 날랐다. 황해도에서는 장산곶의 재목을 오차포(五叉浦) 앞바다에서 취합하여 구포로 수송하였다. 강원도의 경우 금성(현 금화)에서 벤 재목은 낱개로 금성천에 떠내려 보내면 북한강을 거쳐 낭천현 방현포(芳峴浦 : 지금의 화천군 화천읍 아리)로, 양구에서 밴 재목들도 강을 따라 낭천현으로 집산되었다. 여기서 대개 55개를 한 묶음으로 묶어 뗏목으로 춘천을 거처 가평·청평·양수리로 띄워 보냈다.


    이 목재들은 경강에 집결되었다. 경강부터는 조운선으로 수원부까지 운반하게 되는데, 경강 → 인천 팔미도 앞바다 → 안산 옥구도 앞바다 → 화성유수부 쌍서도 → 우음도 구포로 운반하였다. 조운선은 팔미도 바깥 바다로 왕래하는 데 익숙하여 팔미도 앞바다로 나오는 분기점에서 안산 옥구도 앞바다까지 군사가 인수인계한다. 원활하고 신속한 운반을 위하여 감색을 정하여 배를 타고 멀리까지 바라보다가 재목을 실은 배가 경계에 도착하기를 기다려 착실히 호송하여 시각이 지체되는 폐가 없도록 하였다. 이렇게 모여든 재목들은 치목소(治木所)에서 다듬거나 성역소에서 각 시설물에 필요한 대로 재단 절단하여 활용하였다.


    화성 성역의 기와와 벽돌 그리고 철물

    화성 성역에서 기와와 벽돌은 왕륜면 백운동 성역소에서 땔나무를 마련하여 조달하였다. 왕륜면과 사근평 두 곳에 기와는 6개소, 벽돌은 3개소에 나누어 설치하고 장교 2명, 색리 2명을 정하여 감찰 · 독려하였다. 지붕에 올라가는 모든 건축 재료는 ‘와자(瓦子)’로 표현되고 이는 암키와, 암 · 수막새, 용두, 취두, 토수, 잡상, 연가 등이다. 기와가마는 왕륜과 서봉동에 설치하였다. 와자로 멋을 낸 대표적 시설물은 영롱담이다. 전(甎)으로 표현된 재료는 대방전(大方甎), 소(小)방전, 반(半)방전이고, 벽(甓)으로 표현된 재료는 종벽(宗甓), 귀벽이[耳甓], 개벽(蓋甓), 홍예벽 등이다. 이것으로 보아 방전은 벽체를 쌓거나 바닥에 까는 데 사용되었고, 벽(甓)은 벽체를 쌓고 시설물의 섬세한 부분을 처리할 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벽전은 왕륜과 서봉동, 그리고 북성 밖 등 3곳에서 조달되었다. 벽돌가마는 모두 20좌가 설치되어 1좌당 1일 62.5장을 구워 총 1,250장의 벽돌을 생산하였다.


    화성 성역에서 철물은 그 사용 용도가 다양하였다. 철물은 해서(황해도), 호서(전라도), 관동(강원도), 서울, 수원부 등 각처에서 사왔다. 특히 철의 운반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는데 영월에서 조달된 3만 근의 각종 철은 물길이 좁고 여울이 얕아 새로 만든 배로는 실어 나를 수 없어 작은 토박이 거룻배로 적당한 양으로 나누어 싣고 차례로 갈라 실어서 충청도 경계로 운반하였다. 이 철물은 10월 28일에 여주 초입에서 겨우 내려보냈는데 여주 경계인 월계강과 상심진(上沁津)이 모두 얼어 배가 다닐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얼음이 풀리는 봄까지 기다려 수송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다산 정약용의 발명품인 거중기는 왕실에서 1부를 내려주었다. 유형거는 왕실에서 1량을 내려주고 10량을 새로 만들었다. 유형거는 저울과 같이 좌우로 움직이는 독특한 수레로 끝부분이 뾰족하여 이를 돌 밑에 찔러 일정하게 돌을 수레로 이동하고 손잡이를 누르면 별 힘을 안 들이고 들어 올릴 수 있는 특수 수레였다. 녹로 2좌는 역소에서 새로 만든 것인데, 이 녹로는 돌을 묶어 전후좌우로 움직이는 기계로 이전 시기에도 활용되었고 특히 화성 성역에서 돌을 쌓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외에도 화성 성역에서는 각종 재료와 잡물이 조달되었다. 숯, 석회, 장기산 뇌록, 종이, 붓, 먹, 벼룻돌, 숙마, 느릅나무 껍질인 유피, 쇠가죽, 빈 가마니, 숫돌 등이 조달되었다.

    정약용초상
    정약용초상(사진출처:한국데이터진흥원)
    수원화성 동암문

  • 수원 화성을 거쳐 안성까지 가던 영화도(迎華道)

    영화도는 조선 시대에 경기도에 있던 역도 가운데 하나이며, 경기도 수원의 영화역(迎華驛)을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본래 양재도에 속해 있었던 것이 1796년(정조 20)에 개편되어 영화도가 되었다. 중심역인 영화역에는 종6품이 찰방이 파견되어 역무를 관장했다.

    정조는 1796년 가을 수원 화성 축성이 마무리된 후 수원 화성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양재역을 장안문 북쪽으로 이전시키고, 삼남 지방으로 향하던 모든 길을 영화역으로 집중시켜 기존 역로를 영화도로 개편했다. 한양 바로 남쪽에 있던 양재역을 수원 화성으로 옮긴 것은 화성의 위상을 더욱 드높이기 위해서였다.

    영화도의 전신인 양재도는 세조 연간에 역도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고려 시대에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설치되었던 광주도(廣州道)에 속한 역들을 중심으로 편제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조선 초기 수원에는 동화역과 장족역이 설치되어, 경기도 남양의 해문역, 진위의 청호역, 양성의 가천역, 안성의 강복역 등으로 구성되는 동화도(同化道)가 설치되어 있었다.

    1421년(세종 13) 한양에서 전국의 주요 지방으로 연결되던 역로에는 일반 역승이 아닌 정역찰방(程驛察訪)이 파견되어 있었다. 이 때 충청좌도 방면으로 향하던 양재역, 낙생역, 구흥역, 금령역, 좌찬역, 분행역, 무극역 등이 경기좌도 충청도 정역찰방의 관할에 포함되었다.

    경기좌도 충청도 정역찰방은 1456년(세조 2)에 경기 충청좌도 정역찰방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두 정역찰방의 관할에 있던 경기지방의 역들을 모두 양재도 관할로 편제하였다. 1796년 충청도 정역찰방이 관할하던 역과 동화도가 영화도로 개편될 때에 과천역과 영화역을 새롭게 설치했으며 청호역·장족역·동화역 등의 3개 역은 폐쇄되었다. 이 때 중심역은 양재역에서 영화역으로 바뀌었다. 

    수원 화성의 건축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는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따르면, 양재역을 수원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長安門) 바깥 길의 동쪽 1리 지점으로 옮기면서 영화역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와 동시에 양재도라는 명칭을 영화도로 개편했다는 기록이 있다.

    1808년(순조 8)에 출간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영화도가 낙생역·구흥역·금령역·좌찬역·분행역·무극역·과천 읍참역·수원 본참역·해문역·가천역·강복역 등 11개 역을 포함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후 1865년(고종 9)에 간행된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낙생역·구흥역·금령역·좌찬역·분행역·무극역·강복역·가천역·청호역·장족역·동화역·해문역 등 12개의 속역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896년(고종 33) 1월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 화성 건설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는?

    정조는 1793년 12월 6일에 영의정을 역임한 채제공(蔡濟恭)을 총리대신으로, 훈련대장을 역임한 조심태(趙心泰)를 감동당상으로 임명하면서 화성건설을 본격화하였다. 이어 12월 8일에 화성성역소를 설치하고 낭관(郎官)의 우두머리인 도청에 이유경(李儒敬)을 임명하였다. 그 하위 단위는 작업관리 및 현장감독 분야와 사무관리 및 지원부서로 나누었다.


    화성 성역에 동원된 기술자는 석수, 목수, 미장이, 와벽장이, 대장장이, 개와장이, 수레장이, 화공, 가칠장이, 큰끌톱장이, 작은끌톱장이, 기거장이, 걸톱장이, 조각장이, 마조장이, 선장, 나막신장이, 안자장이, 병풍장이, 박배장이, 부계장이, 회장이 등 549명이었다. 기술자 동원과정을 보면, 먼저 1793년 12월 6일 각 지역에 거주하는 기술자의 이름과 거주지를 책자로 작성하여 보고할 것을 공문으로 발송하고, 다음은 훈련도감, 수어청, 총융청, 용호영, 내수사, 선공감 등의 석수 · 목수 · 대장장이들의 본래 일을 면제하고 화성성역소로 보낼 것을 지시하였다.


    석수는 돌을 떼 내는 일, 다듬는 일, 조각하는 일을 맡았다. 이들은 일을 보조해 주는 조역 1명과 함께 2명이 1패가 되었다. 조역에는 어린아이까지 동원되었다. 석수를 기술자들 중에서 제1순위로 꼽았는데 가장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고 성곽 대부분이 돌로 건설되었기 때문이었다. 석수들은 돌을 조달하는 부석소에 가장 많이 파견되었다. 부석소에서 돌을 떠내고 그 돌을 다듬는 일과 특히 돌이 가장 많이 소요되는 동서남북의 체성과 남수문, 장안문의 돌쌓기에 석수들이 집중 투입되었다.


    목수는 총 335명이 투입되었다. 목수도 석수와 마찬가지로 서울 지역만으로는 충당할 수 없어 각 읍에 소재한 목수 중에서 공장이건 사장이건 승과 속을 막론하고 솜씨가 뛰어난 자를 택하여 거주지와 성명을 상세하게 책자로 정리 보고하고, 보고된 뒤로는 제멋대로 떠날 수 없다는 뜻을 엄하게 당부하도록 하였다. 1794년 1월 30일 화성 문루 공사를 위하여 급히 공문을 발송하여 경상도 영천 은해사의 승 쾌성(快性)과 강원도 양양 명주사의 승려 진련(震蓮)을 급히 올려보낼 것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미장이는 총 295명이 투입되었다. 이들은 성벽 여장과 옹성, 적대, 공심돈, 노대, 포루, 봉돈 등의 벽돌쌓기에 주로 투입되었다. 석수, 목수, 미장이 이외에도 와벽장이, 대장장이, 개와장이, 수레장이, 화공, 가칠장이, 큰끌톱장이, 작은끌톱장이, 기거장이, 걸톱장이, 조각장이, 마조장이, 선장, 나막신장이, 안자장이, 병풍장이, 박배장이, 부계장이, 회장이 등이 동원되었다.


    기술자를 제외한 모군(품팔이)은 화성 성역 현장에서는 자재를 운반하는 담군과 허드렛일을 하는 모군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기초공사, 성벽 쌓기, 석회번조, 흙짐 지기, 돌 운반하기, 치도(治道)와 신작로 닦기, 준천 및 연못 파기 등에 고용되었다. 이 외에도 각 지역에서는 벌목, 나무운반, 남양부 구포나루까지의 운반과 뱃사공 등이 고용되었다.


    모군 동원방식에 대해 정조는 신하들과 화성건설 이전과 건설 과정에도 여러 차례 토론을 거치고 있다. 왜냐하면, 1789년 수원부 청사를 팔달산 동쪽으로 옮길 때도 각 도의 백성이 구름같이 몰려든 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농촌을 떠난 유이민(遊離民)과 날품을 팔기 위한 예비노동자가 광범하게 존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정조 이외의 관료들은 모두 강제 부역을 주장하거나 승군을 강제로 뽑을 것을 건의하였다. 그렇지만 정조는 끝까지 돈을 주고 일을 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화성건설에 참여한 사람들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화성건설에 가장 많은 인원이 투입된 시점은 1794년 9월까지이다. 화성건설 초기인 이 시기에 약 4,000명에 달하는 인원들이 터다지기, 개울치기 등에 집중 투입되고 있다. 이후 1795년과 1796년에는 2,000명 내외의 인원들이 투입되어 화성건설을 마무리한 것이다.

    수원화성 장안문

  • 정약용의 화성 기본설계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인재양성과 연구사업의 기초기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이는 다른 왕들과 구별되는 정조의 가장 두드러진 업적 중의 하나이다. 특히 즉위 1년 후인 1777년 2월에 백과전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중 5,020권을 은 2,150냥을 지급하고 사 오도록 명하였다. 원래는 《사고전서》를 사려 했으나 구하지 못하고 부득이 청나라 강희제 때 만들어진 《도서집성》을 사게 되어 북경에서 502 궤짝을 수레에 실어와 규장각에 비치하게 되었다.


    다산 정약용은 1789년(정조 13) 배다리〔舟橋〕를 만드는데 그 규모와 제도를 올려 성공한 바가 있어 주상께서 성제(城制)에 대해 조목조목 올릴 것을 명하여 본인이 화성을 기본 설계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리하여 정약용은 윤경(尹畊)의 보약(堡約)과 유성룡(柳成龍)의 성설(城說)에서 좋은 제도만 채택하여 모든 초루(譙樓)ㆍ적대(敵臺)ㆍ현안(懸眼)ㆍ오성지(五星池) 등 모든 법을 정리하여 왕에게 올렸다. 또 정조는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ㆍ《기기도설(奇器圖說)》 등의 중국 책을 다산에게 내려 인중법(引重法)ㆍ기중법(起重法)을 강구하도록 하였다.


    『고금도서집성』에는 중국의 성제도 실려있다. 그리하여 중국 성제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인 벽돌 쌓는 법을 접목시켜 화성에서는 벽돌과 돌이 만나게 된다. 이는 명․청대의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북학’의 수용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정약용은 여러 책들을 참고하여 『성설』을 지어 정조에게 올렸다. 『성설』의 내용은 성곽의 규모인 1. 푼수(分數), 2. 돌로 쌓는 재료(材料), 3. 호참(壕塹)을 파서 흙을 사용하는 것. 4. 자갈로 기초를 다지는 축기(築基), 5. 성돌의 크기인 벌석(伐石 6. 수레길 치도(治道) 7. 새로운 수레 유형거를 만드는 조거(造車) 8. 성을 쌓는 법 등이었다.


    위의 8가지 원칙이 임금이 지은 『어제성화주략』으로 채택되었다. 이어서 규장각의 도서를 내리니, 곧 『기기도설(奇器圖說)』 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이를 참고로 하여 다음과 같이 성의 제도와 그림을 아울러 작성하여 정조에게 보고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는 성문을 방비하기 위한 옹성도설(甕城圖說), 둘째는 포루도설(砲樓圖說)과 함께 적루(敵樓)ㆍ적대(敵臺)ㆍ포루(鋪樓)ㆍ노대(弩臺) 등의 필요성 셋째는 현안도설(懸眼圖說), 넷째는 누조도설(漏槽圖說), 다섯째는 기중도설(起重圖說) 등이었다.


    성역(城役)을 마친 뒤에 정조는 기중가(起重架)를 써서 돈 4만 냥의 비용을 줄였다며 다산을 칭찬하였다.

    그렇지만 위에서 올린 모든 원칙이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았다. 성의 둘레 3,600보는 4,600보로 늘어났고 호참은 파지 않았으며 성제도 벽돌을 이용한 옹성, 적대 등이 탄생했다. 특히 현안은 중국의 병서에만 있고 실제 건축되어 본 적이 없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방어시설물이다. 다산 정약용이 설계하지 않은 장대, 공심돈, 수문, 암문 등이 축성 과정에서 추가 설치되었고 ‘근총안 통천미석’은 조총으로 근접하는 적을 살상하는 동서양 어디에도 없는 방어시설물인 것이다.

  • 한양에서 수원 화성으로 향하던 수원로(水原路)

    수원로는 조선시대에 수도인 한양에서 남쪽에 자리한 수원 화성으로 이어지던 간선도로이며, 수원별로(水原別路)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 한양과 지방을 연결하던 간선도로가 최종적으로는 10대로로 구성되므로 수원로를 간선도로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 길은 도성에서 노량진-시흥-안양 행궁-사근평 행궁-수원 행궁을 거쳐 건릉까지 이어지는 구간으로 총 100리에 달하는 거리이다. 여기에서 시흥은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가 아니라 서울특별시 금천구의 시흥동 일대를 가리킨다. 건릉(健陵)은 조선 22대 왕이었던 정조와 그의 부인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를 함께 안장한 무덤으로 행정구역 상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산 1-1에 위치한다. 건릉과 융릉의 앞을 지나는 도로의 명칭은 효행로이다.

    장안문
    장안문(사진출처:문화재청)

    건릉과 융릉(현륭원)은 정조 및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이다.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1789년 화성으로 옮기고 이를 현륭원이라 칭했으며, 매년 아버지에게 문안을 드리고 친제를 올렸다. 정조가 아버지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행차하던 도로가 바로 수원로이다. 정조가 어머니의 회갑을 맞은 1795년 한양 도성의 창덕궁에서 현륭원까지 8일에 걸쳐 이동한 행차를 을묘년 원행이라 한다. 정조는 아버지 묘소를 참배하고 수원화성의 행궁에서 어머니의 회갑연을 베풀었다.


    본래 정조가 수원으로 행차하던 길은 동작나루를 통해 남태령-과천-사근내-지지대고개를 넘는 구간이었으나,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계기로 남태령 고개를 넘어 과천으로 이어지는 험한 구간을 이용하지 않고, 한강의 노들나루에서 시흥(지금의 서울특별시 금천구 일대)과 안양을 거쳐 수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 다른 길을 개통하였다. 이 때문에 수원별로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정조 이후 모든 임금이 지나던 길이 되었다.

    정조의 현륭원 행차(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수원시와 의왕시 경계부에서 지금의 국도 1호선이 통과하는 구간의 지지대고개는 과거에 사근현 또는 미륵당이 있어 미륵현으로 불렸다. 해발 약 100m에 달하는 지지대고개의 남쪽으로는 기복이 작은 저지대가 넓게 펼쳐진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으로 이동하면서, 아버지의 묘가 내려다보이는 데도 이동 속도가 너무 느리게 느껴져 “왜 이리 더딘가”라고 아쉬워하였다고 한다. 또한 참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지지대고개를 넘으면 더 이상 아버지의 묘를 볼 수가 없어 안타깝고 그리운 마음에 고갯마루에서 눈물을 흘리며 한참을 머물렀다고 한다.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조가 능을 뒤돌아보며 고개를 떠나기를 아쉬워하였기 때문에, 지금의 지지대고개에 이르면 왕의 이동 속도가 느릿느릿해졌다는 데에서 한자의 '느릴 지(遲)'자 두 개를 붙여 지지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지대고개에는 정조의 효심을 후세 사람들에게 알리는 동시에 시민들의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조성된 효행공원이 있으며, 여기에는 효행기념관과 정조의 동상 등이 있다. 수원로는 지지대고개부터 대황교 근처에서 현륭원 방향으로 향하고 충청도와 전라도로 뻗은 대로는 진위 방향으로 나아간다.


    일본이 1901년 경부선 철도 노선을 계획하면서 안양을 지나 지지대고개를 뚫고 팔달산 뒤쪽을 관통하는 노선을 구상했다고 한다. 수원의 주민들이 지지대고개 통과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그 결과 경부선 철도는 수원화성을 돌아 지금과 같이 군포-부곡-수원역의 노선으로 확정되었다. 수원로는 근현대 들어 수원을 서울과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동맥이라 할 수 있다.

  • 화성건설 비용

    정조는 1789년 7월 11일 장헌세자의 원침을 이전하기로 하고, 4일 만인 15일에 수원의 읍(邑) 소재지를 전격적으로 팔달산 동쪽으로 옮겼다. 그리하여 양주 배봉산의 장헌세자 원침을 수원부 구읍치로 옮기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구읍치에 있던 주민들의 주택과 전답에 대한 보상도 이루어졌다. 보상은 민가 319호에 총 2,417칸으로 원가 4,818냥에 4,394냥을 더 주어 총합 9,212냥이 들었다. 그리고 원침조성 등을 포함한 총 경비는 돈이 18만 4,600여 냥, 쌀이 6,320석, 목면이 279동 남짓, 베 14동 등으로 돈으로 환산하면 총 24만 5,500냥이 지출되었다. 이렇게 해서 현륭원의 모든 공역은 1789년 10월 16일에 완공되었다.

    정조대 국가 수입 총규모는 호조 · 선혜청 · 균역청 · 환곡 · 병조와 5군영 · 장용영 등에서 거두어들이는 790만 냥에 달하였다. 그렇다면 화성신도시 건설 자금 조달은 어떤 형편에서 진행되었는가. 당시 주요 재정 재고는 은자(銀子), 전문(錢文), 면포(綿布), 미(米) 등이었다. 은자는 1년 재고가 항상 40만 냥 전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은 1냥의 가치를 전 4냥으로 환산하면 160만 냥이다. 그리고 전문이 100만 냥 이상을 유지하고 있고, 면포는 50만 냥, 미는 140만 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화성 성역 기간인 1794년부터 1796년 사이에 전문과 미의 재고가 급격히 준 점이 주목된다. 이 시기에는 자연재해에다가 화성 축성에 따른 재정 부족으로 중앙재정이 현저하게 줄고 있었다.

    화성 성역에 구획(區劃)된 총금액은 전(錢) 87만 3,517냥 7전 9푼과 경기회부미 쌀 1,495석 11두 4홉이었다. 그중에서 직접 배정된 전은 24만 3,517냥 7전 9푼이고, 빌려 온 돈의 총액은 63만 냥이었다.

    화성 성역에서 실제 자금 염출 기관은 어영청 20만 3,000냥, 금위영 13만 3,000냥, 기영과 완영이 각각 10만 냥으로 호조와 선혜청과 같은 중앙재정기관에서는 단지 5,000냥과 1만 냥이 투입되었을 뿐이었다. 이 외에 경상도 감영에서 5만 냥, 통영 5,000냥, 4영문 1만 8,000냥 등이었다.

    화성행궁은 1789년 7월부터 시작하여 1790년 5월에는 340여 칸에 달하는 규모로 완공되었다. 처음에는 수원행궁이던 것이 1793년에 행정구역명이 화성 유수부로 승격되면서 ‘화성행궁’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고, 1794년부터 화성행궁을 확장 증축하였다. 총비용은 5만 5,734냥 1전 1푼이 들었다.

    그리하여 총체적인 화성 건설에는 1789년 원침 이전과 구읍치 보상비용에 약 24만 5,500냥, 1790년 용주사 창건에 8만 7,505냥 1전, 혜경궁 홍씨 회갑연을 위한 1795년(을묘)의 원행에 지출된 10만 38냥 6전 8푼, 화성 건설에 약 93만 4,028냥 등 총 136만 7,071냥 7전 8푼이 지출되었다.

    이러한 공사비는 호조 1년 수입과 맞먹는 금액으로, 공사 기간이 10년 계획에서 2년 9개월로 줄면서 일시에 많은 양이 필요하게 되어 정조 대 재정압박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 수원화성, 화성의 도시 기반시설

    정조는 읍치의 이전과 읍치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대한 대책 등을 신속하고 적절하게 처리하기 위해 경기관찰사에 서유방, 수원부사에 조심태를 임명하였다. 정조는 화성을 조선의 제2 도시로 조성하고자 여러 가지 행정적 조치를 취하였다. 한편 상업을 부흥시키기 위한 조치가 취해졌는데 수원부사 조심태는 새 고을에 점포를 설치하는 일에 대해 본고장 백성들 중 살림 밑천이 있고 장사물정을 아는 사람을 골라 읍 부근에 자리 잡고 살게 하면서 이자 없는 돈 6만 냥을 빌려주자는 상업진흥책을 내놓았다. 수원 사람 중에서 이자 없는 돈을 꾸어 주어 장사 밑천으로 삼게 하여 상권을 진흥시키려는 정책이었다. 6만 냥이라는 돈은 당시 쌀값을 1석 당 5냥으로 계산하더라도 12,000석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더하여 조포사(造泡寺) 승려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고자 그들에게도 돈을 빌려주어 종이신[紙鞋]을 만드는 본전으로 삼게 하였다.

    멀리서 본 수원화성
    멀리서 본 수원화성(사진출처:문화재청)
    수원화성 측면전경
    수원화성 측면전경(사진출처:문화재청)

    그리하여 이제는 수원을 ‘상왕의 도시’, ‘조선조 제2의 도시’를 건설하려는 준비작업을 착착 진행하게 된다. 1793년 1월에는 ‘수원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고 좌의정을 역임한 채제공을 초대 화성유수로 임명하였다. 조선 조 제2의 도시로 또한 본인이 노후에 머물 곳을 상정한 새로운 신도시 건설 구상을 실현할 강력하고 신뢰할 만한 인물을 등장시킨 것이다.


    신읍치가 들어선 팔달산 주변 지역은 북쪽에 광교산이 우뚝 솟아 숙지산과 여기산 등을 제외하면 낮은 구릉과 평지로 이루어져 있고 물줄기도 수원의 진산인 광교산에서부터 발원하여 수원천이 도시의 중심으로 흐른다. 화성의 도시계획은 화성행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행궁’은 유수가 통치하는 중심 처소가 되고 매년 아버지 원침(園寢)을 찾아올 왕의 처소의 역할을 하게 된다. 더 나아가 순조가 1804년 성인이 된 뒤에는 왕위를 물려주고 정조가 직접 내려와 상왕으로서 통치하는 ‘궁(宮)’이 될 것이었다.

    화성행궁도
    화성행궁도(사진출처:한국데이터진흥원)

    화성행궁의 주요 건물들은 세 구역으로 구분된다. 첫째,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은 평소에는 수원부의 동헌으로 기능하였다. 행궁의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한 생활공간은 평소 유수의 거처이지만 원행 때는 임금의 임시 처소로 사용된 유여택, 내당인 복내당, 혜경궁의 침전으로 사용된 장락당 등으로 구성된다. 둘째, 이동식 담장이 설치된 독특한 구조의 낙남헌은 양로연과 과거시험 시상식 등 행사공간으로 이용되었다. 셋째,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에서는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면서 가난하고 불쌍한 백성들에게 진휼행사를 베풀었다. 신풍루 주변 공간은 군사와 행정을 담당하는 기능을 하였다. 행궁을 호위하기 위해 친군위들이 숙직하던 남북군영 행각, 매년 원행과 관련한 업무를 담당한 외정리소, 행궁의 잡다한 업무를 담당하였던 비장청 · 서리청 · 집사청도 각각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794년 1월부터 1796년 9월 사이 행궁을 둘러싸는 5.7km에 달하는 성곽이 건설되고 도시기반 시설도 새롭게 조성되었다. 먼저 성안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남북대로와 행궁을 중심으로 동쪽을 향하여 사거리를 만들고 이를 ‘십자로’라 불렀다. 이곳에는 상가가 들어서고 민가들이 주변에 조성되었다. 도시는 성곽 안팎 주민들의 거주 구역은 2개의 부(部)로 나누고 다시 그 안에 4개의 거주지로 편성되었다. 네 개의 행정 단위는 자내(字內)를 써서 ‘남성자내(南城字內)’, ‘서성자내(西城字內)’, ‘북성자내(北城字內)’, ‘동성자내(東城字內)’라 하였다. 사대문도 임금을 맞아들이는 북쪽문인 장안문을 가장 크고 화려하게 건설하고 원행과 삼남지방으로 통하는 남쪽문 팔달문을 그에 버금가게 건설하였다.

    팔달문(남문)
    팔달문(남문)(사진출처:문화재청)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면서 관청, 도로, 다리, 상가 등의 도시기반 시설은 물론 저수지와 둔전을 만들어 생산기반 시설도 완비하였다. 뿐만 아니라 도시조경도 중요시 여겨 도로변에 수많은 나무를 심었다. 그리하여 화성에는 버드나무, 뽕나무, 개암나무, 밤나무 등을 가리지 않고 심어 숲을 이루어서 울창한 경관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시 조경의 측면에서 소나무, 뽕나무, 측백나무, 느릅나무, 오동나무, 가래나무, 버드나무, 연, 대나무 등을 심었으며 특히 미로한정에서 국화를 완상하는 ‘한정품국’, 북지에 곱게 피어난 연꽃 등은 수원의 대표적인 꽃이 되었다. 소나무는 지금도 ‘노송지대’로 남아 있고 창룡문 지역과 운동장 사거리부터 만석거 사거리까지의 도로는 낮에도 걷기에 무서우리만치 소나무가 빽빽하였다. 정조는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도시조경적인 측면에서 남지, 동지, 북지, 용연 등의 인공 연못도 팠다. 이 인공 연못의 조성으로 수문과 배수의 역할은 물론 각종 꽃과 나무를 심어 도시의 미관을 한층 격조 높게 하였다.

  • 수원 화성의 역사와 함께한 수원영동시장

    ‘수원영동시장’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영동 팔달문 인근에 자리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팔달문[수원화성 남문] 안팎으로 개설되었던 '성내시장'과 '성외시장', 그리고 '수원우시장'의 전통을 잇고 있다. 수원영동시장이 정식으로 시장을 등록한 것은 1919년이지만, 실제 시장이 탄생한 것은 1796년경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경기 남부 최대의 전통시장이다. 현재 수원영동시장은 골목형 시장이 아닌 3층 규모의 단일 건물에 200여 개의 점포가 입점한 상설시장으로 운영되며, 주단, 포목, 커튼, 수예, 의류, 패션잡화, 생활잡화 등 다양한 품목을 판매하고 있다. 또한, 한복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40여 개의 점포가 있어 ‘한복특화시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수원영동시장
    수원영동시장
    수원영동시장 옆 수원화성
    수원영동시장 옆 수원화성


    정조의 특혜를 받은 상인들이 개설한 성내시장과 성외시장

    수원영동시장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성내시장'과 '성외시장'은 정조 때 특혜를 받은 상인들에 의해 개설된 시장이다. 정조는 1794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화성을 만들었는데, 화성 안에는 상가와 시장이 들어설 자리를 조성하였고, 인삼, 관모를 비롯하여 중국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제시하여 나라 안의 큰 부자들이 모이도록 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많은 상인이 기회를 얻기 위해 수원으로 모여들었다. 거대 자본과 상인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는데, 당시 성내시장은 매월 9, 19, 29일에 우시장과 함께 열렸으며, 성외시장은 매월 4, 14, 24일에 장이 개설되었다. 이중 성외시장은 일제강점기 ‘영정시장’이라고 불리다가 1949년 수원이 시로 승격하면서 오늘날의 이름인 ‘영동시장’으로 부르게 되었다. 당시 영동시장은 매월 4, 9일에 장이 열렸다.


    일제강점기 전국 3대 우시장이었던 수원우시장

    정조는 화성을 만든 후 수원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농민들에게 종자와 소를 나눠주고 둔전을 운영하였다. 이후 늘어난 소를 팔려는 농민들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우시장이 형성되었다. '수원우시장'은 매월 9, 19, 29일에 성내시장과 함께 열렸는데, 당시 한양 도성 내에서는 도축이 엄격히 금지되었기 때문에 한양에서 소를 거래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수원우시장을 찾았다. 더욱이 1905년 경부선 철도가 운행하면서 연간 2만두 이상의 소가 거래되는 전국 3대 우시장 중 한 곳으로 성장하였다.


    수원갈비의 원조 화춘옥

    우시장의 성장과 함께 수원에는 자연스럽게 소고기를 취급하는 음식점들이 생겨났다. 수원갈비의 유래는 해방 이후 팔달문 밖 장터[현재 수원영동시장]의 싸전거리에서 이귀성(1900∼1964)씨가 '화춘옥'(華春屋)을 세운 것이 시초가 되었다. 초기 화춘옥에서는 설렁탕, 해장국, 육개장 등을 판매했으며, 1946년에 처음으로 숯불에 구운 양념갈비를 팔기 시작했다. 수원갈비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수원갈비의 맛을 보기 위해 화춘옥을 자주 찾으면서부터였다. 화춘옥을 시작으로 수원 전역에는 많은 갈빗집이 생겨났으며, 수원시에서는 수원갈비의 맛과 명성을 알리기 위해 1995년부터 ‘수원양념갈비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 갈비하면 소갈비, 소갈비하면 수원, 수원하면 정조

    갈비의 뜻은 "소나 돼지, 닭 따위의 가슴통을 이루는 좌우 열두 개의 굽은 뼈와 살을 식용으로 이르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갈비라 고 하면 소갈비를 말하고 소갈비 구이를 갈비라는 요리로 인식한다.

    특별한 날, 즐겨 먹는 음식 중 하나인 갈비구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대표 한국음식이다. 옛 문헌들에서 등장하는 갈비구이는 『증보산림경제』의 ‘소갈비구이’, 『시의전서』,와 『조선요리제법』에서는 ‘가리구이’,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갈비구이’로 소개되어 있다.

    특히 갈비는 수원이 자랑하는 향토음식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음식이다. 조선 22대 왕 정조는 부친(사도세자)을 기리고 국가 개혁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정조 18년(1794년), 부친의 묘를 옮기면서 화성(華城)축조를 시작해 2년 10개월 만에 완공했다. 많은 사람들이 화성축조와 관련하여 수원으로 모여들었고, 토목공사에 힘들어하는 인부들의 건강도 신경 써야 할 부분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농업생산에 큰 축을 담당하는 소를 함부로 도축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화성을 건설하면서 이 지역에서는 예외적으로 소의 도축이 허용되었고, 이후 자연스럽게 우시장도 발달하게 되었다. 수원에서는 1940년대까지 전국 최대의 우시장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지역 환경의 영향으로 수원에서는 소를 이용한 음식도 비교적 다양하게 발전되어 왔다.

    수원 갈비는 1940년대 개업한 '화춘옥'이라는 식당에서 탄생하였다. 이 식당은 해장국에 갈비를 넣어주던 것으로 입소문을 탔는데 1956년, 갈비에 갖은 양념을 버무리고 소금으로 간을 한 후 숯불에 구워 팔면서 수원 갈비의 시초가 되었다. 수원 ‘화춘옥’의 갈비는 1960년대 전직 대통령이 자주 이 식당을 애용하면서 수원 갈비의 맛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참숯으로 굽는 수원 갈비는인공 감미료를 사용하지 않아 담백한 맛이 특징이며, 넉넉한 양으로 인기가 높다. 한 대에 15cm 이상 되는 크기로 그 양이 푸짐해 ‘왕갈비’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수원갈비는 1985년수원시 고유 향토음식으로 지정되어 그 맛과 전통을 인정받았다.


    재료

    소갈비(뼈포함), 잣, 양념장(간장, 배즙, 설탕, 다진 마늘, 파, 후춧가루, 참기름, 깨소금)

    조리과정
    1. 1. 뼈에 붙은 기름과 힘줄을 제거한 갈비를 6∼7㎝ 정도의 길이로 자른다.
    2. 2. 뼈에 살이 붙어 있도록 포를 떠서 갈빗살 앞뒤에 칼집을 넣는다.
    3. 3. 소갈비에 갈비 양념장을 넣고 간이 충분히 배이도록 충분히 재워둔다.
    4. 4. 달궈진 석쇠에 갈비를 올리고 양념장을 덧바르며 굽는다.
    5. 5. 잘 구워낸 갈비에 잣가루를 뿌려 낸다.
  • 정조가 더디게 환궁하던 지지대고개

    정조가 이름을 바꾼 지지대고개

    경기도 의왕시와 수원시의 경계에는 지지대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과여지대전도』와 『해동지도』에 따르면 과거에는 지지대고개를 사근현(沙近峴)이라고 불렀다. 그러다 정조 대에 사근현에서 미륵현(彌勒峴)으로, 그리고 다시 지지현(遲遲峴)으로 바뀌었다. 시민들은 이곳을 미륵댕이 또는 미륵당 고개라고도 불렀으나, 지금은 지지현 대신 지지대 고개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조의 화성 효행길에 자리한 지지대고개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찾아가기 위해 행차했던 길을 흔히 정조효행길, 화성효행길이라고 부른다.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경기도 화성시로 옮긴 이후로 매년 현륭원을 찾아가 참배하였다. 지지대고개는 정조가 매년 현륭원을 가기 위해 거치던 곳 중 하나였다. 한양에서 출발하여 현륭원으로 향하던 길은 먼저 용산나루-배다리-노량나루-장승고개-대방천 다리-대방천들-마장천 다리-문성동 앞길-수성참발소-시흥행궁으로 이어졌다.


    당시 교통수단으로는 한양에서 수원까지 하루 만에 이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조는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리고 다음날 만안교-안앙참발소-군포천-서원냇다리-청천평-사근평행궁-지지대고개-괴목정교-만석거-영화정-장안문을 거쳐 수원 화성에 도착했다. 지지대고개는 의왕시와 수원시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므로, 정조효행길의 마지막 관문 중 하나라 하겠다.

     

    정조의 걸음이 늦어지던 지지대고개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컸던 정조에게 지지대고개는 늘 마음을 다그치는 곳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지지대고개는 수원시와 의왕시의 경계에 있다. 정조는 한양에서 출발하여 지지대고개를 넘으면 현륭원이 보이지만 시간이 더디 가서 “왜 이리 더딘가”하고 한탄을 했다고 한다. 또 참배를 마치고 다시 현륭원에서 서울로 돌아갈 때는 지지대고개를 넘으면 더 이상 현륭원이 보이지 않아 계속 뒤를 돌아보고, 눈물을 흘려 행차가 늦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까닭에 정조가 이 고개의 이름을 느릴 지(遲)자를 두 번 쓴 지지현(遲遲峴)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정조의 효심을 담은 비석이 있는 지지대고개

    지지대고개에는 현륭원을 오고 가던 정조의 마음을 담은 글이 적힌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의 이름은 지지대비로, 크기는 높이 156cm, 너비 56cm, 두께 33cm이다. 비석의 앞면의 상단에는 화성유수인 홍명호가 쓴 지지대비명(遲遲臺碑銘)이 적혀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서영보가 짓고, 윤사국이 쓴 비문이 있다.

    비문은 사도세자를 향한 마음에 수원을 떠나지 못하고 더디게 가던 정조의 효심을 예찬하는 글이다. 또 지지(遲遲)가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며 한 말인 “더디고 더디구나, 나의 발길이여(遲遲吾行也)”에 바탕을 두고 있음이 적혀 있다. 지지대비는 지지대고개의 언덕에 자리하고 있어 비석을 보기 위해서는 계단을 올라야 한다. 지지대비로 가는 계단 옆에는 하마비(下馬碑)가 남아 있는데, 이것은 이 앞을 지날 때 말에서 내리라는 표지이다. 누구든 지지대비를 보기 위해서 예를 갖춰야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