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영주풍기인삼축제는 ‘천년건강! 풍기인삼!’이라는 주제로 풍기인삼과 지역 농․특산물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산업형 축제이다. 영주에는 풍기인삼뿐만 아니라 “꿀맛 같은 영주사과, 전국 최고의 육질을 자랑하는 영주한우와 자연섬유로 만든 아이스실크 풍기인견 등 선비의 숨결을 담은 특산품”이 있다. 인삼 향기가 그윽한 축제장에는 다양한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있으며 인삼 캐기 체험과 같은 다채로운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1984년 처음 개최된 경북영주풍기인삼축제는 영주시가 주최하고, 재단법인 영주풍기인삼축제조직위원회가 주관하며, 매년 10월 영주시 풍기읍 남원천 일원에서 열린다.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문화관광축제의 2006년~2010년 유망축제, 2011년~2013년 우수축제이다.
경북영주풍기인삼축제 주요 행사로는 개막식 및 축하공연, 거리 노래방, 경북우량인삼 선발대회, 경찰 오케스트라, 고유제, 관광객 참여 노래 자랑, 관광객 참여 한마당, 금계야 날아라(금계리 마을주민), 모듬북(생활개선회), 문화공연(k-pop댄스그룹, 혼성댄스그룹, 걸스힙합, 버스킹, 여성댄스 그룹), 부석태 콩타령(소천1리 주민일동), 세계엑스포 인삼포럼, 소리나눔공연, 소백산 풍기인삼가요제, 어린이 궁중한복 패션쇼, 어린이 환경 노래자랑, 어린이범죄예방 뮤지컬, 영주시 실버난타, 영주시농악경연대회, 영주시민 노래자랑, 영주시주민자치 한마음대회, 영주아리랑 공연, 온풍기(통기타) 공연, 우량인삼선발대회 시상식, 전국댄스 경연대회, 전국통기타 페스티벌, 주세붕군수 행차, 지역동아리 통기타공연 7080, 천년건강 풍기인삼, 청소년 뮤직페스티벌, 축제 얼라이언스 참여공연(안동탈춤), 평양예술단 공연, 풍기인삼 경매, 풍기인삼 홍보대사 선발대회, 풍기인삼대제(극단 영주), 풍년기원제, 한우사랑 영주사랑 노래자랑, 힐링행복콘서트, 폐막 및 경품추첨 등이 진행된다.
전시․체험행사로는 기념사진 무료인화, 다문화 전시 및 체험, 마임 퍼포먼스, 선비정신 실천 홍보체험, 소백분재 전시회, 어린이 재활용 만들기, 여우가면 만들기, 영주 향토음식 체험 및 시직, 영주쌀 소비촉진행사, 웰빙인삼 요리 전시 및 체험, 인삼 경매, 인삼 유등 전시, 인삼가공제품 홍보전시 판매, 인삼병주 만들기, 인삼홍보조형물, 인절미 떡메치기, 전국 우량인삼 선발대회 수상작 전시, 천연 염색체험, 추억의 학창시절, 풍기인삼 깎기 대회, 풍기인삼 캐기 체험, 환경 캠페인 등이 진행된다. 연계행사로는 경상북도지사기 보디빌딩대회 및 홍삼맨&홍삼걸 선발대회, 마당놀이 덴동어미 화전놀이 공연, 사진으로 보는 인삼이야기, 영주소백힐링 걷기대회, 영주풍기인삼배 경북동호인 게이트볼대회, 영주풍기인삼배 생활체육동호인초청 족구대회, 영주풍기인삼배 전국동호인 및 이순테니스대회, 영주풍기인삼장사 전국동호인 및 씨름대회, 읍면동 한마음 대회, 인삼축제기념 장승 깎기 대회, Mr. YMCA선발대회 등이 진행된다.
『2013년 문화관광축제 종합평가보고서』에 의하면, 경북영주풍기인삼축제는 “대한민국 대표 웰빙건강 축제로 자리매김 하기 위해 ‘천년건강! 풍기인삼’이라는 슬로건에 걸맞게 인삼을 활용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구성”하였다. “축제의 핵심 콘텐츠인 인삼판매장터는 풍기인삼의 인지도 제고 및 지역 인삼재배 농민들의 안정적 판로확보 등을 통한 지역 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판매장터가 과거에는 수삼 등 비가공 제품 위주로 구성되어 소비자의 선택폭이 제한되어 있었으나 금년에는 홍삼 등 가공제품 판매코너를 확충하여 운영되는 등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방향으로 개선된 점이 긍정적”이라고 하였다. 특히 축제 개최장소인 “남원천 중앙에는 풍기인삼을 비롯한 영주사과 등 지역의 상징물들을 유등으로 제작, 전시하여 지역을 홍보함은 물론 축제장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즐거운 볼거리를 제공”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삼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상품으로 이미 전통시대부터 인정받아 주변의 여러나라와 거래가 되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인삼의 질병에 대한 저항력, 항암 효과의 탁월성 등 그 효능이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인삼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인삼 재배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은 자연환경, 지리적 조건, 채취 시기 등이다. 금산은 자연환경이 청정하고 일교차가 커서 이미 약 1,500여 년 전부터 인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다른 지역과 다르게 인삼의 주요 성분인 사포닌 함량이 유독 높은데, 이는 금산인삼이 약리 작용이 가장 높은 시기에 채취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인삼은 서늘하고 통풍이 잘되는 곳에서 자란다. 종자로 번식하는 인삼은 늦가을에 파종하고 다음 해 싹이 나면 1년간 재배하고 이 묘삼을 심어 4~6년 정도 지나면 수확한다.
우리나라 인삼은 예로부터 고려인삼이라고 했는데, 다른 나라의 인삼보다 삼의 주요 성분인 사포닌이 풍부하게 들어있고, 단백질, 핵산, 필수 지방산, 필수 아미노산 등이 다량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세계인으로부터 고려인삼은 건강식품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인삼은 다양한 형태로 가공하기 때문에 그 각각 불리는 이름도 다르다. 말리지 않은 상태의 인삼은 수삼, 수삼을 익히면 홍삼, 수삼을 그대로 말린 것은 백삼이라고 한다. 인삼은 먹는 방식도 다양하다. 그냥 씹어서 먹기도 하고, 달여서 즙으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또 음료, 분말, 차의 형대로 다양하게 인삼을 섭취할 수도 있다. 이외에도 인삼은 음식으로 다양하게 만들어서 먹기도 한다.
금산인삼축제는 1981년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금산인삼제라는 명칭으로 시작되었다. 금산에서는 인삼을 재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산신령에게 감사하고 인삼농사의 풍성을 기원하는 삼장제를 지내고 있었는데 이를 축제로 발전시킨 것이 금산인삼제이다. 금산인삼제는 주민화합형 축제로 시작해서, 1996년 문화관광축제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전국적인 축제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축제의 명칭을 1997년부터 금산인삼축제로 바꾸었다. 1999년부터는 국제인삼교역전을 개최하면서 전국에서 최고의 산업형 문화관광축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2019년 현재 제38회의 축제를 치렀다. 금산인삼축제는 인삼과 관련있는 여러 가지 콘텐츠를 개발하여 날로 확대되고 있다. 금산인삼축제 외에도 전국적으로 영주 풍기인삼축제, 홍천 인삼축제, 파주 개성인삼축제, 강화 고려인삼축제, 안성 세계유기농인삼대회 등의 다양한 인삼 관련 축제가 열리고 있다.
인삼은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草本: 꽃이나 풀 등)식물로, 뿌리가 강장제 또는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져있다. 원래 자연산을 썼으나 수요가 많아서 인공적으로 재배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인삼이 산출되었고, 또 재배할 수 있다. 인삼 밭에서 수확한 인삼을 수삼(水蔘)이라고 한다. 수삼은 가공 방법에 따라 크게 홍삼과 백삼으로 나뉜다. 홍삼은 수삼을 쪄서 말린 것으로 붉은 기운이 있고, 백삼은 수삼을 씻은 후 자연 그대로 말린 것으로 흰색을 띤다. 홍삼과 백삼은 여러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우선 생산 지역이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홍삼은 개성 지역에서 거의 대부분 생산되었고, 백삼은 개성 이외의 지역에서 생산되었다. 재배연수(年數)도 달라 홍삼은 보통 6년을 재배한 수삼으로 만드는 반면, 백삼은 4-5년 정도 재배한 수삼으로 제조하였다. 따라서 홍삼이 크고 굵은 반면 백삼은 그 보다 작았다.
백삼에도 두 종류가 있다. 몸체가 길어서 한두 개의 잔뿌리를 가지면서 전체가 곧게 뻗은 직삼(直蔘)이 있고, 몸체가 비교적 짧고 서너 개의 잔뿌리가 구부러져 몸체에 부착된 것처럼 보이는 곡삼(曲蔘)이 있다. 곡삼은 잔뿌리를 구부려서 건조시키므로 직삼보다 기술과 비용을 요하였다. 곡삼의 대표가 바로 금산 인삼이다. 백삼은 홍삼에 비해 정부의 정책적 개입이 약했다. 홍삼은 중국 수출품으로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였으므로, 조선 정부는 18세기 말부터 대한제국기까지 홍삼 수출에 깊은 관심을 갖고 관여했다. 그러나 백삼은 국내 소비용인데다 경제 규모도 작았기에 별로 개입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인삼 연구 중 하나인 양정필의 연구(양정필, 「한말-일제하 금산인삼 연구」,『한국사학보』51, 2013.)에 따르면 1908년 남한 전역에서 인삼이 재배되고 있는 것으로 통감부가 조사했다. 그러나 재배 규모는 영세하여 경작 인원이 1백명 넘는 곳은 풍기군, 거창군, 용담군, 금산군 등 네 군에 불과했다. 경작 간수도 풍기군이 6,799간, 금산군이 6,500간으로 1천간도 안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이에 비해 개성 인삼은 경작 인원 123명, 면적 140,691간으로 타지 총면적의 다섯배에 달했다. 이처럼 한말 개성 일대와 그 외 지역의 인삼 재배는 규모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통감부기 일제는 대한제국의 정책을 이어받아 대한제국보다 훨씬 강화된 홍삼전매제를 시행하였다. 개성을 비롯해 전국 몇 군데에 인삼특별경작구역을 설정하고, 특별 구역 내에서 인삼을 재배하기 위해서는 총독부 전매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총독부는 이 허가제를 통해 홍삼과 관련 종사자들을 한층 더 강력하게 장악하였다. 인삼특별경작구역으로 지정된 개성과 인근 몇 개 군 외의 지역은 백삼을 제조했는데 백삼은 일제시대에도 총독부가 깊이 통제하지는 않았다. 백삼을 제조할 경우 경작지가 얼마정도 되는지 신고하면, 국가는 이 경작지를 근거로 징세하였다. 특별구역 이외의 지역에서는 신고만으로 삼포를 설치할 수 있었다.
백삼에 대한 인삼세는 1920년 폐지되었다. 이와 함께 전국 각지에서 백삼 재배면적이 꾸준히 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총독부는 백삼에 대해서도 통제정책을 실행하였다. 1934년 인삼 경작에 대해 기존의 신고제를 폐지하고, 부령 제138호(1933년 12월 12일)로 지정구역 외의 인삼 경작도 전매국의 허가를 받도록 변경하였다. 1943년에는 백삼의 유통·배급 부문에 대해서도 개입하였다. 이전까지 백삼유통은 생산지의 생산자들이 조합을 결성하여 관리해 왔다. 가격도 각 생산지의 도지사가 결정하였다. 총독부는 인삼을 한약방이나 병자들이 구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며 조선생약통제회사가 전 조선 인삼의 집하와 배급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인삼재배는 계속 증가했다. 금산 지역의 겨우 1930년대 경작 인원, 면적이 1920년대에 이어서 크게 증가하였고, 그에 따라 백삼 생산량도 격증하여 5만근 수준으로 성장하였다. 그로부터 얻는 수입은 20만원 대 이상이었고, 1941년에는 1백만원을 돌파하였다. 경작 인원은 1920년대 초 4백여 명에서 1930년대 1,800여 명으로, 면적은 같은 시기 5만여 간에서 25만여 간으로 급증하였다.
인삼은 중국과 한국이 원산지인 드룹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학명은 ginseng C. A. Meyer이다. 약재가 되는 뿌리가 팔 다리를 가진 사람의 몸과 같아 인삼이라 부르며, 자연산의 인삼을 산삼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매우 드물고, 대다수의 인삼은 6년 이상 재배하는 것이다. 뿌리줄기는 짧고 마디가 있고 그 아래에 굵은 흰색의 다육질 뿌리가 발달한다. 잎은 손바닥 모양의 겹잎으로 줄기 끝에 3-4장이 돌려난다. 꽃은 4-6월에 피며, 연한 황록색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의서, 약학서인 『신농본초경』에 다양한 품종과 약효가 소개되고 있으며, 후한 말 장중경(張仲景)의 『상한론(傷寒論)』에 인삼의 구체적인 처방이 기록되어 있으니 일찍부터 귀한 약재로 사영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本草綱目)』의 인삼 해설 가운데 상당삼에 관한 내용과 조선에서의 인삼재배 및 거래에 관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 『본초강목』의 집필이 시작된 1552년 당시에는 이미 우리나라에서 인삼재배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라든가 『중경지(中京志)』 등에 인삼재배의 기원이 매우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내용이 있으나 정확히 언제부터 재배되기 시작했는가는 분명치 않다. 기록에 따라 삼국시대부터 재배되거나 산삼을 캐는 것이 일반화된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우리가 아는 인삼재배는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의 모후산(母后山) 일대에서 시작되고 최소한 조선후기에 개성으로 퍼져 인삼재배와 판매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인삼은 우리나라와 중국,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재배되나 그 약효가 가장 우수한 것은 우리나라의 인삼이다.
우리나라의 인삼을 고려인삼이라 부르는데 국제 인삼 시장에서 가장 고품질의 인삼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가격 또한 고가로 판매되고, 때로는 중국이나 현대에 들어 미국에서 재배된 인삼이 고려인삼을 가장하여 팔리기도 한다. 인삼의 식물학적 특성상 재배하기 용이한 땅이 많지 않아, 조금이라도 부적합한 곳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 특성이 있어 우리나라의 환경이 인삼재배에 매우 좋은 곳임을 알 수 있다.
그 인삼의 효능으로 크게 원기회복, 혈액순환, 정신 안정, 당뇨완화, 호흡기강화, 소화기 강화, 피부 재생 및 해독 기능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오래 복용하여도 부작용이 없고 장수를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개성공단’으로 익숙한 개성은 고려시대의 도읍지였으며, ‘송도(松都)’, ‘송경(松京)’, ‘송악(松嶽)’, ‘개경(開京)’등으로도 불렸다. 왕건(王建)이 고려를 개국하면서 고려의 도읍지가 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가 한양 곧 지금의 서울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500여 년간 고려와 조선의 수도 역할을 했던 곳이다. 개성은 정기시장인 오일장보다 상설시장이 발달한 곳이다. 거의 매일 시장이 열렸으며, 정기시장이 개성에 등장한 것은 개항 이후에 오면서다.
왕건은 개성으로 도읍을 옮긴 뒤, 왕궁(王宮)과 국가에서 관리하는 시전(市廛)을 건축하는 등 대대적인 왕도(王都)를 건설하였다. 왕과 대궐의 관리 및 그 가족들의 의식주 생활을 위해서는 매일 생활필수품의 조달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관청에서 사용하는 물자를 조달할 수 있는 시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시전에는 관리감독 관청인 경시서(京市署)를 설치하여 상거래를 관리 하였다. 21대 희종(熙宗)에 와서는 양반(兩班)들에게도 부역(賦役)을 부담시키면서 개성의 시전을 대대적으로 확장하였다.
고려시대 개성은 인접해 있는 항구 도시 벽란도와 함께 국제 상업 도시로 알려져 있다. 개성에서는 외국 사신들이 드나들면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공무역(公貿易)이 이루어졌고, 고려의 상인들과 외국에서 사신과 함께 온 상인들 사이의 사적인 거래도 이루어졌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의하면 “고려시대 개성에서는 외국에서 사신들이 올 때마다 큰 시장이 열렸다. 고려에서 생산한 각종 특산물뿐만 아니라, 왕실 소유의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까지도 내다 진열해 놓고 팔았다”라고 하였다. 외국 상인들은주로 각종 그림, 향물(香物), 그릇, 차 등을 가지고 와 개성에서 교류하였다.
개성은 개성상인들의 조직과 정신 뛰어난 상술 등으로 상업의 요충지가 될 수 있었다.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개성시장에는 무명가게, 종이가게, 어물가게, 과일가게, 담배가게, 쌀가게, 그릇가게 등이 있었다. 서울의 육의전과 마찬가지로 연행사(燕行使: 조선시대 후기에 청나라로 보낸 사신)의 비용, 관청의 물품 납품 등으로 금난전권(禁亂廛權)과 자금 융자 같은 특혜도 존재했다. 개성시장에서 조선시대 전기에는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물건, 후기에는 재배가 시작된 인삼 등이 주요 거래물건이었다. 개성상인들은 개성 근처에서 재배한 인삼과 전매품인 홍삼 등을 거래하였다.
조선시대 개성을 중심으로 국내 상업과 국제무역을 담당하고, 인삼 재배 및 홍삼제조업 등을 한 한국의 대표적 상인집단이 ‘개성상인’이다. 개성상인은 조선 전기에 형성되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국제무역을 통해 크게 발전하였다. 개성상인은 오랜 역사 속에서 자신들 나름의 상업 활동에 적합한 상업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근대이행기에도 쇠퇴하지 않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성장해 나갈 수 있었던 기반이기도 하였다.
개성상인의 형성을 고려시대로 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15세기 중반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조선의 건국과 한양으로 도읍지를 옮기면서 개성은 고려 수도로서의 위상을 잃었다. 당시 개성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한양으로 옮기거나 또는 고향으로 낙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개성에 남은 사람들은 15세기 중반부터 생계수단으로 상업을 선택하였다. 개성의 상업적 기반이 서울처럼 튼튼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장사를 하기 위해 개성을 떠나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서면서 개성상인은 조선을 중심으로 청나라, 일본을 이어지는 삼각무역의 핵심 상인으로 활동하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당시 조선은 인삼, 중국은 백사(白絲), 일본은 은 등의 수출품을 보유하고 있어서 국제무역은 활기를 띨 수 있었다. 개성상인은 삼국 간 무역에서 인삼과 은을 중국에 수출하고 백사를 수입하였다. 반면 일본에는 인삼과 백사를 수출하고 그 대금으로 은을 받았다. 이러한 국제무역 구조에서 개성상인은 핵심 상인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18세기 중반 이후 조선의 인삼과 일본의 은이 고갈되면서 조선과 청나라 일본을 잇는 교역이 침체에 빠졌다. 이에 개성상인은 19세기 이후 인삼 재배에 자본을 투자하였다. 그들은 재배한 인삼으로 홍삼(紅蔘)을 생산하고, 이를 중국에 수출하기 시작하면서 19세기 대중국무역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특히 19세기 인삼은 사람이 경작한 것이고 홍삼은 그것을 쪄서 말린 것이다. 즉 이 시기 인삼은 개성상인이 자본을 투자하여 생산한 상품인 것이다. 홍삼을 생산하면서 개성상인은 중세상인에서 근대상인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중부 지역에서 가장 큰 약재 유통시장인 금산인삼약령시장은 서울특별시의 경동시장, 대구광역시의 약령시장과 함께 전국 3대 약령시장 중 한 곳이다. 인삼과 약초를 파는 상가들이 밀집해 있는 ‘인삼의 거리’는 국내 인삼 유통의 중심지이며,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약령시장이다. 전국 인삼 생산량 중 70%가 금산인삼약령시장에서 모여서 거래되고 있어 좋은 품질의 인삼을 언제든지 안심하고 구입할 수 있다. 인삼약령시장은 1940년대 생긴 금산 수삼시장 부근에 1980년대 노점상이 몰려들어 약초시장을 형성했다. 현재 330개의 점포가 생약, 건재, 건강식품 등을 판매한다. 하루 거래량은 50-60톤이고, 6억 원 상당이다. 연간 4,750톤으로 430여억 원 어치의 약재가 이곳에서 거래되고 있다.
원래 금산 인삼약령시장은 유통 중심 시장이었다. '약초를 전량 외지에서 구매해 유통만 해서는 발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박양우 씨가 약초 생산자 그룹을 확대시키고, 금산군이 약초 세척기, 건조기, 절단기, 저온창고 등을 지원한 덕분에 산지형 시장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금산시 농민들은 인삼 생산자는 많았지만 약초를 생산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농민들은 옻나무, 헛개나무, 대나무 등 일손이 덜 가고 인삼을 재배했던 곳에서 심을 수 있는 나무 종류를 심었다. 점차 농민들은 당귀, 지황, 독활, 길경, 두충, 황기 등 다양한 약초를 심었다. 약초 덕분에 농민들은 소득이 향상되었고, 시장 상인들은 양질의 약초를 유통시킬 수 있게 되었다. 약초 작목반과 동반성장 중인 금산 인삼약령시장에서 거래되는 약초는 100여 종이 넘는다.
금산 인삼약령시장에는 인삼과 홍삼, 양초의 가공품도 살 수 있다. 시장의 금산인삼쇼핑센터에 가면 금산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홍삼 제품 및 가공품, 약재 분말을 구입할 수 있다. 어느 가게에 가든 소비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약재를 갈아서 분말로 만들어준다. 홍삼 농축액도 다양하며, 절편, 사탕, 젤리, 캬라멜, 강정, 연양갱, 건빵 등 홍삼으로 만든 다양한 제품을 맛볼 수 있다. 소화제 종류의 환으로 약초를 가공한 제품도 구매할 수 있다. 담금주 시장은 관광객들로부터 인기이다. 술병에 담긴 갖가지 장식이 볼거리를 제공한다. 수삼으로 편을 만들어 만든 장미꽃과 인삼과 잎을 통째로 넣어 만든 담금주도 보인다.
금산 인삼약령시장 사무실에는 강귀동 전 상인회장이 지은 시 ‘약초거리’가 걸려 있다. “여기들 보소. 여기들 보소. 질경이, 더덕, 잔대, 엉겅퀴, 민들레, 없는 게 없소이다. 축복의 땅 금산 읍내 약초거리에서 가려움 긁어줄 테니 잔말 말고 이 길이나 자주자주 찾아주시오. 아픈 곳 삭혀줄 테니 잔말 말고 이 길이나 자주자주 찾아주시구려.” 아픈 곳을 치료하는 시장, 금산인삼약령시장이다.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에 위치한 금산시장은 40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금산의 전통시장이다. 금산시장은 재래시장의 예스러움을 가지고 있지만 금산시장 창업골목 조성을 위해 2018년 6월 금산시네마 개관과 함께 '청년몰 시네마켓'이라는 새로운 상점 거리를 만들어 만 19세부터 39세 미만의 사업자들이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전통시장은 고리타분하다는 편견을 깨고 젊은층과 노년층의 세대간 조화를 이루고, 남녀노소 누구나 찾아서 즐길 수 있는 시장으로 변화하였다. 2019년 2월에는 시네마켓의 인기에 힘입어 중소벤처기업부의 청년몰 활성화 및 확장 지원사업 공모에 최종 선정되면서 확장사업비 10억 원과 활성화사업비 3억원 등 총 13억원의 사업비를 지원받아 마케팅, 홍보와 고객 커뮤니티 공간 등의 확장 사업을 추진하며 청년상인의 자생력 강화와 전통 시장 활성화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2019년 10월 청년몰의 인기와 함께 조성 1주년에 맞춰 청년몰 생일파티를 열고 금산 시장의 새로운 이름인 '금빛시장'으로 새 출발하였다. 젊은 층과 어우러지는 활력 넘치는 전통시장이 되기 위해 브랜드 네임을 변경함으로써 기존의 전통시장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고 새로운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 그 밖에도 금빛시장에는 ‘대장간골목 뚝딱’이라는 특이한 골목이 있는데, 도시에서 보기 어려운 많은 농기구들을 판매 및 수리를 하고 있다. 옛 농기구들을 직접 볼 수 있어 교육적인 효과도 누릴 수 있다.
금빛시장의 청년몰 시네마켓에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상점들이 입점해 있는데, 하옥 335와 파카롱은 음료와 디저트를 파는 곳이고, 만두와 튀김이 맛있는 시계탑 분식과 국수와 만둣국 등을 파는 만두 마당 등이 있다. 특히 지역 특산물인 인삼을 활용한 홍삼빵, 인삼빵, 홍삼 호두과자를 파는 사므로는 금산의 대표적인 먹거리이다. 그 밖에도 인삼잼이나 인삼식혜, 인삼약과 등 인삼으로 만든 다양한 간식도 금빛시장의 빼놓을 수 없는 재미이다.
먹거리 외에도 잡화나 책방, 요리, 예술 체험 공방 등의 다양한 점포들이 운영되고 있으니 꼭 한번 방문해 보면 좋을 것이다. 금산군은 금빛시장에 예술과 문화를 접목시키는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는데, 2022년 6월 금산문화원 주관으로 14개 문화예술단체의 143명이 참여한 문화예술공연을 진행하였다. 주요 공연 분야는 가요, 악기연주, 전통음악, 시낭송, 댄스 등으로 시장을 찾은 많은 관광객과 주민들에게 좋은 반응을 이끌었고, 시장 분위기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지속적으로 이런 공연을 진행할 계획이다.
그리고, 금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금산인삼축제에는 금빛시장도 참여하여 시장을 홍보하고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인삼을 사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드는 인파와 함께 인삼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구경하고, 다양한 체험도 즐길 수 있는 연례 행사이기 때문에 축제 기간에 맞춰서 방문하면 잊을 수 없는 추억도 만들고, 두 손 가득 품질 좋고, 건강 식품으로 최고인 금산인삼 및 인삼 관련 식품들을 사갈 수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서는 1122년(인종 1)에 산삼을 인공재배하기 시작했다. 1124년에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개경에서 생삼을 쪄서 만든 숙삼을 보았다."라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고려인삼이라 불릴만한 인삼이 있었다고 하겠다. 고려 인삼에 대한 수요가 커지면서 산삼을 인공재배하는 기술이 발달하여 개경과 그 인근 지역에서 가삼을 재배했다고 한다. 가삼은 산삼을 채취해 인공적으로 적지에서 씨를 뿌려 재배한 것이다. 가삼 재배가 본격화된 것은 18세기 중엽부터이다. 가삼의 상품성이 좋아지면서 인삼재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8세기 후반에 개성상인은 홍삼을 제조해 수출하기도 했다. 19세기에는 영호남을 비롯해 경기, 호서지역까지 가삼이 재배되었고, 경상도, 강원도 등지가 주요 가삼 재배지로 알려졌다. 강화도도 이 시기에 인삼을 재배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강화도의 인삼재배의 효시는 개성사람 백남희 씨가 1903년부터 불은면 삼성리에서 인삼 재배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다. 1920년 경에 강화도가 개성삼업조합 특별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재배가 확대되었다. 『동아일보』 기록에 따르면 1919년(대정 8) 이후 경작지가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1936년에는 5만평에서 경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1940년대 강화도에서는 ‘강화형산업’에 인삼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생산량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1~2가구만이 소규모로 경작할 뿐이었다. 1950년대 중후반 이후 대량경작이 시작되었다. 개성 인삼재배 농가가 강화도와 교동 등지로 이주해 오면서 대량경작을 시작했다.
강화인삼의 재배면적은 1970~1980년대에 약 900㏊에 달했다. 인삼은 연작을 할 수 없으므로 강화도 내에서 경작이 불가능해지자 강화도 인근의 파주, 연천, 포천 등지로 경작지를 확산하였다. 2000년대부터는 강화도 내에서는 밭과 더불어 논에서 인삼재배를 하고 있다.
강화인삼은 강화인삼센터, 강화고려인삼센터, 초지인삼센터에서 판매를 하고 있다. 인삼센터 3곳의 센터에서는 말리지 않은 수삼(水蔘)과 수삼을 증기 또는 기타 방법으로 쪄서 건조한 홍삼(紅蔘)을 비롯한 인삼진액, 인삼차, 정과, 캡슐류, 인삼젤리, 과자류, 건강보조식품 등 다양한 형태의 인삼상품도 선보이고 있다.
인삼의 약효가 크기에 비례하지 않기 때문에 연수에 맞는 크기의 삼을 골라야 한다. 인삼은 사람의 형상을 닮은 것이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긴다. 몸통에 굵은 뿌리가 2~3개가 달려 있고, 그 형상이 사람처럼 머리·몸통·팔·다리를 이루어 균형 잡힌 것이 좋은 인삼이다. 몸통에는 붉거나 검은 반점, 흠집 등이 없고, 잔뿌리가 부서지지 않고, 많이 붙어 있는 것이 좋다. 강화인삼은 9~11월에 수확한 것이 효능이 좋다. 수삼을 비롯해 수삼을 말린 백삼, 수삼을 쪄서 말린 홍삼, 수삼을 3회 이상 쪄서 말린 흑삼 등을 비롯해 인삼젤리, 홍삼절편, 인삼차 등의 가공식품으로도 생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