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지에서 열리는 '평창효석문화제'

    평창군 출신 작가 이효식 

    평창 효석문화제 포스터 이미지
    평창 효석문화제 포스터(사진출처:(사)이효석문학선양회)

    평창효석문화제는 소설가 이효석의 대표작인 「메밀꽃 필 무렵」의 실제 배경지인 봉평에서 열리는, 자연과 문학이 함께하는 축제이다.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통해 이효석의 문학적 가치를 공감하고 즐길 수 있다. 평창효석문화제는 이효석 문학선양회를 중심으로 지역주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봉사로 이루어지는 지역의 자랑거리이다. 1999년 처음 개최된 평창효석문화제는 사단법인 이효석문학선양회에서 주최하고 주관하는 축제로, 매년 9월에 평창군 봉평면 문화마을 일원에서 개최된다.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문화관광축제 중 2006년 예비축제, 2008년~2013년 유망축제, 2014년~2017년·2019년 우수축제, 2018년 최우수축제로 선정되었다. 이효석은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서 출생하여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숭실전문학교와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로 재임하고, 1928년 「도시와 유령」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이효석은 한국을 대표하는 단편 소설작가로, 1936년에 발표한 「메밀꽃 필 무렵」은 한국 단편문학의 수작으로 꼽힌다.

     

    문학과 자연과 전통이 어우러진 축제

    평창효석문화제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테마로 한 ‘문학마당, 전통마당, 자연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통마당’은 농·특산물판매로 시골장터 분위기를 조성하고 민속놀이와 함께하는 마당이다. ‘전통마당’ 프로그램으로는 ‘대취타 공연, 뗏목체험, 메일꽃 마당극, 버스킹 공연, 봉숭아 물들이기, 소설 속 인물체험, 오케스트라 공연, 전통민속공연극, 전통민속놀이, 전통찹쌀떡 치기, 지역 먹거리촌(음식체험장), 지역농특산물판매, 학교종이 땡땡땡’ 등이 있다.


    ‘문학마당’은 이효석문학관을 중심으로 문학프로그램을 진행하고 푸른집 체험행사를 하는 마당이다. ‘문학마당’ 제1 프로그램으로는 ‘이효석의 삶과 문학을 재조명하는 축제 주제관, 메밀꽃 필 무렵 영화 상영, 효석문학관 관람 및 이효석 영상물 상영, 독서토론회·거리백일장·추억의 보물찾기, 이효석 작품 삽화전시, 나만의 책 만들기, 전국 효석 백일장, 사생대회, 학생퀴즈대회, 이효석의 고향주의 문학특강’ 등이 있다. 제2 프로그램으로는 ‘문학흐름길 걷기, 사랑의 타임캡슐, 이효석과 봉평 사진 전시, 바람개비 동산, 이효석 문학작품 읽기, 이효석 서점 운영 및 북 카페 운영’ 등이 있다.


    ‘자연마당’은 소설 속 메밀꽃밭에서의 감동을 연출하는 마당이다. ‘자연마당’ 프로그램으로는 ‘포토존에서 소설 메밀꽃 필 무렵 낭송을 들으며 걷기, 메밀꽃 엽서 쓰기, 메밀꽃 스탬프 참여·포토존 사진촬영, 음악사연신청(뮤직학교), 메밀꽃 낭만 콘서트, 소설 속 인물상황(한복입고 축제즐기기), 나귀타고 사진찍기, 메밀꽃 열자, 이효석 소설작품 그림 전시, 뗏목타기체험, 출발!문학산책’ 등이 있다.

     

    소금밭 같은 메밀꽃밭과 이효석 문학의 숲 

    『2016년 문화관광축제 종합평가 보고서』에 의하면, 평창효석문화제는 “서정성 높은 문학작품을 통해 소금을 뿌려놓은 듯 흐드러지게 핀 하얀 메밀꽃은 관람객의 감탄을 자아내며 국내 최고의 감성축제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점과 “넓은 숲을 이용해 메밀꽃 필 무렵의 주요 장면들을 재현한 ‘이효석 문학의 숲’은 관람객들의 명상 트래킹 장소로 최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주변의 약 50개 펜션이 축제기간 중 50% 할인행사에 적극 동참하는 등 지역 상권의 참여도 높았으며,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주민들 간의 단결력을 강화하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평가를 한다.

  • 꽁꽁 언 오대천에서 낚시와 송어회를 즐겨봐요 '평창송어축제'

    평창 오대천에서 즐기는 겨울 축제 

    평창송어축제는 선조들의 삶을 축제로 승화시킨 것으로, “눈과 얼음 그리고 송어가 함께하는 겨울 이야기”라는 주제로 매년 12월 말부터 2월까지 펼쳐진다. 오대천의 얼음 위에서 송어낚시의 짜릿한 손맛을 느끼며 다양한 겨울체험을 할 수 있어 진정한 겨울축제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2007년부터 시작된 축제로, 평창 송어축제위원회가 주최하며 인도교부터 가동보 사이에서 열린다.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문화관광축제 중에서 2018년 육성축제, 2019년 유망축제로 선정되었다.

     

    식감이 일품, 평창송어

    송어는 연어과에 속하는 소하형 어종으로, 평균 수온 7℃~13℃의 깨끗하게 흐르는 물에서만 산다. 우리나라에서는 동해와 동해로 흐르는 일부 하천에 분포하고 있으며 북한, 일본, 연해주 등에 분포한다. 평창군은 국내 최대의 송어 양식지이다. 평창의 맑은 물에서 자란 송어는 부드럽고 쫄깃쫄깃해 씹히는 맛이 일품이며, 주홍빛의 붉은 살은 씹을수록 고소하고 담백한 감칠맛이 난다.


    평창송어축제 포스터 이미지
    평창송어축제 포스터(사진출처:평창 송어축제위원회)


    얼음을 깨거나 맨손으로 송어를 잡아보자!

    평창송어축제의 주요 프로그램으로는 ‘텐트낚시, 얼음낚시, 놀이시설, 맨손잡기, 먹거리촌, 어린이낚시’ 등이 있다 ‘텐트낚시’는 연인과 가족이 오붓하게 텐트 속에서 즐기는 얼음낚시로, 250동에 500석의 좌석이 마련되어 있다. 좌석이 한정되어 있는 관계로 예약제로 시행하며, 잔여좌석이 있을 경우에는 현장발권이 가능하다. 체험료는 재입장과 놀이 종합 이용이 가능한 종합권이 1인당 39,000원이고, 재입장만 가능한 단일권은 29,000원이다.‘얼음낚시’는 얼음을 깨고 송어를 낚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낚시이다. ‘얼음낚시’는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다. 체험료는 1인당 15,000원이다.


    ‘놀이시설’은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과 송어 낚시가 무료해질 때를 위해 준비한 것이다. ‘놀이시설’로는 ‘눈썰매, 전통썰매, 디스코팡팡, 스노우래프팅, 얼음자전거, 바이킹, 범퍼카, 얼음카트, ATV, 스케이트’ 등이 있다. 체험료는 모든 종목의 재입장이 가능하고 종목에 따라 횟수 제한이 없는 종합권은 25,000원이며, 놀이시설 별로 1회씩만 입장 가능하고 종목에 따라 횟수 제한이 있는 단일권은 7,000원이다. 평창송어축제의 하이라이트라면 뭐니뭐니해도 ‘맨손잡기’다. 준비 땅 소리와 함께 송어 맨손 사냥이 시작되는데, 얼핏 보면 쉬워 보이지만, 손으로 잽싸게 송어를 낚아채는 것은 쉽지 않다. 순발력이 요구된다. ‘맨손잡기’는 1일 2회 운영하며, 회당 50명까지 선착순으로 입장할 수 있다. 체험료는 15,000원이다. ‘먹거리촌’에서는 잡은 송어를 즉석에서 회와 구이로 요리해준다. 송어를 잡지 못했다면 산송어를 구입해서 먹을 수도 있다. 800g~1kg 크기의 송어가 가장 맛있다고 한다. ‘어린이 실내 낚시터’는 어린이만을 위한 송어 실내 낚시터로, 무조건 1마리는 잡을 수 있는 낚시터이다. 대상은 7세부터 초등학생까지이고, 수용인원은 30명이며 체험료는 15,000원이다.

     

    스키장, 목장, 전나무 숲 등 인근 관광 가능

    평창에는 송어 낚시 뿐만 아니라 관광명소가 많다. 오대산 전나무 숲길, 웰컴투동막골 세트장, 알펜시아 리조트, 삼양목장, 대관령 양떼목장, 월정사, 계방산, 오대산, 이승복 기념관, 용평리조트, 이효석 문학관, 보광 휘닉스 파크, 오대산 상원사, 한국 앵무새 학교, 평창바위공원, 방아다리 약수, 무이 예술관, 허브나라 농원, 한국전통음식 문화체험관 등이 있어 원하는 레저시설과 관광명소를 골라서 갈 수 있다. 

  • 올림픽 개최로 이름을 바꾼 평창올림픽시장

    평창 하면 ‘올림픽’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평창올림픽시장은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평창군 읍소재지에 있는 시장이다. 상설시장과 매월 5일과 10일에 장이 서는 5일장이 함께 열린다. 시장 규모는 작은 편인데, 시장 내부에는 40년 전통을 자랑하는 ‘메밀 부치기’를 비롯한 많은 먹을거리가 있다.


    올림픽 시장이 된 평창시장

    강원도 평창군에서 언제부터 평창장이 개설되었는지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동국문헌비고』에 읍내 장(5, 10일)이 보인다. 『임원경제지』에는 “미곡, 면포, 마포, 명주, 해초류, 어염, 소 등이 풍부했다.”라고 전하기도 한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평창 읍내장은 평창시장으로 이어졌다. 1955년 시장 건물을 갖추고 정기시장 등록을 하였다. 이후 평창시장은 상설시장과 5일장이 함께 열린다. 2010년 이후에는 시장 시설을 현대적으로 바꾸었다. 특히 2012년에 와서는 평창이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 도시로 선정되면서 ‘평창올림픽시장’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안창 곱창 평창장

    평창장은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불리던 「장타령」에 등장한다. 장돌뱅이들이 “안창 곱창 평창장 국술 좋아 못 보고”라고 부르며 이 장 저 장을 찾아다녔다. 2013년부터는 평창과 영월, 충청북도 제천시의 정기시장을 순회하는 ‘장돌뱅이길’을 개발하였다. 장돌뱅이들이 등짐과 봇짐을 메고 오갔던 길을 걸으며 당시의 모습을 체험하는 것이다. 평창에서는 ‘솔밭 따라 문학 속으로’라는 표제어로 평창올림픽시장 인근의 종부교에서 바위 공원까지 3km 정도를 장돌뱅이 코스로 선정해서 관광객들이 걸을 수 있게 하였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과 ‘동이’가 걷던 길을 걸어볼 수 있다.


    메밀 부치기 원조 시장

    평창올림픽시장을 중심으로 서는 평창장에는 쌀, 채소전, 어물, 의류, 잡화 등을 주로 판매하며, 무엇보다도 대표적인 것이 ‘메밀 부치기’를 비롯한 메밀 음식들이다. 특히 메밀 부치기는 강원도를 상징하는 시장 음식이기도 하지만. 1970년대부터 평창시장에서 팔기 시작한 것으로 평창올림픽시장이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시장 내에서 수수부꾸미나 옥수수로 만드는 올챙이 국수, 감자전 등을 만드는 과정을 구경하며 먹을 수 있다.

  •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221호)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에 봉안되어 있는 문수동자상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예배의 대상으로 만들어진 동자상이며, 조선전기의 불상들 가운데 조각이 가장 우수하고 아름다운 목조 불상이다.


    불교에서 최고의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은 때로는 어린 동자의 모습으로, 때로는 나이든 스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거처는 강원도 오대산이며 신라시대부터 문수 신앙이 크게 발달하였다. 문수보살의 지혜는 어린아이와 같이 집착이 없고 소박하다 하여, 어린아이 모습을 한 독립된 동자상(童子像)으로도 널리 제작되었다. 불상 내부에서 발견된 복장 유물에 의해 1466년(세조12) 세조의 둘째 딸인 의숙공주 부부가 세조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세조실록』의 기록에는 이곳에서 세조가 문수 동자를 만나 병을 치료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세조는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오대산 상원사로 가던 길에 계곡에서 목욕을 하던 중 문수보살을 만나 피부병이 나았다. 세조는 이에 크게 감격하여 화공을 불러 동자의 형상을 그리도록 하고 이 사실이 널리 퍼지도록 했다고 한다. 현재 상원사 입구에는 세조가 목욕할 때 벗어 두었던 옷과 허리띠와 갓을 걸어두던 관대(冠帶)걸이가 남아 있고, 상원사 문수전에는 문수동자상이 단독으로 모셔져 있으며, 세조의 등을 밀고 있는 문수동자의 모습도 벽화로 남아 있다.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사진출처:문화재청)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사진출처:문화재청)

    상원사 문수동자좌상은 나무를 깎아 높이 93cm, 폭 75cm로 만든 목조불상이다. 머리는 양쪽으로 묶어 올린 동자 머리에 가지런한 앞머리가 있으며, 양 볼이 도톰하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어 머리와 얼굴은 천진한 어린아이의 이미지다. 그러나 몸의 자세나 옷 등은 보살상의 형식을 따랐다. 오른손은 어깨높이에서 엄지와 중지를 맞댄 형태로 들고 있고, 왼손은 허리 높이로 들어 엄지와 약지가 맞닿은 모양으로 손가락 표현이 섬세하다. 다리는 왼쪽 다리를 접고 오른쪽 다리를 밖으로 두어 반가부좌를 튼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가슴에는 정교한 구슬장식 목걸이를 길게 늘어뜨렸고, 옷 주름은 몸에 붙어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어 궁정취향의 화려한 세련미를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은 조각수법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조성연대와 발원자가 분명하고 문수보살 단독으로 봉안된 희귀한 예로,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로 전개되는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현재 국보 제221호로 지정되어 있다.

  • 눈꽃마을에서 살아남기, 평창 황병산 사냥놀이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은 겨울철에 눈이 1m나 쌓이는 산간 마을이다. 폭설로 배고픈 산짐승들이 먹이를 찾아 마을로 내려오는 일이 많았는데, 특히 멧돼지가 자주 출몰하곤 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황병산 일대에서 눈 속에 발이 빠진 멧돼지를 쉽게 사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냥을 마친 후에는 짐승을 많이 잡게 해주신 산신령님과 서낭신께 감사의 제의를 올린다. 이처럼 추운 겨울날 사냥의 시작에서부터 제의까지, 전 과정을 놀이화 한 것이 바로 평창 황병산 사냥놀이다. 2007년 강원도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다.

    황병산 사냥 놀이
    황병산 사냥 놀이


    역사와 유래

    평창 황병산 사냥놀이는 정월 초 마을의 서낭신에게 바칠 멧돼지 사냥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조선시대 사냥한 짐승들을 공물로 바치던 일에서 시작됐다고 보기도 한다.


    어디 한 번 놀아볼까

    평창 황병산 사냥놀이는 4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과장(사냥 도구를 갖추어 황병산으로 떠남)

    창과 칼 등 사냥 도구를 준비한다. 사냥에 나가기 전에 서낭당에 모여서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는 고사를 올린다. 이후 대열을 갖추고 농악대를 앞세워 산에 오른다.

    제2과장(짐승을 잡기 위한 사냥몰이)

    짐승의 발자국을 따라 사냥 몰이에 나선다. 전통적인 몰이 방법인 치떨이(계곡에서 산 정상으로 짐승을 모는 것)와 산떨이(산 정상에서 계곡 쪽으로 짐승을 모는 것)를 한다. 치떨이를 할 때는 설피를 착용하여 눈에 빠지지 않게 하고, 산떨이를 할 때는 썰매를 타고 민첩하게 움직인다.

    제3과장(짐승을 몰아서 창으로 공격)

    짐승의 크기, 달려오는 방향, 지형에 따라 다양한 창 기술로 공격한다. 짐승을 잡으면 긴 장대에 매달아 마을로 돌아온다.

    제4과장(마을 제사와 잔치)

    사냥감을 기여도에 따라 나누는데, 이때 마을 제물로 쓸 고기는 따로 두었다가 서낭신에게 올린다. 남녀노소 모두 횃불을 들고나와서 마을의 안녕과 행운을 기원한다.


    의미와 가치

    평창 황병산 사냥놀이는 사냥에서 짐승을 많이 잡게 해달라고 서낭신께 기원하는 의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사냥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흉내 내봄으로써 예기치 못한 사고를 막는 역할도 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는 대동 놀이로 진행되므로 공동체 의식을 높일 수 있고, 산간지역 고유의 사냥 방법과 도구제작 방식을 계승한다는 점에서 민속학적으로 중요한 놀이다.

  • 기록 대신 지명으로 남은 평창 봉화대 봉수

    평창강의 아름다움을 조망하는 봉화대봉수지 

    평창의 봉화대봉수는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방림리 산815-5에 있는 남병산(1,149.7m) 봉화재(700m)에 있는 봉수터이다. 방림리는 평창읍에서 횡성의 안흥 방면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마을이다. 봉수대가 있는 마을은 상방림으로 방림면사무소에서 42번 국도를 타고 대화방면으로 가면 남병산을 만날 수 있다. 남병산은 상당히 높아서 평창의 대표적인 산 중의 하나이다. 그 가운데 해발 700m 정도 되는 봉긋하게 솟아 있는 산봉우리가 봉화재이다. 이 봉화재에 오르면 굽이굽이 펼쳐 흐르는 평창강 줄기와 방림과 대화방면의 마을과 전답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치 손에 잡힐 듯하다. 아울러 봉화재는 사방의 산줄기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어 봉수대가 들어설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대응봉수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기록은 없지만 지명으로 남은 봉수대

    봉수대가 있는 곳은 웃방림이라는 곳인데, 여기서 동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이름이 ‘봉화 앞’이다. 그리고 동쪽에 있는 산 이름이 ‘봉화재’이다. 봉수가 있었던 곳임을 지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평창 방림의 봉화대봉수지는 역사서 어디에도 전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이 봉수지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대응봉수는 어디에 있는 어떤 봉수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이 봉수대가 조사된 것은 『평창군의 역사와 문화유적』(1999)을 집필하면서이다. 이후 『평창군의 문화유적 분포지도』(2004), 『강원의 성곽과 봉수』(2019)에 기록이 되었다. 처음 봉화대 봉수지를 조사한 것은 1999년 1월 22일 지역의 이장이 안내를 해서이다.

     

    석축기단과 돌무지가 남은 봉화대

    봉수의 흔적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석회암 돌을 쌓아 만든 평면형태의 석축 기단이 둥글게 남아 있다. 그 안에는 2~3곳 원형의 돌무지도 남아 있어 연조(煙槽)로 추정된다. 조사할 당시 석축 기단의 일부에 통신 시설이 설치되어 일부가 훼손되었다. 다른 석축도 도로를 내면서 흙을 자른 면과 닿아있다. 그러에도 불구하고, 이곳저곳에 흩어진 돌무더기가 있어 옛날 봉수대였음은 확실하다. 

  • 임진왜란에 대비하여 쌓은 평창노산성

    평창노산성(平昌魯山城)은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평창중앙로 158-8, 및 중리 산10번지 일대인 해발 419m의 노성산 정상을 둘러싸고 축성한 테뫼식산성이다. 노성산은 백덕산의 동쪽 끝 산줄기가 평창강을 만나는 곳에 솟아있으며 평창읍의 진산으로 평창강이 오대산에서 흘러 평창읍을 감싸고 도는 북쪽 강변에 있는 산이다. 산성에 오르면 북쪽으로는 횡성과 장평쪽에서 오는 길과 여만리·후평리 일대를 조망할 수 있고, 남쪽으로는 가까이 평참읍내와 정선으로 가는 42번국도, 그리고 영월로 가는 31번 국도를 한눈에 살필 수 있다. 노산성은 강원도 내륙지역의 영서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고 영동지역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평창 노산성 가는 길
    평창 노산성 가는 길

    임진왜란에 대비하여 다시 축성한 노산성

    평창노산성이 언제 처음 축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으나 성안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볼 때 통일신라시기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산성에 대한 문헌기록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있는데 기록하기를 “돌로쌓았고 둘레는 1364척이며 높이는 4척으로 안에 울물이 1곳 있는데 지금은 반이 무너졌다”고 하였다. 한편 노산성은 조선 선조 초에 군수 김광복(金光福)이 쌓았다고도 하나 통일신라 시기의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서 고대 남북국시기에 축성되었다가 허물어진 것을 임진왜란에 대비하여 김광복이 다시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평창 노산성
    평창 노산성(사진출처:문화재청)
     


    평창강변에 천혜의 요새를 쌓다 

    노산성의 성벽은 노성산 정상에서 동북쪽 능선을 따라 북쪽의 절벽부분을 제외하고 삼면으로 축성되었는데, 능선의 바로 아래 산기슭을 수직으로 잘라내고 그 바깥쪽으로 성벽을 구축하는 내탁편축식으로 쌓았다. 성벽의 북쪽은 평창강의 회돌이에 깎여나가 깍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천혜의 요새를 이루었으므로 나머지 부분만 성벽을 쌓았는데 대부분 무너졌고,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2m내외이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517m정도 되고 성벽 안쪽으로는 넓이 6m정도의 길을 만들었다. 성안의 시설로는 노성산 정상부분인 서쪽 성벽에 치와 망루가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이고 정상 부근에 깊이 약 2m의 우물터가 남아 있다. 노산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주로 고려시대 후기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토기와 자기 및 기와조각들이다. 그 중 기와조각 가운데는 통일신라시기 양식의 기와도 있어 노산성의 축성시기를 가늠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평창전투

    임진노성전적비 정면
    임진노성전적비 정면

    임진왜란이 일어난 때인 1592년 4월 평창군수로 부임한 권두문(權斗文)은 노산성을 고쳐 다시 쌓고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이때 왜적을 맞아 싸운 이야기를 기록한 권두문의 『호구일록(虎口日錄)』에 의하며 그 해 8월 왜군이 백봉령을 넘어 정선을 지나 평창군에 도착하였다. 권두문은 백성들과 병사들을 응암굴로 피신시켰는데 응암굴은 아래, 위로 나누어져 윗굴은 백성들이 피신하고 아랫굴은 군사들이 피신하여 왜적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왜적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응암굴은 왜적에게 무너지고 권두문은 부상을 당하여 끌려갔다가 원주에서 탈옥하여 돌아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