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문화제는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의 효심과 부국강병의 원대한 꿈으로 축성된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에서 개최되는 수원을 대표하는 전통문화 관광축제이다. 수원 화성은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천장(遷葬 :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김)하고 화성행궁과 함께 축조한 성곽이다. 수원화성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이다. 수원화성문화제는 “1964년 서울에서 수원으로 이전한 경기도청 청사 신축 기공식날인 10월 15일을 경축하기 위해 이 날을 ‘시민의 날’로 제정하고 화홍문화제(華虹文化祭)”을 개최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1997년 12월에 “수원의 화성행궁(華城行宮)이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위원회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을 계기로 하여 2000년부터는 화성문화제(華城文化祭)로 축제의 명칭을 변경하였다. 수원화성문화제는 수원시가 주최하고, 수원문화재단이 주관하며 매년 10월에 화성행궁, 수원천, 연무대 등 수원화성 일원에서 개최된다.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문화관광축제의 2010년~2012년․2014년․2017년․2018년 유망축제, 2013년․2019년 우수축제이다.
수원화성문화제는 장소에 따라 열리는 행사가 다르다. 화성행궁․행궁광장에서 열리는 행사로는 ‘개막난장 “품(品)”, 미디어아트 진찬연 “한중록1795”, 정조대왕 능행차 “수원행행(行幸)”, 무예브랜드공연 “야조(夜操)”, 국제자매도시의 밤, 제주문화원 실버 합창단 공연, “정조실감” 토크콘서트, 행궁오솔빛길, 뭔가 좀 색다른 과거시험 보는 날, 행궁 도화서 “그리하라”, 장용영 수위의식, 아름다운 우리 소리, 규장각 책 놀이터, 수원공방체험, 유여택 정오음악회, 고유별다례, 조선별미극장, 수원이와 놀자, 성안 사람들 “기인열전”, 수원화성 상상공작소, 조선핫플레이스, 행궁오락관’ 등이다.
이중에서 정조대왕이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행차하던 효(孝)행렬인 정조대왕 능행차 “수원행행”은 4,000명 정도의 인원이 조선시대의 의상과 소품들을 착용하고 참가하여 장관을 이룬다. 행차는 “수원의 초입이라고 할 수 있는 지지대고개에서 출발하여 노송 지역과 장안문(長安門)을 거쳐 팔달문(八達門)”에서 끝난다. 화서문 일원에서 열리는 행사로는 ‘낙성연’이 있고, 시민체험프로그램인 전통 매듭으로 즐기는 즐거움, 정말 쉬운 수원 화성 지도 그리기, 사방팔당 놀이탐방, 석채화 수원화성 그리기, 오늘 내가 주인공이 day, 정조 예술로 품다, 버스킹&프리마켓 등이 열린다. 또한 공연 프로그램도 진행되는데, 달빛가요제, 야~놀자 아~수원화성에서, 오래된 미래, 시민예술 한마당, 함께 부르는 수원아리랑, 재담소리-장대장타령, 조선의 거리악사, 판소리 음악극 정조가, 수원화성축성체험 등이 진행된다.
화홍문 일원에서는 수원화성달빛살롱, 굿-Good파티, 환상로드 퍼레이드, 예술 장돌뱅이, 화성과 바람과 빛과 시, 수원등불축제 “정조 미래의 빛” 등이 진행된다. 그 외에 참여 프로그램으로 ‘스탬프투어 “수원화성그리미”, 수원화성 야간투어 프로그램 “수원화성 달레길”, 효의 성곽순례, 수원이의 이동 스튜디오’ 등이 있다.
『2017년 문화관광축제 종합평가 보고서』에 의하면, “정조대왕 능행차를 비롯하여 혜경궁 홍씨 진찬연, 무과 재현, 무예브랜드 공연 ‘야조’ 등 수원화성을 주제로 하는 대표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어 역사문화축제로서의 차별성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역사․문화적인 가치를 지닌 “수원화성 일원을 축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어 역사문화축제로서의 장소성과 현장성을 담보하고 있으며, 구도심 일원까지의 축제 공간 확장을 통해 지역과의 연계성을 확대하고” 있다. 그리고 “시민주도형 축제로의 전환을 목표로 시민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시민참여 프로그램 발굴, 시민 참여 분위기 조성, 기부금 모금 활동 등 축제의 기획부터 운영까지 시민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여 축제의 사회적 지속가능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밤이면 섬을 둘러싼 은빛 행렬이 장엄했다. 그 멋진 풍경에 이끌려 까까머리를 기르기도 전, 열다섯 살에 아버지를 따라 처음으로 배를 탔다(정찬구, 남 57세). 문밖 갯벌에는 씨를 뿌리지 않아도 먹을 것이 그득했던 시절이 있었다. 물때를 기다리던 아주머니들은 갯일을 하러 아침 일찍부터 분주했고 저녁에 다시 물이 빠지면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또 갯가로 나갔다. 몇 푼 벌지 못해도 그때는 바다 일 하는 것이 좋았다.
강화도는 조수간만의 차가 크다. 그중 선수포구는 뻘이 기름져서 이곳에서 잡히는 밴댕이가 특히 맛이 있다. 그래서 밴댕이포구라고 부른다. 선수포구 안에는 약 십여 개의 식당이 들어서 있다. 여기서 한 시간가량 떨어진 강화도의 최북단 주문도에서 많이 나온다. 물때를 잘 맞춰야 하는데 조금 때보다는 사리에 많은 배가 드나든다.
강화도에는 5월부터 7월 사이에 밴댕이 식도락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밴댕이는 이 시기에 산란을 준비하기 때문에 살이 오르고 기름기가 가장 많다. 겨우내 바다 깊은 곳에 있다가 따뜻한 바닷물을 따라 먹이활동을 한다. 바로 이때, 살이 오른 통통한 밴댕이를 잡을 수 있다. 그러다가 산란기를 마치면 살도 기름기도 빠져서 맛이 조금 덜하다. '오뉴월 밴댕이'라는 말이 있다. 밴댕이의 맛이 가장 좋은 제철에 대접을 받는 것, 바로 후한 대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조선 22대 왕 정조는 규장각의 신하에게 줄 하사품(下賜品)으로 밴댕이를 선택한다. 밴댕이는 간 기능을 향상해주고 눈을 맑게 해준다. 다정다감했던 임금은 맛 좋고 영양 많은 5월의 밴댕이를 신하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5월 17일 밴댕이 한 두름을 하사받았다. 5월 20일 밴댕이 네 두름을 하사받았다(중략).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그랬다. 전쟁에 나가 있는 동안 어머니를 위로하고 아들에 대한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 오뉴월 밴댕이젓을 보냈다.
밴댕이는 청어과이다. 등은 푸르고 배는 은백색이어서 얼핏 전어와 비슷하다. 잘 모르고 먹는 사람은 전어와 혼동하기 쉽다. 그러나 전어보다 크기가 작다. 밴댕이는 살이 부드러워서 잘 무른다. 다른 생선에 비해 내장이 작아 속 작다는 말을 듣지만, 그 덕분에 비린 맛이 덜하여 국물 맛을 낼 때는 이만한 생선이 없다.
3년 동안 간수를 내린 소금에 포실하게 구워진 밴댕이구이. 뜨거울 때 먹어야 제맛이다. 그러나 급하게 대하여서 안 된다. 가시까지 먹어야 제대로 먹는 것이라고 하니 손으로 들고 먹어야 폼이 난다. 식으면 살이 조금 단단해지지만 비리지 않다. 짭짤한 소금이 잘 배어들어 쫄깃한 살이 구수하고 달다.
10년 전 밤배의 장관은 더는 볼 수 없다. 섬의 환경이 바뀌면서 어장도 변했다. 다양하던 어종도 줄었고 너무 흔하여 거름으로 썼던 밴댕이는 이제 금댕이가 되었다.
■ 도움 주신 분
'강화어부네꽃게탕' 정찬구(남, 57세) 부부
조선의 임금 정조는 한양 도성에서 백리 정도 떨어진 현륭원을 매년 한 차례씩 행차했다. 이 때문에 한양에서 경기도 화성의 현륭원에 이르는 길은 효행의 길로 닦아질 수 밖에 없었다. 본래 한양에서 남부지방으로 이동하던 길은 한강을 건넌 후 노량진에서 남태령을 넘어 과천과 수원을 지나는 길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1790년에 첫 행차부터 이용했던 과천을 경유하는 과천길 대신 1795년부터 시흥길을 새로 닦았다. 시흥길은 과천으로 이동하는 길보다 멀었지만, 평지이기 때문에 남태령과 같은 높은 고개를 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었다. 시흥길로 옮기게 된 다른 사연도 전해진다. 장헌세자를 처벌할 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김상로의 형인 김약로의 무덤이 과천에 있기 때문에, 이 무덤을 피하기 위해 과천길을 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안양에 만안교를 축조했고 시흥행궁도 설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시흥은 지금의 경기도 시흥이 아니라 서울특별시 금천구이다. 시흥길과 과천길이 만나는 곳은 안양시 평촌동에 있던 갈뫼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갈산점으로도 불렸으며,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삼남지방으로 가던 길손들이 많이 쉬어 가던 곳이었다.
한강은 배를 연결한 다리를 통해 건넜으며, 그 이남에서는 비교적 규모가 큰 하천을 건너기 위해 새롭게 다리를 부설했다. 한강을 건널 때에는 노량진과 용산나루에 80여 척의 배를 연결해서 배다리를 만들었다.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이동할 때에 안양에 이르러서는 냇물을 건널 수 있는 만안교(萬安橋)를 만들었고, 수원에서 화성으로 이동하는 중간에는 대황교(大皇橋)를 설치하여 하천을 건넜다. 만안교는 1980년 8월에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이동해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으로 이전했다. 대황교는 경기도 수원시와 화성시의 경계 부근에 있었는데, 이 구간을 통과하는 국도 제1호선의 확장 공사 때에 화성시의 현륭원 입구로 옮겨 놓았다.
정조가 화성의 융릉으로 행차하던 구간은 용산나루-배다리-노량나루-장승고개-대방천 다리-대방천들-마장천 다리-문성동(文星洞) 앞길-수성참발소-시흥행궁으로 이어졌다. 시흥행궁에서부터는 국도 제1호선의 노선과 대체로 일치하는 길을 이동했다. 장승고개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있는 고개이고, 대방천교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해당한다. 마장천교는 도림천이고 문성동은 서울특별시 금천구 독산본동이다. 시흥행궁의 위치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5동 831-6번지 일대로 비정된다. 정조는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시흥행궁을 출발해 만안교-안앙참발소-군포천-서원냇다리-청천평-사근평행궁-지지대고개-괴목정교-만석거-영화정-장안문-수원화성으로 이동했다. 안양참발소는 경기도 안양시에, 사근평행궁은 경기도 의왕시 고촌동에 있었다. 지지대고개는 경기도 의왕시와 수원시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고 괴목정교는 지지대고개의 남쪽에 있던 다리이다. 만석거는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에 있는 저수지이다. 영화정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정자동에 있던 정자이고, 장안문은 수원화성의 북문이다. 사근평행궁에서는 낮 시간에 잠시 쉬어갔다. 이 구간은 지금의 국도 제1호선과 일치하지 않는다. 수원시내에서 두 노선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수원시내를 통과하는 지금의 국도 제1호선이 본래의 국도 제1호선 구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성행궁을 출발해 수원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을 지나 현륭원으로 이동했다.
정조는 가마가 지나는 길에 글을 새긴 돌을 이용해 표지석을 길 옆에 세워두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모두 18곳에 표지석이 건립되었다. 표지석이 설치된 18곳은 지지대고개(遲遲峴), 지지대(遲遲臺), 괴목정(槐木亭), 진목정교(眞木亭橋), 만석거(萬石渠), 대유평(大有坪), 관길야(觀吉野), 영화정(迎華亭), 매교(梅橋), 상류천(上柳川), 하류천(下柳川), 황교(皇橋), 옹봉(甕峯), 대황교(大皇橋), 유첨고개(逌瞻峴), 유근다리(逌覲橋), 만년제(萬年堤), 안녕리(安寧里) 등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전국으로 향하던 간선도로가 한양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뻗어 있었다. 6개 방향으로 뻗었던 대로는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던 길이었다. 한양에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가 있는 남부지방으로 향하던 길은 삼남지방으로 가는 길이라는 의미에서 삼남로 또는 삼남대로라 불리기도 했다. 삼남로는 조선시대 육로 교통의 중심축이었으며, 이 길을 통해 삼남지방의 물산이 중앙으로 이동하고 젊은 선비들은 과거를 치르기 위해 한양으로 올 수 있었다. 한양에 접해 있던 경기도를 통과하던 길은 경기도 삼남길이라는 이름으로 근래에 다시 조명되고 있다.
경기도 삼남길 가운데 제2길이 인덕원 옛길이다. 인덕원(仁德院)은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에 있던 숙박 기능을 갖춘 편의시설이었다. 조선시대에 한양에 살던 환관들이 이곳으로 살면서 동네 주민들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데에서 인덕이라는 이름이 생겨났으며, 이 마을에는 여행중인 관리들에게 숙박 기능을 제공하던 원이 있었다. 환관이란 궁중에서 임금을 보좌하던 내시를 일컫는다. 이로 인해 인덕원은 내시마을이라 불리기도 했다.
인덕원은 과천과 안양, 의왕을 잇는 경기 남부의 교통 요지로 매우 유서 깊은 곳이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도 가운데 『해동지도』에는 인덕원평(仁德院坪), 『1872년 지방지도』에는 인덕원천(仁德院川), 『대동여지도』에는 인덕원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에서는 과천현 북쪽의 남태령을 지나 과천을 경유하여 인덕원을 지나면 수원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표기되어 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면서 인덕원에는 자연발생적으로 주막이나 상점들이 등장했다. 인덕원은 조선시대에 사방을 연결하는 주요한 교통 요지였으며, 현대에도 중요한 교통 결절점으로 기능하고 있다. 인덕원 터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인덕원역 6번 출구 근처의 이면도로에 인덕원 터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세조실록』 9권(1457년)에는 인덕원 일대의 지형에 대한 평가가 있다. 인덕원 동쪽에 이르러 주변의 산세를 살펴보니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용과 호랑이의 기운이 자못 아름답다며 풍수상으로도 매우 길지라는 평가를 하였다. 현대의 풍수가들도 인덕원 일대가 배산임수의 길지이며, 부의 기운까지 가진 상업의 요지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인덕원 옛길은 인덕원 터에서 학의천을 지나 백운호수에 이르는 구간을 포함한다.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의 새마을공원 옆에는 인덕원 옛길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인덕원 터 표지석과 인덕원 옛길 표지석은 100여 m 떨어져 있다. 1999년 10월에 설치된 인덕원 옛길 표지석의 뒷면에는 정조가 화성 현륭원으로 능행을 할 때 인덕원에 머무르면서 주변 고을 백성들의 민원을 듣고 그들의 생활상을 보살폈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는 12번의 능행 가운데 6차례에 걸쳐 인덕원 옛길을 따라 이동했다. 『정조실록』 37권(1793년)에는 정조가 현륭원에 가던 길에 과천에서 낮 시간 동안 머물렀으며, 오후에 인덕원 들녘을 지니다 길가에 있던 남성들을 불러서 위로하며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지금 인덕원은 경기도 과천시와 군포시, 수원시 등지로 향하는 도로의 분기점이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북쪽의 시흥군 과천면, 동쪽으로는 시흥군 일왕면, 남쪽으로는 수원군 등지의 교통로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1950년 6.25 전쟁 때만 해도 인덕원 일대는 소나 말이 끄는 마차가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았고 포장도 되지 않아 사람이 다니기도 힘든 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인덕원 사람들이 한양의 영등포나 남대문 등지에 나무를 팔러 가던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인덕원 일대의 주민들이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관악산, 청계산 등지에서 나무 장작을 마련하여 안양이나 영등포의 시장에 팔았다. 소 등에 장작을 싣거나 지게에 짊어지고 밤 12-1시 사이에 인덕원을 출발하면 남태령 고개를 넘어 한양 도성에 도착해 장작을 팔 수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남태령 고갯길의 폭이 넓어지면서 우마차를 이용해 장작을 운송했다.
영화도는 조선 시대에 경기도에 있던 역도 가운데 하나이며, 경기도 수원의 영화역(迎華驛)을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본래 양재도에 속해 있었던 것이 1796년(정조 20)에 개편되어 영화도가 되었다. 중심역인 영화역에는 종6품이 찰방이 파견되어 역무를 관장했다.
정조는 1796년 가을 수원 화성 축성이 마무리된 후 수원 화성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양재역을 장안문 북쪽으로 이전시키고, 삼남 지방으로 향하던 모든 길을 영화역으로 집중시켜 기존 역로를 영화도로 개편했다. 한양 바로 남쪽에 있던 양재역을 수원 화성으로 옮긴 것은 화성의 위상을 더욱 드높이기 위해서였다.
영화도의 전신인 양재도는 세조 연간에 역도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고려 시대에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설치되었던 광주도(廣州道)에 속한 역들을 중심으로 편제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조선 초기 수원에는 동화역과 장족역이 설치되어, 경기도 남양의 해문역, 진위의 청호역, 양성의 가천역, 안성의 강복역 등으로 구성되는 동화도(同化道)가 설치되어 있었다.
1421년(세종 13) 한양에서 전국의 주요 지방으로 연결되던 역로에는 일반 역승이 아닌 정역찰방(程驛察訪)이 파견되어 있었다. 이 때 충청좌도 방면으로 향하던 양재역, 낙생역, 구흥역, 금령역, 좌찬역, 분행역, 무극역 등이 경기좌도 충청도 정역찰방의 관할에 포함되었다.
경기좌도 충청도 정역찰방은 1456년(세조 2)에 경기 충청좌도 정역찰방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두 정역찰방의 관할에 있던 경기지방의 역들을 모두 양재도 관할로 편제하였다. 1796년 충청도 정역찰방이 관할하던 역과 동화도가 영화도로 개편될 때에 과천역과 영화역을 새롭게 설치했으며 청호역·장족역·동화역 등의 3개 역은 폐쇄되었다. 이 때 중심역은 양재역에서 영화역으로 바뀌었다.
수원 화성의 건축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는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따르면, 양재역을 수원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長安門) 바깥 길의 동쪽 1리 지점으로 옮기면서 영화역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와 동시에 양재도라는 명칭을 영화도로 개편했다는 기록이 있다.
1808년(순조 8)에 출간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영화도가 낙생역·구흥역·금령역·좌찬역·분행역·무극역·과천 읍참역·수원 본참역·해문역·가천역·강복역 등 11개 역을 포함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후 1865년(고종 9)에 간행된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낙생역·구흥역·금령역·좌찬역·분행역·무극역·강복역·가천역·청호역·장족역·동화역·해문역 등 12개의 속역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896년(고종 33) 1월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효종의 영릉이 만들어지고 100여 년이 훨씬 지난 정조 재위기에 송시열은 집권당인 노론의 영수가 되어있었다. 정조는 특별히 그를 위한 사우를 지으라는 명을 내린다. 『정조실록』 20권 정조 9년(1785) 9월 20일 기사에는 정조가 이런 명을 내리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전에 여주(驪州)의 대로사(大老祠)에 사액(賜額)하였다. 연전의 능행(陵幸) 때에 청심루(淸心樓) 위에서 선정(先正, 송시열)의 시(詩)를 보고 비록 ‘달이 잠기도록 앉아 있으니 능(陵)의 잣나무는 컴컴한데, 어디에 꿇어앉아 아뢸지 알 수 없네.[坐久月沈陵栢暗 不知何處跪陳辭]’라고 한 이 한 구절로써 말하더라도 선정의 마음을 상상(想像)할 수 있었으므로 불현듯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향사(享祀)할 곳이 없을 수 없고, 또 많은 선비의 상소로 인하여 특별히 사우(祠宇)를 지으라고 명하였었는데 지금까지 겨를이 없었으니, 실로 사림(士林)들의 한탄이 되었다.
당시 대로사의 창건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미 숙종 대부터 서원과 사우의 폐단이 문제시되어 1751년(영조 27)에는 서원 건립을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졌고 영정(影幀)을 모신 영당(影堂)의 철폐령이 있고 난 뒤였다. 여주에 있던 우암의 영당도 이때 이미 훼철된 상태였다. 그런데도 정조는 영조의 금제(禁制)를 어기면서까지 대로사 창건을 허락하여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송시열을 현양하였다. 창건 이후 대로사는 여주 유생들의 중심서원으로 부상하여 강학(講學)의 기능까지 더하게 되었고, 왕릉 다음으로 중요한 존숭의 대상이 되었다.
서원의 이름에도 존숭의 의미가 담겨 있다. 조선시대 ‘대로(大老)’는 덕이 높고 학식이 풍부하여 존경할 만한 노인에게 붙이는 존호(尊號)였다. 실제 이 존칭을 쓴 사람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과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1820~1898)뿐이었다. 정조가 송시열의 사당에 대로사(大老祠)라는 이름을 내린 이유에 대해 『정조실록』 20권 정조 9년(1785) 9월 20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지금 다행히 낙성(落成)이 되어 그 편액(扁額)을 대로사(大老祠)로 걸게 하였다. ‘대로(大老)’란 두 글자는 다만 옛부터 천하대로(天下大老)란 글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연전에 선정의 문집(文集) 가운데에 뛰어난 구절(句節)을 모아 편집하면서 그 책의 제명(題名)을 『대로일고(大老逸稿)』라 하였으니, 대체로 이에서 따온 것이다.
서원에는 대로사비각(大老祠碑刻)이 있다. 1787년 11월 송시열의 세 번째 회갑연(180년)을 기념하여 정조가 친히 비문을 짓고 전서로 글씨를 쓴 비석이었다. 비석에는 사당을 세우는 대의와 우암의 덕에 대한 칭송, 그리고 정조가 영릉을 찾아뵌 후 대로사와 비를 세우게 한 배경이 빼곡히 적혀 있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대로사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때 명칭을 강한사(江漢祠)로 바꾸었는데, 흥선대원군이 스스로를 ‘대로’라 했기 때문이다. 70여 개에 이르던 송시열의 서원과 사우들이 모두 훼철될 때 여주의 대로사만은 이름을 달리해 후대에 전승되었다.
답교(다리밟기)와 무동춤이 합해진 놀이로 정조 때부터 시작됐다고 알려졌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융릉)을 화성으로 옮긴 후 11년 동안 13번이나 능행을 했다. 궁에서 융릉까지 절대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솔선수범하여 효행을 실천한 것이다. 과천 사람들은 융릉에 참배하러 다니는 정조의 효심을 찬양하고 과천을 지나가는 왕을 환영하기 위해 행사를 벌였는데, 이것이 바로 무동답교놀이라 전한다. 그러나 놀이의 유래와 무관하게 과천 무동답교놀이는 정월 대보름에 무병과 풍요를 기원하는 세시풍속 중 하나로 오랫동안 공연되어 왔다. 일제 강점기 때 민족말살정책으로 잠시 중단된 적도 있으나, 1980년대 공연 형식으로 재현되어 지금까지 전해졌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4호다.
1795년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사도세자의 융릉이 있는 화성에서 열기로 한다.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는 1735년생 동갑이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어머니와 같이 회갑을 맞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 수원 화성의 건설작업이 한창이어서 이를 확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궁을 떠나 배다리(여러 척의 배를 한 줄로 연결한 다리)를 건넌 뒤 둘째 날 저녁 화성행궁에 도착한다. 셋째 날에는 수원 지역 사람들을 대상으로 과거시험을 치러 61명의 관리를 선발하고, 넷째 날에는 융릉에 참배한 후 다섯째 되는 날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열었다. 이날 연회에 참석한 노인들에게 비단 1필씩을 하사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쌀을 나누어주는 등 백성들의 삶을 보살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한양으로 돌아왔는데, 이 총 8일간에 걸친 정조의 화성 행차를 그림으로 표현한 <화성능행도>(1795년)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능행 길목에 위치한 과천 주민들은 이 장엄하고 웅장한 모습을 지켜봤을 것이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직접 왕을 알현했을 것이다. 정조가 능행 길에 과천에 있는 찬우물의 맛을 보더니, 물맛이 매우 훌륭하다며 우물의 이름을 ‘가자(加資, 정 3품) 우물’로 부르게 했다는 이야기, 고개의 이름이 뭐냐고 묻는 정조의 질문에 여우고개라 답하기가 뭐해 임기응변으로 ‘남태령입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지는 까닭이다.
‘답교(다리밟기)’는 정월 대보름에 다리를 밟으면 다리에 병이 생기지 않는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세시풍속이다. 그리고 ‘무동’은 궁중연회 때 당악 정재를 추던 어린 소년을 말하는데, 이것이 민간으로 흘러 들어가 어깨 위에 올라타 춤추는 여장 소년들을 가리키게 됐다. 무동은 보통 10명가량이 어울려 노는데, 노란 저고리와 붉은색 치마를 입고 댕기를 드린다.
과천의 무동답교놀이는 단순히 두 놀이를 합한 연희가 아니다. 무동놀이와 다리밟기는 놀이를 하는 시점에 차이가 있다. 무동놀이는 언제든 벌일 수 있지만 답교놀이는 정월 대보름에만 한다. 과천 무동답교놀이의 공연 시점이 정월 대보름인 것으로 볼 때, 답교놀이에 무동놀이가 더해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원래 무동답교놀이는 정해진 형식 없이 마을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대동놀이였다. 그러나 도시화와 산업화 속에서 국가적인 전승 보존 정책에 따라 당나무고사, 선소리놀이, 우물고사 등을 추가하여 볼거리가 많은 공연 형태로 진화했다. 대회 출전을 위한 과천 무동답교놀이는 총 8과장으로 구성되는데, 이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당나무고사
당나무 앞에서 세 번 절하며 마을의 평안을 기원한다.
지신밟기
기와집, 초가집, 마을의 우물을 두루 돌며 지신밟기를 한다.
우물고사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물가에서 고사를 지낸다. 그 후 어깨에 아기무동을 태우고 무동놀이를 한다.
다리고사
다리 앞으로 이동하여 음식을 차려놓고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낸다.
마당놀이
마당 한가운데서 원을 그리며 신명 나게 무동놀이 마당을 벌인다.
선소리답교
선소리꾼들이 다리 위에서 <앞산타령>, <뒷산타령>, <개구리타령> 등을 부른다.
무동답교놀이
다리 위에 무동들(승려무동, 별감무동, 나장무동 등)이 올라 춤을 추며 흥을 고조시킨다.
뒤풀이
다시 당나무로 돌아와 온 동네 사람들이 참여하는 대동놀이를 벌인다.
오산은 면적이 42.75km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도시이다. 주변에 있는 수원시의 면적이 121.01km 이고 평택시의 면적이 453.31km 에 달하는 것에 비하면 얼마나 작은 도시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오산에는 정조의 효심이 어려있는 특별한 장소가 있다. 바로 독산성이다.
독산성은 오산시 지곶동에 있는 산성으로 만들어진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백제시대 때 축성된 성으로 추정된다. 또한 백제 때 만들어진 산성이지만 통일신라와 고려시대까지 계속 이용되어 왔던 요충지이기도 하다.
독산성은 1953년 임진왜란 때 전라도 관찰사이자 순변사였던 권율이 왜군을 물리친 장소로도 유명하다. 1750년 영조가 임진왜란을 기억하기 위해 방문하였고 10년 뒤 사도세자가 온양온천에 행차했다가 환궁하던 중에 장마로 인해 하루 머물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푼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독산성은 한 때 위기를 맞는다. 풍수지리를 이유로 독산성을 없애야 한다는 논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산성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하루 머물러 백성들에게 인정을 베푼 의미 있는 곳이기에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풍수지리 논란을 이겨내고 독산성을 개축하도록 했고, 개축 이후 현재의 독산성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독산성은 세마역에서 차로 3분 거리에 있다. 독산성 주차장에 도착해 독산성 산림욕장과 보적사라고 적혀있는 안내판을 지나 쭉 올라가면 독산성의 동문을 만날 수 있다. 독산성의 동문을 지나면 보적사를 볼 수 있으며 아담한 보적사를 구경하고 나오면 드디어 독산성의 진짜 모습과 함께 오산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다. 새로 지은 높은 건물들이 즐비한 동탄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독산성길에 앉아 확 트인 전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그림과 같이 나온다.
보적사에서부터 독산성길을 따라 쭉 걸으면 독산성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있는 돌탑도 볼 수 있으며, 영조-사도세자-정조 3대와 얽힌 독산성의 이야기가 적혀 있는 안내판도 찾을 수 있고 독산성의 여러 문도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만나는 문은 남문이다. 남문은 말과 소가 다닐 수 있었고 주 출입구 역할을 했다. 현재의 모습은 1979년에 파손된 것을 복원한 것으로 문확석 2개만이 남아있다. 조금 더 걸으면, 암문도 만날 수 있다. 암문은 순조 4년에 현륭원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서문을 폐쇄하고 만든 문으로 이 역시 복원된 것이다. 지도상에서는 서문과 북문도 확인할 수 있으나, 아직까지 복원중이기 때문에 아쉽게도 직접 볼 수는 없다.
독산성에서는 권율 장군의 전설과 얽혀있는 세마대도 볼 수 있다. 세마대는 권율이 진을 치고 왜적을 기다릴 때, 권율이 쌀을 말에 끼얹어 씻기는 시늉을 함으로써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고 이에 속은 왜적들이 퇴각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세마대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별하게 볼 것이 많지는 않지만 하나하나 역사와 얽힌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갈비의 뜻은 "소나 돼지, 닭 따위의 가슴통을 이루는 좌우 열두 개의 굽은 뼈와 살을 식용으로 이르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갈비라 고 하면 소갈비를 말하고 소갈비 구이를 갈비라는 요리로 인식한다.
특별한 날, 즐겨 먹는 음식 중 하나인 갈비구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대표 한국음식이다. 옛 문헌들에서 등장하는 갈비구이는 『증보산림경제』의 ‘소갈비구이’, 『시의전서』,와 『조선요리제법』에서는 ‘가리구이’,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갈비구이’로 소개되어 있다.
특히 갈비는 수원이 자랑하는 향토음식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음식이다. 조선 22대 왕 정조는 부친(사도세자)을 기리고 국가 개혁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정조 18년(1794년), 부친의 묘를 옮기면서 화성(華城)축조를 시작해 2년 10개월 만에 완공했다. 많은 사람들이 화성축조와 관련하여 수원으로 모여들었고, 토목공사에 힘들어하는 인부들의 건강도 신경 써야 할 부분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농업생산에 큰 축을 담당하는 소를 함부로 도축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화성을 건설하면서 이 지역에서는 예외적으로 소의 도축이 허용되었고, 이후 자연스럽게 우시장도 발달하게 되었다. 수원에서는 1940년대까지 전국 최대의 우시장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지역 환경의 영향으로 수원에서는 소를 이용한 음식도 비교적 다양하게 발전되어 왔다.
수원 갈비는 1940년대 개업한 '화춘옥'이라는 식당에서 탄생하였다. 이 식당은 해장국에 갈비를 넣어주던 것으로 입소문을 탔는데 1956년, 갈비에 갖은 양념을 버무리고 소금으로 간을 한 후 숯불에 구워 팔면서 수원 갈비의 시초가 되었다. 수원 ‘화춘옥’의 갈비는 1960년대 전직 대통령이 자주 이 식당을 애용하면서 수원 갈비의 맛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참숯으로 굽는 수원 갈비는인공 감미료를 사용하지 않아 담백한 맛이 특징이며, 넉넉한 양으로 인기가 높다. 한 대에 15cm 이상 되는 크기로 그 양이 푸짐해 ‘왕갈비’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수원갈비는 1985년수원시 고유 향토음식으로 지정되어 그 맛과 전통을 인정받았다.
소갈비(뼈포함), 잣, 양념장(간장, 배즙, 설탕, 다진 마늘, 파, 후춧가루, 참기름, 깨소금)
조리과정애저는 본래 ‘아저(兒猪)’ 즉 새끼돼지를 뜻하는데, 죽은 새끼돼지를 측은히 여겨 ‘애저(哀猪)’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문헌에서는 애저찜을 ‘아저증(兒猪蒸)’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애저찜이 어떻게 전라북도 진안군의 향토음식이 되었을까. 이는 진안군의 지리 및 풍토와 관계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진안이 “땅이 메마르고 추위가 빨리 오는 기후”라고 기록하고 있다. 진안군은 산지가 발달한 해발 200~300m에 위치한 고원분지 지형으로 전체 면적의 80% 가량이 산지이다. 땅이 건조하고 평균 기온이 낮은 산지이다 보니 농지가 부족한 대신에 가축을 사육하기에는 적절한 환경이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흑염소나 흑돼지 등을 많이 길렀다. 그러다보니 애저찜을 먹을 기회도 많았던 것이다.
조선후기에는 애저찜이 국왕의 식탁에 오를 정도로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1796년(정조 20) 2월 11일 『일성록(日省錄)』 기사에는 국왕에게 올리는 수라의 찬품 중에 애저찜이 있고, 한 그릇을 준비하는데 드는 비용을 9냥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1902년의 『고종임인진연의궤(高宗壬寅進宴儀軌)』에는 애저찜과 새끼돼지집으로 끓인 저포탕(猪胞湯)이 찬품단자에 들어 있다. 그러나 가난한 농가에서 부득이한 사유로 먹게 되었던 애저찜이 왕실의 식탁에 오를 정도로 유행하면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중앙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던 공인(貢人)을 겸한 시전 상인들 사이에 애저찜을 먹는 것이 유행하였다. 그러나 죽은 새끼돼지는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어서 살아있는 새끼돼지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어미돼지를 잡아 돼지새끼집(猪胎)까지 꺼내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실제로 고종(高宗) 때 궁궐과 관청에 각종 그릇을 납품하였던 지규식(池圭植)이라는 공인이 남긴 『하재일기(荷齋日記)』의 1891년 11월 18일 기사에는 “새끼돼지 한 마리를 족히 다섯 냥 주고 사가지고 와서 삶게 했다. 오후에 배부르게 먹었다. 밤중에 또 먹으면서 난경(蘭卿)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규식과 대화를 나눈 난경(蘭卿)이라는 인물은 지규식이 평소 자주 드나들던 장춘헌(長春軒)이라는 술집의 여주인이었다. 아마도 집에서 조리하지 않고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단골술집에 부탁하였던 모양이다. 그야말로 돈 많은 한양 상인의 호사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풍속을 두고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색다른 맛을 즐기는 자’들이 좋아하는 음식명을 열거하는 중에 애저찜도 언급하면서 이르기를 ‘편벽된 기호’라고 비판하였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일각에서는 애저찜을 혐오식품으로 언급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새끼돼지를 먹는 풍습은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존재한다. 일례를 들면 스페인이 자랑하는 ‘코치니요 아사도(cochinillo asado)’는 생후 3주된 새끼돼지를 잡아 통구이로 만든 음식이다. 적어도 죽은 돼지새끼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만들어 먹었던 애저찜의 의미와 향토음식으로서의 가치가 훼손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새끼 돼지, 전피(초피나무 껍질), 인삼, 마늘, 생강, 청주, 밤, 은행, 대추, 양파, 대파, 물, 초고추장
조리과정경기도 양주시 유양동에는 옛 양주관아 자리에 정조가 이곳에 들러 활을 쏘았던 일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당시 양주목사였던 이민채(李敏采)가 세운 것으로, 임금이 사대(射臺)에서 활을 쏘았다고 하여 전면에는 '어사대(御射臺)'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비석의 뒷면에는 정조가 양주관아가 있던 유양리에 와서 머물게 된 경위와 50시의 화살을 쏘아서 49개가 명중한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어사대비는 1978년 11월 10일에 경기도유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되었으며, 높이 140cm, 넓이 55cm, 두께 23cm 규모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1792년 9월 10일 정조는 세조와 정의왕후 윤씨가 잠들어 있는 광릉(光陵)으로 가던 중 미아리(美阿里)에 이르러 잠시 쉬기 위해 말에서 내렸다. 정조는 산천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미아리의 풍경에 감탄하였다. 그리고는 동북쪽 만장봉(萬丈峰)의 깎아지른 절벽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수려하고 깨끗한 기상과 하늘과 땅이 처음 생겨나기 전의 형세가 나는 듯 뛰는 듯하니 이곳 산천의 아름다움이 매우 볼만하구나.”
정조가 주정소(晝停所), 장수원(長水院)을 지나 드디어 양주목 어귀에 이르자 이 고을의 관리들이 나와 맞이하였다. 정조는 친히 아헌(衙軒)에 나아가 활쏘기를 하였는데, 모두 명중하였다. 그리고는 신하들에게도 각각 한 차례씩 활을 쏘도록 명하였다.
활쏘기를 마치고 정조는 친히 양주목사 이민채를 불러 민정을 살피기에 어려움은 없는지를 물었다. 이민채가 아뢰기를 “흉년이 든 해에는 세금으로 거둔 군량을 본읍(本邑)에 보관해 두고 있습니다. 이 군량을 백성이 빌려 가면 돈을 마련하여 상납하고 있고, 이밖에 세금도 쌀 대신 돈으로 상납하는 규칙과 관례가 있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군량 대신 돈으로 세금을 납부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정조는 다음 날 광릉을 참배하고 양주와 포천의 백성들에게 이르기를 “짐이 이곳에 친히 이르러 성조의 능을 뵙고 선대로 부터 내려오던 업을 따르고자 하는 것은 모두 백성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광릉에서 예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양주의 고을 사람들을 불러 처음에는 농사 형편을 묻고 그 다음에는 고통을 물어서 농사하는 방법을 권장하였다. 어진 정치를 이와 같이 펼치니 백성들이 서로 환호하며 기뻐하였다. 백성들의 뜻이 어떠한지를 잘 알았으니 은혜를 대궐로 돌아가 베풀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그 해의 세금을 크게 탕감하고 양주목사의 요청대로 거두어들이는 곡식은 돈을 마련하여 대신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이처럼 정조가 양주에 와서 내린 은혜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사대비는 정조가 양주관아에 들러 활을 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지만, 직접 양주 백성을 어루만지고 선정을 베푼 행적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양주관아에 3일간 머물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들여다보고 은혜를 베푼 정조의 일화는 어사대비에 담겨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경기도 화성시 용주사에는 정조가 직접 지어 용주사에 하사한 『어제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御製花山龍珠寺奉佛祈福偈)』(이하 『기복게』)가 있다. 『기복게』의 명칭은 임금(정조)이 화산 용주사에 부처의 공덕을 칭송하고 복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 게송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게송(偈頌)은 부처의 공덕과 가르침을 찬미하기 위해 지어 부르는 불교식 노래의 일종을 말한다.
용주사 소장 『기복게』는 내용을 나무에 새긴 목판본과 손으로 옮겨 쓴 필사본 2종이 전하고 있다. 이 중에서 필사본인 『전적수사본(典籍手寫本)』은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의 왕이 불교 시를 직접 지은 사례가 드물어서 당시 정조가 불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정조가 1795년 2월에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화성에 다녀온 후 그해 여름에 직접 지어 용주사에 하사했다. 『기복게』의 내용은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권55 「잡저(雜著)」에도 수록되어 있다.
정조는 불교를 통치 수단 중 하나로 여기고 불교에 꾸준히 관심을 보였다. 불교 경전 중 하나인 『불설대보무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에서 부모에게 효를 다하고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내용이 유교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여 친근감을 가지기도 했다. 불교에 대한 정조의 관심은 용주사를 건립하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정조는 용주사 승려인 철학(哲學)에게 전국의 사찰을 관장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용주사를 정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에 편입하기도 했다.
『기복게』는 서문,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결게분(結偈分) 총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문에는 용주사 건립 목적과 『기복게』를 지은 이유가 쓰여 있다. 정조가 『기복게』를 지은 이유는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지어 삼업공양(三業供養)을 바치고, 부모의 은혜를 갚기 위해 복전(福田)을 닦기 위함이었다. 삼업공양은 몸으로 예를 다하고, 말로 칭찬하고, 바른 뜻으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부모가 자식을 길러준 은혜를 생각하여, 부모를 공경하고 은혜를 보답하고자 하는 것이 복전이다. 이처럼 『기복게』는 불교식 노래를 지어 부처를 공양하고, 자식으로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목적에서 지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용주사는 정조가 현륭원(顯隆園) 재궁(齋宮)으로 쓸 목적으로 세운 절이다. 정조는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 배봉산(현, 서울 동대문구)에서 경기도 화산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이듬해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능지 옆 옛 길양사터에 용주사를 창건했다. 아버지를 향한 정조의 효심으로 세워진 용주사는 백성들에게도 본보기가 되어 효행을 장려하는 장소로 여겨져 왔다. 그리하여 2005년에는 용주사에서는 정조의 효행이 깃든 사찰이라는 점을 내세워 효행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용주사 효행박물관에서는 용주사 소장 유물 전시, 용주사 관련 문화유산 해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흥천산 봉수(興天山烽燧)는 경기도 화성시 우정면 화산리 산78-1번지 봉화산(61.3m) 정상에 있다. 산의 높이는 그리 높지 않지만, 주변의 산들이 봉화산보다 낮아 멀리까지 볼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특히 서남쪽으로는 남양만을 조망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화성시는 개발이 빨리 이뤄지고 있어 봉화산 옆으로는 대부분 택지지구로 포함되어 있다. 그 때문에 이곳 봉수가 있는 봉화산도 언제 개발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대응봉수는 남쪽으로 평택시 원정리에 있는 괴태길곶 봉수(槐台吉串烽燧)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서쪽으로 화성시 상안리에 있는 염불산 봉수(念佛山烽燧)로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괴태길곶 봉수까지는 6.25km, 염불산 봉수까지는 16km의 거리이다.
흥천산 봉수는 조선 후기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을 축조하면서 봉수의 노선이 변경되었다. 정조대왕이 행궁에 머물 때를 대비해 흥천산 봉수에 새로운 연대를 축조하였다. 원래 흥천산 봉수는 화성의 봉돈을 거치지 않고 한양으로 갔다. 그러나 정조가 화성에서 머무는 날이 많아지자 봉화의 노선을 바꿔 화성봉돈으로 신호를 보내게 하였다. 아울러 흥천산봉수에서 화성봉돈까지 거리가 멀어 그 중간에 서봉산 봉수와 건달산 봉수를 새로 만들게 하였다.
흥천산 봉수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봉화 한 개가 흥천산에 있는데 부의 서쪽에 있다"면서 대응봉수를 일컫고 있다. 비슷한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도 보인다. 여기에도 대응봉수가 나오는데, 다만 흥천산(興天山)이 흥천산(興川山)으로 한자가 바뀌어있다. 그러나 후대에 나온 지리지에는 원래의 한자로 복구된다. 『여지도서』(1760)에 오면 부의 서남쪽 압장면에 있는데 75리라 했다. 『강화신지』(1783)에는 봉수군이 100명이라고 했다. 그리고 봉수장 1인, 감관(監官) 5인, 도감고(都監考)1인이 별도로 기록되어 있다. 『수원부읍지』(1792)에는 자세하게 봉수군에 관하여 기록해 두었다. 별장 1인, 감관5인, 군(軍) 25명, 감고(監考) 1명, 산직(山直) 5명, 표하군(標下軍) 10명이라 했다. 박기수(朴綺壽)가 쓴 『화성지』(1831)에는 신설된 건달산(乾達山)의 봉수가 기록되어 있다. 이후 『수원부읍지』(1792)에도 흥천산 봉수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1942)에는 직경 4척 높이 2척 정도의 토만두(土饅頭)가 5칸 정도의 간격으로 5개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소금을 묻었다고 하는 토총(土塚) 1개소가 있다고 했다.
현재 구릉 능선에 흙과 돌로 쌓은 정방형에 가까운 시설물 1개소가 있는데, 출입시설, 삼각점이 있다. 북쪽으로 가면서 원형 봉분을 연상하게 하는 5개의 크고 작은 원형봉돈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이 흥천산 봉수는 평면 형태에 있어서 장축이 단축에 비해 5~6배에 달하는 세장한 모습을 보이는 서해안 연변봉수의 전형을 띠고 있다. 아울러 봉돈의 수도 일반적으로 5개소인데 흥천산봉수는 6개소의 봉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