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전주시에서 개최되는 전주한지문화축제는 1997년 처음 시작되었다. 한지를 통해 전국의 우수 공예인을 발굴하고 전주한지의 산업화에 도움이 되고자하는 의미로 시작된 축제이다.
한지는 천년이상 우리와 함께한 종이이다. 종이의 최초 발명자는 중국의 채륜이라고 하지만, 이에 대해 채륜의 종이보다 200여 년이나 먼저 중국 감숙성 천수시 방마탄에서 출토된 종이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한지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4~5세기로, 채륜의 시대에 전해졌을 거라고 추론된다. 7세기 전후 닥나무가 마(麻)와 저(楮)를 대신하여 종이의 주원료가 되면서 우리만의 기술로 종이를 제조할 수 있게 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제지기술이 우리나라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시기는 고려시대로 이해한다. 11세기 불경 조판사업은 종이 생산기술의 급격한 발달을 초래한다.
조선시대에는 종이 생산기술은 국가 수공업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었다. 수도인 한양에 종이생산을 담당하는 조지서를 설치하였다. 한지제조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닥나무 채취 및 닥무지 → 닥나무 껍질 잿물에 삶기 → 세척 및 표백 → 섬유풀기와 닥풀풀기 → 한지뜨기 → 습지 쌓기 및 물짜기 → 건조 → 도침.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전통한지를 만드는 것이다. 한지는 그 자체로 종이로서 뿐 아니라 독특한 멋과 아름다움이 있어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생활용품, 악세서리, 공예, 수 등 한지를 활용한 다양한 산업화가 가능하다. 나아가 한지 원단을 이용한 의상 개발까지도 그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
전주한지문화축제는 1997년 처음에는 전주한지축제으로 시작했고, 1999년부터는 전주종이축제로 이름이 바뀌었다. 2006년에 지금의 전주한지문화축제로 이름이 고정되었다. 전주한지문화축제에서는 조선시대의 한지생활용품 유물전, 완판본 한글 고전소설과 고문헌전, 닥종이인형전, 한지 패션쇼 등의 다양한 전시를 통해 볼거리를 제공하고, 한지그림 그리기대회, 가족 문바르기 대회, 한지제작 체험, 한지공예교실, 종이장터, 한지와 전통문화 체험, 종이재활용 교실, 종이 바수기 시연 및 전시, 한국 전통연 시연 및 전시 등의 체험 행사도 다양하게 진행된다.
종이를 주제로 한 전주한지문화축제는 지속가능성이 높은 축제이다. 다만 전주에서는 전주비빔밥축제, 전주대사습놀이, 전국고수대회, 전주단오, 연꽃축제, 태조어진 봉안행렬 등 크고 작은 축제들이 펼쳐지고 있다. 이러한 축제의 난립이 상호 경쟁을 통한 상생의 효과를 가져오기 보다는 예산의 낭비, 비효율적 행사 진행과 관광객의 분산, 콘텐츠의 부재 등 문제를 일으켜 비판이 일고 있다. 갖가지 축제는 고유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지만, 유사한 축제는 과감한 통폐합도 고려해봄직 하다. 축제가 많아서 문제가 아니라 의미없는 축제가 많은 것이 문제이다.
전주한지문화축제는 한지라는 종이를 주제로 하고 있어, 전통과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한다면 그 지속발전 가능성은 크다고 하겠다.
원주한지문화제는 사단법인 한지개발원이 주최가 되어 1999년부터 매년 9월에 개최되는 축제이다.
한지개발원은 한지를 통한 문화얘술 발전, 한지문화의 대중적 확산, 한지문화자원 육성, 한지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알리기 위해 2001년 설립된 단체이다. 또한 원주한지문화제가 세계로 진출하기 위해 해외전시를 통한 예술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원주한지문화제는 기획행사, 학술행사, 체험행사, 상설행사, 경연대회, 공연행사 등으로 구분하여 한지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원주한지문화제는 아리랑TV를 통해 세계각국에 방송되며, 매년 한지를 소재로 하는 새로운 주제를 설정하고 이에 따른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
그동안 설정된 주제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지 - 천년의 불빛
천년의 숨결 - 우리의 얼굴
Hanji - Time, Color, Rythm
소통 ‘Communication' 동서양의 만남/ 전통과 현대의 만남 / 자연과 문명의 만남
Hanji - Living 한지 - 삶 속으로
천육백년의 역사 한지 - 세계 속으로
페이퍼로드의 심장, 한지
천육백년의 숨결 한지 - 빛의 조화
하늘이 내린 오색빛깔 원주한지, 세계 속의 원주한지
천 육백 년의 숨결 우리 종이 한지(韓紙)를 찾아서
한지개발원은 원주한지문화제가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 2005년 파리한지문화제, 2006년 스트라스부르 한지문화제, 2006년 한불수교 120주년 기념 파리한지문화제 등을 개최하여 원주한지의 우수성을 알리고 있다. 특이하게 원주한지문화제가 개최되는 동안 각종 행사가 개최되지만 먹거리와 향토풍물 장터는 열리지 않는다.
원주한지를 만드는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종이라고 하는 한지는 닥나무나 삼지닥나무 껍질이 주 원료이다. 한지는 이들 나무를 가마솥에 다발로 묶어 세우고 물을 붇고, 가마니를 둘러싸고 불을 땐다. 껍질이 흐물흐물 벗겨질 정도가 되면 껍질을 벗기고 말린다. 말린 껍질은 물에 불려 밟아 하얀 내피 부분만 골라내어 양잿물과 섞어 3시간 이상 삶는다. 그 뒤 압축기로 물을 짜낸 후 닥풀뿌리를 으깨 짜낸 물을 넣고 혼합하여 고루 풀리게 한다. 마지막으로 발로 종이물을 걸러서 뜬다.
한지는 용도에 따라 그 질이 다르며 호칭도 다르다. 문에 바르면 창호지, 족보나 불경 또는 고서의 영인에 사용되면 복사지, 사군자를 치면 화선지, 연하장 청첩장 등에 쓰이면 태지라고 한다. 종이는 인간의 기억과 언어를 저장하는 매개체이다. 문자와 종이의 등장은 인류가 문명의 진전을 이룰 수 있게 해준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였다.
오랫동안 변치 않고 보존이 쉬운 좋은 종이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세계적으로 계속되어 왔다. 우리의 한지는 그러한 의미에서 세계인의 인정을 받는 종이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그러나 한지는 제조공정이 많은 수고를 요하는 작업이다. 때문에 다변화하는 세계의 변화 속에서 수공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한지는 가격 경쟁 등에서 밀리는 모양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지가 지니고 있는 장점을 활용하면 그 가능성은 무한하다. 수공 작업의 공정을 현대의 첨단 과학과 접목하면 더욱 새로운 한지의 개발이 가능하고 첨단 소재 개발도 가능하리라 여겨진다. 다만 전통한지와 기계를 이용한 한지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는 남겨진 숙제이다.
부채는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만드는 도구이다. ‘부치는 채’라는 뜻으로, 줄여서 ‘부채’라고 부른다. 한국·중국·일본 등 동아시아에서는 일찍이 일상생활에서 활발하게 사용되었으며, 서양에서는 동양에서 건너간 부채를 비단이나 진주와 함께 매우 귀한 물건으로 여겨 여성의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식품이 되었다.
부채의 종류는 크게 방구부채와 접부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방구부채는 둥근 형태의 부채로 부챗살에 비단 또는 종이를 붙여 만들어 ‘둥근 부채’라고도 하며, 한자로 단선(團扇), 원선(圓扇)이라고 하였다. 접부채는 가지고 다니기 편하게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도록 부챗살에 종이를 붙여 만든 것으로 ‘접는 부채’라고도 하며 한자로는 접선(摺扇), 접첩선(摺疊扇)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속담에 “단오 선물은 부채요, 동지 선물은 책력(冊曆)이라.”하는 말이 있다. 단오가 가까워지면 곧 여름철이 되므로 부채를 선물하고, 또 동지가 가까워지면 새해 책력인 달력을 선물하는 풍속이 성행하였다. 방구부채는 황색, 접부채는 백색·흑색을 선호하였고, 접부채는 기름먹인 것을 좋아했다. 방구부채는 대개 집안에서 남녀가 함께 사용하였고, 남자가 외출을 할 때는 접부채를 가지고 나갔으며 젊은 부녀자나 아이들은 여러 빛깔이 있는 색선(色扇)을 사용했다.
우리나라 부채의 특징은 대나무와 한지를 주재료로 만드는 것이다. 부채를 만들려면 먼저 대나무를 준비해야 하는데, 음력 7월 15일 전후 한 달 동안과, 9월 그믐부터 이듬해 2월 사이에 벤 대나무를 사용한다. 이 시기의 대나무는 벌레가 꼬이지 않고 질이 좋기 때문이다. 잘 건조한 대나무는 빛깔을 곱게 만들기 위해 끊어서 숯불에 구워 진을 뺀다. 칠부채나 기름부채를 만들 때는 선면(扇面)에 칠을 입히거나 들기름을 먹여 3일 동안 말린다. 부채를 제작하는 데에는 약 3개월 이상의 시간이 걸리며, 대체로 분업하여 만든다.
『경국대전(經國大典)』 공전(工典)에 따르면 경공장(京工匠)에는 첩선장(貼扇匠) 네 명, 전라도에는 선자장(扇子匠) 두 명, 경상도에는 선자장 여섯 명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지역보다 경상도 지역에서 부채 만드는 일이 번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채는 모양이나 품질에 있어서 전라도 지역의 전주와 남평(나주지역의 옛 이름)에서 생산한 것을 제일로 쳐주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곧고 단단한 대나무와 질 좋은 한지를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전주에서는 단오 때 방구부채인 태극선(太極扇)이 임금님께 진상되었고, 전주감영에 부채를 만들고 관리하는 관청인 선자청(扇子廳)을 두어 진상용 부채가 생산되었다. 남평(나주)은 조선시대 여러 문헌에 좋은 부채가 생산되는 고장으로 등장한다. 나주에서 생산된 부채는 나주곡두선, 나주세미선, 세원선 등이 있으며 부챗살 끝부분을 구부려서 만든 부채인 곡두선은 나주에서만 생산된 독특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나주부채는 마지막 장인 김홍식 옹이 작고하여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가 전라남도무형문화재 제14호 나주소반 기능보유자인 김춘식 선생이 기술을 이어받아 나주부채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한지장(韓紙匠)은 전통한지를 제작하는 장인을 말한다. 그래서 한지를 장인의 손맛에 의해 만들어진 ‘닥종이’라고 부른다. 한지는 닥나무 등의 섬유를 원료로 하여 한국 전통적인 기법으로 만든 종이이다. 종이는 처음 중국에서 발명되었다. 후한의 채륜에 의하여 품질이 좋은 종이가 생산되고, 보급이 확대되면서 종이 제조 기술이 향상되었다. 우리나라에 종이가 언제 전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종이는 매우 희고 섬유질이 균일하며 표백기술 등이 훌륭하였다.”고 한 점으로 보아 종이 제작 기술이 오래전부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한지는 고려시대에도 그 명성이 높았다. 중국에서도 제일 좋은 종이를 ‘고려지(高麗紙)’라 불렀다. 또한 송나라의 손목(孫穆)은 『계림유사(鷄林類事)』에서 “고려의 닥종이는 빛이 희고 윤이 나서 사랑스러울 정도”라고 극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태종대부터 조지서(造紙署)를 설치해 원료 조달과 종이의 규격화, 품질 개량을 위해 국가에서 관심을 갖고 관리했다. 특히 활판 인쇄술의 발달로 종이의 수요가 증가하였다. 조선시대 종이는 종류가 다양하며, 나뭇결이 생기고 식물섬유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겨울이 문턱에 이르는 11월 무렵, 양지 바른 산기슭에 곧게 자란 1년생 닥나무를 벤다. 벤 닥나무를 찌고, 삶고, 말리고, 벗기고, 다시 삶고, 두들기고, 고르게 섞고, 뜨고, 말리는 한지장의 손길이 거쳐야 종이 한 장이 된다. 그래서 한지 만드는데 100번의 공정을 거친다고 해서 한지를 ‘백지(百紙)’라 부르기도 하였다. 혹은 물에 정성스레 씻고 티를 골라낸 닥나무의 흰 속살로 섬유를 만들었다고 해서 백지‘(白紙)’라고 부르기도 했다.
1884년 김옥균에 의해 근대 제지술이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다. 특히 근·현대를 지나오면서 건축양식과 주거환경의 변화, 서양지의 수입 등으로 전통적인 한지의 명맥은 거의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전통 한지의 올바른 보존과 전승을 위해 한지장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한지의 우수성을 설명할 때 ‘지천년 견오백(紙千年 絹五百)’이라고 한다. 이 말은 종이는 천년을 견디지만 비단은 오백년을 견딘다는 의미다. 또한 물과 햇빛, 닥 섬유와 닥풀, 흘림뜨기 초지기술과 도침, 천연잿물에 타서 고해 등은 한지의 친환경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일반적인 사전에는 공예를 “조형 미술의 하나로 실용적 물건의 본래의 기능(機能)과 미적 장식(裝飾)의 양면을 조화시켜 직물, 염직, 칠기, 도자기 따위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제작하는 것을 말한다.”라 명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공예는 기능과 예술 혹은 장식미라는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다만 이러한 양상은 적어도 오래전에는 예술미보다는 기능적인 측면이 강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나라의 특징을 보여주는 한지공예는 한지를 활용한 공예를 말한다. 한지공예와 관련이 깊은 한지는 다른 나라에서 사용하거나 제작하는 종이와 달리 닥나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재료로 한국만의 방식으로 만든 종이를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보게 되면 한지공예는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문화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보여주는 공예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지공예는 종이를 사용한다고 하여 종이의 한자어인 지(紙)자를 사용하여 지공예라 칭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가 공예라 부르는 것들 가운데 상당수는 정확한 기원을 알기 어렵다. 한지공예 역시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사실상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중요한 사실은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종이를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하였는데, 그러한 것들이 점차 발전을 하여 한지공예로 자리매김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지금과 달리 전통사회를 비롯해 아주 오래전에는 종이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아무나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쉽게 구할 수도 없었다. 자연스레 종이를 구하기 힘든 시절에는 오늘날의 한지공예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지공예의 개념과 정의를 살피는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사항은 우리네 일상에서 한지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한지공예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 이외에도 편지를 쓰거나 놀잇감 등을 만들 때에도 한지가 널리 이용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비록 한지로 제작된 것이라 하더라도 공예라 부르기에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정리하자면 한지로 제작되거나 포함되었다고 하더라도 모두 한지공예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물론 연구자에 따라서는 한지공예의 범주를 넓게 잡기도 하나, 면밀한 의미에서의 한지공예는 한지로 제작된 것 가운데 기능적인 면은 기본이고 예술미 혹은 장식미 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한지로 만든 공예품은 종이가 지니고 있는 특성상 오랜 역사를 지닌 것들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선시대 후기에 제작된 과반, 장롱 등이 비교적 오래된 한지공예품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지를 여러 가지 생활도구를 만드는데 사용하였는데, 결국 이러한 것들이 시대를 흐르면서 더욱 발전하여 지금처럼 공예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단색인 한지에 여러 가지 색을 가미하여 자신들만의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단색 한지로 제작된 공예 역시 나름대로의 매력을 지니고 있긴 하나 한지에 색을 입히는 기술이 등장하고 발전하면서 한지공예는 더욱 다양하게 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전통의 한지공예는 그 기법을 한두 가지로 설명하긴 어렵다. 다시 말하자면 한지공예와 관련된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면에서나 기법적인 면에서 다소 차이를 보인다는 이야기다. 그 이유는 단순히 한지를 오리거나 바르거나 해서 만드는 방법도 있지만 이러한 방식 이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한지공예를 제작했기 때문이다. 한지공예는 그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이 가능하다. 그중에서도 한지공예를 만드는 기법에 따라서는 크게 5가지 정도가 되는데 지승공예, 지호공예, 지화공예, 전지공예가 그것이다. 지화공예는 다시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종이꽃을 뜻하며(紙花), 다른 하나는 종이에 그림을 그린 지화(紙畵)이다. 한글로 표기했을 때는 동일하지만 한자를 살피면 명백한 차이가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한지공예의 여러 기법 가운데 하나인 지승공예는 ‘지승(紙繩)’과 ‘공예(工藝)’가 합쳐진 것으로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지승이다. 지승의 지는 일반적인 종이를 가리키고 승(繩)은 줄, 새끼를 뜻하는 것으로 우리말로는 '꼬다'라는 뜻을 지닌다. 결국 지승공예의 지승은 한지를 새끼나 줄과 같이 꼬아서 만든 공예인 셈이다. 참고할 내용은 지승을 뜻하는 용어에는 노내끈, 나기, 노끄내기, 노나끈, 노역게 등이 있었는데, 이들 용어는 사용하는 빈도가 줄어들면서 지승이라는 단어로 정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여타의 한지공예가 그러하듯 지승공예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고려할 부분은 지승공예는 적어도 다른 한지공예의 기법에 비해 다소 손이 많이 간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타의 공예의 역사와 견주어 볼 때 다소 후대에 생겨났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 이유는 한지를 오리거나 붙이거나 혹은 단순히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촘촘하게 꼬아서 만들어야 하기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정성을 많이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승공예에 사용하는 한지는 다른 한지공예와 달리 조금은 질이 떨어지거나 혹은 온전한 형태로 사용이 불가능한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좋은 한지가 반드시 사용되지 않아도 지승공예를 제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지승공예를 만드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한지는 휴지나 폐지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런 점에 입각해 보면 지승공예의 역사는 이러한 맥락과도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지승공예의 제작방법은 앞서 소개한 바대로 우선 종이를 꼬는 작업이 필요하다. 휴지나 폐지를 이용하긴 하나 한지를 물에 적신 다음, 그것들을 엮어 끈을 만든다. 그리고 끈을 접거나 혹은 펼쳐서 차근차근 엮어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해당 공예품에 따라 출발점이 다르긴 하겠지만 이 과정이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지승공예 기법에 있어서는 추후 마무리 과정에서 주칠이나 옷칠을 한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형태로 마무리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물에 약한 종이의 특성을 보완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끈을 이용하여 만들기에 중간중간 빈틈이 많은 것도 관련이 있다. 지금까지 전해오거나 혹은 제작되는 지승공예품으로는 화병을 비롯해, 호리병, 항아리를 꼽을 수 있다. 그리고 바구니 역시 지승공예로 제작된 것이 많다. 다소 투박하지만 일상생활 여러 곳에서 사용되는 지승공예는 우리나라 한지공예가 지닌 또 다른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우리네 한지공예는 그 종류가 무척 다양할 뿐만 아니라 제작되는 한지공예에 따라 제작 기법도 차이가 있다. 한지공예를 제작하는 이들이나 연구자들은 여러 종류의 한지공예를 통해 기법에 따라 크게 다섯 종류로 구분을 한다. 기법에 따르면 크게 지승공예, 지호공예, 지화공예, 전지공예로 나누는데, 지화공예는 종이꽃을 뜻하는 지화(紙花)공예와 종이에 그림을 그린 지화(紙畵)공예로 구분을 한다.
이들 기법 중에 지호공예는 ‘지호(紙戶)’와 ‘공예(工藝)’가 합쳐진 것으로 이 기법의 핵심이 되는 것은 온전한 종이건 폐지건 간에 한지를 잘게 찢은 다음 종이죽을 만들어 이것으로 공예품을 만든다는 점이다. 어떤 연유로 종이 다음에 집을 가리키는 ‘호(戶)’가 붙게 된 연유는 알기 어려우나 이런 식으로 제작된 한지공예를 지호공예라 부른다.
한지공예의 여러 기법 가운데 지호공예가 지닌 핵심적인 내용은 종이반죽이다. 평범한 한지를 물에 넣을 경우에는 공예품을 만들 수 있는 반죽을 얻기가 어렵기 때문에 접착력을 지닌 풀을 반드시 첨가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밀로 만든 풀이나 혹은 찹쌀로 된 풀을 넣어 접착력을 확보한다. 그리고 이렇게 확보한 종이죽을 이용하여 한지공예를 만드는 방법은 원하는 기물의 틀을 만들어 종이반죽을 틀에 따라 붙이는 것이 있는 반면 그러한 틀을 만들지 않은 채 작업을 하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다만 후자의 경우는 큰 기물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반죽의 상태가 마르게 되면 따로 떼어내서 비로소 하나의 지호공예품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한지공예의 역사에서 지호공예가 언제부터 등장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전지공예나 지승공예, 지화공예 등과 견주어 보면 비교적 일찍부터 이 기법을 이용하여 한지공예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다른 기법에 비해 단순하기 때문이다. 지호공예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신라시대 불상을 종이로 만든 다음 표면에 도금을 하였다는 이야기는 반드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지호공예 기법으로 제작된 대표적인 것은 오늘날 우리가 닥종이 인형이라 부르는 것을 들 수 있다. 종이를 풀어서 원하는 형태로 인형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지호공예를 만드는 핵심 기법인 셈이다. 그리고 표주박을 비롯해 합, 상자, 반짇고리, 과반 등 역시 지호기법을 이용하여 만든 한지공예이다. 또한 탈춤 과정에서 연희자들이 얼굴에 쓴 탈과 종이 항아리라 불리는 지독 역시 이 기법을 통해 제작된 우리네 일상용품이다.
여타의 기법으로 제작된 한지공예와 달리 지호기법으로 제작된 것들은 무척 촘촘하고 단단하다는 인상을 떨치기 어렵다. 비록 예술적인 부분이나 장식적인 면이 약하긴 하나 우리네 일상생활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는 점도 분명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물을 가까이해도 변형이 없기 때문에 아주 오래오래 사용할 수 있는 것도 분명한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오랜 역사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공예로 널리 알져진 한지공예는 제작 기법에 따라 여러 형태로의 구분이 가능하다. 지호공예, 전지공예, 지승공예, 지화공예 등으로 불리는 것이 한지를 활용하는 방식에 따라 나눈 것이다. 이 가운데 다른 세 가지 공예와 달리 지화공예는 다시 세분화시킬 수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지화(紙花)공예이고, 다른 하나는 지화(紙畵)공예이다. 한글 상으로는 구분이 어렵지만 한자를 참고하면 지화공예는 말 그대로 종이꽃과 관련된 것이고 지화공예는 한지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이 핵심적인 기법임을 알 수 있다.
전자의 지화(紙花)공예는 한지를 이용하여 꽃이나 새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비교적 특별한 기술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완성된 것을 만들기가 어려운데, 어찌 되었든 간에 한지 등을 접어서 이러한 대상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이 공예와 관련된 내용이다. 우리네 한지공예 가운데 지화공예에 해당하는 것으로 상여에 달린 꽃을 비롯해 불교 의식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꽃장식 등이 있다.
그리고 남해안 별신굿과 강릉단오제에서 펼쳐지는 여러 형태의 굿판에서도 이와 관련된 공예를 자주 접할 수 있다. 굿을 주도하는 무녀와 달리 굿판에서는 굿을 진행할 때 사용하는 지화공예를 만드는 사람이 따로 있을 정도이니 그 가치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이 공예에 사용하는 한지는 꽃을 표현하기에 대부분은 염료를 가미한 색지가 사용된다. 얼마나 다양한 색지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긴 하나 비교적 어떤 공예는 실물과 비교해 볼 때 큰 차이가 없는 것들도 적지 않다.
두 번째에 해당하는 지화(紙畵)공예는 평범한 종이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이 핵심이다. 대개는 제작된 한지공예에 그림을 넣는 것이 일반적인 것인데, 해당 공예품의 규모에 따라서는 그림의 크기가 차이를 보이기 마련이다. 한지공예에 그림을 넣는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민화(民畵)와도 관련이 깊은데, 무엇보다 동양화적인 색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그렇다고 해서 완성된 기물에만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별도로 그림을 그려 그것을 오려 해당 되는 곳에 붙일 수도 있다. 특히 해당 한지공예에 필요한 문양을 넣거나 장식을 할 때 지화(紙畵)공예 기법이 널리 쓰인다.
원하는 그림을 그려 넣기 위해서는 우선 넣고자 하는 대상이나 이미지의 본을 떠야 한다. 그런 다음 종이에 아교를 발라주어야 하며, 이것이 마르고 나면 채색을 하여 마무리를 하면 된다. 우리나라의 다양한 한지공예 가운데 이 기법으로 제작된 것으로는 반닫이와 갓집, 고비, 상자류, 의거리 장을 들 수가 있다. 지화공예는 다른 기법의 공예와 달리 제작 과정이 그리 복잡하지 않고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평범해 보이는 한지공예에 장식미와 예술미를 가해 해당 공예를 보다 두드러지게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도 분명 의미가 큰 기법이 아닐 수 없다.
한지공예는 한지라는 종이를 이용하여 제작된 공예를 말한다. 다만 닥나무에서 껍질을 벗겨내고 이것을 한지로 만들 때에는 일차적으로 미백색의 평범한 종이일 뿐, 특별한 색을 지니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한지공예, 특히 화려하고 장식미가 도드라진 한지공예 대부분은 한지에 색을 입혀 새롭게 제작한 것인데, 이것을 가리켜 통상 한지 염색이라 칭한다.
비단 한지염색뿐만 아니라 염색을 하기 위해서는 염료가 필요한데 이는 크게 천연, 합성섬유, 그리고 피염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한지에 염색을 하는 과정에서는 이러한 다양한 염색을 사용하지만 한지염색의 경우는 천연염료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대량으로 생산할 경우에는 화학염료를 사용할 수밖에 없기에 반드시 그렇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다소 조심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다.
여타의 한지공예의 기법 가운데 한지염색이 많이 사용되는 것을 꼽으라면 전지공예를 들 수 있다. 특히 전지공예에 속하는 오색전지공예를 제작하기 위해선 절대적으로 다양한 색을 지닌 한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지염색에 필요한 천연염료에는 잇꽃, 쪽, 자초, 황벽, 치자, 밤나무 등이 사용된다. 각자 나름대로의 고유한 색을 지니고 있어 원하는 색을 얻고자 할 경우에는 해당 천연물을 통해 염료를 확보하면 된다. 가령 붉은색을 필요로 한 경우에는 잇꽃을 통해 염료를 추출하고, 노란색의 경우에는 치자나 울금, 황벽 등을 이용하면 된다.
천연염료이든 화학염료이든 간에 염색을 하는 과정에서는 매염재라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것은 색을 보다 선명하게 하는 동시에 종이에 염색이 잘 흡수되도록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염색을 하는 대상은 크게 천과 종이로 나눌 수 있다. 다만 종이와 천에 염색을 하는 과정은 다소 차이가 있다. 대표적인 차이점으로는 종이는 천에 비해 물에 약하기 때문에 염색이 어렵고 염색이 고르지 않은 편이다. 따라서 한지염색을 잘 하기 위해서는 한지의 이러한 특성과 함께 해당 염료의 성질 등을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한지염색의 기법으로는 우선 선염법이 있다. 이 방법은 한지를 생산해내기 이전의 닥죽 상태에 염료를 넣어 원하는 색의 한지를 얻는 것이 핵심이다. 선염법의 순서는 우선 염료를 부은 다음, 닥죽을 넣고 저어서 물을 들인다. 이 과정에서는 어느 정도 열을 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다음 매염 처리를 하고 나서 종이를 뜨면 된다. 또 다른 기법은 후염법이다.
선염법은 종이를 뜨기 전에 미리 종이의 원료와 염료를 섞어 원하는 한지를 얻는 것인 반면 후염법은 일정한 과정을 거쳐 얻은 한지를 염료가 담겨져 있는 통에 넣거나 해당 염료를 붓을 이용하여 한지에 바르거나 혹은 뿌리는 것이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후염법은 한 차례 작업만으로 원하는 한지를 얻을 수가 없고 염색하고 건조하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을 해야 하기에 다소 번거로운 점이 없지 않다. 무엇보다 자신이 원하는 색이 나올 때까지 반복을 해야 하기에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공예는 예술성이나 미학적인 부분이 강조되고 있긴 하나 그 역사 내지 기원을 좀 더 올라가다 보면 분명 지금과 같은 기능을 한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모든 공예가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공예라 부르는 것들의 일차적인 기능은 생활 과정에 필요로 의해 제작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가지 기능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본래부터 공예품으로 제작된 것이 있을 수도 있고, 전혀 이 부분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상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 역시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공예는 예술성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지공예 역시 생활도구 내지 생활기물로서 사용을 하기 시작하였고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장식품 내지 공예품으로서의 성격이 강조되고 있다. 생활용품이었던 한지공예가 공예품으로 발전을 하는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은 결국 화려함과 장식미라 할 수 있는데 결국 이러한 것들이 한지공예 과정에 적극 활용되면서 생활도구가 아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한지공예가 될 수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런 차원에서 한지공예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색지와 문양(文樣)은 매우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한지공예 가운데 예술성이 뛰어난 것들 대부분은 다양한 문양이 사용되었다. 모란꽃문양을 이용한 이층장이나 패물을 넣을 수 있는 예단함 역시 그 기능에 맞는 문양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 차원에서 문양은 한지공예의 또 다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키워드가 아닐 수 없다.
무척 다양한 한지공예에 새겨진 모든 문양을 일반화시키긴 어렵지만 크게 분류하면 동물과 식물, 기하학문양, 문자로 구분을 할 수 있다. 그리고 특별히 십장생 문양이 한지공예에는 두드러지는데 이 부분을 동물류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따로 분류를 한다. 이 가운데 동물 문양은 무척 다양하여 이 안에서도 몇 가지로 구분을 하는 경우도 있다. 조류, 신령스러운 동물, 십이지, 상서로운 동물이 그것이다. 식물 역시 마찬가지인데 사군자, 과실, 화초가 여기에 해당된다. 비단 한지공예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문자문양도 한지공예 문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단청과 민화풍 역시 한지공예의 문양에서 종종 접하는 내용이다.
동물문양을 비롯해 한지공예에 새겨진 문양은 단순히 장식미나 예술성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해당 기물의 성격이나 기능을 고려하여 새겨 넣은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 문양은 각자 나름대로의 의미와 상징을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을 음미하면서 한지공예를 살펴보는 것도 또 다른 매력이라 할 수 있다. 한지공예에 묘사된 여러 문양을 모두 나열하긴 어렵지만 이들 문양을 새기는 방식 또한 나름대로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해당 한지공예의 기능적인 부분에서도 그렇고 어떤 기법으로 제작을 하느냐에 따라 문양을 새기는 방식이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한지공예의 문양 역시 우리나라 공예가 지닌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판단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한지공예는 사용되는 용도에 따라 크게 여성용과 남성용으로 구분을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분류에 해당되지 않은 것들을 일반 생활기물로 따로 분류를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분류는 연구자마다 혹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지금까지 전해오거나 혹은 제작되고 있는 한지공예들은 이와 같이 세 가지 분류로 나눠 정리되고 있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
한지공예를 이야기할 때 여성용 기물과 대조되는 개념인 남성용 기물은 말 그대로 남성들이 사용하는 물품을 말한다. 여성용 기물에 비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남성용 기물 역시 적지 않은데, 이 부분에 있어서의 핵심은 결국 남성들의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생활용구가 주를 이룬다는 점이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여러 한지공예 가운데 남성용 기물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붓통을 포함하여 벼루집, 서안, 연상, 의걸이장, 지장고비 및 빗접고비, 갓집 등이 있다.
남성용 기물에 속하는 한지공예 가운데 주목할 부분은 문방사우와 관련된 것이 많다는 점이다. 붓통은 대나무 등을 이용하여 만들긴 하지만 종이를 이용한 경우도 적지 않다. 벼루를 담아 놓는 벼룻집 또한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서안과 연상 역시 남성들이 사용하던 문방도구인데, 이 역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남성용 한지공예이다. 서안은 남성들이 책을 읽거나 글씨를 쓸 때 사용하는 도기인데 이는 크게 궤안(軌案)과 경상(經床)으로 나뉜다. 또 다른 문방도구인 연상은 벼루를 비롯해 먹과 붓 등을 보관하거나 넣어두는 것으로 남성들이 주로 사용하던 한지공예라 할 수 있다.
남성들이 주로 사용하는 갓을 보관하는 갓집은 이를 사용하지 않을 때 그 안에 넣어 보관하는 기능이 핵심이다. 한지를 여러 겹으로 만든 다음 두꺼운 종이를 덧대어 갓이 들어 갈 수 있도록 상자 형태로 만든 것이다. 갓집의 표면에는 옷칠을 하거나 기름을 바르기도 하여 태극 문양 등의 문양을 추가로 삽입하기도 한다.
또 다른 남성용 기물인 고비는 편지나 소소한 문서 등을 보관하는 문방용 도구이다. 특히 종이로 제작된 지장고비는 나무로 틀을 만든 다음 여러 겹의 한지를 덧대거나 한지를 오려 비교적 화려하게 장식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에 비해 빗접고비는 가느다란 나무를 이용하여 틀을 만든 다음 앞뒤 부분에 종이를 바른다. 그러고 나서 두꺼운 종이를 이용하여 틈이 보이도록 종이를 발라 놓아 그사이에 빗접을 꽂아놓을 수 있도록 제작된 것이다. 모든 지장고비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남성용 한지공예이긴 하나 문양이나 장식미를 보면 결코 여성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마지막에 소개할 의걸이장은 옷을 넣어 두는 장으로 주로 남성들이 즐겨 입었던 두루마기 등을 그 안에 걸어 두어 보관하는 한지공예이다. 전지 방식을 이용하여 표면에 다양한 문양을 새겨 넣음으로서 나름대로 품격을 지니도록 한 것이 우리네 의걸이장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한지공예의 역사는 비교적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뿐만 아니라 그 종류 또한 무척 다양하다. 그리고 한지공예의 기법 역시 개별 공예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이러한 사실 등을 고려해 보면 한지공예는 어느 한 가지만으로 정리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한지공예는 한지가 지니고 있는 특성상 아주 오래전의 것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한지공예 정도는 현시점에서 눈으로 확인이 가능하지만 좀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실물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보관이 어려운 관계로 개별 시대에 제작된 한지공예가 지금까지 남아 있기가 어려운 것이 핵심적인 이유라 생각된다.
얼마 전해오지 않은 것들과 오늘날까지 제작되고 있는 한지공예의 면면을 살펴보면 몇 가지 종류로 구분이 가능하다. 크게 여성을 중심으로 한 것과 남성이 사용한 것, 그리고 특별히 구분하기 어려운 일상적인 것들로 나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연구자 혹은 개인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관련 공예품을 종합해 보면 얼추 이런 식으로 유형화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유형 분류 가운데 비교적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여성들과 관련된 한지공예이다. 학계를 비롯해 한지공예를 연구하거나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를 ‘여성용 기물’이라 명명하여 따로 분류하고 있다. 여성용 기물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반짇고리와 예단함, 그리고 좌경, 버선장, 동고리, 패물상자, 장과 농, 과반, 버선장을 들 수 있다. 소반의 경우는 다소 모호한 부분이 없진 않지만 여성용 기물에 포함시키고 있다.
받짇고리는 바느질 과정에서 필요한 실을 비롯해, 바늘, 가위, 고무, 조각 천 등을 담아놓는 일종의 그릇을 말하는데 이 형태는 무척 다양하다. 둥근 것도 있고 네모꼴도 있는데 이를 만드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반짇고리의 표면에는 여러 개의 한지를 오려 별도로 문양을 새겨 넣는 것이 특징이다.
또 다른 여성 기물인 좌경은 전통사회의 거울의 일종으로 벽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 놓는 것이 특징이다. 여성들뿐만 아니라 남성들 역시 이 좌경을 사용하지만 여성들이 사용하는 빈도가 훨씬 많기 때문에 여성용 기물에 포함시켜 정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좌경에는 꽃을 포함하여 새와 곤충으로 문양을 넣어 좌경의 미를 더욱 화려하게 한다.
동고리는 버드나무로 제작한 것으로 비교적 작은 고리짝을 가리킨다. 형태에 따라 별도의 명칭이 있긴 하나 이러한 류의 기물을 동고리라 부른다. 촘촘하게 엮은 부위에 색이 입혀진 한지를 발라 마무리하는 것이 특징이다.
여성용 기물 가운데 비교적 흔히 접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장과 농이다. 이 두 기물은 옷이나 이불을 넣어 두는 것으로 주로 여성들이 머무는 안방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결혼을 할 때 신부가 신랑집에 농과 장을 가져가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여성들에게 있어 장과 농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생활용품이자 공예품인 셈이다. 나무로 제작된 장과 농도 있지만 온전히 한지로 제작된 것도 있으며, 나무 위에 한지를 붙여 마감한 것도 적지 않다.
여타의 분야가 그러하듯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한지공예 역시 여러 형태로의 분류가 가능하다. 기능적인 부분에서 이야기되는 것이 지호공예, 지승공예 등이고, 한지공예의 쓰이는 용도에 따른 분류는 남성용과 여성용기물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내용에 포함되지 않은 것들도 적지 않은데 한지공예를 연구하는 학자나 공예물을 직접 제작하는 사람들은 일반생활용구 내지 기물로 따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다.
남성용과 여성용 기물 이외에도 별도로 일반생활기물을 두는 이유는 결국 이에 해당하는 한지공예 역시 두 유형의 것에 비해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지공예 가운데 여기에 해당하는 것들은 일일이 나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은 것이 사실이다. 다만 모든 것들을 다 언급하긴 어렵고 전통성을 담보로 하는 것들을 중심으로 소개를 하면 종이옷, 찻상, 종이로 만든 우산(지우산), 그릇, 채독, 약장, 연, 부채, 자장궤 등이 있다. 여기에 속하는 것 가운데 약장은 지금은 보기 어렵지만 과거에는 한약방 등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온전히 나무로 제작된 것들이 주를 이루긴 하나 표면에 한지를 발라 마무리 한 것도 종종 접할 수 있어 여기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우리네 한지공예를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부채는 한지공예의 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비교적 부채를 사용한 시기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를 통해 한지공예의 시대적 흐름을 조망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려시대의 자료인 『고려도경(高麗圖經): 서긍이 남긴 책』에는 여러 부채를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부채는 반리선(盤螭扇), 쌍리선(雙螭扇), 수화선(繡花扇), 우선(羽扇)인데 이 가운데 어떤 것이 한지공예와 관련된 것인지를 명확하게 알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일반생활기물에 속한 종이옷은 말 그대로 종이를 이용해 만든 옷을 말한다. 계성제지박물관에는 지승기법으로 만든 조선시대의 종이옷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 옷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군사들이 입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견해이다.
종이로 제작된 종이우산(지우산)이다. 비와 종이가 서로 상극적인 부분이 있음에도 종이를 이용하여 우산을 만들었다는 부분은 분명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종이에 기름을 먹이면 충분히 비를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네 한지공예가 일상생활에서 다양하게 활용된 사실을 이 우산이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한지공예는 한지라는 재료만으로 제작을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나무와 함께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채독이다. 채독의 핵심이 되는 재료는 싸리나무 혹은 오리나무인데 이 나무를 이용하여 독 모양을 만들어 종이를 바른다. 채독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항아리와 유사한 것으로 산간지대에서는 이 독에 고구마와 감자를 넣어 보관하였다. 한지공예의 한 분류인 일반생활기물은 여성용이나 남성용 기물 못지않게 무척 다양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통 한지공예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척 매력적이고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지공예가 한국을 대표하는 공예품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하나는 조형미를 비롯해 예술적인 부분에서 한국의 색을 잘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다른 하나는 한지공예의 핵심 재료가 우리나라에서만 생산되는 한지(韓紙)로 제작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자랑이자 한지공예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한지는 그 역사를 정확하게 가늠하긴 어렵다.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한지와 관련된 여러 보물이나 국보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정할 순 있으나 명확하게 단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발달된 목판인쇄물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사실과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 등 한지와 관련된 유물들은 한지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내용이다.
한지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종이의 기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의 채륜이라는 인물에 의해 만들어진 종이는 다양한 형태로 발전을 한다. 일반적으로 종이의 역사와 관련해서는 기원전 3-4세기 설이니 7세기 설이 있지만 어찌 되었든 중국에서 시작된 종이가 어느 시점이 되면서 우리나라로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불교이다. 불교가 유입되면서 불교의 경전 등이 함께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이 자연스레 종이라는 것을 접하게 되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 맥락에서 불교가 우리나라에 유입된 삼국시대에 오면서 지금과 같은 종이가 서서히 우리네 삶 깊숙이 스며들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 무렵 우리나라에 유입된 종이는 오늘날 한지공예와 관련된 한지가 아니었다. 종이가 유입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나라만의 종이를 생산해낼 수 있었는데, 특히 우리나라의 한지는 닥나무를 이용해 제작하였다. 고려시대 중국에서 배를 타고 한국에 와서 여러 곳을 견학한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는 책을 통해 한국에서 생산되는 한지가 매우 뛰어나다고 묘사하였다. 그리고 고려시기에는 왕의 명령으로 한지를 제작하는 닥나무를 적극적으로 심으라고 권장을 하였는데 이러한 내용을 입각해 보면 적어도 고려시대 이전부터 우리나라에서 한지를 생산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조선시대에 오면서 한지는 보다 대량으로 생산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종이를 생산하는 조지소를 운영하여 한지를 생산하고 원활하게 보급하는데 앞장섰다. 그리고 사찰 등에서는 한지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한지는 제작기술은 물론이거니와 재질적인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이런 이유로 조선시대를 한지 제작 기술이 완성된 시기로 평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우리나라 고유의 종이인 한지는 우리가 흔히 ‘양지’라는 종이가 등장하면서 서서히 외면을 받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양지에 비해 대량으로 생산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한지가 지닌 우수성과 고유성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지만 이것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함께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또 다른 이유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한지가 지닌 매력에 사료되어 현재까지도 그 맥이 이어져 오고 있다. 특히 한지의 매력을 전 세계인들이 느끼고 있어 앞으로도 한지는 한국을 대표하는 키워드로 오래오래 자리매김할 것이 분명하다.
종이와 천연직물에 그림과 글씨를 쓰면 습기나 충해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보완하고자 한 것이 배첩지만 작품을 보다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것 역시 배첩이다. 종이나 천으로 작품이 있을 때보다 족자, 병풍, 첩, 서적 등으로 형식을 갖춘다면 보기에도 좋고 보존에도 유리하다. 종이 등을 작품 뒷면에 붙이고 일정한 형태를 만들어 꾸미는 일을 하는 배첩의 기술을 가진 장인을 배첩장이라고 한다.
배접장은 새로운 작품을 배첩하는 일도 하지만 오래된 서화의 복원을 하고 새로운 배첩으로 보존을 하는 것도 맡는다. 중국에서 장황이라는 말로 한나라 때부터 배첩을 하였으며 우리나라는 유물들로 보아 삼국시대에 배첩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배첩장이라는 단어가 승정원일기에 등장한다. 도화서 소속으로 배첩 업무를 하던 사람을 배첩장이라 칭했다. 배첩이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일제강점기에 표구나 배접이라는 말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배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종이와 비단 그리고 풀이다. 한지를 이용한 배첩은 수백 년의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 보존된다. 한지는 부드러우면서 질기고 뒤틀림이 없어 배첩에 제격이다. 또한 나중에 배첩한 것을 다시 뜯어내고 보수할 때도 작품에 손상을 주지 않으면서 완전히 분리된다. 종이의 두께나 질은 배첩장이 판단하고 써야 좋은 배첩이 된다. 비단은 궁중과 민가에서 쓰이는 색과 비단이 다르며 작품과 어울리는 색을 골라 써야 작품의 예술성을 돋보이게 할 수 있다. 배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풀이다. 풀은 배첩장마다 만드는 재료나 종료 방법이 다르다.
밀가루에 있는 단백질은 작품을 훼손할 수 있으므로 얼마나 순수하고 깨끗한 풀을 만들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변경환 전주배첩장은 밀가루와 물을 항아리에 담이 섞어 열흘간 가라앉힌 후 물을 따라 버린다. 다시 맑은 물을 부어 가라앉히는 일을 3년 이상 하면 쫀득한 반죽 같은 덩어리만 남는다. 말려 가루로 만들어 필요할 때마다 풀로 쑤어 사용한다. 이 풀에는 미생물의 먹이가 없어 곰팡이나 세균이 자라지 않는다. 또한 물만 뿌리면 녹아 배첩된 한지가 쉽게 분리되는 장점이 있다. 풀도 작품에 사용되는 재료에 따라 농도나 사용법이 다르다.
작품을 복원‧수리하는 수복 작업은 배첩장의 솜씨에 따라 작품이 달라질 수 있는 조심스러운 일이다. 조사와 분석을 기본으로 해체‧세척을 한 후 배접지를 분리한다. 1차로 배접해서 말린다. 족자, 두루마리, 첩, 병풍과 같은 표장을 마련해 한지로 배접한다. 작품을 재단하고 배접하며 같이 붙일 비단도 골라 재단하여 배접한다.
전주는 한지의 고장으로 전통을 고수하며 생산되는 한지가 있을 뿐 아니라 태조의 어진이 있는 경기전이 있어 배접장이 꾸준하게 활동하던 도시이기도 하다. 변경환 전주배첩장은 전주 다가산방의 김남도의 제자 서재영이 스승이다. 김남도는 일제강점기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서울에서 배첩을 하기 위해 전주까지 왔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김남도에게서 서재영은 전통배첩기술을 배웠으며 그것이 지금의 변경환 전주배접첩장에게 이어졌다. 전주배첩장만의 작품을 보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문화재 복원에도 참여하고 있다. 제대로 된 배첩은 작품을 돋보이게 하고 살리기도 하며 긴 세월을 이길 힘을 주는 일이다.
우리의 종이 한지는 가볍고 부드러울 뿐 아니라 강하고 질기다. 그런 한지의 장점으로 다양한 한지공예가 발달했다. 한지에 예쁜 색을 물들여 규방용 다양한 소품을 만들고 장식하거나 만들어져 있는 기물에 장식하는 것을 색지공예라고 하며 그 기술을 가진 장인을 색지장이라 한다. 규방용 소품을 만들 때는 한지(순지)를 민어부레와 아교를 섞어 합해 쓰거나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나뭇가지 대나무 등으로 골격(틀)을 만들었다.
지금은 시판용 두꺼운 종이를 이용해 만들기도 한다. 한지의 방향을 가로와 세로를 교차하며 한 장씩 40 여장을 붙이고 물수건으로 풀을 밀어내면서 합지를 만든다. 타솔로 도침해 합지를 얇고 단단하게 붙도록 한다. 준비된 합지에 골격을 재단하면 1년간 물을 갈아 부어 가며 삭힌 찹쌀을 이용해 찹쌀풀을 만들어 준비한다. 풀을 발라 골격을 한 조각씩 붙이고 말리기를 반복하는데 조각과 조각이 만나는 부분은 띠 모양의 한지에 풀을 충분히 발라 붙이며 모양을 잡아준다.
골격의 틀이 완성되면 풀을 여러 번 겹쳐 발라 건조한다. 색지를 붙이기 전 초배지를 발라 다음에 붙일 색지가 선명하게 잘 보이게 하고 연결부분과 골격이 단단하게 유지되도록 한다. 풀칠을 해 종이 안에 공기가 차지 않도록 해야 색지를 매끈하게 붙일 수 있다. 색지를 골격에 맞춰 재단하고 붙이는데 어울리는 색한지를 골라 연한 색부터 짙은 색 순서로 붙여간다.
풀을 발라 코팅한 후 사용할 문양을 종이에 그리고 예리한 칼로 오려낸다. 모양이 뒤틀리거나 달라지지 않도록 오랜 시간과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배접을 위해 두세 겹 붙인다. 원하는 색을 오려낸 문양에 배치해 보고 문양 뒤쪽에 붙인다. 완성된 문양을 골격에 맞춰 붙이고 묽은 풀을 두세 번 발라 고정한다. 그 뒤에 옻칠이나 들기름을 발라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한다.
아직도 모든 한지가 좋고 예쁜 색의 한지를 보면 설렌다는 전북특별자치도 무형유산 김혜미자 색지장은 색지공예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색의 조화로움이라고 한다. 고도의 집중력으로 문양을 오릴 수 있는 솜씨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한지를 사랑하는 마음과 관찰력이 있어야 자연스러운 문양을 그리고 색이 잘 어울릴 수 있게 색지를 붙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조선시대 중후기 왕가에서 사용된 색실첩이나 색실함과 그동안 기록으로만 있던 유물들도 재현했다.
하지만 규방공예품을 보관하는 지함이나 지상을 꾸민 색지공예 등을 재현하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현대 생활에도 깊숙이 들어오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색지공예를 일반인들에게도 알리기 위해 교육을 하고 있다. 색지공예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여든이 넘은 고령에도 찾아가 전수하고 있다. 최근에는 화학염료로 염색한 색지들이 있지만 김혜미자 색지장은 자연에서 얻은 천연염색제로 우리의 한지에 염색해 사용한다. 색지공예는 종이를 만지는 일이지만 종이를 한 장씩 붙이면서 종이는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종이로만 꾸몄지만 화려하면서도 품격 있고 소박한 모습의 색지공예를 이어가기 위한 체계적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