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다리축제는 한국의 역사적 전통과 현대적 가치를 녹여낸 문화관광 축제로서 국내 유일의 다리 문화축제이다. 영도다리축제는 1993년 처음 개최되었으며, 이후 매년 특색 있고 다양한 관광, 문화, 체육 행사를 편성하고 있다. 영도다리축제는 제1회부터 16회까지는 매년 10월 중 1~2일간 개최되다가 제17회부터 제25회까지는 9월로 옮겨 3일씩 진행하였다. 2018년 제26회부터 다시 10월로 개최시기를 옮겨 3일간 진행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영도구가 주최하고, 영도문화원이 주관하며 영도대교 및 봉래동 물양장 일원에서 개최된다.
영도대교는 1932년 3월에 착공하여 1934년 11월 23일에 개통된 길이 214.7m, 폭 18.3m 규모의 우리나라 최초의 연륙교로,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일엽식 도개교이다. 본래 이름은 부산대교이다. 부산에서 가장 큰 다리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영도다리라고 해야 금방 알아듣는다. 1982년 2월에 부산광역시 영도구 봉래1동과 대교동을 연결하는 길이 841m의 부산대교가 새롭게 준공되면서 기존의 부산대교는 영도대교로 부르게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영도대교는 헤어진 가족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 모여든 피란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만남의 다리’였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생활고에 시달린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운명을 달리한 곳이기도 하다. 2013년 11월 도개 기능을 복원하여 새롭게 단장한 영도대교는 하루에 1번 오후 2시 정각에 15분간 도개를 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는 ‘추억속의 다리, 희망의 다리’로 부산의 새로운 문화 아이콘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영도대교는 2006년 11월 한국 근현대사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평가받아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었다.
영도다리축제의 주요 행사로는 물양장 메인무대에서 펼쳐지는 개막 행사와 프랑스의 혼성 4인조(컨템포로리 서커스)를 비롯한 5개의 해외공연팀과 정현진(매직쇼)를 비롯한 7개의 국내공연팀, 그리고 오장욱(코미디, 서커스, 저글링)을 비롯한 6개의 부산지역공연팀이 참가하는 국제거리예술공연, 영도에 산재한 다양한 이야기를 소재로 골목 전체를 특화된 놀이공간으로 창출한 영도스토리골목퍼레이드가 있다. 부대행사로는 영도물양장 축제장을 배경으로 한 ‘물양장아트경관조명’, ‘물양장노천가페&아트마켓’, ‘미디어파사드’가 있으며, 영도구와 관련기간의 홍보와 체험을 위한 ‘참여․체험부스’, 영도구의 대표적인 향우회인 강원, 호남, 제주, 남해 등이 참여하는 ‘팔도 푸드페스티벌’, 개똥쑥막걸리, 이모도너츠, 조내기고구마 등 영도의 특산물을 모은 ‘영도특산물’, 부산 청년들의 푸드 트럭이 모인 ‘청년푸드트럭’, 순수하게 우리 동네 노래 대장을 뽑는 ‘영도歌왕’, 7080년대의 영도다리를 추억할 수 있는 ‘영도 추억관’, 영도다리 도개에 맞춰 펼쳐지는 ‘도개기념 해상퍼포먼스’ 등이 있다.
핫플레이스관광으로는 야간투어를 포함하여 총 6회에 걸쳐 부산항을 고스란히 감상할 수 있는 ‘산복도로여행’, 예술공방과 흰여울길 벽화 골목, 바다조망전망대, 영화 ‘변호인’의 촬영지 등을 감상할 수 있는 ‘흰여물문화마을’, 산업역사를 예술로 재구성하여 영도의 대표적인 핫플레이스로 변신한 ‘깡깡이예술마을’, 배를 타고 영도를 체험할 수 있는 ‘도선체험(바다버스)’과 ‘영도한바퀴 선상투어’, 해양대학교와 함께하는 협력프로그램인 ‘해상레포츠체험’이 있다. 연계행사로는 전통시장을 활성화하고자 대통전수방 M-마켓과 영도다리축제를 연계한 ‘대통전수방 M-마켓’, 걷기 행사와 나눔의 문화를 실천하는 ‘영도다리 만남과 나눔의 시민걷기&보건복지부와 함께하는 나눔행사’가 있다.
10월의 부산은 활기가 넘친다. 부산국제영화제, 자갈치축제, 부산불꽃축제, 고등어 축제까지 연이어 잔치분위기다. 부산자갈치축제는 1992년 남포동 상인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축제로, 처음에는 자갈치수산물축제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1995년 4회까지 자갈치수산물축제로 진행되다가 1996년 전국 5대 축제로 선정되면서 이름을 부산자갈치문화관광축제로 바꾸어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의 자갈치시장이 있는 지역은 전통시대에는 남빈(南濱)이라 하였는데 이는 남쪽의 물가라는 뜻이다. 자갈치시장의 ‘자갈’이라는 이름은 주먹만한 자갈들이 바닷가에 있어 붙여진 것이고, ‘치’는 어시장에서 팔리던 꽁치, 갈치, 멸치 등의 물고기를 의미한다. 자갈치시장 지역은 일제강점기에 매립과 매축 공사가 이루어져 남항이 만들어졌다. 일제는 남항을 부산의 어업기지로 만들고, 수산물 도매시장을 세워 경상남도지역에서 생산되는 수산물을 통제하고 장악하였다. 남항에는 부산수산주식회가가 운영하는 어시장과 부산어업조합이 있었다. 부산어업조합은 한국인과 일본이 함께 세운 조합이었다.
남항이 만들어지면서 남빈은 포구·항구를 의미하는 남포라 불렀고, 일제식민지시기까지는 남빈정으로 불렀다. 현재의 남포동이라는 이름은 광복 후에 붙여진 이름이다. 1935년 공설시장으로 중앙도매시장을 개설하고 수산물 유통과 집산을 통제하였다. 광복과 6.25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부산으로 몰리자 시장 주변에는 생계를 위한 노점상들이 생겼다. 자연스럽게 해안가 어패류처리장을 중심으로 노점상들로 형성된 시장이 만들어졌다. 부산시에서는 1970년 노점상들을 정비하여 3층 건물을 짓고 자갈치시장을 개설하였다. 1985년 자갈치시장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다음해 현대식 건물로 개축하였고, 2006년 지금과 같은 현대식 건물로 변화하였다.
부산수산물거리는 남항을 주심으로 형성된 거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수산물거리는 자갈치시장뿐 아니라 충무동 새벽시장과 해안시장도 포함한다. 우리나라 수산물과 건어물의 30~50%가 부산수산물거리에서 공급된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부산자갈치관광축제가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남포동 상인들을 중심으로 ‘자갈치수산물축제’로 시작하였고 지금은 부산자갈치문화관광축제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축제가 계속되고 있다. 먹거리인 해양수산물을 바탕으로 다양한 콘텐츠와 연계하여 프로그램이 진행되며, 부산시민 뿐 아니라 전국의 관광객과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축제다. 시기적으로 10월에 개최되어 부산의 또 다른 축제와 연속성을 가지면서 시너지 효과를 보이고 있다.
좌수영 어방놀이(左水營 漁坊놀이)는 부산시 남구 수영동에서 전승되어온 민속놀이로, 어업의 작업과정과 노동요를 놀이화한 것이다. 1978년 국가무형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되어 보존 및 전승되고 있다.
수영지방은 조선시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의 본영이 있던 곳이며,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으로 멸치·전어·농어 등의 어류, 전복·고동·홍합 등의 패류, 파래·김 등의 해조류 등 어자원이 풍부해서 부산지역에서 가장 먼저 어업이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어업협동기구인 ‘어방’이 형성되었으며, 어방 사람들이 힘을 합쳐 물고기를 잡았다. 이때 일손을 맞춰 능률을 올리고 노동의 고단함을 덜기 위한 노래인 어로요(漁撈謠)를 불렀다. 좌수영 어방놀이는 이러한 어업의 작업과정과 노동할 때 부르던 노래를 놀이화한 것으로 새해를 맞이해 바다로 나가기 전, 굿을 하고 놀이를 벌여 고기를 많이 잡아 만선(滿船)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하였다.
좌수영 어방놀이는 어부들이 그물로 물고기를 잡으며 여러 가지 노래를 부르는 부분이 중요한데, 앞소리, 뒷소리, 맞는소리 등을 맞추며 부른다.
어방놀이는 네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그물을 만들기 위해 짚이나 칡으로 줄을 꼬며 부르는 <내왕소리>, 둘째 그물을 친 뒤 이것을 끌어 올릴 때 부르는 <사리소리>, 셋째 잡은 물고기를 그물에서 풀어 내리고 아낙네들이 바구니에 담아 나를 때 부르는 <가래소리>, 넷째 고기를 많이 잡은 어부들이 풍어를 자축하며 부르는 <칭칭소리>이다. 특히 칭칭소리는 단순한 노래가 아닌 춤을 곁들인 풍어놀이로써 올해의 풍어에 감사하고 다음 해의 풍어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선주네요 선주네요 우리 어부 잘 봐주소
선두에다 봉기 꽂아 천년만년 복 빌겠소
노자 노자 젊어 노자 늙어지면 못 노나니
노랫가락은 영남지방에서 흔히 부르는 ‘쾌지나칭칭나네’이며 여기에 가사 일부만 바뀐 것이다. 꽹과리, 장구, 징, 북 등의 가락에 맞추어 춤추고 노래 부른다.
좌수영 어방놀이는 어업의 작업과정을 놀이에 녹여내며 어부들과 여인네들이 노동요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협동하는 축제로 새해의 풍어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부산광역시 중구 용두산 공원 동쪽 기슭에는 17세기부터 초량왜관(倭館)이 설치되어 있었다. 왜관은 일본 상인들이 조선인들과 교역을 하는 거주지다. 초량왜관은 1876년 일본이 힘으로 조선의 부산포를 강제 개항시키면서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로 성격이 바뀌었다. 조금 일찍 서구의 근대를 받아들였을 뿐인 일본인들이 자신들조차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근대를 조선에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초량왜관은 10만 평 규모로 확장되어, 일본이 전권을 행사하는 전관거류지가 되었다. 근대도시 부산의 원도심은 이로부터 차츰 모습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부산은 일본이 중요시한 항구였으므로 1902년부터 1908년까지 이른바 ‘북빈매축사업’이 진행되었다. 현재 중구 중앙동 일대 바닷가를 매립하고 토목공사를 벌여 시가지를 정비하는 사업이었다. 중앙동 북쪽 영주동 쪽으로 시가지를 넓히는 공사는 1909년에서 1913년까지 진행되었다. 해발 50m 정도였던 영성산이 이때 완전히 사라졌다. 항만을 만드는 공사는 1911~1918년 1차 공사를, 1919~1928년 2차 공사를 진행해 부산항이 건설되었다. 일련의 공사를 통해, 경부선과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관부연락선을 연계시킬 수 있게 됐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관청들은 용두산 일대에 자리 잡았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용두산의 정기를 끊기 위해 용의 눈에 해당하는 자리에 쇠말뚝을 박고, 용 허리를 가르는 도로를 냈으며, 용의 꼬리 격인 용미산을 아예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부산부청을 세웠다고 한다. 부산부청이 있던 자리는 현재 롯데백화점 광복점이 들어서 있다. 중구 중앙동과 남포동 건너편은 원래 절영도라 불리던 섬이었다. 사람은 별로 살지 않고 군마를 기르던 곳이었는데,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이 빨리 달린다 하여 절영도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절영도가 바로 현재의 영도다. 영도 쪽으로는 우선 근대식 조선소들이 들어섰다. 1887년 일본인이 세운 목선 조선소를 시작으로, 영도구 대평로 일대에 수많은 조선소와 선박 수리점, 부품점이 생겨났다. 1937년에는 철강으로 큰 배를 건조하는 조선중공업(훗날 한진중공업)이 들어섰다.
남포동 맞은편 영도에는 일명 ‘깡깡이길’이라는 코스가 있다. 고장 난 선박을 수리하기 위해 ‘깡깡이질’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거리다. ‘깡깡이질’이란 배를 수리하기 전에 배에 들러붙은 패각류를 떼어내고, 부식된 도료를 벗겨내는 일을 가리킨다. 망치를 들고 선체를 두드리며 작업을 하는 동안 ‘깡깡’ 하는 소음이 쉴 새 없이 나기 때문에 ‘깡깡이질’이라 부른다. 주로 가난한 부녀자들이 이 작업을 했는데, 작업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도 ‘깡깡’ 하는 환청이 계속 들렸다고 한다.
1934년 중앙동과 영도를 잇는 다리인 영도대교가 개통되었다. 초기에는 부산대교라고 불린 이 다리는 배가 들어올 때면 들어 올려지는, 최초의 도개교였다. 중앙동 쪽 다리 구간이 서서히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 장관이어서 수많은 구경꾼 인파가 몰려들곤 했다. 하루 2~7회 들어 올려지던 다리 위로는 전차도 다녔다. 영도다리는 한국전쟁 시기 피란민들이 혹시 헤어질 경우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로도 유명하다. 대중가요 <굳세어라 금순아>의 가사에도 영도다리가 등장한다. 영도다리 주변에는 애타게 상봉을 기다리는 이산가족에게 점을 쳐주는 점집이 70여 곳이나 들어서기도 했다. 영도다리는 1966년 교통량이 늘어나 도개를 중단했다. 2013년부터 하루 1차례 오후 2시에 시범적으로 도개 작업이 진행된다.
1925년 경상남도 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해온다. 부산은 개항 이후 일본 상품이 들어오는 가장 중요한 항구였고, 거주 일본인이 급격하게 늘어난 도시였다. 1925년 무렵엔 부산 거주 일본인이 4만 명을 넘어섰다. 진주 사람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청 이전이 강행되었다. 당시 지은 도청 건물이 서구 부민동에 남아 있다. 등록문화재 제41호인 이 건물은 해방 후 한국전쟁 시기의 용도가 더욱 강조되어 ‘부산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등록되어 있다. 한국전쟁 때 부산은 1023일간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다. 당시 대통령도 부산에 내려와 예전 경상남도 도시사가 관사로 쓰던 집에서 살았다.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현 임시수도 기념관)는 ‘부산 임시수도 정부청사’(현 동아대하교 박물관) 인근에 있는데, 일대 거리 전체가 ‘대한민국 임시수도 기념거리’로 지정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내내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였던 부산은 해방 후 급증하는 유입 인구로 몸살을 앓게 된다. 해방 직후엔 배를 타고 돌아온 귀국 동포 가운데 약 15만 명이 부산에 터를 잡았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50만 명이 피란해 옴으로써 극심한 주택난과 도시기반 시설 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실업자 또한 넘쳐났다. 유입 인구는 서구, 중구, 동구, 영도구 등의 산 중턱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부산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보수동, 초량동, 영주동, 수정동 산길을 따라 줄줄이 판잣집이 들어섰다. 1960년대 중반 이들 동네를 연결하는 산복도로가 개설됐다. 말 그대로 산(山)의 배(腹)를 따라 낸 길이었다. 서구 아미동의 경우 예전 일본인들의 공동묘지 납골당 위에도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산복도로 주민들은 산 아래 도심으로 내려가기 위해 계단 길을 이용해야 했다. 168계단, 200계단, 500계단 등 여러 계단 아래로 내려가 일거리를 찾아야 했고, 먹을 물을 긷고 수백 개나 되는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땅 부산에는 정주민과 이주민이 갈등하고 섞이며 만들어낸 근대의 궤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인구가 400만 명에 이르는 대한민국 제2의 대도시 부산의 근대 자취를 요약하는 일은 사실 불가능하다. 산복도로 마을들로 오르는 길만 해도 수십 곳이다. 용두산에서, 영도에서, 산복도로에서 부산을 삶터로 삼은 시민들이 겪어낸 고통과 좌절, 다시 되찾은 희망과 용기는 직접 돌아보지 않고는 실감할 수 없다.
부산관광공사는 2015년부터 ‘부산 원도심 스토리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원도심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있는 길을 계속 개발 중이다. 2019년 운영한 스토리투어의 경우 6개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영도다리 건너 깡깡이길을 걷다, 용두산 올라 부산포를 바라보다, 이바구길 걷다, 국제시장 기웃거리다, 흰여울마을 만나다, 공동어시장 남항을 품다, 이렇게 6개 코스다. 각 길을 따라 가면 개항 이후 부산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부산의 근대는 이들 코스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근대가 부산에 무엇을 가져다주었고, 던져준 문제점과 숙제는 무엇이며, 어디서부터 미래의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는 부산에 가서 생각해볼 일이다.
신을 신지 않고 맨발로 도서관에 들어가서 책을 보고, 바닥에 누워 만화책을 볼 수 있다면 어떨까? 조용하고 무겁고 지루한 도서관이라는 편견을 단박에 깰 수 있을 것만 같다.
20년 전 만해도 한국의 도서관은 딱딱하고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최근 마을도서관, 지역도서관 등 다양한 도서관의 갈래들이 생기면서 십진분류법을 혁파한 파주 지혜의 숲 도서관, 천장까지 책으로 가득한 서울 시청 도서관, 뫼비우스의 띠를 형상화해 끝이 마주보게 만든 도서관 등 기발하고 재미난 도서관의 새로운 모습이 등장하고 있다.
부산 맨발동무도서관은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에 위치한 '사립' 공공 도서관으로 기존 도서관의 틀을 깬 편안한 도서관이다. 동네 주민이 삼삼오오 모여 마을도서관을 만들자는 논의가 시작된 것이 지난 2005년부터였다. 준비과정을 거쳐 2005년 7월에 맨발동무 어린이도서관으로 개관했다. 이 재미난 이름은 시인 권태응의 시 '맨발 동무'에서 따왔다. 누구나 맨발로 찾아와도 편한 곳이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지었다.
맨발동무도서관은 만화책만 모아둔 ‘만화방’도 있고, 그림동화책으로만 구성된 ‘재미난 다방’, 숨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나무집도 있다. 자료실의 구성이 공립도서관과 사뭇 다르다. 독립된 방을 세 개로 나눠 만든 이곳은 도서관이라기보다 책과 재밌게 놀 수 있는 놀이방 같다. 그래서 공간의 이름도 딱딱하지 않다. 사무공간이자 방문객을 접대하는 공간의 이름은 모심방, 회의공간이자 자료 정리와 보수 작업이 이뤄지는 공간은 살림방, 책을 읽어주거나 영화를 볼 수 있는 공간은 이야기 방이다.
맨발동무도서관에서 하는 프로그램 들 중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은 책 읽기 시간이다. 개관이래 하루도 빠짐없이 하고 있는 책읽어주는 시간은 맨발동무도서관에서 가장 소중한 활동으로 꼽히고 있다. 김부련 맨발동무도서관 관장은 "모두가 평등하고 함께하며 친구가 될 수 있는 도서관을 지향한다. 도서관에서는 아주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는데 그중 매일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일, 문 열고 하루도 빠짐없이 하고 있는 오후 4시 책 읽기 시간은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맨발동무도서관은 마을을 유기적인 공동체로 묶는 구심점이다. 도서관을 독서 공간으로 한정하지 않고, 마을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에 귀 기울이는 작업을 토대로 요구를 펼쳐나갈 수 있는 플랫폼으로 확장됐다. 김부련 관장은 "도서관에서 하고 있는 것 들 중 10년째 하고 있는 장터인 마을 장날은 필요와 요구가 있는 사람이 모이고, 모일 수 있는 공간 마련을 도서관이 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도서관의 장은 지역 청소년의 참여도 이끌었다. 10대 청소년들이 모여 만든 ‘다함께 먹는 세상’이라는 뜻의 다먹세 동아리는 토요일마다 도서관에 모여 밥을 해먹고 장터 때 모인 돈을 모아서 여행을 떠나고 있다. 이외에도 독서모임, 옛이야기 모임, 마을사랑방인 평상 너머, 라면 극장 등의 다양한 주민 참여가 도서관을 북적이게 만든다. 맨발동무 도서관은 2018년 12월 기준 전체 회원 수 11,718명, 대출자수는 3779명, 장서 수는 2만 8천여 권을 구비하고 있다.
동네 사랑방 같은 도서관, 하교 후 아이들의 만남의 장소, 퇴근 후 직장인의 수다 공간, 엄마들의 육아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참깨방앗간 역할을 지역 마을 도서관이 톡톡히 하고 있다. 맨발동무도서관은 월, 화, 공휴일에 쉬고, 수목금토일에 문을 연다. 10시 개관해 금요일은 오후 9시까지, 수목은 오후 6시, 주말은 오후 5시까지 문을 연다.
1927년생 김문숙 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이사장은 93세다. 일본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구제 인권 운동을 1991년부터 28년간 해온 그는 사재 1억 원을 털어 2004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한 ‘민족과 여성 역사관’을 세웠다. 부산시 수영구 연수로 397번지에 위치한 민족과 여성 역사관(이하 ‘역사관’)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과 상처가 낱낱이 기록된 아카이브 장소다. 1990년 이래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약칭 부산정대협)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함께 투쟁한 역사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김 이사장은 “위안부의 존재를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고 충격을 받아 1991년 신문 광고를 내서 전화로 위안부 피해자를 모집했다. 그때 250명을 찾았다. 이들 중 현재까지 살아계신 분은 이제 21명뿐이다”고 말했다.
1992년부터 6년간 26차례, 23번의 재판 끝에 1998년 일본 야마구치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 지부는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30만엔 (한화 약 300만원)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김문숙 이사장은 위안부 피해를 알리는 데 중요한 것은 교육이라는 생각에 2004년 사비 1억 원을 들여 ‘민족과 여성 역사관’을 개관했다.
그의 일대기는 2018년에 ‘허스토리’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화가 개봉된 이후 관심을 갖고 역사관을 찾는 방문객 수가 늘었다고 한다. 역사관 해설사는 “역사관을 유럽이나 일본에서도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영화 개봉 후에는 부산의 젊은 학생들이 관심을 갖고 방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시관은 크게 제 1전시관, 제 2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1전시관은 일본군 위안소 당시 증거자료와 부산의 강제위안부 할머니들과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투쟁해온 7년 동안의 시모노세키 재판에 대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2전시관에는 매년 테마에 맞춰 새로운 자료가 보충돼 전시된다. 현재 여성 독립운동가 소개와 활동 자료들이 방문객을 기다린다. 이외에도 강제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미술 심리치료를 통해 그린 작품이 있다.
역사관 해설사는 “누군가는 잊고 있을 때, 누군가는 차곡차곡 모아온 아픈 역사의 한 자락을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과 함께 차근차근 배워갈 수 있는 곳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이곳을 시작으로 조국의 아픔을 새기고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고통을 멈추는데 우리의 역사관은 생명이 다할 때까지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역사관의 전시자료는 1931년부터 1949년 일제 강점기 때 조선 여성이 당해야만 했던 뼈아픈 현실과 고통을 모아둔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한다. 특히 일본군 위안소 당시 증거자료와 일본을 상대로 진행했던 재판에 관한 세세한 자료가 역사관을 찾은 이들의 마음을 울린다. 잔혹하고 뼈아픈 역사 속에서 엄연히 실재했던 그녀들의 이야기를 보존해야만 하는 이유다.
김문숙 이사장이 사비를 털어 만든 이곳의 월세는 약 150여만 원. 부산시에서 사업비 관련 지원을 받지만 총 운영비를 감당하기 버겁다. 김문숙 이사장은 부산시나 공공기관에서 역사관의 중요성을 동의하고 운영을 맡아주기를 바란다.
“여러분은 그저 말로만 ‘위안부였다’라는 말을 듣지만 조선의 처녀들을 잡아가서 위안부로 만들었다. 우리가 생각해도 분하다 이런 정도가 아니다. 한 나라의 처녀들을 이유 없이 잡아가서 성노예로 만들었다. 성노예생활도 너무 처참하고 너무나 불쌍했다. 여러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을 준 위안부의 역사를 잊어서는 도저히 안 된다.”
도심 속에 새로운 공간들이 들어서고 있다. 낡은 건물을 부수고 새 건물을 짓던 도시개발은 옛 건물을 그대로 두면서 트렌디한 공간을 창출해 내는 도시재생으로 방향을 틀었다. 여기에 적용되는 옛 공간의 범위가 점점 넓어져 공장이나 창고였던 곳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핫플레이스’로 자리잡기도 한다.
부산 수영구 망미동에 F1963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숫자는 고려제강의 부산 공장의 창립연도, 알파벳 F는 Factory에서 따왔다. 고려제강은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와이어로프(쇠줄) 부문에서 세계적인 기술력을 보유하고, 40여 개국에 공장을 두고 있는 대기업이다. 45년 동안 산업용 와이어로프를 생산했던 옛 수영공장이 문을 닫자 기업은 2008년 6월 이후 방치됐던 부지와 건물을 새로운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었다. 이 공사에 부산시가 지원을 하긴 했지만 기업의 지원금이 훨씬 컸기 때문에 기업의 사회공헌으로 이루어진 시민을 위한 문화시설로 주목 받았다.
F1963의 대문을 열면 나오는 맹종죽 숲인 ‘소리길’은 바람에 댓잎 부딪히는 소리를 듣는 특별한 공간이다. 또 전시장과 공연장으로 동시에 활용이 가능한 실험적 공간인 ‘석천홀’과, 공연, 세미나가 열리고, 정기적으로 오페라, 영화, 실황공연 등이 상영되는 ‘F1963 스퀘어’에서는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공장의 폐수처리장은 대나무와 습지식물의 ‘생태정원’으로 개조되었고, 희귀식물, 유기농 채소 및 과실을 재배하는 ‘유리온실’도 있다. 완성된 제품을 출고하던 옛 공장의 뒷마당에 꾸민 ‘달빛정원’에서 꽃, 나무를 만나고, ‘F1963 브릿지’에서는 공간의 전경과 탁 트인 수영강변을 조망할 수도 있다.
고려제강은 처음에는 이곳에 세계적인 규모의 도서관을 지을까 고민했다고 한다. 이곳에 예술 서적 1만 권이 소장된 도서관이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논의 과정에서 전시장과 음악홀, 책방, 갤러리, 상업 문화시설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왔고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간 프랑스 리옹국립음향센터의 ‘사운드 아트’ 전시, ‘줄리안 오피 인 부산’ 전시, ‘금난새 베토벤 심포니 사이클’ 공연, ‘부산 리턴즈’ 전시 등 이름난 전시를 선보여 부산 시민에게 고급문화를 제공했다. 이곳은 2016부산비엔날레 전시장으로 활용되면서 17만 2000여 명이 다녀갔다. 덕분에 이곳은 부산에 오면 꼭 들러야 하는 관광명소로 부상하고 있다.
F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공간은 공장의 뼈대가 되는 철골 구조와 지난 세월의 흔적을 살려서 리모델링했다. 옛 공장의 모습과 이야기를 담은 채로 세련된 현대적인 시설을 더하고 편의시설까지 갖춰 재탄생한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공장을 지지한 벽돌기둥과 목재, 기름으로 얼룩덜룩한 바닥, 벗겨져 제 색깔을 잃은 페인트까지, 이곳이 한때 공장이었음을 보여주는 것들이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다.
주차장 옆 폐공장 건물의 한가운데에는 전시와 공연을 볼 수 있는 장소가 있는데, 천장이 뚫린 옛 건물 구조의 중정(中庭·건물 가운데 뜰)이 독특하게 느껴진다. 중정 계단 아래에는 공장을 문화공간으로 리노베이션 하는 과정에서 나온 돌더미가 작품인 양 전시되어 있다. 콘크리트가 덕지덕지 붙은 이 돌더미는 공장을 지으면서 기초공사에 사용했던 것들이다.
와이어 공장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린 커피 전문점 ‘테라로사’는 F1963의 상징적인 공간이다. 매장 안에는 공장 기계 등으로 만든 설치작품이 있고 바닥과 테이블, 조리대 역시 공장에서 나온 철판과 콘크리트를 재활용한 것이다. 높고 넓은 천장 아래 지붕 골조도 그대로 사용하는 등 공장 건물의 모습을 그대로 두고 공장 기물은 작품처럼 전시를 했다.
F1963의 공간 개조를 맡은 조병수 건축가는 2010년 김수근문화상을 수상한 실력자다. 심플하고 자연미 깃든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 공간을 맡아 하면서 ‘상자’를 떠올렸다고 한다. 비워진 상자 안에는 무엇이든 담을 수 있듯이 새로운 상자가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그대로 담아낼 수 있기를 바랐다고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F1963은 ‘2018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손몽주 작가의 와이어 설치작품을 상시 보고, 체코 전통 맥주를(프라하993)를 마신다. 아니면 전통 막걸리를 파는 한식점(복순도가)에 들를 수도 있다. 공간이 넓고 찾는 사람이 많아 취향별로 이 공간을 즐기 수 있는 코스 안내도 기사로 나오고 있다. 부산비엔날레 공간으로 쓰였던 예술 공간 갤러리와 카페가 있는 문화의 공간. 부산을 여행한다면 이곳에 한 번 들러 보자.
오래된 세월을 간직한 낡은 헌책을 뒤적이며 누군가의 삶의 흔적을 유추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헌책방은 추억의 보고이다. 손때 묻은 책장을 넘기다보면 누군가의 메모와 낙서들도 발견할 수 있고 오래된 책에서만 맡을 수 있는 시간의 냄새는 읽는 사람의 과거 어느 시점으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해주기도 한다.
레트로라는 말이 유행을 끄는 요즘, 다시금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는 곳 중에서 헌책방을 빼 놓을 수 없다. 어찌 보면 전국에서 몇 개 남지 않은 책방골목일 수도 있는 곳, 부산의 숨겨진 명소이며, 책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꼭 한번쯤은 찾아가보는 곳인 ‘보수동 책방골목’을 찾았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지하철로는 자갈치역에 하차하여 국제시장 출구로 나와 대청로 사거리에서 동서로 길게 이어져 있다. 다닥다닥 붙은 좁은 골목에는 오래된 책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책방사람들과 헌책들이 즐비하다.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번잡함과 다르게 책방골목의 시계는 느긋하고 여유롭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은 대표적인 피란지였다.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좁은 땅과 공간을 가득 메우고 서로 부대끼며 살았다. 사람들이 모인 곳엔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된다. 당시 부산의 국제시장은 온갖 물건이 사고 팔리는 곳이었고 자연스레 피란길에 가져온 물건들과 책들을 사고파는 일도 흔히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의 교과서나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영어책 같은 것들을 사고팔던 것이 점점 확장되어 지금의 헌책방 골목으로 발전했다.
한국전쟁 이후 부산으로 온 피란민들은 국제시장 일원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고 보수동 뒷산 노천에서 천막을 치고 수업을 하는 학교들이 많았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레 보수동 골목길은 학생들의 통학길이 되었다. 가난한 그 시절에 보수동은 자연스레 헌책들이 유통되기 좋은 요건을 갖추었던 셈이다. 새 학기에는 참고서며 책을 사려는 학생들로 책방골목이 북새통이었다. 책방을 뒤지다가 간혹 누군가의 값나가는 고서가 발견되는 일도 종종 있었기에 고서 수집상들과 희귀본을 모으는 수집가들에게 보수동 책방골목은 빼놓을 수 없는 단골코스였다. 보수동 책방골목의 전성기는 1960~1970년대라 한다. 당시에는 70여개의 책방이 있었다. 지금껏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반세기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古)서점과 대우서점 등은 책방골목의 산증인이다.
책방골목을 들어서기 전에 꼭 들려볼 곳으로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관이 있다. 문화관에는 책방 골목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총 8층으로 되어 있는 문화관에는 박물관과 북 카페 등이 있어서 책방골목을 찾는 이들이 책방골목의 역사를 이해하며 지친 걸음을 멈춰 잠시 쉬어갈 수 있다.
헌책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는 책방골목을 지나다보면 아슬아슬하게 높이 쌓인 책 탑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비좁은 책꽂이에 다 꽂을 수 없는 책들을 보다 많이 보유하고 공간을 최대로 활용하기 위한 책방 주인들의 오랜 노하우다.
책방 골목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고(古)서점은 보수동 책방골목에서도 1세대로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왔다. 아버지에 이어 지금은 막내아들이 책방을 지키고 있다. 고서와 인문서적을 주로 파는 고(古)서점의 또 다른 특징은 오래된 수집품들이 들어찬 회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로 마련된 회관은 오래된 가구, 도자기, 그림, 미술품, 민속용품 등 다양한 수집품이 들어찬 작은 박물관으로 세월을 담은 오래된 물건들을 향한 주인의 애정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2005년부터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축제를 열기도 한다. 오래된 책들을 전시하거나 도서무료교환 행사를 진행하기도 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행사와 같은 의미 있는 행사를 진행해서 시민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있으며 2014년에 부산시 우수축제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보수동 책방골목은 오랜 역사를 이어온 지역의 명소로 이름을 빛내고 있다.
대형 서점과 인터넷 서점이 생겨나면서 한때 동네 곳곳에 자리하던 소형 서점들이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비워진 그 자리를 대형 자본과 맞서는 개성과 전문성을 살린 동네책방들이 채워가고 있다. 특정 분야의 책만을 다루거나 책방 주인장의 취향이 묻어나는 책들로 가득한 책방, 혹은 책방이면서 문화 공간이 되는 다양한 형태의 동네책방들이 생겨났다.
1997년 부산에 문을 연 동네책방 ‘책과아이들’은 어린이전문서점이다. 200군데 넘게 있던 어린이책 전문서점이 이제는 20군데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 내 아이에게 읽히고 싶은 책들, 옆집 아이들과 함께 읽으면 더 재미있겠다 싶어 시작한 일이 부산에서 서점으로 이어졌고 20년을 훌쩍 넘겼다. 2만권이 넘는 책을 소장하고 있는 책과아이들은 이제 동네책방의 버팀목 같은 존재가 되었다. 서점, 도서관, 전시관 그리고 널찍한 앞마당이 있는 이곳은 오랫동안 부산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단순 책방이 아닌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아동문학을 지키고 독서를 즐거워하는 이들이 모이는 곳, 책으로 가득 찬 사랑방이다.
책과 함께 자라는 아이들이 신나게 모여 있을 것 같은 이름인 책과아이들 공간의 옆에는 마을 도서관 ‘구름빵’이 있다. 구름빵에서는 읽고 싶은 책을 뒹굴뒹굴 편하게 읽을 수 있다. 북 콘서트·축제·강연·연극 등이 진행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가면 동백나무 너른 그늘 아래 앉아 책을 볼 수 있다. 커다란 테라스로 이어져 있고 탁자와 소파, 그리고 피아노가 놓여 있어 작은 연주회가 열리기도 한다. 햇살 좋고 쾌청한 날 책을 읽고 있자면 바람이 슬그머니 다가와 책장을 넘겨줄 것만 같은 자유롭고 편안한 공간이다.
책과아이들의 2층 공간은 다양한 모임을 진행할 수 있도록 특성에 맞게 모임이 가능한 여러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5층엔 널찍한 갤러리가 있어 다양한 문화행사가 펼쳐진다. 특이하게도 1층과 2층 사이에 ‘중2층’으로 불리는 서가가 있다. 읽을거리가 가득한 구석진 이곳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자리다. 이렇게 5층 건물은 책과 사람이 어울리는 복합 문화공간이다.
김영수·강정아 공동 대표가 동네책방 책과아이들의 문을 연 이유는 단순하다. “전집이 아닌, 조금이라도 덜 상업적이고 좋은 책들을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책과아이들은 1997년 12월 부산 양정동에서 12평 규모로 처음 문을 열었다. 초창기에는 책방과 육아공동체를 함께 운영했는데 회원이 늘자 공간이 비좁았다. 아기와 엄마들을 위해 2001년 공간을 넓혀 부산교대 근처로 이전했고, 2009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책과아이들은 연중 무휴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미리 책방과 약속을 잡으면 유치원이나 학교의 한 학급 전체가 책방 나들이를 올 수 있다. 또한 서점에 오는 손님들 가운데 연극을 하고 싶은 사람들을 모아 연극모임 ‘두근두근 당당하게’를 만들었다. 수개월 동안 기획하고 연습을 해서 책과아이들에서 선을 보인다. 얼마 전 강정아 대표는 청소년들을 데리고 《레미제라블》을 함께 읽기도 했다. 그러면 프랑스 혁명사와 사회민주주의까지 자연스럽게 공부가 이어진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강연도 진행된다. 책과아이들에 터를 잡은 중학생들은 특강 내용이 정해지면 스스로 공부하고 자기들만의 자료집을 만들어 발표회를 한다. 최근에는 《코스모스》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책방 사람들 사이에서 강정아 대표는 책방 큰엄마로 불린다. 책방을 열겠다며 사람들이 찾아오면 프레젠테이션까지 준비할 정도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도와준다. 강정아·김영수 대표는 책방이 우체통만큼, 미용실만큼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웃으며 말한다. 늘어나는 숫자만큼 공간이 많아지면 청소년들과 함께 책을 읽는 일도 더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자기만의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청소년들이 많아져야 우리 교육의 미래도 밝다고 믿는다.
어린이문학의 정신을 지키고 실천하는 길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달려온 지 23년. 그동안 여러 번의 고비가 있었고 지금도 사정이 넉넉한 것은 아니다. 더 한적한 시골로 들어갈까 생각도 해봤다. 많은 고민을 하지만 그래도 늘 같은 결론을 내린다. “책방이 사람들 곁에 있어야지!” 강정아·김영수 대표는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앞으로의 20년을 다짐한다. 책과아이들은 단지 책을 파는 공간이 아니다. 책과 사람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잇고, 생각과 생각을 잇는다. 책이 있어 편안한 곳, 아이들의 생각이 자라는 곳이 책과아이들이다. 부산에 간다면 꼭 한번 들러보자. 새로운 동네책방을 만날 수 있다.
한국전쟁 시기 부산이 임시수도였던 기간은 정확히 1,023일이다. 1차로 1950년 8월 18일부터 10월 27일까지, 2차로 1951년 1월 3일부터 1953년 8월 15일까지다. 개전에서 휴전까지 날수로 1,129일이므로 100일 남짓 기간을 제외하고는 부산이 대한민국의 수도 역할을 떠맡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서울을 떠나 부산의 경상남도 도청을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사용했다.
경상남도 도청은 1925년 경상남도의 도청 소재지가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겨온 직후 건립되었다. 당시 주소는 경상남도 부산부 부민정 2정목이다. 붉은 벽돌 2층으로 지어진 청사는 좌우대칭의 외관에서부터 식민지배자의 권위를 드러내도록 설계되었다. 건축사적으로는 서양에서 유행하던 역사주의 양식을 차용했다고 평가된다. 신축 경상남도 도청은 원래 한일자[一]형 평면이었으나, 증축을 거듭하면서 해방 무렵에는 날 일자[日] 평면으로 바뀌었다.
대한민국 임시수도 정부청사는 정부의 기능보다는 ‘부산 정치파동’으로 더 유명하다. 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인대도 대통령 이승만은 1951년 말부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밀어붙인다. 국회에서 정부의 안이 부결되자, 1952년 5월 26일 직선제에 반대하는 야당 의원의 통근버스를 그대로 들어서 견인하는 횡포를 부렸다. 국회의원 12명이 국제 공산당 연루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부통령 김성수는 항의의 뜻으로 사표를 제출했다.
당시 국회는 임시수도 정부청사 옆 무덕관을 사용했다. 무덕관은 경상남도 도청의 체육관 시설이다. 국회 앞에는 직선제를 지지하는 관제 데모가 연일 이어졌다. 야당 의원들이 개최한 ‘반독재 호헌 구국대회’는 백골단, 땃벌떼, 민중자결단 등 정치깡패들이 난입해 아수라장이 되었다. 결국, 1952년 7월 4일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발췌개헌안’이 기립 표결 방식으로 통과되었다. 1952년 8월 5일 선거에서 이승만은 대통령에 다시 당선되었다.
원래 40만 명 수준이었던 부산의 인구는 전쟁 기간에 100만 명이 되었다. 바다가 가로막아 더 갈 데가 없었던 피란민들로 인해 부산은 그야말로 뜨거운 가마솥 같은 도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의 부(釜)는 가마라는 뜻이다. 집이 없는 피난민들은 공동묘지에 움막을 짓고 살기도 하고, 외양간을 판자로 막아 거주하기도 했다. 비석 마을, 소막마을의 유래다. 사회는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임시수도로 피란 내려온 정부는 정치 소동을 일으키는 일에는 유능했지만, 국민의 삶을 다스리는 일에는 무능했다. ‘국제시장’이 상징하는 부산의 역동성은 생존과 생계를 어떻게 하든 이어가려는 서민들이 스스로 힘으로 만들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산 임시수도 정부청사가 서울로 돌아가자 청사 건물은 경상남도 도청 청사로 환원되었다. 1983년 경상남도 도청이 창원으로 이전한 뒤에는 2001년까지 부산지방검찰청 청사로 쓰였다. 2009년 건물을 인수한 동아대학교는 현재 임시수도 정부청사를 박물관으로 꾸몄다. 임시수도 정부청사는 2002년 등록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었다. 건축물의 외관은 해체복원을 거쳐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나, 내부는 일제강점기부터 증개축이 거듭되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임시수도 정부청사 옆에 있는 건물은 원래 경상남도 도지사 관사였는데 임시수도 시절 대통령 임시 관저로 쓰였으며 현재는 임시수도 기념관이다.
부산 금정산 범어사 대웅전에는 조선시대 목조삼존불좌상이 있다. 금빛 우물이 있는 산인 금정산(金井山)과 금정에 하늘의 물고기가 노닐었다는 범어사(梵魚寺)의 아름다운 유래는 1481년 간행된 지리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1700년에 간행된 『범어사창건사적(梵魚寺創建事蹟)』에 전한다.
범어사에 따르면 목조삼존불상의 복장물을 개봉했었고 복장기문은 따로 복사해서 보관중이며 발견된 불상기문(佛像記文)과 <불상기인발원축(佛像記因發願祝)> 등은 다시 복장했다고 한다. 이때 출토된 불상기문을 통하여 삼존불상의 정확한 조성 시기는 1661년(현종2)이라는 것과 조각승은 희장(熙莊)을 비롯하여 경신(敬信), 보해(寶海), 신학(神學), 쌍묵(雙黙), 청언(淸彦) 등이 참여했고, 좌우에 있는 보살상의 이름은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 임이 밝혀졌다.
이 삼존불의 규모는 본존상의 높이가 130cm, 좌우 보살의 높이는 125cm 정도로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안정적인 비례와 균형 잡힌 당당한 형태를 보인다. 얼굴은 작고 단정하며, 우아하고 자비로운 모습의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옷 주름은 간략하게 직선의 선묘(線描)로 간략하게 처리하고 넓은 여백을 줬지만, 전체적으로는 힘 있게 잘 정돈되어 있다.
좌우의 보살상은 화려한 보관과 영락으로 몸을 꾸몄고 두 손으로 연꽃을 받쳐 들고 있다. 오른쪽 미륵보살상은 왼손으로 연봉오리를 들었고, 왼쪽의 제화갈라보살은 오른손을 들어 활짝 핀 연꽃을 잡고 있다. 미륵보살의 아직 피지 않은 연봉오리는 앞으로 다가올 유토피아를 은유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수조각승 희장(熙莊)은 17세기 중·후반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였던 대표적인 조각승이다. 범어사 대웅전의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은 그가 완숙기에 접어들었을 때 만든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는 1639년 하동 쌍계사 대웅전 목조삼세불좌상 및 사보살입상(보물 제1378호)을 조성한 청헌(淸憲)과 같이 활약하고, 1646년 천은사 수도암 목조아미타삼존불을 조각한 승일(勝一)과도 작업을 함께 하였다고 한다.
범어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은 부드럽고 자비로운 미소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 단정하고 우아한 조각 솜씨를 보인다. 불상기문을 통해 제작연대와 조각가를 알 수 있고, 본래의 봉안처를 변함없이 유지하여, 17세기 중반의 완성도 높은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아 보물 제1526호로 지정되었다.
수영야류(水營野遊)는 부산 남구 수영동에서 마을사람들에 의해 정월대보름날 행해지던 탈놀이(가면극)로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어 보존 및 전승되고 있다.
경남지방의 탈놀이는 낙동강 중류인 합천 초계 밤마리(현재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에서 시작되었는데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의 명칭이 다르다. 동쪽인 부산(수영·동래·부산진)은 ‘야류’, 서쪽인 고성, 마산, 통영, 가산 등은 ‘오광대’라고 불렀다. 야류(野遊)는 우리말로는 ‘들놀음’이라고 하는데 넓은 들판에서 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수영야류의 유래는 두 가지가 전해지는데 하나는 1870년 무렵 수영지역 사람이 밤마리 대광대패의 오광대를 보고 와서 시작하였다는 설과 약 200년 전 경상좌수영의 수사가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하여 대광대패를 데려다가 연희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놀이 준비는 먼저 야류계(野遊契)가 만들어져 음력 정월 3-4일경부터 13일까지 각 가정을 방문하여 지신밟기를 해주고 받은 곡식과 돈으로 탈놀이 할 경비를 조달하였다. 일부 놀이꾼은 지신밟기 기간에 가면과 도구를 만들고, 가면극의 원만한 거행을 기원하는 가면제(假面祭)를 지냈다. 이후 정월 14일에는 원로들이 각 놀이꾼들이 연습한 연기를 심사하고 배역을 결정하며 예행연습을 하였다.
정월 15일인 보름날은 낮부터 산신제를 올리고, 마을의 우물과 최영 장군 무덤에 제사를 지낸 뒤 달이 떠오르면 본격적으로 놀이를 시작한다. 놀이는 화려한 길놀이와 양반춤·영노춤·할미와 영감춤·사자춤 등 4과장의 가면극으로 구성된다. 길놀이는 일종의 시가행진으로 등을 든 아이들이 맨 앞줄에 서고, 이어서 농악대, 길군악대, 팔선녀, 수양반, 말뚝이, 난봉가패 등이 순서대로 행진한다.
이들이 놀이판에 다다르면 일반 구경꾼들과 어울려 흥겹게 춤을 추며 농악놀이를 하고 이후 자정이 지나 수양반이 등장하면 가면극이 시작되었다. 새벽에 이르러 모든 놀이가 끝나면 가면과 고깔을 모아놓고 제사를 지내고 불태우면서 마을의 태평과 풍요, 가정의 행운을 빈다.
제1과장 양반마당
하인 말뚝이가 양반의 이중인격을 폭로하고, 무능과 허세를 풍자.
제2과장 영노마당
하늘에서 내려온 괴물 ‘영노’가 자신이 양반이 아니라고 우기는 양반을 잡아먹는 내용. 양반에 대한 조롱과 야유, 울분의 노골적인 표현.
제3과장 할미·영감마당
영감이 본처인 할미와 첩 사이에서 가정불화를 겪다가 할미가 영감의 발길에 채여 죽는 내용.
제4과장 사자춤마당
사자와 범의 격투 끝에 범이 사자에게 잡혀 먹히는 내용. 사자신을 위로하기 위하여 범을 공물로 바치는 것.
가면극의 주제는 다른 가면극과 같이 양반에 대한 풍자와 처·첩 간의 가정문제, 벽사의식 등을 다루었다. 등장인물은 수양반·둘째양반·셋째양반·넷째양반·종가도령·말뚝이·할미·제대각시·영노·사자·범 등 11명이다. 악기는 장구, 꽹과리, 징, 북이며 가락은 굿거리장단과 타령장단이고 춤사위는 일정한 형식 없이 즉흥적인 덧배기춤으로 수영지방의 토속적이 멋이 있다.
수영야류가 다른 탈놀음과 다른 특색은 타 지역이 5과장, 7과장, 8과장, 10과장, 12과장으로 이루어진데 반해 수영야류는 전체 4과장으로 짧다는 점이다. 또 등장인물이 11명으로 다른 지방(봉산 36명, 송파 33명, 통영 31명 등)에 비해 가면수가 월등하게 적고, 문둥이 과장이 없는 대신 사자춤마당이 있다.
구덕 망깨터다지기란 건물이나 담장을 짓기 전에 땅을 단단하게 다지는 망깨질 작업을 말한다. '망깨'는 '달구'라고도 불리는데, 무겁고 넓적한 돌에 4~5개의 손잡이를 매달아 만든다. 여럿이서 손잡이를 잡고 돌을 높이 들어 올렸다가 바닥에 떨어트리면 중력에 의해 연약한 흙이 단단해지는 원리다. 힘들고 고단한 터다지기 작업을 노동으로만 보지 않고 놀이화하여 즐긴 옛사람들의 지혜가 놀랍다. 현재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구덕 망깨터다지기를 언제부터 했는지는 알 수 없다. 678년에 창건된 범어사, 1636년에 건축된 동래부 동헌, 1825년에 수리된 다대포 객사 등을 지을 때 망깨질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전통이 상당히 오래됐음을 짐작할 뿐이다. 마을 주민들의 말로는 1950년 전후까지 큰 집터를 다질 때 망깨질을 하면서 터다지기 소리를 했다고 한다.
하나. 터잡이
풍수 전문가의 도움으로 집터를 잡는다. 땅의 모양과 주변 산세 등을 살핀 후, 명당임을 선언한다.
둘. 텃제(오방신제)
집터가 정해지면 공사에 앞서 텃제를 지낸다. 집터와 가옥의 수호신들께 집을 짓겠다고 알리는 의식이다. 보통 터고사는 터주를 중심으로 하지만, 구덕 망깨터다지기에서는 터주와 함께 오방지신(五方之神)에게도 제를 올린다. 돼지머리·쌀·명태·시루떡·대추·밤·감·사과를 차려놓고, 술은 청주가 아니라 막걸리를 쓴다.
셋. 모탕고사
텃제와 별도로 목수들은 모탕고사를 지낸다. 모탕이란 목수들의 작업대를 말하는데, 이 위에 음식을 차려 놓고 상량신에게 공사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무사히 작업을 마칠 수 있게 도와달라며 기도한다.
넷. 가래질
텃제와 모탕고사를 마치면 본격적인 터다지기를 시작한다. 우선 땅을 고르게 만드는 가래질을 하는데, 이때 <가래질소리>를 한다.
(후렴) 어여차 가래야 / 어여차 가래야 /닦읍시다 닦읍시다 / 이 집터를 닦읍시다 / 이 집터를 닦은 후에 / 이 터에다 집을 짓고 /만수무강 현판 달고 / 산수 좋은 구덕산에/ 불로초와 불사약을/ 여기저기 심어놓고 / 학발 양친 봉양하여 / 세세익수 하여보세 /여보시오 가래꾼들 / 신명나게 당겨주소 / 어여차 가래야
다섯. 망깨질
땅이 평탄하게 정리되면, 작은 망깨로 집터 전체를 고르게 다진다. 그다음 주춧돌을 놓을 자리에 구덩이를 파서 자갈과 굵은 모래 등을 채워 넣고 물을 뿌린 후 큰 망깨질을 한다.
1) 작은망깨소리
(후렴) 어여차 망깨야 / 어여차 망깨야 / 이 망깨가 뉘 망껜고 / 여러분의 망깨로다...(중략)...오방지신을 다졌으니 / 여보시오 여러분들 / 이내 말씀 들어보소 / 우리나라 팔도강산 / 곳곳마다 망깨 소리/ 어여차 망깨야 / 망깨 소리 크게 내소 / 팔도강산 중에서도 / 우리 부산이 제일일세/ 구덕 망깨가 제일이로다
2) 큰망깨소리
(후렴) 어여차 망깨야 / 어여차 망깨야...(중략)...터를 잡던 성황님네 / 오동나무 상상봉에 / 봉황이 높이 떠서 / 천년 지둥 만년 가옥/ 주춧돌에 땀이 나고 / 팔모기둥에 좀이 나네 / 만인간의 소원 성취 / 부귀영화를 마련하여 / 오는 길에 복을 주고 / 가는 길에 명을 주소 / 눌러주소 눌러주소 / 천년만년 눌러주소 / 부귀영화를 누려주소 / 어여차 망깨야
여섯. 뒤풀이
망깨질이 끝나면 작업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그동안의 피로를 푼다. <쾌지나칭칭나네>를 신나게 부른다.
(후렴) 쾌지나칭칭나네 / 쾌지나칭칭나네 /여보시오 여러분들 / 이내 말씀 들어보소 /어떤 사람은 복이 많아 / 천석 만석 누리는데 /이내 팔자 기박하여 / 주야장천 날만 새면 /망깨소리 못 면하네 / 여보시오 망깨꾼들 /소리 맞춰 힘을 내소 / 죽으나 사나 망깨소리 /여보시오 망깨꾼들 / 부지런히 일을 하여/ 티끌 모아 태산이라 /한 푼 두 푼 모은 재물로 / 명산대천에 집터를 잡아 /그 집터를 마련하여 / 고대광실 집을 짓고 /네 귀에다 풍경 달고 / 동남풍이 불어오면 /풍경 소리가 요란하다 / 여보시오 여러분들 /우리 인생 천년만년 /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눌러주소 눌러주소 / 천석 만석 눌러주소
구덕 망깨터다지기는 땅을 다지는 힘든 노동의 고단함을 이겨내기 위한 놀이다. 노래를 통해 고통을 잠시나마 잊고 일꾼들 사이의 단합을 끌어낼 뿐만 아니라 집터의 모든 재앙을 물리치고 가정에 평화가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동래 지신밟기는 부산 동래지역에 전승되는 민속놀이로 새해를 맞이해 정월 정초에 마을과 집터에 머물러 있는 지신(地神)을 진압하여 악귀와 잡신을 물리치고 마을과 집안의 평안을 빌며 한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민속신앙적인 놀이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1977년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된 지신밟기는 조선후기에 전승된 것을 재구성하여 민속놀이로 다듬은 것이다.
동래 지신밟기는 음력 12월부터 악기, 의상, 도구 등을 준비하여 다음 해 1월 초 2, 3일경부터 시작하여 대보름(15일) 이전에 마친다. 등장인물은 기수, 사대부, 팔대부, 포수, 하동, 각시, 머슴 등이 있고, 악기는 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 태평소 등이 등장하여 총 35명 내외의 인원으로 구성된다. 주제는 양반의 위선을 풍자하고 평민의 지혜를 드러내는 것이다. 양반(사대부, 팔대부)과 평민(하동·포수) 사이에 각시가 개입해 추잡한 애정 갈등을 연출하며, 그 과정에서 해학적인 연기를 선보여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놀이의 구성은 주산(主山) 지신풀이, 당산(堂山) 지신풀이, 우물샘 지신풀이, 각 가정 지신풀이 등 네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주산과 당산에 고사를 지내고, 마을로 내려와 마을에 있는 공동우물에서 우물풀이를 한 후 마지막으로 각 가정을 돌면서 본격적인 지신밟기를 한다.
각 가정 지신밟기는 먼저 마당에 들어가 마당놀이를 한 후 대청 앞에 차려진 고사상 앞에서 대청풀이를 하고 큰방과 각 방을 풀이한다. 이어서 부엌, 장독, 마구간, 도장, 뒷간, 삽짝(사립문) 등을 돌며 풀이를 하며 잡귀는 물러가고 복이 오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노래하며 발을 구르며 춤춘다.
잡귀신은 물알로, 만복은 이리로~
이렇게 모든 풀이가 끝나면 집주인이 차린 술과 안주를 먹고 다음 집으로 향하며 집주인은 지신을 밟아준 사례로 곡식과 돈을 내놓는데 이는 마을의 공동사업에 사용한다.
동래 지신밟기는 복식이 일반적인 농악대와 다르다. 일반적인 농악대가 입는 색깔 있는 채복(綵服)과 머리에 쓰는 전립 대신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를 입으며 머리에는 고깔을 쓴다. 또 굿거리장단에 동래지역 특유의 우아한 덧배기춤을 위주로 추는 것이 특징이며 대사의 내용과 짜임새가 우수하다.
농청(農廳)이란 마을의 공동 노동 조직인 두레에서 출발한 모임을 말한다. 마을 가운데에 ‘농청’이라고 부르는 가옥을 두고, 그곳에 모여 마을의 크고 작은 일들을 처리하거나 농기구를 보관했다. 농청은 상당히 조직적이었고 규율도 엄했다. 농청을 이끄는 행수, 행수를 돕는 도감, 작업을 지휘하는 수총각 그리고 농청의 활동을 기록하는 서기를 뽑아 운영했는데, 농청에 소속된 사람들은 이들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다. 모심기, 타작, 추수뿐만이 아니라 마을의 길을 고치거나 풀을 베는 일 등에도 동원됐다. 아무리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함께 작업한다고는 하지만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일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더욱이 개인 행동을 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면 벌을 받았기 때문에 마음의 부담도 컸다. 그래서 이 고통스러운 농청 활동을 위로하고 피곤함을 덜어주며 생산성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농악을 동원했다. 노동하는 가운데 신명 나는 풍물 가락을 듣고 목청을 한껏 높여 노래를 부름으로써 잠시나마 고단함을 잊고자 음력 7월 무렵 농청놀이를 벌였던 것이다. 수영 지역의 농청놀이는 1972년 10월 20일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수영 농청놀이는 노래가 중심이다.
1. 집합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리면 농청원들이 마당에 모인다. 농기와 풍물패를 앞세우고, 손에 가래ㆍ빗자루ㆍ도리깨ㆍ갈고리 따위의 농기구를 들고 농청원들이 뒤를 따른다.
2. 풍물 소리가 멈추면 <풀베기소리>를 부른다. 악기 반주 없이 한 사람씩 돌아가며 독창한다.
3. 풀베기가 끝나면 남자 농청원들이 소 두 마리를 끌고 와 논갈이와 써레질을 한다. 이때 부르는 노래가 <가래소리>다.
4. 그런 다음 여자 농청원이 모를 찌면서 <모찌기소리>를 한다. 모찌기란 모내기를 하기 전에 못자리에서 모를 뽑아내는 작업을 말한다. 이때 남자 농청원들은 모를 나르거나 논을 편평하게 고른다.
5. 모찌기 후에는 모를 심는데, 수영에서는 대대로 여성들이 모를 심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모심기소리> 역시 여성 농청원들이 부른다.
6. 모심기하는 동안 남자 농청원들은 보리타작을 한다. 보릿대를 도리깨로 때리고 갈퀴질 하면서 <도리깨타작소리>를 한다.
7. 모심기와 보리타작이 끝난 뒤에는 새참을 먹는다. 남자들은 술동이 옆에, 여자들은 함지박 옆에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한다.
8. 중참 후 <논매기소리>를 하며 남자들은 논을, 여자들은 밭을 맨다.
9. 논매기가 끝나면 잠시 춤을 추며 놀다가 소싸움을 벌인다. 목청을 높여 <소싸움소리>를 불러 분위기를 띄운다. 소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꼬리를 내리고 달아나면 승패가 결정되는데, 진 쪽에서는 땅을 치며 통곡을 한다.
10. 마지막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하나가 되어 춤을 춘다. 이때 부르는 노래가 <칭칭소리(쾌지나칭칭나네)>다.
수영 농청놀이는 농청의 공동노동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민속놀이다. 농사 짓는 괴로움을 달래기 위한 것이지만, 노랫가락을 보면 사실 농사와는 별로 관계가 없고 신세타령이 대부분이다. 힘을 돋우는 것은 물론 처첩 간의 갈등, 효도에 대한 내용도 있다. 노랫가락이 어떻든 간에, 노동집약적 성격의 농사일을 수월히 하기 위해서 마을 공동체의 협력을 끌어내야 했던 우리의 생활문화가 잘 담겨있는 놀이임에는 분명하다.
‘고분도리’는 부산광역시 서구 대신동 일대의 옛 지명으로 ‘고불거리는 길’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걸립(乞粒)’이란 마을에 공공 자금이 필요할 때, 풍물패를 조직해 집집마다 다니며 돈이나 곡식을 거둬들이는 일을 말한다. 부산의 고분도리 걸립은 음력 정월 초에 벌이는 세시풍속으로 나쁜 일은 막고 좋은 일만 일어나길 기원해주는 지신밟기 형태의 풍물굿이며, 복을 대신 빌어주는 대가로 쌀과 돈을 조금씩 받는 까닭에 걸립굿이라 불리고 있다. 걸립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성주풀이 전문가인 대처승 출신의 유삼룡을 영입했다고 한다. 2011년 3월 26일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었다.
고분도리 걸립의 원형은 부산 아미농악이다. 아미농악은 정월에 복을 빌어주러 다니는 걸립 놀이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한국전쟁 때 부산 지역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아미동 일대에 정착하면서 1956~1957년 사이에 결성된 신생 풍물집단(꼬깔패라고도 부른다)이라고 한다. 비록 역사는 짧지만, 정초 지신밟기의 전통을 잇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격변기에 자생한 민속놀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1. 당산에 올라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축원하는 당산굿을 한다.
2. 마을로 돌아와 우물굿을 한다. 우물물이 마르지 않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3. 집집이 다니며 가정의 평안과 풍요를 비는 대문굿, 성주풀이, 조왕굿, 장독굿, 곳간굿, 정낭굿, 마굿간굿 등을 한다. 이 중 성주굿의 내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여봐라! 북쇠야(사설) 우리가 천날만날 응막 깽깽만 할 것이 아니라
천개는 자하고 지벽은 축하니 사람은 인시에 생겼다.
그중에 성주부친이 생겼고 그중에 성주모친이 생기어
성주부친이 누구시냐 천궁황제가 분명하고 성주모친이 누구시냐 옥진부인이 분명하다.
옥진부인 거동봐라! 슬하에 일점 혈육이 없어 재미쌀씻고 실어 명산대천 찾아가서
상탕에 목욕하고 하탕에 수족 씻고 무주남산 지치달라 칠성당 모아놓고
황초에 불을 밝혀 소지삼장을 드린 후 비나이다 비나이다 칠성님전 비나이다.(이하 생략)
4.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를 올린다.
5. 마지막으로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어울리는 춤판이 벌어진다.
부산역 맞은편 동구 초량동 옛 백제병원은 ‘초량 이바구길’의 출발점에 해당한다. 이 길을 따라 근대 개항 이래 쌓이고 쌓인 이바구(이야기의 경상도 사투리)가 굽이굽이 넘쳐나기에 2014년 초량 이바구길로 명명됐다. 길이 시작되는 건물의 사연부터 예사롭지 않다. 만고풍상을 다 겪은 건물은 현재 카페로 변해 있다.
1921년 최용해(崔鏞海)라는 의사가 초량동에 백제의원이라는 작은 병원을 열었다. 최용해는 경상남도 김해군 명지면(현재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출신으로서 일본 오카야마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 당시 만난 일본인 여성과 결혼을 했는데, 장인이 건축업을 하는 부자였다고 한다. 개인 개업의로서 백제의원을 하던 최용해는 장인이 병원 건물을 지어주겠다고 하자, 1927년 의원급이 아니라 정말 병원급 건물을 짓기로 했던 모양이다. 일제 강점기에 병원이란 최소 20병상 이상을 갖추고, 의사도 3~4명 있는 종합 진료 기관을 뜻했다.
1927년 2월 우선 지상 4층짜리 벽돌 건물을 지었다. 이어 같은 해 12월에는 바로 옆에 지하 1층 지상 6층짜리를 붙여서 건축했다. 건축비는 6만 원이 들어갔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시세로 쌀 6,000섬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3만 원은 동양척식회사로부터 빌렸고, 나머지 돈은 장인의 지원과 개인 재산을 털어 넣었으나 모자라 사채를 끌어다 썼다고 한다.
어쨌거나 부산은 기껏해야 2~3층 건물이 고작이었고, 그나마도 벽돌로 지은 건물은 관공서이던 시절에 개인이 무려 6층 높이의 건물을 올렸으니, 부산 사람들 입이 딱 벌어졌을 듯하다. 의료진도 외과는 자신이 맡고, 내과는 독일인 의사와 일본인 의사를 초빙해왔다. 치과와 이비인후과까지 진료과목을 늘려 의사와 간호사가 30명이 넘고, 병상도 40여 베드를 갖추었다. 부산에서 백제병원은 부산부립병원, 철도병원과 함께 3대 병원으로 부상했다. 조선 팔도를 통틀어 한국인이 설립한 사립 병원이 10여 개에 불과했던 시절의 일이었다.
그러나 자자했던 병원의 명성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외국 의사 초빙에 비용이 많이 들어간 데다 사채 이자의 압박이 갈수록 심해졌다. 게다가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용해 원장은 행려병자의 시신으로 인체 표본을 만들어 병원 5층에 보관했다가 당국에 걸렸다. 당시 병·의원은 일본 경찰의 통제를 받았다. 백제병원이 가난한 환자를 죽여 옥상에 보관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지하에는 감옥이 있어 원혼이 병원을 떠돈다는 루머도 있었다. 결국 최용해는 1932년 일본으로 야반도주했다.
벽돌로 아치를 쌓은 현관, 건물 상층부에는 화강석으로 모양을 내고, 내리닫이 창이 달린 층과 층 사이에 다이아몬드 문양을 벽돌로 연출했던 백제의원 건물은 결국 동양척식회사로 넘어갔다. 동양척식회사는 백제병원 건물을 양모민(楊牟民)이라는 중국인에게 넘겼다. 양모민은 내부를 개조해 1933년 봉래각이라는 청요릿집을 열었다. 건물의 위치가 마침 부산 차이나타운의 끝자락이었다. 부산 차이나타운은 임오군란(1884년) 때 청나라 군대가 출병한 이래 중국인들이 부산으로 몰려오면서 형성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부산의 중국인 화교는 4,000명이 넘었다는 기록이 있다.
봉래각은 객실이 120개에 접대 여성만 50명이었다고 한다. 봉래권번과 초량권번의 예기(藝妓)들이 수시로 불려가는 연회가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 권번은 기생조합이다. 봉래각은 부산에서 가장 유명한 중국 요릿집으로 꼽혔고, 부산을 찾는 일본인도 봉래각을 반드시 가 봐야 할 음식점으로 쳤다 한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일제의 화교 탄압이 시작되었다. 결국 양모민 또한 1942년 봉래각을 닫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일본군이 건물을 접수해 장교숙소로 쓰기 시작했다. 광복이 되자 건물은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귀환한 학병들이 조직한 학병치안본부로 사용되었다. 1950년엔 중화민국 임시 대사관이 들어서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1953년 건물은 개인에게 불하되었다. 부산 최초의 개인 병원이 부산에서 유명한 중국 요릿집이 되었다가 이번에는 ‘신세계 예식장’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서양식 결혼 예식의 붐을 타고 신세계 예식장은 다시 사람이 북적이는 장소로 변했다. 수많은 신혼부부가 하객들의 박수 속에 신세계 예식장에서 식을 올렸다. 하지만 더 좋은 시설을 갖춘 예식장들이 부산에 속속 등장하면서 초량동 신세계 예식장의 전성시대도 막을 내렸다.
1965년 이래 건물은 흉가처럼 버려졌다. 한때 부산 최초이자 최고로 꼽아주던 신세에서 과거의 영광이나 되씹는 초량동 텍사스촌의 볼품없는 흉물 취급을 받았다. 1971년 건물의 주인은 내부를 고치고, 외부를 손질해 다양한 업종의 점포로 세를 주었다. 독서실, 탁구장, 각종 사무실이 들어왔다. 1972년 3월 옆 건물에서 난 불이 이 건물로 옮겨 붙었다. 지붕 부분은 뻥 뚫렸고, 건물의 3분의 2가 타버렸다. 그나마 건물의 골조와 아래층들은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 부산시는 화재 이후 건물의 5층을 철거하도록 했다.
화재 이후 수많은 상가 점포, 사무실, 식당, 부동산 중개업소, 심지어 사찰까지 건물에 세 들었다가 나갔다. 2009년에서야 ㈜북천의 대표가 건물을 인수했다. 건물의 역사와 가치를 알아본 새 주인과 지역 주민들의 노력으로 건물은 2014년 말 등록문화재 제647호로 지정되었다. 등록문화재 지정을 계기로 1년여에 걸친 복원 위주의 리모델링이 이루어졌다. 옛 모습을 완벽히 되살리는 게 아니라 사각형, 마름모꼴 등 부정형(不定形)의 평면 위에 지어진 방 형태를 그대로 두고, 목조계단과 장식 등 병원 시절의 남은 흔적들을 최대한 살리면서 카페로 개조했다.
‘초량 이바구길’은 길이 1.5㎞ 남짓에 불과한 골목이다. 하지만 남선창고 옛터, 초량교회, 인물담장거리, 168계단, 김민부 전망대, 장기려 더 나눔센터, 유치환의 우체통, 까끄막(산비탈의 사투리) 게스트 하우스, 천지 삐까리 마을카페 등 가는 곳마다 이야깃거리가 넘쳐나는 부산의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 부산역 바로 앞이라 접근성도 좋다. 최근에는 168계단 쪽에 모노레일까지 놓였다. 부산의 근대부터 한국전쟁 시기 피난민들의 삶까지 소중한 근현대사의 기억들이 이야기로 되살아나는 골목이 되었다. 초량 이바구길에 들어서면서 만나게 되는 백제병원 옛 건물의 이바구부터가 그렇다.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송공단(宋公壇)에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기녀 금섬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인 금섬 순난비(金蟾殉亂碑)가 있다. 송공단은 임진왜란 때 동래성을 지키다 순절한 송상현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비석을 세운 곳이다. 금섬 순난비는 높이 73cm, 너비 30.5cm, 폭 12cm의 크기로 비석 윗부분이 반달처럼 둥글게 다듬어져 있는 형태이며, 송상현 순절비 뒤쪽 왼편에 마련된 별도의 공간에 세워져 있다. 비석 앞면에는 ‘금섬 순난비’라 새겨져 있고 붉은 색으로 덧칠해져 있는데 이는 ‘나라의 위기에 목숨을 바친 금섬의 비’ 라는 정도의 의미로 볼 수 있다.
금섬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의 기녀로, 1592년 열세 살 되던 해에 송상현의 첩이 되어 동래부사로 부임하게 된 송상현을 따라 부산으로 갔다. 같은 해 4월 15일 동래성이 왜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송상현은 죽기를 각오하고 동래성 남문으로 향했다. 왜군은 “싸울 것이면 싸우고 싸우지 못하겠으면 길을 빌려 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고 크게 쓴 나무판을 보이며 항복하기를 권유하였다. 송상현은 나무판에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고 써보이며 절대 물러나지 않을 뜻을 밝혔다.
마침 예전에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 송상현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자가 왜군의 장수로 왔는데, 송상현을 알아보고서 빨리 피신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송상현은 피하지 않았고,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절을 한 뒤 아버님께 “군신의 의리는 무겁고 부자의 은혜는 가볍습니다(君臣義重 父子恩輕).”라는 글을 남기고서 맞서 싸우다 결국 순절하고 말았다.
이때 금섬이 관아에 있다가 여종 금춘과 함께 동래성에 찾아갔으나 송상현이 이미 순절한 후였다. 그러다 곧 금섬도 왜군에게 잡히게 되었으나 두려워함이 없었다. 오히려 사흘 동안 왜적들을 욕하며 꾸짖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조선의 사신으로 왔었던 왜군의 장수가 금섬의 의로움을 기특하게 여겨 동래성 밖에 송상현과 함께 묻어주었다고 한다.
금섬은 비록 기녀였지만 송상현의 첩으로써 그에 못지않은 의로움과 충절을 보여주었고 그것을 잊지 않고 기념하기 위해 순난비가 세워졌다. 1608년 동래부사 이안눌이 동래성 남문 밖에 제단을 만들어 임진왜란 때 동래에서 순절한 사람들을 기렸는데 여기에 금섬도 속했다. 1742년 동래부사 김석일이 송공단을 설치하면서 앞선 제단이 옮겨졌으며 이후 매년 음력 4월 15일 제사를 지냈다.
또한 충렬사에 배향되어 매년 5월 25일 제향을 통해 그 의로운 절개가 기려지고 있다. 또한 최근에 부산 동래 지역의 역사와 설화를 스토리텔링한 민속 공연이 진행되기도 하였는데, 송상현과 금섬을 소재로 재구성된 이야기가 포함되었다. 자칫 잊혀질 수 있었던 금섬을 재조명한 좋은 사례로 여겨진다.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는 조선 후기의 문신 이안눌(李安訥)의 시를 새긴 목판과 바위가 있다.
이안눌은 1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동료들의 모함을 받아 관직에 뜻을 버리고 오로지 학문에 매진하였다. 그러다 29세에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문과에 급제하면서 전국을 돌며 여러 지역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들어 온전치 못한 몸으로 왕을 모셔 남한산성에 갔다 돌아온 후 병이 더욱 깊어져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이안눌은 시를 짓는 능력이 탁월하였으며 4,379수라는 많은 양의 시를 남겼다. 이태백에 비유될 만큼 유명하였고 글자 하나, 글귀 하나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고 전한다.
이안눌은 38세 되던 해인 1608년 2월 동래부사에 부임하였다. 이듬해인 1609년 5월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후임자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6월이 되자 더위를 피하고자 범어사의 혜정 스님의 처소에서 머물게 되었다. 이안눌은 범어사에서 지내면서 혜정 스님을 비롯한 다른 스님들을 위해 26수의 시를 지었다. 그중 2수가 범어사의 청룡암이라는 큰 바위에 새겨져 있다. 2수의 시의 제목은 「청룡암 시」와 「범어사 증도원산인」이다. 「청룡암 시」는 ‘청룡암에 새긴 시’, 「범어사 증도원산인」은 ‘범어사의 도원스님에게 드리는 시’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혜정 스님이 이안눌에게 시를 지어 바위에 새길 것을 요청하자 이안눌이 지어준 것이다. 2수의 시는 범어사 산령각 앞에 있는 청룡암에 새겨졌으며 별도로 목판에도 새겨졌다. 2수의 시는 다음과 같다.
「靑龍巖 詩」
德水李居士 덕수 땅 이 거사
萊山晶上人 동래산 혜정 상인
丘壑兩閑身 산수 즐기는 한가한 두 사람
掃石苔粘珖 바위를 밟으니 나막신에 이끼 파랗고
觀松露塾巾 소나무를 보느라 두건에 이슬 젖는다
蒼崖百千劫 수만 겁 내려온 푸른 바위에
新什是傳神 이제 새로이 문장을 새기네
「梵魚寺贈道元山人」
石崖苔逕入烟霏 바위 벼랑 이끼 낀 길은 안개 속으로 접어들고
坐倚松根看夕暉 소나무 뿌리에 기대 앉아 석양을 바라본다
蜀魄一聲山寂寂 접동새 우는 소리에 산사는 적막하고
轉頭三十九年非 돌이켜 생각하니 삼십구 년 내 인생이 어리석구나
범어사 청룡암시 목판은 부산 지역에서 동래부사를 역임한 이안눌이 지은 시를 목판으로 새겼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은 자료이다. 목판이 제작되었다는 것은 인쇄되어 많은 사람들이 감상하였다는 의미로, 이안눌의 시가 당시 부산 지역의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범어사 청룡암시 목판은 이안눌이 시를 지은 시기로 미루어 보아 17세기 초반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연대도 꽤 오래되었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99년 9월 3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청룡암도 웬만한 건물 크기의 거대한 바위로 웅장하게 자리 잡고서 이안눌의 시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동래부사를 역임했던 많은 사람 중에 유일하게 이안눌의 시가 남겨졌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부산 지역에 많은 볼거리 가운데 고즈넉한 분위기의 산책을 원한다면 범어사를 찾아가 청룡암 시도 감상하고, 범어사로부터 시작되는 금정산 둘레길을 걷는 것도 좋을 듯하다.
기장죽성리왜성은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601번지 일대에 있는 죽성만 서쪽의 낮은 구릉 두 곳에 축조된 왜성이다. 이곳은 죽성천이 죽성만으로 흘러 들어가며 형성된 너른 항구에 접해 있어 많은 배를 정박시킬 수 있는 곳이다. 죽성리왜성은 기장성(機張城) 또는 두모포왜성(豆毛浦倭城) 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만호영(萬戶營)이 설치됐던 두모포진성과 성과 일부분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왜성은 동해안 남쪽의 울산 왜성과 울주의 서생포왜성, 부산의 증산왜성을 이어주는 요충지에 있다.
죽성리왜성은 1593년 왜장 쿠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쌓은 성으로 왜군이 남해안을 근거지 삼아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에 대항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알려져 있다. 『기장현읍지』에 기록되기를 "왜성은 현의 동쪽 8리에 있으며 옛날 두모포진이 있던 자리 위쪽에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만들었는데 견고하고 반원 형태로 통행하여 올라가게 되어 있어 위아래로 사닥다리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 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 후퇴한 왜군이 서생포에서 거제에 이르는 해안가에 장기전을 준비하며 쌓은 왜성으로 정유재란 때에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주둔하기도 하였다.
죽성리왜성은 기장읍 동남쪽의 봉대산 동북쪽 끝자락에 있는 두 개의 작은 구릉지를 중심으로 남쪽 구릉에 본성을 축조하고, 북쪽 구릉에 지성을 둔 형태이다. 왜성은 윤곽식산성(輪廓式山城)으로 왜장이 머무는 장소인 천수각(天守閣)을 조성한 혼마루[本丸]가 있고, 계단식으로 곡륜(曲輪)성을 몇 개의 층으로 나누어 조성하였다. 성문은 항구 쪽인 동쪽에 있는데, 성벽을 서로 엇갈리며 꺾어 만든 승형호구(枡形虎口)로 성 박에서는 안이 잘 보이지 않도록 만들었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있으며 높이는 4~5m이고, 둘레는 960m, 전체 넓이는 3만 8253㎡이다. 서북쪽 성곽 밖으로는 해자(垓字)를 팠던 흔적이 남아있으며 북쪽 지성의 동쪽 외곽으로는 두모포진성의 성벽을 이부 이용한 것으로도 보여 한일 양국의 성벽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우리나라 동남해안에 여러 개의 왜성을 축성하였는데 첫 번째 성은 부산왜성으로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지시로 축성하였다. 그 다음해인 1593년 명군의 본격적인 개입으로 조명(朝明) 연합군에 의해 쫓기기 시작한 왜군은 장기전에 대비하여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를 중심으로 20여 명의 장수가 울산광역시에서 거제도에 이르는 동남해안과 도서 지역에 10여 개의 왜성을 쌓았다. 또 정유재란 시기에도 울산광역시의 학성에서 전라남도 순천의 왜교성에 이르는 남해안에 30여 개의 왜성을 만들었다. 왜군은 대개 바다나 강 가까이 있는 낮은 구릉지에 성을 축조하여 배를 활용한 연락이나 수송 등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왜성을 두었다.
부산 해운대구 동백섬 안에는 ‘해운대(海雲臺)’라는 글씨가 새겨진 작은 바위가 있다. 통일신라 후기 학자였던 최치원(崔致遠)이 가야산(현, 경상남도 합천군)으로 가던 도중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고 자신의 자(字)를 따서 해운대라는 글씨를 새겼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하고 있다.
『해운대 석각』이 최치원이 새겼다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고려 시대에 정포(鄭誧)가 남긴 시 등을 통해 고려 후기에도 석각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해운대 석각』은 부산의 지명 유래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으며, 1999년 3월 9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5호로 지정되었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자연을 문화적으로 수용할 때도 유교적 관념과 세계관을 따랐는데, 그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두고 감상하는 방식과 자연에 문화를 새겨 넣는 방식이다. 이중에서 자연에 문화를 새겨 넣는 ‘석각(石刻) 문화’는 인위적인 방식으로 자연과 인간 문화가 융합하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에 정자나 별장을 짓고 풍류를 즐기면서 자신의 아호(雅號)나 시문(詩文)을 바위에 새기는 것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는데는 최치원의 영향이 컸다. 석각 문화를 우리나라에 들여와 널리 퍼트리기 시작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최치원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러 곳에 자신의 친필을 바위에 새겼는데 경상남도 하동군 쌍계사, 부산 해운대, 경상남도 양산의 임경대 등 아직도 흔적이 남아 있는 곳들이 많다.
최치원은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29세에 신라로 돌아왔다. 그는 재주가 뛰어나 국내외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신분의 한계로 높은 자리까지 오르지 못했다. 정치가 문란하고 사회가 어지러워서 신라가 점점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음에도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40여 세에 정계를 등지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최치원이 남긴 석각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최치원이 중앙을 떠나 경주의 남산(南山), 강주(剛州, 현 경상북도 의성), 합포현(合浦縣, 경상남도 창원) 지리산 쌍계사 등을 다녔다고 하는데 석각이 있는 곳들과 대개 일치한다.
최치원이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전국을 떠돌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반해 자신의 흔적을 남긴 부산 해운대구 동백섬은 오늘날까지도 명성이 자자하다. 현재는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동백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공원 내에는 최치원의 유적지도 포함되어 있다. 유적지에는 최치원 동상과 최치원 선생비, 해운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동백섬의 아름다움은 울창한 동백꽃 소나무, 최치원이 남긴 석각과 함께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부산광역시 금정구 남산동 중앙대로1985번길에는 남산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주택지가 분포해 있고 남산 하이츠타운이라는 큰 아파트 단지와 상가건물을 볼 수 있다. 이 곳에 신록이 푸르른 대규모 농원이 있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 21세기 현재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 자취를 파악할 길 없지만, 아파트 단지와 상가가 위치한 이 큰 터에 농원이 있었다.
이름은 남산농원. 부산의 한 재력가가 소유했던 곳으로, 1970년대 중반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처음에는 돌산에 불과했던 부지를 개발해 돌은 팔고 땅을 가꾸어서 꽃과 나무를 심고 판매하는 농원을 완성했다. 남산동에 지하철역이 처음 생겼을 때 1번 출구에는 ‘남산농원’이 안내되어 있었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길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초록색 철조망이 쳐진 나무숲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곳이 바로 남산농원이었다. 현재의 아파트 단지와 상가건물만 봐도 이 부지가 얼마나 거대했을지 짐작할 수 있는데, 단순히 꽃과 나무만 빼곡이 심겨진 곳은 아니었다. 이 곳에는 사람들이 살았고, 당시에는 보기 힘든 서양식 주택과 정원이 있었다.
남산농원에는 두 관리인이 있었다. 이들은 주문된 꽃과 나무를 뽑아 운반차량에 싣는 업무 외에 조경을 했고, 농원 전체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농원에는 총 3채의 집이 있었는데 그 중 2채에 관리인들이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맨 아랫집은 작은 대문이 연결되어 외부로의 출입이 가능했고, 개와 거위, 닭 등을 함께 키웠다. 또 다른 관리인의 집 사이에는 채소를 가꾸거나 비료를 만드는 비닐하우스 세 채가 마련되어 있었다. 두 번째 관리인의 집은 작은 규모였고 이 집을 지나 약 1분 가량을 걸어가면 거대한 서양식 주택이 나왔다.
이 집은 소유주의 별장 격이었으나, 1980년대 초 그의 조카네 가족이 거주했다. 네 식구가 살기에는 몹시 큰 크기였는데, 거실의 두 면은 모두 유리문으로 둘러싸여 바깥에서도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빨간색의 뾰족 지붕이 특징인 집으로, 커다란 옥상에서는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놀 수 있었다. 인근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집이어서 동네 아이들은 ‘귀신집’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가족은 농원이 철거되기 직전인 1991년 10월 이 집에서 나갔다.
농원에 공식 출입 가능한 커다란 대문을 따라 걷다보면 거대한 원형 정원이 나오고 바로 이 붉은 지붕집으로 이어졌다. 붉은 지붕집에서 좁은 잔디길을 따라 걷다보면 소형 저수지가 나왔고, 각종 채소를 심어 먹을 수 있는 중형 크기의 밭도 있었다. 여기서는 배추, 무, 강낭콩, 깻잎, 더덕 등 다양한 채소들을 심었다고 한다. 농원에는 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존재했다. 농원을 감싼 벽을 따라 엄청난 크기의 소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향나무가 가장 많이 분포했고, 감나무, 자두나무, 대추나무, 은행나무, 치자나무, 수선화, 목련, 영산홍, 천리향, 참나리, 개나리, 철쭉 등이 있었다.
1987년 설립된 남산 초등학교에는 나무가 미비했는데 매해 식목일이 되면 붉은 지붕집의 아이들을 통해 남산농원으로부터 나무 한 그루씩을 기증받기도 했다. 농원에는 동물들도 많았다. 남산 초등학교가 생기기 전이었던 1980년대 초중반까지 인근이 모두 산이었기 때문에 꿩과 토끼들이 내려왔다. 농원 내부에서 뱀 허물이 몇 번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때까지는 뱀도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산농원은 1992년 허물어졌고, 이후 ‘남산하이츠빌라’라는 이름의 아파트 단지가 세워졌다. 상가 역시 이때 세워졌는데, 2층에는 남산볼링센터가 문을 열었다. 매주 일요일 오후 12시에 부산 MBC를 통해 방영되었던 볼링 경기가 이곳에서 자주 촬영되기도 했다. 또한 상가 오픈 기념으로 1993년 경 한석규, 김수미 등의 인기 연예인 사인회가 열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