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래성전투를 재현하는 역사교육형 전통문화축제 '동래읍성역사축제'

    동래의 역사가 부산의 역사 

    2024 동래읍성익사축제 포스터
    2024 동래읍성익사축제 포스터(사진출처: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읍성역사축제는 1995년 ‘동래충렬제’라는 이름으로 개최되던 것을 2005년 제11회부터 현재의 이름인 ‘동래읍성역사축제’로 변경하였다. 동래읍성역사축제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을 지키기 위한 송상현 부사와 동래읍 주민들의 결사항전을 재현하고 장터 등 생활상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역사교육형 전통문화축제이다. 2014 문화체육관광부 ‘유망축제’로 선정됨에 따라 전국적인 규모의 축제로 성장할 기틀을 마련하였다. 부산광역시 동래구가 주최하고, 동래문화원과 동래읍성역사축제추진위원회가 주관하며 매년 10월에 동래문회회관·읍성광장·온천장 일원에서 개최된다. 동래는 조선시대까지 행정과 국방의 중심지로, 동래의 역사는 곧 부산의 역사라는 자부심을 가진 곳이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격전지였으며 7년간 왜군이 주둔하여 가장 오랫동안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지역이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동래전투로 3천여 명 이상의 조선인이 사망했고, 50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동래성 전투 재현, 동래부사 부임행차 길놀이 

    동래읍성역사축제의 주요 행사로는 ‘동래부사부임행차길놀이, 동래성전투 재현 뮤지컬, 동래세가닥줄다리기, 동래온천용왕제 길놀이, 동래장터재현’ 등이 있다. 동래부사부임행차길놀이는 동래읍성역사축제의 출발을 알리는 길놀이이다. 동래부사는 매년 동래를 대표할 만한 덕망 있는 인물 중에서 선정하며, 길놀이의 행렬은 길이 440m로 약 1.6km의 거리를 행진한다. 동래성전투 재현 뮤지컬은 동래읍성 북문 언덕에서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을 지키고자 했던 송상현 동래부사와 성민들의 처절한 항쟁을 재조명하여 동래읍성역사축제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창작뮤지컬이다. 축제기간 중 모두 5차례에 걸쳐 진행된다. 동래세가닥줄다리기는 전국 유일의 세 가닥 줄다리기로, 축소 복원된 줄의 길이는 90m, 몸줄 굵기는 40㎝이다. 수줄을 암줄의 구멍에 끼워놓고 수줄머리 구멍에 전봇대만한 비녀목(나무기둥)을 끼워 징소리에 맞춰 약 1천 명의 구민들이 양쪽으로 나누어 줄을 당긴다. 동래온천 용왕제 길놀이는 온천수의 영구 분출을 기원하는 행사이다. 축제 기간 중에는 동래장터를 재현하는데 조선시대 엽전을 구매해서 사용하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구경할 수 있다. 혼례나 옥사 체험도 가능하다.


    문화·공연 프로그램으로는 ‘나도 모르게 어깨춤이 동래학춤 한마당’, ‘말뚝이는 왜 말뚝이인가? 이야기 인형극’, ‘동래부사’, ‘집무재현 마당극’, ‘북문에서 풍류를 노래하다!’, ‘전통 줄타기 공연’, ‘조선 전기수의 옛이야기’, ‘전우치의 마술쇼’ 등이 있으며, 참여·체험 프로그램으로는 ‘동래 한걸음 야행’, ‘읍성민 씨름대회’, ‘동래읍성 따라걷기’, ‘조선시대 복식-합성촬영’, ‘동래읍성 가요제 ‘왕중왕 레전드 편’’, ‘동래성 기억의 공간 체험’, ‘읍성에서 동래온천을 만나다!’ 등이 있다. 부대행사로는 명륜1번가 등 107개소가 참여하는 ‘동래세일대축제’, ‘읍성민 먹거리 장터’, ‘어린이 먹거리 장터’, ‘소원담은 소망등 달기’ 등이 있다. 동래구는 구민들과 관람객들이 쉽게 축제장을 찾을 수 있도록 25인승 셔틀버스를 축제 기간 동안 오전 10시부터 오후 9시까지 20~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운행구간은 부산도시철도 1호선 동래역~온천장역~명장역 3개 코스이다.  또한 관람객 편의를 위해 캐리어 보관소도 운영한다.

     

    동래읍성과 역사를 엮은 매력적인 콘텐츠 

    동래읍성역사축제는 『2014 문화관광축제 종합평가 보고서』에서 “역사테마 축제 소재로서 ‘동래읍성’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동래부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와 동래읍성의 규모, 그리고 동래성전투라는 스케일감이 축제 콘텐츠의 매력을 더하여 줌으로써 타 지역의 유사한 읍성축제와 차별화” 된 축제라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 영남대로에서 가장 험했던 문경 토끼비리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새재에서 내려오는 조령천(鳥嶺川)과 가은읍에서 흘러가는 영강(穎江)이 만나는 곳에서는 아주 특별한 산길이 있다. 이 산길은 산골짜기의 협곡을 따라 굽이굽이 물이 흐르면서 깎아지른 듯한 가파른 벼랑을 따라 나 있다. 오정산(810.5m)의 서쪽 끝자락에서 영강이 만나는 곳의 절벽에 만들어진 이 긴 길이가 약 3km에 달하는 잔도(棧道)이다. 잔도는 바위 절벽 등을 파고 다듬어 낸 옛길이다. 토끼비리는 조선 시대에 영남지방과 한양을 오가던 사람들이 다니던 영남대로의 옛길에서 가장 험난한 구간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길이 통과하는 구간의 지형이 험준하다는 데에서 ‘관갑’이라는 이름을 붙여 관갑천잔도(串岬遷棧道)라고도 부른다.

    문경토끼비리_고모산성 상단방향
    문경토끼비리_고모산성 상단방향(사진출처:문화재청)
    문경토끼비리
    문경토끼비리(사진출처:문화재청)

    ‘비리’는 위험한 낭떠러지의 험하고 가파른 언덕을 일컫는 ‘벼루’ 또는 ‘벼랑’의 경상도 방언이고 한자로는 천(遷)으로 표기한다.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을 향해 군사를 이동할 때에 이곳에 이르러 길이 사라지자 고심했다고 한다. 그 순간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는 것을 보고 그 길을 따라갔더니 군사들이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서 토끼비리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이로부터 토천(兎遷)이라는 명칭도 생겨났다.


    조선 시대에는 낙동강을 거슬러 온 사람들이 문경새재로 갈 때 물이 흐르는 영강의 물길보다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산을 가로질러 갈 수 있는 토끼비리를 자주 이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영남대로는 조선 시대에 한반도에서 사람들의 통행이 가장 잦았던 구간이다. 당시의 영남대로는 지금의 경부고속도로보다 100리 이상이나 짧은 도로였다고 전해진다. 토끼비리의 바닥은 암석으로 되어 있지만, 수백 년 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면서 암석이나 바위는 미끌미끌해졌으며 사람들이 디뎠던 곳은 발자국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모양으로 닳고 달았다. 벼랑길의 바닥에서 우리 선조들이 다니던 길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토끼비리 길
    토끼비리 길 (사진출처:문화재청)
    토끼비리 길
    토끼비리 길 (사진출처:문화재청)

    토끼비리 구간은 근대와 현대에 들어서 새로운 교통로가 개통되면서 아련한 추억을 간직한 곳으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토끼비리를 서쪽으로 돌아 문경읍으로 향하는 국도 3호선이 개통되었다. 문경지방에서 무연탄이 생산되면서 무연탄을 수송하기 위한 문경선이 1955년 9월 개통했으며, 문경선의 지선인 가은선도 개통되었다. 이 두 철도는 1990년대 중반까지 활기차게 운행했지만, 이후 석탄 생산량이 줄어들면서 1990년대 중반 운행을 멈추었다. 지금은 토끼비리에서 영강 건너편에 옛 철도 노선만이 남아 있으며, 이 철길은 레일바이크를 즐길 수 있는 장소로 바뀌었다. 토끼비리의 동쪽은 오정산의 정상부로 향하는 구간이어서 해발고도가 높아진다. 2010년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문경시를 통과하여 개통되면서 토끼비리 동쪽의 산악구간은 진남터널을 통해 통과한다. 토끼비리와 그 주변 지역은 옛길을 중심으로 근대와 현대의 길들이 서로 어우러져 있는 곳이다.


    토끼비리는 43,067㎡의 면적이 2007년 12월 17일 명승 제31호로 지정되었으며, 옛길에서 내려다보이는 영강과 절벽, 강 건너편의 맞은편 마을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옛길의 중간중간에는 주막거리와 성황당을 설치하고 당나무를 심어 옛길 문화를 잘 보여준다. 진남교 주변의 진남교반은 경북 팔경 가운데 제1경으로 꼽힐 정도로 경치가 아름답다.

  • 2~3만 명이 동부와 서부로 나눠 줄을 당겼던 동래 줄다리기

    동래 줄다리기는 부산광역시 동래구에서 전승되는 놀이다. 이 지역에서는 줄다리기를 `줄땡기기`, `줄쌈`이라고 부른다. 동래 줄다리기는 정월대보름 경에 행해지며, 동부가 이기면 농사가 잘되고 서부가 이기면 어업이 잘 된다고 믿었다. 일설에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에 그 억울함을 표출하기 위해 사라졌던 줄다리기를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1928년 동아일보에 보도된 동래 줄다리기

    동래 줄다리기의 정확한 역사는 알기 어려우나 1930년대 중반까지 행해졌다는 것이 지역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다. 실제로 1928년 2월 9일자 『동아일보』에는 동래 줄다리기와 관련된 기사가 실려 있다. 이 기사를 보면 당시 동래 줄다리기는 동래청년회가 주최하였고 줄다리기가 열린 장소는 시장이며, 심판이 진행을 했고, 수만 군중이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줄다리기가 행해지는 과정에서 `백년회악대`라는 단체가 풍물을 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동래 줄다리기는 규모가 큰 줄다리기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 동래줄다리기는 중단된다. 일본의 탄압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에 지역 주민들의 노력으로 다시 복원이 된다.


    아기 줄다리기부터 시작

    정월대보름 본 행사가 열리기 며칠 전부터 아이들의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동래지역에서는 `애기줄땡기기`라고 부른다. 아이들의 줄다리기에 사용되는 줄은 규모가 작지만 몇 차례 줄을 당기는 과정에서 줄이 커진다. 

    정월 13일 정도가 되면 어른들이 줄을 제작하는데, 동부(암줄)와 서부(수줄)를 각각 만든다. 1980년에 제작한 줄은 길이가 100미터를 넘었다고 한다. 

    줄을 당기기 위해서는 많은 인원이 필요하다. 많을 때는 무려 2~3만 명이 참여하였다. 동부에는 수영, 안락, 거제, 양정, 해운대, 기장 지역 주민이, 서부에는 금곡, 구포, 온천, 복천 지역 주민이 참여한다. 그리고 개별 팀에는 대도독사령관을 비롯해 줄을 이끌 대표자를 선정한다. 


    2~3만명이 모여 2~3일 동안 줄을 당기던 큰 행사

    줄이 완성되면(14일경) 풍물패의 장단에 맞춰 줄을 어른다. 이 과정에서 노래를 부른다. 줄을 당길 장소로 줄이 옮겨지면 두 줄을 맞댄 다음 고사를 지낸다. 고사를 지내는 목적은 아무런 사고 없이 줄다리기 행사를 잘 치룰 수 있도록 기원하기 위함이다. 

    줄이 워낙 큰 탓에 두 줄을 결합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2~3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이유로 2~3일 동안 줄을 당긴다. 수만 명이 참여하던 시절에는 승부를 판단하기도 어려웠다. 승부가 결정되면 이긴 쪽에서는 비녀목과 줄을 어깨에 메고 노래를 부르며 마을을 돌아다닌다. 

    특이한 것은 이긴 쪽에서 줄을 모두 가져간다는 사실이다. 이 줄을 창고에 보관해 두었다가 다시 줄을 만들 때 사용하지만 일부는 팔기도 하였다. 

    동래 줄다리기는 비록 예전처럼 큰 규모로 행해지지는 않지만 역사와 규모 면에서 의미가 있는 문화자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