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부터 열린 여주도자기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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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도자기축제 포스터(사진출처:여주시)

    여주도자기 축제는 1990년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도자기의 예술적 가치를 계승하고 나아가 이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개최된다. 또한 여주도자기축제를 통해 도자기 문화를 대중화하고 도자기의 세계화를 꾀한다. 여주도자기축제는 신륵사 국민관광지와 도예촌 등에서 매년 4월~5월에 2주간 개최된다. 


    여주는 울창한 소나무와 양질의 고령토, 그리고 깨끗한 물이 있어 도자기 생산에 적합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여주도자기는 중암리 고려백자 가마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경기도 박물관에서 2차에 거친 발굴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199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견한 중암리 가마터는 2001년과 2003년 2차에 걸쳐 경기도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하였다. 경기도 박물관 조사결과, 중암리 가마터는 여주 도자기의 역사를 천년 끌어올렸고, 시흥 방산동·용인 서리 가마터와 더불어 우리나라 초기 가마터 연구의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우리나라 도자기 발생의 초기상황과 변천과정 그리고 초기 백자의 편년연구의 중심에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도기소(陶器所) 하나가 여주 관청의 북쪽 관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현채를 비롯한 몇 사람의 도공이 1884년 광주분원이 없어지자 여주에 정착해 요강과 막사발을 제작하고 이를 전국적으로 보급했다. 여주도자기의 전통은 일제강점기에도 면면히 이어져 1950년 5개의 생활도자기 공장이 새로 설립되었다. 1960년 후반 도자기 산업의 호황으로 많은 공장이 설립되어 운영되었고, 1970년에는 40개소, 1980년에는 100개소 등으로 증가하여 현재까지도 많은 도자기 공장이 한국 도자기 생산을 주도하고 있다. 여주에서 생산되는 전통 및 생활도자기는 전국 생산량의 60%를 차지하고 있고 현재 여주에는 600여 개의 도요가 갖추어져 있다. 


    여주도자기 축제는 평소 접하기 어려운 도자 예술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관광객이 직접 나만의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데, 흙을 밟으며 흙의 질감을 직접 느끼는 이색적인 체험이 될 것이다. 여주도자기 축제의 프로그램 중 ‘전국도자접시깨기’는 관람객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도자접시깨기는 도공들이 판매 불가한 도자기를 깨는 전통에서 힌트를 얻은 프로그램으로, 체험권이 매년 완판될 정도이다. 여주도자기 축제에서는 오감을 통해 도자기를 느낄 수 있다. 시각(작품 감상)·청각(사찰 풍경소리)·후각(아로마향)·미각(찻잔에 따라 마시는 차)·촉각(터치스크린)을 동원해 도자기를 즐기는 것이다. 


    최근 여주도자기축제는 그동안의 성공적인 축제로 자리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콘텐츠 부재라는 불만과 ‘그들만의 잔치’라는 소리도 나오고 있는데, 여주시가 가지고 있는 자연환경과 역사 등을 활용하고 연계하여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신륵사 앞을 흐르는 남한강도 중요한 소재로 활용해볼만한 자연자원이다.

  • 세계도자비엔날레와 함께 하는 이천도자기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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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도자기축제 포스터(사진출처:이천시)


    이천도자기축제는 1987년부터 매년 4~5월에 개최되는 축제이다. 설봉문화제의 단위행사로 시작된 이천도자기 축제는 이제는 단순히 도자 상품을 판매하는 축제가 아니라 공예도시 이천의 도시 상징을 나타내며 브랜드 마케팅을 주도하는 세계적인 축제로 성장하고 있다.


    이천에서 도자기축제가 가능한 배경은 역사적 연원에서 찾을 수 있다. 이천의 효양산, 장동리, 설봉산성에서 발견된 유물을 통해 이천에서 도자기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들 세 지역에서 발견된 대형 항아리·오기·무문토기·선사시대 토기 파편·삼국시대 기와와 파편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이천은 청동기시대 이래 토기제작이 활발했고, 삼국시대 패권의 각축장이었던 까닭에 삼국의 토기 문화들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다만 삼국시대 이천에서 자기제작을 하였다는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조선시대 중종대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이천의 특산품으로 백옥(白玉)과 도기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도자기제작이 이천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사음동(沙音洞 -사기막골)유적지와 해월리(蟹越里)·마옥산(磨玉山)·관리(冠里) 가마골을 통해 확인할 수 있고 점말가마터 등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사기막골의 경우 가마터가 5군데 확인되는 곳인데 이곳의 도공들이 광주분원(廣州分院)에 공역을 나갔다고 한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청자·분청·백자가 발전과 쇠퇴를 하였는데 이천의 신둔면 수광리 일대는 칠기가마가 2군데 현존하면서 근현대시기 도자기의 맥을 잇고 있었다. 1950년대 이후 전통도자기를 재현하는 도공들이 이천시 신둔면 일대에 터를 잡기 시작하면서 전통도자기 부활을 위한 노력이 가속화 되었다. 1976년 이후에는 가마 설립이 급속하게 증가하면서 이천은 전통 도자기 주요 생산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1981년에는 한국전승도예협회가 설립되어 도예의 저변확대를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1987년부터 시작된 이천도자기축제는 도자기산업의 발전과 국제화라는 목적으로 시작되어 1995년에는 이천 도자기조합이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이천도자기축제는 2001년부터 2년에 한 번씩 세계도자비엔날레도 같이 개최하고 있다. 국내축제가 아닌 세계적인 축제로 개최되는 세계도자비엔날레는 이천과 여주 그리고 광주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다. 2010년 이천은 공예와 민속예술분야 유네스코 창의도시로 선정되었고, 2018년에는 유네스코 공예분야 창의도시 의장도시로 선정되어 세계적인 도자도시로서 거듭나게 되었다. 이천시가 유네스코 창의도시로 선정되면서 시에서는 해외의 축제에 이천의 도공들이 직접 시연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으며, 해외의 유명한 도자도시와 교류사업도 지속적으로 유지 확대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도 이미지메이킹이나 문화예술 창작분야 활용을 통해 이천도자기를 국내외에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천도자기는 세계의 특산품으로 거듭나고 있다.


    축제가 거듭되면서 이천도자기축제를 지역축제가 아닌, 지역의 상징성을 드러내는 세계적인 축제로 만들기 위해 민관이 여러모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축제라는 것이 관주도, 민간주도 어느 것이 효율적인 것인가에 대한 갈등으로 축제를 둘러싸고 불협화음이 나오는데, 이 역시 어찌보면 성장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장통은 축제 발전을 위해 오랜 동안 지속되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 국내 유일의 분청사기 축제, 김해분청도자기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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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분청도자기 축제 포스터(사진출처:김해시)


    도자기를 주제로한 축제는 전국적으로 여주도자기축제, 이천도자기축제, 광주왕실도자기축제, 문경도자기축제, 강진도자기축제 등이 있다. 김해에서 열리는 도자기축제는 다른 도자기축제와 달리 유일하게 분청사기를 주제로 개최된다. 매년 10월 말~11월 초에 개최되는 김해분청도자기축제의 분청은 전라남도 강진의 청자, 경기도 이천의 백자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도자기 중의 하나이다. 


    분청사기는 서민의 삶과 같이 하는 생활자기이기 때문에 민족자기로도 불린다. 모양은 투박하지만 형태와 문양이 자유롭다. 표현방식도 자유롭고 박진감과 뛰어난 예술성으로 한국적 미의 원형이라고도 한다. 김해분청사기는 2천년전 가야 토기의 맥을 잇고 있는 일본 분청사기의 원류라고 알려져 있다. 김해지역이 도자기로 유명한 것은 이곳이 가야국 땅이었고, 이 곳 가야토기를 기반으로 2,000년 전부터 분청도자를 빚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분청사기라는 명칭은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1940년경 백토로 분장하여 회청색을 띠는 특징을 가진 도자기에 분청회청사기라고 명명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분청사기는 14세기중엽~16세기 중엽에 주로 생산되었고, 15세기 세종대왕 때 다양한 기법의 분청사기가 발전하였다. 14세기 중후반은 고려 상감청자에서 분청사기로 이어지는 중간 단계의 시기이다. 청자의 정형이 사라지면서 분청사기로 이어져 상감청자의 기법을 응용한 분장인화기법이 나타나게 된다. 분청사기의 백토분장기법은 그릇 표면에 백토를 씌우는 기법으로 본래의 회색 태토가 드러나지 않고 백토를 바른 후 조각을 하거나 긁어내어 무늬를 내는 분청사기만의 독특한 장식법이다. 15세기~16세기에는 분청사기가 단지 청자와 백자의 과도기적 양식이 아니라 새로운 미와 양식을 드러내게 되었다. 분청사기는 우리나라 도자기사에서 가장 한국적인 미의 원형으로 평가하고 있다.  한국미의 본질 중 한 요소를 이루는 획일적 틀을 거부하고 생동하는 생명력을 포착하는 한국인의 기질이 도자기에도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도자기를 제작하는데 있어 좋은 흙, 가마용 땔나무와 물 그리고 도자기를 팔고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교통이 중요하다. 김해는 인근의 산지와 퇴적도, 낙동강을 끼고 있어 흙, 나무, 물이 풍부하고 교통 또한 좋다. 도자기 제작에 최적화된 곳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자료들에 의하면 김해의 토산공물이 자기(『경상도지리지』김해도호부)라고 기록되어 있고, 도자기를 제작하는 자기소, 도기소(『세종실록』「지리지」)가 기록되어 있어 김해지역의 요업이 어느정도 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특히 김해 상동면 대감리 분청사기 가마의 발굴은 당시의 김해 지역 가마운영과 제작품의 변화를 밝힐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1996년 처음 시작된 김해분청도자기축제는 2019년 24회를 맞이하고 있다. 김해군과 김해도예협회가 중심이 되어 축제를 개최한다. 

  • 찻사발 장인들이 함께 하는 축제 '문경전통찻사발축제'

    전통 방식으로 찻사발을 만들어온 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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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 전통찻사발축제 포스터(사진출처:문경시)


    문경찻사발축제는 경상북도 문경시에서 찻사발을 주제로 개최되는 축제이다. 경상북도 문경은 ‘문경새재’라는 유명한 고갯길이 있어, 서울과 영남을 오고가는 길의 중심지였다.


    문경새재는 서울로 가는 관문이었다. 또한 문경은 풍부한 사토와 땔감이 있었고, 잘 발달된 수송로가 있어 도자기 산업이 발달하기 좋은 적지였다.


    문경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 장작 가마를 비롯한 약 200개의 도요지가 있다. 그리고 전국 도예명장 8인 중 2인이 문경에서 활발하게 도예 활동을 하고 있다.


    문경에서는 예로부터 전통 방식으로 찻사발을 만들어왔는데, “찻사발의 주원료가 되는 사토를 캐내 발물레로 찻잔을 성형하고, 망댕이 가마를” 이용해 구워낸다.



    문경찻사발축제에서는 이렇게 찻사발을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찻사발을 활용하는 방법까지 모두 관람할 수 있다. 그리고 사토와 망댕이 가마 등도 체험할 수 있다. 아울러 찻사발을 활용한 여러 가지 체험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1999년 처음 개최된 문경찻사발축제는 문경시가 주최하고, 문경문화관광재단과 문경찻사발축제추진위원회가 주관하며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에서 열린다. 


    자주 바뀐 축제 명칭 

    문경찻사발축제는 명칭이 자주 바뀌었다. 1999년 제1회에서 2003년 제5회까지는 '문경전통찻사발축제', 2006년 제6회는 '문경새재 대축제', 2005년 제7회부터 2007년 제9회까지는 ‘문경한국전통찻사발축제’, 2008년 제10회부터 2018년 제20회까지는 ‘문경전통찻사발축제’로 진행되었다. 그러다 기억하기 어렵다는 여론을 수렴하여 2019년 ‘문경찻사발축제’로 명칭을 간소화하였다. 2001년~2003년 경상북도 우수축제, 2005년~2007년 문화관광부 예비축제,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 유망축제, 2009년~2011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축제, 2012년~2016년 문화체육관광부 최우수축제, 2017년~2019년 문화체육관광부 대표축제이다.


    매년 축제의 주제를 정했는데, 1회와 2회는 ‘전통과 현대의 만남’, 제3회는 ‘인간, 흙, 불의 향연’, 제4회와 제5회는 ‘흙과 불의 향연’, 제6회는 ‘전통과 자연의 좋은 만남’, 제7회는 ‘전통도자기와 웰빙의 만남’, 제8회는 ‘혼을 굽는 장인과의 만남’, 제9회는 ‘다시피는 천년의 불꽃’, 제10회는 ‘어기여茶 디여茶’, 제11회는 ‘ 聞香천년 茶香만리’, 제12회는 ‘천년의 숨결 차의 향연’, 제13회는 ‘찻사발에 담긴 천년사랑’, 제14회는 ‘흙, 불, 바람의 어울림’, 제15회는 ‘첫사발에 담긴 전통, 그 깊은 울림!!’, 제16회는 ‘발물레 차는 사기장 이야기’, 제17회는 ‘망댕이 가마 불지피는 사기장의 하루’, 제18회는 ‘사기장이 들려주는 찻사발이야기’, 제19회와 제20회는 ‘문경 찻사발의 꿈! 세계를 담다.’, 제21회는 ‘쉬고, 담고, 거닐다’를 주제로 축제가 진행되었다.

     

    도예명장과 찻사발 빚기 

    문경찻사발축제는 ‘공식행사, 기획전시, 특별행사, 체험행사, 알찬행사, 다례시연, 야간행사, 공연행사, 도자기경매’ 등으로 구성된다. 공식행사로는 ‘개막연회, 전국찻사발공모대전 시상식’. 기획전시행사로는 ‘대한민국 도예명장전, 문경 도예명장전, 문경도자기 명품전, 전국찻사발공모대전, 어린이 사기장전’ 등이 진행된다. 특별행사로는 ‘문경 도예명장 경매, 문경도자기 깜짝 경매, 문경도자기 명품 경매, 문경도자기 현장경매, 사기장의 하루’ 등이 진행된다.


    체험행사로는 ‘왕의 찻자리, 나의 수제자가 되어주겠나?, 첫사발 그림 그리기, 첫사발 빚기, 차담이 어드벤처’ 등이 진행된다. 알찬행사로는 ‘찻사발 타임 “1250”, 등금장수 퍼레이드, 경품 추첨, 찻사발 방송국, 인생샷 포토존’ 등이 진행된다. 다래시연행사로는 ‘아름다운 찻자리 및 다례시연, 전국 “가루차 투다(鬪茶) 대회”’ 등이 진행된다. 야간행사로는 ‘점촌 夜 밤에 한사발’, 공연행사로는 ‘멍석 버스킹’이 진행된다. 문경도자기경매는 깜짝경매, 명장경매, 명품경매로 나누어 진행된다.


    『2017년 문화관광축제 종합평가 보고서』에 의하면, 문경찻사발축제의 “가장 좋은 점은 전통 장작 가마를 사용하는 도예인들이 직접 참가하는 축제”로 여러 찻사발 장인들이 함께 하는 축제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문경에서는 찻사발 생산이 전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나 축제 장소는 문경새재 야외공연장과 오픈세트장 일대에서 열린다. 따라서 다른 축제들과 달리 축제의 주제와 장소가 일정 부분 일치한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 흙을 빚고 불을 피우는 체험 '강진청자축제'

    500년간 청자문화를 꽃피운 강진 

    강진청자축제는 청자의 발생에서 쇠퇴기까지 약 500년간 청자문화를 꽃피운 강진 청자문화의 맥을 잇고 고려청자의 우수성을 홍보하기 위한 도자기문화 예술축제이다. 풍부한 점토와 온화한 기후 조건을 가진 강진은 고려시대 청자문화의 발상지이다. 현재도 200개의 가마터가 산재해 있으며, 우리나라의 국보와 보물급 청자 중에서 80%는 강진에서 생산된 것이다. 9세기부터 14세기까지 약 500년간 청자를 빚어온 청자골은 국가 사적 68호로 지정되었다.


    강진청자축제의 전신은 1973년 개최된 ‘강진군민의 날 및 금릉문화제’이다. 1996년 축제 명칭에서 금릉을 빼고 ‘군민의 날 및 청자문화제’로 변경하고 제1회 청자문화제를 개최했다. 2009년부터 강진청자축제로 명칭을 바꾸고 “금릉문화제가 포함된 횟수로 조정하여 제37회 청자축제를 개최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강진청자축제는 강진군이 주최하고, 강진군향토축제위원회가 주관하며 매년 9~10월 중에 강진군 대구면 고려청자박물관 일원에서 개최된다. 강진청자축제는 “축제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국가 지정 집중 육성축제에 5회, 대표축제에 2회,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최우수축제에 13회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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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청자축제 포스터(사진출처:강진군)

     

    직접 흙을 빚고 가마에 불 지피고 깨뜨려보자 

    강진청자축제는 고려시대 무명 도공들의 넋을 추모하는 청자축제 기원제로 시작된다. 체험놀이 프로그램으로는 ‘강진 문화유적 투어, 나도 청자축제 SNS 서포터즈!(현장 즉석참여), 물 풍선 터뜨려 청자 가져가기, 물레 성형하기, 볼링공 청자 깨뜨리기, 봉숭아 손톱 물들이기, 어린이 짚트랙 운영, 오물락 조물락 청자만들기, 잉어 등 물고기 먹이주기 체험, 전통 옹기 제작 시연 및 체험, 청자 상감 체험, 청자 스탬프 랠리, 청자 액세서리 만들기, 청자 코일링 체험, 청자 풍경 만들기 체험, 청자(만들기)야 반갑다!, 청자골 야생 수제차 다도체험, 청자문양 페이스 페인팅, 청자조각하기 체험, 청자축제 (토우)캐릭터 만들기 등이 진행된다. 초대형 워터 슬라이드도 운영하고, 흙을 밟고 던지고 적실(투게더 점핑 소일) 수 있는 축제이다. 희망의 불꽃 화목가마 불 지피기도 시연해볼 수 있다. 또한 청자 판매 공간을 마련하여 청자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게 쿠폰을 발행하고 다양한 이벤트도 개최된다. 

     

    고려청자의 탄생을 입체적 스토리로 구성 

    『2017년 문화관광축제 종합평가 보고서』에 의하면, 강진청자축제는 “축제개막식 행사를 화목가마 불지피기-청자마임 길놀이-주무대 주제공연 등의 순으로 고려청자 탄생 스토리를 입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관광객들이 고려청자에 대한 이해력을” 높여 축제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드러냈으며, 축제기간 중에 청자와 관련된 상품을 30% 할인 판매하여 고가․고급상품으로 인식된 고려청자의 대중화에 앞장섰으며 청자 상품의 판매를 촉진하여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 옹기마을에서 흙을 빚고 구워봐요! '울산옹기축제'

    옹기마을에서 개최되는 울산옹기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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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옹기축제 포스터(사진출처:울주군)


    울산옹기축제는 국내 최대 규모의 옹기집산지인 울산광역시 울주군 외고산 옹기마을에서 개최되는 현장성이 강한 축제이다. 옹기축제는 2000년 11월 울주군 외고산에 거주하던 옹기 장인이 주민 화합의 장을 마련하고자 소규모로 시작하였다. 이후 규모가 커지면서 2003년 11월에는 ‘온양옹기축제’, 2004년 10월에는 ‘외고산옹기축제’, 2006년 10월에는 ‘울주외고산옹기축제’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다.


    2011년 9월부터 ‘울산옹기축제’로 축제 명칭을 변경하였다. 2012년부터 축제 개최시기를 5월로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울산옹기축제는 울주군이 주최하고 울산옹기축제추진위원회와 울산외고산옹기마을협동조합이 주관하며 울주군 온양읍 외고산 옹기마을 일원에서 열린다. 2009년, 2016년,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 문화관광축제의 유망축제로, 2018년에는 육성축제로 선정되었다.




    외고산 옹기마을의 유래

    옹기는 도기의 한 종류로, 자기보다 차진 흙으로 빚고, 자기보다 낮은 온도에서 굽는다. 빗살무늬토기로부터 비롯된 흙그릇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옹기는 숨 쉬는 그릇으로 통기성, 방부성 등이 뛰어나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고 있으며, 웰빙 유행에 맞는 건강용 도자기로 각광을 받고 있다. 외고산 옹기마을은 “1957년 허덕만 씨가 이주하여 옹기를 굽기 시작하면서 옹기촌이 형성”된다. 한국전쟁 이후 옹기수요가 증가하면서 옹기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1960~1970년대에는 약 350명의 장인과 도공들이 거주했고, 당시 마을에서 생산한 옹기는 서울뿐 아니라 미국·일본에까지 수출되었다.” 울산광역시가 전통옹기체험마을로 지정했으며, 마을에는 옹기전시관․옹기회관․체험실습장․상설판매장 등이 있다. 『2006 문화관광축제 종합평가 보고서』에 의하면, 울산광역시 울주군 외고산 옹기마을은 전국 50%이상의 옹기를 생산하는 전통과 문화가 살아 있는 전국 최대의 옹기민속마을이다.


    흙을 밟고, 빚고, 굽는 체험 축제

    울산옹기축제의 대표 프로그램은 ‘외고산 옹기장터길, 옹기장날 공식 경매행사 및 깜짝경매, 옹기사랑 상품권 운영, 옹기마을 추억길’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프로그램으로는 외고산 옹기장인들의 옹기 제작 시연과 최대 옹기 제작 시연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옹기장인 시연관’, 옹기가마 소원장작 넣기와 가마 먹을거리를 체험할 수 있는 ‘불가마촌’, 흙밟기 놀이․흙놀이 미끄럼틀․흙 던지기․흙 조각 만들기․훠터 슬라이드․옹기대첩(옹기마을에서 진행되는 물총놀이) 등 옹기흙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흙장난촌’, 동화 속 주인공과 함께하는 옹기이야기인 ‘동화 속 옹기이야기’, 젊은 연인들을 위한 포토존과 함께 하는 이색적인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옹기공장 감성카페’가 있다.


    주요 체험․참여 프로그램으로는 초등학생들이 펼치는 개성만점 옹기만들기 경연대회인 ‘어린이 옹기 장인 선발대회’, 가족끼리 혹은 연인끼리 옹기작품도 만들고 상품도 타가는 ‘전국가족옹기 만들기대회’,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옹기작품을 만드는 ‘나만의 옹기 만들기 체험’, 옹기 다기 속 전통차의 향기와 운치에 빠지는 ‘옹기다례 체험’, 옹기만들기의 시작인 ‘옹기코일링 체험’, 장인들의 옹기물레 위에 나만의 옹기를 만드는 ‘옹기물레․전기물레 체험’가 있으며 그밖에 ‘옹기발효음식․발효꽃차 제험, 소원지달기, 황금옹기를 찾아라, 찾아가는 미디어 체험’ 등이 있다. 주요공연으로는 ‘마당극 공연, 옹기축제 개막행사, 전국청소년댄스 퍼포먼스대회 “발악”, 전국옹기가요제, 감성카페 별빛콘서트’가 있으며, 주요 전시행사로는 ‘현대옹기 상품전, 세계옹기특별전, 대통령 방문기념 서명 옹기 특별전, 옹기공모전 입상작전, 옹기마을6차산업프로젝트 상품전, 울주민속박물관 기획 사진전’ 등이 있다.


    재방문객이 점점 많아지는 축제  

    2019년 울산옹기축제의 방문객은 15만 4,352명으로 집계됐다. 그리고 “34억 원의 직접 경제효과를 창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축제의 재방문객 비율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17년 39.3%에서 2018년 49.7%, 그리고 2019년에는 52.5%로 나타났다. 재방문객 중 3회 방문객이 가장 많은 38.9%였으며, 2회 방문객이 35.6%이고, 4회 이상 방문객도 25.5%로 조사되었다. 『2016년 문화관광축제 종합평가 보고서』에 의하면, 울산옹기축제는 “국내 유일의 옹기축제로서 ‘옹기’라는 특화된 주제를 부각”시킨 차별화된 축제라는 점, 대부분의 축제가 임시로 조성된 공간에서 개최되는 데 비해 울산옹기축제는 옹기마을이라는 마을 공간을 활용한 축제라는 점, 그리고 옹기라는 주제를 부각시킬 수 있는 체험․공연 프로그램이 방문객들의 참여와 흥미를 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 왕실 백자를 만들던 분원리에서 펼쳐지는 ‘광주왕실도자기축제’

    경기도 광주 분원리는 왕실용 백자 생산지

    조선시대 가장 질 좋은 백자를 생산한 상품 자기 생산소는 광주, 상주, 고령이다. 이중 한양에서 가장 가까운 도기소는 경기도 광주 자기소로, 16세기에 이미 중앙관요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분원리 관요의 왕실 도자기 생산은 1883년에 도요지가 민영화되기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1973년 팔당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어, 그 주변지역은 사적314호로 지정하고, 그 독보적인 위상을 토대로 곤지암도자공원에서 ‘왕실도자기기축제’가 해마다 5월에 개최된다. 

    광주 왕실도자기축제 포스터 이미지
    광주 왕실도자기축제 포스터(사진출처:광주시)


    왕실도자기와 다른 도자기의 교류 

    곤지암도자공원에서는 광주 관요에서 생산한 왕실 도자기의 명맥을 이어 도예명장들이 제작한 도자기를 전시하여, 조선백자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있다. 특히 60여명의 도자기 명장들의 손에서 재현된 국보 중 광주에서 생산된 도자기와 시대를 초월한 창작품들을 전시관에서 볼 수 있다. 2019년의 '오감만족 왕실도자여행'이라는 주제로 열린 축제에는 왕실도자기 테이블웨어가 전시되어 전통방식으로 제작된 현대적 디자인의 도자기도 체험할 수 있다. 광주왕실도자기 축제에서는 조선시대 왕실 도자기 멋을 체험하는데 그치지 않고 국내외 도자기 교류전을 연다. 조선시대 관요 중 하나인 전남 강진에서 생산된 도자를 교류 전시하여 광주백자와 또 다른 멋을 지닌 강진백자의 멋을 비교 체험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웃한 중국의 도자와 교류전을 하기도 했다.  

     

    직접 도자기를 만들어보는 오감(五感) 만족 체험 

    아름다운 공예작품으로서의 왕실 도자기를 보았다면, 그 다음에는 직접 만들어볼 차례다. 시민들이 도자기를 직접 만드는 6가지 도자기 체험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는데 AR과 드론을 이용한 체험도 준비돼 있다. 물레를 직접 돌려보고, 빙빙 돌아가는 물레 위에서 하나의 흙덩어리가 펴지면서 사발도 되고, 넓은 접시도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부드러운 흙으로 형태를 만든 그릇에 백토를 발라 구우면 유약처리가 된 백자가 완성된다. 


    아름다운 공예품을 만드는 예술의 고장답게 다양한 공연이 오색별별마당에서 곁들여진다. 오카리나 공연을 시작으로, 광주시립 광지원농악단의 공연과 줄타기 공연, 예결밴드 공연, 버스킹공연, 브라스통, 가천대 오케스트라 공연, 매직센트 및 풍선쇼 공연, 찾아가는 문화 예술공연 (광주시연예협회), 공개방송 가요TV 등으로 다채로운 공연들이 펼쳐진다. 

  • 조선시대 남부 최대의 상인 병영상인

    전라남도 강진군은 한반도 서남해안 끝에 위치해 서해안과 남해안이 만나고, 중국과 일본의 중간지점의 항로에 위치해 있어 오래전부터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다. 이곳 강진군에 병영면이라는 곳이 있는데, 1417년 전라도와 제주도를 관할하는 전라병영성이 있었던 곳에서 지명이 비롯되었다. 이곳 병영성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어 전라도 일대에서 중심적인 상업지역이 되었다. 흔히 개성상인과 비교되는 남부 최대의 ‘병영상인’을 형성하게 된다. 1656년(효종7년)에는 우리나라에 표류한 하멜 일행 33명이 이곳 전라병영성에서 약 8년간 억류되어 있기도 하였다.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와 병영상인의 탄생

    882년 통일신라시대 장보고가 군사시설인 청해진을 설치하고,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삼각 국제무역을 벌이면서 ‘병영상인’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강진군에서의 고려청자 생산을 계기로 병영상인이 발전하게 된다. 강진군에는 공납(貢納)을 위해 강진에서 개경으로 청자를 실어 나르는 뱃길이 있었으며, 제주도에 청자를 팔러 다니는 일반 상인이 존재하기도 하였다. 청해진 일대에서 활동했던 상인의 후예들은 고려시대 고려청자 생산과 유통을 담당하였다.


    전라병영성 축조와 병영상인

    1417년 전라병영성이 강진군 병영면으로 옮겨오게 된다. 석성을 쌓는 토목공사가 벌어지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공출되었다. 성 주변에 거대한 주거단지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필요한 자재와 식량을 공급하는 상인이 필요했다. 또한 병영성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취급할 수 있는 상인도 요구되었다. 이 무렵에 ‘병영상인’이 독자적인 상업을 확장해 나간다. 당시 병영성 인근으로 유입된 인구가 2만 명이 넘어섰고, 가구 수는 3,000호를 넘었다고 한다.


    병영상인들의 판매 물품과 국제무역

    조선시대에는 병영유지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군사들의 상업 활동을 어느 정도 허용하였다. 병영성은 베를 이용해 철을 수입하기도 했으며, 대마도에서 조총을 수입하기 위해 부산으로 조총대금을 수송하기도 했다. 전라도를 비롯한 조선 각지의 관청도 특산품 판매활동을 했다. 한편, 병영에 군역을 들어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용할 물품들을 직접 가져와야 했다. 거기다 세금으로 바칠 무명베와 쌀까지 지참해야 했다. 그렇기에 병영성 일대에는 군역 온 장정들이 구입할 각종 물건들을 파는 상가들이 즐비했을 것으로 보인다.


    병영성 폐쇄와 병영거상의 등장

    1894년 동학농민군에 의해 병영성이 함락되었다. 관아와 병영의 민가들은 거의 대부분이 불에 타버렸고, 1895년 병영성은 폐성이 되었다. 병영성을 의지해 생계를 이어갔던 상인들은 살길을 찾아 전국으로 흩어졌다. 장사에 밝았던 병영군사들과 상인들은 곧 자리를 잡았다. 신용과 정직을 최고의 밑천으로 삼은 병영출신 상인들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병영거상(兵營巨商)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 ‘경기도자박물관’, 왕실 도자의 기품있는 나들이

    조선시대 ‘분원’이 있던 바로 그곳

    경기도 광주는 ‘분원’이 있던 지역이다. 분원은 왕실에 도자기를 공급하던 곳을 말한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전국 여기저기에서 도자기를 가져다 썼지만, 조선으로 넘어와 15세기 후반부터는 경기도 광주에 왕실 전용 가마와 작업장을 지어 분원을 설치하고, 사옹원[조선시대 궁중에서 음식을 담당한 관청]에서 관리하도록 했다. ‘분원’이라는 이름은 사옹원에 속한 분사(分司)라는 뜻의 ‘분사옹원(分司甕院)’을 줄인 말이다.

    경기도자박물관 외부 전경
    경기도자박물관 외부 전경(사진출처:경기도자박물관)

    분원으로 광주가 선정된 이유는 일단 질 좋은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있었고, 가마의 연료인 땔나무가 풍부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던 까닭에 흰색의 백자 그릇을 주로 사용했다. 그래서 분원에서 생산된 도자기는 백자가 대다수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온통 백색이지만 전혀 심심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흰색 빛깔이 아름다운 무늬 없는 백자는 물론 청화[원료 코발트]ㆍ철화[원료 산화철]ㆍ진사[원료 산화동] 안료로 그림을 그린 백자, 구멍을 뚫거나 사물과 동식물의 모양을 본뜬 백자 등 모양과 장식이 다채로운 까닭이다.


    오랫동안 조선시대 도자 문화를 이끌던 분원은 아쉽게도 19세기 말 문을 닫는다. 사회 문란과 외세의 위협 속에서 조선 왕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자, 왕실 전용 가마인 분원 역시 흔들렸던 탓이다. 사기 장인들은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고, 일본에서 들어온 값싼 사기그릇이 유통되면서 경쟁력까지 잃게 되자 결국 1884년에 민영화됐다가 일제강점기 때 문을 닫았다. 지금은 백자를 구웠음을 알려주는 가마터만 남았지만, 경기도자박물관을 방문하면 광주의 수준 높은 도자 문화의 증거들을 보고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 백자 이야기

    경기도자박물관 상설 전시실
    경기도자박물관 상설 전시실(사진출처:경기도자박물관)

    경기도자박물관의 상설전시실은 ‘도자기로 본 우리 역사’를 주제로 우리나라의 도자기 문화가 어떻게 변하고 발전했는지를 소개하는 곳이다. 고려시대에는 중국과의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청자 제작 기술을 받아들여 고려만의 ‘비색(翡色)’을 완성했고, 국가 이념의 변화와 세계적인 백자 선호 흐름에 맞춰 조선시대부터는 백자 생산에 주력했다. 


    도자기에 표현된 무늬에서도 이웃 국가들과의 교류 양상, 당시의 경제 사정 등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도자기는 단순히 그릇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비추는 거울과 다름없다. 관람객은 고려시대 청자에서부터 시작해 분원이 설치되기 전과 후의 백자들을 시대 순서로 관람할 수 있다. 왕실 도자기에서만 쓰였던 용무늬가 화려한 청화백자 항아리를 보며 왕실 전용 가마의 위엄을 느끼고, 한 편의 수묵화를 보는 것 같은 수준 높은 산수와 문양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경기도자박물관 상설 전시실
    경기도자박물관 상설 전시실(사진출처:경기도자박물관)
    경기도자박물관 상설 전시실
    경기도자박물관 상설 전시실(사진출처:경기도자박물관)


    우리의 도자 문화를 잇는 사람들은 누구?

    경기도자박물관에서는 조선시대 전통 도자기뿐만 아니라 현대의 주목할만한 도자공예 작가들의 전시도 볼 수 있다. 도자기가 옛것에 머물지 않고, 지금 그리고 미래 세대의 ‘쓰임’이 있는 일상생활 도구이자 중요한 문화 콘텐츠로 이용되기 위함이다. 경기도자박물관에서 운영 중인 ‘전통 공예원’은 2014년 한국 도자 예술의 발전과 신진 도예 작가들의 작업을 지원하기 위해 세워졌다. 물레며 가마, 흙을 반죽하고 곱게 가는 기계 등이 두루 갖춰져 있고, 작업 공간도 넉넉해서 젊은 도예 작가들이 입주해 작업에 몰두하기 좋은 환경이다. 도예 작가들에게는 안정적인 작업 환경을, 관람객에게는 현대 작가들의 최신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니, 일거양득이 아닐까.

    경기도자박물관 외부 전경
    경기도자박물관 외부 전경(사진출처:경기도자박물관)

  • ‘고흥분청문화박물관’, 오백 년 전 고흥의 도자 산업 단지를 찾아서

    고려시대부터 도자기의 고장

    요즘이야 ‘도자기’라고 하면 경기도 광주, 이천, 여주 등지를 꼽지만, 500여 년 전에는 고흥군 운대리 역시 중요한 도자기 생산지였다. 지금으로 치자면 고흥에 대규모 도자 산업 단지가 있었달까. 운대리가 중요한 도자 생산지였다는 것은 32개에 달하는 청자와 분청사기 가마터가 증명해 준다.


    이 중 청자 가마터는 2021년도에 발굴 조사를 시작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청자가 막 만들어지던 시기에 생산된 ‘청자햇무리굽완’을 비롯해 고려 초기의 것임을 알 수 있는 여러 청자 조각들이 확인됐다. ‘햇무리’란 해 주변에 생기는 반지 모양의 둥근 테두리[무지개의 일종]로, ‘햇무리’처럼 생긴 굽 모양은 고려 초기에만 만들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가마에 도자기를 넣을 때, 허드렛용은 그냥 그대로 재우지만, 고급 자기의 경우 도자기 위로 재나 불순물이 달라붙지 않도록 ‘갑발’을 씌워서 굽게 된다. 그런데 고흥 운대에서도 이 갑발이 출토됐다. 이곳이 고급 청자를 굽던 첨단 시설이었다는 뜻이다.

     

    덤벙했을 뿐인데, 매력 상승!

    고려시대부터 도자기를 생산했지만, ‘고흥 운대리’ 하면 역시 그 중심은 ‘분청사기’다. 운대리 분청사기 가마터 중 1·2호는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19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고흥 운대리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면, 분청사기를 장식하는 7개의 기법, 즉 ‘상감’, ‘철화’, ‘인화’, ‘조화’, ‘귀얄’, ‘박지’, ‘덤벙’이 모두 확인되지만, 이 중에서도 ‘덤벙 분청사기’의 질이 매우 뛰어나다. ‘덤벙 기법’이란 흙으로 그릇을 만든 후 백토물에 덤벙 담갔다 빼는 장식법을 말한다. 


    이렇게 하면 도자기 표면이 뽀얀 흰색으로 덮여, 본래의 흙색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마치 백자와 같은 자태를 뽐내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다른 지역에서도 덤벙 분청사기는 생산됐다. 그러나 운대리에서 하는 것처럼 굽까지 백토물에 담근 예는 많지 않다. 이곳 운대리의 도공들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분청사기를 빚었을지, 그 노력과 정성을 알만하다. 


    가마터 발굴 현장을 경험할 수 있는 전시실

    고흥 운대리에서 출토된 분청사기를 보려면 1층에 있는 분청사기실을 찾으면 된다. 운대리에서 발굴된 분청사기 가마터[재현물]를 유리 바닥 밑으로 내려다보고, 또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가마터 출토 분청사기 조각들도 관람할 수 있다. 잘못 구워져서 폐기한 도자기가 이 정도일진대, 밖으로 팔리거나 진상된 것은 얼마나 많을까. 고려시대 사람들이 운대리 생산 분청사기를 사용하는 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


    눈으로만 보는 박물관은 가라! 고흥분청문화박물관에서는 전시실 내에서 가마터 발굴 체험을 할 수 있다. 분청사기 가마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안에 도자기를 어떤 방식으로 놓았는지 등을 살필 수 있다. 또, 보물을 찾듯이 모래 속에서 유물을 발굴해 보는 활동도 가능하다. 고흥분청문화박물관은 온 가족이 방문해서 도자기를 재미있게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 ‘영암도기박물관’, 고온의 반짝이는 도기 탄생

    유약을 입힌 도기란?

    도기는 점토를 반죽해서 형태를 잡고, 불에 구워 단단하게 만든 도자기를 말한다.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 전역에서 생산해 왔고, 일상에서의 쓰임도 많아서 새삼스러울 것도 놀라운 것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가 영암 도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곳에서 한국 최초 시유도기[유약을 입힌 도기]가 생산된 까닭이다. 유약은 청자와 백자, 분청사기에만 입혀지는 줄 알았는데, 도기에 왜 유약을 시유했을까? 유약은 일단 도자기를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어 준다. 표면이 반짝거리고 만지면 매끄럽다. 


    높은 온도에서 서로 엉겨 붙는 작용 덕분에 음식물이 그릇에 스미는 것을 막기도 한다. 유약 없는 도기보다 위생적일 수밖에 없다. 유약의 기본 재질은 소나무를 태운 ‘재’인데, 재유약이 가마 안에서 녹으려면 매우 높은, 천도 이상의 온도로 구워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구우면, 도기는 더욱더 단단해져 쉽게 깨지지 않는다. 결국 영암의 도기는 통일신라시대부터 만든 도자기로 매우 튼튼하고 광택이 나며 물이 흡수되지 않는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라 할 수 있다.

     

    구림리 도기 가마터와 함께

    영암도기박물관은 영암 구림리에서 발견된 도기 가마터[사적 제338호] 옆에 지어졌다. 다행히 발굴된 가마터 중 한 기가 잘 보존돼 있어서, 박물관 전시 관람 후 가마터까지 둘러볼 수 있다. 흙으로 투박하게 만든, 크지 않은 가마에서 어떻게 저렇게 야무진 도자기가 구워졌을까. 불과 가마의 원리를 모르면 그저 거짓말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불을 다루는 기술은 상당히 까다롭다. 낮은 온도, 즉 100℃에서 500℃까지 온도를 높이기는 쉽지만, 고온으로 올라갈수록 1℃ 높이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온의 영암 도기를 구워낸 가마의 모습과 구조, 그 원리를 꼭 확인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암 구림리 가마는 비탈면에 땅을 파고 들어간 한 칸짜리 지하식 오름 가마다. 고려시대 청자가마의 길이가 40~20m로, 용처럼 길게 생긴 것과 비교하면 규모가 작다. 그러나 이 단순해 보이는 가마에 과학이 들어 있고, 인간의 기술이 더해져 영암 도기가 만들어졌다니,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하는 문화유산이다.


    형태 또한 남다르구나~

    구림리 도기는 저장과 이동에 좋은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내용물을 쉽게 담을 수 있도록 입구를 넓게 만들었고, 효율적으로 적재하려고 양옆을 두드려 사각 형태로 빚었다. 입넓은편병(廣口扁甁)과 우주선처럼 배가 납작한 편구병(扁球甁)이 대표적이다. 쓰기에 편리한 형태이고, 고온에서 구워 단단하기까지 하니, 매우 실용적인 그릇이었다. 게다가 흑갈색이나 녹갈색이 도는 유약을 입혀 아름다움을 갖췄으니, 이곳저곳으로 인기리에 팔려 나갔을 것이다.


    지금이야 간척사업으로 구림리가 바다에서 조금 멀어졌지만, 옛날엔 바다와 접해 있었고 이곳 상대포[백제에서 조선시대까지 이용된 국제무역항]에서 구림 도기가 배에 실려 나갔을 터다. 상대포의 활기를 상상해보면 흥이 절로 난다.

  •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보고 체험할 수 있는 석봉도자기미술관

    고온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 도자기 

    고려청자, 분청사기, 달항아리, 백자 등 선조들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유물은 단연 도자기가 아닐까 한다. 도자기는 진흙으로 빚어서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모든 그릇을 부르는 말이다. 도기와 자기를 통틀어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이 처음 토기를 만든 것을 서기전 1만년에서 6,000년 경으로 추측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6,000~5,000년 사이로 보고 있다. 사람들의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 토기도 햇빛에서 말리던 것이 가마에 들어가고 모양과 무늬도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보고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석봉도자기 박물관 

    석봉도자기박물관은 1997년 경기도 여주시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석봉 조무호는 전통문화인 도예문화를 현대사에 맞도록 계승 발전시켜 재창조하려는 목적으로 개관하였다. 1997년 11월 3일에는 경기도에서 테마미술관으로 지정되었고, 관내에 도자기문화학교를 개설하여 도예를 가르쳤다. 그러다 2002년 3월 현재의 위치인 강원특별자치도 속초시 교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석봉도자기박물관은 관광의 도시 속초에서 우리나라의 찬란한 도예문화를 다시 꽃피우고자 한다.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현대사회에 맞는 세계적인 도예문화를 재창조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취지를 살려 석봉 조무호의 작품과 세계 각국 도예가들의 작품을 한곳에 모아 전시하고 있다. 전시 공간은 2층으로 나뉘어져 있다. 미술관에서 가장 먼저 접하는 곳은 바로 ‘산하관’이다. 산하관는 백두산을 담은 커다란 도자기벽화를 시작으로 대형벽화와 실물크기의 토기 테라코타를 볼 수 있다. 산화관 옆 역사관은 통일신라의 토기부터 조선 백자까지 한국의 도자기 역사를 도자기를 통해 전시했고, 모형관은 토우를 통해 옛날 도자기 만드는 방식을 알아볼 수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오악관, 사계관, 설악관, 국제관, 세종관이 있다. 오악관은 민화 일월오악도를 도자기로 구워 대형 벽화로 만들었다. 사계관에는 세계 최대 크기의 도자기 벽화와 1994년 기네스북에 기록된 세계에서 가장 큰 접시인 백자도자기 사계 대명 등 도자기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명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국제관은 국내외 유명작가들의 도자기를 볼 수 있다. 설악관은 속초시의 대표적인 산인 설악산의 모습을, 세종관은 세종대왕의 모습을 담은 도자기 벽화를 전시하고 있다. 그 외에도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이색적인 도자기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보는 즐거움이 있는 미술관이다. 

     

    직접 해볼 수 있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

    석봉도자기박물관에는 도자기를 직접 만들어볼 수 있는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간단하게 그림을 그려보는 방식부터 직접 물레를 돌려보거나 흙을 돌돌 말아서 모양을 만드는 코일링 체험까지 단계별로 선택해서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다. 체험한 작품은 직접 가마에서 구워서 약 1달 정도 기다려야 완성된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 해방촌의 역사와 함께한 ‘한신옹기’

    용산 해방촌에 자리한 한신옹기

    서울 한신옹기 외관
    서울 한신옹기 외관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2가 해방촌에는 ‘한신옹기’라는 옹기 전문점이 있다. 미군 부대 담벼락에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가득 쌓여 있어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한신옹기의 창업주는 한태석 씨와 신연근 씨 부부이다. ‘한신옹기’라는 상호도 부부의 성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부부는 채소 장사를 비롯해 여러 일을 전전하며 가난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러다 1960년대 초 우연히 친척분에게 옹기 장사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추천을 받았고, 그 길로 옹기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어엿한 가게를 열고 시작하지는 못했다. 리어카에 항아리를 싣고 이 동네 저 동네 돌아다니며 파는 도부꾼 생활을 오래 했다. 한태석 씨는 장사 수완이 좋았다. 다른 옹기장수들보다 더 많이, 더 빠르게 팔았다. 그렇게 돈을 모아 1967년 현재 자리에 집터를 구했고, 도부꾼 생활을 청산했다. 옹기가 집터에 수북하게 쌓여갔다.


    미군 부대로 인해 호황을 누린 한신옹기

    서울 한신옹기 내부
    서울 한신옹기 내부

    집터는 구했지만 집을 지을 수는 없었다. 20년이 넘도록 무허가로 집을 지었다가 헐리기를 반복하다 1988년 정식 허가를 받아 집과 가게 건물을 짓게 되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규모의 건물과 창고를 지었다. 1980년대에 한신옹기는 호황을 누렸다. 미군에서 부대가 오갈 때면 컨테이너 화물로 짐을 부쳤다. 짐을 채워 넣을 상자가 부족하면 한신옹기의 항아리를 사서 물건을 담았다고 한다. 이러한 특수한 배경도 있었다. 그러던 차에 한태석 씨가 건강이 악화되어 그만 세상을 떠났고, 홀로 남은 신연근 씨가 6남매를 돌보며 악착같이 한신옹기를 운영하였다. 


    기념품을 사려는 외국인이 많이 찾아오는 한신옹기

    서울 한신옹기 내부
    서울 한신옹기 내부
    서울 한신옹기 내부
    서울 한신옹기 내부

    이후로 점차 옹기에 대한 수요가 줄면서 주변의 옹기 가게가 점차 문을 닫았다. 그래도 한신옹기만은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예전에는 김장을 하고 장을 담그면 항아리에 보관하였고, 쌀은 쌀독에 담아두었기 때문에 항아리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 하지만 현재는 그런 항아리나 쌀독의 수요는 줄어들었고, 장식용 도자기가 많이 팔린다. 아주 작게 만든 소품용 항아리나 접시 등이다. 지역의 특성상 외국인들이 이런 소품용 도자기를 기념품으로 사기 위해 많이 찾아온다. 항아리는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에서 만든 것을 사오고, 도자기는 여주와 이천에서 만든 것을 사온다. 외국인들이 중국산인지 한국산인지를 물으면 신연근 씨는 지체없이 ‘코리아’라고 외친다.


    한신옹기의 전통이 오래 이어지기를 바라며

    서울 한신옹기 외부 옹기
    서울 한신옹기 외부 옹기

    현재 한신옹기는 건물 1층에 자리하고 있고, 2층에는 도자기 공방, 3층에는 가정집이 있다. 신연근 씨는 구순을 바라보는 80대 후반의 노인이지만 옹기에 대한 열정만은 남다르다. 한신옹기가 자신의 대에서 끊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다행히 막내며느리가 2층에서 도자기 공방을 하며 관련 공부를 하고 있다. 막내며느리는 옹기와 도자기에 관심이 많고 직접 발품을 팔며 좋은 물건을 구해오기도 한다. 신연근 씨의 뒤를 이어줄 듯하여 다행스럽다. 신연근 씨는 헛걸음하는 손님이 있을까 우려해 늘 가게 문을 연다. 오래도록 사람이 끊이지 않는 한신옹기의 역사가 지속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 한국 미(美)의 정수, K-이천도자기

    이천의 자랑스러운 특산품, 도자기

    도자기는 대한한국의 대표적인 공예품이자 특산품이다. 이천의 대표 특산품이기도 하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생전에 "특급이 있으면 컬렉션 전체 위상이 올라간다.”라고 미술품 수집 지론을 밝혔다. 이 회장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미술 명작 수집가로도 정평이 나 있다. 미술품에 조예가 깊은 전문가들은 이건희 컬렉션의 핵심은 ‘우리 옛 도자기, 특히 백자'라고 했다. 이런 도자기가 이천 특산품이라니. 그뿐이 아니다. 이천시는 국내 유일의 도자특구지역이다. 도자전문도시이다. 아래 이야기를 따라가면 ‘아하 그래서 이천도자기이구나!'라고 할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특산품이었던 이천 도자기

    도자기는 조선전기에도 이천 특산품이었다.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도기(陶器)와 백옥(白玉)이 이천도호부의 특산품."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는 조선전기 전부터 이천에서는 도기를 많이 제작했고 도기문화가 활성화됐음을 짐작케 한다. 이천시는 2010년 7월 유네스코(UNESCO) 창의도시로 지정됐다. 분야는 '공예 및 민속예술'이며, 이 분야에서 이천은 대한민국 최초로 지정됐다. 당시 인구 20만 명 정도인 대한민국 소도시 이천의 쾌거에 '도자기'가 있다. 유네스코는 이천시를 선정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도자공예는 가장 한국적인 전통문화이다.

    이천시는 도자공예와 첨단기술을 융합해

    새롭고 아름다운 한국도자문화를

    역동적이고 지속적으로 만들고 있다.

    창의도시로서 자격이 충분하다.


    이렇게 훌륭한 도자기는 토기, 도기, 자기 등을 총칭한 말이다. 이런 도자기, 특히 우리나라 옛 도자기 종류와 제작 방법은 조금씩 다르다. 같은 점은 흙수비부터 장작가마에 장작으로 불을 때서 도자기를 굽는, 참으로 고단하고 지난한 과정을 사람이 일일이 했다는 점이다. 이천 도예인들은 꽤 오랜 기간 옛 방식으로 도자기를 제작했다. 지금도 그런 도예인이 있다. 


    이천도자기와 미나리칠기가마 

    1955년 이천 관내 요업공장 현황에 따르면 신둔면에 신둔토기공장이 2곳, 장호원읍에 검호토기공장 1곳, 백사면에 백사토기공장 1곳, 마장면에 마장토기공장이 2곳이라고 나온다. 이 가운데 신둔면 수광리 주민들은 당시 신둔토기공장 중 수광1리에 있던 공장을 '미나리칠기가마'라고 불렀다. 미나리는 수광리의 옛 지명이고 가마에서 주로 칠기(漆器)를 구웠기 때문이다.


    칠기는 검은 잿물(黑)을 사용한 유약을 기물에 바른 후 불에 구웠다 하여 흑자(黑磁), 흑유자기라고 했다. 까마귀 오(烏)를 사용해 오지그릇 이라고도 했다. 고려시대 청자와 비슷한 시기부터 제작했고 제작 방법도 청자나 자기에 가깝다. 1960년대 초반까지 서민들 부엌에서 먹거리 저장용기로 사용했고 현재도 존재한다. 생김새는 옹기와 닮았으나 제작 방법은 다르다.

    1960년대 제작한 칠기
    1960년대 제작한 칠기(사진출처:김희정)
    1960년대 제작한 칠기
    1960년대 제작한 칠기(사진출처:김희정)

    어쨌거나 미나리칠기가마 소유주 이현승(1913~1993) 선생은 이 가마는 1900년 이전부터 사용했다고 추정했다. 이천에는 그럴만한 환경이 조성돼 있었다. 예컨대 교통수단이 발달 되지 않고 원료 수급이 어렵던 시절, 신둔면에서는 장작가마의 땔감인 소나무가 많았다. 신둔면은 원적산과 정개산이 길게 이어지고 경기도 광주시의 산간지대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도자기 원료인 점토나 사토 등 흙도 쉽게 구했다. 물은 맑고 품질 좋은 볏짚도 많았다. 이천에서는 예로부터 맛 좋은 쌀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볏짚은 소나무 떡갈나무 콩깍지 등과 함께 자연유약재료로 사용했다. 이천은 분지형이라 자연재해도 없었다. 이포나루에서 수로로 서울과 전국으로 도자기를 실어나르는데도 용이했다. 


    일급도예인들이 미나리칠기가마로 모여들다. 

    1960년대 초반 이천도자기와 미나리칠기가마는 큰 전환점을 맞는다. 서울에서 전문도예를 익히고 숙련된 일급 도예인들이 수광리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울 한국조형문화연구소(1955년 속칭 성북동가마)와 한국미술품연구소(1956년 속칭 대방동가마)에서 근무했다. 이들은 그곳에서 단절된 한국 전통도자기 재현 실험을 하고 청자와 백자 분청 다완 등을 제작했다. 한데 두 가마가 2~3년 간격으로 문을 닫았다. 그 바람에 갈 곳을 잃었다. 지역마다 가마가 소실됐다는 소식만 듣게 됐다. 그러는 중에 기쁜 소식이 있었다. 수광리에 미나리칠기가마가 있고 칠기 제작이 활발하다는 소식이었다.

    1960년대 고려도요 가마 앞
    1960년대 고려도요 가마 앞(사진출처:엄기환)
    1960년대 고려도요
    1960년대 고려도요(사진출처:엄기환)

    일급 도예인들은 이천으로 왔다. 미나리칠기가마에서 전통도자기 재현 실험을 하고 도자기를 제작했다. 마침내 해강海綱 고故 유근형 선생은 수광리에서 고려상감청자 재현에 성공한다. 이즈음 서울에서 내려온 도예인들은 앞다퉈 요장(도자기공장)을 설립했다. 광주요, 고려도요, 해강고려청자연구소(해강요), 동국요, 청운도자기연구소(청운요), 이조요, 한국도요 등. 이 요장 대표 도예인은 물레대장 등 분야별 장인을 모셔오고 흙 선별, 디자인, 그림과 조각, 유약, 품질관리, 불 때기 등을 철저히 관리했다. 요장에서는 고려상감청자 백자 분청 다완 등 전통자기, 생활자기 등을 제작했다. 전국에서 도자기를 배우려는 사람들은 계속 이천으로 왔다. 몇 년 후 규모가 큰 요장에서 도예기술을 익힌 도예가들은 독립요장을 차렸다. 신둔면에는 요장이 점점 늘어놨다. 


    일본인들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우리 옛 도자기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됐다. 큰 요장 대표 도예인들은 우리 도자기를 일본에 홍보하고 전시를 열었다. 일본인들은 한국도자기에 매료됐다. 일본인의 우리나라 여행도 자유로워졌다. 그러면서 신둔면에 소재한 요장과 사기막골은 일본 단체 관광객의 여행코스가 됐다. 그들 눈에 고려상감청자와 백자 분청 다완 등은 그 나라에서 보기 드문 아름답고 진귀한 작품이었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0년대 고려도요를 방문했다가 요장에 일본 단체 관광객이 많은 것을 목격하고 경기도 광주에서 이천으로 이어지는 3번 국도를 넓게 해줬다는 일화도 있다. 일본인들한테 우리나라를 알리고 외화를 벌어들인다는 격려였다.

    한석봉 도예가 작품
    한석봉 도예가 작품(사진출처:김희정)

    1960~1970년대까지 신둔면 일대 요장은 전통도자기 제작은 물론 대학의 도예과 학생들 도예 연수, 작품 제작 실습장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즈음 칠기가마와 칠기는 점차 사라졌다. 육체노동을 줄여준 가스가마가 들어왔고 칠기 수요는 적어졌기 때문이다. 신둔면 주민들에 의하면 1980년대 일본인들은 해강요 등 여러 요장 앞에 트럭을 세워놓고 가마 문을 열자마자 도자기를 가져간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때 도자기 값은 선불이었다. 


    대한민국 도자문화의 중심지, 이천

    이천에서는 시대를 불문하고 도자기를 꾸준히 제작했다. 1592년 임진왜란, 1884년 관요(官窯, 국영 도자기 공장) 폐쇄, 일제 강점기, 1945년 광복, 1950년 6.25전쟁 속에서도 이천에는 도자기 제작 기술자가 많았다. 이천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공예 관련 물적·인적 인프라도 탄탄하게 구축했다.

    이천 도자기
    이천 도자기(사진출처:김희정)
    이천 도자기
    이천 도자기(사진출처:이천시)

    1987년부터 매해 열린 이천도자기축제, 2001년부터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세계도자비엔날레, 도예공방 및 도자판매장 등 51곳이 모인 사기막골도예촌, 도예공방 및 다채로운 예술공방 200여 곳이 밀집된 예스파크, 경기도자미술관(구 세계도자센터), 이천세라피아, 한국도자재단, 도자전문도서관인 도자만권당, 한국도예고등학교, 이천시도자기명장 25명(총 31명 중 6명 작고. 2023년 기준), 대한민국명장(도자기) 5명(이천시도자기명장과 중복), 이천도자기공예사업협동조합(구 이천도자기협동조합), 한국세라믹기술원, 반도체종합솔루션센터 등이다. 한국도자재단이 발간한 「2023 도자센서스」에 따르면 전국에서 운영 중인(2023년 기준) 요장 수는 1,347개, 이천시에 소재한 업체는 307개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다. 도자기 해외 수출 비중도 가장 높다.


    수광리에 1960년대 흙가마가 살아있다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수광리를 걷는다. 오래전 요장이 있던 자리에 빌라가 들어섰다. 옛 요장이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운 마음 숨길 수 없다. 1964년에 축조한 흙가마(장작가마)를 발견한 것은 큰 위안이다. 해강 유근형 선생과 그의 아들 유광열, 그리고 홍재표, 고영재 선생이 함께 축조해 사용한 가마이다. 가난하던 시절, 도예인들은 이 가마에서 고려상감청자와 백자 분청, 칠기 등 아름다운 우리 도자기를 연구 연구하고 생산했다. 같은 해 청운요 이준희 선생이 매입한 이 가마는 이천시가 유네스코창의도시, 대한민국 대표 도자도시가 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가마 중 하나로 유일하게 현존한 흙가마이다.

    1960년대 후반에 제작한 흙가마
    1960년대 후반에 제작한 흙가마(사진출처:김희정)
    1960~70년대 가마가 허물어지고 있는 모습
    1960~70년대 가마가 허물어지고 있는 모습(사진출처:김희정)

    이 선생은 1960년대 말 그 가마 옆에 다른 흙가마 1개를 축조했고 가마 바로 옆에 전시장 및 숙소를 지었다. 현재 가마 2개와 전시장 및 숙소는 수광리에 남아 있다. 안타까운 사실은 2020년 큰 태풍으로 인해 이 가마 옆에 있는 느티나무 가지가 잘리면서 가마 지붕을 덮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가마지붕과 가마가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있다. 가마지붕과 가마 보수 작업이 시급하다. 1960년대 도예인들과 대학 도예과 학생들이 실습하러 왔듯이, 가마를 문화재로 등록하거나 보수하여 도예인들과 많은 이가 이 가마를 사용하고 숙소에서 머물러 보는 날을 기대한다. 


    수광리를 걸으며 생각한다. 진정한 도자기가 되려면 뜨거운 불 속에서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작품 안으로 숙성시켜야 한다. 적지 않은 연단의 시간을 통과한 후 또 며칠을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탄생한 극한 아름다움, 어쩌면 그런 이유로 도자기를 대한한국 미(美)의 정수라 할 것이다. 세계인들이 놀라는 지점이고. 그것은 인간의 삶과 닮았다. 수광리에 있는 전통 흙가마를 살려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천의 자랑스러운 특산품, 우리 전통도자기가 제 2의 부흥기를 맞이하는 시발점이 되기를.

    1960~70년대 가마가 허물어지고 있는 모습
    1960~70년대 가마가 허물어지고 있는 모습(사진출처:김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