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요를 채보하고 현대적으로 재건한 국악의 아버지, 지영희

    지영희는 1909년 경기도 진위군 포승면(현재 경기도 평택시 포승면)에서 태어났다. 지영희가 살았던 내기리와 만호리는 무속신앙이 발달한 고장이었다. 지영희 가문도 세습무가로, 지영희는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무속음악을 익혔다. 지영희는 11세에 이석은에게 승무, 검무, 굿거리 등 춤을 배운 이후 30대 중반까지 많은 민속음악의 명인들로부터 기예를 사사받았다. 1929년 조항년에게 호적을 배우고, 1930년 정태신에게 양금을 배우고, 1931년 지용구에게 해금을, 양경원에게 피리를 배웠다. 또한 김계선에게 풍류 대금을, 방용현에게 민간 풍류 대금을, 최군선에게 농악을, 오덕환에게 무용장고를, 박춘재에게 경서도 민요를, 최수성에게 단소를, 김상기에게 거문고를 익히는 등 거의 모든 민속예술의 장르를 섭렵하며 종합예술인으로서 소양과 능력을 두루 갖추었다. 지영희는 천대 받는 무속인이 아닌 사회적 인정과 존경을 받는 음악가가 되고자 하는 뜻을 품었다. 그리하여 1937년에 서울로 상경하여 당대 최고의 무용가였던 한성준의 조선음악무용연구소에 들어가 최승희무용단의 악사로 활동하며 해금과 피리 연주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지영희는 뛰어난 민속악기 연주자에서 국악계를 재건하는 데 앞장서는 지도자이자 스승으로서 활약한다. 일제의 식민 지배에 억눌리고 서구음악의 유입에 밀려나는 전통음악을 되살리고자 대한국악원 창립을 주도하고 음악연구소를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하는 등 국악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았다. 또한 지영희는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민속음악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하여 국악 현대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지영희에 의해 악보 없는 우리의 가락은 처음으로 오선보에 기록되었다. 지영희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채보활동을 펼쳤고, 그렇게 수집한 민요들을 연구하여 새로운 민속음악을 작곡하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특히 지영희는 국악기로 관현악단을 구성하여 연주하는 혁명적인 실험을 시도하여, 최초로 국악관현악단을 만들어 지휘하였다. 


    지영희는 국악을 대중화하기 위해 1937년 처음 민요와 대풍류로 음반을 취입한 이후 수많은 민요들을 녹음하여 음반으로 발매하였다. 특히 2003년에 발매한 <해금시나위와 산조>에는 지영희 해금산조의 특징적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지영희는 1972년 최초로 미국 카네기홀에서 연주하는 영예를 얻었고, 1973년 시나위로 국가무형문화재 제52호에 지정되었다. 지영희는 국악계와의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1974년 가야금 명인인 부인 성금연과 함께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영희는 민속음악을 채보하고 녹음하여 제자들에게 전해주고 연주와 강연을 계속하며 국악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지영희의 고향인 평택시에는 지영희의 이름을 내건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있다. 지영희국악경연대회와 지영희예술제가 매년 개최되고, 평택시가 운영하는 지영희국악관현악단의 정기공연도 주기적으로 열린다.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에 위치한 '한국 소리터' 1층에는 ‘지영희국악관’도 있다. 이곳에는 지영희의 일대기와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해금을 직접 연주할 수 있는 체험시설도 마련되어 있다. 

  • 국악의 사표가 된 명창, 만정 김소희

    김소희(金素姬, 1917-1995)는 전북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순옥(順玉)이며, 호는 만정(晩汀)이다. 아버지가 피리와 단소의 대가였다. 13세 때 전남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고등보통학교 재학 때 협률사 공연에서 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의 「추월만정」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아 소리꾼이 되기로 결심했다. 김소희는 날마다 소리판을 기웃거렸고, 이를 보다 못한 형부가 김소희를 당대 명창인 송만갑(宋萬甲)에게 데려가 소리를 배우도록 했다. 그때 김소희의 나이 15세였다. 김소희는 송만갑 문하에서 「심청가」와 「흥보가」를 익히며 판소리에 입문했다. 18세(1934년) 때 서편제의 대가 정정렬(丁貞烈)에게 「춘향가」와 「수궁가」를 배워 동편제와 서편제를 모두 익혔다. 22세 때 박동실(朴東實)에게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를 학습했다. 광복 후에도 정응민(鄭應珉), 정권진(鄭權鎭), 박록주(朴綠珠), 김여란(金如蘭), 박봉술(朴鳳述) 등을 찾아가 소리를 학습하는 등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명창 김소희 기념비
    명창 김소희 기념비


    김소희는 판소리 외에도 다양한 악기와 기예를 배운 사통팔달한 예인이었다. 14세 때 전주의 정성린(鄭成麟)을 찾아가 승무 살풀이를 배우고, 16세 때 전계문(全桂文)에게 가곡과 시조를, 김용건에게 거문고와 양금을, 1933년(17세)에 정경린으로부터 무용을 전수받았으며, 1934년에는 김종기에게 가야금과 거문고를 배웠다. 이후 서예와 한학도 공부했다. 김소희는 송만갑 문하에서 소리 공부를 시작한지 6개월만에 남원명창대회에 나가 1등을 차지한다. 어느날, 송만갑을 찾아온 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이 김소희의 소리를 듣고 탄복하여 그날 바로 김소희를 자신의 공연무대에 세웠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그만큼 김소희는 재능을 타고난 소리꾼이었다. 15세 때 일본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춘향가」를 취입한 후 많은 음반을 녹음하여 남겼다. 19세 때 정정렬, 이화중선, 임방울, 박록주와 함께 「춘향전 전집」을 녹음했는데, 판소리사의 명반으로 남아 있다. 또한 58세에 녹음한 「심청가」 완창과 61세에 녹음한 「춘향가」 완창 음반 역시 명반으로 평가된다.



    1936년부터 조선성악연구회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1939년에 창립한 화랑창극단에도 참여했다. 해방 후 1948년 박귀희와 함께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했다. 최초의 여성 국극인 「햇님 달님」에 출연했다. 「햇님 달님」은 여성 국극의 전성기를 가져오며 1960년대까지 큰 인기를 끌었다. 1954년에 민속예술원을 설립하여 초대 원장을 지냈다. 1962년에 유럽, 1972년에 미국 순회공연을 하면서 우리 민족예술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데 힘썼다. 1988년 서울 올림픽 폐막식 공연에서 판소리 「뱃머리」를 개작한 「떠나가는 배」를 불러 전 세계에 큰 감동을 안겼다.

    김소희 기념비 이미지
    김소희 기념비

    김소희는 천부적으로 목청을 타고난 명창이었다. 청아하고 미려한 애원성의 소리를 구사했고, 감정에 매몰되거나 기교주의에 치우치지 않는 섬세하고 절제 있는 창법을 지향했다. 김소희의 판소리는 우아함을 추구하는 여창 판소리의 한 정점을 이루었다. 김소희는 「춘향가」와 「심청가」, 「흥보가」를 장기로 삼았는데, 특히 「춘향가」는 동편제와 서편제의 장점을 고루 살려 재구성한 만정제다.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79년 5월에 고향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에 ‘만정(晚汀) 김소희 여사 명창 기념비’가 세워졌고, 기념비에는 미당 서정주의 헌사가 쓰여 있다. 2002년에는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에 생가가 복원되었다. 

  • 서편제의 대가, 김창환

    김창환(金昌煥, 1855-1937)은 전남 나주군 삼도면(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동)에서 태어났다. 세습예인 집안 출신으로, 판소리 명창 이날치(李捺致)와 박기홍(朴基洪)과 이종 간이고, 판소리 명고 김종길(金宗吉)과 재종 간이다. 판소리 명창 임방울(林芳蔚)의 외숙이기도 하며, 훗날 김창환의 두 아들 김봉이(金鳳伊)와 김봉학(金鳳鶴) 형제 역시 판소리 명창이 된다. 김창환은 어렸을 때 이날치에게서 가문소리를 습득했다. 


    서편제 명창 정창업(丁昌業)에게서 판소리를 사사받았고, 20대 중반 신재효(申在孝)의 문하에 들어가 판소리에 관한 이론과 실기를 배웠다. 김창환이 부른 「춘향가」, 「심청가」, 「홍보가」에는 신재효 판소리 사설의 많은 대목이 수용되었는데, 그만큼 신재효로부터 받은 영향이 크다. 1902년 고종의 즉위 40년을 기념하는 경축행사를 위한 협률사(協律司)의 주석(主席)으로 발탁되었다. 칭경예식 이후에도 김창환은 어전에서 여러 차례 소리를 하였고 고종의 총애를 받아 의관(議官) 벼슬까지 받으며 국창으로 인정받았다. 


    협률사가 폐지된 후 고향 나주로 내려가 50여 명의 전라도 출신 명창들을 규합해 ‘김창환협률사’를 조직하고 지방을 순회했다. 1915년 전통연희를 공연하던 배우들이 모여 만든 ‘경성구파배우조합’에 이동백(李東伯)과 함께 선생으로 참여하였다. 1930년에 창립된 ‘조선음률협회’의 회장을 맡았고, 1932년에 출범한 ‘조선악정회’에도 참여하여 전통음악의 발전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1915년 미국 빅타사에서 「춘향가」의 ‘옥중가’와 「흥보가」의 ‘가난타령’의 음반을 처음 녹음한 후 다수의 음반을 취입하였고, 각종 명창대회와 국악방송에 출연하여 판소리를 대중화하는 데 앞장섰다.


    김창환은 서편제 명창이지만, 그의 소리는 서편제 특유의 애절하고 감상적인 특징과 달리 호방하고 웅장하여 청승맞은 느낌이 없다고 한다. 또 그는 풍채가 좋고 발림(판소리에서 소리의 극적인 전개를 돕기 위하여 몸짓이나 손짓으로 하는 동작)을 잘해 관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김창환의 판소리 공연 중 유명한 것은 1908년 원각사에서 공연한 창극 「최병두타령」에서 최병두 역을 맡아 열연한 것이다. 그 공연에서 김창환이 수십대의 곤장을 맞아 죽어나올 때 관객들이 그의 목에 엽전꾸러미를 걸어주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김창환의 더늠(판소리 명창이 사설과 소리를 새로 짠 대목)으로는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가 있는데, 음악적인 구성이 뛰어나 오늘날 여러 명창들이 이 대목을 그의 더늠으로 부르고 있다. 고향 나주에서 후진을 양성하다가 타계했다.

  • 동편제의 마지막 거장, 명창 박봉술

    박봉술(朴奉述, 1922-1989)은 전남 구례군 용방면에서 태어나 20세기에 활동한 판소리 명창이다. 세습예인 집안 출신으로, 판소리와 소리북에 능했던 박만조(朴萬祚, 1875-1952)의 아들이자, 판소리 명창 박봉래(朴奉來, 1900-1933)·박봉채(朴奉彩, 1906-1946)의 동생이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박만조에게 「춘향가」, 「수궁가」, 「흥보가」를 배웠다. 박만조는 명창으로 행세하지는 않았지만 소리 속을 잘 알았고, 정식 공연을 다니지는 않았지만 그 지역에서 고수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그는 어린 아들을 명창으로 길러내고자 새벽에 깨워 박하사탕을 입에 물려주면서 열성적으로 소리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던 송만갑(宋萬甲, 1865-1939)에게 「적벽가」를 학습했다. 21세부터 둘째 형인 박봉채로부터 4-5년 남짓 소리를 익혔다. 송순섭(宋順燮, 1939- ), 김일구(金一球, 1940- ), 선동옥(宣東玉, 1936-1998), 안숙선(安淑善, 1949- ), 정미옥(鄭美玉, 1928- ), 이옥천(李玉千, 1946- ), 정성숙 등이 그의 제자이다.


    어린 시절부터 소년 명창으로 유명했던 그는 19세에 임방울(林芳蔚, 1904-1961)이 이끄는 동일창극단에 입단해 활동했다. 이후 순천, 목포, 전주, 군산, 정읍 등에 위치한 국악원에서 강사로 재직했다. 37세에 부산으로 이주해 오랜 기간 후진을 양성했다. 49세에 '뿌리깊은나무'에서 주최한 판소리 완창 감상회 무대에 서면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60년대에는 전주의 김동준(金東俊, 1928-1990), 군산의 이기권(李起權), 광주의 한승호(韓承鎬, 1924-2010), 남원의 강도근(姜道根, 1918-1996)과 더불어 호남의 5명창이라 불릴 정도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그가 부른 「적벽가」는 송흥록(宋興祿)-송광록(宋光祿)-송우룡(宋雨龍)-송만갑으로 이어지는 바디(판소리에서 명창이 스승으로부터 전승하여 한 마당 전부를 음악적으로 절묘하게 다듬어 놓은 소리)이다. 또 「춘향가」, 「흥보가」, 「수궁가」에도 능했는데, 동편제의 법통을 충실하게 이으면서도, 좋은 대목이 있으면 차용해 부르기도 했다.


    박봉술은 20대 초반에 독공을 하며 쉰 목을 너무 무리하게 쓴 탓에 소리가 꺾이고 말았다. 그래서 중성과 하성은 좋았지만, 상성이 잘 나지 않게 되었다. 이에 엄청난 독공으로 상성을 가늘게 뽑아내는 희성을 개발해 자신의 결점을 극복했다. 이를 암성이라고도 하는데, 그가 이 성음으로 소리를 하면 무대 객석 뒤까지 선명하게 잘 들렸다고 한다. 박봉술은 전형적인 동편제 창법을 구사했다. 붙임새도 능숙하게 구사했으며, 특히 자진모리로 몰아가는 대목에 뛰어났다. 박봉술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수궁가」 다섯 바탕소리에 고르게 뛰어난 기량을 보유했으며, 이 가운데 네 바탕을 음반으로 남겨 후대에 전했다. 동편제 판소리의 맥을 이었다는 점에서 현대 판소리사적으로 중요한 명창이다.

  • 일제강점기의 여류 명창, 배설향(裵雪香)

    배설향은 1895년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목소리가 아름답고 한번 들은 소리를 그대로 따라 부를 만큼 음악적 감각도 뛰어났다. 딸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는 순창에서 활약하는 명창인 장판개에게 배설향을 보내 소리 공부를 시켰다. 배설향은 12세 때 장판개에게 「흥보가」,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네 바탕을 모두 배웠다. 판소리에 입문한 지 불과 5년 만에 이룬 놀라운 성장이었다. 1915년에 서울로 올라가 장안사(長安社)와 연흥사(演興社)에서 창극 공연에 출연하면서 명창으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배설향의 명성이 갈수록 높아지자 당대 5대 명창 중 한 명인 송만갑(宋萬甲)이 자신이 이끌던 창극단 협률사의 단원으로 배설향을 영입했다. 배설향은 협률사에서 송만갑, 이동백(李東伯), 김창룡(金昌龍) 등 국창으로 불리는 명창들의 영향을 받으며 실력을 더욱 갈고 닦았다. 협률사 창극 공연에서 배설향은 늘 「춘향전」과 「심청전」의 주역을 도맡았다. 

    서울에서 활약하던 배설향은 1920년에 장판개와 함께 전주를 거쳐 경상북도 경주권번(慶州券番)에서 소리 선생으로 지냈다. 1935년에 전라북도 순창으로 귀향하여 장판개와 함께 살았다. 이때 조카딸 장월중선(張月中仙)에게 흥보가와 가야금산조를 가르쳤다고 한다. 

    1936년 조선여류명창대회 때 김여란·조산옥·김연수 등과 함께 출연했고, 1938년 여류명창대회 때 박녹주·신금향·박초선·임소향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1937년 장판개가 병사하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 4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배설향은 성량이 풍부하고 음색이 씩씩했다. 마치 목소리 고운 남자의 소리처럼 우렁차고 선이 굵은 음색을 자랑했다. 소리계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배설향의 공연이 끝나면 그녀를 보려는 인파가 무대 위까지 몰려와 무대 경비를 증원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1928년에 남도잡가(南道雜歌) ‘흥타령’, ‘개고리타령’을 녹음한 콜럼비아 음반이 남아 있다. 그밖에 「춘향가」 중 ‘옥중가’와 ‘추월강산’을 녹음한 소리가 전하고 있다.

  • 소리로 통정대부에 오른 명창 이동백

    이동백(李東伯)은 1867년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도만리에서 외아들 유복자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종기(李鐘琦)이다. 편모슬하에서 궁핍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 큰아버지에게 맡겨져 자랐다. 글공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광대들을 쫓아다니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고 한다. 소리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이규석(李圭錫)과 동편제 명창 최상중(崔相仲), 중고제 명창 김정근(金正根)을 찾아가 잠시 소리를 공부한다. 그러다 13세 때 전라북도 순창에 있는 김세종(金世宗) 문하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공부하여 자신의 소리를 완성했다. 이후에도 전국 팔도를 유랑하며 보다 높은 득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혼자 소리를 연마했다. 도만리 호리산의 용구(龍口)에서 2년간 독공(獨工)했고, 다시 진주 이곡사(里谷寺)에 들어가 3년간 공부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약 10여 년 동안 창원에 살면서 주로 경상도 지방을 무대로 활동했는데, 이때 경상관찰사(慶尙觀察使) 이지용(李址鎔)의 부름을 받아, 「적벽가」 중 ‘장판교대전’을 불러 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45-46세 무렵 상경하여 당대의 명창 김창환과 송만갑을 보좌해 함께 공연하면서 이름을 떨쳤다. 김창환의 주선으로 어전에서 소리를 하고 이후 고종의 총애를 받아 당상관인 정삼품 통정대부의 벼슬을 받는다. 소리광대가 정삼품의 벼슬을 제수받은 것은 이동백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원각사 해산 이후에 연흥사(延興社), 광무대(光武臺) 등에서 활동하거나 협률사에 참가해 지방을 순회했다. 1930년에 ‘조선음률협회’ 조직에 참여하고, 1933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국악인 모임인 ‘조선성악연구회’의 이사장을 맡아 판소리 교육 및 창극 정립을 위해 노력했다. 61세에 최초의 창극 음반인 「일축조선소리반 춘향전 전집」 녹음에 참여했고 이후 많은 유성기 음반을 취입했다. 1939년 이동백은 국악인 최초로 은퇴 기념 공연을 열었고, 약 한 달간 지방순회공연을 다녔다. 이동백의 은퇴공연은 장안의 화제였고, 가는 곳마다 성황을 이룰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은퇴 후 소리에 대한 열정을 품고 후배 양성에 힘쓰다가 1949년 경기도 평택군 송탄면 칠원리에서 작고했다.


    이동백은 중고제의 명창으로, 풍채가 당당하고 성음이 미려했으며, 하성의 웅장함은 당시 비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거대한 성량과 힘찬 선율로 「춘향가」의 ‘어사출도’, 「적벽가」의 ‘장판교대전’을 실감나게 잘 표현했다고 한다. 특히 이동백의 「새타령」은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는데, 고음의 가성으로 새 울음소리를 탁월하게 표현했다고 한다. 이동백은 독창성과 즉흥성이 뛰어났는데, 소리판의 상황에 따라 사설과 곡조를 변주했고, 같은 대목이라도 부를 때마다 다르게 불러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냈다.


    원각사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서울특별시 중구의 ‘정동극장’에는 이동백을 기리는 기념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고향인 충청남도 서천군 종천면에는 ‘이동백선생생가지’ 표석이 있고, 이동백이 득음했다는 동굴인 용구가 희리산에 남아 있다.

  • 불운한 시대의 천재 가객, 명창 임방울

    임방울 흉상 이미지
    임방울 흉상

    임방울(林芳蔚, 1904-1961)은 전남 광산군 송정읍 수성리(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산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승근(承根)이다. 어머니가 세습무 출신으로, 세습예인 집안 출신이다. 판소리 명창 김창환(金昌煥)이 외숙이었고, 그의 아들 명창 김봉이(金鳳伊)와 김봉학(金鳳鶴) 형제의 외사촌동생이었다. 아버지가 글공부를 시키려고 했으나, 임방울은 노래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14세 때, 명창 박재현(朴載賢)을 찾아가 3년간 「춘향가」와 「흥보가」를 배웠고, 명창 공창식을 찾아가 「적벽가」를 배웠다. 또한 동편제의 대가인 유성준(劉成俊)으로부터 「수궁가」, 「적벽가」, 「심청가」를 전수받았다. 훗날 임방울은 명창으로 이름을 떨친 후에도 유성준을 찾아가 소리를 배우곤 했다.


    1928년, 25세의 임방울은 동아일보사가 주최하는 전국명창대회에 참가하여 「쑥대머리」를 불렀는데, 이를 계기로 소리꾼으로서 이름을 알렸다. 이후 라디오방송에도 출연하고 많은 음반을 취입하였다. 2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쑥대머리」가 포함된 음반은 우리나라, 일본, 만주 등지에서 20여만 장이나 판매되었다. 1935년 ‘대동창극단’(大東唱劇團), 1939년에는 ‘동일창극단’(東一唱劇團)에 참가하여 지방 및 해외 순회공연을 다녔다. 해방 후에는 ‘임방울과 그 일행’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전국 순회공연을 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1959년과 1960년 사이 임방울은 일본 동경과 오사카에서 창극 공연에 참가했는데, 조총련의 공연에 출연했다는 이유로 귀국 후 경찰에 연행되어 고문을 당했고, 이후 공연을 하지 못했다. 1960년에 국악진흥회(國樂振興會)의 제5회 국악상(공로상)을 수상했다. 1960년 전북 김제공연에서 「수궁가」를 부르는 도중 쓰러졌으며, 1961년 3월 7일 향년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임방울은 아름다운 성음을 타고난 명창이었다. 애절함을 자아내는 그의 창법은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서민들의 슬픈 정서를 대변하였다. 「춘향가」, 「수궁가」, 「적벽가」를 장기로 삼았으며, 「춘향가」에서 ‘쑥대머리’, 「수궁가」에서 ‘토끼와 자라’ 대목은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단가 「추억」은 임방울이 사랑했던 기생 ‘김산호주’와 사별하고 지은 노래로 큰 인기를 끌었다. 1986년 9월 12일 광주 광산구 송정공원 안에 국창 임방울 선생 기념비가 세워졌다. 1994년 12월에는 광주문화예술회관에 국창 임방울 선생 흉상이 세워져서 그의 예술을 기리고 있다.

  • 민중이 사랑한 명창 정정렬

    정정렬(丁貞烈)은 1875년(또는 1876년)에 전라북도 익산군 망성면(현재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에서 태어났다. 세습예인 집안 출신으로, 판소리 명고 정원섭(丁元燮)의 형이다. 송만갑, 이동백 등과 함께 근대 오명창에 속하는 인물이다.

    정정렬은 철이 들기 전부터 소리에 타고난 재주를 보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7세 때 정정렬의 아버지가 익산에 머물던 서편제의 명창인 정창업 문하에 들어가 소리를 배우게 했다. 그러나 몇 년 후 스승 정창업이 세상을 떠나자, 명창 이날치에게서 소리를 배운다. 그런데 2년 후 이날치(李捺致)마저 세상을 떠나자 정정렬은 혼자서 익산의 미륵산 심곡사, 부여의 만수산 무량사, 공주의 계룡산 갑사 등지를 떠돌며 오랜 기간 독공했다.


    정정렬은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소리꾼으로서 이름이 알려졌다. 서울에 올라와 송만갑, 이동백 등 당대의 명창들과 함께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나이 50세(1926)가 다 되어서였다. 이 시기부터 정정렬은 명창의 반열에 오르고, 그의 문하에는 판소리를 배우고자 하는 제자들이 성시를 이루었다. 

    1933년 5월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하고, 상무이사를 역임했다. 이 연구회에서 정정렬은 정열적으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고 한다. 한편 ‘창극좌’라는 연구회 산하 단체를 조직하여 전통 판소리를 창극으로 전환하는 데 선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창극으로 공연된 작품 대부분은 정정렬의 기획·연출이나 작곡을 거친 것이었다. 정정렬을 ‘현대 창극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정렬은 1938년 63세를 일기로 타계할 때까지, 라디오방송, 지방 순회 공연, 음반 취입, 인재 양성, 소리의 창극화 등 열정적으로 활동하며 판소리의 보급과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정렬은 다른 대명창과 달리 선천적으로 목이 약했다. 고음 발성이 어려운 탁한 저음이어서 상청은 거의 지르지 못했다. 성량도 부족했다. 정정렬의 독공 수련이 길었던 것도 타고난 목의 약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정정렬은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발성법과 기교를 개발하였다. 그 결과 나온 정교한 ‘부치샘’[박자에 다채로운 변화를 주는 기교]와 ‘방울목’[판소리 창법의 하나로 둥글둥글 굴려 내는 소리]은 정정렬만의 장기가 되었다. 또한 음악적 구성을 치밀하게 연구하여 독보적인 경지에 오른 명창이 되었다.


    정정렬의 「춘향가」는 다른 명창의 「춘향가」를 모두 압도할 정도로 매우 뛰어난 절창 중의 절창이다. 정정렬이 부른 「춘향가」는 당대에 많은 인기를 누렸고, 많은 소리꾼들조차 「춘향가」만큼은 정정렬에게 사사 받으려고 했다. 1930년에 열린 ‘조선팔도명창대회’에서 정정렬이 부른 「춘향가」의 ‘몽중가’는 커튼콜을 무려 5번이나 받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정정렬제 「춘향가」는 오늘날 불리는 「춘향가」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춘향가」의 재해석은 정정렬이 판소리 역사에 남긴 큰 업적 가운데 하나다. 

    정정렬의 판소리는 기교가 뛰어나고 음악적 구성이 정교하여 화려하고 세련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정정렬 판소리는 특유의 슬픔을 자아내는 계면조의 창법으로, 서민들의 애환과 시대의 아픔을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된다. 정정렬이 유독 민중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정정렬의 더늠(판소리에서, 명창이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다듬어 부르는 어떤 마당의 한 대목)은 「춘향가」의 ‘신년맞이’다. ‘어사출두’와 ‘광한루 경치’ 대목 역시 정정렬의 독창적인 장기에 해당한다. 


    익산시에서는 2001년부터 ‘국창 정정렬 추모 전국 판소리 경연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 판소리의 집을 짓고 옷을 입힌 이, 신재효

    판소리 명창들의 교육자이자 후원자

    신재효 고택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는 고창 출신의 판소리 이론가 겸 비평가이자 판소리 작품의 창작자 겸 편집자, 그리고 판소리 명창들의 후원자(patron)였다. 부유한 중인계급의 아들로 태어나 치산(治産)에 능했던 그는, 자신의 부를 바탕으로 재능있는 소리꾼과 소리 선생을 모아 판소리를 배우고 가르치게 했다. 소리꾼이 아님에도 비평가로서 빼어난 안목을 지녔던 그의 판소리 인식은, 박만순, 김세종, 전해종 등 동편제 명창과 이날치, 김수영, 정창업 등 서편제 명창을 가리지 않고 그의 후원을 받은 명창들에게 큰 이론적 영향을 미쳤다.

     

    세련된 이론가이자 비평가, 판소리 사설의 개작부터 창작까지

    신재효는 판소리 열두 마당동 가운데《춘향가》,《심청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변강쇠가》여섯 마당을 개작(편집)하면서,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을 개연성 있게 수정하거나 고상한 한문표현을 삽입하는 편집방식으로 판소리를 체계화하고 세련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판소리가 지닌 서민적 해학과 풍자, 재치있는 표현과 발랄한 현실 인식이 약화되었다고 비판받기도 하지만, 이는 부유한 중인으로서 양반과 활발히 교류했던 신재효의 세련된 미의식이 반영된 결과이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그는 흥선대원군으로 대표되는 양반지배층에게 명창들을 소개하여 재능을 펼칠 기회를 제공할 수 있었다. 그는 판소리 창자의 조건으로‘인물치레’, ‘사설치레’, ‘득음’, ‘너름새’를 강조하며 박만순과 김세종 같은 명창들에게 판소리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고, 본격적인 판소리 가창에 앞서 부르는 단가(短歌)인《허두가(虛頭歌)》와《광대가》,《치산가》,《도리화가》등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거나 새로 창작했다.

    신재효 고택
    신재효 고택

    신분의 굴레에 한탄하고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하다

    신재효는《자서가(自序歌)》에서“사나이로 조선에 생겨/장상댁에 못 생기고/활 잘 쏘아 평통할까/글 잘한다고 과거할까”라며, 중인으로 태어났기에 뜻을 펼칠 수 없는 처지를 한탄했다. 또한 그는《광대가》에서 송흥록, 모흥갑, 권삼득, 신만엽, 황해천, 고수관, 김제철, 주덕기 등 명창을 각각 이백, 두보, 한유, 두목, 맹교, 백거이, 구양수, 소식 등 당송의 유명 문인에 빗댐으로써, 자신과 명창들이 지닌 미적 감각과 기예에 대한 자의식과 자긍심을 드러냈다. 


    신재효는 《춘향가》를 여성, 남성, 아동 창자를 위한 세 가지 형태로 분화시켜 남성만의 영역이었던 판소리판에 여성과 아동도 판소리를 할 수 있는 저변을 닦았고, 최초의 여성 명창 진채선(陳彩仙)을 길러냈다. 진채선은 흥선대원군이 주최한 경복궁 낙성연(落成宴)에 참여해 뛰어난 실력으로 청중을 놀라게 했고, 대원군의 눈에 들어 운현궁에 머물렀다. 진채선에게 애정을 느꼈던 신재효는《도리화가》에서 “강호우의호걸들이/왕래하며 하는 말이/‘선랑(仙娘)의 고운 얼굴/노래 또한 명창이라/듣던 바의 으뜸이니/못 들으면 한이 되리/그중의 기묘한 일/쌓인 병이 절로 낫네’/이 말 듣고 일어 앉아/어서 바삐 보고지고”라고 노래하며 그녀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 귀신에게 직접 배운 듯한 귀곡성의 명수, 가왕 송흥록

    소리꾼과 사대부 문인이 모두 인정한 당대의 가왕(歌王)

    가왕 송흥록 국창 박초월 생가 동상
    가왕 송흥록 국창 박초월 생가 동상

    송흥록은 정노식의 『조선창극사』(1940)에 "모든 가조(歌調)를 집성하고, 진양조를 완성한 판소리의 중시조로서 가왕(歌王)으로 추앙받았던 인물"이라고 기록된 판소리의 대표적인 거장이다. 그의 소리는 당대 이름난 사대부 문인에게도 잘 알려진 것은 물론 노래판에서 함께 기예를 발휘하는 동료 예인들의 인정도 받았다. 훗날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 기록이나 시서화(詩書畵)의 삼절(三絶)로 불렸던 신위(申緯)의 한시 『관극절구십이수(觀劇絶句十二首)』에서는, 판소리를 관람한 모습을 묘사하면서 고수관(高壽寬), 모흥갑(牟興甲) 등과 더불어 송흥록의 이름이 손꼽힌다. ‘가왕(歌王)’이라는 칭호는 송흥록과 함께 ‘전기 팔명창’으로 꼽히는 모흥갑이 바친 것이다.


    진양조를 완성하고 가조(歌調)를 집대성한 판소리의 중시조(中始祖)

    그는 『춘향가』의 『옥중가』,『변강쇠타령』,『적벽가』, 단가인 『천봉만학가(千峯萬壑歌)』 등을 잘 불렀고, 판소리가 동편제와 서편제가 본격적으로 나뉘기 이전 이른바 '중고제(中高制)'의 소리를 구사했다고 한다. 그는 매부였던 김성옥(金成玉)이 창시한 진양조를 더욱 연마하여 완성했다. 느린 속도로 장중하고 힘있는 분위기, 또는 애절하고 슬픈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 적합한 진양조의 완성은, 정서적 표출을 극대화함으로써 판소리의 예술성을 강화하고 향유층을 확대하는 데 이바지했다고 평가받는다. 동생 송광록(宋光祿)을 거쳐 송광록의 아들 송우룡(宋雨龍), 손자인 송만갑(宋萬甲)으로 이어지는 송씨 가문의 명창과 그 제자들의 계보가 오늘날 동편제 판소리의 발전과 전승에 큰 역할을 했기에, 그는 오늘날 판소리 명창의 큰 선생님이자 조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귀신에게 직접 배운 듯한 애끓는 귀곡성

    귀곡성(鬼哭聲)은 사람은 도저히 낼 수 없을 듯이 구슬프고 애절하여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것과 같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으로,『춘향가』중 『옥중가』에 등장하는 창법이 바로 귀곡성이다. '조물주의 조화를 벗어났다(奪造化)'고 평가받는 송흥록의 귀곡성은 여러 일화로 유명한데, 대부분 ‘맹렬’이라는 이름의 기생과 관련된 것이다. 대개 연회 자리에서 송흥록의 노래를 듣고 다들 칭송하는데 유독 맹렬만이 귀곡성이 모자람을 지적했고, 절치부심하며 귀곡성을 연습하던 송흥록이 꿈에서 만난 귀신에게 귀곡성을 직접 배웠다는 식의 이야기이다. 노래를 듣고 송흥록에게 반해 함께 지내던 맹렬이 공연 때문에 외박이 잦은 것에 화를 내며 떠난 뒤, 혼자 남겨진 슬픔을 담아낸 송흥록의 귀곡성에 그녀가 감동하여 돌아섰다는 류의 일화도 있다. 그만큼 그의 귀곡성이 청중의 마음을 애끓게 하고 소름 끼치도록 슬퍼서, 도무지 사람이 내는 소리로 여겨지지 않았던 탓이다.

    송흥록생가
    송흥록생가
    가왕 송흥록 국창 박초월 생가
    가왕 송흥록 국창 박초월 생가

  • 판소리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 얽매임 없는 예술가, 송만갑

    동편제 판소리의 적통 소리꾼

    ‘가왕(歌王)’으로 불린 증조부 송흥록에서 조부 송광록, 부친 송우룡을 잇는 판소리 동편제의 적통으로 구례 은천사에서 공부를 할 때는 그가 질러대는 소리가 지겹다고 승려들이 그의 방을 뒤엎기도 했으나 폭포 아래서 내는 소리가 비로소 멀리 절집까지 들리게 되었을 때쯤 세상 밖으로 나와 활동했다는 전설의 주인공. 17세 때에는 전주 ‘대사습놀이’에서 최고의 소리꾼으로 등극해 전국을 누비며 명성을 쌓았고, 1894년 충정공 민영환을 따라 중국과 미국에 다녀오며 더 큰 세상으로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이런 안목으로 30대 후반에는 임금 앞에서 소리하는 ‘어전광대’의 영예를 얻은 덕에 서울에 머물면서 1902년 전국에서 명창과 춤꾼, 기녀 170여 명을 소집해 ‘원각사(圓覺社)’의 전신인 협률사의 기획을 주도했다. 그의 소리는 1906년 처음 헐버트 박사의 주선으로 음반에 녹음되어 전국에 라디오로 전파되며 판소리 예술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당시 이 소리를 들은 고종과 순종은 이 유성기 음반은 정녕 조선의 국보며 이들의 소리야말로 조선 최고의 재산이라고 칭송했다. 

     

    판소리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 얽매임 없는 예술가  

    관습에 매이지 않았던 그는 이미 세상 밖으로 시야를 넓히면서는 더 많이 서울에서 활동하며 웅장하고 호탕한 동편 소리에 서편제의 명창 정창업의 소리 중 계면조 및 경기도와 북한 지역의 특성까지 수용해 동편제의 소리 지향을 크게 확장했다. 이로 인해 전통을 고수하는 동편제 선배들의 지탄은 물론 부친에게 독살 당할 뻔 했다는 소문까지 돌았을 만큼 경계에 묶이지 않은 예술가였다. 또한 ‘청중과의 교감이 진정한 예술’이라는 지론으로, 소리로만 불리던 《춘향가》며 《심청가》를 여러 가객이 함께 연기하며 오페라처럼 연행하는 ‘창극’으로 바꿔내는 작업에 몰두했다. 이를 무대에 올리게 되니 판소리 가문의 집안어른들이며 선후배, 동료들 사이에서 몹시 지탄을 받았으나 대중들에게는 큰 인기를 끌었다. 

     

    음반에 새긴 그의 소리는 조선 최고의 자랑 

    늘어난 제자들과 함께 1908년 지방 공연을 목적으로 소리와 춤, 줄타기 등 갖가지 재주를 보여주는 순회 공연단체 ‘협률사’를 다시 조직해 판소리뿐 아니라 창극 무대를 펼치며 공연을 다니던 송만갑은 1910년 8월 공연 중에 한일병탄 소식을 듣고는 곧 해산 후 전남 구례로 낙향해 꾸준히 소리꾼들을 키우다 고향인 순천 낙안으로 이주해 더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일제 치하에서 우리 전통을 지키려는 예술인들의 노력은 수시로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으나 1933년에는 백여 명의 명창들이 의기투합해 설립한 ‘조선성악연구회’ 설립에 동참해 적극적으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첫 녹음 이후 1913년, 1926년, 1930년, 1934년까지 단가와 판소리 등 유성기 음반에 그를 비롯해 명창들의 소리를 새겨둔 자료가 새롭게 발견되고 있다.

  • 판소리 이론을 세운 원조 명창, 김세종

    당대 최고가의 개런티를 받던 ‘후기 8명창’의 한사람

    김세종(金世宗)은 신재효(申在孝)와 함께 판소리 이론을 확립한 이론가이자, 오늘날 보성소리 계열로 전승되는《춘향가》의 형식을 체계화한 판소리 명창이다. 본디 무가(巫家) 계열 소리꾼 집안 출신인 김세종은, 어려서부터 익힌 동편제 판소리를 발전시켜 당대 최고의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다. 전라도 감영에서 1885년 벌인 잔치의 회계기록 「연수전중용하기(宴需錢中用下記)」에는 공연에 참여한 명창들의 당시 몸값이 기록되어 있는데, 서편제 명창으로 이름난 이날치(李捺致), 김세종의 제자 장자백(張子伯) 등은 50냥을 받았고 김세종은 그 두 배인 100냥을 받았다. 17세기 기준 서울 사대문 안의 기와집 한 채가 150냥이었다고 하니, 당백전 발행 이후 인플레이션이 심했던 김세종 당대(19세기)의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100냥의 몸값은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후기 8명창’으로 함께 손꼽히는 이날치, 장자백 등과 비교해도 그의 위상과 인기가 그만큼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공연자이자 판소리 교육자로서 실제적인 판소리 이론의 확립

    흔히 판소리의 대가로 유명한 신재효는 판소리를 실제로 공연하는 명창이 아니라, 고급 취향의 비평가이자 경제력을 지닌 중인 계층으로서 판소리 공연과 소리꾼 양성을 후원한 패트런(patron)이었다. 반면 김세종은 신재효가 마련한 울타리 속에서 소리꾼들에게 직접 판소리를 가르친 교육자였다. 그는 신재효에게 이론적 조언을 받으면서도, 공연자이자 교육자의 경험을 반영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판소리 이론을 확립했다. 비평자로서 신재효의 판소리 이론이 ‘인물치레’, ‘사설치레’, ‘득음’, ‘너름새’같은 판소리의 여러 개념과 용어를 정의했다면, 공연자로서 김세종의 판소리 이론은 사설(가사)과 발림(몸짓)이 어느 대목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뤄야 하는지, 노래의 장단이나 곡조를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구사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자세히 제시한다.

     

    동편제와 서편제를 넘나든 김세종의 《춘향가》

    판소리 교육자로서 후대에 미친 김세종의 영향은 광범위하다. 신재효가 발굴한 최초의 여성 명창 진채선(陳彩仙)이 흥선대원군이 주최한 경복궁 낙성연(落成宴)에 참석할 때 김세종도 진채선과 동행했다고 하는데, 진채선도 소리를 익힐 때 신재효 문하의 노래 스승이었던 김세종의 지도를 받았을 것이다. 한편 그는 《춘향가》, 그중에서도 <천자뒤풀이> 부분을 잘 불러 큰 인기를 끌었으며, 오늘날 전승되는 <천자뒤풀이> 사설은 김세종의 더늠에서 비롯했다고 전한다. 김세종제 《춘향가》는 제자 김찬업(金贊業)을 거쳐 정응민(鄭應珉)이 전수받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데, 정응민은 서편제 보성소리 유파를 이끈 명창이다. 본래 동편제였던 김세종의 《춘향가》가 오늘날 서편제 계열에도 계승되어 널리 사랑받는 것이다.

  • 전라남도 국악 예맥의 효시, 명창 장판개

    1885년에 태어났다. 학순 장판개(鶴舜 張判盖)의 출생지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연화리이고 다른 하나는 전라남도 곡성군 겸면 현정리이다. 장판개의 가계는 대대로 예술가 집안이었다. 할아버지 장주한은 참봉 벼슬을 지낸 ‘음률의 명인’이었고, 아버지 장석중 역시 참봉 벼슬을 받았다. 동생 장도순 또한 판소리 명창이었다. 이들 가족은 곡성과 순창을 오가며 살았는데, 이러한 거주 지역은 대대로 예인들을 가르치는 교육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인의 피를 물려받은 장판개는 어려서부터 어바저의 소리를 듣고 그대로 복창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아버지로부터 젓대, 거문고, 장구 등을 10년 동안 배웠다. 아버지의 주선으로 당대 명창 송만갑(宋萬甲)에게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등을 3년 동안 배웠다. 그 후 순창의 산사로 들어가 2년간 독공했다. 그러나 소리공부의 부족함을 느끼고 송만갑의 수행고수로 따라다니면서 소리를 더 익혔다. 


    1904년 스승 송만갑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원각사에 참여했다. 1904년 7월 어전에서 「적벽가」를 불렀다. 청미하고 풍부한 성음 성량으로 절륜의 기예를 발휘하여 고종의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고종은 장판개에서 종9품 벼슬인 혜릉 참봉을 제수했다. 

    원각사 폐쇄 후 1908년 송만갑협률사에 참여하여 지방순회 공연을 다녔다. 이후 연흥사에서 창극 공연에 참여했고, 창극 <춘향가>에서 이도령 역을 맡아 춘향 역의 배설향과 열연했다. 1920년 전주권번의 소리선생으로 추진을 양성했다. 1928년 담양극장에서 개최된 신춘구악대회에 참가하였다. 1930년대 초반 아내 배설향과 함께 경주의 권번에서 장월중선 등을 가르쳤다.


    1935년 임방울과 함께 일본에 갔다가 임방울의 권유로 단가 「진국명산」과 「홍보가」 중 ‘제비노정기’를 녹음했다. 이 두 곡이 장판개의 유일한 녹음이다. 당시 아편에 중독되어 성대가 망가진 장판개가 전력을 다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장판개의 「진국명산」은 스승 송만갑이 부른 「진국명산」보다 짜임새가 좋다는 평을 받았다. 장판개의 「제비노정기」는 송만갑제를 버리고 새로 짠 것이다. 

    장판개는 재질이 탁월하고 성음이 청미하며 성량이 풍부하였다. 최하의 저음에서 최상의 고음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거문고, 대금, 피리에도 정통했다. 「심청가」와 「적벽가」를 잘 불렀으며 특히 「홍보가」 중 ‘제비노정기’와 「적벽가」 중 ‘장판교 대전하는 대목’이 일품이라고 전해진다. 장판개는 고수로도 일가를 이루었다. 임방울이 부른 「적벽가」의 ‘호전망극’에 장판개의 북장단과 추임새가 남아 있다.

    1937년에 사망했다. 

  • 중고제 복원의 근거가 될 서산의 명창, 방만춘

    매혹적인 아귀성과 살세성을 구사하던 중고제 명창  

    큰 산줄기가 남북방향으로 뻗어 있고 서쪽은 천수만에 닿아서 물산이 풍부하고 다양한 문화가 싹튼 충남의 해미를 중심으로 경기와 충청 지역에 꽃피었던 중고제는 동편제와 서편제보다 시기적으로 앞섰던 까닭에 초기 판소리의 면모를 고스란히 간직한 소리였다. 방만춘은 바로 이 지역 출신의 명창으로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따르면, 일찍부터 총명하고 판소리에 재질이 있어서 11세 때 고향 근처 충남 가야산 일락사(日落寺)에서 오래도록 공부했으며, 황해도 봉산 어느 절에서 4년 남짓 혹독한 수련을 하던 어느 날 나무 기둥을 끌어안은 채 뿌리가 뽑히고 인근의 절이 무너지는 뇌성벽력의 소리를 지르며 쓰러진 이후에 목이 트이고 특유의 웅장한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각고의 노력과 피나는 수련을 통해 방만춘은 시대를 풍미하는 중고제 명창으로 등극하는데, 그는 특별히 목청을 젖히면서 크게 내지르는 ‘아귀성’과 가늘고 미약하지만 맑고도 선명하게 들리는 ‘살세성’ 같은 소리에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판소리의 지평을 열었던 전기 8명창의 반열에 들다  

    방만춘은 고향 친구인 고수관과 함께 본격적으로 판소리가 완성되던 19세기 초, 시대를 대표하는 8인의 명창 중 하나로 꼽혔다. 명창이란 단순히 최고 소리꾼으로 무대의 주인공 노릇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판소리 사설의 주요 대목들에서 매력적 성격을 드러내는 '더늠'들을 완성하는 창작자들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황해도 봉산의 절에 머물며 소리 공부에 정진하던 시절 그는 시문에 해박했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이와 함께 문헌에 전하는 자료를 참고해 「적벽가」와 「심청가」 내용을 윤색하고 개작하며, 고유한 더늠의 사설을 완성시켰다. 이런 작업을 통해 방만춘은 「심청가」와 「적벽가」를 한결 완성도가 높은 수준으로 정리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상당히 오랜 세월 전해졌다던 이 자료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중고제 부활의 단초가 될 명창 방만춘의 흔적 

    방만춘은 전라도의 동편제와 서편제가 부상하기 이전 서울의 왕실과 귀족 사대부 양반 상류층에서 선호되던 중고제의 소리꾼 중 대표적 인물이었다. 목청이 트인 스무 살 초반 한양에 올라 와서 큰 이름을 떨친 그의 소리는 왕실과 귀족 사대부, 양반 상류층의 기호와 내포 지역 시조를 비롯한 양반들의 가창 문화를 기반으로 중고제 형성의 기반이던 것으로 여겨진다. 안타깝게도 일제 강점기에 급속히 진행된 전통사회의 해체, 즉 판소리를 고도의 예술로 육성하고 이를 지원해 오던 양반사대부 계층 및 조선 왕실이 붕괴되면서 이들의 예술성은 존속되지 못한 채 1910년을 기점으로 쇠퇴하며 단절되었다. 중고제의 명창을 많이 배출한 서산을 중심으로 이를 복원하려는 최근 노력은 아마도 할아버지의 소리를 간직한 그의 손자 방진관의 소리 녹음을 통해 상당한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 바람처럼 떠돌던 중고제의 마지막 소리 고수관

    중고제의 고향 소리를 시작으로 명창의 반열에 오른 소리꾼  

    고수관 기념비
    고수관 기념비
    고수관 생가터
    고수관 생가터

    중고제는 판소리계의 한 유파로 전라도의 동편제와 서편제보다 앞서 경기, 충청 지역, 특히 해미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초기 판소리의 면모를 간직한 소리 전통을 말하는데, 당대의 전설적 명창 고수관은 바로 이 중고제의 마지막 소리로 그에게서 대가 끊긴 셈이다. 서산 고북면 초록리 꽃패집이라고 불리던 초가삼간 옴팡집에 살면서 뒷산 골짜기에 있는 꽃샘에서 목을 축여가며 소리를 연마해 비교적 이른 나이인 20세 전후 득음을 하니 그 목소리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실력을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한다. ‘고수관제’라는 독특한 창법을 개발해 전수하며 소리계에 고유한 흔적을 남겼으나, 득음 후 곧 고향을 떠나 광대로 전국 곳곳을 떠돌다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 그 탁월한 실력과 예술혼 그리고 생몰 시기와 여러 행적을 고향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말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즉흥적으로 시를 읊었던 고품격의 소리꾼  

    판소리는 18세기 후반 음악적인 세련도와 서민적인 흥미를 바탕으로 급부상하면서, 오늘날의 형식과 내용을 비로소 갖추게 된다. 충청도와 서울 일원을 오가면서 활동했던 고수관은 당대 최고의 명창 송흥록, 모흥갑, 염계달 등과 같은 시기에 활동하며, 고향 선배였던 염계달의 중고제를 계승한 것으로 여겨진다. 광대라면 백정보다 못한 취급을 받던 시대에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 알 수 없으나 그는 퍽 유식하고 글재주가 있어 소리판에서 즉흥적으로 한시를 잘 지었다고 전해지며 소리판의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서 임기응변으로 사설을 창작해내는 비상한 재질을 발휘했다고 한다. 최고의 귀명창으로 꼽히면서 시, 서, 화에 두루 능했던 당대 최고의 지식인 신위(申緯)는 고수관의 소리에 홀린 나머지 더 이상은 시를 쓸 수 없다는 한시를 남겼고, 판소리의 이론과 사설의 정립 및 당대 판소리 상황을 집대성했던 신재효와도 두터운 교분을 쌓았는데 당나라의 서정시인 백낙천에 고수관을 비유한 바 있을 만큼 그는 고품격의 소리를 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어허 둥둥 내 사랑

    고수관은 목소리가 각별히 아름답고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독특한 감동을 일으켜 딴청 일수 고수관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하며, 『춘향가』 중에 특히 “사랑 사랑 내 사랑 … 어허 둥둥 내 사랑”으로 리듬을 타는 저 유명한 더늠 ‘자진사랑가’는 선배 염계달의 소리제를 받아 마치 그네를 타듯 더욱 신명나는 소리를 내는 그의 창작물이며, 이후 송만갑(宋萬甲)과 전도성(全道成)의 소리로 전승되어 온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는 성병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코 먹은 소리를 냈는데, 이게 사랑가에 잘 어울린 탓에 오늘날까지 자진사랑가를 부를 때면 비음을 섞어 부르게 되었고, 바람처럼 전국 팔도를 떠돌다 만년에는 공주에 살면서 후학을 양성했다 한다.

  • 일제강점기 민족의 소리를 지킨 맏언니, 명창 김초향

    담대하고 용감했던 소녀 명창 

    김초향은 가난한 소작농의 맏딸이던 그녀는 13세 때 모친을 잃고 가장 노릇을 맡아 16세 때 대구로 와서 대구기생조합에 기적을 두었으며, 20세 때 서울로 올라와 ‘협률사’와 ‘광무대’와 ‘장안사’ 등 공연 단체에 입단해 당대 최고의 소리꾼들의 총애를 받아, 예컨대 김창환에게 토막소리를, 정정열에게는 「춘향가」와 「적벽가」, 송만갑에게는 「홍보가」를, 이동백에게는 소리 바디를 전수받는 등 탄탄히 실력을 쌓았다. 한편 송만갑의 수제자 김정문은 남자들도 쉽게 넘볼 수 없는 「적벽가」를 가르치며  “능히 적벽가를 배워도 아깝지 않은 목청”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소녀 가장으로 생활전선에 나서면서 다져진 강단에다 판소리에 욕심이 대단했던 그녀는 ‘이화중선이냐 김초향이냐’라거나 ‘김녹주냐 김초향이냐’라는 얘기가 회자될 만큼 당대 최고 여류 명창 중의 하나로 호명되던 시절에도 공부를 멈춘 적이 없을 만큼 소리에 대한 애착이 강했고, 1920년대 이후 전국 곳곳에서 열린 명창대회며 방송에 꾸준히 출연하는 등 활동의 폭이 대단한 소리꾼이었다.

     

    의롭고 자비로우며 지혜로웠던 명창 김초향  

    소녀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 수재를 당한 삼남지방민을 돕고자 그녀는 대구에서 모금 공연을 펼치기도 하고, 나라를 잃은 시절 멀리 타향에서 떠도는 만주 지역 동포들을 위한 기금 마련에도 앞장서는 등 민족의식도 남달랐다. ‘옥과 같이 쟁그랑 울리며 푸른 산을 깨치는 듯하고, 난새와 봉황의 피리처럼 선계를 흔드는 모습이 선궁에서 봄바람에 학을 타고 돌아오는 것을 보는 것 같’은 유연하고 품격 높은 소리로 당대 최고의 귀명창과 성북동에 있던 고종의 아들 의친왕의 별장에도 불려 다니며 박영효를 비롯해 김성수·김연수 형제, 송진우, 조봉암, 송병준, 장택상, 조병욱, 예종식, 김병로, 이광수, 염상섭 등 정객과 사업가, 예술가 등을 매료시키고 이름을 높이면서 전성기를 누렸으나 혼인으로 활동이 크게 축소되었다. 결혼 이후 무대에서는 물러났으나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우리 음악이 본격적으로 탄압 받기 시작하자, 1933년 그녀는 이동백과 송만갑, 정정렬 등 당대의 명창들을 익선동 자택으로 초대해 사무실로 쓸 수 있게 배려하면서 판소리 교육과 중흥을 도모할 ‘조선성악연구회’ 발족이 이루어지도록 후원했다.

     

    소리꾼 자매의 전설과 기록  

    스물다섯 살 김초향은 정정렬 명창에게 「춘향가」를 배우려 계룡산 갑사에 백일 동안 용맹 정진하러 가며 열네 살 먹은 동생 김소향을 데려가 함께 공부하는데, 피나는 노력 끝에 명창으로 거듭난 자매는 특히 1927년 개국하는 경성 라디오 방송국(호출부호 JODK)의 단골 가수로 따로 또 함께 활동하면서 ‘자매가수’로도 이름을 날렸다. 당시 라디오로 여러 단가를 비롯해 「춘향가」와 「심청가」, 「적벽가」 일부를 병창으로 부른 더늠들도 전국에 울려 퍼지고 1934년 동생이 요절하기까지 콜럼비아와 빅타 등에서 「이별가」며 「삼고초려」 등 음반을 발표하는 등 20세기 초반 판소리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명창이었다.


  • 하늘 아래 제일로 서러웠던 노래 소리꾼, 이화중선

    꽃들 사이에 나타난 선녀 같았던 화중선

    남원 권번에서 소리를 익힌 꼬마 명창 이화중선은 열다섯 무렵, 조선 후기 8명창 중 한 사람으로 동편제의 법통을 이어받은 명창 장재백의 조카 장득진의 첩으로 들어가서 본격적인 공부의 기회를 얻고 토막 소리들을 익혔고, 열일곱 무렵 소리꾼들이 마을에 유랑 온 ‘협률사’의 공연을 보고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받은 이후 서울로 와서 송만갑과 이동백의 지도를 받아 천부적 재능을 발휘해 「춘향가」, 「수궁가」, 「흥보가」 세 마당을 습득했다고 한다. 1923년 경복궁에서 열린 판소리 대회에 출전해 황후가 된 심청이가 가을 달빛이 가득한 뜰에서 아비를 그리면서 탄식하는 ‘추월만정’을 불러서 최고의 여성 판소리 창자로 등극한다. 이 노래는 최고 히트곡이 되어 꽃들 사이에 나타난 선녀와 같다는 화중선(花中仙)이란 예명과 함께 그녀의 등록상표로 널리 알려지는데, 판소리사상 이 노래는 임방울이 부른 「춘향가」의 ‘쑥대머리’가 새로운 정상에 등극하기까지 1923년 이후 최고의 인기곡이었다.

     

    소리판에 젠더 혁명을 일으킨 인기몰이 

    경복궁의 판소리 대회 이후 이화중선의 폭발적인 인기는 그녀 자신뿐 아니라 여성 소리꾼들에게 남자 명창을 능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에 앞선 최초의 여류명창 진채선(1847∼1901)의 시대만 해도 소리할 때는 남장을 해야 할 만큼 남자들의 전유물이던 판소리의 세계에 새 바람을 몰고 온 이화중선은 사람이 모인 곳이면 찾아가서 우렁차거나 애절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아니고 청아하고 시원스런 소리로 인기를 끌었다. 더욱이 비단옷이 아닌 흰 무명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그녀가 온다는 소문이 나면 구름떼 같은 인파가 모였다. 인당수로 끌려가는 심청, 옥에 갇힌 춘향, 쫓겨나는 흥부, 육자배기 같은 서러운 이들의 관조적이고 덤덤한 이화중선의 소리는 식민지 시절 춥고 배고프며 기댈 곳 없었던 서러운 민중들의 심금을 더 깊이 파고들며 따뜻한 위안이고 희망이 되어 주었다. 

     

    절정에서 스러진 외롭던 그녀의 소리  

    1924년 상경 후 조선 권번에 적을 두었던 그녀는 1928년 남편이며 스승이던 장득진이 사망하자 임실로 내려와서 역시 소리꾼으로 제법 실력을 인정받았던 동생 이중선과 장터에서 주막을 꾸리며 지역에서 열리는 행사들에서 실력을 발휘하는 등 ‘자매가수’로 이름을 날렸다. 1930년대 초 토목업자였던 후견인 이재삼과 법적 부부가 되고 그의 재정적 후원 덕에 홀로 상경해 새로운 전성기를 누렸다. 콜럼비아와 오케, 빅타레코드 등에서 「춘향전」과「흥보전」을 녹음하며 더 큰 인기와 명성을 얻고 ‘조선성악연구회’ 활동도 동참하며 여성 판소리의 최고봉으로 등극했으나, 1944년 새 음반을 녹음하고 일본 탄광이며 군수품 공장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 위문 및 순회공연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풍랑으로 연락선이 전복되면서 외롭고 고달팠던 천민 출신 여성 예술가, 이화중선의 삶은 막을 내렸다.

     

  • 열 폭 병풍 ‘모흥갑도’로 남은 평양의 전설, 명창 모흥갑

    판소리의 두보(杜甫)라 불린 「적벽가」의 거장

    모흥갑은 조선 후기 순조부터 헌종, 철종 때까지 송흥록과 함께 8대 명창에 꼽혔다. 소리의 임금이란 뜻으로 ‘가왕(歌王)’이라 불린 대가, ‘귀곡성’을 잘 구사하기로 이름난 송흥록에게 그런 별칭을 처음 붙여준 인물은 당대 판소리의 양대 산맥이던 동료 모흥갑이었다. 하지만 실내의 청중을 위해 부르는 ‘방안소리’로 바뀌게 되기 전까지, 모흥갑 명창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야외에서 우람하게 질러내는 ‘마당소리’의 전성기라, 그의 우람한 목소리는 독보적이었다. 이들을 한양 궁궐까지 오게 하고, 모흥갑 명창을 ‘청천만리에 울려 퍼지는 학의 울음소리와 같다’라면서 두보(杜甫, 712∼770년)의 아름다움에 비유한 신재효에게 헌종은 벼슬을 내려 크게 칭찬했다. 이에 힘입어 판소리는 전국으로 퍼져 나가 19세기 중반 이후 임금부터 천민들까지 관중의 폭이 크게 늘어날 수 있었다.

     

    열 폭 병풍으로 남은 ‘모흥갑 판소리도’

    이른 시기의 판소리 명창 중 모흥갑은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소리꾼 중 한 사람으로, 그의 자취는 특히 평양감사 김병학의 초청을 받고 대동강 옆으로 흐르는 능라도의 연회장 ‘연광정’에서 양반들에 둘러싸여 공연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으로 더욱 선명하게 전해진다. 당시 그의 소리가 10리 밖까지도 들렸다는 전설과 함께 이를 묘사한 그림에서 평양감사는 숲속에 자리를 깔고 앉았고 좌우로 선비들이 늘어앉거나 서 있고, 한가운데 당대 명창 모흥갑이 부채를 펴들고 고수와 마주한 채 소리를 하는데, 그림 왼쪽에 ‘명창 모흥갑’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모흥갑은 「적벽가」와 「춘향가」를 잘 불렀고, 특히 「적벽가」로는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더늠으로 전해지는 「춘향가」의 ‘이별가’ 중 ‘날 데려가오’하는 대목은 높은 소리를 계속 질러내는 그의 특징적인 고동상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음반에 새긴 그의 소리는 조선 최고의 자랑 

    양반들 축하연이며 임금 앞에서 판소리를 부르는 일이 흔했던 시절, 특히 「적벽가」 중 ‘장판교’ 대목은 지금도 ‘모흥갑 더늠’이라고 밝힐 만큼 최고의 경지를 드러낸 까닭에 그의 시대에서 50년이 더 지난 1936년에 녹음된 이화중선의 소리에서도 가장 격정적인 대목에서는 ‘모흥갑의 더늠’이라는 표시가 확인된다. 모흥갑이 소리를 하던 당시 헌종을 위시해 삼정승과 육판서 이하 어전에 나열했던 조신들까지 고음으로 올라가는 그의 소리가 ‘하얀 눈 위에’ 혹은 ‘혀 위에서 진저리치듯’ 현란하고 매혹적이어서 지위와 체면을 잊고 다 함께 탄성을 지르며 그의 더늠 소리에 열광했다고 전해한다. 모흥갑 명창의 이름은 구전이나 전설에만 남은 게 아니라, ‘춘향가’나 ‘무숙이타령’에도 등장하며, 윤달선의 『광한루악부』, 이유원의 『임하필기』, 이건창의 『이관잡지』, 신재효의 『광대가』 등의 문헌에도 꾸준히 등장해, 모흥갑이라는 명창에 대한 인기가 얼마나 광범위했는지 가늠케 한다.

  • 최초의 여성 명창 진채선

    천시받던 판소리를 공공연하게 부른 첫 번째 여성 명창

    오늘날 판소리는 한국의 중요한 전통문화로 대접받지만, 조선시대에는 양반이 즐겨듣는 가곡창이나 시조창, 그에 따르는 춤이나 악기 연주보다 판소리를 ‘서민들이 즐기는 천한 음악’으로 여겼다. 그러나 판소리의 매력은 양반들 사이로도 번져나갔고, ‘금향선(錦香仙)’이라는 기생이 시조창만큼이나‘잡가(雜歌, 여기에서는 판소리를 가리킴)’를 잘했다는 『금옥총부(金玉叢部)』의 기록을 보면, 늦어도 19세기 후반에는 판소리를 가창하는 기생들이 많아졌다는 것이 학계의 논의다. 물론 판소리를 낮춰보는 인식은 여전했고, 기예의 일종으로 판소리 일부를 간단히 익히는 기생들은 있었어도 여성 예능인이 전문적인 판소리 가창자를 자임하는 일은 없었다. 이런 시기에, 다른 곳도 아닌 조선왕조의 정궁, 경복궁의 연회 현장에서 당당하게 판소리 공연에 나선 여성 소리꾼이 등장했으니, 그녀가 바로 최초의 여성 명창 진채선(陳彩仙)이다.

     

    신재효와 흥선대원군의 귀를 사로잡은 진채선의 소리

    진채선이 판소리사에 남는 여성 명창으로 성장한 데에는 판소리 이론가이자 비평가, 후원가였던 신재효의 역할이 컸다. 신재효는 남성만의 영역이었던 판소리판에 여성과 아동도 판소리를 할 수 있는 저변을 마련했는데, 진채선이 그 대표적인 수혜자였다. 그녀는 신재효의 이론적 영향, 그리고 신재효의 후원을 받은 노래 선생 김세종의 지도를 통해 판소리를 익혔다. 진채선이 남장을 하고 공연에 임했다는 증언도 있는데, 증언의 사실 여부는 확증할 수 없지만 그만큼 당대에 여성 예능인이‘기생’이 아닌 ‘소리꾼’으로 인정받기가 어려웠으리라는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어려움에도 진채선은 흥선대원군이 주최한 연회에 참여해 뛰어난 실력으로 청중을 놀라게 했고, 대원군의 눈에 들어 운현궁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만큼 진채선의 실력이 당대의 으뜸이었다.

     

    「도리화가」와 ‘기생점고’ 더늠, 편지기록에만 남은 진채선의 흔적

    그러나 시대적 한계는 그녀에게 신분과 성별의 굴레를 동시에 씌웠다. 유일하게 전해지는 그녀의 더늠 「춘향가」‘기생점고’ 대목으로 보건대, 학계에서는 그녀가 기생 출신이거나 혹은 기생과 비슷한 대우를 받았으리라 짐작한다. 신재효의 서신에는 고을 수령이 진채선으로 추정되는 기생을 억지로 붙잡으려 하자 신재효가 이를 무마시킨 흔적이 여럿 남아 있다. 자신을 기생으로 여겨 착취하려는 남성들과 이를 거부하고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 한 진채선 사이의 갈등을 그려볼 수 있다. 대원군 앞에 나서서 공연할 만큼 재능과 명성이 뛰어났지만, 그 이후에는 진채선의 음악 활동에 대한 눈에 띄는 기록은 물론 제자 양성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는 것도 그녀가 처했던 시대적 한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운현궁에 들어가 쉽게 만날 수 없게 된 진채선을 그리워하며 신재효가 지었다는 「도리화가」만이 진채선의 흔적을 전하고 있다.


    진채선의 일화를 재구성한 영화 「도리화가」

    진채선과 그의 스승 신재효의 일화는 재구성되어 2015년 영화 '도리화가'로 제작되었다. 영화 자체는 아쉽게도 호평은 얻지 못했지만,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진채선이라는 조선의 소리꾼을 기억할 수 있는 영화로 남게 될 것이다. 영화 속 드넓은 억새밭에서 진채선이 소리를 하는 장면은 경상남도 합천의 황매산에서 촬영되었다. 합천 8경 중 하나인 황계폭포는 진채선 일행이 소리를 연습하는 장소의 배경이 되었다. 주위 경관과 더불어 시원한 폭포가 장관이다. 

  • 전주 대사습의 원조이며 최초의 양반 광대, 권삼득

    전주 대사습놀이의 원조 

    19세기 초 판소리 발달사에서 양반 광대는 한글로 된 판소리의 사설 곳곳에 한문으로 된 세련된 구절들을 넣어 다듬으며 판소리의 격조를 한껏 높이고, 덕분에 다수의 양반과 중인 사이에 호응을 얻게 되면서, 이 시기 판소리에 대한 양반들의 태도는 단순한 호기심 차원을 넘어 예술적 가치에 대한 관심과 고찰 대상으로 격상되었다. 귀명창으로 이름난 신위(申緯)나 이유원(李裕元) 같은 당대의 탐미주의 유학자들 문헌에도 판소리에 대한 체험과 여러 소리꾼의 특성에 대한 논지들이 보이고, 왕실에 불려가 소리를 하는 이른바 어전 명창들도 생겨났다. 이런 배경에서 향반 출신의, 보통 무계 출신의 천민이던 예인집단이 아닌 양반 출신 광대를 뜻하는 ‘비가비’로 이름을 날린 명창 권삼득은 오늘날 예향(藝鄕) 전주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전통예술의 놀이마당 대사습놀이의 원조로도 손색이 없다.

     

    양반 출신 광대 ‘비가비’ 출신 소리꾼의 전설  

    영정조 시대에 활동을 시작한 명창 권삼득은 당대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보다 40여 년 먼저 태어난 소리꾼이었다. 12세 무렵에 초기 판소리의 명창으로 꼽히던 하은담과 최선달 등으로부터 소리를 익히기 시작해 근교의 산과 계곡을 떠돌며 사람 소리뿐 아니라 새와 짐승의 소리까지 세 가지 소리를 두루 터득했다는 뜻에서 삼득(三得)이라는 이름을 새로 얻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 양반댁 자제로 광대소리를 하겠다고 고집한 탓에 가문에서 멍석말이로 목이 잘릴 뻔했으나 황홀한 소리로 사람들을 감동하게 한 덕에 족보에서 이름만 빼고 목숨을 구했다거나, 그의 묘 앞에는 비 오는 밤이면 노래가 새 나오는 소리굴이 있다는 식으로 그의 재능과 실력을 칭송하는, 아마 비가비 출신이라는 예외적인 신분적 배경 탓인지 그의 재능을 더욱 독보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 듯한 내용의 설화들도 전해진다.

     

    목청을 길게 빼어 부르는  ‘제비 후리러 나가는’ 덜렁제 

    조선 후기 영정조에서 순조로 이어지던 시대에는 판소리가 여러 지역 민요와 양반들의 취향까지 포용해 지역과 계층을 막론하고 애호하는 민족음악으로 거듭나는데, 이런 대중화에 혁혁한 공이 있는 대표적인 광대 즉 8대 명창의 반열에 든 권삼득은 특히 「흥보가」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그가 창안한 ‘덜렁제’ 혹은 ‘설렁제’라 불리는 독특한 소리제에서 기인하는데, 본래는 판소리 동편제에 가까운 중고제로서 특히 소리의 위아래가 분명하고 명쾌한 특성이 있다. 예컨대 귀인의 행차에 가마를 메고 가며 둘로 나뉜 교군들이 주거니 받거니 목청을 길게 빼어 부르는 권마성(勸馬聲)처럼 높은 소리를 길게 질러서 내니 「흥보가」에서 놀부가 가노들을 이끌고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과 「춘향가」의 ‘군노사령 나가는 대목’처럼 씩씩하고 경쾌한 느낌이다. 이는 이전의 판소리가 상당히 여성적 창법이었던 반면 남성적 창법의 도입과 함께 한결 우렁차고 매혹적인 소리로 표현을 넓히고 소리의 예술성이 강화되니, 이런 식의 더늠은 특히 전도성과 송만갑, 김창룡, 염계달 등 후배 명창들이 즐겨 따라하는 새로운 스타일로 정착해 간 계기였다.

     

  • 판소리계의 카루소 이동백

    중고제의 고향 소리를 시작으로 전국 명창의 소리를 섭렵

    무계(巫系)와 관련 있는 예능인 집안의 후손으로 추정되며, 유복자로 태어나 가난하고 불우한 유년기의 서당 공부는 지루했던 반면 소리 공부는 마냥 즐거웠다. 열세 살 무렵 서천 지역을 대표하는 소리, 중고제를 잇는 명창 김정근(金正根)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일곱 살짜리 아들 김창룡과 함께 공부해 둘은 중고제를 계승한 마지막 소리꾼이 되었다. 더 좋은 소리를 하고자 고향 서천의 희리산 토굴에 들어가서 2년 동안 목에서 피를 토하며 혼자 공부한 결과 소나무 앞에서 통성을 내지르면 그 뿌리가 뽑힐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진주 옥천암에 3년간 머물며 불가의 소리도 배우고, 최고의 남도 소리를 찾아 김세종(金世宗)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5년간 창을 배웠다. 이 무렵 창원 부사로 있던 대표적인 친일파 이지용의 주목을 받아 명창으로 알려진 이후, 서울에서 힘을 쓰던 권세가들 사이에 불려 다니며 중앙으로 진출할 기회를 얻었다.

     

    한국의 카루소 

    경남 창원에서 특히 「새타령」으로 이름을 떨치다 상경한 이동백은 워낙 훤칠한 용모에 야외에서 지르는 ‘마당소리’에서 우람한 목소리와 고음과 저음을 자유롭게 오르내리며 숨 가쁘게 몰아가는 창법은 당대 관객들을 사로잡아 같은 시기 이탈리아 최고의 인기가수인 카루소에 비견되곤 했다. 실제 공연에서 아기자기한 성음으로 특유의 새 울음소리를 기막히게 구사하며 자진중중모리로 “삼월삼짇날 연자 나라들고”로 시작한 박력 있는 소리에 즉흥적으로 소리를 바꿔가며 청중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킬 수 있을 만큼 그는 소리 실력이 탁월했다. 1900년 고종 황제 앞에서 판소리를 불러 ‘통정대부’ 벼슬까지 얻은 이후, 고종은 원각사의 소리 공연에 전화선을 대고 그의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는데, 그의 새타령은 이날치 이후 최고라는 평을 받았으며 그의 소리 음반 수십 종이 남아 있어 판소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일제 시대 민족음악 지킴이로 활약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우리 음악이 탄압 받기 시작하자, 동료들과 원각사에서 창극을 공연하고, 원각사가 해산되자 연흥사와 광무대로 반경을 넓혀 창극과 판소리를 공연하며 창극의 정립에도 힘을 쏟은 한편 1933년 송만갑, 김창룡, 정정렬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해 본격적으로 판소리 교육과 중흥에 앞장섰다. 1939년에 부민관에서 은퇴 공연 후 열화와 같은 요청으로 두 달 동안을 전국과 만주, 연해주 일대까지 순회공연이 이어졌다. 외래 음악의 영향이 커지는 상황에서 특히 일제가 혐오하며 적극적으로 단절시키려 했던 전통의 소리로 조선인들의 귀를 매혹시켜 창가나 소리를 주제로 한 훌륭한 공연 문화를 창조했던 그의 역할은 우리 음악사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로 꼽을 만하다. 특히 그가 남긴 중고제 소리는 20세기 전반까지는 지속되던, 동편제나 서면제보다 더 오랜 전통을 많이 간직한 원형에 해당하므로 이를 통해 이전의 판소리를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단히 귀한 사료가 되었다.

  • 보성소리의 창시자 박유전

    섬세하고 세련된 서편제의 대표적 명창

    전라도의 대표 소리 중 호남 동부인 내륙 지역, 즉 우도의 동편제가 19세기 중반 무렵 정립된 이후, 유난히 곱고 빼어난 목소리로 청중을 사로잡던 박유전은 25세에 전주통인청대사습에 나가서 「심청가」로 장원한 덕에 한양에 올라가는 특별상이 주어졌다. 마침 세도정치로 위세를 떨치던 안동 김씨의 감시와 생명의 위협을 피해서 남사당패를 따라 전주에 들른 대원군은 섭정을 시작한 후 1864년 전라감사에게 “단오절 경창대회를 감영에서 관장하고 장원한 명창은 상경하라”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이는 판소리 광대들이 경제적 부와 명예 그리고 어전명창이 되는 신분 상승까지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바로 이 기회를 얻은 박유전은 한양에서 대원군의 처소인 운현궁의 사랑채에 머물며 갈고 닦은 소리로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였다. 이전 전통인 동편제가 선이 굵고 꿋꿋하며 담백한 소리지만, 한양 생활에서 귀명창들과 교류하며 가다듬은 그의 새 스타일은 한결 부드럽고 세련된 기교와 섬세한 변화를 담은 감성 물씬한 소리로, 이후 섬진강 서쪽의 광주와 나주, 보성과 장흥 등지, 즉 우도 지역으로 퍼지며 서편제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대원군의 심장을 흔든 소리 

    대단한 호사가였던 대원군은 전주대사습에서 선발된 최고의 광대들을 한양으로 불러 후한 대접을 하며, 양반 좌상객들을 불러들여 광대의 품평회 자리를 마련하니 박유전은 수시로 이들 앞에서 소리를 하고 이들의 질정을 통해 꾸준히 자신의 소리를 다듬어 점점 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예컨대 기존의『춘향가』에 새로운 더늠 「이별가」를 추가하고, 『심청가』에도 전보다 훨씬 더 비애감이 깊은 소리로 유생들의 권유를 반영하니 운현궁 품평회에서 그의 빼어난 소리에 흡족했던 대원군은 한쪽 눈이 먼 박유전을 몹시 안타까워하며 검은 안경을 선물로 주었고 “천하제일 강산”이라고도 칭찬하며 ‘강산’이라는 호를 지어주고, 무과 선달의 첩지를 내렸다.

     

    보성소리, 이름하여 강산제의 창시자  

    소리꾼들의 후원자였던 대원군이 1873년 권좌에서 물러나자 한양을 떠나 판소리의 본고장이었던 전라도 나주로 내려가, 광대 집안 출신 정재근을 만난 인연으로 그를 따라 보성에 정착한 후에 다시 소리의 새로운 지평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보성 일대에서 대대로 활동하던 정재근을 시작으로 세마치장단과 여러 장단을 운용하여 변화무쌍한 부침새로 다시 짜 넣은 박유전의 새로운 스타일은 이날치와 정창업을 거쳐 김채만과 정응민, 김창환으로 이어졌고, 공창식, 박동실, 성원목, 정권진, 성우향, 오수암, 정정렬 등 이후 지역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활약하며 이름을 날리게 되는 명창들이 뒤를 이어 새로운 양식으로 자리 잡았는데, 그의 호를 따 강산제(江山制)라 불리며 지역의 이름을 따라 ‘보성소리’라는 별도의 이름도 얻게 되었다. 특히 강산제 『심청가』 전통은 정재근의 후손을 중심으로 이후에는 무형문화재로 계승되었다.


    '보성 판소리성지' 와 '서편제보성소리축제'

    전라남도 보성에는 박유전을 비롯하여 보성을 대표하는 보성 판소리 명창 6인을 기리고 판소리를 대중화하기 위해  '보성 판소리성지'가 조성되어 있다.  보성 판소리성지의 생활관 옆에는 '박유전 선생님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판소리의 역사를 알아볼 수 있는 '판소리교육관'도 있다. 1998년부터 매년 '서편제보성소리축제'를 열어 근대 판소리문화를 계승하고 있다. 녹차 차향 가득한 보성에서 우리 소리를 감상해봐도 좋을 듯 하다.

  • 서편제 나주 소리의 시조, 국창 김창환

    판소리 명문가의 적통 소리꾼  

    전라남도 나주 지역의 무계 출신인 김창환은 어려서부터 외가 쪽의 이종형들인 명창 이날치와 박기홍에게 소리를 익힌 한편 각종 고전에도 능통하고 선배들의 창법과 바디를 두루 공부해 동료 명창들로부터도 존경받던 판소리계의 대가였다. 특히 「흥보가」 중 강남에 갔던 제비가 박씨를 물고 흥보의 집으로 돌아오는 노정을 노래하는 ‘제비 노정기’는 그가 창작한 대표작으로, 동편제 명창들도 즐겨 부르는 명작이었다. 당대 정상으로 꼽히던 정창업 명창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판소리 공부를 시작해 상당 수준에 이른 20대에는 이론을 완성한 신재효의 문하에서 여러 해를 이론과 실기 공부를 하며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등 작품을 문학과 음악 그리고 연극적 요소까지 신재효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절제된 발림 등으로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을 완성시켰다. 이에 따라 18세기 후반 나주는 활달하고 우렁찬 동편제에 비해 한결 섬세하고 세련된 기교가 돋보이는 서편제의 중심, 남도 소리가 탄생한 본거지로 자리 잡았다.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어전 광대

    수려한 풍채와 세련된 너름새까지 겸비한 김창환은 마흔 무렵 한성에 올라와서 이름을 날리던 중 대한제국의 왕실 어전에도 호출되어 한껏 실력을 발휘했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영향으로 판소리 애호가였던 고종은 출중한 그의 실력에 감동해 명예직이지만 중추원의 의관직을 주고 춤과 소리 교육을 담당한 왕실 교방서의 다른 이름으로 ‘협률사(協律司)’를 설치해 170여 명의 궁궐 소속 연예인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기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했다. 그는 나라를 대표하는 어전 광대 소리꾼으로서 1902년 가을 전국의 명창들을 한양의 궁으로 불러올려 고종황제 환갑을 기념하는 예식을 준비했으나 콜레라의 창궐로 계속 연기되다 결국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로 취소된 바 있다. 국내 최초 서양식 극장 원각사가 개관하며 운영 책임을 맡게 된 그는 궁궐에서 준비하던 행사의 전통 판소리를 오페라처럼 변형해서 무대에 올리며 대중이 함께 즐기는 소리의 향연, 창극의 시대를 새로 열었다.

     

    최초의 사설 창극단 ‘김창환 협률사’

    왕명으로 개관했던 국내 최초의 근대식 공연장이던 원각사가 일제의 간섭으로 폐쇄되자 그는 곧 나주로 귀향해 지역의 명창들과 최초의 창극단 ‘김창환 협률사’를 조직해 전국 순회공연을 벌였는데, 풍채가 좋고 너름새가 출중했던 국창 김창환과 그 일행을 보려고 몰려오는 사람들로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같은 시기에 동편제의 명창 송만갑은 이동백, 한성준 등 당시 젊은 예술인들과 뜻을 모아 한양에서 ‘동대문 협률사’를 개관해 성공했으나,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탄과 함께 전통예술을 통한 민족혼의 고취 및 한국인의 동질성을 고무시킨다는 이유로 두 협률사 모두 해산되었다. 이후에도 김창환은 유사한 목표로 설립된 경성 배우조합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한참 설립되던 음반사들에 소리를 취입하고, 경성방송국 국악 방송에 출연하며 1930년 설립된 조선음률협회의 회장을 맡는 등 전통의 소리를 지키는 최전선에서 활약을 멈추지 않았다.

  • 명창 이선유, 동편제 소리가 경상도로 흘러가 다섯 권의 책으로 남은 사연

    동편제 소리가 경상도로 흘러간 사연  

    이선유 판소리 기념관
    이선유 판소리 기념관

    서편제에 비해 전통을 고수한 동편제는 교통이 힘들던 시절 지리산과 섬진강을 경계로 남원과 구례, 순창 등 전라도 동쪽 지역 및 인접한 경상도 서남 지역에서 맥을 잇던 소리로, 명창 이선유를 통해 하동과 진주 지역으로 유입되었다. 지리산과 맞닿은 지역에서 발달한 탓인지 기교를 삼가고 대신에 소리 끝을 짧게 끊어 힘이 있고 시김새가 굵은 ‘고졸한 소리’라고들 이야기했다. 하동 출신 이선유는 15세 때 인근 구례에서 이름난 명창 송우룡을 찾아가서 3년을 머물면서 씩씩하고 꿋꿋한 소리 기반을 익힌 후에 폭포와 사찰 등지로 십년 여를 홀로 떠돌며 공부하다 1902년 순창의 김세종을 찾아가서 본격적으로 소리 공부를 했다. 김세종은 신재효를 사사해 이론에 밝을 뿐 아니라 소리꾼들에게 최고의 교육자여서, 이선유는 그 밑에서 제대로 득음해 ‘신묘지경에 이르러 조선 성악의 독보'라고 평해질 만큼 동편제 소리의 대가로 등극하지만 그를 잇는 동편제의 소리꾼은 대가 끊겼다. 송만갑협률사 활동에도 동참해 잠시 전국으로 순회공연을 다녔으나 경술국치로 해산된 이후 극장이나 무대의 공연 활동은 하지 않았다.

     

    소리 낙원을 구가했던 진주 권번

    당시 판소리는 양반에서 일반대중으로 확산되어 소리꾼들도 대중의 취향을 따라서 서편제가 크게 확산되었으나, 이선유는 이런 변화를 삼가고 전통 스타일을 고집하면서 1920년경 진주로 이주해 권번의 소리 선생으로 20년간 일했다. 대중적으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1930년 이후 몇 해 동안은 방송에도 출연하고 콜럼비아, 포리돌, 빅타 등에서 유성기 음반 30면(약 90분) 분량을 녹음해 자료로 남겨두었고 꾸준히 제자를 양성했다. 진주 권번은 1905년 관기제도가 없어지면서 진주의 노기(老妓)들이 기생조합을 만들어 발전시킨 국악학교로, 여기 초빙되어 그가 키워낸 제자 중 대표적 예술가로는 1936년부터 2년에 걸쳐서 「춘향가」와 단가를 가르쳤던 무형문화재 ‘진주검무’의 춘당 김수악(1926~2009), 판소리와 가야금의 명인 오비취(1910~1986), 함양 출신 명창 신숙(1916∼1982) 등이 있다.

     

    최초로 인쇄 출간된 이선유의 판소리 다섯 마당

    이선유는 굵고 탁한 소리로 심금을 울리는 서편제의 흐름을 마다하고 동편제의 전통 스타일을 고집한 탓에 대중적 인기와는 거리가 멀었던 반면, 권번에서 가르치던 청아한 그의 소리는 독창적인 예술성보다는 사대부 남성들의 취향에 맞춘 기녀들의 음색으로 애호된 편이어서, 판소리에 감식안을 가졌던 김택수와 공동 작업으로 『오가전집』이라는 유물을 남길 수 있었다. 두 사람은 1933년 봄 계룡산 동학사에서 한 달, 경남 산청 대원사에서 보름을 머물면서 이선유가 판소리 다섯 마당(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 박타령)을 부르고, 김택수는 이를 기록하며 함께 정리했다. 이전에도 사설과 소리를 담은 자료는 있었으나 개인적 기록에 해당하는 필사본 형태였던 반면, 판소리의 장단과 아니리를 꼼꼼히 표기했던 이 책은 일제 강점기에 많이 출판된 딱지본 소설처럼 김택수가 사비로 출간한 인쇄본으로, 동편제의 판소리 사설과 장단 구성의 연구는 물론 고종 말기 판소리연구에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선유 판소리 기념관
    이선유 판소리 기념관
    이선유 판소리 기념관
    이선유 판소리 기념관

  • 세상을 향해 베를린에 울려 퍼진 명창 박초월의 소리

    몰래 참가한 전주대사습놀이 에서 장원으로 이름을 날리다

    가왕 송흥록 박초월 생가 동상
    가왕 송흥록 박초월 생가 동상

    박초월은 전라남도 순천에서 남사당패의 일원으로 활약하던 아버지와 무업에 종사한 외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아홉 살 무렵 그녀의 가족은 가왕 송흥록과 송광록이 살던 소리의 고향, 남원 운봉으로 이사를 했다. 자매들은 자연스레 악기와 소리를 익히며 성장했는데, 10녀 1남의 셋째 딸 박초월은 특히 천재 소녀 명창이라는 칭찬을 자주 들었다. 그녀는 12세 무렵 남원 권번에 적을 두고 집에서 왕래하며 소리를 배우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14세에 대부호의 재취로 시집갔으나, 넉 달 후 집을 나와 김정문(金正文), 송만갑(宋萬甲) 등 최고 명창의 제자가 되어 소리 공부를 계속했다. 그리고 17세인 1930년, 부모와 남편 몰래 전주대사습놀이에 나가 「춘향가」 중 ‘어사와 춘향모 상봉’ 대목을 불러 장원을 했다. 이를 계기로 판소리계에 널리 이름이 알려지고, 임방울(林芳蔚)과 유성준(劉成俊) 등 당대의 명창에게 지도를 받는 한편, 일본 도쿄로 건너가서 음반을 취입하고 경성의 부민관(府民館)에서 성황리에 공연을 여는 등 일약 판소리 스타의 삶을 살게 되었다.

     

    판소리의 보존과 부흥을 위한 노력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을 지나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박초월은 여성 명창들과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는 한편 각종 창극과 국극에 활발히 출연했는데, 특히 춘향의 어머니 ‘월매’ 역할로 유명했다. 이규환 감독의 영화 『춘향전』, 『심청전』에서 창을 맡기도 했다. 1955년에는 사라져가는 판소리의 보존과 부흥을 위해 박귀희, 김소희 명창 등과 뜻을 모아 오늘날 국악예술학교의 전신 민속예술학원을 설립했고, 1959년 민속예술학원이 국악예술학교가 되자 초대 교장 박헌봉(朴憲鳳)이 작사한 교가를 직접 부르기도 했다. 박초월은 특히 제자 양성에 힘써서 문하생들을 위한 발표회를 열고, 이 발표회를 위해 임방울, 정광수 등 당대 명창들에게 찬조출연을 부탁하기도 했다. 작창(作唱)에도 힘쓴 결과 47세였던 1963년 국립국악원에서 창설한 제1회 국립국악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1974년에는 판소리보존회의 이사장으로 취임해 활동했다.

     

    서베를린에 울려펴진 박초월의 「수궁가」

    박초월 판소리의 음악적 특징은 판소리의 대중화라는 그녀의 지향과 잇닿아 있다. 상청 고음에 탁월했던 박초월의 소리는 ‘애원성’과 ‘설움조’로 유명했는데, 이는 기존 판소리 사설에서 비속하거나 재담이 많은 내용은 줄인 대신 서민적 형상을 강화하는 박초월 특유의 사설 구사와 어우러져 ‘서민의 한’을 잘 담아낸, 서민이 즐길 수 있는 판소리를 일궈냈다고 평가받는다. 판소리의 대중화를 지향한 박초월의 활동은 판소리의 세계화로 이어져, 1976년 서베를린에서 열린 국제현대음악제에서의 판소리 공연을 성공시킨다. 3시간여에 걸쳐「수궁가」를 연창하며 서구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박초월의 공연은, 1970년에 최초로 판소리를 오선지에 채보하도록 했던 선구적인 노력이 빛을 본 결과이다.

    동편제 마을
    동편제 마을
    가왕 송흥록 국창 박초월 생가
    가왕 송흥록 국창 박초월 생가

    박초월이 어린시절을 보냈던 전라남도 남원시 운봉읍 비전마을에는 박초월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박초월 생가 옆에는 동편제의 가왕 송흥록의 생가와 동상이 있다. 이 곳 비전마을은 고려 우왕 6년(1380) 태조 이성계의 환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대첩비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제비 몰러 나간다~ 명창 박동진

    박동진 명창

    박동진의 1916년 충남 공주군 장기면 무릉리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시절 대전극장에서 열린 협률사 공연을 보고 판소리에 입문하기로 결심을 했으나 이 때문에 아버지께는 절연을 당했다. 그 길로 홀로서기를 한 박동진은 충남 청양의 풍물패 상쇠를 잡았던 손병두 선생의 문하에서 토막잡가를 배우는 것을 시작으로 김창진, 정정렬, 유성준, 조학진, 박지용 등에게 소리를 배웠다. 18세~21세에는 아직 판소리를 배우는 학생 입장이었음에도 기ᇠ언과 대구에서 권번의 기생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쳤다.


    많은 스승으로부터 소리를 배웠으나 시기적으로 풀리지 못하고 일제 말부터 1960년 무렵까지의 혼란기에는 권번에서의 소리선생으로 또 여러 국극단을 전전하였다. 한국전쟁 기간에는 국민방위군 창극단에서 활약하기도 하였으나 4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명창으로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1962년 국립국악원의 국악사보가 되면서 생활에 안정을 찾게 되자 판소리 수련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6년 뒤인 1968년, 박동진의 판소리 인생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는 ‘흥보가’ 완창 발표회를 연다. 남산 국립국악고등학교에서 열린 완창 공연은 꼬박 5시간이 걸렸다. 당시 완창을 할 수 있는 명창도 극히 드물었기도 하였지만, 완창을 부른 관례도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5시간에 걸친 박동진의 ‘흥보가’ 완창은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는 전통 판소리 공연 형태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고, 박동진이 명창으로 판소리계의 중심인물로 서게 된 전환점이 되었다.


    그 후로 박동진은 판소리 5마당은 물론, ‘춘향가’ 8시간, ‘심청가’ 6시간, ‘변강쇠타령’ 5시간, ‘적벽가’ 7시간, ‘수궁가’ 5시간을 완창하였다. 이외에도 ‘숙영낭자전’, ‘옹고집’ 등의 전통 판소리에 곡을 붙여 전통 판소리를 이어오는가 하면, 창작 판소리인 ‘성서 판소리(예수전)’, ‘이순신장군일대기’(충무공 이순신)를 자신만의 독창성을 보여주었다. 1960∼70년대 ‘이순신 선양화 사업’과 맞물려 창작된 ‘이순신장군일대기’는 약 9시간에 이르는 대작이다.


    박동진은 1992년 의약품 TV 광고에서 흥보가의 “제비 몰러 나간다~”라는 대목을 부르며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고 하던 장면이 유명해지며 대중에게 각인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박동진은 완창 공연과 미디어의 인기에 힘입어 1970~80년대 판소리의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얻은 소리꾼이었다. 소리의 공력과 공연 능력으로는 최고로 손꼽히고 있으며, 조선시대 광대놀음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충청남도 공주시의 지원으로 박동진 명창의 소리를 계승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1998년 박동진판소리전수관(충청남도 공주시 무릉동 370)이 설립되었다. 박동진 명창 생전에는 판소리전수관에서 직접 제자를 가르치기도 한 이곳에서는 지역민을 대상으로 평생학습 특성화 프로그램으로 판소리 교육이 진행되기도 한다. 판소리전수관 정원의 박동진의 호를 딴 ‘인당정’에 걸려있는 현판은 박동진 명창이 직접 쓴 글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