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요를 채보하고 현대적으로 재건한 국악의 아버지, 지영희

    지영희는 1909년 경기도 진위군 포승면(현재 경기도 평택시 포승면)에서 태어났다. 지영희가 살았던 내기리와 만호리는 무속신앙이 발달한 고장이었다. 지영희 가문도 세습무가로, 지영희는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무속음악을 익혔다. 지영희는 11세에 이석은에게 승무, 검무, 굿거리 등 춤을 배운 이후 30대 중반까지 많은 민속음악의 명인들로부터 기예를 사사받았다. 1929년 조항년에게 호적을 배우고, 1930년 정태신에게 양금을 배우고, 1931년 지용구에게 해금을, 양경원에게 피리를 배웠다. 또한 김계선에게 풍류 대금을, 방용현에게 민간 풍류 대금을, 최군선에게 농악을, 오덕환에게 무용장고를, 박춘재에게 경서도 민요를, 최수성에게 단소를, 김상기에게 거문고를 익히는 등 거의 모든 민속예술의 장르를 섭렵하며 종합예술인으로서 소양과 능력을 두루 갖추었다. 지영희는 천대 받는 무속인이 아닌 사회적 인정과 존경을 받는 음악가가 되고자 하는 뜻을 품었다. 그리하여 1937년에 서울로 상경하여 당대 최고의 무용가였던 한성준의 조선음악무용연구소에 들어가 최승희무용단의 악사로 활동하며 해금과 피리 연주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지영희는 뛰어난 민속악기 연주자에서 국악계를 재건하는 데 앞장서는 지도자이자 스승으로서 활약한다. 일제의 식민 지배에 억눌리고 서구음악의 유입에 밀려나는 전통음악을 되살리고자 대한국악원 창립을 주도하고 음악연구소를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하는 등 국악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았다. 또한 지영희는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민속음악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하여 국악 현대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지영희에 의해 악보 없는 우리의 가락은 처음으로 오선보에 기록되었다. 지영희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채보활동을 펼쳤고, 그렇게 수집한 민요들을 연구하여 새로운 민속음악을 작곡하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특히 지영희는 국악기로 관현악단을 구성하여 연주하는 혁명적인 실험을 시도하여, 최초로 국악관현악단을 만들어 지휘하였다. 


    지영희는 국악을 대중화하기 위해 1937년 처음 민요와 대풍류로 음반을 취입한 이후 수많은 민요들을 녹음하여 음반으로 발매하였다. 특히 2003년에 발매한 <해금시나위와 산조>에는 지영희 해금산조의 특징적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지영희는 1972년 최초로 미국 카네기홀에서 연주하는 영예를 얻었고, 1973년 시나위로 국가무형문화재 제52호에 지정되었다. 지영희는 국악계와의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1974년 가야금 명인인 부인 성금연과 함께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영희는 민속음악을 채보하고 녹음하여 제자들에게 전해주고 연주와 강연을 계속하며 국악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지영희의 고향인 평택시에는 지영희의 이름을 내건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있다. 지영희국악경연대회와 지영희예술제가 매년 개최되고, 평택시가 운영하는 지영희국악관현악단의 정기공연도 주기적으로 열린다.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에 위치한 '한국 소리터' 1층에는 ‘지영희국악관’도 있다. 이곳에는 지영희의 일대기와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해금을 직접 연주할 수 있는 체험시설도 마련되어 있다. 

  • 국악의 사표가 된 명창, 만정 김소희

    김소희(金素姬, 1917-1995)는 전북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순옥(順玉)이며, 호는 만정(晩汀)이다. 아버지가 피리와 단소의 대가였다. 13세 때 전남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고등보통학교 재학 때 협률사 공연에서 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의 「추월만정」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아 소리꾼이 되기로 결심했다. 김소희는 날마다 소리판을 기웃거렸고, 이를 보다 못한 형부가 김소희를 당대 명창인 송만갑(宋萬甲)에게 데려가 소리를 배우도록 했다. 그때 김소희의 나이 15세였다. 김소희는 송만갑 문하에서 「심청가」와 「흥보가」를 익히며 판소리에 입문했다. 18세(1934년) 때 서편제의 대가 정정렬(丁貞烈)에게 「춘향가」와 「수궁가」를 배워 동편제와 서편제를 모두 익혔다. 22세 때 박동실(朴東實)에게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를 학습했다. 광복 후에도 정응민(鄭應珉), 정권진(鄭權鎭), 박록주(朴綠珠), 김여란(金如蘭), 박봉술(朴鳳述) 등을 찾아가 소리를 학습하는 등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명창 김소희 기념비
    명창 김소희 기념비


    김소희는 판소리 외에도 다양한 악기와 기예를 배운 사통팔달한 예인이었다. 14세 때 전주의 정성린(鄭成麟)을 찾아가 승무 살풀이를 배우고, 16세 때 전계문(全桂文)에게 가곡과 시조를, 김용건에게 거문고와 양금을, 1933년(17세)에 정경린으로부터 무용을 전수받았으며, 1934년에는 김종기에게 가야금과 거문고를 배웠다. 이후 서예와 한학도 공부했다. 김소희는 송만갑 문하에서 소리 공부를 시작한지 6개월만에 남원명창대회에 나가 1등을 차지한다. 어느날, 송만갑을 찾아온 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이 김소희의 소리를 듣고 탄복하여 그날 바로 김소희를 자신의 공연무대에 세웠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그만큼 김소희는 재능을 타고난 소리꾼이었다. 15세 때 일본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춘향가」를 취입한 후 많은 음반을 녹음하여 남겼다. 19세 때 정정렬, 이화중선, 임방울, 박록주와 함께 「춘향전 전집」을 녹음했는데, 판소리사의 명반으로 남아 있다. 또한 58세에 녹음한 「심청가」 완창과 61세에 녹음한 「춘향가」 완창 음반 역시 명반으로 평가된다.



    1936년부터 조선성악연구회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1939년에 창립한 화랑창극단에도 참여했다. 해방 후 1948년 박귀희와 함께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했다. 최초의 여성 국극인 「햇님 달님」에 출연했다. 「햇님 달님」은 여성 국극의 전성기를 가져오며 1960년대까지 큰 인기를 끌었다. 1954년에 민속예술원을 설립하여 초대 원장을 지냈다. 1962년에 유럽, 1972년에 미국 순회공연을 하면서 우리 민족예술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데 힘썼다. 1988년 서울 올림픽 폐막식 공연에서 판소리 「뱃머리」를 개작한 「떠나가는 배」를 불러 전 세계에 큰 감동을 안겼다.

    김소희 기념비 이미지
    김소희 기념비

    김소희는 천부적으로 목청을 타고난 명창이었다. 청아하고 미려한 애원성의 소리를 구사했고, 감정에 매몰되거나 기교주의에 치우치지 않는 섬세하고 절제 있는 창법을 지향했다. 김소희의 판소리는 우아함을 추구하는 여창 판소리의 한 정점을 이루었다. 김소희는 「춘향가」와 「심청가」, 「흥보가」를 장기로 삼았는데, 특히 「춘향가」는 동편제와 서편제의 장점을 고루 살려 재구성한 만정제다.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79년 5월에 고향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에 ‘만정(晚汀) 김소희 여사 명창 기념비’가 세워졌고, 기념비에는 미당 서정주의 헌사가 쓰여 있다. 2002년에는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에 생가가 복원되었다. 

  • 가야금 산조의 창시자, 악성 김창조(金昌祖)

    영암 악성 김창조 선생 흉상 정면
    영암 악성 김창조 선생 흉상 정면


    김창조는 1856년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 세습 율객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7세 때 부모에게 가야금과 노래를 배워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기악의 명수들에게 거문고, 젓대, 단소, 해금, 퉁소 등 여러 악기를 익혔다. 그는 악기나 곡조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 숙련 속도가 매우 빨랐다. 김창조의 나이가 30대에 이른 1890년대 무렵부터 가야금 연주자로서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펼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특히 가야금 독주와 병창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김창조는 주로 전라도 지역을 순회하며 연주활동을 벌였고, 가야금 외에 거문고, 대금, 단소 등의 연주도 선보였다.


    영암 가야금산조기념관 전시물
    영암 가야금산조기념관 전시물
    영암 가야금산조기념관 전시물
    영암 가야금산조기념관 전시물


    김창조는 1890년부터 1895년 사이에 산조(散調)라는 음악 형식을 완성한다. ‘신방곡(神房曲)’이라고 불란 초기 산조는 시나위 가락에 판소리 가락을 도입하여, 민속장단인 진양조 · 중모리 · 중중모리 · 자진모리 · 휘모리장단에 짜넣어 만든 것이라고 한다. 


    김창조가 만든 가야금 산조는 당대 대중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김창조는 60세가 되는 1915년부터 영암을 떠나 전주와 광주, 전라도 일대, 대구 등지를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1915년에 광주로 이사하고 이듬해 전주로 거처를 옮겨 전주예기조합(全州藝妓組合)에서 가야금 산조를 가르치면서 제자를 육성했다. 1916년에 다시 전주를 떠나 2년 동안 군산 · 정읍 · 나주 · 대구를 다니며 연주활동과 후배양성에 힘썼다. 


    영암 가야금산조기념관 내부
    영암 가야금산조기념관 내부


    64세가 되는 1919년에 광주로 이사했으나 병고로 타계했다. 김창조가 가야금 산조를 창조한 이후 거문고, 대금, 해금, 단소, 피리, 아쟁 등 악기마다 산조가 출현하게 되었다. 김창조를 산조의 효시라고 부르는 이유다. 김창조의 가야금 산조는 판소리의 율조와 장단에 기반하여 즉흥성이 강한 전통적인 기악곡을 체계적으로 양식화하여 기악의 대중성을 확대했다. 김창조의 산조 음악은 안기옥을 비롯하여 정남희, 김광준, 한성기, 정운용, 강태흥, 유동혁, 김병호, 최옥삼, 김윤덕, 성금연, 김죽파, 함동정월 등 수많은 후계자들에 의해 그 맥이 전승되고 있다. 2018년에는 김창조 선생의 고향인 영암에 '가야금산조테마공원'과 '가야금산조기념관'이 조성되었으며, 매년 「김창조 전국국악대전」을 개최하고 있다. 


    영암 가야금산조기념관 표석
    영암 가야금산조기념관 표석
    영암 가야금산조기념관
    영암 가야금산조기념관

  • 서편제의 대가, 김창환

    김창환(金昌煥, 1855-1937)은 전남 나주군 삼도면(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동)에서 태어났다. 세습예인 집안 출신으로, 판소리 명창 이날치(李捺致)와 박기홍(朴基洪)과 이종 간이고, 판소리 명고 김종길(金宗吉)과 재종 간이다. 판소리 명창 임방울(林芳蔚)의 외숙이기도 하며, 훗날 김창환의 두 아들 김봉이(金鳳伊)와 김봉학(金鳳鶴) 형제 역시 판소리 명창이 된다. 김창환은 어렸을 때 이날치에게서 가문소리를 습득했다. 


    서편제 명창 정창업(丁昌業)에게서 판소리를 사사받았고, 20대 중반 신재효(申在孝)의 문하에 들어가 판소리에 관한 이론과 실기를 배웠다. 김창환이 부른 「춘향가」, 「심청가」, 「홍보가」에는 신재효 판소리 사설의 많은 대목이 수용되었는데, 그만큼 신재효로부터 받은 영향이 크다. 1902년 고종의 즉위 40년을 기념하는 경축행사를 위한 협률사(協律司)의 주석(主席)으로 발탁되었다. 칭경예식 이후에도 김창환은 어전에서 여러 차례 소리를 하였고 고종의 총애를 받아 의관(議官) 벼슬까지 받으며 국창으로 인정받았다. 


    협률사가 폐지된 후 고향 나주로 내려가 50여 명의 전라도 출신 명창들을 규합해 ‘김창환협률사’를 조직하고 지방을 순회했다. 1915년 전통연희를 공연하던 배우들이 모여 만든 ‘경성구파배우조합’에 이동백(李東伯)과 함께 선생으로 참여하였다. 1930년에 창립된 ‘조선음률협회’의 회장을 맡았고, 1932년에 출범한 ‘조선악정회’에도 참여하여 전통음악의 발전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1915년 미국 빅타사에서 「춘향가」의 ‘옥중가’와 「흥보가」의 ‘가난타령’의 음반을 처음 녹음한 후 다수의 음반을 취입하였고, 각종 명창대회와 국악방송에 출연하여 판소리를 대중화하는 데 앞장섰다.


    김창환은 서편제 명창이지만, 그의 소리는 서편제 특유의 애절하고 감상적인 특징과 달리 호방하고 웅장하여 청승맞은 느낌이 없다고 한다. 또 그는 풍채가 좋고 발림(판소리에서 소리의 극적인 전개를 돕기 위하여 몸짓이나 손짓으로 하는 동작)을 잘해 관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김창환의 판소리 공연 중 유명한 것은 1908년 원각사에서 공연한 창극 「최병두타령」에서 최병두 역을 맡아 열연한 것이다. 그 공연에서 김창환이 수십대의 곤장을 맞아 죽어나올 때 관객들이 그의 목에 엽전꾸러미를 걸어주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김창환의 더늠(판소리 명창이 사설과 소리를 새로 짠 대목)으로는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가 있는데, 음악적인 구성이 뛰어나 오늘날 여러 명창들이 이 대목을 그의 더늠으로 부르고 있다. 고향 나주에서 후진을 양성하다가 타계했다.

  • 동편제의 마지막 거장, 명창 박봉술

    박봉술(朴奉述, 1922-1989)은 전남 구례군 용방면에서 태어나 20세기에 활동한 판소리 명창이다. 세습예인 집안 출신으로, 판소리와 소리북에 능했던 박만조(朴萬祚, 1875-1952)의 아들이자, 판소리 명창 박봉래(朴奉來, 1900-1933)·박봉채(朴奉彩, 1906-1946)의 동생이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박만조에게 「춘향가」, 「수궁가」, 「흥보가」를 배웠다. 박만조는 명창으로 행세하지는 않았지만 소리 속을 잘 알았고, 정식 공연을 다니지는 않았지만 그 지역에서 고수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그는 어린 아들을 명창으로 길러내고자 새벽에 깨워 박하사탕을 입에 물려주면서 열성적으로 소리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던 송만갑(宋萬甲, 1865-1939)에게 「적벽가」를 학습했다. 21세부터 둘째 형인 박봉채로부터 4-5년 남짓 소리를 익혔다. 송순섭(宋順燮, 1939- ), 김일구(金一球, 1940- ), 선동옥(宣東玉, 1936-1998), 안숙선(安淑善, 1949- ), 정미옥(鄭美玉, 1928- ), 이옥천(李玉千, 1946- ), 정성숙 등이 그의 제자이다.


    어린 시절부터 소년 명창으로 유명했던 그는 19세에 임방울(林芳蔚, 1904-1961)이 이끄는 동일창극단에 입단해 활동했다. 이후 순천, 목포, 전주, 군산, 정읍 등에 위치한 국악원에서 강사로 재직했다. 37세에 부산으로 이주해 오랜 기간 후진을 양성했다. 49세에 '뿌리깊은나무'에서 주최한 판소리 완창 감상회 무대에 서면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60년대에는 전주의 김동준(金東俊, 1928-1990), 군산의 이기권(李起權), 광주의 한승호(韓承鎬, 1924-2010), 남원의 강도근(姜道根, 1918-1996)과 더불어 호남의 5명창이라 불릴 정도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그가 부른 「적벽가」는 송흥록(宋興祿)-송광록(宋光祿)-송우룡(宋雨龍)-송만갑으로 이어지는 바디(판소리에서 명창이 스승으로부터 전승하여 한 마당 전부를 음악적으로 절묘하게 다듬어 놓은 소리)이다. 또 「춘향가」, 「흥보가」, 「수궁가」에도 능했는데, 동편제의 법통을 충실하게 이으면서도, 좋은 대목이 있으면 차용해 부르기도 했다.


    박봉술은 20대 초반에 독공을 하며 쉰 목을 너무 무리하게 쓴 탓에 소리가 꺾이고 말았다. 그래서 중성과 하성은 좋았지만, 상성이 잘 나지 않게 되었다. 이에 엄청난 독공으로 상성을 가늘게 뽑아내는 희성을 개발해 자신의 결점을 극복했다. 이를 암성이라고도 하는데, 그가 이 성음으로 소리를 하면 무대 객석 뒤까지 선명하게 잘 들렸다고 한다. 박봉술은 전형적인 동편제 창법을 구사했다. 붙임새도 능숙하게 구사했으며, 특히 자진모리로 몰아가는 대목에 뛰어났다. 박봉술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수궁가」 다섯 바탕소리에 고르게 뛰어난 기량을 보유했으며, 이 가운데 네 바탕을 음반으로 남겨 후대에 전했다. 동편제 판소리의 맥을 이었다는 점에서 현대 판소리사적으로 중요한 명창이다.

  • 일제강점기의 여류 명창, 배설향(裵雪香)

    배설향은 1895년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목소리가 아름답고 한번 들은 소리를 그대로 따라 부를 만큼 음악적 감각도 뛰어났다. 딸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는 순창에서 활약하는 명창인 장판개에게 배설향을 보내 소리 공부를 시켰다. 배설향은 12세 때 장판개에게 「흥보가」,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네 바탕을 모두 배웠다. 판소리에 입문한 지 불과 5년 만에 이룬 놀라운 성장이었다. 1915년에 서울로 올라가 장안사(長安社)와 연흥사(演興社)에서 창극 공연에 출연하면서 명창으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배설향의 명성이 갈수록 높아지자 당대 5대 명창 중 한 명인 송만갑(宋萬甲)이 자신이 이끌던 창극단 협률사의 단원으로 배설향을 영입했다. 배설향은 협률사에서 송만갑, 이동백(李東伯), 김창룡(金昌龍) 등 국창으로 불리는 명창들의 영향을 받으며 실력을 더욱 갈고 닦았다. 협률사 창극 공연에서 배설향은 늘 「춘향전」과 「심청전」의 주역을 도맡았다. 

    서울에서 활약하던 배설향은 1920년에 장판개와 함께 전주를 거쳐 경상북도 경주권번(慶州券番)에서 소리 선생으로 지냈다. 1935년에 전라북도 순창으로 귀향하여 장판개와 함께 살았다. 이때 조카딸 장월중선(張月中仙)에게 흥보가와 가야금산조를 가르쳤다고 한다. 

    1936년 조선여류명창대회 때 김여란·조산옥·김연수 등과 함께 출연했고, 1938년 여류명창대회 때 박녹주·신금향·박초선·임소향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1937년 장판개가 병사하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 4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배설향은 성량이 풍부하고 음색이 씩씩했다. 마치 목소리 고운 남자의 소리처럼 우렁차고 선이 굵은 음색을 자랑했다. 소리계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배설향의 공연이 끝나면 그녀를 보려는 인파가 무대 위까지 몰려와 무대 경비를 증원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1928년에 남도잡가(南道雜歌) ‘흥타령’, ‘개고리타령’을 녹음한 콜럼비아 음반이 남아 있다. 그밖에 「춘향가」 중 ‘옥중가’와 ‘추월강산’을 녹음한 소리가 전하고 있다.

  • 소리로 통정대부에 오른 명창 이동백

    이동백(李東伯)은 1867년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도만리에서 외아들 유복자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종기(李鐘琦)이다. 편모슬하에서 궁핍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 큰아버지에게 맡겨져 자랐다. 글공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광대들을 쫓아다니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고 한다. 소리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이규석(李圭錫)과 동편제 명창 최상중(崔相仲), 중고제 명창 김정근(金正根)을 찾아가 잠시 소리를 공부한다. 그러다 13세 때 전라북도 순창에 있는 김세종(金世宗) 문하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공부하여 자신의 소리를 완성했다. 이후에도 전국 팔도를 유랑하며 보다 높은 득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혼자 소리를 연마했다. 도만리 호리산의 용구(龍口)에서 2년간 독공(獨工)했고, 다시 진주 이곡사(里谷寺)에 들어가 3년간 공부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약 10여 년 동안 창원에 살면서 주로 경상도 지방을 무대로 활동했는데, 이때 경상관찰사(慶尙觀察使) 이지용(李址鎔)의 부름을 받아, 「적벽가」 중 ‘장판교대전’을 불러 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45-46세 무렵 상경하여 당대의 명창 김창환과 송만갑을 보좌해 함께 공연하면서 이름을 떨쳤다. 김창환의 주선으로 어전에서 소리를 하고 이후 고종의 총애를 받아 당상관인 정삼품 통정대부의 벼슬을 받는다. 소리광대가 정삼품의 벼슬을 제수받은 것은 이동백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원각사 해산 이후에 연흥사(延興社), 광무대(光武臺) 등에서 활동하거나 협률사에 참가해 지방을 순회했다. 1930년에 ‘조선음률협회’ 조직에 참여하고, 1933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국악인 모임인 ‘조선성악연구회’의 이사장을 맡아 판소리 교육 및 창극 정립을 위해 노력했다. 61세에 최초의 창극 음반인 「일축조선소리반 춘향전 전집」 녹음에 참여했고 이후 많은 유성기 음반을 취입했다. 1939년 이동백은 국악인 최초로 은퇴 기념 공연을 열었고, 약 한 달간 지방순회공연을 다녔다. 이동백의 은퇴공연은 장안의 화제였고, 가는 곳마다 성황을 이룰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은퇴 후 소리에 대한 열정을 품고 후배 양성에 힘쓰다가 1949년 경기도 평택군 송탄면 칠원리에서 작고했다.


    이동백은 중고제의 명창으로, 풍채가 당당하고 성음이 미려했으며, 하성의 웅장함은 당시 비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거대한 성량과 힘찬 선율로 「춘향가」의 ‘어사출도’, 「적벽가」의 ‘장판교대전’을 실감나게 잘 표현했다고 한다. 특히 이동백의 「새타령」은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는데, 고음의 가성으로 새 울음소리를 탁월하게 표현했다고 한다. 이동백은 독창성과 즉흥성이 뛰어났는데, 소리판의 상황에 따라 사설과 곡조를 변주했고, 같은 대목이라도 부를 때마다 다르게 불러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냈다.


    원각사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서울특별시 중구의 ‘정동극장’에는 이동백을 기리는 기념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고향인 충청남도 서천군 종천면에는 ‘이동백선생생가지’ 표석이 있고, 이동백이 득음했다는 동굴인 용구가 희리산에 남아 있다.

  • 불운한 시대의 천재 가객, 명창 임방울

    임방울 흉상 이미지
    임방울 흉상

    임방울(林芳蔚, 1904-1961)은 전남 광산군 송정읍 수성리(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산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승근(承根)이다. 어머니가 세습무 출신으로, 세습예인 집안 출신이다. 판소리 명창 김창환(金昌煥)이 외숙이었고, 그의 아들 명창 김봉이(金鳳伊)와 김봉학(金鳳鶴) 형제의 외사촌동생이었다. 아버지가 글공부를 시키려고 했으나, 임방울은 노래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14세 때, 명창 박재현(朴載賢)을 찾아가 3년간 「춘향가」와 「흥보가」를 배웠고, 명창 공창식을 찾아가 「적벽가」를 배웠다. 또한 동편제의 대가인 유성준(劉成俊)으로부터 「수궁가」, 「적벽가」, 「심청가」를 전수받았다. 훗날 임방울은 명창으로 이름을 떨친 후에도 유성준을 찾아가 소리를 배우곤 했다.


    1928년, 25세의 임방울은 동아일보사가 주최하는 전국명창대회에 참가하여 「쑥대머리」를 불렀는데, 이를 계기로 소리꾼으로서 이름을 알렸다. 이후 라디오방송에도 출연하고 많은 음반을 취입하였다. 2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쑥대머리」가 포함된 음반은 우리나라, 일본, 만주 등지에서 20여만 장이나 판매되었다. 1935년 ‘대동창극단’(大東唱劇團), 1939년에는 ‘동일창극단’(東一唱劇團)에 참가하여 지방 및 해외 순회공연을 다녔다. 해방 후에는 ‘임방울과 그 일행’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전국 순회공연을 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1959년과 1960년 사이 임방울은 일본 동경과 오사카에서 창극 공연에 참가했는데, 조총련의 공연에 출연했다는 이유로 귀국 후 경찰에 연행되어 고문을 당했고, 이후 공연을 하지 못했다. 1960년에 국악진흥회(國樂振興會)의 제5회 국악상(공로상)을 수상했다. 1960년 전북 김제공연에서 「수궁가」를 부르는 도중 쓰러졌으며, 1961년 3월 7일 향년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임방울은 아름다운 성음을 타고난 명창이었다. 애절함을 자아내는 그의 창법은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서민들의 슬픈 정서를 대변하였다. 「춘향가」, 「수궁가」, 「적벽가」를 장기로 삼았으며, 「춘향가」에서 ‘쑥대머리’, 「수궁가」에서 ‘토끼와 자라’ 대목은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단가 「추억」은 임방울이 사랑했던 기생 ‘김산호주’와 사별하고 지은 노래로 큰 인기를 끌었다. 1986년 9월 12일 광주 광산구 송정공원 안에 국창 임방울 선생 기념비가 세워졌다. 1994년 12월에는 광주문화예술회관에 국창 임방울 선생 흉상이 세워져서 그의 예술을 기리고 있다.

  • 민중이 사랑한 명창 정정렬

    정정렬(丁貞烈)은 1875년(또는 1876년)에 전라북도 익산군 망성면(현재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에서 태어났다. 세습예인 집안 출신으로, 판소리 명고 정원섭(丁元燮)의 형이다. 송만갑, 이동백 등과 함께 근대 오명창에 속하는 인물이다.

    정정렬은 철이 들기 전부터 소리에 타고난 재주를 보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7세 때 정정렬의 아버지가 익산에 머물던 서편제의 명창인 정창업 문하에 들어가 소리를 배우게 했다. 그러나 몇 년 후 스승 정창업이 세상을 떠나자, 명창 이날치에게서 소리를 배운다. 그런데 2년 후 이날치(李捺致)마저 세상을 떠나자 정정렬은 혼자서 익산의 미륵산 심곡사, 부여의 만수산 무량사, 공주의 계룡산 갑사 등지를 떠돌며 오랜 기간 독공했다.


    정정렬은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소리꾼으로서 이름이 알려졌다. 서울에 올라와 송만갑, 이동백 등 당대의 명창들과 함께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나이 50세(1926)가 다 되어서였다. 이 시기부터 정정렬은 명창의 반열에 오르고, 그의 문하에는 판소리를 배우고자 하는 제자들이 성시를 이루었다. 

    1933년 5월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하고, 상무이사를 역임했다. 이 연구회에서 정정렬은 정열적으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고 한다. 한편 ‘창극좌’라는 연구회 산하 단체를 조직하여 전통 판소리를 창극으로 전환하는 데 선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창극으로 공연된 작품 대부분은 정정렬의 기획·연출이나 작곡을 거친 것이었다. 정정렬을 ‘현대 창극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정렬은 1938년 63세를 일기로 타계할 때까지, 라디오방송, 지방 순회 공연, 음반 취입, 인재 양성, 소리의 창극화 등 열정적으로 활동하며 판소리의 보급과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정렬은 다른 대명창과 달리 선천적으로 목이 약했다. 고음 발성이 어려운 탁한 저음이어서 상청은 거의 지르지 못했다. 성량도 부족했다. 정정렬의 독공 수련이 길었던 것도 타고난 목의 약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정정렬은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발성법과 기교를 개발하였다. 그 결과 나온 정교한 ‘부치샘’[박자에 다채로운 변화를 주는 기교]와 ‘방울목’[판소리 창법의 하나로 둥글둥글 굴려 내는 소리]은 정정렬만의 장기가 되었다. 또한 음악적 구성을 치밀하게 연구하여 독보적인 경지에 오른 명창이 되었다.


    정정렬의 「춘향가」는 다른 명창의 「춘향가」를 모두 압도할 정도로 매우 뛰어난 절창 중의 절창이다. 정정렬이 부른 「춘향가」는 당대에 많은 인기를 누렸고, 많은 소리꾼들조차 「춘향가」만큼은 정정렬에게 사사 받으려고 했다. 1930년에 열린 ‘조선팔도명창대회’에서 정정렬이 부른 「춘향가」의 ‘몽중가’는 커튼콜을 무려 5번이나 받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정정렬제 「춘향가」는 오늘날 불리는 「춘향가」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춘향가」의 재해석은 정정렬이 판소리 역사에 남긴 큰 업적 가운데 하나다. 

    정정렬의 판소리는 기교가 뛰어나고 음악적 구성이 정교하여 화려하고 세련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정정렬 판소리는 특유의 슬픔을 자아내는 계면조의 창법으로, 서민들의 애환과 시대의 아픔을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된다. 정정렬이 유독 민중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정정렬의 더늠(판소리에서, 명창이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다듬어 부르는 어떤 마당의 한 대목)은 「춘향가」의 ‘신년맞이’다. ‘어사출두’와 ‘광한루 경치’ 대목 역시 정정렬의 독창적인 장기에 해당한다. 


    익산시에서는 2001년부터 ‘국창 정정렬 추모 전국 판소리 경연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흥으로 멋으로! 덩기덕 쿵덕

    우면산 아래, 용트림을 기다리며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에 대해 이야기할라치면, ‘국악박물관이라는 곳이 있었어?’라는 반응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은 많은 사람이 아는 ‘예술의 전당’ 바로 옆, ‘국립국악원’ 안에 자리하고 있다. 그것도 1995년부터 한자리에 쭉, 말이다. 처음에는 유물 위주의 눈으로 보는 박물관이었으나, 2019년 전시실 개편으로 국악을 신나고 재미있게 즐기기 위한 ‘듣는’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이번 생애, 모르고 지나치면 아쉬울 게 분명한 박물관 중 하나다.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외관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외관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입구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입구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입구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입구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의 핵심 콘텐츠인 ‘국악’은 무형의 문화유산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유산일수록, 형태가 없는 탓에 계승하려는 노력 없이는 사라지기 쉽다. 우리가 편의로 문화유산을 유형과 무형으로 나누고 있지만, 실체가 있는 유형의 문화유산 뒤에는 반드시 무형의 자산이 숨어 있다. 무형의 문화유산이야말로 유형을 아우르는 큰 개념인 셈이다. 이제 장구와 꽹과리 뒤에 잠들어 있는 무형의 ‘국악’이라는 용을 깨워 하늘로 올려보내야 할 때다. 그래서 세상에 ‘국악’이라는 단비를 내린다면, 우리 사회가 흥으로 들썩들썩하지 않을까.


    궁중 의례의 현장 속으로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의 문을 열면, 곧장 조선시대 궁궐의 안뜰로 들어서게 된다. 이곳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절도 있는 궁중음악이 행해지던 곳이다. 관람객들은 궁중 의례에 쓰이던 악기를 살펴보고, 국립국악원이 연주하는 종묘제례악 등의 연주를 고화질 화면으로 감상할 수 있다. 콘서트홀 의자에 앉아서 듣는 것보다도 실감 나는 국악의 울림이 전시실에 가득하다.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국악뜰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국악뜰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국악뜰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국악뜰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국악뜰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국악뜰


    소리의 기원을 찾아서

    음악은 가지각색 소리의 모음이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소리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2층 ‘소리품’ 전시실에서 확성기 모양의 의자에 앉아 비, 천둥, 폭포, 매미 등의 자연의 소리는 물론 정겨운 시골집 맷돌 돌아가는 소리, 불붙은 장작이 타닥타닥하는 소리, 사찰의 공양 소리 등을 들어보자. 그리고 이 소리를 노랫가락으로 표현해 본다면? 국립국악원국립박물관에서만 할 수 있는 즐거운 체험이다.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소리뜰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소리뜰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아카이브실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아카이브실


    요런조런 국악기의 세계

    19세기 이후, 서양 음악이 소개되면서 피아노나 바이올린, 기타 등에 익숙해진 오늘이지만, 우리의 음을 담는 그릇은 엄연히 국악기다. 2층 ‘악기실’은 우리의 전통 국악기를 모아놓은 공간으로 소리가 나는 원리에 따라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로 나뉘어 있는데, 악기의 역사와 악기 간의 관계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악기실’의 매력은 역시 이제껏 몰랐던 국악기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전시물 중 ‘물장구’는 동이에 물을 반쯤 담고 바가지를 엎어 놓은 후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악기다. 서민들 사이에서 비싼 장구 대신 흔히 사용됐다고 하는데, 요즘에는 보기 어려워졌다. 반면 형태부터 화려한, 궁중 의례에 쓰인 ‘소(簫)’라는 악기도 있다. 봉황의 날개를 닮은 악기로, 나무 틀을 양손으로 잡고 길이가 다른 16개의 관을 아랫입술을 대어 불면 ‘12율 4청성’의 음을 낸다. 소리도 생김새도 멋진 국악기다. 이 외에도 장구, 태평소, 북, 그리고 풀피리까지 40여 개의 국악기가 전시돼 있다.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소리뜰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소리뜰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소리뜰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소리뜰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소리뜰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소리뜰

     

    얼씨구 지화자! 흥 부자들의 체험실

    눈으로 보기면 했다면, 국악을 제대로 경험했다고 말할 수 없다. 주사위를 굴려서 친구들과 산조 협주를 하고, ‘가야금’의 줄을 튕겨 소리를 내 볼 수도 있다. 크기 차이로 서로 다른 음색을 내는 ‘편종’과 똑같이 생겼는데 두께가 달라서 음계를 만들어내는 ‘편경’을 두드려 보자. 잘하고 못하고는 상관없다. 우리 악기의 우리 소리를 듣고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다.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체험실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체험실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체험실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 체험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