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은 1906년 서울시 종로구 종로4가 112번지에서 중추원 의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간송의 집안은 대부호였다. 증조부 전계훈 때 배오개시장(지금의 종로4가)을 장악하였고 그 이문으로 전국의 농지를 구입하여 수만 석을 추수하는 대지주 가문으로 성장했다. 간송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며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가 아홉 살 되던 해부터 조부와 조모, 양부와 친형 등 집안 어른들이 잇달아 죽으면서 큰 불행을 겪었다. 1929년 친부마저 사망하면서, 간송은 집안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는다. 그가 상속받은 논만 4만 마지기로, 당시 서울의 기와집 2,000천 채에 해당하는 재산이었다. 약관 24세에, 간송은 조선의 백만장자가 된 것이다.
간송은 소년시절부터 외사촌형인 소설가 박종화와 가깝게 지냈는데, 그로부터 투철한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배운다. 박종화를 따라 휘문고보에 진학한 간송은 그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춘곡 고희동을 만난다. 그리고 춘곡의 소개로 당대 최고의 금석학자이자 예술품에 대한 뛰어난 감식안을 가진 위창 오세창과 조우한다. 오세창으로부터 간송은 문화재에 대한 미감과 안목, 예술품에 담긴 민족의 고고한 정신과 그 가치를 배우게 된다. 23세의 간송과 43세의 춘곡, 65세의 위창이 만난 것은 한국미술사의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다.
간송은 우리 민족의 서화 전적(典籍 일정한 목적, 내용, 체재에 맞추어 사상, 감정, 지식 따위를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여 적거나 인쇄하여 묶어 놓은 것. 책과 같은 말)과 골동품이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빼앗긴 문화유산을 되찾고 싶었다. “서화 전적과 골동은 조선의 자존심이기 때문”이었다. 1932년 간송은 종로구 관훈동의 고서적 서점인 한남서림을 인수하고 거간꾼 이순황과 오세창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으로 문화재 수집에 나선다. 한남서림을 통해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 국보 제71호 '동국정운' 등 많은 전적들이 수집되었다. 또한 1934년 간송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지금의 성북동에 문화재를 보관하고 연구할 수 있는 터전으로 ‘북단장’을 만든다. 이곳에 보물 제579호 「괴산팔각당형부도」 보물 제580호 「문경오층석탑」 등 일본인들이 가져간 석불, 석탑, 부도 등을 되찾아와 보존하였다.
1938년 7월,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정책이 시작되자 간송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을 설립한다. 이 ‘보화각’이 바로 ‘간송미술관’의 전신이다. ‘보화각’은 ‘민족문화의 보존을 통해 민족적인 긍지를 되찾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우리문화를 건설하기 위한 초석이었다.’ 보화각은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고 보관하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문화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이기도 했다. 간송은 우리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선 민족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지닌 후학을 양성하고 교육할 수 있는 기틀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보화각’을 연구기관이자 교육기관으로 발전시키고, 민족사학인 보성학교를 인수하고, 훗날 최초의 미술사학 학술지 『고고미술』을 창간한 것은 바로 이러한 목적 때문이었다. 간송에게 ‘보화각’은 단지 문화재를 수집하고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민족문화의 혼을 지키고 민족의 미래를 창달하는 모태라고 할 수 있다.
간송이 수집한 문화재의 양은 매우 방대하다. 서화, 도자기, 불상, 부도, 전적 등 문화의 전 영역을 망라하고 있다. 중요한 유물로는 국보 제20호 『훈민정음 해례본』 , 국보 제135호 「혜원 전신첩」, 국보 제68호 「고려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등이 있으며, 현재 간송미술관에는 12점의 국보와 10점의 국가 보물, 4점의 서울시 유형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혜곡 최순우는 1916년 4월 27일 개성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희순(熙淳)이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다. 1930년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고등보통학교 시절 고유섭(高裕燮)을 우연히 만나 문화유산을 지키고 연구하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고 크게 감화되어 1935년부터 미술사를 배우게 된다. 1945년에 개성시립박물관에서 근무하고, 1949년 서울 국립박물관으로 전근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문화재가 북송되는 것을 막았다. 또한 서울 수복 후 피난시절에도 미군 트럭으로 전국 불교 사찰문화재 기록 등 박물관의 주요 기록 문서를 피난시켰다.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의 간송 전형필의 소장품을 지켜낸 이야기도 유명하다.
1954년 국립박물관 보급과장을 역임하였으며, 우리 국보의 해외 전시사업을 주관하여 우리문화를 해외에 알리는 데에 혼을 쏟았다. 1957년 미국 8개 도시를 순회하는 전시 「한국국보전」을 담당했다. 1964년에 강진군 사당리에서 ‘청자가마터’를 발굴하고, 1966년에 일제강점기 강제 반출 문화재를 회수한다. 1973년에 한국미술을 집대성한 최초의 기념비적인 전시인 「한국미술 2000년」를 개최하고 1974년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취임한다.
1976년 「한국미술 5천년 전」을 개최했다. 이 전시는 「한국미술 2000년」과 함께 한국미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획기적인 전시로 평가된다. 1978년 『한국미술오천년』 을 출간한다. 이 책에는 도판 378점이 수록되어 있다. 1976년 한국미술사학회의 회장에 취임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중앙청 이전 계획을 진행하다 1984년에 성북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최순우는 문화재위원회 위원(1967년∼1984년), 한국미술평론인회 대표(1962년∼1965년),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1965년∼1966년), 한국미술사학회 대표위원(1976년∼1980년)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 미술 연구와 문화재 보존에 깊고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방대한 저서와 논문을 남기는 한편 일반 대중에서 한국 미술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주옥 같은 수필들을 남겼다. 그의 유고집으로는 『최순우전집』 (전 5권),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등이 있다. 1977년 홍조근정훈장을 받았고, 1984년 은관문화훈장에 추대되었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에는 최순우가 1976년부터 별세할 때까지 살았던 옛집이 남아 있다. 이 집은 1930년대에 지은 전통 한옥인데, 시민운동단체가 매입, 복원하여 지금은 최순우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이 옛집에서 집필했다고 한다. 2006년 9월 19일 등록문화재 제268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 야행은 정동야행이 성공적으로 개최된 것을 계기로 문화재청에서 지역문화재 활용사업으로 기획되었다. 인천개항장 문화재 야행도 이 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처음 인천개항쟁 문화재 야행은 2016년 ‘인천 개항장 밤마실’이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고 이후 지금의 이름인 ‘인천개항장 문화재 야행’이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문화재청의 문화재야행 사업은 처음 56건의 공모사업 가운데 14개 시·도에서 22개의 사업이 선정되어 진행되었다. 인천개항장 문화재 야행은 이후 매년 개최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인천 개항장은 조일수호조규(일명 병자수호조약, 강화도조약)로 인해 1883년 인천이 개항되면서 형성된 곳이다. 개항장은 외국인 정박·접대·무역처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항구를 말하고, 이러한 개항장에 자유로이 외국인이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조계 구역을 설정하였다. 이로 인해 인천개항장에는 중국 전관 조계지인 청관조계지, 일본 전관 조계지인 일본조계지, 이외의 각국인이 거주하는 각국 조계지가 설정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개항장은 일종의 인종 전시장, 외국 선박의 정박처, 외국 상품의 진열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개항장은 유행에 민감하였고, 다양한 외국어가 혼합되어 들리는 곳이었으며, 풍속 변화와 각국의 이색적인 복장을 쉽게 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외형상으로는 근대화의 출발지였지만, 한편으로 개항장은 외세 침투와 침략의 발판이 되기도 하는 치외법권지역이었다.
인천개항장은 1883년 개항된 이래 1910년 강제적으로 국권을 빼앗길 때까지 다양한 사람과 시설물을 남겨 놓았다. 1910년 이후 인천개항장은 근대화의 출발점이기 보다는 일본제국주의가 강제적으로 무력을 앞세워 식민 지배를 하는 수탈의 현장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인천개항장에는 개항과 수탈의 모습이 공존하고 있다. 수탈에 저항하는 당시대인의 삶도 엿볼 수 있다. 제국주의가 합법적으로 개항을 통해 이 땅에 들어왔지만, 이후 힘을 앞세워 조선을 강제로 지배했던 것이다.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항구가 열리면서 근대화의 관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천 개항장은 채 30여 년이 안되어 식민지역으로 전락해버렸고, 인천 개항장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통해 현존하는 문화와 문화재가 혼재하고 있다. 때문에 개항과 수탈은 구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현존하는 근대 문화재들을 야행을 통해 즐기는 인천개항장 문화재 야행은 평상시 느낄 수 없는 밤문화의 모습을 보고 즐기는 기회이다. 다양한 주제와 체험을 할 수 있는 인천 개항장은 그 범위가 좁지 않기 때문에 각자의 필요에 따라 체험할 수 있다. 2017년부터는 상반기와 하반기로 나누어 개최되고 있다. 인천 개항장은 개항장문화지구로 설정되어 있어 근대문화유산을 지키고 가꾸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다만, 인천개항장만이 가지는 특장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지속적인 콘텐츠 개발이 필요하다. 더불어 개항과 식민지배를 구별하는 역사인식도 요구된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