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희는 1909년 경기도 진위군 포승면(현재 경기도 평택시 포승면)에서 태어났다. 지영희가 살았던 내기리와 만호리는 무속신앙이 발달한 고장이었다. 지영희 가문도 세습무가로, 지영희는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무속음악을 익혔다. 지영희는 11세에 이석은에게 승무, 검무, 굿거리 등 춤을 배운 이후 30대 중반까지 많은 민속음악의 명인들로부터 기예를 사사받았다. 1929년 조항년에게 호적을 배우고, 1930년 정태신에게 양금을 배우고, 1931년 지용구에게 해금을, 양경원에게 피리를 배웠다. 또한 김계선에게 풍류 대금을, 방용현에게 민간 풍류 대금을, 최군선에게 농악을, 오덕환에게 무용장고를, 박춘재에게 경서도 민요를, 최수성에게 단소를, 김상기에게 거문고를 익히는 등 거의 모든 민속예술의 장르를 섭렵하며 종합예술인으로서 소양과 능력을 두루 갖추었다. 지영희는 천대 받는 무속인이 아닌 사회적 인정과 존경을 받는 음악가가 되고자 하는 뜻을 품었다. 그리하여 1937년에 서울로 상경하여 당대 최고의 무용가였던 한성준의 조선음악무용연구소에 들어가 최승희무용단의 악사로 활동하며 해금과 피리 연주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지영희는 뛰어난 민속악기 연주자에서 국악계를 재건하는 데 앞장서는 지도자이자 스승으로서 활약한다. 일제의 식민 지배에 억눌리고 서구음악의 유입에 밀려나는 전통음악을 되살리고자 대한국악원 창립을 주도하고 음악연구소를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하는 등 국악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았다. 또한 지영희는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민속음악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하여 국악 현대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지영희에 의해 악보 없는 우리의 가락은 처음으로 오선보에 기록되었다. 지영희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채보활동을 펼쳤고, 그렇게 수집한 민요들을 연구하여 새로운 민속음악을 작곡하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특히 지영희는 국악기로 관현악단을 구성하여 연주하는 혁명적인 실험을 시도하여, 최초로 국악관현악단을 만들어 지휘하였다.
지영희는 국악을 대중화하기 위해 1937년 처음 민요와 대풍류로 음반을 취입한 이후 수많은 민요들을 녹음하여 음반으로 발매하였다. 특히 2003년에 발매한 <해금시나위와 산조>에는 지영희 해금산조의 특징적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지영희는 1972년 최초로 미국 카네기홀에서 연주하는 영예를 얻었고, 1973년 시나위로 국가무형문화재 제52호에 지정되었다. 지영희는 국악계와의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1974년 가야금 명인인 부인 성금연과 함께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영희는 민속음악을 채보하고 녹음하여 제자들에게 전해주고 연주와 강연을 계속하며 국악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지영희의 고향인 평택시에는 지영희의 이름을 내건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있다. 지영희국악경연대회와 지영희예술제가 매년 개최되고, 평택시가 운영하는 지영희국악관현악단의 정기공연도 주기적으로 열린다.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에 위치한 '한국 소리터' 1층에는 ‘지영희국악관’도 있다. 이곳에는 지영희의 일대기와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해금을 직접 연주할 수 있는 체험시설도 마련되어 있다.
고복수는 1911년 경상남도 울산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좋아해, 축음기를 틀고 종일 노래만 불렀다고 한다. 교회 합창단에 들어가 선교사로부터 드럼과 클라리넷 등 각종 악기를 익혔다. 이때 익힌 음악 실력을 바탕으로 울산실업중학교에 특별장학생으로 입학했다. 1933년에 콜롬비아레코드사 주최한 ‘전선(全鮮)아홉도시 콩쿠르대회’의 부산대회에 출전해 1등을 차지하고, 1934년에 서울에서 열린 전국남녀가수신인선발대회에서 3등으로 입상하면서 대중가요계에 데뷔했다.
1934년에 오케레코드의 전속가수로 「타향」과 「이원애곡」이 담긴 음반을 발표했다. 「타향」은 「타향살이」로 재발표되는데, 당시 5만 장이 넘게 팔리며 만인의 애창곡이 되었다. 「타향살이」와 「이원애곡」 모두 고향을 떠나 유랑할 수밖에 없던 식민지 조선인의 설움을 노래한 것으로, 당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적시며, 일제 강점기 최고의 대중가요로 꼽힐 만큼 크게 유행했다. 이후 1939년까지 오케레코드에서 「불망곡」, 「휘파람」, 「사막의 한」, 「새날이 밝아 오네」, 「울며 새우네」, 「밀월의 대동강」, 「짝사랑」, 「마차의 방울소리」, 「풍년송」 등을 발표하며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로 군림했다. 오케레코드사의 전속공연단인 ‘조선악극단’에서 일본, 만주, 간도 등지를 돌며 공연활동을 이어갔다.
오케레코드사와의 불화로 해약을 당한 뒤, 1940년 3월에 조직된 반도악극좌(半島樂劇座)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여기서 빅타(Victor)레코드 전속가수였던 황금심(黃琴心)을 반려자로 만났다. 고복수·황금심 부부는 반도악극좌의 후신인 빅타가극단에서도 함께 활동했고, 1943년에는 새로 창립된 제일(第一)악극대에도 함께 가입했다. 광복 직전에는 유성(流星)연예대로 옮겨 활동하기도 했고, ‘고복수와 그 악단’을 조직해 운영하기도 하였다. 한편 전옥(全玉)이 주관하던 백조악극단(白鳥樂劇團)의 주요단원으로도 활약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붙잡혔다가 국군에게 구출되었다. 자신이 ‘고복수’임을 증명하기 위해 「타향살이」를 불렀다고 한다. 이후 한동안 군예대에서 활동했다.
1957년 8월 서울 명동의 서울시공관에서 25년 가수 생활을 결산하는 은퇴 공연을 열었다. 은퇴 후 1959년 서울 회현동의 동화백화점[지금의 신세계백회점 자리]에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학원인 동화예술학원(東和藝術學院)을 개설했다. 이미자(李美子), 문주란, 오기택, 안정애(安貞愛) 등의 인기 가수를 배출함으로써 대중음악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은퇴 후 고복수는 여러 사업에 실패하며 생활고에 시달렸다. 1959년에 영화 「타향살이」를 제작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서적외판원이나 택시기사로 일하며 생활을 연명했다. 1972년 고복수는 생활고와 병마에 시달리다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1987년 울산에서 제1회 고복수가요제를 개최했고, 이후 매년 열리고 있다. 1991년 울산광역시 중구 동헌 입구 근처에 ‘고복수 노래비’가 세워졌다. 이 노래비는 2018년 12월 고복수 음악살롱이 개관하면서 이 곳으로 옮겨졌다. 고복수 음악살롱의 1층은 고복수 선생의 앨범과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고, 2층은 커피숍으로 운영된다.
소천 권태호(笑泉 權泰浩)는 1903년 9월 16일 안동에서 태어났다. 유가 가문이었지만, 아버지는 기독교인이었다. 어린 시절 예배당에서 풍금소리를 처음 듣고 서양음악에 매료되었다. 안동보통학교 재학 시절, 선교사들로부터 음악을 배우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발견했다. 찬송가집 172장 전곡을 암보하고, 지휘와 독창에도 재주가 있었다.
1920년에 결혼을 한 후, 그 다음해 음악의 꿈을 이루고자 홀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신문팔이로 생계를 이으며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 야간 속성반을 다니며 수학했다. 1927년에 일본 최고(最古)의 니혼음악학교(日本音樂學校)에 입학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사례였다. 같은 해 4월 26일, 동경 소재 일본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베토벤 100주년 기념음악제」에서 테너로 참가하였고, 얼마 후 「히비야(日比谷) 음악회」에 초청받아 독창 공연을 하고 찬사를 받았다.
1928년(25세) 7월 14일, 대구공립심상소학교에서 독창회를 열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인 성악가 독창회였다. 또한 처음으로 독일 가곡을 우리나라에 알린 계기가 되었다. 1928~29년 사이 일본의 요코하마, 고베, 오사카, 아마가타, 시즈미, 한국의 안동, 군산, 원산 등에서 계속 독창회를 열었다. 1930년에 니혼음악학교를 졸업하고, 5월에는 동요 「봄나들이」를 작곡했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뒤에도 평양, 안동, 청송, 부산, 대구, 함흥, 의천, 서울 등을 오가며 독창회를 열고 곡을 쓰며 활발한 음악활동을 펼쳐나갔다.
1939년에 니혼음악학교의 교수로 초빙되어 가족과 함께 도일했다가, 1944년에 귀국했다. 일제 말기 일본에서 거주했지만,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친일 협력을 거부했다. 소천 선생은 중일전쟁 이후 친일음악단체들이 난립할 때 오히려 「조선 아기 행진곡」(1938) 같은 노래를 작곡하며 민족음악의 정신을 지켰다.
광복 후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경북문화건설연맹’, ‘경북예술가협회’ 등의 단체에서 주요 직책을 맡아 활동했다. 1946년 대구음악학원을 개설하고 국민 계창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1949년에 [국민가요집]을 발간했는데, 이 책은 일반 대중을 위한 노래책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국방부 정훈국 전문위원으로 종군하며, 「승리의 노래」, 「보병의 노래」, 「호국의 노래」 등 군가들을 작곡했다. 1959년에 대구로 이주한 뒤, 「국민가요합창단」을 설립하고, 1961년에 대구시 대봉동에 「권태호음악연구소」를 개소했다. 1970년에 다시 안동으로 이주하여, 동부동에 「권태호음악연구소」를 만들었다. 1972년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안동시 와룡면 오천 2리 산103에 그의 묘소가 있다.
광복 후 대구, 경북의 음악 발전과 보급에 힘썼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제1회 경북도 문화상 음악부문 공로상, 1960년에 제1회 대구시문화상을 수상했다. 신암국교, 삼덕국교, 인지국교, 대구여중, 안동중학, 안동농고, 대구고 등의 교가가 그의 작곡이다.
소천 선생에게 음악은 종교와 같았다.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과 전란의 혼돈 속에서도 소천 선생은 쉬지 않고 곡을 쓰고 노래를 부르며 음악의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 1928년 첫 독창회 이후 200여 회가 넘는 독창회를 열었고, 어린이와 민족을 위로하는 수많은 명곡을 지었다. 소천 선생의 삶은 음악과 분리될 수 없었고, 음악가로서 그가 걸은 길은 곧 한국 근대음악의 이정표가 되었다.
2014년 경상북도 안동시 성곡동 문화관광단지 내에 ‘소천 권태호 음악관’이 개관했다. 음악관 1층에는 '봄나들이'의 노랫말을 딴 카페 '나리'가 있고, 2층에는 소천 선생의 악보와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실이 있다. 지하1층 강당에서는 '봄나들이 동요제' 및 각종 공연과 음악회 등 다양한 예술행사가 진행된다.
배호는 1942년 중국에서 태어났다. 산둥성 제남시가 그의 출생지인데, 대한광복군 출신의 아버지 배국민이 독립운동으로 활약하던 때였다. 출생 당시 이름은 배만금(裵晩今)이며, 나중에 배신웅(裵信雄)으로 개명하였다. 해방이 되면서 부모를 따라 고국에 돌아와 경기도 인천의 수용소에서 생활하였고, 1946년 4월에 서울 창신동으로 옮겼다.
1955년 아버지가 죽자 부산의 이모댁으로 내려가 지냈다. 그러나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삼성중학교를 중퇴하고 1956년 다시 상경했다. 이때부터 외삼촌 김광빈를 따라 대중음악을 시작했다. 배호라는 예명도 김광빈이 지어주었다. 배호는 김광수가 운영하던 ‘무학성 카바레’ 사환으로 취직하여 드럼을 배웠다.
1958년부터 ‘김광빈 악단’에 소속되어 드럼을 연주했는데, 이후 미군 부대를 비롯하여 ‘천지 카바레’, ‘mbc악단’, ‘김인배 악단’ 등에서 드럼연주자로 이력을 쌓아갔다. 곧이어 12인조 밴드 ‘배호와 그 악단’을 결성, 서울 낙원동 ‘프린스 카바레’에서 가수로 활동했다. 1964년에는 「두메산골」을 발표, 솔로 가수로 변신했다. 그의 초기 장르는 재즈, 라틴음악이 조합된 스탠더드 팝에 속했다.
1967년 신장염 발병으로 병상에서 노래한 「돌아가는 삼각지」가 대히트를 기록한다. 잇달아 발표한 「누가 울어」, 「안개 낀 장충단공원」 등이 연달아 히트하면서 배호는 트로트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67년에만 배호는 30여 개의 가수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후 배호는 병마에 시달리며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도 쉬지 않고 곡을 발표했고, 명실상부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로 군림한다.
1971년 10월 배호는 라디오 프로그램 출연 후 비를 맞고 귀가하면서 감기가 걸려 신장염이 재발하였고, 결국 1971년 11월 7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배호의 장례식에서는 그의 인기를 반영하듯 소복을 입은 여인들이 수백 미터나 늘어섰다고 한다. 배호의 인기는 요절한 후에도 식지 않았고, 그를 모창(模唱)한 가짜 배호 음반들이 판을 쳤다.
배호는 1960년대 후반 트로트를 대표하는 남자 가수였다. ‘지하 8층까지 내려가는’ 배호 특유의 저음은 대중들의 심금을 울렸다. 중후한 저음의 멋을 살린 바이브레이션, 절정에서 터져나오는 한이 서린 고음이 돋보이는 배호의 발성과 감성은 이후 ‘한국 남성 트로트 창법의 교본’으로 통했다. 배호는 그 자신이 장르였다.
배호는 가수로 활동하며 10여 곳 음반사에서 20여 장의 음반을 냈고, 총 200여 곡을 불렀다. 가난과 병마, 신고의 세월에 시달린 배호의 노래는 눈물의 비표가 새겨져 있고, 그것은 고달픈 삶을 이어가던 소시민들의 일상을 위로했다. 지금까지도 배호는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가수로 남아 있고, 그의 노래는 국민적 애창곡으로 불린다. ‘서양에는 베토벤, 동양에는 배호’라고 말할 정도로 배호는 음악성과 대중성을 모두 인정받았다.
배호의 묘지는 경기도 양주시 신세계 공원묘지에 있다. 전국에 그의 노래비가 7개 세워져 있는데, 그 중 4개의 비석이 공식적인 비석이다. 삼각지에는 ‘돌아가는 삼각지의 노래비’와 그의 동상이 있고, 배호의 묘지에는 '두메산골'의 노래비가 있다. 또한 경주시와 강릉시에 각각 '마지막 잎새' 와 '파도'의 노래비가 있다. 2003년부터 ‘배호 가요제’가 열리고 있다. 삼각지의 한 거리가 배호 길로 명명되었다.
작곡가 이시우의 본명은 이만두(李萬斗)다. 1913년 거제시 거제면 남동리 45번지에서 태어났다. 1928년 거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족과 함께 경상남도 창원군으로 이사했다. 그 이후 만주 하얼빈 상업학교와 만주국립대학을 나왔다. 일본으로 유학하여 1941년 일본조도전대학 전문부 법률전공으로 졸업했다. 일본 유학시절에 취미로 기타를 배웠는데, 이를 바탕으로 경음악연주와 악단원 생활을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 극단 ‘예원좌’에서 가수 겸 연주자로 활동했다.
이시우는 극단 ‘예원좌’에 소속되어 중국 동북지방을 순회공연하던 중 어느 여관에서 불후의 명곡 「눈물 젖은 두만강」을 작곡한다. 이 곡의 창작배경에 대한 일화는 이렇다. 두만강에서 가까운 도문공연을 마치고 여관에 투숙한 어느 날 밤, 이시우는 비통하고 처연한 여인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다음날 사연을 알아보니 그 여인의 남편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총살되었고, 그날이 바로 죽은 남편의 생일날이었다는 것이다. 이 사연을 듣고 두만강을 바라보면서 이시우는 두만강의 물결이 민족의 눈물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때 함께 있던 문학청년 한명천에게 이러한 사연을 전해주자 그가 가사를 썼고, 이시우가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곡을 극단 공연 막간에 ‘장월성’이라는 소녀배우에게 부르도록 했는데, 관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귀국 후 이시우는 이 노래를 레코드로 출반하기 위해 김용호 시인에게 가사를 다듬도록 하고, 김정구의 노래로 녹음하여 1938년 오케음반으로 발표한다.
그후 가요작곡가로 인정받아 「눈물의 국경」, 「타향의 술집」 등을 발표하였다. 오케레코드사 전속 악단원 생활을 계속하다가 만주의 창춘에 정착하였다. 1941년 매일신보사 하얼빈지국에 근무했고, 이후 1945년까지 조선상공신문 하얼빈지국에서 일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연예계에서 생활하다가, 1948년 지리산전투지구 공비소탕작전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대한민국내무부장관촉탁(1948), 대한반공인천시연맹 특무국장(1949), 부산시비상사태대책위원회 선전부 차장(1950), 경상남도비상사태대책위원회 선무과장(1950), 경기도 부평 형사주임(1954), 경상남도 동부산 경사근무(1958) 등 여러 공직에 종사했다. 1957년에 국제레코드제작사 부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1962년 다시 가요계로 돌아와 「님없는 거제도」, 「인생 역마차」, 「영도다리 애가」, 「아내의 사진」 등을 발표했다. 1964년부터 방송된 KBS라디오 최장기 프로그램 「김삿갓 북한방랑기」라는 5분 드라마의 주제음악으로 「눈물 젖은 두만강」이 흘러나오면서, 본격적인 국민가요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1968년 한국가요작가동지회(韓國歌謠作家同志會) 초대 부회장을 지냈다. 1975년 1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2013년부터 이시우 선생 탄생 100주년 행사를 개최하며 ‘이시우 가요제’가 열리고 있다.
‘가왕(歌王)’으로 불린 증조부 송흥록에서 조부 송광록, 부친 송우룡을 잇는 판소리 동편제의 적통으로 구례 은천사에서 공부를 할 때는 그가 질러대는 소리가 지겹다고 승려들이 그의 방을 뒤엎기도 했으나 폭포 아래서 내는 소리가 비로소 멀리 절집까지 들리게 되었을 때쯤 세상 밖으로 나와 활동했다는 전설의 주인공. 17세 때에는 전주 ‘대사습놀이’에서 최고의 소리꾼으로 등극해 전국을 누비며 명성을 쌓았고, 1894년 충정공 민영환을 따라 중국과 미국에 다녀오며 더 큰 세상으로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이런 안목으로 30대 후반에는 임금 앞에서 소리하는 ‘어전광대’의 영예를 얻은 덕에 서울에 머물면서 1902년 전국에서 명창과 춤꾼, 기녀 170여 명을 소집해 ‘원각사(圓覺社)’의 전신인 협률사의 기획을 주도했다. 그의 소리는 1906년 처음 헐버트 박사의 주선으로 음반에 녹음되어 전국에 라디오로 전파되며 판소리 예술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당시 이 소리를 들은 고종과 순종은 이 유성기 음반은 정녕 조선의 국보며 이들의 소리야말로 조선 최고의 재산이라고 칭송했다.
관습에 매이지 않았던 그는 이미 세상 밖으로 시야를 넓히면서는 더 많이 서울에서 활동하며 웅장하고 호탕한 동편 소리에 서편제의 명창 정창업의 소리 중 계면조 및 경기도와 북한 지역의 특성까지 수용해 동편제의 소리 지향을 크게 확장했다. 이로 인해 전통을 고수하는 동편제 선배들의 지탄은 물론 부친에게 독살 당할 뻔 했다는 소문까지 돌았을 만큼 경계에 묶이지 않은 예술가였다. 또한 ‘청중과의 교감이 진정한 예술’이라는 지론으로, 소리로만 불리던 《춘향가》며 《심청가》를 여러 가객이 함께 연기하며 오페라처럼 연행하는 ‘창극’으로 바꿔내는 작업에 몰두했다. 이를 무대에 올리게 되니 판소리 가문의 집안어른들이며 선후배, 동료들 사이에서 몹시 지탄을 받았으나 대중들에게는 큰 인기를 끌었다.
늘어난 제자들과 함께 1908년 지방 공연을 목적으로 소리와 춤, 줄타기 등 갖가지 재주를 보여주는 순회 공연단체 ‘협률사’를 다시 조직해 판소리뿐 아니라 창극 무대를 펼치며 공연을 다니던 송만갑은 1910년 8월 공연 중에 한일병탄 소식을 듣고는 곧 해산 후 전남 구례로 낙향해 꾸준히 소리꾼들을 키우다 고향인 순천 낙안으로 이주해 더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일제 치하에서 우리 전통을 지키려는 예술인들의 노력은 수시로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으나 1933년에는 백여 명의 명창들이 의기투합해 설립한 ‘조선성악연구회’ 설립에 동참해 적극적으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첫 녹음 이후 1913년, 1926년, 1930년, 1934년까지 단가와 판소리 등 유성기 음반에 그를 비롯해 명창들의 소리를 새겨둔 자료가 새롭게 발견되고 있다.
이난영은 일제강점기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고, 15세 무렵 두 살 터울 오빠와 함께 제주 최초의 극장 창심관(暢心館) 주인집에 식모살이하는 어머니를 찾아 갔다가 태양극단의 제주도 순회공연 중 막간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며 실력을 인정받아 정식 단원이 되었고, 이들의 일본 공연 중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음반회사 오케레코드사의 전속 가수가 되었다. 최초 4인조 걸그룹 저고리시스터즈의 멤버로도 활약하던 십대 소녀 이난영은 1935년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의 〈목포의 눈물〉로 식민지 조선을 온통 흐느끼게 하는 5만 장의 LP 판매를 기록하며 대중가요의 전성시대를 열어 보였다.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 영화 〈노래 조선〉을 촬영하고, 일본에서도 유명해져〈아리랑〉과 〈봄맞이〉, 〈봄강〉 등을 함께 취입하는 등 본격적인 스타덤에 올랐다.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하던 시기 악극단에서 만난 천재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하는데, 남편은 그녀를 위해 작곡한 우리나라 최초의 블루스 곡 〈다방의 푸른 꿈〉으로 블루스의 여왕이라는 명성을 선사하지만 동거한 9년 동안 아홉 차례 출산을 한 아내는 자살을 시도할 만큼 그의 여성 편력은 심각했다. 게다가 6.25 전쟁 중 납북되면서 연년생 일곱 아이를 데리고 고향에 내려가서 자녀들에게 노래뿐 아니라 발레, 승무 등의 춤과 가야금, 북, 장구, 기타, 색소폰 등을 가르치며 고단한 나날을 보냈던 반면 본인은 술과 아편에 젖은 폐인 신세가 되기도 했다. 마침 〈이별의 부산정거장〉으로 가요계의 황제가 된 옛 동료, 〈제3 일요일〉과 〈달 없는 항로〉,〈연락선 비가〉등을 부르며 듀엣으로 함께 활동한 남인수는 힘들게 지내는 그녀를 돌보며 애틋한 사랑을 나누지만 곧 결핵에 걸려 그녀의 무릎을 벤 채 세상을 떠나고, 다시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그녀는 스스로를 학대하면서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1959년 미국으로 진출한 딸들, 김시스터즈를 따라 미국에 건너가지만 향수병으로 곧 귀국하고, 몇 번 더 무대에 설 기회를 얻지만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심장마비 혹은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으로 마흔이 채 안 된 나이에 삶을 마감했다.
조선악극단의 프리마돈나였던 이난영은 일본과 중국으로 공연을 다니며 트로트뿐만 아니라 민요에서 재즈까지 다양한 장르의 노래 2백여 곡을 부른 팔색조 가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걸그룹 ‘저고리 시스터즈’의 리더로 활약했고, 자녀들을 ‘김시스터즈’라는 이름으로 교육시켜 미국 라스베거스로 진출하도록 준비했던 역할은 연예 기획자로서 오늘날 한류의 원조로 평가할 수 있다. 그녀의 노래 가사에 실린 삼학도와 유달산 등, 슬픈 역사와 전설이 담긴 장소들은 그녀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지고 목포의 주요한 랜드마크가 되었다.
근재(謹齋) 안축(安軸)은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조카손자로, 죽계(竹溪, 오늘날 경상도 영주시 순흥면) 지역의 사대부다. 1307대 초 고려와 원나라 과거시험 양쪽에 급제했다. 당시 충숙왕은 고려 왕위를 빼앗으려는 심양왕 왕고(王暠)의 정치적 모함으로 원나라에 억류되었는데, 안축은 이때 왕을 변호하여 신임을 얻었다. 전리총랑, 전법판서, 판정치도감사 등 관직생활 동안 그가 거친 벼슬은 대개 토지 및 노비 문제를 다루는 법 관련 직책이었다. 토지나 노비를 억울하게 빼앗긴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종의 경제적 개혁정책에 참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심양왕과의 정치적 갈등에 지친 충숙왕이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원나라로 떠나버리면서, 안축은 상당한 정치적 좌절을 겪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충숙왕의 아들 충혜왕은 고려판 연산군이라 불릴만한 폭군이어서, 『고려사』에 따르면 왕의 행실을 기록하는 사관(史官), 또는 왕에게 충고하는 언관(言官)이 모두 사대부였기에 충혜왕은“본래도 사대부를 싫어했지만, 이 때문에 더욱 싫어했다”라고 한다. 충혜왕이 왕위에 오른 직후 안축은 지금의 함경남도 지역과 영동(嶺東) 지방을 순찰하는 ‘강릉도존무사(江陵道存撫使)’로 파견되었다. 정황을 고려하면 중앙에서 지방으로 좌천을 당한 셈이다. 폭정을 일삼던 충혜왕이 폐위되어 충숙왕이 복위한 뒤에도, 안축은 충혜왕의 측근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약 10년간 중앙관직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흔히 「관동별곡」하면 송강 정철의 가사(歌辭)가 유명하지만, 사실 관동별곡이라는 이름의 ‘원조’는 안축의 경기체가 「관동별곡」이다. 그는 지방관으로서 안변, 흡곡, 통천, 고성, 간성(지금의 속초 부근), 양양, 강릉, 삼척, 울진, 평해, 정선 등 강원도의 명승을 순찰한 내용을 9장의 「관동별곡」을 통해 노래했다. 근래의 연구에 따르면 「관동별곡」은 관동의 자연을 아름답게 묘사하면서도, 여러 가지 고사와 비유를 통해 외직으로 좌천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중앙에서 정치적 포부를 펼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한글이 창제되기 이전 작품이기에 한자를 빌린 차자(借字)표기로 전하지만, 그의 경기체가는 고려 말 사대부가 한국어 노래를 어떻게 창작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관동별곡」 외에도, 충혜왕의 아들 충목왕이 성군의 자질을 보이던 시기를 배경으로 고향 순흥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죽계별곡」이 유명하다. 그는 한시 창작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관동별곡」과 같은 시기 창작된 시집 『관동와주』의 여러 시는 강원도 지역의 상황과 당대 정치의 폐단을 비판하고 근심하는 내용이다. 특히 삼척 죽서루 일대의 여덟 정경을 묘사한 팔경시 「삼척서루팔영」은 당대는 물론 조선시대 내내 수많은 문인들이 차운(次韻)한 걸작으로 손꼽힌다.
송흥록은 정노식의 『조선창극사』(1940)에 "모든 가조(歌調)를 집성하고, 진양조를 완성한 판소리의 중시조로서 가왕(歌王)으로 추앙받았던 인물"이라고 기록된 판소리의 대표적인 거장이다. 그의 소리는 당대 이름난 사대부 문인에게도 잘 알려진 것은 물론 노래판에서 함께 기예를 발휘하는 동료 예인들의 인정도 받았다. 훗날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 기록이나 시서화(詩書畵)의 삼절(三絶)로 불렸던 신위(申緯)의 한시 『관극절구십이수(觀劇絶句十二首)』에서는, 판소리를 관람한 모습을 묘사하면서 고수관(高壽寬), 모흥갑(牟興甲) 등과 더불어 송흥록의 이름이 손꼽힌다. ‘가왕(歌王)’이라는 칭호는 송흥록과 함께 ‘전기 팔명창’으로 꼽히는 모흥갑이 바친 것이다.
그는 『춘향가』의 『옥중가』,『변강쇠타령』,『적벽가』, 단가인 『천봉만학가(千峯萬壑歌)』 등을 잘 불렀고, 판소리가 동편제와 서편제가 본격적으로 나뉘기 이전 이른바 '중고제(中高制)'의 소리를 구사했다고 한다. 그는 매부였던 김성옥(金成玉)이 창시한 진양조를 더욱 연마하여 완성했다. 느린 속도로 장중하고 힘있는 분위기, 또는 애절하고 슬픈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 적합한 진양조의 완성은, 정서적 표출을 극대화함으로써 판소리의 예술성을 강화하고 향유층을 확대하는 데 이바지했다고 평가받는다. 동생 송광록(宋光祿)을 거쳐 송광록의 아들 송우룡(宋雨龍), 손자인 송만갑(宋萬甲)으로 이어지는 송씨 가문의 명창과 그 제자들의 계보가 오늘날 동편제 판소리의 발전과 전승에 큰 역할을 했기에, 그는 오늘날 판소리 명창의 큰 선생님이자 조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귀곡성(鬼哭聲)은 사람은 도저히 낼 수 없을 듯이 구슬프고 애절하여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것과 같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으로,『춘향가』중 『옥중가』에 등장하는 창법이 바로 귀곡성이다. '조물주의 조화를 벗어났다(奪造化)'고 평가받는 송흥록의 귀곡성은 여러 일화로 유명한데, 대부분 ‘맹렬’이라는 이름의 기생과 관련된 것이다. 대개 연회 자리에서 송흥록의 노래를 듣고 다들 칭송하는데 유독 맹렬만이 귀곡성이 모자람을 지적했고, 절치부심하며 귀곡성을 연습하던 송흥록이 꿈에서 만난 귀신에게 귀곡성을 직접 배웠다는 식의 이야기이다. 노래를 듣고 송흥록에게 반해 함께 지내던 맹렬이 공연 때문에 외박이 잦은 것에 화를 내며 떠난 뒤, 혼자 남겨진 슬픔을 담아낸 송흥록의 귀곡성에 그녀가 감동하여 돌아섰다는 류의 일화도 있다. 그만큼 그의 귀곡성이 청중의 마음을 애끓게 하고 소름 끼치도록 슬퍼서, 도무지 사람이 내는 소리로 여겨지지 않았던 탓이다.
임방울(林芳蔚, 1904-1961)은 전남 광산군 송정읍 수성리(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산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승근(承根)이다. 어머니가 세습무 출신으로, 세습예인 집안 출신이다. 판소리 명창 김창환(金昌煥)이 외숙이었고, 그의 아들 명창 김봉이(金鳳伊)와 김봉학(金鳳鶴) 형제의 외사촌동생이었다. 아버지가 글공부를 시키려고 했으나, 임방울은 노래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14세 때, 명창 박재현(朴載賢)을 찾아가 3년간 「춘향가」와 「흥보가」를 배웠고, 명창 공창식을 찾아가 「적벽가」를 배웠다. 또한 동편제의 대가인 유성준(劉成俊)으로부터 「수궁가」, 「적벽가」, 「심청가」를 전수받았다. 훗날 임방울은 명창으로 이름을 떨친 후에도 유성준을 찾아가 소리를 배우곤 했다.
1928년, 25세의 임방울은 동아일보사가 주최하는 전국명창대회에 참가하여 「쑥대머리」를 불렀는데, 이를 계기로 소리꾼으로서 이름을 알렸다. 이후 라디오방송에도 출연하고 많은 음반을 취입하였다. 2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쑥대머리」가 포함된 음반은 우리나라, 일본, 만주 등지에서 20여만 장이나 판매되었다. 1935년 ‘대동창극단’(大東唱劇團), 1939년에는 ‘동일창극단’(東一唱劇團)에 참가하여 지방 및 해외 순회공연을 다녔다. 해방 후에는 ‘임방울과 그 일행’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전국 순회공연을 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1959년과 1960년 사이 임방울은 일본 동경과 오사카에서 창극 공연에 참가했는데, 조총련의 공연에 출연했다는 이유로 귀국 후 경찰에 연행되어 고문을 당했고, 이후 공연을 하지 못했다. 1960년에 국악진흥회(國樂振興會)의 제5회 국악상(공로상)을 수상했다. 1960년 전북 김제공연에서 「수궁가」를 부르는 도중 쓰러졌으며, 1961년 3월 7일 향년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임방울은 아름다운 성음을 타고난 명창이었다. 애절함을 자아내는 그의 창법은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서민들의 슬픈 정서를 대변하였다. 「춘향가」, 「수궁가」, 「적벽가」를 장기로 삼았으며, 「춘향가」에서 ‘쑥대머리’, 「수궁가」에서 ‘토끼와 자라’ 대목은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단가 「추억」은 임방울이 사랑했던 기생 ‘김산호주’와 사별하고 지은 노래로 큰 인기를 끌었다. 1986년 9월 12일 광주 광산구 송정공원 안에 국창 임방울 선생 기념비가 세워졌다. 1994년 12월에는 광주문화예술회관에 국창 임방울 선생 흉상이 세워져서 그의 예술을 기리고 있다.
윤이상(尹伊桑)은 1917년 9월 17일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덕산리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아버지가 통영으로 이주하면서 통영에서 수학하며 성장하였다. 1926년부터 1932년까지 통영공립보통학교[지금의 통영초등학교]에 다녔다. 1932년 통영협성상업강습소에 입학하여 2년 후 수료하고, 1934년 서울로 올라가 바이올리니스트 최호영(崔虎永)으로부터 작곡 지도를 받았다. 1935년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大阪音樂學校)에 입학하여 작곡을 비롯하여 음악이론, 첼로 등을 배우며 본격적인 음악 공부에 매진하였다.
어머니가 죽고 가세가 기울어져 귀국하여 서울의 공장에서 일했다. 1938년 통영 산양면의 사립 화양학원[현 화양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생활하다가, 1940년 초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파리국립음악원 출신의 엘리트 작곡가 이케노우치 토모지로오[池內友次郞]에게 작곡을 배웠다. 1943년 항일지하활동에 참가한 이유로 감금을 당하기도 했다.
해방 후 1952년까지 통영과 부산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였다. 유치환, 김춘수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창립하여 지역 문화의 저변을 확대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노래하자회를 조직하여 개창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이 시기 윤이상은 경남지역 9개 학교의 교가를 작곡했다. 1949년 「고풍의상」·「달무리」·「추천」 등이 수록된 가곡집 [달무리]를 출판하였으며, 1953년에 서울로 이주하여 경희대·숙명여대·덕성여대 등에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1957년까지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음악원(Paris Conservatoire)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공부하였고, 다시 독일로 가 베를린음악대학(Berlin Hochschule)에서 작곡을 전공한 후, 1959년 동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과 동시에 네델란드의 빌토벤과 독일의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과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이 초연되어 호평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독일에 체류하게 되었고 유럽 각지에서 활동을 하다가 1964년 독일 포드기금회의 요청으로 베를린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1965년에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와 1966년에 독일의 도나우싱엔 현대음악제에서 대편성 관현악곡 「예악」을 발표하여 국제적인 작곡가로 주목을 받게 되었고, 1965년에 「현악 4중주 1번」과 「피아노 3중주」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1967년에는 이른바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복역을 하였으며 1969년 다시 독일로 돌아가 1970년부터 1971년까지 하노버 음악대학(Hanover Hochschule ful Musik)에서 작곡을 가르쳤고, 1971년에는 독일 국적을 취득하였으며, 1972년에 뮌헨 올림픽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위촉받은 오페라 「심청」의 대성공으로 세계적인 작곡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95년 11월 3일 베를린의 발트병원에서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윤이상 거리는 통영시 서호시장의 끝에서 시작하여 직선으로 해저터널과 연결되는 곳으로 2001년 통영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지정하였다. 2010년 3월 생가가 있었던 도천동 주변부지에 윤이상기념관을 개관하였다. 윤이상과 그의 음악을 기리기 위해 통영국제음악재단(TIMF)이 만들어졌고, 매년 11월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가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열리고 있다. 통영국제음악당에는 윤이상의 유해가 묻혀져 있는데, 이는 2018년 독일 베를린 공원묘지에 있던 것을 이장해 온 것이다. 그의 음악은 고향 통영을 기반으로 후대로 이어지고 있다.
1885년에 태어났다. 학순 장판개(鶴舜 張判盖)의 출생지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연화리이고 다른 하나는 전라남도 곡성군 겸면 현정리이다. 장판개의 가계는 대대로 예술가 집안이었다. 할아버지 장주한은 참봉 벼슬을 지낸 ‘음률의 명인’이었고, 아버지 장석중 역시 참봉 벼슬을 받았다. 동생 장도순 또한 판소리 명창이었다. 이들 가족은 곡성과 순창을 오가며 살았는데, 이러한 거주 지역은 대대로 예인들을 가르치는 교육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인의 피를 물려받은 장판개는 어려서부터 어바저의 소리를 듣고 그대로 복창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아버지로부터 젓대, 거문고, 장구 등을 10년 동안 배웠다. 아버지의 주선으로 당대 명창 송만갑(宋萬甲)에게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등을 3년 동안 배웠다. 그 후 순창의 산사로 들어가 2년간 독공했다. 그러나 소리공부의 부족함을 느끼고 송만갑의 수행고수로 따라다니면서 소리를 더 익혔다.
1904년 스승 송만갑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원각사에 참여했다. 1904년 7월 어전에서 「적벽가」를 불렀다. 청미하고 풍부한 성음 성량으로 절륜의 기예를 발휘하여 고종의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고종은 장판개에서 종9품 벼슬인 혜릉 참봉을 제수했다.
원각사 폐쇄 후 1908년 송만갑협률사에 참여하여 지방순회 공연을 다녔다. 이후 연흥사에서 창극 공연에 참여했고, 창극 <춘향가>에서 이도령 역을 맡아 춘향 역의 배설향과 열연했다. 1920년 전주권번의 소리선생으로 추진을 양성했다. 1928년 담양극장에서 개최된 신춘구악대회에 참가하였다. 1930년대 초반 아내 배설향과 함께 경주의 권번에서 장월중선 등을 가르쳤다.
1935년 임방울과 함께 일본에 갔다가 임방울의 권유로 단가 「진국명산」과 「홍보가」 중 ‘제비노정기’를 녹음했다. 이 두 곡이 장판개의 유일한 녹음이다. 당시 아편에 중독되어 성대가 망가진 장판개가 전력을 다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장판개의 「진국명산」은 스승 송만갑이 부른 「진국명산」보다 짜임새가 좋다는 평을 받았다. 장판개의 「제비노정기」는 송만갑제를 버리고 새로 짠 것이다.
장판개는 재질이 탁월하고 성음이 청미하며 성량이 풍부하였다. 최하의 저음에서 최상의 고음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거문고, 대금, 피리에도 정통했다. 「심청가」와 「적벽가」를 잘 불렀으며 특히 「홍보가」 중 ‘제비노정기’와 「적벽가」 중 ‘장판교 대전하는 대목’이 일품이라고 전해진다. 장판개는 고수로도 일가를 이루었다. 임방울이 부른 「적벽가」의 ‘호전망극’에 장판개의 북장단과 추임새가 남아 있다.
1937년에 사망했다.
1900년 대구시 중구 동신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추동암이었지만, 훗날 이화학당에 입학하면서 추애경으로 개명하였다. 대구사립고등보통학교를 4년간 다녔고, 1915년 신명여학교에 입학했다. 가족들은 교회를 다니지 않았지만, 추애경은 1914년부터 제일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교회를 다녀야만 들어갈 수 있는 신명여학교 진학 때문이었다. 제일교회에서 장래 남편이 되는 김태술을 비롯하여 음악동지들인 박태원, 박태준, 권영화, 현제명 등을 만났다.
1919년 신명여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직전 3월 8일 3.1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대구 서문시장에서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1921년 이화학당 대학예과(2년제)에서 성악(소프라노)를 전공했다. 이후 2년간 본과과정을 더 수료하여 1925년에 졸업했다. 1923년 8월에 만국기독교청년회 주최의 하령회(夏令會)에 대구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졸업 후 1926년 신명여학교에 교사로 재직하기 시작했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대외음악활동을 주관했다. 1926년 7월에는 대구청년회와 대구여자청년회와 함께 하기음악무도를 대구에서 개최했다.
추애경은 음악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1926년 일본 규슈 나가사키현(長崎縣)에 위치한 가즈이(活水)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서 피아노 전공을 수학한 뒤, 1927년 미국으로 떠났다.
1927년 6월 3일 대구제일소학교 강당에서 추애경의 송별음악회가 열렸다. 미국 워싱턴대학교로 음악 유학을 떠나는 추애경을 축복하는 무대였다. 이 송별음악회는 당시 『매일신보』에도 실렸는데, 수백 명의 관객이 강당을 가득 메웠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추애경은 「고별가」를 불렀다.
1927년 샤블 워싱턴대학 음악과에서 성악전공으로 수학했다. 같은 해 8월에 와이노나 호반에서 열린 성악콩쿠르에 참가했다. 1920년 보스톤으로 옮겨 뉴일글랜드 컨서바로트음악원에 성악전공으로 입학했다. 이때 김태술을 만나 결혼했다. 1932년 보스톤 추기음악대회에 참가하여 「그를 다시는 사랑하지 않았소」와 「장미와 야앵」을 불렀다. 당시 보스톤의 음악잡지에서 추애경을 “리릭소프라노로 조선의 천재”라고 격찬했다. 1933년 졸업했다.
이후 메샤추세츠주 보스톤시 워터타운에서 음악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1973년 세상을 떠나 매사추세츠주 블루힐즈공원에 잠들어 있다.
1874년 충청남도 홍성골 고도면, 지금의 홍성군 갈산면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준’은 예명으로, 호적에는 ‘문필(文必)’, 묘비에는 ‘성진(成鎭)’으로 기재되어 있다. 6~7세 때부터 조선춤의 명인인 외조부 백운채로부터 춤과 북을 배웠다. 1887년부터 재인 서학조(徐學祖)에게 줄타기와 기예 등 재주와 민속예능을 3년간 익혔다. 1893년에 덕산골 수덕산의 박순조(朴順祚)를 찾아가 춤과 장단을 공부했다. 3년 후부터 전국을 유랑하며 각종 민속 연희판에 참여했고, 각 지역 권번에서 기생의 예능을 배웠다.
1894년에 동학운동에 가담했지만 부친의 만류로 포기했다. 이후 충청남도 서산군 태안 일대를 돌며 약 10년간 경기도와 충청도의 굿을 섭렵하고 장단과 춤을 갈고닦았다. 특히 이 시기 굿판과 민속연희에서 무속춤을 접했다. 1898년 두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다시 유랑길에 올라 전국을 순회했다. 많은 지역의 권번을 다니며 기생들에게 춤과 장단을 가르쳤다.
1908년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상경했다. 뛰어난 고수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송만갑 협률사에 들어가 김창환(金昌煥), 송만갑(宋萬甲), 이동백(李東伯), 정정렬(丁貞烈) 등 당대 국창들의 고수로 활동했다. 1908년 고종 앞에서 춤을 추어 종9품에 해당하는 참봉 벼슬을 하사받았다. 이 시기 당대 최고 명창들의 판소리 음반 및 「폴리돌 심청전 전집」, 「폴리돌 화용도 전집」, 「빅타 춘향가 전집」 등 창극 유성기 음반 녹음에서 북장단을 맡았다. 1910년 송만갑 협률사가 폐지되자 조선권번에서 춤과 장단을 지도하는 선생님으로 활동했다. 이때 기생들에게 전승되던 궁증정재와 기방무를 배웠다.
1930년 조선음률협회에 가입해 활동했고,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임원직을 맡기도 했다. 1934년 무용만을 전문으로 교육하는 조선무용연구소를 설립했다. 1937년에는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무용교육체계의 기반을 구축하여 조선 가무의 보존과 전승의 기틀을 마련했다. 1935년 61세에 부민관에서 제자들과 함께 첫 춤 공연을 가졌다. 이후 한성준은 고수생활을 접고 무용가로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한성준은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이끌며 1938년 ‘전조선향토연예대회’를 시작으로 1929년 ‘남선순업’이라는 명칭으로 치러진 조선 남부지역 20개 도시 순회공연, 1940년 일본 순회공연과 만주 공연 등 왕성한 공연활동을 펼쳤다.
1941년 전통춤을 발굴하고 집대성한 공로로 『모던일본』이 수여하는 ‘조선예술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지병으로 고향 홍성으로 돌아와 요양하다 6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칠곡 출신의 명창 박귀희는 대구 보통학교 3학년이던 1934년 당시 이화중선이 이끄는 대동가극단에 입단해 대구극장의 첫무대에 올라 ‘소상팔경가’를 불러 소녀명창이라는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단원으로 활동하던 임방울과 장판개, 박초선 등 당대의 정상급 명창들로부터 ‘춘향전’과 ‘흥보가’의 토막소리를 익히며 21세 나이에 판소리 다섯 바탕을 섭렵했고 조학진과 유성준, 박동실, 이기권, 박녹주 등에게서 더욱 소리를 연마했다. 강태홍과 정남희, 오태석과 함동정월로부터는 가야금을 연주하며 민요나 단가, 판소리 일부 대목을 노래하는 가야금병창을 익히면서 일제강점기부터 작고하기까지 왕성하게 활약했다. 아울러 김남수로부터는 승무와 박전무, 검무, 살풀이춤 등 전통 춤을 사사하면서 공연 분야 전반에서 활약하는 전통 예인으로 전설적인 이름이 되었다.
원각사며 협률사 등 근대적 공연장이 20세기 초반 경성에 문을 열면서 당대 명창들은 판소리 공연뿐 아니라 고전 소설과 근대 소설을 오페라처럼 각색한 창극을 무대에 올려 1930년대에는 공연의 주류가 되었다. 박귀희는 임방울과 박초월, 박녹주와 김옥진과 뜻을 모아 1943년 서울 아닌 대구에서 동일창극단을 개관해 〈일목장군〉과 〈선화공주〉에서 남자 역할을 맡아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여성국극의 기틀을 세웠다. 광복 직전인 1945년 박녹주, 김소희, 박소군, 조유색, 조소옥, 조농옥, 성추월 등과 함께 최초의 여성국극단인 ‘여성국악동호회’를 설립해 춘향전을 각색한 〈옥중화〉를, 다음 해에는 박귀희가 햇님왕자 역을 맡고 김소희는 목숨을 걸고 햇님왕자를 짝사랑하는 달님공주 역을 맡은 〈햇님 달님〉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어 〈가야금의 유래〉, 〈일목장군〉, 〈견우와 직녀〉, 〈춘향전〉, 〈흥부전〉 등의 작품으로 여성국극의 전성기를 구가했고, 1962에 창립된 국립창극단 단장 시절에는 〈대춘향전〉, 〈최병도전〉, 〈수궁가〉, 〈춘향전〉 등을 무대에 올렸다.
산조와 판소리에 밀려 멸실될 위기에 처해 있던 가야금병창에 주력한 박귀희는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병창 예능보유자가 된 그녀는 국내외 행사 및 재일교포 위문공연 등 가야금병창의 레퍼토리를 확대하여 대중화에 앞장섰다. 제자들과 함께 소리의 멋과 가야금의 경쾌함, 화려한 무대의상으로 공연효과를 크게 살린 대규모의 무대예술로도 발전시켰다. 또한 전국국악경연대회에 이를 포함시키고, 1979년 평생 입에 올린 소리들을 악보로 정리해 '가야금병창곡집'을 출간한 이후, 동료 및 후배들과 함께 멸실 위기에 있던 전래민요를 채집해 보존하고 전승할 수 있는 악보집을 펴냈다. 1993년에는 국악예술고를 설립해, 체계적으로 국악 전공자를 양성할 기반을 마련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제자들을 키우며 명창으로서의 예술적 성취에 더해 한국 국악 교육의 대모답게 평생을 우리의 국악 살리기에 헌신했다.
건국 이후 맨 처음 앨범을 발매해 ‘대한민국 제1호 가수’라는 호칭이 붙은 현인은 부산 출신 엘리트 음악인으로, 아버지가 기자로 일하던 일본으로 건너가 명문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공부했다. 1942년 귀국해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려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했고, 징병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가 여러 도시에서 샹송과 칸초네를 부르며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광복 후 귀국해 ‘19번가’라는 악극단을 조직해 활동하던 중 작곡가 박시춘의 권유로 「신라의 달밤」을 불러 가요계의 스타덤에 올랐다. 전통 민요나 트로트가 아닌 성악에 기반을 두고 바이브레이션과 스타카토 창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독특한 창법으로, 일제 치하와 전쟁을 겪으며 고향을 떠나야 했던 동시대 젊음의 구슬픈 사연을 노래한 영원한 사모곡 「비 내리는 고모령」과 「고향만리」로 대한민국 최초 국민가수의 입지를 굳혔다. 1949년에는 국내 최초의 음악 영화 「푸른 언덕」에 주인공으로 출연해 무대 인사를 겸하여 주제가를 부르기도 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던 그는 현인은 1950년대 최고 인기를 누린 당대의 가왕이었다. 7인조 악단인 ‘고향 경음단’을 만들어 팝송을 레퍼토리로 극장무대에서 활동했는데, 한국 전쟁 중에는 「전우야 잘 자라」로 군인들의 사기를 높였고, 1951년 흥남 부두에서의 이별을 노래한 「굳세어라 금순아」는 죽을 고비를 넘기며 월남한 이산가족들의 각별한 애창곡이 되었다. 서울 수복의 감격을 노래한 「럭키 서울」과 좀 낯설지만 유려하고 세련된 탱고의 선율을 기반으로 한「서울야곡」은 베이징 감옥 안에서 서울을 떠올리면서 만든 노래였다. 작곡자로 표기된 현동주(玄東柱)라는 이름은 그의 본명으로, 일본과 상해에서 다양한 음악을 익히고 활동했던 가수 현인의 역량을 발휘한 자작 멜로디에, 감성파 방송작가 유호에게 의뢰해 가사를 쓴 곡으로 고등학교 동창이던 이들이 함께 만든 가요들은 해방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는 활력소였다. 이후에도 「꿈속의 사랑」, 「나포리 맘보」, 「불국사의 밤」, 「청포도 사랑」 그리고 「베사메무쵸」나 「고엽」 등의 번안곡도 그의 입을 거치며 곧 히트곡이 되고 십수 년 불후의 명곡이 되어 현인의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현인의 노래들은 60년대 번안곡 열풍과 70년대 통기타세대에도 계속 리바이벌되면서 한 세대가 넘는 기간 영향력을 발휘하며, 젊은이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이후 샹송, 칸초네, 탱고와 맘보 등 해외의 낯선 리듬과 멜로디를 적절히 도입해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해방 후의 한국 대중가요를 풍요롭게 했다. 1980년대에는 'KBS 가요무대'의 단골 가수로 활동하며 그 명성을 이어갔고, 2002년 작고 후 그가 유년기를 보낸 부산의 송도해수욕장 입구에 ‘현인 광장’이 설치되고, 매해 여름 ‘현인가요제’를 열어 그를 기리며 실력 있는 신인 가수를 발굴하는 행사가 계속되고 있다.
세 살 아래 동생 김창진(金昌鎭)도 알려진 소리꾼이며, 할아버지는 장중하고 우아한 진양조를 처음으로 판소리에 넣었다는 명창 김성옥(金成玉)이고, 아버지는 시조와 음률에도 정통했던 김정근(金定根)으로 그 음악적인 특징을 명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상궁접(삼공제비) 곡조를 창시했다는 문헌 기록이 있다. 선비가 달밤에 글을 읽는 느낌의 군더더기 없는 소리라는 경기와 충청 지역에서 발생한 중고제를 가문의 전통 소리로 익히고 전수 받아 독특한 고전미를 품고 있다는 평을 들었다.
7세 때부터 후일 소리판의 쌍벽을 이루는 동료가 된 이동백과 함께 부친에게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해 14세가 되자 소리의 자리가 잡혔다 한다. 이러한 집안 소리 외에 서편제의 이날치에게도 소리를 공부를 한 바 있고, 진사(進士) 시험에도 급제한 유가(儒家)출신 광대였던 동편제의 정춘풍 제자인 박기홍에게 공부한 이력을 자랑 삼아 이야기했던 것으로 보아, 당대 대표 소리들을 섭렵하며 음악적 완성도를 심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로는 혼자 공부하다 지방의 소리꾼들이 줄지어서 서울 무대로 진출을 하던 20세기 초, 32세의 그 역시 상경하는데, 중고제의 충실한 계승자였던 그는 특히 서울의 양반 계층에게 인기가 높았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우리 전통 음악도 탄압을 받게 되면서 그는 폐쇄된 원각사 단원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무대 공연을 펼칠 수 있는 ‘협률사’와 ‘연흥사’ 등을 창단 후 판소리 및 일인 공연을 하던 소리꾼들이 이제는 뮤지컬의 양식으로 새로운 무대를 꾸미는 ‘창극’ 가수로 활약하며 창극의 정립에도 무던히 힘을 쏟았다. 1933년에는 송만갑, 이동백, 정정렬 등과 함께 우리 소리를 정립하고 전파하는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해 전국 순회공연을 하고 본격적으로 판소리 교육과 중흥에 앞장서며, 창극의 보급과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다행인 점은 방송과 음반 녹음까지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진 흔적이 많이 남아 그의 고향인 서천을 중심으로 내포 지역에서 최근 새롭게 부상하는 중고제 판소리 복원의 꿈을 성취할 수 있는 단서들이 제법 있다는 것이다. 1932년에 콜럼비아 명창제의 음반 총 8면에 단가 ‘대장부한’을 포함하여 모두 11곡을 취입했고, 이들 중에 ‘범피중류’, ‘이별가’, ‘귀곡성’, ‘대장부 한’을 제외한 7곡을 레갈 음반으로 재녹음할 정도로 당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소중한 자료는 현재 전승이 끊긴 20세기 초의 중고제 판소리 녹음들로서, 그가 남긴 중고제 소리는 동편제나 서면제보다 더 오랜 전통을 많이 간직한 판소리의 원형에 해당하므로 이를 통해 이전의 판소리를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단히 귀한 사료이다.
큰 산줄기가 남북방향으로 뻗어 있고 서쪽은 천수만에 닿아서 물산이 풍부하고 다양한 문화가 싹튼 충남의 해미를 중심으로 경기와 충청 지역에 꽃피었던 중고제는 동편제와 서편제보다 시기적으로 앞섰던 까닭에 초기 판소리의 면모를 고스란히 간직한 소리였다. 방만춘은 바로 이 지역 출신의 명창으로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따르면, 일찍부터 총명하고 판소리에 재질이 있어서 11세 때 고향 근처 충남 가야산 일락사(日落寺)에서 오래도록 공부했으며, 황해도 봉산 어느 절에서 4년 남짓 혹독한 수련을 하던 어느 날 나무 기둥을 끌어안은 채 뿌리가 뽑히고 인근의 절이 무너지는 뇌성벽력의 소리를 지르며 쓰러진 이후에 목이 트이고 특유의 웅장한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각고의 노력과 피나는 수련을 통해 방만춘은 시대를 풍미하는 중고제 명창으로 등극하는데, 그는 특별히 목청을 젖히면서 크게 내지르는 ‘아귀성’과 가늘고 미약하지만 맑고도 선명하게 들리는 ‘살세성’ 같은 소리에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방만춘은 고향 친구인 고수관과 함께 본격적으로 판소리가 완성되던 19세기 초, 시대를 대표하는 8인의 명창 중 하나로 꼽혔다. 명창이란 단순히 최고 소리꾼으로 무대의 주인공 노릇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판소리 사설의 주요 대목들에서 매력적 성격을 드러내는 '더늠'들을 완성하는 창작자들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황해도 봉산의 절에 머물며 소리 공부에 정진하던 시절 그는 시문에 해박했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이와 함께 문헌에 전하는 자료를 참고해 「적벽가」와 「심청가」 내용을 윤색하고 개작하며, 고유한 더늠의 사설을 완성시켰다. 이런 작업을 통해 방만춘은 「심청가」와 「적벽가」를 한결 완성도가 높은 수준으로 정리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상당히 오랜 세월 전해졌다던 이 자료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방만춘은 전라도의 동편제와 서편제가 부상하기 이전 서울의 왕실과 귀족 사대부 양반 상류층에서 선호되던 중고제의 소리꾼 중 대표적 인물이었다. 목청이 트인 스무 살 초반 한양에 올라 와서 큰 이름을 떨친 그의 소리는 왕실과 귀족 사대부, 양반 상류층의 기호와 내포 지역 시조를 비롯한 양반들의 가창 문화를 기반으로 중고제 형성의 기반이던 것으로 여겨진다. 안타깝게도 일제 강점기에 급속히 진행된 전통사회의 해체, 즉 판소리를 고도의 예술로 육성하고 이를 지원해 오던 양반사대부 계층 및 조선 왕실이 붕괴되면서 이들의 예술성은 존속되지 못한 채 1910년을 기점으로 쇠퇴하며 단절되었다. 중고제의 명창을 많이 배출한 서산을 중심으로 이를 복원하려는 최근 노력은 아마도 할아버지의 소리를 간직한 그의 손자 방진관의 소리 녹음을 통해 상당한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근대 5명창’의 한 사람으로도 꼽히는 박기홍(朴基洪)에게 동편제 소리를 배운 박녹주(朴綠珠)는 17세, 18세 때 각각 원산과 서울의 명창대회에서 활약하여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남편이었던 원산의 갑부 남백우, 남백우와의 이혼 1년 후 재혼한 순천의 교육사업가 김종익(金鍾翊)처럼 부부관계를 맺은 인물 외에도, 보성전문(오늘날 고려대학교)과 동아일보의 소유자 김성수(金性洙)나 그의 부친 김경중(金暻中) 같은 유명인사들이 박녹주의 소리에 반해 그녀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그녀가 녹음한 유성기음반은 오늘날 인기 아이돌의 음반을 연상시키는 인기를 누렸다. 31세인 1935년에는 창극 「춘향전」에서 주인공 춘향역을 맡아 5시간에 달하는 공연을 하루 2회씩 소화했다. 이 공연에는 일주일만에 수만 명의 관중이 몰렸고 박녹주를 만나보려는 관중들이 일대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드높은 인기에도 박녹주는 늘 가난을 걱정해야 했는데, 노름빚과 술값을 대기 위해 어린 박녹주를 기생으로 팔아넘겼던 아버지 때문이다. 국악인으로 활약하게 된 이후에도 자신을 끊임없이 착취하는 아버지에게 시달리던 스트레스로 박녹주가 자살 시도를 한 일이 있다. 한편 박녹주는 「봄봄」, 「동백꽃」으로 유명한 소설가 김유정의 ‘짝사랑’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흔히 짝사랑으로 포장되곤 하는 김유정의 행동은 현대 기준으로 흉악범죄이자 악질적인 스토킹이었다. 팬레터를 빙자한 연서(戀書)에 대해 박녹주가 거절의 뜻을 보이자 김유정은 자신이 가난한 학생이라 거절당했다는 피해의식에 빠졌다. 이후 그는 박녹주를 죽여버리겠다는 협박편지나 혈서를 연달아 보내고, 집 근처를 배회하거나 흉기를 들고 협박하며 애정을 강요하는 행각을 벌였다. 심지어 그가 병으로 요절한 뒤 박녹주는 김유정의 친구 안회남(安懷南)에게‘당신이 (매몰차게 거절해서 김유정을) 죽였다’는 애꿎은 원망까지 들어야 했다.
불행한 개인사, 그리고 나이가 들며 앓게 된 시력 이상과 폐 질환 등 각종 질병으로 고통받는 와중에도 박녹주는 국악 보존을 위한 노력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선구적 여성국악인이었다. 창극 공연을 주도한 조선성악연구회가 1943년 해산한 후, 박녹주는 1948년 김소희(金素姫), 박귀희(朴貴姬) 등 여성 명창들과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여 판소리 보존과 대중화에 앞장섰다. 송만갑, 이동백, 김창환, 정정렬 등 죽거나 은퇴한 선대 남성 명창들의 빈자리를 메꾸려는 노력이었다. 그녀는 송만갑(宋萬甲)-김정문(金正文)의 동편제 소리를 이어받아 특히 「흥보가」의 전승에 기여했는데, 박력 있고 진중하며 저음역이 강한 박녹주의 소리는 여성 가창자는 소리가 여리고 고음에 강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는 새로운 스타일의 소리였다고 한다. 원로 명창이 되어서도 열정적으로 공연과 음반녹음에 임했으며, 후진 양성에 힘써서 1990년대~2000년대까지 활약한 여러 명창이 박녹주의 계보에서 나왔다.
김초향은 가난한 소작농의 맏딸이던 그녀는 13세 때 모친을 잃고 가장 노릇을 맡아 16세 때 대구로 와서 대구기생조합에 기적을 두었으며, 20세 때 서울로 올라와 ‘협률사’와 ‘광무대’와 ‘장안사’ 등 공연 단체에 입단해 당대 최고의 소리꾼들의 총애를 받아, 예컨대 김창환에게 토막소리를, 정정열에게는 「춘향가」와 「적벽가」, 송만갑에게는 「홍보가」를, 이동백에게는 소리 바디를 전수받는 등 탄탄히 실력을 쌓았다. 한편 송만갑의 수제자 김정문은 남자들도 쉽게 넘볼 수 없는 「적벽가」를 가르치며 “능히 적벽가를 배워도 아깝지 않은 목청”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소녀 가장으로 생활전선에 나서면서 다져진 강단에다 판소리에 욕심이 대단했던 그녀는 ‘이화중선이냐 김초향이냐’라거나 ‘김녹주냐 김초향이냐’라는 얘기가 회자될 만큼 당대 최고 여류 명창 중의 하나로 호명되던 시절에도 공부를 멈춘 적이 없을 만큼 소리에 대한 애착이 강했고, 1920년대 이후 전국 곳곳에서 열린 명창대회며 방송에 꾸준히 출연하는 등 활동의 폭이 대단한 소리꾼이었다.
소녀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 수재를 당한 삼남지방민을 돕고자 그녀는 대구에서 모금 공연을 펼치기도 하고, 나라를 잃은 시절 멀리 타향에서 떠도는 만주 지역 동포들을 위한 기금 마련에도 앞장서는 등 민족의식도 남달랐다. ‘옥과 같이 쟁그랑 울리며 푸른 산을 깨치는 듯하고, 난새와 봉황의 피리처럼 선계를 흔드는 모습이 선궁에서 봄바람에 학을 타고 돌아오는 것을 보는 것 같’은 유연하고 품격 높은 소리로 당대 최고의 귀명창과 성북동에 있던 고종의 아들 의친왕의 별장에도 불려 다니며 박영효를 비롯해 김성수·김연수 형제, 송진우, 조봉암, 송병준, 장택상, 조병욱, 예종식, 김병로, 이광수, 염상섭 등 정객과 사업가, 예술가 등을 매료시키고 이름을 높이면서 전성기를 누렸으나 혼인으로 활동이 크게 축소되었다. 결혼 이후 무대에서는 물러났으나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우리 음악이 본격적으로 탄압 받기 시작하자, 1933년 그녀는 이동백과 송만갑, 정정렬 등 당대의 명창들을 익선동 자택으로 초대해 사무실로 쓸 수 있게 배려하면서 판소리 교육과 중흥을 도모할 ‘조선성악연구회’ 발족이 이루어지도록 후원했다.
스물다섯 살 김초향은 정정렬 명창에게 「춘향가」를 배우려 계룡산 갑사에 백일 동안 용맹 정진하러 가며 열네 살 먹은 동생 김소향을 데려가 함께 공부하는데, 피나는 노력 끝에 명창으로 거듭난 자매는 특히 1927년 개국하는 경성 라디오 방송국(호출부호 JODK)의 단골 가수로 따로 또 함께 활동하면서 ‘자매가수’로도 이름을 날렸다. 당시 라디오로 여러 단가를 비롯해 「춘향가」와 「심청가」, 「적벽가」 일부를 병창으로 부른 더늠들도 전국에 울려 퍼지고 1934년 동생이 요절하기까지 콜럼비아와 빅타 등에서 「이별가」며 「삼고초려」 등 음반을 발표하는 등 20세기 초반 판소리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명창이었다.
남원 권번에서 소리를 익힌 꼬마 명창 이화중선은 열다섯 무렵, 조선 후기 8명창 중 한 사람으로 동편제의 법통을 이어받은 명창 장재백의 조카 장득진의 첩으로 들어가서 본격적인 공부의 기회를 얻고 토막 소리들을 익혔고, 열일곱 무렵 소리꾼들이 마을에 유랑 온 ‘협률사’의 공연을 보고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받은 이후 서울로 와서 송만갑과 이동백의 지도를 받아 천부적 재능을 발휘해 「춘향가」, 「수궁가」, 「흥보가」 세 마당을 습득했다고 한다. 1923년 경복궁에서 열린 판소리 대회에 출전해 황후가 된 심청이가 가을 달빛이 가득한 뜰에서 아비를 그리면서 탄식하는 ‘추월만정’을 불러서 최고의 여성 판소리 창자로 등극한다. 이 노래는 최고 히트곡이 되어 꽃들 사이에 나타난 선녀와 같다는 화중선(花中仙)이란 예명과 함께 그녀의 등록상표로 널리 알려지는데, 판소리사상 이 노래는 임방울이 부른 「춘향가」의 ‘쑥대머리’가 새로운 정상에 등극하기까지 1923년 이후 최고의 인기곡이었다.
경복궁의 판소리 대회 이후 이화중선의 폭발적인 인기는 그녀 자신뿐 아니라 여성 소리꾼들에게 남자 명창을 능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에 앞선 최초의 여류명창 진채선(1847∼1901)의 시대만 해도 소리할 때는 남장을 해야 할 만큼 남자들의 전유물이던 판소리의 세계에 새 바람을 몰고 온 이화중선은 사람이 모인 곳이면 찾아가서 우렁차거나 애절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아니고 청아하고 시원스런 소리로 인기를 끌었다. 더욱이 비단옷이 아닌 흰 무명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그녀가 온다는 소문이 나면 구름떼 같은 인파가 모였다. 인당수로 끌려가는 심청, 옥에 갇힌 춘향, 쫓겨나는 흥부, 육자배기 같은 서러운 이들의 관조적이고 덤덤한 이화중선의 소리는 식민지 시절 춥고 배고프며 기댈 곳 없었던 서러운 민중들의 심금을 더 깊이 파고들며 따뜻한 위안이고 희망이 되어 주었다.
1924년 상경 후 조선 권번에 적을 두었던 그녀는 1928년 남편이며 스승이던 장득진이 사망하자 임실로 내려와서 역시 소리꾼으로 제법 실력을 인정받았던 동생 이중선과 장터에서 주막을 꾸리며 지역에서 열리는 행사들에서 실력을 발휘하는 등 ‘자매가수’로 이름을 날렸다. 1930년대 초 토목업자였던 후견인 이재삼과 법적 부부가 되고 그의 재정적 후원 덕에 홀로 상경해 새로운 전성기를 누렸다. 콜럼비아와 오케, 빅타레코드 등에서 「춘향전」과「흥보전」을 녹음하며 더 큰 인기와 명성을 얻고 ‘조선성악연구회’ 활동도 동참하며 여성 판소리의 최고봉으로 등극했으나, 1944년 새 음반을 녹음하고 일본 탄광이며 군수품 공장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 위문 및 순회공연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풍랑으로 연락선이 전복되면서 외롭고 고달팠던 천민 출신 여성 예술가, 이화중선의 삶은 막을 내렸다.
모흥갑은 조선 후기 순조부터 헌종, 철종 때까지 송흥록과 함께 8대 명창에 꼽혔다. 소리의 임금이란 뜻으로 ‘가왕(歌王)’이라 불린 대가, ‘귀곡성’을 잘 구사하기로 이름난 송흥록에게 그런 별칭을 처음 붙여준 인물은 당대 판소리의 양대 산맥이던 동료 모흥갑이었다. 하지만 실내의 청중을 위해 부르는 ‘방안소리’로 바뀌게 되기 전까지, 모흥갑 명창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야외에서 우람하게 질러내는 ‘마당소리’의 전성기라, 그의 우람한 목소리는 독보적이었다. 이들을 한양 궁궐까지 오게 하고, 모흥갑 명창을 ‘청천만리에 울려 퍼지는 학의 울음소리와 같다’라면서 두보(杜甫, 712∼770년)의 아름다움에 비유한 신재효에게 헌종은 벼슬을 내려 크게 칭찬했다. 이에 힘입어 판소리는 전국으로 퍼져 나가 19세기 중반 이후 임금부터 천민들까지 관중의 폭이 크게 늘어날 수 있었다.
이른 시기의 판소리 명창 중 모흥갑은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소리꾼 중 한 사람으로, 그의 자취는 특히 평양감사 김병학의 초청을 받고 대동강 옆으로 흐르는 능라도의 연회장 ‘연광정’에서 양반들에 둘러싸여 공연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으로 더욱 선명하게 전해진다. 당시 그의 소리가 10리 밖까지도 들렸다는 전설과 함께 이를 묘사한 그림에서 평양감사는 숲속에 자리를 깔고 앉았고 좌우로 선비들이 늘어앉거나 서 있고, 한가운데 당대 명창 모흥갑이 부채를 펴들고 고수와 마주한 채 소리를 하는데, 그림 왼쪽에 ‘명창 모흥갑’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모흥갑은 「적벽가」와 「춘향가」를 잘 불렀고, 특히 「적벽가」로는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더늠으로 전해지는 「춘향가」의 ‘이별가’ 중 ‘날 데려가오’하는 대목은 높은 소리를 계속 질러내는 그의 특징적인 고동상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양반들 축하연이며 임금 앞에서 판소리를 부르는 일이 흔했던 시절, 특히 「적벽가」 중 ‘장판교’ 대목은 지금도 ‘모흥갑 더늠’이라고 밝힐 만큼 최고의 경지를 드러낸 까닭에 그의 시대에서 50년이 더 지난 1936년에 녹음된 이화중선의 소리에서도 가장 격정적인 대목에서는 ‘모흥갑의 더늠’이라는 표시가 확인된다. 모흥갑이 소리를 하던 당시 헌종을 위시해 삼정승과 육판서 이하 어전에 나열했던 조신들까지 고음으로 올라가는 그의 소리가 ‘하얀 눈 위에’ 혹은 ‘혀 위에서 진저리치듯’ 현란하고 매혹적이어서 지위와 체면을 잊고 다 함께 탄성을 지르며 그의 더늠 소리에 열광했다고 전해한다. 모흥갑 명창의 이름은 구전이나 전설에만 남은 게 아니라, ‘춘향가’나 ‘무숙이타령’에도 등장하며, 윤달선의 『광한루악부』, 이유원의 『임하필기』, 이건창의 『이관잡지』, 신재효의 『광대가』 등의 문헌에도 꾸준히 등장해, 모흥갑이라는 명창에 대한 인기가 얼마나 광범위했는지 가늠케 한다.
무계(巫系)와 관련 있는 예능인 집안의 후손으로 추정되며, 유복자로 태어나 가난하고 불우한 유년기의 서당 공부는 지루했던 반면 소리 공부는 마냥 즐거웠다. 열세 살 무렵 서천 지역을 대표하는 소리, 중고제를 잇는 명창 김정근(金正根)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일곱 살짜리 아들 김창룡과 함께 공부해 둘은 중고제를 계승한 마지막 소리꾼이 되었다. 더 좋은 소리를 하고자 고향 서천의 희리산 토굴에 들어가서 2년 동안 목에서 피를 토하며 혼자 공부한 결과 소나무 앞에서 통성을 내지르면 그 뿌리가 뽑힐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진주 옥천암에 3년간 머물며 불가의 소리도 배우고, 최고의 남도 소리를 찾아 김세종(金世宗)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5년간 창을 배웠다. 이 무렵 창원 부사로 있던 대표적인 친일파 이지용의 주목을 받아 명창으로 알려진 이후, 서울에서 힘을 쓰던 권세가들 사이에 불려 다니며 중앙으로 진출할 기회를 얻었다.
경남 창원에서 특히 「새타령」으로 이름을 떨치다 상경한 이동백은 워낙 훤칠한 용모에 야외에서 지르는 ‘마당소리’에서 우람한 목소리와 고음과 저음을 자유롭게 오르내리며 숨 가쁘게 몰아가는 창법은 당대 관객들을 사로잡아 같은 시기 이탈리아 최고의 인기가수인 카루소에 비견되곤 했다. 실제 공연에서 아기자기한 성음으로 특유의 새 울음소리를 기막히게 구사하며 자진중중모리로 “삼월삼짇날 연자 나라들고”로 시작한 박력 있는 소리에 즉흥적으로 소리를 바꿔가며 청중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킬 수 있을 만큼 그는 소리 실력이 탁월했다. 1900년 고종 황제 앞에서 판소리를 불러 ‘통정대부’ 벼슬까지 얻은 이후, 고종은 원각사의 소리 공연에 전화선을 대고 그의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는데, 그의 새타령은 이날치 이후 최고라는 평을 받았으며 그의 소리 음반 수십 종이 남아 있어 판소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우리 음악이 탄압 받기 시작하자, 동료들과 원각사에서 창극을 공연하고, 원각사가 해산되자 연흥사와 광무대로 반경을 넓혀 창극과 판소리를 공연하며 창극의 정립에도 힘을 쏟은 한편 1933년 송만갑, 김창룡, 정정렬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해 본격적으로 판소리 교육과 중흥에 앞장섰다. 1939년에 부민관에서 은퇴 공연 후 열화와 같은 요청으로 두 달 동안을 전국과 만주, 연해주 일대까지 순회공연이 이어졌다. 외래 음악의 영향이 커지는 상황에서 특히 일제가 혐오하며 적극적으로 단절시키려 했던 전통의 소리로 조선인들의 귀를 매혹시켜 창가나 소리를 주제로 한 훌륭한 공연 문화를 창조했던 그의 역할은 우리 음악사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로 꼽을 만하다. 특히 그가 남긴 중고제 소리는 20세기 전반까지는 지속되던, 동편제나 서면제보다 더 오랜 전통을 많이 간직한 원형에 해당하므로 이를 통해 이전의 판소리를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단히 귀한 사료가 되었다.
전라남도 나주 지역의 무계 출신인 김창환은 어려서부터 외가 쪽의 이종형들인 명창 이날치와 박기홍에게 소리를 익힌 한편 각종 고전에도 능통하고 선배들의 창법과 바디를 두루 공부해 동료 명창들로부터도 존경받던 판소리계의 대가였다. 특히 「흥보가」 중 강남에 갔던 제비가 박씨를 물고 흥보의 집으로 돌아오는 노정을 노래하는 ‘제비 노정기’는 그가 창작한 대표작으로, 동편제 명창들도 즐겨 부르는 명작이었다. 당대 정상으로 꼽히던 정창업 명창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판소리 공부를 시작해 상당 수준에 이른 20대에는 이론을 완성한 신재효의 문하에서 여러 해를 이론과 실기 공부를 하며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등 작품을 문학과 음악 그리고 연극적 요소까지 신재효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절제된 발림 등으로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을 완성시켰다. 이에 따라 18세기 후반 나주는 활달하고 우렁찬 동편제에 비해 한결 섬세하고 세련된 기교가 돋보이는 서편제의 중심, 남도 소리가 탄생한 본거지로 자리 잡았다.
수려한 풍채와 세련된 너름새까지 겸비한 김창환은 마흔 무렵 한성에 올라와서 이름을 날리던 중 대한제국의 왕실 어전에도 호출되어 한껏 실력을 발휘했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영향으로 판소리 애호가였던 고종은 출중한 그의 실력에 감동해 명예직이지만 중추원의 의관직을 주고 춤과 소리 교육을 담당한 왕실 교방서의 다른 이름으로 ‘협률사(協律司)’를 설치해 170여 명의 궁궐 소속 연예인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기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했다. 그는 나라를 대표하는 어전 광대 소리꾼으로서 1902년 가을 전국의 명창들을 한양의 궁으로 불러올려 고종황제 환갑을 기념하는 예식을 준비했으나 콜레라의 창궐로 계속 연기되다 결국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로 취소된 바 있다. 국내 최초 서양식 극장 원각사가 개관하며 운영 책임을 맡게 된 그는 궁궐에서 준비하던 행사의 전통 판소리를 오페라처럼 변형해서 무대에 올리며 대중이 함께 즐기는 소리의 향연, 창극의 시대를 새로 열었다.
왕명으로 개관했던 국내 최초의 근대식 공연장이던 원각사가 일제의 간섭으로 폐쇄되자 그는 곧 나주로 귀향해 지역의 명창들과 최초의 창극단 ‘김창환 협률사’를 조직해 전국 순회공연을 벌였는데, 풍채가 좋고 너름새가 출중했던 국창 김창환과 그 일행을 보려고 몰려오는 사람들로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같은 시기에 동편제의 명창 송만갑은 이동백, 한성준 등 당시 젊은 예술인들과 뜻을 모아 한양에서 ‘동대문 협률사’를 개관해 성공했으나,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탄과 함께 전통예술을 통한 민족혼의 고취 및 한국인의 동질성을 고무시킨다는 이유로 두 협률사 모두 해산되었다. 이후에도 김창환은 유사한 목표로 설립된 경성 배우조합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한참 설립되던 음반사들에 소리를 취입하고, 경성방송국 국악 방송에 출연하며 1930년 설립된 조선음률협회의 회장을 맡는 등 전통의 소리를 지키는 최전선에서 활약을 멈추지 않았다.
박초월은 전라남도 순천에서 남사당패의 일원으로 활약하던 아버지와 무업에 종사한 외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아홉 살 무렵 그녀의 가족은 가왕 송흥록과 송광록이 살던 소리의 고향, 남원 운봉으로 이사를 했다. 자매들은 자연스레 악기와 소리를 익히며 성장했는데, 10녀 1남의 셋째 딸 박초월은 특히 천재 소녀 명창이라는 칭찬을 자주 들었다. 그녀는 12세 무렵 남원 권번에 적을 두고 집에서 왕래하며 소리를 배우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14세에 대부호의 재취로 시집갔으나, 넉 달 후 집을 나와 김정문(金正文), 송만갑(宋萬甲) 등 최고 명창의 제자가 되어 소리 공부를 계속했다. 그리고 17세인 1930년, 부모와 남편 몰래 전주대사습놀이에 나가 「춘향가」 중 ‘어사와 춘향모 상봉’ 대목을 불러 장원을 했다. 이를 계기로 판소리계에 널리 이름이 알려지고, 임방울(林芳蔚)과 유성준(劉成俊) 등 당대의 명창에게 지도를 받는 한편, 일본 도쿄로 건너가서 음반을 취입하고 경성의 부민관(府民館)에서 성황리에 공연을 여는 등 일약 판소리 스타의 삶을 살게 되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을 지나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박초월은 여성 명창들과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는 한편 각종 창극과 국극에 활발히 출연했는데, 특히 춘향의 어머니 ‘월매’ 역할로 유명했다. 이규환 감독의 영화 『춘향전』, 『심청전』에서 창을 맡기도 했다. 1955년에는 사라져가는 판소리의 보존과 부흥을 위해 박귀희, 김소희 명창 등과 뜻을 모아 오늘날 국악예술학교의 전신 민속예술학원을 설립했고, 1959년 민속예술학원이 국악예술학교가 되자 초대 교장 박헌봉(朴憲鳳)이 작사한 교가를 직접 부르기도 했다. 박초월은 특히 제자 양성에 힘써서 문하생들을 위한 발표회를 열고, 이 발표회를 위해 임방울, 정광수 등 당대 명창들에게 찬조출연을 부탁하기도 했다. 작창(作唱)에도 힘쓴 결과 47세였던 1963년 국립국악원에서 창설한 제1회 국립국악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1974년에는 판소리보존회의 이사장으로 취임해 활동했다.
박초월 판소리의 음악적 특징은 판소리의 대중화라는 그녀의 지향과 잇닿아 있다. 상청 고음에 탁월했던 박초월의 소리는 ‘애원성’과 ‘설움조’로 유명했는데, 이는 기존 판소리 사설에서 비속하거나 재담이 많은 내용은 줄인 대신 서민적 형상을 강화하는 박초월 특유의 사설 구사와 어우러져 ‘서민의 한’을 잘 담아낸, 서민이 즐길 수 있는 판소리를 일궈냈다고 평가받는다. 판소리의 대중화를 지향한 박초월의 활동은 판소리의 세계화로 이어져, 1976년 서베를린에서 열린 국제현대음악제에서의 판소리 공연을 성공시킨다. 3시간여에 걸쳐「수궁가」를 연창하며 서구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박초월의 공연은, 1970년에 최초로 판소리를 오선지에 채보하도록 했던 선구적인 노력이 빛을 본 결과이다.
박초월이 어린시절을 보냈던 전라남도 남원시 운봉읍 비전마을에는 박초월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박초월 생가 옆에는 동편제의 가왕 송흥록의 생가와 동상이 있다. 이 곳 비전마을은 고려 우왕 6년(1380) 태조 이성계의 환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대첩비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 트롯의 인기가 뜨겁다. 각종 경연프로그램에서 구슬프고도 흥겨운 다양한 곡들이 알려지며 트롯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반짝이는 별빛 아래 소곤소곤 소곤대는 그 날밤
천년을 두고 변치 말자고 댕기 풀어 맹세한 님아”
위 노랫말은 오래전에 불렸던 노래지만 요즘의 젊은이들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곡이다. 이는 1958년 나화랑(본명 조광환, 1921~1983)이 작곡하고 남인수가 부른 <무너진 사랑탑>이다. 당시의 유행을 넘어 현재까지 많은 가수들이 불러왔다. 이 노래를 작곡한 나화랑은 1940년 제1회 레코드예술상에 입상하며 가수 활동을 하다 1942년 <삼각산 손님>이란 곡을 작곡하면서부터 작곡가로 데뷔하였다. 이후 우리나라 민요를 체계적으로 정리·편곡하여 최초의 민요 LP판을 보급하였으며, 서양의 맘보·탱고·블루스 등의 리듬을 우리 대중가요에 접목시키기도 했다. 이미자를 비롯한 가수 발굴에도 힘썼으며 대중가요 보급에 앞장섰다. 나화랑은 <닐리리 맘보>, <청포도 사랑>, <열아홉 순정>, <울산 큰애기> 등 500여 편이 넘는 곡을 남긴 한국 대중가요 1세대 작곡가이다.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에는 나화랑의 생가가 있다. 나화랑 생가는 나화랑이 태어난 해인 1921년에 지어졌다. 안채와 사랑채, 창고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래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나화랑 생가는 2020년 3월 9일 국가등록문화재 제775호로 지정되었다. 작곡가나 작사가, 가수를 물론하고 배우나 방송인 등의 모든 대중문화인을 놓고 보더라도, 생가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나화랑의 경우가 최초이다. 한국 대중가요에 지대한 공을 세운 나화랑의 업적을 높이 평가해 보존할만한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평가된다. 나화랑 생가의 사랑채 앞에서는 수년 전부터 야간고택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나화랑이 대중가요에 힘쓴 것에는 맏형인 고려성(본명 조경환)의 영향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고려성은 나화랑이 레코드사에서 일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으며, <나그네 설움>, <고향에 찾아와도> 등 수많은 곡의 노랫말을 쓴 작사가이다. <삼각산 손님>, <제물포 아가씨> 등 고려성·나화랑 형제가 함께 작사·작곡한 것으로 이외에도 다수의 곡이 전한다.
2010년에는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직지문화공원에 고려성·나화랑 형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노래비가 세워졌다. 노래비에는 고려성이 작사한 <나그네 설움>과 나화랑이 작곡한 <무너진 사랑탑>의 노랫말이 새겨져 있다. 한편 나화랑은 가수 유성희와 결혼해 슬하에 3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바로 조규천·조규만·조규찬이다. 조규천 형제는 부모님의 재능을 물려받아 모두 작사·작곡 및 편곡에 능하고 꾸준히 가수 활동을 해오고 있다. 나화랑 생가와 직지문화공원의 고려성·나화랑 형제 노래비를 둘러보며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도 알아보고, 고려성과 나화랑의 곡을 흥얼거려보는 기회도 가져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