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항일 문학의 푸른 불꽃, 『상록수』의 작가 심훈

    당진 심훈 기념관 내부 전시물
    당진 심훈 기념관 내부 전시물

    심훈은 1901년 9월 12일, 경기도 시흥군 북면 노량진리, 지금의 서울 영등포구 노량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대섭(大燮)이다. 명문 양반 가문의 막내 아들이었지만, 봉건적인 제도와 인습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 강했다. 서울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학생 때부터 심훈은 민족의식과 저항정신이 남달랐다. 경성고보 재학 때 일본인 교사에 항의하기 위해 백지 답안을 제출하여 유급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8개월 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출옥 후 심훈은 중국행을 선택, 항주의 지강대학에 입학하여 문학을 공부하고 연극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중국에서 심훈은 민족주의자 이동녕과 이시영, 무정부주의자 신채호와 이회영, 공산주의자 여운형과 박헌영 등과 교류하며 민족 독립을 향한 의지를 굳건하게 다짐한다. 


    1924년 동아일보에 입사했지만, 언론운동을 벌여 해직되고 1927년에 영화를 공부하고자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6개월 만에 귀국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 를 직접 연출했다. 이 영화는 나운규의 「아리랑」 만큼이나 큰 인기를 끌었다. 1928년에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동방의 애인』(1930) 『불사조』(1931) 등의 소설을 연재하였으나 모두 일제의 검열로 중단되고 만다. 1932년 격정적인 항일시 「그날이 오면」을 발표한다. 심훈은 생전에 시집을 내려고 했으나 역시 검열로 출간할 수 없었고, 1949년 둘째 형 심명섭에 의해 유고시집으로 세상에 나온다.

    당진 심훈 동상과 시비 정면
    당진 심훈 동상과 시비 정면

    1931년에 심훈은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충남 당진군 송악면(松嶽面) 부곡리(富谷里)로 낙향하여 창작생활에 전념한다. 1934년에는 ‘필경사’라는 자택을 직접 설계하여 짓는데, 바로 이곳에서 『상록수』를 집필하였다. 심훈은 당시 부곡리에서 조카 심재영이 주도하는 ‘공동경작회’ 회원들과 어울리며 지냈는데, 『상록수』는 바로 심재영의 야학운동과 공동경작회 활동을 소재로 삼고 있는 작품이다. 『상록수』의 주인공인 수원고등농림학생 박동혁의 모델이 바로 심재영이다. 한편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은 당시 경기도 반월면 천곡리 샘골(현재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다 요절한 최용신이 모델이다. 『상록수』는 심재영과 최용신의 이야기를 연결하여, 두 남녀의 숭고한 사랑의 과정을 한 축으로 삼아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하는 지식인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당진 심훈 기념관 내부 전시물
    당진 심훈 기념관 내부 전시물

    『상록수』의 두 주인공 박동혁과 채영신은 각각 ‘한곡리’와 ‘청석골’로 내려가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하는데, 그 지역은 지금의 충청남도 당진군과 경기도 안산시에 해당한다. ‘한곡리’는 심훈이 살았던 부곡리와 그 인근의 한진리를 합쳐 만든 이름이며, 청석골은 최용신을 활동했던 샘골을 가리킨다. 『상록수』에는 박동혁이 한곡리에서 농우회를 조직하고 농우회의 회관을 짓는 과정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아마도 자신이 직접 필경사를 지으면서 겪은 경험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심훈은 『상록수』를 출판하기 위해 상경하여 간행 작업에 매진하다 장티푸스에 걸려 1936년 3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당진 필경사 앞 조형물
    당진 필경사 앞 조형물
    당진 필경사 앞 조형물
    당진 필경사 앞 조형물

    『상록수』를 집필한 필경사는 1997년에 충청남도 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에는 심훈기념관이 설립되어 있고, 매년 심훈상록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아울러 경기도 안산시 본오동에 있는 상록수공원에는 최용신기념관과 최용신의 묘, 최용신기념비 그리고 심훈문학기념비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당진 심훈 묘 정면
    당진 심훈 묘 정면
    당진 필경사 정면
    당진 필경사 정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