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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우리나라는 한일병합조약에 의해 일본에 나라를 강제로 빼앗겼다. 일본 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힘썼다. 이에 따라 독립운동은 19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945년 우리나라를
되찾을 때까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우리 민족의 발자취와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독립운동은 한 순간에 시작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바라는 민중의 마음과 행동이 일제를 향한 처절한 저항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그들의 발자취를 통해 격렬했던 독립운동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독립을 향한 뜨거운 민족의 열망을 독립운동사를 통해 확인해보자.
우리 민족이 독립을 염원한 수십년의 세월동안 우리나라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자랑스러운 ‘우리의 독립운동가’라고 부른다.
어록 출처 : 국가보훈처
보다 강력한 항일전을 수행하기 위해 광복군을 결성해야 한다.|이동녕|
싸우다 싸우다 힘이 부족할 때는 이 넓은 만주 벌판을 베개 삼아 죽을 것을 맹세합니다.|지청천|
러시아 추위보다 나라를 잃은 나의 심장이 더 차갑다.
|최재형|
조선 독립을 일본 사람도 자기 일같이 생각하여 주기를 바란다.|이동휘|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안중근|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누가 했을까?
독립운동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능했다. 성별도 국적도 상관 없었다.
우리는 그들을 독립유공자라 칭하며, 그들을 기리고 있다. 독립유공자는 2022년 기준 17,285명이며,
그들 중 독립운동인명사전에 소개된 15,178명의 독립운동 계열과 본적을 통해 그들이 지나온 길을 알아보자.
자료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이 독립운동가를 아시나요?
독립운동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사명이 아니었다.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디서든 독립을 위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각자의 사정으로 그들의 이야기는 널리 퍼지지 못했다. 지역N문화에서는 각 지역별로 많이 알려지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와 더불어 뛰어난 활약을 했음에도 공적인 영역에 기록되지 못하고 잊혀진 ‘여성독립운동가’의 이야기도 함께 담았다.
박순구(朴順九)
· 인제 가리산에 본거지를 두고 6년간 19차례에 걸쳐 경찰관주재소 습격
· 1924년 부호층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 징수
박순구는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도현의 친족으로, 1907년 자신의 부친 박영관이 마도현의 부친 마정삼과 함께 의병 활동을 벌이다가 일본군에게 체포된 뒤 살해되자 복수를 결심하고 1921년 9월 마도현, 마만봉 등과 함께 장총단(長銃團)을 조직했다. 그는 화승총을 휴대하고 마씨 형제들과 함께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자은리에 소재한 경찰관 주재소의 경찰관을 향해 발포하였으나 사살에 실패했다.
박종성(朴鍾聲)
·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공채 증서 제작 및 사용
· 독립운동 자금 모집
박종성은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1921년 4월 서울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공채증서를 제작·사용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려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1년 5월 29일 밤 10시 충북 음성·충주·제천 등지의 자산가들에게 군자금 모집 실행 방침을 논의하기 위해 경성부 종로2정목 중국요리집 제일루(第一樓)에서 모였다가 경기도 경찰부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조철호(趙喆鎬)
· 조선소년군을 창설하여 청소년운동 전개
조철호는 경기도 시흥군(현 서울시)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 중에 동기생인 지청천과 조국독립을 위하여 헌신할 것을 맹약했다. 1922년 10월 5일에는 조선소년군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창설하여 청소년 운동을 전개하면서 청소년들을 독립전쟁에 씩씩한 전사가 될 수 있는 민족간부로 육성하기 위하여 진력했다. 1938년 8월에는 보성전문학교의 체육교사가 되어 청년학생들을 훈련했다.
송재필(宋在弼)
· 일제가 공포한 「조선육군특별지원병령」 거부
송재필은 인천에서 태어나 1939년 인천상업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오륜조(五輪組)를 조직하여 창씨개명령 반대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1943년 7월경 일본 메이지대학에 재학 중 일제의 강제 학병모집에 항거하여 결의문을 작성하고 인천상업학교 졸업생들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충북 영동경찰서에 체포되었다가 고문을 받고 1944년 6월 대전형무소로 송치되었다.
유완무(柳完茂)
· 인천 감옥에 수감된 김구 구출 계획 수립
· 『북여요선(北輿要選)』의 간행사업 주도
· 만주, 러시아 일대 독립운동근거지 개척사업 전개
유완무는 인천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1898년 일본인 처단 사건으로 감옥에 수감된 김구를 구출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1904년 간도감계(間島勘界) 관계 지리서인 『북여요선(北輿要選)』의 간행사업 주도했으며 1905년 이후 만주, 러시아 일대에서 성태영 등과 독립운동근거지를 개척하기 위한 사업을 전개했다. 그리고 1908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항일신문 간행사업에 참여했다.
선백중(宣百仲)
· 조선독립단 가입 후 독립운동자금 모집
선백중은 전라북도 익산에서 태어났다. 선백중은 1921년 6월경 비밀결사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에 가입하여 10월부터 12월까지 전북 익산군 일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선백중은 1921년 10월 25일 김재원ㆍ김한복 등과 함께 익산군 망성면 어량리에 있는 민가에 들어가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이때 그는 김재원과 집 밖에서 망을 보았다. 집 안으로 들어간 동지들은 조선독립에 관한 격서문 등을 낭독한 후 180원을 모집하였다.
김란사(金蘭史)
· 이화학당 교사로 재직, 학생 대상 민족의식 고양
· 성경학원 설립 후 기독정신 보급 및 민족의식 고취
김란사는 평안남도 안주 사람으로, 이화학당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데 앞장 섰다. 그녀는 이화학당을 중심으로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성경학원(聖經學院)을 설립하여 기독정신 보급과 아울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녀는 제1차 세계대전 종결과 함께 국제사회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인도주의가 부상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할 것을 계획하였다.
권기옥(權基玉)
· 비밀결사대 송죽회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
·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로 보내는 일에 투신
· 중국혁명전선에서 한국인 최초 여성비행사로 복무
권기옥은 평안남도 평양 사람이다. 평양 숭의학교 졸업반으로 3·1독립운동에 참가했다가 구류, 뒤이어 임시정부의 일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후 평양청년회 여자 전도단을 조직,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상해(上海)로 탈출했다. 상해에서 임시정부에 속해 활동하다 1923년 운남육군항공학교 제1기생으로 입학, 졸업 후 공군에서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로서 복무하였다. 1943년에는 한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지복영(池復榮)
· 여군으로 광복군에 입대
· 광복군 초모위원회 위원 겸 비서로 활동
· 임시정부 선전부에 복무하면서 대적 선전방송
지복영은 서울 종로 사람이다. 일찍이 부친 지청천을 쫓아 중국으로 건너가 수학하였다. 1940년 광복군이 창설됨에 여군으로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1942년에는 광복군 초모위원회 위원 겸 비서로 활동하였으며, 1944년에는 임정 선전부 자료과와 선전과에 복무하면서 대적 선전방송을 하고 또한 원고를 작성하는 등 활동하였다. 1945년 4월에는 임시정부 회계검사원 및 조리원(助理員)에 임명되어 겸직 근무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애라(李愛羅)
· 3.1독립만세시위에 가담하여 평양경찰서에 구금
· 남편을 도와 임시정부 수집을 위한 국민대회 소집을 도움
· 애국부인회를 결성하여 모금활동 전개
이애라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애라는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결혼 후 공주 영명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1917년 평양의 정의여학교에 전근되어 근무하던 중, 3·1독립만세시위에 가담하였다가 평양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남편을 돕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온 그녀는 한남수(韓南洙)·김사국(金思國)·홍면희(洪冕熹)·이규갑(李奎甲) 등이 비밀히 연락 회합하면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국민대회를 소집하는데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연미당(延薇堂)
· 상해 청년여자교민에 대한 조사 및 상해지역 교민 단합을 위해 활동
· 한국애국부인회의 조직부장으로 반일의식 고취
한국 독립운동 중심지 룽징과 상하이에서 활동한 여성독립운동가이다. 1927년 엄항섭과 결혼하여 독립운동가 내조뿐만 아니라 여성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상해여자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임시위원으로 적극적 활동하였고, 한국애국부인회 재건에 참여하여 조직부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광복이 되어 귀국 후 내조와 가족을 돌보다 6.25전쟁 때 엄항섭이 납북되자 월북자 가족으로 오해받아 평탄치 못한 세월을 보냈다.
조복금(趙福今)
· 근우회 하동지회 조직 및 참여
· 부산에서 격문 사건에 연루되어 불구속 기소
·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에 참여
· 전북교원비밀결사 사건에 연루
조복금은 경상남도 하동 출신이다. 1928년 하동군에서 근우회 하동지회를 조직하여 1930년까지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31년 부산진 조선방직회사 직공이 되어 노동운동에 참여하다 고광한·윤달선 등이 주도한 ‘격문 사건’에 연루, 불구속기소되었다. 이후 경상북도 대구부로 옮겨서 활동하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조직인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에 참여하였다. 1933년 ‘전북교원비밀결사’ 사건에 연루되어 형사에게 체포되었고 전주로 압송되었다.
김한정(金漢貞)
· 비밀결사 ‘조선공산당 제주도야체이카’ 결성
· ‘제주도 소년운동 지도사 비밀간담회’를 열어 소년·부인·농민 문제 등을 협의
김한정은 제주 사람이다. 1925년 창립된 제주청년연합회에서 집행위원을 맡았다. 12월에는가파소년회(加波少年會)에서 무산(無産) 청소년들을 교육시키고자 신유의숙(辛酉義塾) 내 야학회(夜學會)를 결성하여 교사로 활동했다. 1931년 강창보의 제안으로 비밀결사 ‘조선공산당 제주도야체이카’를 결성했다. ‘제주도 소년운동 지도자 비밀간담회’를 열어 소년·부인·농민 문제 등을 협의했다.
최철호(崔鐵鎬)
· 조선청년전지복무단에서 선전공작의 선봉에 섬
· 화북지대원으로 활동 중 호가장전투에서 사망
최철호는 대전 사람이다. 1935년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에서 혁명활동에 참가하다가 1938년 한구에 와서 조선청년전시복무단에서 항일선전 임무에 전력하였다. 동년 10월에는 조선의용대에 가입하여 대적선전사업에 종사하였다. 1940년에는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서안으로 가서 조선의용대 서안판사처 주임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인 1941년 조선의용대는 적후방의 혁명부장대오를 건립하기 위하여 대적선전과 유격전을 진행하여 전후 수십 차례의 격전을 치렀다.
오강표(吳剛杓)
· 「청참조인제적소」라는 상소문을 지어 을사오적 토벌을 요청
·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성토하는 글을 작성하려 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쓰지 못함
오강표는 충청남도 공주군 출신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상소문을 관찰사에게 올렸으나 관찰사가 조정에 올리지 않자 아편을 구입하여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또 이토 히로부미를 성토하는 글을 쓰고자 했으나 주변 만류로 무산되자 세상일을 등지고 항상 독약을 지니고 살았다. 이후 1910년 소위 ‘한일합방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공주향교 강학루 들보에 목을 매 자결하였다.
송종익(宋鍾翊)
· 미국을 중심으로 여러 민족운동에 참여
· 흥사단 창립
· 북미실업주식회사 조직
송종익은 대구 사람이다. 1906년 유학을 목적으로 간 미국에서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민족운동에 진력하였다.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興士團)을 창립했다. 1917년 안창호와 함께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조직했으나 1927년 문을 닫고 말았다. 1919년 대한인국민회 재무로서 설립에 필요한 자금을 모집·송금하고, 1936년 분열된 북미지역 각 지방 대표자회의에 참석해 북미 대한인국민회를 재조직하는 한편, 미주 한인사회의 부흥과 항일운동, 임시정부의 재정 후원을 도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