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어탕 하면 아마도 미꾸라지를 통째로 끓여내는 ‘서울추어탕’, 미꾸라지를 갈아서 만든 ‘남원추어탕’, 민물고기가 주재료인 ‘청도추어탕’, 매운탕처럼 얼큰하게 끓여내는 ‘원주추어탕’ 등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추어탕이 인천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이었다면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해안도시인 인천에서 생선 매운탕도 아니고, 논농사를 많이 짓는 지역도 아닌 인천에서 추어탕은 다소 의외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옛날에는 추어탕이 인천지역의 이름난 향토음식이었다. 인천 추어탕의 정확한 명칭은 추어탕이 아니라 ‘추탕’이다. 요즘은 구분하지 않고 모두 추어탕으로 통하지만 원래 인천과 서울지역 등 수도권에서는 추탕이라고 하였지 추어탕이라고 호칭하지는 않았다. 지금과 같이 추어탕이라는 용어로 변하게 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 남쪽 지방에서 옮겨온 말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같은 미꾸라지 재료를 끓여내는 탕인데 굳이 추탕과 추어탕으로 구분하여 부르는지, 둘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것은 바로 추탕은 미꾸라지를 통째로 끓인 탕인 데 비해 추어탕은 미꾸라지를 갈아서 끓인 탕이라는 점에서 다른 지역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인천의 추탕은 이미 백여 년 전부터 인천의 대표적인 음식이었다. 더군다나 추탕은 상품화된 음식으로 인천의 여러 음식점에서 판매되는 인기메뉴였다. 추탕이 음식상품으로 팔릴 정도로 성황을 이루게 된 것은 인천이 개항되면서부터이다. 1883년 개항된 인천에는 일본ㆍ청나라ㆍ미국ㆍ영국 등이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仁川濟物浦各國租界章程)’을 체결하고 각국 조계지를 설정하면서, 인천은 바야흐로 동서양 문물이 조우하는 조선 최고의 선진적인 국제도시로 부상하였다. 그러한 인천 개항장에는 외부 인구가 유입되었고 물류가 증가하면서 대규모 건설과 토목공사가 시행되었다. 공사에 필요한 인부와 노동자들이 전국에서 몰려들면서 인천에는 자연스레 이들이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음식숙박업이 번창하게 되었다.
인천은 국제도시인 동시에 조선 최고의 경제도시이기도 했다. 1896년 현재의 인천광역시 중구 해안로 3가 국민은행 지점 자리에 ‘인천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가 설립되었다. 지금의 주식시장에 해당하였던 미두취인소는 쌀과 콩, 석유 등 7개 품목을 거래하고 중개하는 선물시장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미두취인소가 설립되면서 전국의 쌀이 인천으로 집하되었고, 이른바 ‘미두꾼’이라 불린 조선 팔도의 부호와 지주들이 일확천금을 노리고 모여들었다. 인원과 자본이 모이다 보니 인천항 일대에는 술집, 여관, 요릿집 등 향락산업이 성행하였다.
개항장 인천에는 이른바 ‘인천드림’을 꿈꾸고 전국에서 몰려든 근로자로부터 미두꾼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추탕을 비롯한 냉면ㆍ짜장면ㆍ해장국 등이 대중적인 식사로 판매되면서 인천의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인천 추탕은 통 미꾸라지를 쇠고기와 곱창ㆍ고사리ㆍ느타리버섯ㆍ토란대ㆍ파ㆍ두부 등과 함께 넣고 갖은 양념을 하여 푹 끓여 낸 음식이었다. 그 맛이 매우 뛰어나서 인천항의 축항공사에 동원되었던 인부들이 가장 애호하는 음식이었다고 한다.
개항 이후 인천의 호황은 미두취인소가 1932년 경성주식현물거래시장과 합병되어 서울로 이전하기까지 유지되었다. 이후 인천의 미두취인소는 조선거래소 인천지점으로 유지되다가 1937년 중일전쟁 개전 이후 전시체제로 전환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인천지역의 경기도 가라앉았다. 인천 추탕도 1940년대 전시총동원체제와 어수선한 해방정국,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사라졌다.
인천과 수원을 연결하는 42번국도의 인천광역시와 시흥시 경계 도로변의 인천광역시 남동구 운연동 40-15 일대에는 ‘연락골 추어탕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연락골은 추어탕마을이 위치한 동네의 옛날 명칭이다. 이곳은 인근에서 가장 높은 산인 소래산(蘇萊山 해발 299미터) 자락의 구릉에 위치하여 옛날부터 논농사를 많이 짓던 지역이었다. 주변에 논이 많고 미꾸라지가 많아 마을사람들이 모여 추어탕을 끓여 나누어 먹었다. 마을의 추어탕 맛은 인근 지역까지 소문이 나면서 식당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에 식당 세 곳이 영업을 개시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는 9개소의 전통 추어탕 전문점이 모여서 추어탕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연락골 추어탕마을의 추어탕은 삶은 미꾸라지를 갈아서 얼큰한 국물에 넣고 끓여내는 형태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국물에 된장을 주로 사용하지만, 이곳 추어탕은 매콤한 고추장을 넣은 국물에 수제비를 넣어 먹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백여 년 전 전국 팔도에서 온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화려한 추탕과는 많이 다르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연락골 추어탕은 한때 그 명맥이 단절된 것으로 알려진 인천 추탕이 인천의 대표 음식이었다는 기억을 소환시켜주는 음식으로 손색이 없다. 또한 현지 주민들의 노력만으로 향토음식으로 정착시켰다는 점에서 그 역사성과 문화적 가치는 인정받기에 충분할 것이다.
경부선 청도역(淸道驛)에서 내리면 역 주변에 추어탕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밀집해 있어 단번에 추어탕이 경상북도 청도군을 대표하는 음식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청도 추어탕의 역사는 1963년으로부터 비롯된다. 청도역 인근에서 의성식당을 운영하는 김말두 할머니가 추어탕을 팔기 시작한 이래 추어탕 집이 늘기 시작해 지금은 역 주변에 추어탕 거리가 형성되었다.
청도 추어탕은 미꾸라지와 민물고기를 섞어서 맑게 끓여내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산 좋고 물이 맑아 지명조차 맑을 청(淸)자를 쓰는 청도군의 청도천과 동창천, 운문천에는 미꾸라지보다 민물고기가 더 풍부하다. 미꾸라지는 주로 논두렁이나 도랑 및 수로 등 진흙 바닥이 있고 물의 흐름이 적은 곳에서 서식하기 때문에 흐르는 물에는 아주 적다. 상대적으로 미꾸라지가 적은 청도에서는 청도의 청정하천에서 많이 잡히는 꺽지와 메기, 동사리, 빠가사리 등 민물고기를 섞어 추어탕을 끓여낸 것이다.
이렇게 민물고기를 넣어 끓인 추어탕은 타 지역의 추어탕에 비해 국물이 맑고 시원해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저절로 입소문이 퍼지면서 청도 특유의 ‘민물고기 추어탕’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미꾸라지를 통째로 끓인 서울식, 매운탕에 가까운 원주식, 미꾸라지를 뼈까지 갈아서 끓여내는 남원식 추어탕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미꾸라지 식용의 역사는 비교적 오래되었다. 미꾸라지를 언급한 최초의 기록은 1123년(인종1) 북송(北宋)의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인데, “고려 풍속에 양과 돼지는 왕궁이나 귀인이 아니면 먹지 못하며, 가난한 백성은 해산물을 많이 먹는다”라고 하여 해산물의 하나로 미꾸라지를 기록하고 있다.
추어탕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문헌은 19세기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이다. ‘추두부탕(鰍豆腐湯)’이란 이름으로 조리법과 함께 “이 탕은 서울에서 성균관에 속한 반인(泮人)들 사이에 성행하는 음식으로 독특한 맛을 즐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마도 19세기 중엽의 추어탕은 중하류 계층의 음식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솥에 물을 붓고 두부 몇 모와 미꾸라지를 넣어 불을 때면 미꾸라지는 뜨거워서 두부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모습이 점잖은 양반계층으로서는 꺼리는 음식이었을 것이다. 그런 탓인지 글자를 아는 양반이나 반가의 부인들이 주로 기록한 전통 조리서에는 미꾸라지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미꾸라지의 효능에 대해서는 『본초강목(本草綱目)』에 “배를 따뜻하게 하고 원기를 돋우어 준다. 술에 취한 것을 깨도록 하며 소갈을 풀어준다”라고 전한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미꾸라지는 성질이 따듯하며 단맛이 나고 독이 없다. 속을 보하며 설사를 그치게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미꾸라지의 한자어 추(鰍)는 ‘고기 魚’와 ‘가을 秋’가 합성된 글자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미꾸라지는 음력 7월부터 8월까지가 제철로, 이때 먹는 추어탕은 여름철 무더위와 고된 농사일에 지친 사람들에게 풍부한 단백질과 무기질, 비타민을 공급원이 되었을 것이다.
미꾸라지를 넣고 끓이지 않는데도 추어탕이라고 하는 것에 의아심이 든다면 경상도 지방에서 '추어탕'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쓰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상도에서는 미꾸라지 아닌 다른 생선을 넣고 끓인 탕도 추어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미꾸라지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의성식당의 김말두 할머니도 그의 고향인 경상북도 의성군에서는 민물 잡어탕을 추어탕으로 불렀다고 한다. 부산에서는 ‘고등어 추어탕’이라는 향토 음식이 전하는데, 고등어를 추어탕의 조리법으로 끓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그러므로 민물고기만을 사용하든 미꾸라지와 섞어서 사용하든 모두 청도 '추어탕'이다.
추어탕은 가을바람이 불 무렵 무더위에 지친 서민들의 기를 보충해주고 영양을 공급하던 보양식이었다. 그 종류도 지역별로 다양하여 사골국물에 미꾸라지를 통째로 끓여내어 식감을 살린 서울식 추어탕, 고추장을 풀어 넣고 매운탕처럼 얼큰하게 끓여내는 강원도 지방의 원주추어탕, 미꾸라지와 민물고기를 섞어 맑고 시원하게 끓여내는 경상도 지방의 청도추어탕 등이 있다. 그런데 추어탕하면 미꾸라지를 통째로 갈아 된장에 버무린 시래기를 넣고 들깻가루를 풀어 구수하고 걸쭉하고 끓여낸 전라도의 남원추어탕이야말로 단연코 우리나라 추어탕의 대표음식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전라북도 남원시에서는 예전부터 가을걷이를 마치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겨울잠에 들기 위해 논두렁 속에 들어간 미꾸라지를 잡아 국을 끓여 동네사람들이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기나긴 겨울잠을 준비하기 위해 영양분을 비축한 가을 미꾸라지는 살이 통통하게 올라 무더운 여름과 힘겨운 농사에 지친 농민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보양식품이었다. 미꾸라지의 한자어인 추(鰍)가 ‘물고기 魚’자와 ‘가을 秋’자가 합쳐진 글자인데서도 알 수 있듯이 추어탕은 가을에 제격인 음식이었다. 예전에는 가을이 깊어져서 첫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 무렵이 추어탕의 제철이었다고 한다.
미꾸라지의 효능에 대해서는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배를 따뜻하게 하고 원기를 돋우어 준다. 술에 취한 것을 깨도록 하며 소갈을 풀어준다”고 하였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미꾸라지는 성질이 따뜻하고 맛은 달며 독이 없다. 속을 보해주고 설사를 그치게 한다. 몸이 짧고 작으며 늘 진흙 속에 사는데 추어라 부르기도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규준(李奎晙, 1855~1923)이 1908년 간행한 『의감중마(醫鑑重磨)』에는 “추어는 단맛으로 성질이 평하다. 위장의 활동을 도와 식욕을 돋우고 비장을 건강하게 하고 오장을 통하게 한다. 어떤 약이든 함께 먹을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옛 의서들에 기록된 미꾸라지의 효능을 종합하면 숙취해소와 당뇨예방, 원기회복, 소화기능과 면역기능을 활성화하는데 좋은 식품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미꾸라지를 식용한 역사는 비교적 오래 되었다. 현전하는 고문헌 가운데 미꾸라지를 언급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123년(인종 1)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이 저술한 『고려도경(高麗圖經)』이다. “고려 풍속에 양과 돼지는 왕공이나 귀인이 아니면 먹지 못하며, 가난한 백성은 해산물을 많이 먹는다”고 언급하면서, 해산물 중에 미꾸라지[鰌]를 언급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고려시대에 미꾸라지가 서민들의 식품으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추어탕을 언급한 문헌이 등장한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이 19세기 초에 저술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추두부탕(鰍豆腐湯)’이란 음식명으로 조리법이 소개되어 있다. 이규경은 “이 탕은 서울에서 성균관에 속한 반인(泮人)들 사이에 성행하는 음식으로 독특한 맛을 즐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마도 19세기의 추어탕은 힘들고 고된 육체노동을 하는 노비계층들이 즐겨먹는 음식이었던 것 같다.
한편 “솥에 물을 붓고 두부 몇 모와 미꾸라지를 넣어 불을 때면 미꾸라지가 뜨거워서 두부 속으로 기어들어 간다”고 묘사한 추두부탕의 조리법은 점잖은 양반계층의 시선에서는 징그럽기도 하고 먹기에도 꺼려지는 별로 달갑지 않은 음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주로 양반계층에서 저술했던 옛 조리서에는 미꾸라지를 이용한 식품에 대한 기록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던 추어탕이 근대에 들어서는 인기 있는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던 모양이다. 1927년 10월 1일에 발간된 잡지 『별건곤(別乾坤)』 9호에 실린 「추탕집 머슴으로 이틀 동안의 더부살이」라는 기사에는 광고를 하지 않고 슬그머니 개업한 추어탕집에 첫날부터 손님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는데, 중류 이상의 인사들까지 하류계층 사람들과 섞여 먹고 있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근대에는 추어탕이 계층을 가리지 않고 먹는 대중화된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라북도 남원시가 추어탕의 명소로 알려지게 된 것은 고(故) 서삼례 씨(2008년 작고)가 1971년 전라북도 남원시 천거동 160-206에 새집추어탕이라는 상호를 걸고 영업을 시작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본래는 1959년에 광한루원 근처에 포장마차를 열고 은어회와 은어구이를 팔다가 1970년대 초부터 현재의 위치에서 추어탕을 팔기 시작하면서 남원추어탕 식당의 원조가 되었다고 한다. 새집추어탕이 위치한 남원시 천거동 160번지 일대에는 추어탕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추어탕뿐만 아니라 미꾸라지튀김, 추어숙회 등 다양한 미꾸라지 음식을 선보이고 있다.
미꾸라지, 물, 시래기, 얼갈이배추, 들깻가루, 된장, 다진 마늘, 고추, 산초가루, 소금, 청장, 물
조리과정청도군은 경상북도 남단 중앙에 자리하고 있으며, 민속놀이인 소싸움으로 상징되는 청도에는 청도시장이 있다. 청도시장은 읍소재지에 위치하고, 도보로 5분 거리에 청도역과 청도 공영버스 정류장 등이 있어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곳에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청도시장은 179개의 점포를 갖춘 상설시장이며, 매월 4일과 9일에 오일장도 열린다.
청도의 상권은 크게 청도시장, 풍각시장, 동곡시장으로 나뉘는데, 이중 중심시장은 단연 청도시장이다. 청도시장은 1912년에 개설된 시장으로 1991년에 장옥을 정비하였고, 2000년대 들어 노후화된 시설을 현대화하였다. 장날이 되면 일상생활에 필요한 각종 생활용품 및 인근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판매하고 있다. 특히 청도에서 생산된 청도반시, 복숭아, 미나리 등을 구매하기 위해 부산과 대구 등지에서 중간 상인들도 모여든다. 이때 중간 상인들이 모였던 시장은 ‘반짝시장’이라고 불리는 번개시장이다. 원래 반짝시장은 1991년 장옥을 정비하기 위해 잠시 열렸던 시장이었지만 현재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소싸움은 한가위 때 행해졌던 놀이로 일제강점기에 폐지되었다가 1970년대에 한국의 전통 민속놀이로 자리를 잡아갔다. 청도소싸움은 1990년 ‘영남민속 투우대회’를 시작으로 매년 삼일절 기념행로 자계서원(紫溪書院) 앞 서원천변에서 개최되었다. 이후 해마다 규모가 커지면서 1999년부터 ‘청도소싸움축제’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다. 축제에는 체급별 소싸움, 외국 소와의 친선경기, 로데오경기 등의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며, 매년 4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청도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구매하는 품목은 지역의 대표 특산물인 청도반시이다. 청도반시는 생긴 모양이 쟁반처럼 납작하다고 해서 반시(盤柿)라 불리며, 씨 없는 감으로 먹기가 편하다. 씨가 없다 보니 가공이 쉬워 감말랭이, 반건시, 아이스홍시, 와인, 한과 등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또한, 매년 10월 청도에서는 ‘청도반시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청도 지역은 미꾸라지를 넣고 끊인 일반적인 추어탕과 달리 미꾸라지를 포함한 각종 민물고기를 함께 넣어 끓인 청도추어탕이 유명하다. 1963년 김말두 할머니가 청도역 인근에 민물고기로 만든 추어탕 식당을 개업하면서 시작되었으며, 현재 청도시장 인근에는 20여 곳의 추어탕 전문 식당들이 있다. 청도군은 청도추어탕을 지역의 대표하는 먹거리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2010년부터 추어탕 거리를 조성하고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