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국민적인 고기가 된 닭고기는 60년대 전까지만 하더라도 귀한 음식이었다. 사위가 오면 잡아 내오고는 했던 씨암탉은 달걀을 얻기 위해 기르던, 집안의 가장 귀한 자원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씨암탉을 잡는 것은 백년손님인 사위에게 최고의 대접을 한다는 의미로 통했다. 그런데 60년대 중반, 미국으로부터 육계 품종의 닭을 들여오면서 한국의 닭 문화가 바뀌기 시작했다.
육계 품종이란 고기만을 얻기 위해 품종이 개량된 닭으로써, 대표적으로 브로일러(Broiler: 구이용 닭이라는 뜻)라는 종이 있는데, 이 종은 부화한 지 한 달여 만에 성체의 덩치를 갖추기 시작하며 무게가 1.3~1.5kg이나 나갔다. 빠르게 성장하는 닭 덕분에 70년대와 80년대에 양계산업이 활성화되고, 공장 노동자들을 비롯해 각종 산업 일꾼들의 식탁에 닭고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경공업 도시였던 대구에서는 70년대 닭똥집 튀김과 닭 곱창볶음과 같은 별미가 등장하였고, 수원에서는 통닭이, 인천에서는 닭강정이 등장하였다. 닭갈비의 대명사로 통하는 춘천닭갈비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저마다 산업 형태와 지역의 입맛에 따라 음식문화를 발전시킨 것이다. 당시 가장 어둡고 깊은 곳에서 일하던 광부들의 입맛도 새로운 닭고기 요리를 탄생시켰다. 칼칼한 국물로 목에 낀 먼지를 씻어 내리는 음식, 태백 물닭갈비의 탄생이 강원도 태백시의 탄광촌에서 시작된 것이다.
태백의 탄광은 당시 산업의 에너지를 담당하고 있던 석탄 채굴의 중심지였다. 어두컴컴하고 머리에 천정이 닿을까 말까 한 좁은 갱도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가면서 암석을 깨고 석탄을 채굴했던 광부들은 흙먼지가루와 석탄가루를 뒤집어쓰면서 밤과 낮의 구분이 되지 않는 곳에서 일했다. 수백 미터의 길이를 땅밑으로 파고 들어가면서 탄광 붕괴의 위험과 땅속에 묻혀있던 유독가스와의 전쟁을 한바탕 치르고 나오면 당연히 스트레스를 해소할 만한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갱도 안에서는 밥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탄광 밖으로 나오면 영양 보충에도 좋고 맛도 좋은 음식을 찾기 마련이었는데, 당시 유행하기 시작했던 닭갈비를 태백에 맞게 손보기 시작했다. 지친 피로를 풀기 위해 꼭 필요했던 소주는 식사 자리에 빠지지 않았는데, 술을 먹으려면 국물 요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육수를 많이 부어 전골처럼 만들어냈다. 칼칼한 국물에 닭고기 한 점 먹으면 갱도에서 쌓인 먼지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 들어 시원했다고 한다.
얼핏 보면 닭볶음탕과 비슷한 모양새지만, 손질한 닭고기를 양념 국물에 넣고 자작하게 끓여내는 닭볶음탕하고는 다른 요리이다. 태백 물닭갈비는 춘천의 양념 닭갈비처럼 미리 양념에 재워두었다가 육수를 부어 끓여내는 방식이기 때문에 천천히 끓이다 보면 양념이 국물에 진하게 배어 나온다. 조리 방식이 다르므로 즐기는 방법이 다르다.
일단 약간 심심하면서도 시원한 국물과 채소를 먼저 건져 먹다가 닭갈비 양념이 국물에 충분히 우려지면 고기를 즐기는 것이 순서다. 태백에서 물닭갈비를 시키면 위에 초록색의 채소를 수북하게 쌓아서 내어 주는데, 이것이 바로 비법이라면 비법. 싱그럽고 시원한 맛을 내는 냉이는 닭고기 잡내를 잡아줄 뿐만 아니라, 개운한 맛을 더해주어 숙취를 풀어주는 효과도 있다.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국물과 닭고기를 다 먹을 즈음이면 국물이 졸아들어 걸쭉해진다. 바로 이때가 밥이 등장하는 타이밍! 전골냄비에 밥을 볶아 먹음으로써 화룡점정을 찍는다.
경공업 제품 수출을 경제의 성장 동력으로 삼았던 1970년대는 우리나라 섬유산업의 호황기였다. 서울의 동대문과 남대문 시장에서 섬유와 의류가 불티나게 거래되었고, 섬유 공단이 집중되어있던 대구는 전국 직물 판매액의 52%를 거래할 정도로 경공업의 메카였다. 섬유산업의 호황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자 자연스레 도시가 성장하고 물류가 집중되기 시작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물류가 모이기 마련이고, 물류가 모이는 곳에는 시장이 활성화되기 마련이다. 대구에서 대표적인 시장을 꼽자면 서문시장과 칠성시장을 꼽을 수 있는데, 서문시장이 의류 중심이라면 칠성시장은 농·수산물과 청과 등 식자재를 중심으로 취급하는 시장으로 발전해 왔다. 본래 칠성시장은 칠성교 옆의 시장 한 구역만을 가리켰었지만, 오늘날에는 대구 1호선 칠성시장역 부근의 여러 시장을 통칭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아직 큰 화재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덕에 시장의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칠성시장은 구역별로 취급하는 물품이 다른데, 닭고기와 닭 부산물을 파는 골목도 있다. 술안주 별미로 취급되는 닭똥집(닭근위, 닭모래집) 부위는 물론이고 염통이나 닭발, 닭곱창까지 판매한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상가들 앞에 서서 상인과 손님들이 흥정하는 모습을 보면 옛 닭전골목의 향수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닭전골목을 둘러보고 조금 내려오다 보면 시장 내 청과류를 담당하는 대구 청과시장의 맞은편에서 아주 독특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대구지역의 별미로 꼽히는 닭곱창볶음이 그 주인공이다. 대구에는 안지랑 곱창골목이 있어 곱창 마니아들의 성지로도 꼽히는데, 우리가 오늘날 흔히 먹는 소곱창이나 돼지곱창이 아닌 닭곱창으로 만든 볶음요리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칠성시장 건너편에 자리 잡은 닭곱창 요릿집들이다.
1970년대 당시에는 산업의 중심축이었던 방직노동은 몰론이고 도시가 발전하면서 세워지는 건물과 도로망 공사에 힘을 쏟았던 노동자들이 많았다. 이들이 영양보충도 하고 고된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값도 싸고 맛도 좋은 적당한 안줏거리가 필요했다. 예전에는 닭고기가 비싼 가격이었기 때문에 쉽게 먹지 못했지만, 닭을 잡고 나서 나오는 내장과 부산물들은 상당히 저렴했다. 동물의 내장 특성상 잡내를 잡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요리재료로 잘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솜씨깨나 한다는 ‘대구 아지매’들이 손을 걷어붙이고 나왔다. 닭곱창과 내장을 일일이 깨끗하게 손질하고, 고추장 양념을 기반으로 매콤하게 볶아내어 잡내가 적고 식감도 쫄깃한 대구식 닭곱창볶음을 개발한 것이다.
식당을 골라 자리를 잡아 닭곱창볶음을 하나 주문하면 원하는 양과 매운맛의 강도를 물어본다. 술안주 삼아 먹는 사람들은 양념을 강하게 원하고,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본 맛으로 시킨다. 기본맛은 일반적인 제육볶음과 비슷한 맵기다. 음식이 나오면 곱창뿐만 아니라 난생처음 보는 다양한 닭 부속 부위를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사실 닭곱창볶음에는 닭곱창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곱창 끄트머리와 닭 알집, 염통, 근위 등 다양한 내장이 들어간다.
조류인플루엔자의 위기가 몇 번 닥치자 정부에서 닭곱창의 사용을 부분적으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닭곱창이 줄어든 만큼 다른 특수부위를 많이 사용하기에 젓가락질마다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닭곱창에 빠지지 않는 것이 상추와 깻잎쌈인데, 그냥 먹었을 때보다 쌈을 싸서 마늘 한 쪽을 올려 먹으면 그 맛이 배가 된다. 닭곱창의 고소한 맛과 마늘의 알싸한 맛, 그리고 상추의 아삭함이 3박자를 이룬다. 여기에 밥 한 숟갈을 얹어 먹으면 “감동의 쓰나미”가 밀려온다. 저렴한 가격에 이만한 술안주가 또 있을까.
닭곱창은 처음 보는 사람을 대접하는 음식이라기보다는 오랜 친구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삶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누기에 좋은 음식이다. 30년, 40년 동안 가게를 지켜오며 수많은 사람의 애환을 달랬던 장소인 만큼, 겉치렐랑 다 집어던지고 솔직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추억의 음식이 바로 대구의 닭곱창볶음이다. 오늘날까지도 그 추억을 잊지 못해 포장해가는 어르신들이 종종 보인다. 포장하면 닭곱창이 담긴 비닐봉지를 신문지로 감싸 내어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음식의 온기를 잃지 않도록 하는 배려가 오랜 세월 동안 이어진 사람의 온기와 오버랩된다.
시장은 물류와 사람이 모이는 곳이고, 그만큼의 수많은 입맛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농수산물이 모이는 장소이다 보니 다양한 재료를 수급하기가 쉽고, 많은 사람이 오가는 장소라서 새로운 맛에 도전해보기에도 적합하다. 보통 시장의 음식은 그 지역의 역사를 담고 있기 마련이다. 오랜 세월 동안 경상도 감영 소재지로서 영남지방의 중추를 담당해온 대구는 60년대와 70년대 경공업으로 급격히 성장하여 본격적인 도시화를 이룩해낸 지역이다. 오랜 역사와 물류 중심지라는 지위에 걸맞게 전국적으로도 이름난 시장들이 포진해있는데, 그중 전국에서 유일하게 ‘닭똥집 골목’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인기와 지명도를 확보한 시장이 있다. 바로 대구 평화시장이다.
서울과 부산의 평화시장처럼, 시장의 이름에 ‘평화’가 붙어 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힘든 시기를 극복한 상인들이 앞으로는 평화롭게 살고 장사할 수 있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있다. 그 염원이 통했을까, 이제는 닭똥집을 비롯하여 막창, 뭉티기육회, 돼지국밥 등 각종 음식을 파는 먹거리 주제 거리가 조성되어 관광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닭똥집은 속어이며, 정식 명칭은 ‘닭 모래주머니’ 혹은 ‘닭 근위’라고 불린다. 이 부위는 닭의 대표적인 부속 부위로서, 치아가 없는 닭이 음식을 잘게 으깨는 소화기관이다. 대구는 가축의 부산물로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내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도시다. 안지랑 곱창골목부터 시작해서 닭곱창볶음, 닭똥집 골목까지 대구에서 반드시 맛봐야 한다고 소문난 음식들은 특수부위를 활용했다. 사실 닭똥집은 전국 어디에서나 한두 번씩 먹어보았음직한 대표적인 국민 술안주다. 대구와 타지역의 차이점은 조리방법에 있다.
대개 술집에서 내오는 것은 닭똥집 볶음이라 하여 마늘과 후추와 함께 볶아낸 요리이지만, 대구 닭똥집 골목에서 파는 것은 닭똥집 튀김이라 하여 후라이드 치킨의 모양을 하고 있다. 닭똥집의 역사는 1972년, 인력시장이 위치하던 평화시장에서 시작된다. 당시 경공업 호황을 맞아 도시가 성장하면서 방직노동자, 건설노동자 등 수많은 노동자가 필요했고 인력시장이 활황이었다. 인력시장에 나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싸고 맛있는 술안주감을 개발하고자 한 고민은 닭똥집 요리라는 새로운 음식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닭의 모래집을 먹기 좋게 잘게 손질한 후 밀가루에 버무려 튀겨내면 닭똥집 튀김 완성이 완성된다. 굉장히 간단한 듯싶지만, 닭의 내장 부위인 만큼 잡내를 잡아내는 기술과 기름의 튀김 온도를 얼마나 잘 맞추는지에 따라 음식의 승패가 갈린다.
닭똥집 튀김의 실력은 튀길 때 기름의 온도를 맞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너무 낮으면 무르고, 너무 높으면 껍질이 타버리거든요.
평화시장 내 닭똥집 골목 한점포를 담당하고 있는 강승진씨는 닭똥집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튀김 기름 사용의 기술이라고 강조한다. 편으로 썬 고구마와 닭똥집을 튀겨 낸 다음, 고추를 채 썰어 고명으로 올려내는 것이 닭똥집 골목의 주요리법이다. 메뉴에 따라 양념을 바르는데, 양념 후라이드 치킨과 비슷한 맛을 내는 자체제작 특수양념을 버무려 낸다. 모듬 메뉴를 시키면 양념되지 않은 후라이드와 간장마늘양념, 매운 양념 닭똥집 튀김 등의 3가지 맛을 볼 수 있게 나온다. 닭똥집 특유의 오도독 거리는 식감과 튀김이 만나 씹는 맛이 좋은 술안주는 술을 부르기 마련. 최근에는 대구광역시와 함께 닭똥집 명물 거리 치맥 축제까지 열 정도로 지역 문화관광의 중요한 자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치킨 종주국이라고 하는 미국보다 다양한 맛의 치킨을 파는 치킨공화국,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치킨과 관련된 신조어만 해도 수십가지다. 치킨과 하느님의 합성어인 ‘치느님’, 치킨과 맥주를 함께먹는 새로운 문화인 ‘치맥’, 치킨의 맛을 감별하는 ‘치믈리에’ 등 우리의 치킨사랑이 느껴지는 단어들이속속 생겨나고 있다. 우리나라에 있는 치킨집 점포의 개수가 전 세계 맥도날드 매장의 수를 뛰어넘었다고 한다. 대단하다.
그렇다면 한 가지 큰 궁금증이 생긴다. “이 치킨의 역사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우리나라 치킨의 원조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주한미군 유래설과 전통시장 유래설이다.
우선, 주한미군이 추수감사절에 칠면조 대신 닭을 튀겨먹은 것이 오늘날 치킨요리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혹은 미국 남부의 프라이드치킨 문화가 미군과 함께 들어와서 사람들이 즐겨 먹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두 번째로는, 식용유가 값싸게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전통시장을 중심으로 가마솥에 닭을 튀겨내는 ‘시장 통닭’이 국내 치킨 요리의 기원이 되었다는 설이다.
그런데 음식이라는 것은 다양한 문화적 요인과 경제적 상황이 총체적으로 녹아드는 곳이다. 주한미군이 치킨을 국내에서 처음 소개했다고 한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전 처음 보는 기름진 닭튀김을 좋아라했을까? 또한, 전통시장에서 닭을 튀겨 팔아보자는 생각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졌을 리도 없다. 1970년대 이전에는 식용유가 굉장히 비쌌기 때문에 닭을 튀긴답시고 가마솥 가득 식용유를 부어 사용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최초의 치킨은 눈썰미 좋은 누군가가 이 두 아이디어를 합쳐본 것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통시장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시장의 음식이 맛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만큼 다양한 창의적인 생각들도 모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바로 이 기발한 발상이 수원 팔달문의 시장 부근에서 시작되었다. 수원 팔달문 동쪽에는 팔달문시장, 시민상가시장, 수원영동시장 등 수원의 내로라하는 시장들이 몰려있다. 이들 시장에서 북쪽으로 발걸음을 조금만 옮기면, 전국적으로 유명한 거리에 진입하게 된다. 진미통닭, 용성통닭, 남문통닭, 매향통닭, 중앙치킨타운 등 지급까지 수십년 통닭의 맛을 지키며 수원 통닭거리의 명성을 만든 일등공신들의 간판이 보이기시작하면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바로 수원 통닭거리다.
어린 시절 아버지 월급날이면 오른쪽 손에는 서류가방이, 왼쪽 손에는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 기름기가 배어 나오는 갈색 종이봉투와 ‘통닭’이라고 적혀있는 투명한 치킨무 봉지가 있었는데, 이것만 보면 환호성을 지르곤 했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서일까, 지금도 통닭을 떠올리면 복고적인 향수가 피어오른다. 그래서 다시 수원 통닭거리를 찾아간다.
하얀 밀가루 반죽에 닭을 통째로 풍덩 담갔다가 기름이 부글거리는 가마솥 안에 넣으면, 지글지글거리는 맛있는 소리와 함께 닭이 노란 튀김옷을 입고 나온다. 가위로 숭덩숭덩 잘라내면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데, 한입 베어 물고 치킨무를 재빨리 입에 넣으면 그 맛이 기가 막히다.
기름으로 가득 찬 커다란 가마솥에 밀가루 반죽을 입은 닭고기 덩어리들을 한 조각씩 밀어 넣는다. 이렇게 한번 튀겨진 녀석들은 체에 밭쳐 기름을 털고 살짝 식혀준다. 열기가 어느 정도 내리면 다시 옆에 있는 또 다른 가마솥으로 풍덩. 이 두 번의 과정은 튀김을 더욱 바삭하게 해주기 위한 비법이다. 그 다음에는 준비된 양념장에 넣고 간이 충분히 밸 때까지 이리저리 볶아준다. 인천 신포국제시장의 명물, ‘신포닭강정’의 조리과정이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치킨은 오늘날 치킨과 하느님의 합성어인 이른바 ‘치느님 열풍’으로까지 확산되었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근래엔 우리나라의 치킨집 개수가 전 세계 맥도날드 매장의 수를 뛰어넘었다고 한다. 큰 틀에서 생각해보면 닭을 튀겨 양념에 조려내는 닭강정 또한 일종의 양념치킨이다.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인 ‘신포닭강정’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1883년, 인천이 개항되면서 일본인 상인들이 오가며 전국 각지의 물자들이 인천에 모이기 시작했다. 1903년에는 신포시장을 ‘닭전거리’라고 불렀는데, 닭과 달걀을 비롯해 꿩이나 오리 등을 팔던 곳이었다. 사람이 모이자 시장이 크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해방 후에도 미군정에 의해 신포시장은 식품거래시장으로 지정됨으로써 특히 식품의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시장의 특성에 맞게 여러 음식이 개발되었다.
당시는 우리나라에 치킨 역사가 태동하고 있던 시기였다. 치킨이나 닭강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 닭을 기름이 가득 담겨진 솥에 튀겨 내어야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저렴하게 사용할 수 있는 대량의 식용유가 필요했다. 비교적 싼 값에 대량생산되는 국내 식용유의 역사는 1969년 동방유량(현 사조해표) 공장의 가동을 그 기점으로 꼽는다. 이 시기를 기준으로 식용유의 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해지면서 치킨이라는 음식이 등장한다.
국내 최초의 치킨이 닭을 통째로 튀겨내는 통닭이었다면, 이를 조각조각 내어 먹기 좋게 튀겨낸 것이 신포시장의 닭강정이다. 잘 만든 신포닭강정의 특징은 식어도 바삭한 식감을 낸다는 것이다. 강정이라는 이름답게 물엿이 많이 들어간 양념을 사용해서 볶아냈기 때문에, 물엿이 굳으면서 바삭하고 쫀득한 맛을 낸다. 그렇기 때문에 식사라기보다는 간식거리의 느낌이 더 많이 난다. 한입 먹고 옆 사람에게 물어보자. “이것은 치킨인가 과자인가?”
닭은 인류와 오랫동안 함께 해온 가축이며, 흥미롭게도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의미를 가진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프랑스, 포르투갈, 이탈리아 여행을 다니면 ‘어둠을 물리치고 새벽을 알리는 전령’으로서의 닭의 이미지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동양의 경우도 비슷하다. 아침을 알리는 닭은 근면성실과 부(富)를 뜻하고 귀신과 어둠을 물리치는 영험 있는 가축이었기 때문이다. 세계 곳곳에서 닭과 관련된 속담이나 상징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닭이 오랜 시간 인류가 곁에 두고 기른 가축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동서양의 닭요리를 따라가다 보면, 각지의 음식 민속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창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깐 질문!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흔하게 먹는 고기가 무엇일까? 세계 3대 육류를 꼽을 때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를 꼽는다. 인도인들은 소를 먹지 않고, 무슬림들은 돼지를 먹지 않는다. 하지만 닭고기를 금지하는 나라는 없다. 그렇기에 닭고기가 영예의 1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런 닭고기의 가장 간편하고 보편적인 조리법이 바로 닭볶음탕이다. 닭의 털을 뽑고 손질하여 먹기 좋게 토막 낸 후, 갖은 야채와 양념을 넣어 함께 끓여내면 끝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나라에서 닭볶음탕이라고 하는 것이 유럽식으로 명명하면 치킨 스튜(Chicken Stew)와 비슷하다. 물을 흥건하게 하느냐 졸이느냐의 차이정도는 있겠지만, 닭고기를 야채와 함께 끓여낸다는 면에서는 대개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먹는 닭볶음탕과 가장 비주얼이 유사해 보이는 것을 꼽자면 토마토소스를 넣어 만든 이탈리아의 카치아토레(Cacciatore)를 들 수 있겠다. 고춧가루와 간장 대신 토마토소스를 넣으면 된다. 이탈리아인이 가장 사랑하는 토마토가 들어가면 “카치아토레”, 그리고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고춧가루가 들어가면 “닭볶음탕”이 된다. 쉽게 말해, 둘의 차이는 양념(소스)인 셈이다.
한국인의 밥상에 등장하는 닭볶음탕은 한국적인 매운맛이라고 할 수 있는 ‘달짝지근’ 한 매운맛이 특징이다. 닭을 볶아 만드는 탕 요리가 오래전부터 있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매콤달콤한 맛을 내는 닭볶음탕을 언제부터 만들었는지 그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거치며 매운맛을 선호하기 시작하고, 이것이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성장한 양계산업과 맞물리면서 가장 쉽게 만들고 싸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닭볶음탕이 등장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사실 닭볶음탕은 우리나라에서 닭도리탕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닭볶음탕이라고 하면 이름에 조리법이 그대로 녹아있어서 무언가 임팩트가 없지만, 닭도리탕이라고 하면 특별한 음식처럼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닭도리탕’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털어내야 할 일제의 잔재다. 닭을 일본어로 「도리」라고 한다. 그러니까 닭도리탕은 닭닭탕이라는 웃지 못할 조어(造語)다.
1992년 문화부에서는 ‘식생활 관련용어 순화안’을 확정해 발표했고, 우리말로 순화하여 부르도록 권장하고 있다. 이름은 부를수록 익숙해진다. 사람의 이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의 이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직까지 닭도리탕이 닭볶음탕보다 입에 붙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가 닭볶음탕이라고 많이 불러주지 않은 탓일테다. 매운맛의 나라 대한민국, 그리고 그 대표주자로서의 닭볶음탕. 그 이름을 식탁에서 자주 불러주도록 하자.
바다의 계절이 되면 들려오는 버스커버스커의 노래 <여수 밤바다>의 주인공 여수는 낭만적인 도시로 발돋움하기 이전에는 여천 산업단지, 항만, 공항 등 전남 동부권의 종주 도시로 기능해왔다. 산업화의 심장인 공단을 중심으로 인구집중이 이루어지다 보니 먹을 입이 많았다. 아무리 아름답고 풍요로운 바다가 있지만 해산물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인 만큼, 돼지나 닭, 소 등을 사육하며 육류를 보충해왔다. 특히 공단 주변에는 ‘노동자의 고기’로 잘 알려진 닭고기에 대한 수요가 늘어 닭고기집이 성황이었다. 비교적 값이 싸고 맛이 좋은 닭고기는 기분 좋게 식사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인기 메뉴였기 때문이다. 특히 닭을 많이 사육하던 여수 구봉산 일대에는 닭요리 집이 많았는데, 어부들과 산업 공단 인력이 닭요리를 먹기 위해 줄지어 올라가는 줄이 보였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이러한 인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2010년도까지만 해도 구봉산 일대에 닭을 직접 길러 요리를 내오는 닭요리 전문점이 많았으나, 가축분뇨가 주변의 하천과 바다의 수질오염을 유발한다고 해서 2012년 말에 가축사육 제한 조례가 제정되었다. 재개발이 진행됨에 따라 축사가 사라지고 여수의 닭요리집은 여수의 주요 관광지역 근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는 오늘에 이르러서는 소수의 닭요릿집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여수에서 토종닭정식을 시키면 갓 잡은 닭의 모든 것이 나온다. 닭 육회, 볶음탕, 백숙, 숯불구이까지 다양한 요리가 나오는데, 요리집마다 구성이 다르고 주력 메뉴가 다르니 자신의 음식 취향대로 골라서 방문하면 된다. 대체적으로 공통되는 것은 주문과 동시에 가장 먼저 나오는 닭 육회다. 흔히 ‘닭사시미’라고 불리는 이 요리는 갓 잡은 닭의 가슴살과 근위(모래집)를 육회로 손질한 것이다. 기본 접시 마냥 단촐하게 나오지만, 그 특별한 맛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누가 뭐래도 최고의 접시로 통한다. 얇게 썰어낸 닭 육회는 마늘을 올려 참기름장에 찍어 먹는데, 여기에 약간의 깨를 뿌려주면 고소한 맛을 즐길 수 있다. 같은 육회지만 두 부위의 맛은 확연히 다르다. 닭가슴살 육회는 촉촉하고 부드러우며 끝에 차진 맛이 있으며, 근위(모래집)은 우리가 흔히 ‘닭모래집볶음(닭똥집)’에서 알던 그 꼬독아삭한 식감이 그대로 살아있다.
닭볶음탕이 나오는 집이라면 대파와 양파, 당근을 큼지막하게 썰어내어 철판 위에서 지글지글 끓이는 달콤 매콤 짭조름한 볶음요리를 즐길 수 있다. 토종닭을 사용하는 집은 일반 식당에서 먹는 닭볶음탕하고는 그 식감부터 다르다. 혹자는 여기에 ‘밥을 비벼 먹지 않는 것은 죄’라고 할 정도니 꼭 밥을 비벼 먹어보기를 추천한다. 매콤달콤한 자극적인 맛의 폭풍이 지나간 이후에는 진하고 시원한 백숙요리가 등장한다. 찹쌀과 녹두, 한약재가 들어간 닭백숙은 생활 스트레스로 지친 몸을 치유하고 몸을 건강하게 회복시키는 진한 맛을 보여준다.
숯불고기가 주력인 집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피어오르는 연기로 알 수 있는데, 배배 꼬아서 만든 동석쇠구이판 위에서 구워내는 닭고기는 소고기나 돼지고기 숯불구이와는 또다른 체험이다. 닭 숯불구이의 화룡점정은 닭껍질인데, 구웠을 때 쫄깃한 식감에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닭껍질은 최고 별미로 꼽는 부위이자 기름이 제일 많은 부위이기도 한데, 숯불구이 특성상 기름이 떨어지면 연기가 많이 나기에 마지막에 구워먹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