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의 외식문화는 최근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음식한류의 선풍을 일으키며 그 명성을 높이고 있다. 우리 외식문화는 단순히 음식의 종류와 맛뿐만이 아니라 서비스에서도 지구촌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특히 24시간 온갖 종류의 음식을 소비자가 원하는 장소로 가져다주는 이른바 ‘배달문화’로 통칭되는 음식배달서비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배달되는 여러 가지 음식 가운데 가장 많이 사랑받는 음식은 바로 돼지족발이다. 양념과 향신료를 넣고 푹 삶아 기름기를 제거한 돼지족은 부드러운 식감과 고소하고 담백한 맛으로 인해 남녀노소 부담 없는 야식이자 최고의 안줏거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돼지족을 이용한 음식은 꽤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조선왕실의 연회(宴會)를 기록한 『진연의궤(進宴儀軌)』와 근대 조리서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 『이조궁정요리통고(李朝宮廷料理通攷)』 등에는 돼지족을 푹 고아서 만든 ‘족편’이 알려져 있다. 또한 현재의 족발과 같은 유형의 음식으로는 19세기 말에 편찬된 『시의전서(是議全書)』에 돼지족을 무르게 삶아 뼈를 추리고 양념하여 굽는 ‘족구이’의 조리법을 소개하고 있다.
돼지족발은 기본적으로 돼지족의 털을 제거한 후 마늘ㆍ생강ㆍ파ㆍ물ㆍ청주 등을 넣고 푹 삶아 낸 다음 간장과 설탕, 물을 넣어 다시 조린 음식으로 본래는 우리나라 이북지역의 음식이었다. 돼지족발이 현재와 같은 형태로 상품화된 것은 6.25전쟁 때 월남한 이북 실향민들이 고향에서 즐겨 만들어 먹었던 족발음식을 응용해서 개발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특히 1950년대 중반 이후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는 ‘장충체육관’이 건립되면서 다양한 실내 스포츠경기가 열렸고, 이때 스포츠 관람객들의 간식거리로 등장한 것이 바로 돼지족발이었다. 처음에는 좌판을 벌여놓고 판매를 시작하던 것이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족발식당들이 하나씩 들어서면서 지금의 ‘장충동족발’이라는 고유명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른바 ‘장충동족발’로 알려진 일반 돼지족발요리는 통념적으로 돼지족을 양념을 한 육수에 푹 삶아낸 다음 썰어서 새우젓에 찍어 먹거나, 상추와 깻잎 등에 싸서 마늘과 쌈장을 얹어 먹는 따뜻한 음식으로 이해되고 있다. 일반적인 육류요리가 그러하듯이 고기는 식으면 육질이 딱딱하게 굳거나 기름기가 져서 식감이 떨어지므로 보통 따뜻한 상태에서 섭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남쪽 최대의 항구도시에 부산에서는 기존 족발요리의 통념을 깨는 음식이 탄생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냉채족발이다. 냉채족발은 음식명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돼지족발과 우리 전통음식인 냉채가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하이브리드(Hybrid)음식이라 할 수 있다.
냉채족발은 재료와 먹는 방법에서 기존의 족발과는 전혀 다르다. 우선 얇게 썬 족발과 삶은 해파리에 겨자소스와 굴소스를 붓고 당근ㆍ양파ㆍ오이를 썰어 얹어 먹는다. 냉채족발은 살코기만을 장이나 새우젓에 찍어 먹는 일반 돼지족발에서 오는 다소 느끼하거나 텁텁한 식감을 톡 쏘는 겨자소스의 맛으로 잡아준다.
또한 해파리의 쫄깃함과 오이와 같이 상큼하고 아삭한 야채는 깻잎이나 상추에 싸먹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식감을 제공한다. 따라서 냉채족발은 돼지족발을 차갑게 먹는다는 점에서 기존 돼지족발과 가장 큰 차이가 나는 혁신적인 음식이라 할 수 있다.
냉채족발은 1980년대 초반 현재의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에서 탄생하였다. 당시만 하여도 중구 부평동과 남포동 일대는 인근의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 부평시장 등과 부산시청을 비롯한 관공서와 회사들이 운집한 부산의 도심으로서 많은 회사원과 젊은이들이 모이는 번화가였다.
현재의 BIFF거리에서 부평시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원조부산족발, 한양족발, 한성족발, 오륙도족발 등의 족발집이 들어서면서 현재의 ‘부평동족발골목’을 형성하였다.
이곳에서 탄생한 냉채족발은 부산을 방문하는 외지인들도 들려서 먹어 보아야 하는 부산의 명물음식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돼지족발요리 외식업의 기본식단에 오를 정도로 전국적인 음식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냉채족발은 그 역사가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탓에 2009년 부산광역시에서 지정한 부산을 대표하는 13가지의 향토음식에는 들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 탄생의 기원은 한국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의 장충동족발이 한국전쟁 이후 북한 실향민들이 상품화한 음식이었던 것처럼, 부산의 냉채족발도 한국전쟁 이후 서울 못지않게 부산에 많이 자리 잡은 이북 실향민들의 향토음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부산의 경우에는 이북음식이 부산 특유의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 비단 냉채족발에 그치지 않는다. 부산에 정착한 이북 실향민들이 전쟁통에 구하기 어려운 메밀가루 대신 원조 밀가루를 이용하여 만든 ‘밀면’, 미군부대 근처에서 구한 돼지 부산물로 만들기 시작한 ‘부산돼지국밥’이 그러한 종류이다. 부산의 냉채족발도 단순히 원형의 유지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부산지역과 부산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고유한 음식으로 개발된 것이다.
돼지족은 간식이나 술안주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 건강식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옛날부터 민간에서 젖이 잘 안 나오는 산모에게 돼지족을 고아 먹이면 모유분비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삶은 돼지족의 젤라틴에는 콜라겐 성분이 풍부하여 여성의 노화방지와 피부미용에 효과가 있다. 또한 비타민 B군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피로회복에 좋고, 풍부한 불포화지방산은 혈관 내의 콜레스테롤 축적을 방지해 준다. 그뿐만 아니라 간 기능에 작용하는 메티오닌과 시스테인, 글루타티온 등 양질의 아미노산을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어 알코올분해와 숙취해소에도 효과가 있다.
날씨가 쌀쌀해지면 구미를 당기는 음식이 있다. 탱탱하고 쫄깃한 식감과 감칠맛 나는 국물에 익혀낸 어묵이다. 나이 든 어른들에게는 궁핍했던 시절에 따뜻한 위로가 되었던 추억의 음식이자, 지금은 젊은이들의 주전부리로 사랑받는 길거리 음식의 대표주자이다.
어묵은 어느 가정에서나 어묵볶음으로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국민반찬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와같이 어묵은 길거리 포장마차로부터 시장의 음식좌판, 분식집, 어묵전문점, 고급일식집 등 여러 다양한 공간에서 접할 수 있을 정도로 가장 널리 보편화된 식품이다.
어묵하면 거의 고유명사와 같이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바로 ‘부산어묵’이다. 상점이나 마트의 식품코너에는 제조업체는 달라도 ‘부산어묵’이라는 상표를 단 어묵제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심지어 어묵꼬치를 파는 길거리 포장마차에서도 그냥 어묵이 아닌 ‘부산어묵’이라고 붙여 놓은 팻말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아마도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간에 부산이 어묵의 고장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러한 명성에 기대고자 한 것이다.
부산역에서 내리면 2층 열차대합실에는 다른 기차역에서는 볼 수 없는 대형어묵상점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진풍경을 목격할 수 있다. 이른바 ‘오뎅’으로 알려진 어묵꼬치를 판매하는 매점은 여느 기차역사에도 있지만 다양한 어묵제품을 판매하는 상점이 있는 기차역은 아마 부산이 유일할 것이다. 더군다나 판매하는 어묵제품도 기발한 제품들로 다양하다. 예컨대 다양한 종류의 ‘어묵타르트’ 제품은 어묵에 대한 기존의 인식과 통념을 사라지게 만들 정도이다. 부산이 어묵의 고장이라는 것을 부산역을 나서기 전에 체험하는 순간이다.
부산어묵은 1996년부터 개최된 부산국제영화제를 기점으로 항도(港都) 부산이 국제적인 문화관광도시로 발돋움하면서 부산의 명물로 더욱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영화제 초기에 개막식이 진행되었던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BIFF광장에는 부산어묵과 어묵국물에 익힌 가래떡고치, 씨앗호떡 등 예전에는 부산 특유의 간식을 파는 좌판에는 연중 내외국인들로 붐빈다. 남포동을 지나면 국제시장의 ‘오뎅골목’과 부평깡통시장의 ‘부산어묵골목’ 등지에서는 여러 가지 부산어묵을 맛보고 다양한 어묵제품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부산광역시가 어묵의 고장으로 뿌리내리게 된 배경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이 있다. 부산에서 어묵 생산의 역사는 1907년 11월 대창정(大昌町, 현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에 설립된 야마구치어묵제조소(山口蒲鉾製造所)에서 시작된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1920년대까지 수산물통조림 가공공장이 주로 많이 들어섰다가 1925년~1929년 무렵에는 어묵공장들이 다수 설립되었다. 일제강점기 부산에 설립된 어묵공장 15개소 가운데 10여 개가 이 시기에 생겨났다. 어묵공장의 소유주는 대부분 일본인이었지만, 1918년 9월 지금의 범일동에 설립된 정가마보코제조소(正蒲鉾製造所)와 1927년 2월 지금의 보수동에 설립된 산삼가마보코점(山三蒲鉾店) 등 두 곳은 김정선(金正善)과 나경중(羅景中) 등의 한국인이 운영하고 있었다. 1907년부터 1929년 사이에 설립된 부산의 어묵공장들은 일제의 식민지배가 끝날 때까지 대다수의 공장들이 영업을 계속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일본에서 어묵 제조기술을 익히고 귀국한 박재덕 씨가 1950년 영도(影島)에 삼진식품을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동광식품, 영진식품, 환공어묵 등 어묵제조업체들이 설립되면서 부산어묵의 전통과 변화를 견인하고 있다. 부산어묵은 1940~1960년대까지는 생선을 맷돌에 통째로 갈고 기름 솥에서 튀기는 방식이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일본에서 자동화기기를 도입하면서 제조방식의 개선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에는 1980년대 외식산업의 성장을 발판으로 새로운 도약기에 접어들었다. 2014년에는 부산의 10대 히트상품으로 부산어묵이 부산국제영화제 등과 함께 선정됐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부산어묵은 어육 함유량 70%의 원칙을 지키면서 맛과 품질의 전통을 이어 가고 있다.
어묵은 오래전부터 ‘오뎅(おでん,御田)’이라는 일본어 명칭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오뎅이 어묵이라는 우리말로 바뀌게 된 시기는 1992년 무렵이다. 당시 국립국어원에서 제시한 ‘식생활관련순화안’에서 생선묵을 ‘어묵’으로 바꾸면서 교육기관과 방송언론매체를 통해 계도(啓導)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큰 변경사유는 일본어의 잔재를 우리말로 바꾼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원을 먼저 살펴보면 ‘오뎅’으로 불리던 어묵은 사실 ‘오뎅’이 아니다.
일본 위키피디아(ウィキペディア)의 오뎅 항목을 인용하면 “가다랑어와 다시마에서 취한 맛국물에 양념으로 맛을 내고 튀긴 어묵(さつまあげ)ㆍ한펜(はんぺん)ㆍ구운 대롱어묵(焼きちくわ)ㆍ동그랑땡(つみれ)ㆍ곤약ㆍ무ㆍ고구마ㆍ유부ㆍ대롱어묵ㆍ소 힘줄ㆍ삶은 달걀ㆍ튀긴 두부 등 다양한 종류를 넣어 장시간 끓인 조림요리의 일종”이라고 한다. 즉 우리가 먹는 어묵은 일본의 오뎅요리에 사용된 재료 중 하나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요리명 자체가 어묵의 이름으로 와전된 것이다.
일본의 오뎅요리에 들어간 어묵은 종류만 살펴보면, 우선 사츠마아게(さつまあげ)는 으깬 생선살을 둥글고 납작하게 만들어 튀긴 어묵이다. 한펜(はんぺん)은 으깬 생선살을 삼각형 또는 반달형으로 쪄서 만든 어묵이다. 츠미레(つみれ)는 으깬 생선살을 완자형태로 동그랗게 뭉쳐서 삶은 것이다. 치쿠와(ちくわ)는 대나무에 으깬 생선살을 붙여서 굽거나 쪄낸 어묵으로 완성 후 대나무를 빼내면 어묵 가운데 구멍이 마치 대나무의 빈 속과 같다고 하여 대롱어묵으로 불린다. 이외에도 일본의 어묵은 재료와 가공법, 지역에 따라 무수히 많은 종류가 있다. 이러한 일본의 어묵은 물가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인 부들의 열매와 닮았다고 하여 이름 지어진 가마보코(かまぼこ, 蒲鉾)로 통칭된다.
우리가 어묵으로 부르는 식품은 일본의 가마보코에서 유래한 것이다. 가마보코와 관련하여 우리 고문헌에서 흥미로운 내용을 살펴 볼 수 있다. 18세기에 편찬된 『수문사설(謏聞事說)』이라는 조리서에 ‘가마보곶(可麻甫串)’이라는 음식의 조리법이 소개되어 있다. ‘가마보곶’은 바로 ‘가마보코’의 발음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으로 원어와 상당히 유사하다.
가마보곶. 숭어 혹은 농어 혹은 도미를 잘라서 편을 만든다.
별도로 소고기, 돼지고기, 목이버섯, 석이버섯, 표고버섯, 해삼 등
여러 재료 및 파, 고추, 미나리 등 여러 가지 채소를 다진다.
어편(魚片) 1층에 다진 소 1층, 또 어편 1층에 다진 소 1층으로 이와 같이 3~4층을 만든 후
두루마리처럼 말아서 녹말가루로 옷을 입혀
끓는 물에 삶아낸 후 칼로 잘라서 편을 만든다.
그러면 어편과 다진 소가 서로 둘둘 말린 것이 마치 태극모양과 같다.
비로소 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소의 여러 재료가 다섯 가지 색으로 나뉘는데,
칼로 자른 후에는 무늬의 결이 매우 아름답다.
(可麻甫串 秀魚 惑 鱸魚 惑 道味魚 切作片 另以 牛肉 猪肉 木耳 石耳 蔈古 海蔘 諸味 等 及 蔥 苦艸 芹 諸物爲末 魚片一層加饀物一層 又 魚片一層加饀物一層 如是三四層後 捲如周紙㨾 以菉末爲衣 以沸湯煮出後 以刀切作片 則魚片及饀物 相捲回回如太極㨾 乃以苦艸醬食之 饀物諸味 分五色爲之 刀切後 紋理尤佳).
조선시대에 이미 어묵 만드는 법이 우리나라에 알려졌다는 것도 흥미롭기도 하지만 일본의 가마보코보다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재료를 사용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수문사설』의 저자가 숙종(肅宗) 때 어의를 지낸 이시필(李時苾) 혹은 왕실의 종친이었던 이표(李杓) 중 한 사람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두 사람이 모두 궁중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점에서 ‘가마보곶’은 궁중음식을 염두에 두고 수록한 것이 아닌 가 한다. 실제로 1902년(고종 39) 고종의 즉위 40주년과 보령 51세를 축하하기 위한 잔치의 전말을 기록한 『임인진연의궤(壬寅進宴儀軌)』에는 대전(大殿)에 올리는 찬품(饌品)에 ‘감화부(甘花富)’라는 음식이 등장한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감화부’가 “감화보금을 한자를 빌려서 쓴 말이다.”라고 한 점에서 가마보곶과 비슷한 어묵요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묵이라는 이름도 엄밀하게 따져보면 그다지 적확한 명칭은 아니다. 어묵은 ‘생선살로 만든 묵’이라는 뜻일 텐데 실제의 묵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묵은 곡식, 열매, 해초, 생선, 가축 등에 들어 있는 전분(식물)이나 콜라겐(동물) 성분을 끓인 다음 식히는 과정에서 젤라틴화 시킨 음식을 말한다. 녹두묵, 도토리묵, 우무, 박대묵, 족편 등이 묵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그런데 으깬 생선살에 전분을 섞고 모양을 만들어 익혀낸 식품에 ‘묵’자가 붙었으니 적절하지가 않은 것이다. 식품의 이름에는 그 식품의 재료와 조리법에 따른 종류를 내포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어묵이라는 명칭은 오뎅을 우리말로 바꿀 때 적절한 용어에 대해 좀 더 신중하게 살펴보지 못한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어묵은 우리 전통음식 중에서 ‘묵’보다는 ‘완자(完子)’에 가까운 음식이다. 완자는 소고기를 비롯한 다양한 육류와 생선 등을 재료로 삼는 음식으로서, 다진 고기에 두부를 넣고 둥글게 빚어서 기름에 지진 음식을 말한다. 완자는 국물음식에도 잘 어울려서 조선시대에는 완자로 만든 완자탕이 궁중과 반가(班家)에서 애용하는 음식이었다. 또한 중국에도 ‘유완[어환, 魚丸]’이라는 어묵과 유사한 음식이 있다. 생선살 다진 것에 전분을 섞은 다음 둥글게 빚어서 삶거나 튀긴 음식으로 광동요리에 많이 쓰이며 중국인들이 간식으로 애용한다.
우리나라 연안에서 잡히는 바닷물고기 중 못 생긴 물고기를 선정한다면 아마도 아귀ㆍ삼세기ㆍ물메기ㆍ도치ㆍ곰치 등이 순위에 들 것이다. 이런 물고기들은 생김새 및 생태와 관련하여 주로 ‘못생겼다’, ‘징그럽다’, ‘난폭하다’, ‘흉칙하다’는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그런 탓에 예전에는 어선의 그물에라도 걸려서 올라오면 어부들은 그 자리에서 떼어내 바다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바다에 빠질 때 ‘텀벙’하고 물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서 ‘물텀벙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하였다. 인천에서는 아귀를 아귀로 부르지 않고 물텀벙이로 통하는데 이러한 일화에서 연유한 것이다.
부산광역시에 가면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간혹 ‘물꽁식당’, ‘물꽁집’이라는 간판을 목격하게 된다. 도대체 ‘물꽁’이 무엇일까? 그저 가게이름을 재미있게 지으려고 고안해 낸 말인가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물꽁’이라는 무엇인가를 식품으로 판매하는 식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밀려온다. ‘물’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니 필시 바다나 하천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기왕에 부산지역이 바다에 접해 있으니 민물보다는 바다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까지 이른다. 그러나 거기까지이다. 워낙 ‘꽁’이라는 글자의 어감이 귀엽고 정겹기도 해서 그 정체가 더욱 궁금해진다. ‘물꽁’의 뜻을 살펴보면 ‘물에 사는 꿩’이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부산에서 아귀를 가리키는 별칭이라고 한다. 아귀와 꿩이 전혀 연결지점이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아귀의 껍질에 나타난 색상이 마치 꿩 수컷인 장끼의 알록달록한 색상과 비슷하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지역 향토음식으로 물텀벙탕(아귀탕)이 유명한 인천에 물텀벙이가 있다면 부산에는 물꽁이 있는 셈이다.
아귀는 흉측하게 생긴 모습때문에 예전에는 식용을 하지 않아서인지 옛 문헌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김려(金鑢)의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1803),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玆山魚譜)』(1814), 서유구(徐有榘)의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 등 19세기 초에 저술된 3종의 어보(魚譜) 가운데 『자산어보』에서만 아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자산어보』에는 아귀의 이름은 조사어(釣絲魚)이고 민간에서는 아구어(餓口魚)라 부른다고 소개하고 있다. 조사어는 ‘낚싯줄을 가진 물고기’라는 뜻이고, 아구어는 ‘굶주린 입을 가진 물고기’라는 뜻이다. 대가리 위에 달린 돌기를 낚싯대처럼 살살 흔들며 물고기를 유인한 다음 자기 몸보다도 큰 먹이까지도 순식간에 통째로 삼켜버리는 아귀의 습성을 잘 묘사한 명칭이다. “먹기는 아귀같이 먹고 일은 장승같이 한다.”든지 “아귀같이 먹고 굼벵이같이 일한다.”와 같이 아귀는 우리 속담에서도 일은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음식만 축내는 사람을 빗대는 데 사용되었다. 옛날의 아귀는 인간의 관심 영역 밖에 있었고 흉하게 생긴 모습으로 탐욕의 대명사 정도로 여겨졌었다. 따라서 잡히는 대로 바다에 버려지거나 기껏해야 썩혀서 바닷가 텃밭에 비료로 뿌려지는 신세에 불과했다.
그러던 아귀가 언제부터인가 ‘귀하신 몸’ 대접을 받는 위치로 올라서게 되었다. 시쳇말로 먹고 싶어도 없어서 못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1980년대 초반 한 제과업체에서 아이스크림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내세운 “못 생겨도 맛은 좋아”라는 광고카피는 요즘의 아귀를 간명하게 정의해주는 문구이다. 아귀는 1960년대 무렵부터 바닷가의 부두노동자들이나 어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안주내지 식사거리로 등장하였다. 흔하게 잡힌 아귀로 만든 음식은 저렴하면서도 풍성한 양으로 고된 바닷일을 마친 가난한 부두노동자들이나 어부들에게는 제격이었다. 인천에서는 용현동을 중심으로 ‘물텀벙이탕’으로 불리는 ‘아귀 맑은 탕’이 출현하였고, 경상남도 지역에서는 제각기 개성을 지닌 ‘마산아구찜’과 ‘부산아구찜’이 등장했다. 마산과 부산의 아구찜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마산아구찜은 꾸덕꾸덕하게 말린 아귀를 사용하기 때문에 쫄깃쫄깃한 식감과 담백한 맛이 특징이다. 반면에 부산아구찜은 생아귀를 사용하므로 부드러운 식감과 신선한 맛을 주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아귀가 음식으로서 처음 등장한 것은 1960년대 중반 무렵 마산에서 부터이다. 마산에서 장어식당을 하는 한 할머니가 꾸덕꾸덕하게 마린 아귀를 쪄서 양념장에 찍어먹던 것이 찜요리, 탕요리 등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1970년대 부산에서는 말린 아귀가 아닌 생아귀를 사용하여 해물생아구찜, 찹쌀아구찜 등 부산 특유의 아구찜 요리를 만들어 내기 시작하면서 부산의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1972년 문화공보부에서 발간한 『한국민속 종합조사보고서 제3책 경상남도편』에는 부산의 수산물이나 향토음식에 아귀와 부산아구찜이 아직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도 1970년대를 전후한 무렵에 탄생한 부산아구찜이 대중적인 음식으로서 대내외적으로 알려진 단계는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가 10여 년이 지난 1984년의 『한국민속 종합조사보고서 제15책 향토음식편』에서는 경상남도 지방의 향토음식 항목에 ‘아구찜’으로 조리법과 재료가 비로소 등장한다. 이는 아구찜이 1970년대를 지나면서 점차 경상남도 지역의 향토음식으로 정착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산아구찜은 1970년대 부산이 대형도시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비싼 가격의 생선회보다 저렴하고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해산물 찜이나 탕 요리들이 각광받게 되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다. 부산아구찜은 2001년에 이르러 부산광역시를 대표하는 향토음식에 선정된 이래 지금까지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참고로 지역자치단체에서 선정하는 지역대표 향토음식 선정은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평가와 심사를 거쳐 새로운 음식이 선정되거나 기존의 향토음식이 탈락하는 경우도 적지 많다. 부산아구찜은 신선한 생아귀에 다양한 해물과 고춧가루ㆍ미나리ㆍ콩나물ㆍ고춧가루ㆍ전분가루 등을 사용한다. 생아귀를 이용하므로 어육을 씹을 때 부드럽고 독특한 식감과 신선한 맛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아구찜을 익힐 무렵에 전분을 물에 풀어 찜에 부어주고 마저 익히면, 조리 과정에서 아귀와 부재료에서 빠져나온 즙을 전분이 흡수하여 음식에 그대로 부착시켜 주기 때문에 영양 성분을 손실하지 않고 섭취할 수 있다. 부산아구찜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생아귀를 잘 씻은 다음 살과 내장을 토막 낸다. 아귀 간은 삶아서 으깬 것과 새우살과 홍합살 다진 것을 합하여 해물조미료를 만든다. 육수에 해물조미료를 반만 넣고 끓이다가 아귀살ㆍ내장ㆍ미더덕ㆍ콩나물을 넣어 10분 정도 익힌다. 그 다음 미나리ㆍ대파ㆍ다진 마늘ㆍ후춧가루ㆍ설탕ㆍ 나머지 해물조미료ㆍ 고춧가루 등을 넣고 잘 섞어 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한 다음 전분 물을 붓고 뜸을 들여 참기름ㆍ깨소금ㆍ들깨가루를 뿌린다.
아귀의 살은 심해성 어류의 특징인 수분함량이 높고 지방과 콜레스테롤이 적은 저칼로리 식품이다. 아귀의 연골에는 황산콘드로이친이 들어 있어 관절염 개선 등 관절질환에 도움을 준다. 아귀의 간은 메티오닌과 시스테인과 같은 함황아미노산이 많이 들어 있어서 ‘바다의 푸아그라’로 불릴 정도로 영양가가 높고 맛이 좋다. 비타민A와 비타민E도 많이 함유하고 있어서 안구 건강, 노화 방지와 골격과 치아의 형성에 효과가 있다.
부산의 관광명소인 부평깡통시장을 둘러보면서 북쪽 방향으로 올라가면 보수동책방골목이 나온다. 책방골목이 있는 보수사거리에서 중부산세무서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부산 생아구찜의 원조로 알려진 ‘물꽁식당’이 나온다. 이 식당은 1965년에 개업한 이래 3대에 걸쳐 54년째 전통을 지키고 있는 부산의 노포(老鋪)로서 부산아구찜과 아구맑은탕, 아구수육 등을 맛볼 수 있다. 특히 생아귀의 살코기와 간, 껍데기, 내장을 삶아서 살짝 익힌 콩나물과 미나리에 말아서 간장에 찍어먹는 아구수육은 양념을 사용하지 않아 아귀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는 부산의 별미로도 알려져 있다.
옛날 속담에 “눈 본 대구(大口), 비 본 청어(靑魚)”라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대구는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철에 많이 잡히고, 청어는 봄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봄철에 많이 잡힌다는 뜻이다. 그래서 대구를 뜻하는 한자어 중에 ‘대구 설(鱈)’자가 있기도 하다. 글자를 파자(破字) 해보면 ‘고기 어(魚)+눈 설(雪)’의 조어(造語)인 것이다. 대구가 겨울철이 제격인 생선임을 알 수 있는 속담이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은 설어(鱈魚)가 일본어 표기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덕무(李德懋)는 『청령국지(蜻蛉國志)』에서 왜자(倭字) 목록을 나열하면서 “설은 대구어이다(鱈 大口魚也)”라고 하였다. 청령국(蜻蛉國)은 일본의 별칭이다. 또 『동사강목(東史綱目)』의 저자 안정복(安鼎福)은 1765년(영조 41) 이가환(李家煥)에게 보낸 편지에서 “왜인은 도미를 조어(鯛魚)로 이름 하고, 또 대구는 설어(鱈魚)라고 한다(倭人名以鯛魚 又以大口魚爲鱈魚)”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구를 대구어(大口魚) 또는 화어(夻魚)로 불렀다. 대구어는 조선초기부터 사용된 명칭으로 『세종실록』에는 지리지(地理志)를 포함하여 대구어가 총 20회 등장한다. 조선 광해군 때 허균(許筠)이 지은 『도문대작(屠門大嚼)』에는 “대구어는 동해ㆍ남해ㆍ서해에서 모두 나는데 북쪽에서 나는 것이 가장 크고 누른색이며 두껍다(大口魚 東南西海皆產 而北方最大 色黃而厚)”고 하면서 대구어로 표기하고 있다. 이외에도 대구어는 조선초기부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각종 국가기록 및 민간기록에 자주 사용된 일반적인 대구의 명칭이었다.
19세기 서유구(徐有榘)의 『난호어명고(蘭湖魚名考)』에는 대구를 화어(㕦魚)라 하고 ‘대구’라는 한글표기도 달았다. 서유구는 『동의보감』에 화어(夻魚)라고 되어 있는데 자서에 없는 글자라고 하였다. 『동의보감』 탕액편(湯液篇) 2권 어부(魚部)에는 대구어를 화어(夻魚)로 표기하고 있다. 서유구는 청나라 학자 이조원(李調元)의 저서 연서지(然犀志)에서 화어(夻魚)에 대해 언급한 것을 인용하여 “자서(字書)에 화(㕦)자가 있다. 주(注)에 이르기를 ‘물고기 중 입이 큰 것으로 조선인은 화(夻)자로 만들어 쓰는데, 글자는 달라도 뜻은 같다’”고 하였다. 서유구가 표기한 화어(㕦魚)나 『동의보감』의 화어(夻魚)나 ‘大+口’로 구성된 것은 동일하다. 중국에서는 입이 큰 물고기여서 화(㕦)인데, 우리나라는 대구의 어순에 따라서 화(夻)로 변형한 것이 흥미롭다.
대구는 조선시대부터 귀한 생선이어서 국초부터 조선후기까지 건대구와 대구어란해(알젓) 등은 궁중의 진상품이었다. 또 『세종실록』 1424년(세종 6)부터 1428년(세종 10) 사이의 대구어 관련 4건의 기록을 살펴보면 대구는 궁중진상품, 명나라 무역품, 일본 대마도주 하사품, 명나라 황제 진상품 등 외교와 무역에도 중요한 품목이었다. 또한 1671년(현종 12)부터 1697년(숙종 23)까지 각 도(道)와 제주목에서 종묘(宗廟)와 각 전(殿)에 올린 진상품의 목록을 예조(禮曹)에서 펴낸 『천신진상등록(薦新進上謄錄)』에 의하면, 종묘에서 월별로 천신(薦新)하는 제수 중에 대구어는 음력 10월에 올리는 천신품목이었다.
이와 같이 대구는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버릴 것이 없을 정도로 쓰임새가 다양하여 ‘바다의 황소’로 일컬어 질 정도로 귀한 어종이었다. 또한 서해의 조기, 동해의 명태가 각 바다의 대표 어종이라면대구는 단연코 남해를 대표하는 생선이었다. 실제로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편에 의하면 대구는 경상도와 경주부, 안동대도호부, 진주목 등 경상도 대읍(大邑)의 주요 공물이었다. 19세기 정약용(丁若鏞)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어세(魚稅)를 언급하는 가운데 “영남의 어장에는 대구어장[화(夻)는 속자임. 본 이름은 대구], 청어어장[소청어], 문어어장(장거어)이 있다(嶺南 海之漁塲 有夻魚塲[夻俗字也 本名大口魚] 靑魚塲[小靑魚] 文魚塲[章擧魚])”고 하여, 조선후기 경상도 남해안 지방에는 대구어장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이 언급한 경상도 남해안의 어장 가운데 최고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의 대구어장이었다. 가덕도 어장이 최고의 어장이었다는 것은 이학규(李學逵)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학규는 정약용의 스승이었던 이가환(李家煥)의 외조카이자, 정약용의 매부인 이승훈(李承薰)의 삼종질(三從姪)로서 정약용과 사돈뻘 되는 인물이다. 이학규는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경상도 김해에서 약 24년 간 유배생활을 했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유배기간 중에 저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후포행 18수(後浦行 十八首)’라는 시에 덧붙인 주(註)에 이르기를 “대구는 가덕포에서 나는 것이 최고이다. 금년 겨울에는 극히 흔하여 1마리 값이 4~5전이다(大口魚 最産加德浦 今冬極賤 一頭値四五錢)”고 하였다.
가덕도는 대구의 남해안 최대 산란지로서 회유성어종인 대구는 매년 11월 말에서 이듬해 2월까지 산란을 위해 북태평양에서 따뜻한 남해안 가덕도 일대로 돌아온다. 특히 가덕도와 진해만 사이의 ‘가덕수로(加德水路)’에서 잡힌 ‘가덕 대구’는 살이 꽉 차서 맛이 좋고 영양가 또한 많기로 정평이 높았다. 대구의 주산지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가덕도는 대구를 이용한 다양한 향토음식으로도 유명하다. 대구 철이 되면 맛볼 수 있는 대구회ㆍ대구탕ㆍ대구매운탕ㆍ대구뽈찜ㆍ대구포ㆍ 대구 젓갈 등 다양하다. 그중에 단연 압권으로 꼽히는 음식은 ‘대구 맑은 탕’으로도 불리는 ‘가덕 대구탕’이다. 가덕 대구탕의 진수(眞髓)는 여느 다른 지역의 대구탕처럼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나박하게 썬 무를 넣고 끓인 물에 대구와 대구 수컷의 정소인 곤이, 고추, 대파 등을 넣어 끓여낸 것이 재료와 조리의 전부이다. 무와 대파가 내는 시원한 맛과 고추의 매콤한 맛, 대구살과 곤이가 지닌 바다의 맛 자체가 양념으로 어우러져 대구탕의 본연의 맛을 지닌 것이 가덕 대구탕이다. 가덕도에서는 2015년부터 매년 12월경 ‘가덕도 대구축제’를 개최하여 가덕도 대구를 비롯한 다양한 해산물로 만든 향토음식과 맨손 대구잡기, 가덕도대구풍어제 등 다양한 행사를 선보이고 있다.
대구는 대구목 대구과에 속하며 한류에 사는 회유성 어종으로 같은 대구과에 속하는 명태와는 사촌지간이다. 대구를 ‘화어(夻魚)라고 한 『동의보감』에는 “(대구는) 성질이 평(平)하고 맛은 짜며 독이 없다. 먹으면 기를 보한다. 내장과 기름은 맛이 더욱 좋다. 동북해에서 난다. 속명은 대구어이다(性平 味鹹 無毒 食之補氣 腸與脂 味尤佳 生東北海 俗名大口魚)”라고 하여 기력을 보강하여 주는 것을 대구의 주된 효능으로 소개하였다. 그 밖에 대구의 효능으로는 구충효과(『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주촌신방(舟村新方)』), 지혈작용(『의방합부(意方合部)』,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구는 고단백 저지방 식품으로 체중조절에 도움이 되는 식품이다. 대구의 간에는 비타민 A와 D가 많이 함유되어 있어 안구건강에 좋다. 피부미용과 감기예방에 좋은 비타민 B1과 소염작용에 도움을 주는 비타민B2, 노화방지에 효과가 있는 비타민E도 풍부하게 들어 있다. 특히 간 해독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메티오닌과 시스테인 등의 함황아미노산이 매우 풍부하게 들어 있어 음주나 과로, 스트레스 등으로 인하여 간 기능이 저하되었을 때 섭취하면 좋다.
음식점 골목을 지나다 보면 간혹 ‘조방낙지’라는 간판이나 음식 차림표를 알리는 식당들을 보게 된다. 심지어는 조방낙지라는 동일한 상호를 사용하는 업소가 많아서 요즘 한창 유행하는 프랜차이즈 음식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는 아예 조방낙지라는 낙지 종류가 따로 있거나, 특정지역에서 나는 낙지 산지의 지명(地名)을로 붙인 것이 아닐까 추정해보기도 한다. 아무튼 조방낙지라는 명칭이 낙지를 재료로 하는 음식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낙지전골ㆍ낙지볶음ㆍ낙지숙회ㆍ낙지탕탕이ㆍ연포탕에 비해 조방낙지는 어떠한 종류의 음식인지 제목만 봐서는 바로 추정하기는 어렵다.
우선 조방낙지는 낙지볶음의 일종으로 부산광역시의 향토음식이다. 일반적으로 특정지역에서 발생하여 그 지역을 대표하는 향토음식들은 대체로 전주비빔밥이라든지 마산아구찜과 같이 음식 이름 앞에 해당 지역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조방낙지의 ‘조방’도 부산광역시의 지명일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도 아니다. 조방낙지라는 이름은 특이하게도 부산에 있었던 한 기업의 명칭에서 비롯되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향토음식 가운데 기업의 이름이 고유명사로 정착된 음식으로는 조방낙지가 거의 유일할 것이다.
조방낙지는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소재하였던 조선방직의 줄임말인 ‘조방’에서 비롯되었다. 조선방직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일본 미쓰이(三井) 자본계열이 조선 최초로 부산에 설립한 대규모의 근대적 면방직공장이다. 1910년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일제는 산업화를 촉진하면서 인건비와 후생복지비의 부담이 높은 노동집약적인 산업을 점차 조선으로 이전하였다. 업종은 공정마다 많은 인력에 의존해야 했던 면방직과 신발과 같은 경공업이 대상이었다. 일제는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선전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식민지 조선의 백성을 ‘이류국민(二流國民)’으로 간주하고, 일본인의 절반도 안 되는 싼 임금으로 조선노동자들의 피땀을 착취할 목적이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부산은 일본과 거리가 가장 가까운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경부선이 부설되면서 경성을 제외한 조선 최대의 도시이자 일본의 대륙진출을 위한 전초기지로서 부상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국내 최초의 방직공장이 부산에 설립되었던 것이다. 조선방직은 해방 후 적산(敵産)으로 관리되다가 1955년 민간에 불하되었으나 방만한 경영으로인해 막대한 부채를 지고 1968년 부산시에 인수되었다가 공장이 철거되어 부산자유도매시장 등이 들어섰고 회사는 1969년 해산되었다.
1960년대는 당시 군사정권이 강력하게 추진하는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온 국민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허리띠를 졸라 매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조방낙지는 이 시기에 생겨났다. 1960년대 초부터 낙지를 안주로 제공하기 시작하면서 선을 보이기 시작했으나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음식으로 출발하지는 않았다. 저렴한 안주를 찾는 노동자들에게 낙지를 삶아 초고추장과 함께 내는 낙지숙회를 내다가 점차 고춧가루 양념을 더해 가면서 현재의 조방낙지가 개발되었다. 조방낙지는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서민에게는 식사와 안주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음식이었다. 예로부터 ‘쓰러진 소도 벌떡 일으킨다.’ 하여 이른바 ‘갯벌의 산삼’으로도 잘 알려진 낙지의 효능은 고된 노동에 시달린 범일동 일대 노동자들의 피로회복에 더할 나위 없는 힐링푸드로 각광을 받았다.
낙지볶음의 일종인 조방낙지는 낙지볶음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알려진 서울의 ‘무교동낙지’와는 사뭇 다르다. 무교동낙지는 손질한 낙지에 파ㆍ마늘ㆍ간장ㆍ설탕ㆍ매운 고춧가루를 넣고 센 불에 조리해 내는 음식으로 국물이 없고 눈물 콧물이 날 정도로 지독하게 매운 것이 특징이다. 조방낙지는 낙지와 고추ㆍ깻잎ㆍ당근ㆍ대파ㆍ양파ㆍ당면ㆍ고춧가루 양념을 넣고, 새우ㆍ조개ㆍ멸치 등을 우려낸 육수를 부어 걸쭉하게 끓여내는 것이 특징이다. 육수를 부어 얼큰하게 끓여내는 조방낙지는 무교동낙지처럼 자극적이지도 않고, 해산물을 이용하므로 국물 맛도 담백하여 다른 지역의 낙지볶음과는 확실히 차별화 되는 부산 고유의 향토음식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방직은 이미 오래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조방낙지는 여전히 건재하다. 현재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범천동 평화시장 일대의 ‘범천동 조방낙지거리’는 부산시민은 물론이고 부산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그 중 ‘원조 할매집’은 조방낙지의 역사와 함께 한 노포(老鋪)로서 50여 년간 3대에 걸쳐 조방낙지의 명성을 지키고 있다.
요즘은 위생문제와 도시미관 저해 등의 이유로 많이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서민들이 간단히 요기도 하고 저렴한 가격에 술과 안주를 즐길 수 있던 길거리 포장마차가 있었다. 당시 포장마차의 최고 인기 안주는 속칭 ‘닭똥집’으로 호칭되는 닭모래집볶음과 꼼장어구이가 쌍벽을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포장마차하면 연상되는 대표적인 음식은 단연코 꼼장어구이였다. 벌겋게 양념한 꼼장어를 연탄화덕 위에 석쇠를 얹고 구워낸 꼼장어구이를 안주삼아 들이키는 소주 한 잔은 고된 일과에 지친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묘약이기도 했다.
저렴한 가격은 물론이고 뛰어난 맛과 영양을 갖춘 꼼장어구이는 부산광역시의 향토음식이다. 부산은 인근 기장군을 비롯한 부산 앞바다에서 많이 잡히는 수산물인 먹장어가 있어서 음식으로 발달할 수 있었다. 부산에는 양념구이, 소금구이, 통구이 등 세 종류의 꼼장어구이가 있다. 통구이는 일반적으로 ‘기장짚불구이꼼장어’로 알려진 것으로 꼼장어를 통째 짚불에 구워낸 기장군의 향토음식이다. 소금구이는 꼼장어의 속살을 불판이나 석쇠에 구운 다음 소금을 찍어 먹는 음식으로 동래 온천장에서 만날 수 있다. 양념구이는 꼼장어를 벌겋게 양념하여 채소와 버무려 구워먹는 음식으로서 바로 부산 자갈치시장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향토음식이다. 이 자갈치시장 꼼장어구이가 한때 전국의 포장마차를 석권하고 전국적인 음식으로 격상하였던 꼼장어구이의 원조라 할 수 있다.
부산 자갈치시장이 꼼장어구이의 원조가 된 것은 1945년 광복 후 일본에 거주하던 동포들이 귀환하면서부터이다. 상당수가 부산에 정착한 동포들이 생계를 마련하기 위해 자갈이 많던 서구 충무동 해안가에 좌판을 시작하면서 훗날 자갈치 시장으로 발전하였다. 이 무렵에 꼼장어구이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패망으로 인해 내몰리다시피 귀국하여 경제적으로 넉넉 못했던 자갈치 상인들은 헐값에 구할 수 있었던 꼼장어를 사다가 구워 팔기 시작한 것이다. 1950년대 이전만 해도 꼼장어는 주로 가죽을 얻기 위한 용도 외에 식용하지는 않아서 껍질을 벗긴 나머지는 그대로 버려졌기 때문에 구이 재료로 선택된 것이다.
매콤하게 양념하여 석쇠에 구워 먹는 꼼장어는 차츰 부산 서민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부산의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특히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부산으로 피난민이 몰려들면서 전쟁 전 47만이었던 인구가 무려 87만으로 급증하였다. 이에 반해 당시의 먹거리 사정은 부산 인근 지역의 농수산물과 미군 원조로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 시기에 자갈치 꼼장어구이를 비롯한 부산의 꼼장어음식은 당시 피난민과 부산 서민들에게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자 서민의 안줏감으로서 확고히 자리 매김하였다.
‘꼼장어’는 ‘곰장어’를 지칭하는 경상도 방언이고 곰장어의 공식명칭은 먹장어이다. 먹장어는 먹장어목 꾀장어과의 물고기로 사니(沙泥)질의 바닥에 서식한다. 눈이 상당히 퇴화되었기 때문에 눈이 멀었다 하여 먹장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꼼장어라는 명칭은 먹장어가 죽은 듯이 가만히 있다가 손으로 움켜잡으면 ‘꼼작꼼작’ 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혹은 먹장어의 가죽을 벗겨내도 바로 죽지 않고 꼼지락거린다하여 꼼장어로 불렀다고도 한다.
먹장어의 외형은 뱀장어와 비슷하지만 몸이 가늘고 긴 원통형으로 빛깔은 다갈색을 띤다. 또한 뱀장어목의 경골어류(硬骨魚類)와는 달리 턱이 없고 입이 둥근 빨판 모양을 하고 있어 원구류(圓口類)로 분류되는 원시어류이다. 먹장어는 바다 밑에 살면서 작은 벌레나 죽은 물고기를 뜯어 먹어 ‘바다청소부’라는 별명이 있다. 경골어류와 달리 턱이 없고 입이 동그랗다 해서 어류가 아니라 ‘원구류’로 분류한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해만(海鰻)은 성질이 차고 평하다. 맛은 달고 독이 없으나 전하기로는 약간의 독이 있다고도 한다. 다섯 종류의 치질병과 부스럼 치료에 주효하다. 온갖 충을 죽이고 악창과 부인병을 다스린다”고 하였다. 곰장어는 비타민 A와 양질의 단백질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 고혈압ㆍ당뇨병ㆍ숙취해소ㆍ허약체질 개선에 좋고, DHA와 EPA 등 양질의 지방산도 풍부하여 안구 건강과 심혈관질환에 효능이 있다. 꼼장어로 만든 음식은 양념구이 이외에도 짚불구이ㆍ소금구이ㆍ통구이ㆍ매운탕ㆍ삶은 꼼장어ㆍ볶음 요리 등으로 다양하다.
꼼장어구이는 2009년 부산광역시가 선정한 부산의 13가지 향토음식 중 하나인 꼼장어요리에 들게 되었다. 2019년 부산광역시에서는 꼼장어구이 등 꼼장어음식을 취급하는 업종을 더욱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관광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하여 소상공인 유망업종으로 꼼장어요리를 선정하고 ‘살아있네 부산꼼장어’를 BI(브랜드 아이덴티티)로 선정하였다.
이른바 ‘맛집’을 즐겨 찾는 식객(食客)들 사이에는 부산에 가면 반드시 먹어보아야 할 부산에서만 맛 볼 수 있는 향토음식이 전하고 있다. 바로 완당이다. 완당이 식객들에게는 부산의 명물로 알려져 있으면서도 일반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은 부산에서도 완당을 만드는 식당이 몇 곳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완당은 우리 고유의 전통음식은 아니다. 중국 광동지역의 음식이 일본을 거쳐 바다 건너 부산에 와서 정착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백여 년 전 중국 산동성의 ‘작장면(炸酱面)’이 인천에 전래되어 지금은 대한민국의 대표음식 중 하나인 ‘짜장면’이 된 것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유입경로로 따지자면 1899년 일본의 화교 천핑순(陳平順)이 개발한 나가사키짬뽕으로 잘 알려진 ‘잔폰(ちゃんぽん)’이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고춧가루와 만나 얼큰한 ‘짬뽕’이 탄생한 것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완당은 중국에서 아침식사로 차리는 만둣국의 일종인 ‘훈뚠(渾沌)’에서 유래되었다. 홍콩을 비롯한 광동지역에서는 ‘완탐’으로 불리던 것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식 명칭인 ‘완탕(ワンタン)’으로 정착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에서 완탕 만드는 법을 배워온 이은출 씨가 1947년 중구 보수동에서 포장마차를 열고 완당을 만들어서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경상남도 양산군(현 양산시] 출신인 이은출 씨는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야간공업학교에 다니면서 낮에는 일본식당에서 일하면서 완당 만드는 기술을 익혔다. 해방 후 귀국하여 몇 번의 사업실패 끝에 일본에서 배운 완당기술을 살려 포장마차를 연 것이 현재까지 3대를 잇는 가업이 되었다.
완당은 두께가 0.3mm 정도 되는 얇은 밀가루 피에 고기와 계란노른자ㆍ부추ㆍ파ㆍ양파ㆍ양배추 등을 다져 만든 소를 새끼손톱 크기로 넣어 빚는다.
완당은 얼핏 보면 물만두와 비슷하기도 하지만 보통 1~2mm 하는 두께의 만두피에 속을 많이 채워 넣는 만두와는 엄연하게 다르다. 육수는 닭고기를 사용하는 일본 완탕과는 달리 부산과 인근 기장군의 특산물인 멸치와 다시마를 주재료로 만들어서 시원한 맛을 낸다.
중국에서는 완당이 국물에 떠있는 모습이 마치 하늘에 떠 있는 흰 구름과 같다고 해서 구름을 삼킨다는 뜻을 지닌 ‘운탄(雲呑)’으로 불렸다는 점에서, 부산의 완당은 운탄의 근사한 뜻을 가장 제대로 반영한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완당의 차림새는 그릇에 육수를 붓고 따로 삶아 놓은 완당을 넣은 다음 당근ㆍ쑥갓ㆍ어묵 등을 고명으로 얹어 낸다. 매우 얇은 밀가루 피에 소의 양도 적은 완당은 목 넘김이 부드러운 데다가 시원한 멸치육수와 어우러진 깔끔한 맛으로 인해 오래전부터 부산의 주당(酒黨)들이 애호하는 해장음식이기도 하다.
보수동에서 포장마차로 시작했던 이은출 씨는 1956년 서구 부용동 전차역 인근에 ‘18번완당’을 개업하였다가, 1972년에는 현재의 위치인 부용동 1가 69번지로 이전했다. 이은출씨는 1981년에 작고하였지만 장남 이용웅 씨와 손자 이상준 씨가 3대에 걸쳐 가업을 계승하고 있다.
흑염소는 예로부터 부족한 기력을 보충해주는데 더할 나위 없는 보양식으로 이용된 가축이다. 흑염소를 재료로 만든 다양한 음식 중에서 흑염소불고기는 대중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음식이다. 흑염소 고기를 얇게 저며서 고추장으로 만든 양념장에 재워두었다가 석쇠에 얹어 숯불에 익혀 먹는 흑염소불고기는 고기의 성질이 따뜻하고 영양가가 높아 허약한 체질이나 쇠약해진 체력을 보강할 때 특히 많이 애용되는 음식이다.
흑염소는 예전부터 전국의 여러 지역에서 많이 사육되었고 흑염소를 이용한 다양한 향토음식들이 알려져 오고 있다. 그중에서 부산광역시 금정구에 있는 금정산성의 흑염소불고기는 금정산성 막걸리와 더불어 금정산성의 2대 명물로서 1970년대 이후부터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부산광역시 금정구의 향토음식이다.
금정산성의 흑염소불고기가 부산지역의 향토음식으로 부상하게 된 역사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연원은 금정산성의 성쇠(盛衰)와 연관이 깊다. 금정산성은 임진왜란 이후 왜적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하여 쌓은 산성이다. 임진왜란 이후 왜적의 침입을 막는 1차 방어선으로서 동래부(東萊府)를 강화하기 위해 여러 차례 축성 논의가 진행되다가, 1701년(숙종 27) 11월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이 금정산성의 축조를 건의한 것이 채택되어 1703년(숙종 29)에 축조되었다.
금정산성 내에는 관아를 비롯하여 군기고, 화약고, 산성창, 교련청 등 많은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모두 파괴되었으며 산성의 성곽도 상당 부분이 훼손되었다. 또한, 일제가 금정산성을 파괴하자 금정산성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던 산성마을 사람들은 생계의 일환으로 누룩과 막걸리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산성마을에서 제조된 금정산성 막걸리는 박정희 대통령이 매우 좋아하여서 1979년에는 대통령령까지 제정하여 대한민국 민속주 1호로 지정해 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1961년부터 금정산성 막걸리가 부활하는 1970년대 말까지 누룩의 생산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또다시 생계가 막연해진 산성 주민들은 흑염소를 사육하기 시작하였고, 1970년대부터는 흑염소로 만든 불고기를 등산객이나 관광객에게 팔기 시작하면서 향토 음식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금정산의 해발 420m에 위치한 산성마을에는 산성흑염소불고기와 금정산성 막걸리에 관한 유래설이 전한다. 약 300여 년 전 금정산성에 김 씨, 오 씨, 장 씨의 3성이 정착하였는데, 금정산의 산세가 험하고 땅이 척박하여 개간해도 식량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탓으로 누룩과 막걸리를 빚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또한, 세 성씨는 산성 남쪽의 흑염소를 방목하면서 지금의 남문마을이 형성되었고 흑염소 불고기가 유래되었다고 한다.
2009년 부산광역시는 부산지역 향토 음식을 알리기 위해 13개 음식을 향토 음식으로 지정하였는데 산성흑염소불고기도 그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부산광역시 금정구 땅곡길 45-5일대에는 ‘산성마을 먹거리촌’이 형성되어 있다. 부산 산성마을에는 1970년대 초 처음으로 흑염소불고기 음식점이 허가를 받아 영업을 개시한 이래 1980년대에는 음식점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완화된 이후에는 산성마을 안에 100여 곳이 넘는 음식점으로 증가하였다. 산성마을 먹거리촌에는 흑염소불고기뿐만 아니라 오리 불고기도 유명하여 금정산성 막걸리와 곁들이면 금정산 산행과 금정산성 일대의 관광을 마친 관광객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별미로 자리 잡게 되었다.
흑염소는 철분과 칼슘이 풍부해 임산부와 회복기의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식품이다. 특히 비타민E가 많이 함유되어 있어 노화 방지와 불임 예방에 효능이 있어 여성들의 건강식품으로도 알려져 있다. 또한, 신장 기능을 보호하고 다리와 허리가 저린데 복용하면 효과를 볼 수 있다. 고기는 지방이 적고 육질이 연하여 위장의 기능이 약한 사람이나 위장병 환자에게도 좋다.
흑염소 고기, 배, 고추장, 마늘, 생강, 양파, 파, 소주, 깻잎, 상추
조리과정부산광역시 동래구는 조선시대에 행정·외교·경제의 중심지였다. 현재도 그렇지만 전통시대의 읍치(邑治)는 조세와 물산이 집중되고 인원의 왕래가 활발한 곳이었다. 특히 종3품의 도호부사가 파견되었던 동래부는 다른 지역의 도호부와는 달리 일본과의 외교와 교역을 담당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던 관계로 막대한 국가재정을 집행하는 경제도시였다.
조선시대에는 전세(田稅)와 공납(貢納)으로 거둔 세금은 중앙의 호조로 상납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경상도에서 조세로 거둔 미포(米布)의 상당량이 외교비 명목으로 동래부에 곧바로 운송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경상도의 조세 중 쌀로 환산한 약 40,843석 정도가 동래부로 이송되었다. 조선에서 국가재정을 담당하였던 호조의 1년 예산이 평균 12만석 내외였던 것과 비교해도 동래부의 재정규모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동래는 대일교역의 한 축을 담당하였던 ‘래상(萊商)’으로 불리던 동래상인의 활동무대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장시도 크게 발달하여 ‘동래장(東萊場)’은 당시 조선의 큰 장시 중의 하나로 번성하였다.
동래파전은 이러한 동래의 역사와 경제적 배경을 가장 잘 반영한 향토음식이다. 우선 동래파전은 만드는 방법에 있어서 장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빈대떡’이라 부르는 부침개류와는 차원이 다르다. 빈대떡은 모든 재료를 잘게 썰어 반죽에 섞은 다음 국자로 떠 넣어서 부치는 ‘부침’ 형태인 반면에, 동래파전은 원형을 유지한 재료들을 기름으로 익히면서 그 위에 반죽을 부어 지져내는 ‘지짐’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래파전에는 전통음식 중에 지진음식의 대표격인 ‘전(煎)’자가 붙게 된 것이다. 또한 경상도에서 부침개류를 통틀어 ‘지짐이’라고 부르는 데서도 동래파전의 특징을 알 수 있다. 재료에서도 동래파전은 굴, 새우, 조갯살, 홍합 등 해산물과 소고기, 계란, 쪽파, 미나리 등 농축산물, 멥쌀가루와 찹쌀가루의 반죽재료를 사용하므로 여타 부침개류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풍성하고 화려하다.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서민들이 맛보기 어려운 고급음식에 속했다.
동래파전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음력 삼월삼짇날 동래부사가 임금에게 진상하기 위해 만든 음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숙종 때 금정산성을 축성하면서 역군에게 새참으로 제공한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파전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근대음식문헌인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1917년)과 『간편조선요리제법(簡便朝鮮料理製法)』(1934년) 등에 ‘파초대’로 등장한다. 그런데 조선후기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년), 『규합총서(閨合叢書)』(1815년), 『시의전서(是議全書)』(1800년대 말) 등의 고문헌에 전(煎)음식이 본격적으로 소개되는 것 등을 종합하면 파전이 적어도 19세기 또는 그 이전부터 만들어 먹었던 음식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1934년 이석만(李奭萬)이 지은 『간편조선요리제법』에는 파전을 ‘파초대’라는 명칭으로 조리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초대는 미나리와 파로 만드는 것이니, 밀전병 부치듯이 밀가루를 묽게 개어서 미나리와 파를 한 치 길이로 잘라서 각각 넣어 가지고 지짐질 냄비에 지지는 것이니 파로 한 것은 파초대라 하고, 미나리로 한 것은 미나리 초대라 한다.”
실제로 동래파전이 일반인에게 선을 보이기 시작한 시기는 1930년대 무렵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동래 일대의 고급 요릿집에서 술안주로 올렸던 것이 동래장터의 명물로 대중화된 것이다. 동래에는 “장보는 것은 둘째 치고, 파전 먹는 재미로 동래장에 간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동래파전은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동래 인근 양산, 금정 등지의 농축산물과 기장 앞바다의 해산물을 기름으로 푸짐하게 구워 낸 동래파전은 동래주민과 동래장을 드나드는 상인들에게 새로운 맛을 제공하는 ‘작은 산해진미’로 알려지면서 현재까지 이어져 오게 되었다.
동래구청 인근(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 94번길)의 ‘동래할매파전’은 1940년부터 동래장터에서 파전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여 4대째 이어오고 있는 부산광역시에서 향토음식점 1호로 지정한 동래파전의 원조로 알려진 식당이다.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1동 금강공원로 일대는 동래파전 골목이 형성되어 있어 금강공원과 온천장을 둘러본 후 부산의 명물인 금정산성 막걸리를 곁들여 동래파전을 맛볼 수 있다.
멥쌀가루, 찹쌀가루, 쪽파, 미나리, 해산물(굴, 새우, 조갯살, 홍합), 달걀, 쇠고기, 소금, 식용유
조리과정부산광역시 북동부에 위치한 기장군은 어장이 풍부해 예로부터 이곳에서 생산된 미역, 멸치, 갈치는 최고로 쳐서 궁중에 진상할 정도로 유명하였고 그 명성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기장에는 또 다른 명물이 있는데 바로 기장 곰장어이다. 그런데 기장 곰장어가 처음부터 명물로 대접받은 것은 아니었다. 곰장어는 눈이 퇴화되어 보이지 않고 징그럽게 꿈틀거리는데다 껍질에는 끈적거리는 진액까지 있어 몹시 천대받던 물고기였다. 어부들도 그물에 걸려 올라온 곰장어는 바로 떼어서 바다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곰장어는 육고기가 귀했던 시절 바닷가 서민들에게는 단백질을 보충할 수 있는 식품이었다.
곰장어의 공식명칭은 먹장어이다. 먹장어는 먹장어목 꾀장어과의 바닷물고기로 바닥이 펄질인 수심 45~60m의 연안이나 얕은 바다에 서식한다. 눈은 퇴화되어 ‘눈 먼 장어’ 라는 뜻의 먹장어로도 불렸다. 곰장어(꼼장어)는 먹장어가 “죽은 듯이 가만히 있다가 손으로 잡으면 꼼작꼼작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외형은 뱀장어와 비슷하지만 몸이 가늘고 턱이 없다. 입은 씹지 못하고 빨 수만 있어 어류나 오징어류의 살과 내장을 녹여서 빨아먹고 산다.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는 곰장어의 명칭이 해만리(海鰻鱺)라 하고, “맛이 달콤하며 사람에게 이로와 오랫동안 설사를 하는 사람은 이 고기로 죽을 끓여 먹으면 이내 낫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도 “해만(海鰻)은 성질이 차고 맛은 달며 독이 없다. 오치(五痔)와 창루(瘡瘻)에 주로 쓴다. 온갖 충을 죽인다”고 하였다. 곰장어는 양질의 단백질과 비타민 A가 다량 함유되어 있어 당뇨, 숙취해소, 허약체질 개선에 좋고, DHA와 EPA 등 양질의 지방산도 풍부하여 시력보호, 심장·뇌혈관질환 개선에 효능이 있다.
곰장어 짚불구이는 조선말 춘궁기와 흉년에 기장의 서민들이 허기를 채우기 위해 곰장어를 볏짚, 보릿짚 또는 솔잎에 구워 먹은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60~80년 전 해안지역에서 곰장어를 구워 먹던 것에서 기장 곰장어짚불구이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곰장어구이는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주던 음식 중 하나였다. 기장사람들은 1960년대까지도 곰장어를 잡아 밤새워 껍질을 벗겨 구운 다음 꼬치에 꿰어 자갈치시장, 부산시청 앞 등지에서 팔았다고 한다. 현재에 이르러 부산 자갈치시장의 곰장어구이가 부산의 명물로 알려지고, 2009년 부산의 13개 향토음식 중 하나로 지정된 데에는 기장군과 기장 곰장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시랑리는 곰장어 짚불구이의 원조가 되는 지역으로 곰장어 음식점 타운이 형성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짚불구이 곰장어 외에 양념구이, 소금구이, 통구이, 생솔잎구이, 삶은 곰장어, 곰장어 된장국, 곰장어 매운탕 등 다채로운 곰장어 요리를 맛볼 수 있다. 특히 1929년에 개업한 ‘기장곰장어’는 곰장어 짚불구이를 처음 선보인 식당으로 4대에 걸쳐 이어가고 있다.
곰장어, 짚 또는 솔잎
조리과정기장우무는 족편의 한 종류로 기장우묵 또는 기장어묵이라고도 부른다. 족편은 식재료에 따라 두 종류로 분류한다. 그 하나는 동물성 단백질인 콜라겐(Collagen)을 젤라틴화(Gelatin化)하여 응고시킨 묵으로 우족(牛足)을 삶아 만든 족편이 대표적이고 대부분의 족편은 이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음식으로 많이 해먹는 소대가리, 돼지껍질 등도 콜라겐이 풍부한 식재료로 알려져 있다. 다른 하나는 식물성인 우뭇가사리에 함유되어 있는 한천(寒天) 성분을 응고시킨 것이다. 한천에 함유된 아가로스(agarose)와 아가로펙틴(agaropectin)이라는 2가지의 다당류를 가열하여 겔화(Gel化)시킨 것이 바로 기장우무이다.
우뭇가사리는 우뭇가사리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홍조류이다. 우뭇가사리는 몸길이가 10~30㎝ 정도이고 5~10월에 생육하며 수심 20~30m의 바위에 붙어서 산다.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는 “형태는 섬이가사리(蟾加菜)를 닮았으나 몸이 납작하다. 가지 사이에 잎이 있는데 매우 가늘고 빛깔이 보라색으로 특이하다. 여름에 삶아서 우무고약을 만들면 죽이 굳어져서 맑고 매끄럽고 부드러워 씹을 만한 음식물이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뭇가사리에는 요오드와 칼륨 같은 무기질 성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 콜레스테롤을 낮춰주고 혈관계 질환을 예방하는데 좋다. 또한, 열량이 낮으면서도 포만감이 높아 체중조절에 알맞은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우뭇가사리의 한자명은 석화채(石花菜)이고 속명으로는 우무(牛毛)라 한다. 1748년(영조 24) 현문항(玄文恒)이 편찬한 『동문유해(同文類解)』에는 우뭇가사리를 ‘石花菜우모가시’로 표기하였다. 『자산어보』에는 우뭇가사리의 명칭을 해동초(海凍草)라 하였고, 또 모양새가 소의 털과 유사하다 하여 우모초(牛毛草)로도 불린다고 기록하고 있다. 19세기 후반의 상급관청에서 하급관청에 보내는 공문서인 관문(關文)에는 우리말 발음대로 ‘우모가사리(牛毛加沙里)’ 혹은 ‘우모가사리(牛毛加士里)’ 등 이두(吏讀)식 표기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우뭇가사리를 묵으로 만들어 식용한 역사는 오래되었다. 우선 기장우무의 원형인 족편은 중국 원나라에서 편찬된 조리서인 『거가필용(居家必用)』에 수록된 저육수정회방(猪肉水晶膾方)과 이어수정회방(鯉魚水晶膾方)이라는 음식이 알려졌다. 전자는 돼지고기, 후자는 잉어를 재료로 만든 족편인데, 17세기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와 19세기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誌)』에도 『거가필용』의 내용이 그대로 인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록으로는 『태종실록(太宗實錄)』에 우무묵이 오래전부터 해 먹었던 음식임을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1413년(태종 13) 7월 27일 실록에 의하면 “전라도와 경상도의 바닷물 색깔이 변하여, 물을 떠서 그릇에 담으니 마치 우뭇가사리 즙을 끓인 것과 같이 응고되었다(取水盛器 凝如煎牛毛汁)”고 기록하고 있다. 적조현상으로 바닷물이 붉고 걸쭉하게 변한 것을 우무에 비교한 것이다.
『세조실록(世祖實錄)』 1455년(세조 1) 7월 24일 기사에는 호조에서 우뭇가사리로 우무를 만들어 백성을 진휼할 수 있도록 구황식품으로 비축할 것을 건의하였다. 조선 중기의 문신 윤근수(尹根壽, 1537~1616)의 문집인 『월정집(月汀集)』에 수록된 「만록(漫錄)」에는 1468년(세조 14)에는 중국에서 온 사신이 연회상에 차려진 우무(牛毛)를 보고 바다에서 난 풀로 만든 것인데 해무(海毛)라 하지 않고 어찌하여 우무라 부르는지 따졌다는 일화도 전한다. 이상의 기록을 통해 우무가 최소한 조선전기에는 이미 상용화된 식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무는 크게 우뭇가사리만을 끓여내어 체에 걸러 응고시킨 투명한 재질의 묵과 기장우무와 같이 육수에 우뭇가사리와 된장, 계란, 새우살, 조갯살, 방아잎 등을 넣고 끓인 다음 응고시켜 족편 형태로 만든 두 가지로 나뉜다. 조선시대의 고문헌에도 우무 만드는 다양한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예를 들면, 19세기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소고기 1근과 우뭇가사리 4냥(兩)을 섞어 끓인 후 식혀서 굳힌 다음 국수처럼 썰어서 초장(醋醬)에 찍어 먹는다”고 조리법을 소개하고 있다. 또 최영년(崔永年, 1859~1935)의 『해동죽지(海東竹枝)』에는 ‘우모포(牛毛泡, 우무)’를 먹는 풍습을 소개하고 있다. “남해 연안에서는 우뭇가사리가 나는데 매년 여름 공인(貢人)들이 녹두묵처럼 만들어 대궐에 바친다. 또한 돌아다니면서 판매하는 자들도 있다. 이 묵을 잘게 썰어서 초장(醋醬)을 넣어 차가운 탕으로 먹으면 상쾌하여 더위와 갈증을 씻을 수 있다.”
우무가 조선시대에 구황식품으로 이용되었듯이 기장우무도 먹을 것이 부족했던 보릿고개 시절에 끼니 대용으로 만들어 먹던 음식에서 비롯되었다. 식재료에 불과했던 우무에 집에 있는 멸치, 다시마, 된장과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방아잎, 조갯살 등의 재료를 넣어 음식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자극적인 맛을 즐기는 요즘의 미각과는 잘 맞지 않아서인지 기장군의 또 다른 향토음식인 짚불구이 곰장어의 전국적인 유명세에 비하면 근근이 명맥만 이어가는 정도라고 한다. 부산광역시 기장군 대라리에 위치한 기장시장에서 우무를 가득 띄운 콩국 등을 맛볼 수 있다.
우뭇가사리, 계란, 새우살, 조갯살, 방아잎, 석이버섯, 된장, 실고추, 멸치장국, 초고추장
조리과정비빔당면은 삶은 당면에 비빔장과 고명을 얹어 즉석에서 비벼 먹는 부산의 향토음식이다. 먹을거리가 귀했던 한국전쟁 시절 고구마 또는 감자에서 추출한 녹말가루로 면을 만들어 먹었던 데서 유래한다. 비빔당면이 탄생한 지역은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에 위치한 부평시장이다. 피난시절 시장상인들의 허기를 달래는 음식으로 만들어졌다가 부평시장의 명물 음식이 되었다. 비빔당면은 한국전쟁이라는 시간과 부평시장이라는 공간이 어우러진 부산의 현대사가 만들어낸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부평시장은 일제가 한반도를 병탄하던 해인 1910년 조선 최대의 공설시장으로 개설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직후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각종 통조림을 비롯한 식료품을 노점상들이 팔기 시작하면서 ‘깡통시장’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부평시장은 1970년대 전후 전쟁에서 귀국하는 부대와 군인들을 통해 미군의 물품이 대거 반입되면서 베트남전쟁의 특수를 누리기도 했다. 부산의 근현대사에서 부산유통경제의 중심지였던 부평시장은 현재 풍물시장의 면모를 갖추고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먹을 것이 귀했던 피난시절, 부평시장 상인과 부산에 유입된 피난민에게 당면은 중요한 먹을거리로 등장하였다. 당면은 국수와 달리 삶아 놓아도 불지 않고 쫄깃한 식감을 유지하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당면을 미리 삶아 준비하였다가 현장에서는 별도의 조리과정 없이 즉석에서 바로 먹을 수 있는 비빔면의 형태로 정착하게 되었다. 특히 1950년 5월 부평시장 건너편 지금의 부산광역시 중구 창선동에 국제시장이 개설되면서 이른바 먹자골목이 형성되어 비빔당면을 파는 수많은 좌판과 상점들이 부산의 명물이 되었다.
2009년 부산광역시는 부산지역 향토 음식을 관광상품화하기 위해 13개 음식을 향토음식으로 지정하였다. 선정된 향토음식은 곰장어구이, 낙지볶음, 동래파전, 돼지국밥, 밀면, 붕어 찜복어 요리, 생선회, 아구찜, 장어요리, 재첩국, 해물탕, 흑염소 불고기 등이다. 비록 비빔당면은 향토 음식 지정에 포함되지 못했지만 유명세만큼은 절대 뒤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짧은 역사와 재료의 소박함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만 맛볼 수 있는 부산의 가장 서민적인 향토 음식으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초기의 비빔당면은 삶은 당면에 고추장 양념과 참기름만 얹은 단순한 형태였지만, 차츰 고명이 추가되면서 지금의 비빔당면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재료의 증감과 관계없이 즉석에서 바로 먹을 수 있는 향토 음식으로서 부산의 역사가 낳은 패스트푸드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당면, 김, 단무지, 당근, 시금치(또는 부추), 어묵, 양념장
조리과정우리나라의 향토음식은 본래 특정 지역의 자연적 환경과 문화적 배경이 만들어낸 고유한 음식이었다. 그러나 교통과 물류가 발달한 현대사회에 이르러서는 그 향토음식이 존재했던 지역을 넘어 다른 지역에서도 맛보거나 접할 수 있는 전국적인 음식으로 보편화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그 지역에서 유독 전통을 이어오면서 그 지역에서만 맛 볼 수 있는 향토음식도 적지 않다. 그 중 부산광역시의 ‘부산 밀면’이 그러한 향토음식 중의 하나이다.
부산 밀면이 부산광역시의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은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현대사에 속한다. 1950년의 6·25전쟁 과정에서 전시 피난 수도였던 부산은 전국에서 몰려든 피난민들이 전한 각기 고유의 음식문화들이 어우러져 새롭고 독특한 부산 특유의 향토음식문화를 만들어냈다.
지금도 부산을 방문하는 외지인들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향토음식으로 부산 밀면을 비롯하여 자갈치시장의 곰장어구이, 서면의 돼지국밥, 부평깡통시장의 비빔당면, 남포동의 냉채족발, 구포 국수 등이 있다. 이 음식들이 바로 먹을 것이 귀했던 6·25전쟁 시기 피난민의 허기를 달래준 음식으로 생겨났거나 또는 피난민들이 고향에서 먹던 음식이 부산에서 새로운 향토음식으로 거듭난 것들이다.
밀면은 밀국수냉면의 약칭이다. 즉 일반적으로 알려진 전통적인 냉면에는 메밀가루로 만든 면을 사용하는 평양식 냉면과 감자 전분으로 만든 면을 사용하는 함흥냉면으로 알려진 함경도의 농마국수가 있다. 물론 경상남도 진주시에도 조선시대부터 진주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으로 냉면이 있었으나 이 또한 메밀로 만든 면을 사용한다.
이에 반해 부산 밀면은 이름 그대로 메밀이나 감자가루 대신에 밀가루를 재료로 사용하여 만든 냉면이다. 밀가루로 만든 면을 사용하게 된 유래는 흥남철수 등으로 인해 이북지역에서 부산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이 전쟁 통에 메밀가루를 구할 수 없자 당시 미국에서 대량으로 원조하던 밀가루로 면을 만들어 냉면을 만들어 먹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의 잉여 농산물인 밀가루가 대량 유입되면서 부산지역에는 밀면 이외에도 지금의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일대에 국수공장들이 들어서면서 구포시장을 중심으로 이른바 ‘구포 국수’가 피난민의 허기를 달래준 피난음식이었다가 현재는 부산의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부산 밀면을 누가 먼저 시작하였는지의 원조에 대한 논란은 분분하다. 그 중 하나는 함경남도 흥남시 내호리 내호시장에서 1919년부터 ‘동춘면옥’을 운영하였던 고 이영순 씨가 1·4 후퇴로 지금의 부산광역시 남구 우암2동에 ‘내호냉면’이라는 가게를 열고 밀면을 팔기 시작했다는 설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함흥 지역에서 피난 내려온 모녀가 부산에 냉면집을 열었는데, 메밀로 만든 냉면이 부산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자 밀가루로 만든 밀면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그 외에 진주냉면으로 유명한 진주시는 원래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였는데, 1925년 4월 경상남도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밀면이 전해졌다는 설이 전하기도 한다.
부산밀면은 비빔밀면과 물밀면의 두 종류가 있는데, 둘 다 양념고추장이 들어가는 것이 특징이고 삶은 계란과 깨, 오이, 노른자 지단, 수육 등이 고명으로 업어진다. 물밀면이 여름에 시원하게 즐겨 먹는 데 반해 겨울에는 따뜻하게 먹을 수 있는 온밀면도 있다 온밀면에는 잘 익은 김치를 고명으로 얹어서 얼큰한 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부산 밀면은 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 이후부터 부산이 공업화되는 과정에 맞물려 인구가 지속적으로 유입되면서 서민들에게 저렴하면서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선호를 받게 된다. 1970년대 전후로는 부산 여러 곳에 밀면집들이 생겨나면서 대중음식으로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지금도 부산에서 밀면집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 중에서 남구 우암2동의 내호냉면, 부산진구 개금동의 개금밀면과 가야동의 가야밀면, 연제구 거제1동의 국제밀면, 해운대구 우동의 초량밀면 등이 부산 밀면의 명소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애지찜의 재료인 애지는 녹조류인 청각(靑角)의 경상도 방언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경상남도 기장군 죽성리 해안에 많이 서식하는 기장지역의 토산물이며 특색 있는 향토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청각은 여름철에 수확한 것을 말려 두었다가 음식에 이용한다. 기장 애지찜은 청각에 여러 가지 재료를 혼합하여 찜요리로 만들어서 주로 혼례나 환갑 등과 같은 잔치나 의례에 사용하는 부산광역시 기장군의 향토음식으로 예로부터 귀한 식품으로 취급되었다.
고문헌을 살펴보면 찜요리법이 다양하게 등장하는데, 1766년(영조 42) 유중림(柳重臨)이 지은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는 음식 담은 그릇을 끓는 물 속에 넣어 익히는 ‘중탕 찜’과 즙이 바특하게 남을 정도로 삶아 익히는 ‘삶기 찜’이 대표적인 찜요리법으로 소개되어 있다. 애지찜은 국물이 자작하도록 삶는 찜 음식으로 기장지역의 고유한 향토음식이다.
청각은 청각목 청각과에 속하는 녹조류로 사슴뿔처럼 생겼다고 하여 녹각채, 녹각(鹿角)이라고도 부른다. 형태는 선명한 녹색으로 가지는 사슴뿔 모양으로 갈라져 곧게 자라며, 모두 같은 높이에 달하여 부채꼴 모양을 이룬다. 표면은 융처럼 부드럽고, 포자가 들어 있는 주머니는 곤봉 모양이며 길이는 굵기의 5∼7배이고, 꼭대기는 뾰족하다.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는 청각채라 부르며 “뿌리, 줄기, 가지가 모두 토의초(土衣草)를 닮았으나 둥글다. 감촉은 매끄러우며 빛깔은 검푸르고 맛은 담담하여 김치 맛을 돋운다. 5~6월에 나서 8~9월에 다 성장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의하면 “녹각채는 성질이 매우 차고 독이 거의 없다. 열기를 내리고 어린이의 뼈아픈 골증을 푼다”고 하였다. 또한 『식료본초(食療本草)』에는 “오래 먹거나 많이 먹으면 신경이 좋지 않으며 안색이 나빠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식성본초(食性本草)』에는 “열과 풍기를 내리게 하고 담이나 신장의 결석을 내리게 한다”고 하였다. 『자산어보』에는 김치의 맛을 돋운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청각은 오래전부터 김치양념에 넣어 김치의 풍미를 살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청각의 주요영양소는 식이섬유가 가장 많고 뼈에 좋은 칼슘과 빈혈에 좋은 철이 다량 함유되어 있는 무기질의 보고이다. 또한, 비타민A와 C도 풍부하다. 의학 분야에서는 항생작용, 항응고, 항암, 항돌연변이, 면역활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민간요법으로는 구충과 비뇨기 질환, 야뇨증 치료에 이용되어 왔다.
말린 청각, 고사리, 늙은 호박, 콩나물, 미더덕, 조갯살, 다진 마늘, 대파, 들깻가루, 밀가루, 방아잎, 멸치장국, 된장, 소금
조리과정막걸리는 우리 고유의 곡주로 쌀, 밀가루, 보리 등의 곡물을 쪄낸 후 물과 누룩을 혼합하여 발효시킨 술이다. 곡물로 술을 담가 숙성시키면 맑은 술이 위로 뜨고 술 찌꺼기인 지게미는 밑으로 가라앉는다. 윗부분의 맑은 술이 우리가 알고 있는 청주이다. 막걸리는 청주를 떠내지 않고 "그대로 막 걸러서 마신다"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막걸리는 농부들이 즐겨 마셨다고 해서 농주(農酒), 색이 희다고 해서 백주(白酒), 청주와 달리 맑지 않고 탁해서 탁주(濁酒) 등으로 불렸다. 막걸리는 서민을 대표하는 술이기도 하면서 서민들의 허기를 채워주는 술이기도 했다.
금정산 산성마을은 해발 420m 고지에 있는, 부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자연부락이다. 금정산성에서 생산되는 누룩과 막걸리는 300여 년의 역사를 지녔다고 한다. "금정산성에 오, 장, 김씨 3성이 정착하였는데, 척박한 토질을 개간해도 3개월 식량밖에 안 되어 결국 밀을 심어 밀기울을 이용, 누룩장을 만들고, 띄운 누룩에 고두밥을 섞어 막걸리를 제조하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되었다"라고 한다. 이곳에서 만든 누룩은 품질이 뛰어나 일제 강점기 때에는 일본과 만주까지 팔려나갔다고 한다. 또한 "조선 숙종 때 금정산성을 축조하였는데, 당시 각 지역에서 동원된 사람들이 이 지역 막걸리 맛에 반하였고 공사가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 입소문을 내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라고 한다.
좋은 물은 술을 빚는 재료 중 가장 중요한 필수 조건이다. 청정한 자연 속에서 발효시킨 누룩과 물맛 좋기로 유명한 금정산성의 물로 빚은 막걸리는 구수한 맛과 은은한 향이 일품이다. 금정산성 막걸리는 알코올 도수가 8도로 일반 쌀 막걸리보다 알코올 도수가 높고, 전국에서 생산되는 수많은 막걸리 중에서 유일하게 향토주로 지정되었다. 금정산성 막걸리는 산성마을의 부산시가 선정한 10대 향토음식 중 하나인 흑염소 불고기와 함께 먹으면 그 맛이 한층 더해진다.
쌀, 누룩, 물
조리 과정부산광역시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민들이 전한 여러 지역의 음식문화가 어우러져 만들어진 부산 특유의 향토음식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자갈치시장의 곰장어구이를 비롯하여 구포국수, 냉채족발, 돼지국밥, 밀면, 비빔당면 등이 피난민을 통해 부산에 유입되어 정착하였거나 먹을 것이 부족했던 피난시절의 음식으로 등장한 것들이다.
그중에 부산 돼지국밥은 돼지 사골을 우려낸 뜨거운 육수를 밥과 돼지고기에 여러 차례 부었다 따랐다 하여 덥게 만든 다음에 국물을 부어내는 부산광역시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이다. 뽀얗게 우려낸 진한 국물에 경상도 방언으로 ‘정구지’라 불리는 부추를 듬뿍 넣어 새우젓으로 간한 국밥의 맛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부산진구에 위치한 서면시장의 돼지국밥골목은 부산의 원조 돼지국밥 맛을 보러 온 전국의 식객들로 연중 북적인다.
국밥은 전통시대의 장터를 중심으로 발달한 우리나라 고유의 서민음식이자 외식문화의 원조이다. 경상도 지방에도 옛날부터 지역별로 국밥문화가 발달하였다. 경상북도 영천시의 소머리국밥, 대구광역시의 따로국밥, 경상남도 함안군의 소고기국밥 등이 그러한 것이다. 이 지역들은 교통로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어 장시가 크게 발달하였고 교통과 물류의 거점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에 반해 부산의 돼지국밥은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현대사가 낳은 산물이다.
또한 부산은 교통로의 요지이기 보다는 종착지였기 때문에 전국의 음식이 한데 모여 어우러지는 용광로와도 같은 곳이었다. 즉 분단과 전쟁으로 인하여 부산으로 이주하거나 피난 내려온 전국 팔도의 음식문화가 한데 어우러져 부산 특유의 새로운 음식문화가 탄생한 것이다.
부산광역시 영도구에서 58년을 살아온 정진아 할머니가 한국방송공사의 '한국인의 밥상'에서 한 인터뷰에 의하면 어릴 적에는 부산에서 돼지국밥을 본 기억이 없다고 한다. 돼지국밥은 부산에 이북 피난민들이 내려오면서 만들어진 음식이라고 증언하였다. 즉 부산의 돼지국밥은 이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태어난 고유의 향토음식이라기 보다는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회적 환경을 바탕으로 하여 탄생한 음식이다.
부산에 돼지국밥이 자리 잡은 연원은 한국전쟁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부산 지역으로 유입된 피난민들이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돼지뼈를 이용해 탕국을 만들어 먹은 데서 돼지국밥이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1950년 9월 지금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범전동 일대에는 '하야리아 부대' 불리는 주한미군 부산기지사령부가 설치되었고, 주변에는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각종 부산물과 재료를 이용한 국밥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미군부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부산 서면시장에 돼지국밥 골목이 형성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과거의 돼지국밥은 전쟁으로 인해 헐벗고 굶주리며 경제개발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힘겨운 시절, 피난민에게는 타향의 설움을 달래주고 부산서민에게는 고달픈 삶의 애환을 풀어주는 힐링푸드였다. 그러나 현재는 부산시민의 헬스푸드이자 부산을 찾는 식객들이 순례하는 컬처푸드로 자리 잡았다. 2009년 부산광역시는 부산지역의 여러 향토음식 중에서 13개 음식을 부산의 공식적인 향토음식으로 지정하였다. 돼지국밥도 그 중에 하나로 선정되어 부산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전2동 255-15 서면시장 일대는 서면 향토음식 특화거리로 지정되어 있다. 도로 한 쪽에는 돼지국밥집들이 늘어서 있고 그 맞은편은 칼국수집들이 죽 늘어서 있다. 1946년 연지시장에서 개업하여 1950년 이 곳으로 이전해온 ‘송정3대국밥’이 오래된 맛집으로 알려져 있다.
돼지사골, 사태, 전지, 무, 물
조리과정밀국수는 돌잔치나 혼인, 회갑 등 특별한 날에 먹던 음식이었다. 국수 재료인 밀가루가 고려 시대까지 중국에서 수입할 정도로 희소성 높은 곡물이었고, 조리 공정 또한 손이 많이 가고 복잡했기 때문이다. 밀국수가 우리의 식탁에 자주 올라오게 된 것은 한국전쟁 당시 외국 원조구호물자와 함께 대량의 밀가루가 반입되면서부터다. 한국전쟁으로 어려웠던 시절에 밀국수는 허기를 달래는 대표 음식이었다.
구포는 낙동강 유역의 대표적인 물류 거점이었다. 그래서 구포는 각지에서 몰려든 물자로 장시를 이루었다. 이렇게 모인 물산이 낙동강을 따라 멀리 안동까지 오갔다. 특히 1905년 인근에 구포역이 생기고 밀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집하된 밀로 누룩을 빚어 막걸리를 만들어 마셨다. 그러나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의 주세령이 시행되어 더 이상 막걸리를 빚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누룩의 주 원료였던 밀가루로 국수를 만들기 시작했다.
구포에서 국수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6·25 전쟁으로 피난민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구포동으로 모여든 피난민들은 싸고 맛있는 구포국수로 허기를 채웠다. 1959년 10월에 20개의 국수 공장들이 ‘구포건면생산조합’을 결성하고 상표 등록을 해 구포국수를 생산했다. 1960~1970년대에는 구포에 국수 제면 공장이 30여 곳에 달하였다. 국수 제면 공장에서는 국수를 자체 생산하기도 했지만, 서민들이 배급받은 밀가루로 국수를 뽑아주고 삯을 받는 형식으로 ‘삯국수’를 제공하였다. 삯은 돈으로 지불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일정량의 밀가루로 대체하였다. 그 후 1980년 와서 구포국수는 부산의 대표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국수가 다른 곳에서도 대량 생산되고 유통되면서 구포국수는 1990년대 이후부터는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구포국수는 구포시장을 방문한 이들이 간단하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음식으로 유명해졌다. 구포국수는 쫄깃쫄깃하고 짭조름한 면발이 특징인데, 국숫발을 낙동강 강바람과 해풍에 말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수를 만들려면 밀가루, 소금, 물을 혼합해 반죽한다. 면발 제조는 ‘반죽→압연[반죽 밀기]→절출[면 자르기]→건조→절단’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강도를 조정하면 굵기가 다른 소면, 중면 등의 국수가 만들어진다. 구포국수의 종류는 두 가지다. 두께가 얇은 ‘소면’은 익는 시간이 짧고 쉽게 불기 때문에 비빔국수나 낙지볶음·골뱅이무침 등 비벼 먹는 요리에 알맞고, 두께가 두꺼워 좀 더 쫄깃한 맛을 내는 ‘중면’은 주로 국물에 말아 먹는 용도로 많이 쓰인다.
'구포시장'은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 위치하며, 조선중기에 개설되었던 '구포장'의 명맥을 잇는 전통시장이다. 구포장은 매월 3일과 8일에 열렸던 오일장으로 1932년 상설시장이 되었고, 이때부터 상설시장과 오일장을 동시에 운영하고 있다. 현재 구포시장에는 675개의 점포가 조성되어 있고, 농산물, 수산물, 약재, 야채와 과일, 가축, 먹을거리를 파는 거리로 나뉘어 있다. 더욱이 장날이면 전국에서 모여든 상인들 골목골목 자리를 펴고, 500여 개의 노점들이 조성되고 있다.
구포는 조선시대 낙동강 수운과 동래를 잇는 포구로 각종 물산이 집산되는 곳이었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고, 1682년 세곡을 저장하던 '감동창(甘同倉)'이 설치되면서 구포의 상권은 크게 성장하였다. 구포장이 언제 개설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동국문헌비고』(1770)에는 “구포장은 구포 안쪽으로 들어오는 공터와 골목에서 매월 3일과 8일 열렸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때부터 이미 구포장이 활성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포시장은 조선시대에 개설되었던 구포장의 전통을 잇는 시장이다. 구포장은 1932년 당시 구포의 면장이었던 장익원이 습지를 매립해 마련한 터에 목조로 건물을 만들면서 상설시장이 되었고, 이때부터 '구포시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1972년 구포시장번영회가 만들어지면서 곡물・생선을 취급하는 선어구와 곡물구가 조성되었다. 현재 구포시장은 노후화된 시설을 현대화사업을 통해 정비하였고, 2011년 문화관광형 시장을 선정되면서 시장의 이름도 ‘정(情)이 있는 구포시장’으로 바꾸고 시장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구포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먹거리는 '구포국수'이다. 구포국수는 강바람과 바닷바람에 말려서 면이 쫄깃하면서 짭짤한 맛이 특징이다. 한국전쟁 때 구포동으로 모여든 피난민들이 저렴하고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는데,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에 의해 구포국수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밀면은 6·25 전쟁 시기에 탄생한 음식이다. 밀면의 시작은 "1·4 후퇴로 함경남도 흥남시 내호에서 동춘면옥이라는 냉면집을 하던 정한금 씨가 친정어머니와 함께 임시수도 부산으로 피난와 피난촌에서 '내호냉면'이라는 냉면집을 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그러나 전쟁으로 메밀을 구하기가 어려웠고, 부산 사람들에게 메밀면은 익숙지 않은 재료였다. 이에 당시 미군의 원조로 풍부했던 밀가루에 전분을 넣어 쫄깃한 면을 만들었고, 이것이 밀면의 시작이라고 한다. 처음에 밀면을 '경상도 냉면'이라 했다.
이렇듯 함흥냉면은 밀면의 뿌리이다. 고향인 함흥에서 먹던 음식을 피난지 부산에 맞게 변형하여 새로운 음식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고 냉면이 경상도 지역에 없지는 않아, 조선시대부터 서부경남지역의 진주, 사천에는 진주냉면이 존재했다. 이 냉면은 경상도 고유의 음식으로 해물 육수와 육전을 사용했다.
밀면은 유사한 음식인 냉면에 비해 가격이 비교적 저렴하다. 밀가루를 사용했기에 그렇다. 질긴 메밀 냉면 면발을 먹기 힘들어 한 부산 사람들에게 밀면은 크게 인기를 끌었다. 밀면의 굵기는 쫄면과 소면 중간 정도이고, 가게에 따라서는 면의 굵기를 소면급으로 하거나 쫄면급으로 하는 등 각기 다르게 한다.
현재 부산에는 많은 밀면 전문점이 성업 중이고, 여름철마다 부산 근처의 지방에서 많이 찾는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밀가루에 전분이 뿐 아니라 쑥즙을 넣은 쑥밀면도 있다. 냉면에 비해 밀면은 국물에 짠맛과 단맛이 강하고, 돼지고기 누린내를 잡기 위해 한약재를 넣기 때문에 약재 향기가 나는 경우도 많다. 밀면의 대중성은 부산과 경남의 웬만한 거리에는 밀면집이 있는 걸 봐도 알 수 있다.
부산 출신의 사람들에게 밀면은 고향을 생각나게 하고, 타지에서는 먹고 싶어도 못 먹는 향토음식이다. 추석이나 설날은 밀면 가게의 대목인데 그 이유는 외지에 나갔던 부산 사람들이 고향 온 김에 먹고가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냉면은 북한이 원조이지만 밀면은 부산의 기후나 음식문화에 맞게 변형된 음식으로, 부산의 향토음식이 되었다.
돼지국밥은 경상도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는 음식이다. 또한 향토 음식의 하나로 지역을 대표하여 부산에는 돼지국밥 골목이 있다. 허영만은 만화 『식객』에서 돼지국밥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소 사골로 끓인 설렁탕이 잘 닦여진 길을 가는 모범생 같다면, 돼지국밥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반항아 같은 맛이다.” 돼지국밥 애호가인 부산의 최영철 시인은 “돼지국밥을 먹으면 숨어 있던 야성이 깨어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경상도 지역에서 돼지국밥은 다음의 3가지 방식으로 구분하고 있다. 하나는 ‘대구식’인데 이는상대적으로 향신료와 내장을 많이 넣는다. 다음으로 ‘밀양식’은 뽀얀 색깔이 설렁탕을 연상시키는 국물로 대표된다. 마지막으로 ‘부산식[신창 국밥식]’ 인데 곰탕처럼 맑은 국물로 대표된다. 그러나 현재는 일부의 식당만이 이같은 특색을 유지하고 있고, 대부분 모든 방식이 혼합되어 있다.
돼지국밥의 정확한 유래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돼지 뼈로 우려 낸 육수에 고기와 밥을 마는 돼지국밥이 부산과 경상도 일대에 국한되고 1950~1960년대부터 급속히 확산된 것을 보면, 6·25 전쟁을 거치면서 그나마 구하기 쉬운 돼지 부산물로 설렁탕을 흉내내어 뿌리 내린 것으로 추측”된다는 설이다. 김상애 전 신라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돼지국밥은 자생적으로 태어난 향토 음식이라기보다는 전쟁과 피난이라는 혼란한 시대·환경적 토대 위에서 태어난 부산물로 보인다”라고 주장한다. 다른 하나는 “북한 지역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에 의해 북한 지역의 향토 음식이던 순대국밥이 유입되었고, 1960년대 이후 순대가 귀해져 순대를 대신하여 편육을 넣어 현재의 형태로 변형되었다는 설(1952년에 개업한 부산 돼지국밥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하동집’ 주인의 말)"이 그것이다.
어쨌거나 두 가지 설은 모두 6·25전쟁과 관련되어 있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국에 밥을 말아먹는 탕반 문화가 있어왔는데, 피난지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로 만든 탕반이 돼지국밥이었던 것이다. 설렁탕의 변형이든, 북한 지역 순대국의 변형이든 전쟁이 낳은 음식이 바로 돼지국밥인 것이다. 2009년 부산 향토 음식점으로 서구 토성동에 있는 신창국밥, 북구 구포동에 있는 덕천 고가, 연제구 연산동에 있는 경주 박가 국밥이 지정되었다. 그리고 동구 범일동에 있는 조선방직 앞과 부산진구 부전동에 있는 서면 등지에 소위 ‘돼지국밥 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조선 시대부터 구포는 곡물이 모인 곳으로 일제침략시기에는 제분·제면 공장이 성업하였다. 구포에서 국수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피난민이 6·25 전쟁으로 모여들면서부터이다. 20개의 국수 공장들이 1959년 10월 ‘구포건면생산조합’을 결성하고 구포 국수를 상표 등록을 하였고 국수 생산에 힘썼다. 1960~1970년대에는 구포에 30여 곳의 국수 제면 공장이 있었다. 1980년대까지 구포 국수는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구포 국수는 전쟁 기간의 무상 지원, 혼분식을 장려하는 정책으로 인해 많이 팔렸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국수가 대량 생산되고 유통이 되기 시작하면서, 1990년대 이후부터 구포 국수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구포 국수를 만드는 과정을 살펴보면 밀가루, 소금, 물을 혼합해 반죽한다. 면발 제조는 "반죽→압연[반죽 밀기]→절출[면 자르기]→건조→절단"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구포연합식품의 경우 "쌍롤러 두 쌍이 서로 맞물려 반죽을 눌러 붙이면서 넓고 긴 반죽 띠를 만들면, 일반 롤러 6개가 차례로 압축해 국수 면발을 쫄깃하고 탄력 있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롤러마다 부착된 핸들로 반죽의 강도를 조정하면 굵기가 다른 소면, 중면 등의 국수가 만들어진다."
구포 국수의 특징은 면발이 짭짤하고 쫄깃하다는 것이다. 이는 한강 이북에 살다가 내려온 피난민들이 면을 가늘게 뽑는 기술이 있었고, 면을 널어 말릴 때 바다와 낙동강에서 불어오는 염분을 함유한 바람이 면발에 닿아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부산은 피난민의 도시로 제대로 반듯하게 갖춰진 것이 없었고, 여기에 내동댕이쳐진 피난민들도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남자들이 실업난·주택난에 허둥거릴 때 집안의 아낙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이때 가장 손쉽게 좌판에서 팔 수 있는 것이 국수였다. 구포국수는 고향 음식을 닮았지만 어딘가 낯선 음식이었다. 이북식 메밀 냉면이 피난지에서 밀가루를 만나 밀면이 되었고, 밀양·합천·함안 출신 할머니들의 손을 거친 돼지국밥이 이제는 부산을 상징하는 음식이 된 것처럼, 구포국수 역시 한국전쟁기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꾸역꾸역 부산으로 밀려왔다. 그들은 귀국선을 기다리며 물건이 든 고리짝을 팔았다. 고리짝 1개에 무조건 5원씩, 고리짝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따지지 않고 거래되었다. 일본군은 세계대전 말에 미군 상륙에 대비하여, 소개지(疏開地)를 조성하였는데 그곳이 나중에 국제시장 자리가 되는 중구 신창동과 창선동 일대의 공지였다. 일본인들이 판 고리짝들은 이 공터에서 10원에 다시 팔렸다.
일본인의 귀국이 끝나자 이번에는 귀환 동포들이 대거 들어왔다. 귀환 동포들은 광복 후 이곳에 판자촌을 이루어 살았고, 판자집이 2만 여동이나 들어섰다. 이들은 고향에 가는 노자를 마련하기 위해 일본에서 가져온 물건을 팔았고, 이를 빌미로 즉석 시장이 만들어졌다. 장사꾼들은 일본인의 고리짝과 귀환 동포들의 물건을 두고 쟁탈전을 치열하게 벌였다. 때문에 이 시장을 일명 ‘도떼기시장’이라고 한다. 일본어 ‘도리[取る]’에서 유래한 ‘도떼기’는 ‘취하다’라는 말이었다. 도떼기시장은 1948년 자유시장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12동의 단층 목조 건물이 세워졌다.
미군이 주둔하면서 부터는 시장에 미군 부대 물건들이 넘쳐났다. 일본산, 미국산, 국내산 물건이 한데 어우러져 거래되자 ‘국제’라는 말이 어울린다 하여 1950년 시장 이름이 국제시장으로 바뀌었다. 이북에서 6·25전쟁을 피해 내려온 피란민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국제시장으로 몰려들었다. 피란민들은 길거리에 터를 잡고 노점을 차렸으며 토박이 이곳 상인들과 경쟁하며 장사에 억척스럽게 매달렸다.
처음 도떼기시장 상인은 1,000명 안팎에 지나지 않았지만 1·4 후퇴 직후엔 수만 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국제 시장은 당시 피란민들의 급식소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피란민들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음식 찌꺼기로 만든 소위 "꿀꿀이죽"으로 주린 배를 채우기도 하였다. 국제 시장에서는 1950년대 못구하는 물건이 없을 정도로 물건을 다양하게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화재로 많은 재산과 인명 피해를 낳았다. 국제시장은 1952년 11월 27일 대형 화재를 당했다. 그리고 연속적으로 1953년 1월 30일 밤부터 31일 아침까지 또 화재가 일어나 시장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화재로 인한 피해액은 14억 300만 원으로 발표되었고, 이재민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1952년 우리나라 일반 회계 세출 결산액이 206억 9500만 원이었는데 화재 피해액이 14억 300만원이었으니 한국 전체 결산액의 약 7%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1961년 5월 16일 이후 국제시장은 해산 명령을 받았다. 무허가 시장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해산명령에 대응하여 국제시장번영회 창립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리하여 정부로부터 1966년 5월 귀속 재산인 시장 대지를 불하받고 매매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어 국제시장번영회가 1969년 설립 인가를 받았고, 1977년 8월 6일 정식시장으로 개설 허가를 받았다.
국제 시장은 지금 그때와 많이 달라졌다. 국제 시장의 좁고 질척거렸던 길목은 아스팔트로 바뀌었고 주변의 판잣집은 사라졌으며 고층빌딩이 즐비하다. 2002년 시장 현대화 사업을 실시하여 6개 공구별로 2005년까지 아케이드를 설치하고 리모델링하였다. 창선 상가, 부평 시장, 만물의 거리와 함께 2008년 2월 28일 국제 마켓 타운을 만들어 상권 활성화를 꾀하였다. 세월 따라 국제 시장 상인들이 취급하는 상품도 많이 변했지만, 깡통 시장이라는 별칭을 갖고있는 부평 시장에서는 지금도 수입 캔과 식료품이 진열되어 있다. 긴 역사만큼이나 국제 시장은 세대별로 다른 추억을 가지고 있는 장소가 되고 있다.
부평깡통시장은 1890년대에 부산 중구 부평동에 '사거리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자리잡았다. 개항 후 일본인이 몰려와 부산 중구에 주로 거주하면서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이 일본인들이 사거리 시장의 주요 고객이었다. 상인들은 근처의 밭을 사서 장옥과 점포를 설치한 뒤 경찰의 허가를 받아 1909년 한국과 일본이라는 의미의 ‘일한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사설시장을 개설했다. 이 시장은 1910년 전국 최초로 공설 1호 시장으로 지정되었다.
1914년 일제가 정한 시장규칙에 따라 일한시장은 시장 부지와 건물을 부산부 당국이 임차, 1년 뒤 장옥을 개축해 공설시장으로 재개장했다. 공설시장의 이름은 ‘부평정시장’이었다. 국내 최초의 공설시장인 부평정시장은 1920년대에 시장 규모를 넓혀가며 성장했다. 해방으로 일본인이 물러간 뒤 ‘부평시장’으로 이름을 바꿨고, 한국전쟁으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을 취급하면서 다시 장세를 키웠다. 70년대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 식량을 비롯해 다양한 군수품을 선보였고, 통조림 등 미군 물자를 많이 팔아 ‘깡통시장’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깡통 외에도 신기한 물건들이 많아 '도깨비시장'이라는 별칭도 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부평 깡통시장은 일본을 통해 워크맨·양주·화장품 등 세계 각국의 물자를 들여와 소비자에게 판매했으며 전국의 유통업자가 물건을 구하려고 모여드는 시장이 되었다.
부평깡통시장은 부평시장과 깡통 골목을 합쳐 부르는 것으로, 먹거리는 부평 시장, 다양한 수입 제품은 깡통 골목으로 더 유명하다. 이른바 ‘미제’와 ‘일제’ 상품이 깡통 시장 상점마다 가득하다. 특히 한·일 수교 이후 1970년대 일제 밀수품을 팔아 한동안 재미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해외여행 자율화가 시작된 1990년대 들어 부평 깡통시장에도 위기가 닥쳤다. 수입 개방으로 손쉽게 외국 제품을 구할 수 있게 되면서 깡통시장을 찾는 발길이 뜸해졌고, 특히 1998년 부산시청이 연제구로 이전하면서 도심 공동화 현상이 보태져 깡통시장은 쇠퇴에 이르렀다.
중구의 인기 관광지인 남포·광복동 등을 찾았다가 저녁에 갈만한 곳이 없다는 의견이 나오면서 새로운 야간 명소 모색과 원도심 활성화 프로젝트를 위한 대안으로 야시장을 도입하게 되었다. 부산 중구청은 2013년 3월 야시장 육성 종합계획을 수립한 뒤 본격적으로 추진해 같은 해 6월 행정자치부(옛 안전행정부) 야시장 시범공모 사업을 신청하여 ‘전북 전주 남부시장 한옥마을 야시장’과 함께 뽑혔다. 사업 공모 전부터 미리 착착 준비했던 부산 깡통야시장은 선정되자마자 개장에 박차를 가해 같은 해 10월 29일 국내 최초 야시장을 개장, 세계 전통음식과 먹을거리 등으로 관광객을 끌어모았다. 유명 관광지인 ‘남포동 BIFF 광장’, ‘보수동 책방골목’ 등이 가까이 있어 낮 시간대 이 일대를 둘러본 관광객들이 자연스레 깡통시장을 찾게 되면서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봤다.
특히 2014년 12월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이 화제로 떠오르면서 국제시장과 인접한 깡통시장과 야시장에도 방문객의 발길이 늘었다. 깡통야시장은 인근 주요 관광지를 찾는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오후 7시 30분부터 자정까지 매일 문을 연다. 깡통시장 내 110m의 통로에 자리 잡은 야시장은 공고를 통해 응모한 사람 중 엄정한 조건과 심사를 거쳐 ‘야채 삼겹말이’ 등 음식 26개와 ‘석고 방향제’ 등 프리마켓 4개 등 모두 30개의 매대로 구성됐다. 입구부터 오색찬란한 빛깔이 화려한 천장을 장식한 깡통야시장은 다른 야시장처럼 음식 매대에 가장 많은 손님이 줄지어 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 음식도 1천원부터 5천원의 부담 없는 가격으로 즐길 수 있다. 중구청 조사 결과 야시장의 하루 평균 방문객은 2천500~3천500명이며, 주말은 7~8천명이 방문하는 명실상부한 인기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비빔당면은 먹을거리가 없는 6·25 전쟁 시절에 , 가루를 감자나 고구마의 녹말로 내어 국수처럼 먹은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면 자체가 당면은 국수와는 달리 부풀어도 쫄깃하게 씹을 수 있고, 적은 양으로도 포만감을 느끼게 해 주어 당면은 피난 시절부터 주요한 먹을거리가 되었다. 부평 시장에서 1963년부터 비빔당면을 팔고 있는 서성자에 의하면, "깔끔한 맛을 좋아하던 시어머니가 잡채의 느끼한 맛이 나지 않는 당면 요리를 구상하다가 비빔당면이 탄생하였다"고 한다. 또한 "초기에는 좌판에서 당면에 참기름과 고추장 양념만 얹은 소박한 형태로 출발하였지만, 조금씩 고명을 추가해 지금의 비빔당면의 형태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비빔당면을 만드는 방법은 당면을 미리 삶아 말아 놓고 뜨거운 육수에 한 번 풀어서 그릇에 담은 다음, 시금치·어묵·단무지·김 가루 등의 고명을 당면위에 놓고 양념장을 참기름·고춧가루·깨소금 등으로 만들어 얹으면 완성된다
혹자는 조리법과 맛이 비빔당면은 부산의 기질과 닮은 점이 많다고 하는데, 이는 급한 성미의 부산 사람이 선호하는 매운맛을 첨가한 것을 보고 부산 기질이 잘 반영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조리법이 간단한 비빔당면은 즉석에서 빨리 만들수 있는 특성과 당면의 미끄덩거리는 속성상 오래 입속에서 씹기보다 빨리 삼키게 된다는 점에서 그 특성이 어느 음식보다 빠르게 먹게 된다는 것이다. 당면 음식은 먹을 거리가 부족한 피난 시절, 시장에서 사람들이 많이 오가고 쉽게 포만감을 느끼면서도 빨리 만들어 빨리 먹을 수 있어 대표적인 음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면이 곧 잡채라고 여겼던 사람들에게 국수도, 잡채도 아닌 비빔당면은 처음 경험해 보는 맛이었고 바로 즉석에서 해 주는 조리적 특성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지금의 당면집은 국제 시장과 부평 시장 일대에 많이 있으며, 일본 여행객과 타 지역 사람들에게 더 인기를 끌고 있는 음식점이 되었다.
창선동 먹자골목은 일명 ‘약국 거리[과거 약국들이 많이 모여 있던 장소라서 붙여진 이름]’라 불리는 위치인 아리랑 거리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북적거리며 좁은 골목길에 매대로 인한 통행이 불편해도 이 조차도 독특한 먹자골목의 풍경으로 바라보며, 삶의 활력을 찾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곳은 장사를 하루 중 오후에 시작한다. 오후가 되며 오전에는 깨끗하게 비어 있던 골목이 한 떼의 아지매들이 몰려들어 단지 매대와 앉은뱅이 의자만을 놓고 장사를 시작, 야간이면 장사가 끝나 골목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던 모든 매대가 사라지고 빈 공간이 된다.
비빔 당면은 창선동 먹자골목의 먹거리 가운데 가장 특색 있는 먹거리이다. 비빔 당면은 매운 맛과 당면의 조화가 독특한 느낌을 준다. 또한 부산항 특성을 반영하는 어항(漁港)에서 유부주머니는 어묵과 일제 강점기의 흔적을 보여어 역시 부산 다운 향토 음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은 독특성에 기반하여 창선동 먹자골목은 기무라 타쿠야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히어로」의 배경이 되었고, "「1박 2일」, 「런닝맨」" 등에서 먹거리 투어 코스로 부산을 대표하여 소개되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부산 시민들의 추억의 공간으로 부산 시민들에게 인식되던 이곳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로까지 부산의 상징성을 보여주는 공간으,독특한 먹거리 공간으로 인식되어 그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주변의 "BIFF 거리, 깡통 시장, 자갈치 시장 등"과 연결되어 있어 사람들에게 이곳은 부산 투어를 하기에 좋은 곳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하다.
6·25전쟁 당시 피난민들은 많은 사람들이 부산으로 내려와 터를 잡고 살았다. 전쟁통에 식량배급이 힘들었던 그 당시 미군의 원조 물품은 전통 음식문화를 통째로 뒤집어 놓았다. 서민들의 전쟁음식이 이제는 모두가 즐기는 음식으로이어져 가고 있다. 전후음식을 파는 식당은 저마다 수십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이들은 전쟁통에 먹을 것이 없어 대충 있는 재료를 휙휙 쓸어담아 먹은 게 시초인 음식들이기도 하다.
어묵과 오뎅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묵과 오뎅은 조리 방법이 조금 다르다. 어묵은 우리말, 오뎅은 일본 어원으로 구분한다. '어묵'은 생선 살코기에 전분이나 양념 등을 더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익힌 식품이다. 부산어묵은 주로 국내 연근해장에서 잡히는 어린 갈치인 '풀치'와 원양어업에서 잡히는 명태와 도미 그리고 광어 등을 주재료로 만든다. ‘오뎅’은 무·곤약 등에 에 계란·유부·어묵을 함께 국물에 삶은 일본식 요리 ‘니코미 오뎅’의 줄인 말이다.
부산연구원은 2016년 『부산어묵의 역사』에서 어묵과 오뎅의 특성이나 차이 등을 전문가와 시민에게 물어 조사했으나 특별한 차이점을 설명하지 못하였다. 다만 맛에 있어 ‘어묵은 식감이 탱탱하고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간장 등으로 간을 해 독특한 맛을 낸다. 반면 오뎅은 재료의 식감이 부드럽고 간이 센 편이라서 부산 오뎅에 맛을 들인 미식가들의 입맛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평가하였다. 통칭으로 불리는 ‘부산어묵’은 각각 제조방법, 제품구성 등이 다양할 뿐 아니라 업체간에도 제조법이 다르다. 일제강점기 온천장 일대에는 주로 일본인 관료들이 거주했다. 이곳에서는 일본인들의 까다로운 식성으로 인하여 일본인들이 고향에서 먹었던 맛에 맞춘 고급 어묵이 만들어졌다.
1960년, 성명섭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있는 온천시장에서 온천식품을 세워 어묵 제조와 판매를 시작하였다. 이후 1984년 부산광역시 사하구 장림동에 선우식품을 만들어 어묵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1992년 성명섭의 딸 성재란과 사위 김천환이 선우식품을 이어받아 효성식품을 세웠고, 2009년 상호를 (주)효성어묵으로 변경하였다. 2015년 성명섭의 손녀인 김민정이 효성어묵을 이어받았다. 효성어묵은 2009년 부산 지방 식품의약품 안전청의 HACCP 인증을 받았다. 2016년에는 이노비즈 인증을 받았고. 당해 9월에는 여성기업 인증을 받았다.
1923년 출생한 성명섭은 청년 시절부터 부산 온천장과 일본을 오가며 무역에 뛰어들었다. 광복 후 성명섭이 생각한 사업은 명품 수제어묵을 만드는 것이었다. 신선한 재료와 숙련도 높은 성형기술은 어묵의 핵심이다. 주재료인 생선이 신선생육인지 국내외 가공된 냉동어육인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신선식품의 물류과정도 중요한 요인이다. 효성어묵은 이 세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 효성어묵은 1997년 수제어묵업계 최초로 현대백화점 압구정점에 입점하였다. 그리고 2008년 미국 수출을 시작으로 일본 등 전세계로 수출하고 있다. 전국 KTX 역사와 고속도로 휴게소에는 2010년부터 납품하기 시작하였고 대중적 브랜드로 편의점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게 되었다.
3대째 가업을 이어가는 효성어묵 김민정은 피아노와 문화예술경영을 전공했다. 김민정은 효성의 목표를 “천천히 가지만, 전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어묵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인정받는 기업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부산의 어묵 산업은 부산의 풍부한 수산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 생산기술을 받아들이면서 어묵 산업이 발전했다. 효성어묵은 ‘여의도장어’와 공동협력하여 ‘부산 장어어묵’을 개발하여 수출에도 나섰다. 효성어묵은 해양관리협의회(Marine Stewardship Council)의 MSC 인증도 획득하였다. MSC 인증은 MSC 에코라벨(Eco-Label) 사용 권한이 주어지며, 수산물의 어획과 가공·유통 기준에 있어 국제적으로 신뢰도와 인지도가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부산의 개항과 더불어 부산어묵의 역사가 시작된다. 부산어묵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924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의 시장』에서 찾을 수 있다. '부평시장은 쌀, 어묵, 채소, 청과물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라는 기록이다. 우리나라 어묵의 시작은 조선시대 숙종 45년(1719년)에 편찬된 『진연의궤』에 등장하는 ‘생선숙편’을 그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현재의 부산데파트 자리에는 일본인이 1936년 세운 어묵공장이 있었다. 이 어묵공장은 1945년 광복이 되면서 공장장이었던 박동원이 이어받았다. 우리나라 사람이 세운 최초의 어묵공장은 부평동시장에 이상조가 설립한 동광식품이다. 삼진식품을 세운 박재덕은 일본에서 어묵제조 기술을 배워 영도 봉래시장 입구에서 1950년 초 상호없이 어묵을 판매하다 1953년 삼진식품 가공소를 세웠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산으로 많은 피난민이 들어오게 되어 부산의 어묵 생산은 호황기를 맞았다. 이즈음 삼진식품과 동광식품 출신의 공장장이 환공어묵을 세우면서 부산의 어묵시장은 동광식품·삼진식품·환공어묵의 3자구도가 형성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이들 식품회사에서 기술을 익힌 기술자들이 독립을 하면서 부산어묵 시장은 춘추전국시대가 되었다. 영진·미도·대원·효성 등이 이때 생겨난 공장이다. 3각 구도를 형성했던 동광식품은 잠시 맥이 끊어졌지만 중앙시장에서 최근 창업주의 손자가 이어가고 있다. 환공어묵은 1990년 부도가 난 이후 새 주인이 경남 김해로 본사와 공장을 이전하였다. 삼진식품은 영진식품과 더불어 어묵시장의 부침 속에서 부산어묵의 전통과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삼진식품은 박재덕이 1950년 초 상호없이 판잣집에서 어묵을 가공하여 판매하면서 시작되었다. 박재덕은 일본에서 어묵제조 기술을 배워와 가게를 꾸리기 시작한 것이고, 1953년 삼진식품 가공소라는 상호를 내걸었다. 현재의 삼진식품이라는 상호는 1980년대 중반에 변경하였고, 1983년부터는 박재덕의 아들인 박종수가 가게를 이어서 운영 중이다.
1950년 6·25전쟁 직전 박재덕은 봉래시장에 터를 잡았는데, 그 이유는 시장 주위에 인구가 많고 어묵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의 수급이 쉬웠기 때문이다. 당시 어묵 주원료는 연근해에서 잡히는 '풀치'와 '깡치'였다. 현재의 롯데백화점 광복점 자리는 '큰 도가'라 하던 제1수산시장이 있었고, 남포동주민센터 자리는 '작은 도가'라 하던 제2수산시장이 있었다. 어묵의 품질은 재료의 선도가 결정한다. 때문에 운송 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 부평동시장이나 영도는 어묵 제조의 메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삼진식품은 어묵 제조 시 어육과 밀가루의 함량비율을 75:25를 고집한다. 박종수는
“밀가루 함량이 높으면 절대로 이런 탄력이 안 나온다. 때로는 생산원가보다 재료비가 더 높을 때도 있지만 원칙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 대기업과의 경쟁 속에서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위해서는 품질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삼진식품은 2011년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일본에 어묵을 수출하였다. 그 비결은 ‘선대부터 고집해온 어묵에 대한 장인정신’과 ‘자동화 생산시설을 갖춘 공장’이었다. 박종수는 “어묵을 만드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밀가루 함유량이다. 일본은 생선을 70~80%정도 넣는다. 우리도 생선 함유량을 75~80%정도 고집하고 있다. 심지어 90~100%까지 도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삼진식품은 “지금까지 어묵을 만들어오면서 생선함유량이 75% 이하로 내려간 적은 한 번도 없다.”고 강조한다.
'자산어보'에서는 멸치를 멸어(蔑魚), 추어(鯫魚)라고 기록해놓았다. 잡아 올리는 즉시 죽는 급한 성질을 빗대어 滅(멸할 멸) 자를 붙여주고, 작고 빨리 죽기 때문에 보잘것없는 생선이라 하여 鯫(송사리 추)자를 붙여주었다. 잡자마자 금방 죽고 빠르게 상하기 때문에 멸치는 보통 어획되자마자 배 위에서 찌거나 삶아 육지에서 말리고는 했다.
오늘날 남해에서는 유자망이라는 조업방식을 통해 멸치를 잡는데, 이는 멸치의 머리는 들어가지만, 몸통은 꽂히게끔 그물코의 크기를 조절하여 잡는 방식이다. 그물이 수면과 수직 방향으로 펼쳐지면 조류의 흐름에 따라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그물코에 화살 꽂히듯이 꽂히게 된다. 엄청난 속도로 그물에 꽂히기 때문에 빠져나가지 못한 멸치는 그물에 걸린 채 버둥거리다가 어부들이 그물을 끌어 올릴 때 무더기로 끌려온다. 그러므로 남해에서는 멸치가 ‘잡혔다’라고 하지 않고 ‘꽂혔다’고 한다.
멸치가 그물에 꽂히기 시작하면 그 모습을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던 갈매기들이 하나둘씩 날아들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이것을 신호 삼아 어부들이 그물을 회수했는데, 요새는 어군탐지기로 측정하여 어획한다. 그물을 다 끌어 올리면 부둣가에 배를 정박하고 멸치 떨이를 시작한다. 작은 생선이 많이 걸려있기 때문에 손으로 일일이 뜯어내기보다는 이불 먼지 털 듯이 그물을 털어내어 멸치를 수확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멸치 떨이를 할 때는 네 다섯 명이 각자 그물 한쪽씩을 잡고 대장의 선창에 따라 후렴구를 외치며 박자를 맞춰 그물을 털어낸다. “어이야” 외치면 후렴으로 “디야”를 외치는 방식으로 어이야, 디야 외치다 보면 팔과 어깨가 빠질 것 같고, 허리가 아프다. 그 때문에 멸치잡이는 바다에서 돌아와 그물을 털기 시작할 때부터가 시작이라는 말도 있다.
힘차게 그물을 털어야 단단하게 꽂힌 멸치를 털어낼 수 있으므로 세차게 털어내지만, 이렇게 털다 보면 멸치의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기 일쑤다. 이렇게 분리된 멸치는 온전한 상태를 유지한 녀석들보다 낮은 등급을 받고 젓갈용으로 분리된다. 세차게 터는 과정에서 비교적 쉽게 쏙 빠져나와 머리와 몸통이 온전한 멸치들은 통 멸치구이로 사용되거나 일일이 손으로 손질하여 멸치회와 멸치회 무침에 사용된다.
멸치잡이 기간에 기장군의 항구들에 가면 아주머니들이 바구니 서너 개를 놓고 멸치를 분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멸치 손질과 분류를 하는 곳에서 칼을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는데, 칼을 쓰면서 손질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작이 느리면 사람체온에서 나오는 손의 열기로 멸치가 상해버려 횟감으로 사용할 수 없기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멸치를 손으로 찢어 머리와 내장, 비늘을 제거하고 살을 분리하는 숙련자의 기술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횟감으로 손질, 분류한 멸치는 초장에 찍어 미역이나 다시마에 쌈을 싸서 먹는 것을 최고로 친다. 하지만 이는 사람에 따라 살짝 비리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특히 아이들의 경우 미역이나 다시마를 잘 안 먹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멸치회 무침을 추천한다. 초고추장과 미나리, 실파 등을 넣고 버무려 내었기 때문에 회무침 특유의 매콤·달콤·새콤 세 박자가 입맛을 확 돋우어 낸다. 처음에는 양념 맛이 강하지만, 뒤이어 멸치의 고소한 맛이 느낄 수 있다. 회무침을 충분히 즐기고 나서 밥을 한 공기 볶아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다면 ‘제대로’ 즐겼다고 자랑할 만하다. 멸치 축제를 하는 4~5월 중이 멸치가 가장 기름지고 살이 오르는 시기이기 때문에 멸치회나 멸치회 무침의 온전한 맛을 느끼기 위해서는 날짜를 잘 맞춰 갈 필요가 있다.
시장바닥이나 푸드트럭에서 너무나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호떡. 그 친근한 느낌을 생각하면 우리나라 음식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호떡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고, 우리나라에서 발명된 음식이 아니다. 기록을 찾아보면 중국에서 호인(胡人)이라고 불리던 중앙아시아의 아랍인들이 밀가루 반죽을 화덕에 구워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이름이 후빙(胡餠)이었다. 쌀보다는 밀가루가 더 많이 나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흉노족, 선비족, 돌궐족 등은 밀가루 반죽을 화덕에 구워 빵 형태로 먹었는데, 그들과 국경을 맞대고 문화교류를 하던 중국은 여기에 고기와 채소를 채워 넣어 황제 일행의 식단에 넣는 등 다양하게 즐겼다.
아랍 문명과 중국의 문명을 거쳐 19세기 말, 화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호떡이 우리나라에 퍼지기 시작했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육군 3천여 명을 파견했는데, 이때 청나라 상인들도 군인들과 함께 한반도에 상륙했다. 군사적 원조를 통해 확고한 경제적 지위를 자리 잡아가려는 계산이 깔린 행동이었다.
20세기 초, 청나라는 망했지만, 한반도에 자리 잡은 화교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증진해 나갔다. 그들이 만들어 소개한 호떡은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되었다. 호떡 안에 꿀이나 조청, 설탕 등을 넣어 달짝지근한 맛을 내는 호떡이 개발되었고 인천 지역을 넘어 서울 종로까지도 퍼져나갔다.
일제강점기 종로에서는 중국인 인력거꾼들이 주로 호떡을 사먹었는데, 값이 싸고 쉽게 상하지 않아 허기를 채우기에 꽤 괜찮은 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부산을 최후의 보루로 삼고 치열하게 저항했던 한국전쟁 기간에도 호떡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부산으로 모여든 피난민들은 다양한 종류의 곡물 씨앗을 넣고 호떡을 만들어 먹었다. 휴전 이후, 미국에서 우리나라에 밀가루로 대대적인 식량 원조를 해줬고, 이 밀가루로 만든 호떡은 대중화되었다.
당시 호떡은 지금처럼 기름에 튀긴 형태가 아니라 화덕에 구운 마른 형태였다. 가끔 길거리에 세워진 푸드트럭에서 ‘중국 호떡’이라는 이름으로 파는 호떡이 있는데, 가운데 속이 비고 바삭 담백한 빵의 형태로서 당시 호떡과 비슷하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호떡이 한 번 더 변신하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식용유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기름에 부쳐 먹게 되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기름지고 쫀득한 맛의 부산 씨앗호떡은 1980년대 남포동 거리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다. 화덕에 구울 필요 없이 밀가루 반죽을 식용유 두른 호떡 판에 눌러 튀겨낸 후, 가운데를 잘라 각종 견과류를 듬뿍 채워내면 부산 씨앗호떡이 완성된다.
오도독 씹히는 특유의 식감과 고소한 맛이 입소문을 타고 해운대와 같은 관광지구로 점차 퍼져나가, 이제는 부산을 방문하면 꼭 먹어봐야 할 부산의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혔다. 이제 호떡은 연중 어느 때나 먹어볼 수 있는 국민 간식으로 자리 잡혔지만, 겨울철 부산 앞바다에서 먹는 씨앗호떡은 아직도 특별한 지역 별미로 꼽힌다. 찬 바람 부는 항구도시에서 호호 불어가며 먹는 씨앗호떡은 6.25 전쟁 최후의 보루였던 부산에 모인 피난민들의 추억을 담은 식사이자 간식이기 때문이다. 전 국토가 함락될 뻔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무사히 빠져나온 안도감이 호떡의 온기를 통해 느껴진다.
낙곱새를 먹어본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극찬한다. “대체 이런 조합은 누가 만든걸까!” 최강 조합의 별미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부산의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오래전부터 국제적인 도시였던 부산은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에 수차례의 군사적 침략을 받기도 했지만, 평화기에는 일본 사신들이 오가는 문화 교류의 관문이었다. 우리 민족의 뼈아픈 역사인 6.25 전쟁에서도 국군과 미군의 최후의 방어지이자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으며, 지리적으로도 훌륭한 항구를 가지고 있어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무역국가로 발돋움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덕분에 부산에는 미국과 일본, 홍콩 및 동남아에서 들어오는 수백, 수천가지 물품과 그에 따라오는 문화도 지속적으로 소개되었고, 그것들을 잘 녹여내어 우리 문화의 일부로 흡수하는 역량을 키워나갔다. 그 때문인지 부산은 이것저것을 섞어 잘 조화롭게 녹여낸다. 요즈음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낙곱새’ 또한 이러한 부산의 비법이 적용되어 탄생한 지역 별미라고 볼 수 있겠다.
낙곱새는 낙지·곱창·새우를 매콤한 양념장과 함께 넣고 국물이 자작자작해질 때까지 끓여내는 요리다.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960년대에 부산에서 개발된 낙지볶음인 ‘조방낙지’에 이르게 된다. 저렴한 안주를 찾는 노동자들에게 낙지를 삶아 초고추장과 내어 주었던 것이, 점차로 낙지를 아예 고춧가루 양념에 넣고 끓여 볶아내는 방법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새로운 요리의 이름은 당대 기업명이었던 '조선방직'의 노동자들이 즐겼다고 해서 조방낙지라고 불렸는데, 조리법의 변화가 새로운 음식을 만든 것이었다. 여기에다 재료를 더 추가해서 한 번 더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 바로 낙곱새다.
고소함으로 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곱창, 그것이 매콤한 낙지볶음에 들어가는 순간 ‘신의 한수’가 된다. 부산은 곱창골목이 따로 형성되어 있을 만큼 곱창으로 유명한데, 이 맛있는 것을 낚지볶음에 넣었으니 어찌 보면 ‘맛이 없을 수가 없는’ 조합이다.
그런데 사실 낙지와 곱창의 환상적인 조합을 더 끌어올리는 비밀은 낙곱새의 막내, 새우에 있다. 새우의 탱글탱글한 식감은 낙지와 곱창에서 이어졌던 고소함의 여운을 깔끔하게 잡아준다. 그래서 보통 낙곱새가 나오면 먹는 순서로 낙지를 우선 한 점 먹고, 그 다음 곱창 한 점, 그리고 마지막에 새우를 먹으면서 식사를 시작한다. 물론 먹는 순서가 따로 정해져있는 건 아니지만 특이하게도 사람들이 낙곱새의 첫 수저를 뜰 때는 이 순서를 지킨다.
인기 먹방 TV프로그램인 <맛있는 녀석들>에서도 이렇게 먹는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는데, 아마 이 순서는 담백하고 고소하면서 탱글탱글한 3가지 재료의 식감을 온전히 확인 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새우는 우리나라에서 쉽게 잡을 수 있는 어종이 아니었다. 1980년대부터 태안 중심으로 바다 새우 양식이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이것이 서해에서 점차로 내려와 남해에서도 활성화된 것이다. 음식이 한 지역의 먹거리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맛도 중요하지만, 가격도 중요하다. 낙곱새에 화룡정점을 찍는 새우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새우의 원활한 보급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지금 논하는 부산의 별미에는 우리나라 새우 양식의 역사 또한 녹아있는 것이다.
낙곱새는 90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경제성장과도 맞물려있다. 국민 소득수준이 크게 향상되어 낙지에 곱창을 넣어 만들자는 기막힌 발상이 통했고, 여기에 새우양식의 성공까지 겹쳐서 탄생한 것이 우리가 오늘날 먹는 낙곱새라는 별미의 숨은 이야기다. 하지만 이모든 것은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고자하는 도전정신이 없다면 이루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격동의 역사에서 이것저것 섞어보고 해석해보고자 한 부산의 열정이 녹아있는 음식이 바로 낙곱새가 아닐까 싶다
부산의 하늘은 겨울에도 푸르고 높다. 일제시대 때 소를 키우던 소 막사가 있었다는 우암동으로 향한다. 소 막사는 6.25 전쟁 후에는 피난민들의 거처(居處)가 되었다. 구불구불 좁은 그곳을 나오면 우암 동구시장이 나온다. 발길이 드문 재래시장에서 유독 한 집에만 삼삼오오 사람들이 드나든다. 2019년이면 백 년을 맞는 내호냉면집.
이 집에는 육십 년이 넘도록 부엌을 지킨 아궁이가 있다. 내호냉면 식당은 구조도 독특하다. 시장 입구의 골목을 사이에 두고 앞뒤 옆, 위아래 모두가 내호냉면집이다. 알고 보니 사람이 다니는 골목을 사이에 두고 조금씩 증축을 하였다. 하나로 합쳤다면 꽤 큰 건물이었을 텐데 길을 막지 않고 공간을 만들려 했던 주인장 유상모(남, 71세) 씨의 생각으로 지금의 형태가 된 것이다. 그런 사연으로 아홉 번 공사를 하여 내호냉면 집만 일곱 채이다.
내호라는 가게명은 함경남도 흥남시 내호(內湖) 면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1950년 12월, 유 씨의 부모님은 우여곡절 끝에 부산까지 피난을 와서 5평도 안 되는 냉면집을 차렸다. 내호시장에서 동춘면옥을 운영했던 솜씨를 발휘하여 고(故) 이영순 여사와 고(故) 정한금 여사가 함흥냉면을 만들었다. 지금은 유 씨의 부인이자 돌아가신 정한금 여사의 며느리인 이춘복(69세) 씨가 3대째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 유재우(43세) 씨가 4대째 가업을 이어간다. 식당 경영과 재료구입, 양념장을 숙성하고 육수를 내는 일 모두를 유재유 씨가 한다.
제가 어릴 때 할머니는 ‘니가 이어가야 한다.’라고 늘 말씀하셨어요.
할머니, 할아버지는 통일되면 다시 올라간다고 생각하셨고 사발 몇 개,
나무로 만든 사과 궤짝 놓고 냉면을 팔았대요.
함경도식으로 농마 국수(녹말 국수)를 해가지고 면이 질기니까
남쪽 사람들보다 피난 오신 분들이 주로 드셨대요.
지금도 그 맛을 아시는 분들이 오시죠.
할머니의 손맛을 어머니가 이어가셨고 저도 그러고 싶어요.
군대 다녀와서 배운 것이 지금은 십여 년 되었어요.
함흥냉면은 감자나 고구마 녹말로 면을 만들어서 가자미회와 양념 등을 올려 비벼 먹는 냉면이다. 함경도 지방은 지형이 험준하여 메밀 대신 감자녹말로 냉면을 해 먹었다. 수동식 제면기로 농마(녹말의 북한말) 국수를 뽑아 식량이 부족한 겨울철에 먹던 음식이었다. 6·25 전쟁 이후 피난민들에 의해서 남쪽 지방에도 알려지게 되는데 냉면국수의 주요 재료인 감자녹말은 고구마 녹말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미군의 구호품이었던 밀가루 보급으로 고구마 녹말과 밀가루를 섞어 면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밀면이 탄생하게 되었다. 1955년 밀면 가격은 5원이었다.
1948년 5월 21일 부안신보를 살펴보면 ‘가족요리지식, 각종 냉면 만드는 법’에 <밀국수 냉면>이라는 기사가 있다.
재료는 밀가루 한되, 간장 한종지, 닭한마리, 파두뿌리, 우육 반의 반근, 마늘하나, 애호박 한개(중략) 一. 고기로 맑은 장국을 맛있게 끄려 식혀서 기름을 모두거더노코(중략)... 五. 밀가루는 끌른물로 반죽을 충분히 해서 잘 게 밀어서 가늘게 썰어노코... 七. 대접에 밀국수를 담은 후 국물을 붓고 차게 해서 만들어서 먹을지니라(기사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
또한 1963년 4월 25일 동아일보에서도 ‘집에서도 손쉽게 여름철 입맛 돋우는 냉면’이라는 기사를 살펴볼 수 있다. 겨울철의 냉면이 언제부터 여름의 별미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음식문화에 많은 변화가 있었고 냉면과 밀면도 이에 해당한다.
이곳의 비빔밀면과 비빔냉면은 주방에서 나올 때 양념장에 비벼져서 나온다. 눈으로 보는 것과 달리 맵지 않다. 자극적이지도 않고 달지도 않다. 깔끔한 맛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식당에는 밀면을 먹는 방법이 크게 적혀있다.
밀면은 부드럽기 때문에 가위로 잘라버리면,
그 국수 먹지 뭐할라꼬 밀면 먹나 생각이 들지요.
밀면이고 냉면이고 쫌 땡기고 목젖을 치는 그 맛으로 먹는 거죠.
저희 냉면은 간이 강하지 않아요.
순수한 재료의 맛, 깔끔한 맛을 좋아하는 분들이 오시죠.
고춧가루를 삼일 정도 숙성해서 매운맛을 중화해야 돼요.
저흰 기교가 없어요. 순수한 재료의 맛입니다.
아궁이의 솥을 옮기지 않는 고집. 음력 초삼일이 되면 온 가족이 불자리에 기원을 하며 한 해를 시작한다. 그 정성이 고부간에 이어지고 자식에게 이어졌다. 고향을 지척에 두고 돌아가신 유상모 씨의 아버지(유복연, 1921~2009). 고향을 그리워했던 그들의 마음이 내호냉면의 특별한 맛을 만들었나 보다.
푸릇푸릇한 쪽파가 번철(燔鐵) 위에 가지런히 누웠다. 뚜껑을 덮어 해산물과 파가 익으면서 한 숨 노곤해지면 덮어두었던 뚜껑을 연다. 신선한 쪽파의 향기가 달착지근하게 올라온다. 이것이 동래파전이다. 부산의 동래파전은 밀가루 파전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조금 낯선 음식이다. 일반적으로 파전이라고 하면 바삭하게 기름에 구워진 밀가루 파전을 생각한다. 밀가루 위에 쪽파가 얹어진 모습이랄까. 반면 동래파전은 엄청난 양의 쪽파 위에 찹쌀가루 반죽한 물을 한 숟가락 뿌려 익힌다. 게다가 찹쌀 반죽은 익을수록 질어지고 죽이 된다. 밀가루 파전과 달리 쪽파와 해물이 주인공이며 찹쌀은 이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접착해 주는 역할을 한다.
동래파전을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다. 우선 쪽파를 다듬는 작업이 까다롭다. 연한 속대만 사용한다는 원조동래파전 박말태(여, 62세) 씨는 서른 즈음에 이 일을 시작해서 어느덧 삼십 년이 되었다. 그녀는 향긋하고 연한 부드러운 속대만 사용하여 파전을 만든다. 정갈하게 다듬은 파들을 유채씨 기름 위에 가지런히 줄을 맞추어 눕히고 멸치 다신 물과 고춧가루로 간을 맞춘 찹쌀 반죽을 뿌린다. 알이 굵은 굴과 새우, 대합을 듬뿍 넣고 계란을 툭 깨어 올려 마무리를 한다. 찹쌀 반죽은 식으면 쫄깃해지기 때문에 식으면 식은 대로 맛있다.
예전에는 어릴 때 동래시장 난전에서 파전을 지질 때 돼지기름 발라서 녹여가지고 올려가 그 냄새에 얼마나 춤이 넘어가노. 그래 식구들이 장에 간다카면 그 가는 김에 그 하나 사 오소 했지. 그땐 춥고 배고파서 그 하나만 다지.
파전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여름철의 실파를 다듬는 일이었다. 여름이 되면 실파가 난다. 실파는 쪽파보다 가늘어 다듬기도 어렵지만, 장마철이 되면 흙 범벅이 되어 썩어서 버리는 것이 반이었다. 요즘이야 비닐하우스에서 쪽파를 재배하여 그런 일은 없지만 재룟값이 워낙 비싸졌다. 비가 오는 날이면 해물파전에 막걸리나 동동주가 생각이 난다. 왜일까? 전문가들은 해물파전에 함유된 단백질과 비타민B는 비 오는 날에 드는 우울한 기분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독특한 파 향기의 원인인 `황화아릴'은 어패류가 가지고 있는 비타민B1의 흡수율을 높여서 기분을 상승시켜 준다.
파전을 제대로 맛보려면 봄철이어야 한다. 그것도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온돌로 된 주막에 앉아 비 오는 창을 열어젖히고 동동주 한 동이와 향긋한 파전 한 접시면 이야기가 필요 없다. 비에 젖은 봄밤은 속삭이는 추억이 될 테니 말이다.
부산 동래에는 동래구청을 근처에 원조동래파전과 동래할매파전 집이 있다. 원조동래파전은 박말태(여, 62세) 씨와 그녀의 남편이 삼십 년 동안 운영하고 있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동네에는 오뎅공장이 있었다. 어머니는 내게 가끔 오뎅 심부름을 시키셨다. 골목을 나와 큰길을 건너면 오뎅공장이 보였다. 거대한 통의 흰 어묵을 반죽하던 장화 신은 키 큰 아저씨는 동그란 모양과 길쭉한 모양, 넓적하고 네모난 모양의 오뎅을 섞어 한 봉지 가득히 담아주셨다. 문 앞에 서 있던 나는 따듯하고 말랑한 기름진 오뎅을 가슴에 품었다. 심부름의 보상으로 신선하고 고소한 오뎅을 입에 오물거리면서.
필자와 오뎅과의 인연은 이게 다가 아니다. 도시락을 쌌던 초등학교 시절에는 소시지보다 오뎅 반찬을 좋아했다. 고등학생 때 학원에 다닐 때도 근처 포장마차에서 파는 오뎅을 사 먹었다. 포장마차의 주인아주머니는 손님이 없는 짬짬이 얇고 넓은 오뎅을 삼등분으로 접어서 대나무 꼬지에 주름지게 꽂았다. 그 손놀림이 놀라울 정도로 빨라서 넋 놓고 바라볼 정도였다. 자고로 오뎅은 쫄깃하고 살짝 오동통하여 국물 맛이 배어 있어야 하며 간장에 찍어 먹어야 제맛이다.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했던 그 분홍색 플라스틱 간장통. 지금은 솔을 사용하여 오뎅에 간장을 바르거나 스프레이로 간장을 뿌려 먹지만 그때는 그랬다.
오뎅 바람이 서울에서 강하게 불어댄 것이 1990년대 즈음이었던 것 같다. 종로와 을지로 등 거리마다 오뎅을 파는 포장마차가 줄지어 있었고 특히 붉은 페인트로 ‘부산오뎅’이라고 쓴 포장마차에서는 연실 흰 수증기를 뿜어댔다. 그런데 우리에게 추억이 되고 있는 ‘오뎅(おでん)’은 일본요리의 이름이다. 어묵과 우무, 무 등을 넣고 끓인 냄비 요리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뎅이 아닌 어묵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1935년 9월 18일 매일신보를 살펴보면 ‘「熬뎅」집 出入도 學生은 안된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중략) 최근 표면으로는 오뎅집이라고 하고 비밀히 二三명의 식녀급(女給, 카페나 다방, 음식점 따위에서 손님의 시중을 드는 여자)을 두어서 학생생도들을 끄터들이는 오뎅집들이 잇서서 오뎅집에도 학생생도들의 출입을 금하게 되엇다(기사내용 그대로 인용).
일제 강점기 시대에는 통영과 부산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어묵공장이 생겼다. 전문가들은 1907년 야마구치어묵제조소(山口 蒲鉾製造所)에서 시작되어 해방 직전까지 대략 15개 내외의 어묵공장들이 부산에서 운영되었다고 전한다. 이후 1940년대 말과 1950년대를 전후해서 동광식품과 삼진식품이 영도 봉래시장 입구에 들어선다. 한국인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어묵공장이다. 한국전쟁 이후 부산은 갈치와 조기, 노가리(어린 명태) 등 어묵의 재료 조달이 수월하여 호황을 맞게 되고 연이어 이와 같은 업체들이 생겼다. 그리고 공동 브랜드로 부산오뎅이 탄생한다.
2013년 12월 19일 본점 개장한 날이 제가 입사한 날이에요. 삼진어묵이 1953년에 설립했으니까 64년(2018년 기준) 됐지요. 삼십 년 전에는 어묵이 백 원도 안 했어요. 봉래시장에서 사 먹었지요. 여기서 배출한 상인들이 꽤 많아요.
삼진어묵 본점에서 흰 모자를 쓰고 어묵을 판매하는 황영옥(여, 60세) 씨의 이야기이다. 일하는 내내 웃는 얼굴인 그녀는 직장에 대한 자긍심이 높아 보였다. 3대를 이어 운영하는 이곳의 대표는 박용준 씨이다. 그는 어묵 경영에 새로운 변화를 이끌었다. 메뉴만 해도 40종이 넘는다. 예전처럼 국물에 불려 간장에 찍어 먹거나 반찬으로 먹는 어묵이 아니다. 빵처럼 음료수와 먹는 고급 간식이 되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시절, 사원 두 명이었던 삼진어묵은 현재 16개의 직영점을 운영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변함이 없는 것은 ‘좋은 재료’를 써야 한다는 할아버지, 아버지의 운영철학이다.
마감시간이 다 되어서인지 어묵의 종류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필자는 빵을 고르듯 신중한 고민 끝에 몇 가지를 쟁반에 담았다. 다양한 어묵의 모양만큼 맛도 가지가지이다. 제일 인기가 좋다는 어묵 크로켓(korokke). 소리까지 바삭한 크로켓의 표피가 부서지면서 신선한 생선살이 부드럽게 혀에 와 닿는다. “음~” 하고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삼진어묵은 1953년 박재덕 씨가 창업하여 박종수 씨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박용준 씨가 3대째 운영하고 있다. 삼진어묵의 영도 본점에서 사원으로 근무하는 황영옥(여, 60세) 씨가 인터뷰에 응해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