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궁중음식이었던 육회가 경기도의 향토음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으로 경기도의 지역적ㆍ행정적 특수성에 기인한다. 조선시대에는 수도 한양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경기ㆍ황해도ㆍ평안도ㆍ함경도ㆍ강원도ㆍ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 등 팔도로 나누었다. 그런데 지금은 경기도라 부르지만 조선시대에는 경기도라 하지 않고 ‘경기’라 하였고, 나머지 일곱 개의 지역은 모두 ‘도’를 붙여서 구분하였다.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편찬한 법전을 비롯한 각종 문부를 보면 경기도라 하지 않고 ‘경기’라고 표기한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경기’라는 용어는 고대 중국의 『시경(詩經)』, 『맹자』 등에서 유래한다. 『시경』에는 ‘기내(畿內)의 땅이여 백성이 머물러 사는 곳이로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왕도(王都) 주변 사방 오백 리 이내의 땅을 경기로 획정하고 천자(天子) 직할지(直轄地)로 삼은 데서 비롯된다. 경기는 기내(畿內), 기전(畿甸)으로도 불리었다. 즉 조선에서의 ’경기‘는 도성인 한양을 둘러싼 인근 지역을 일컫는 것이었고, 다른 지방의 도와는 달리 군사적으로는 도성을 옹위하고 경제적으로도 가장 빨리 도성의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지역으로 기능하였다. 현재 경기도의 도청은 수원시에 있지만 조선시대의 경기감영은 지금 서대문이라 불리는 돈의문(敦義門) 밖에 바로 위치하였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교남동의 서대문 적십자병원 자리가 바로 경기감영 터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경기는 도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보니 한양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여건을 갖출 수 있었다.
실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17세기 중반 이후는 군사제도가 도성방위중심으로 개편되면서 한양에는 훈련도감과 금위영, 한양 이북은 북한산성의 총융청과 이남은 남한산성의 수어청 등 사영(四營) 방위체제가 구축되었다. 18세기 정조(正祖)대에 이르러서는 경기지역의 동서남북으로 개성ㆍ강화ㆍ광주ㆍ수원을 정2품 유수부(留守府)로 승격하고, 각각 경리영(經理營)ㆍ진무영(鎭撫營)ㆍ총리영(總理營)등 군영(軍營)을 설치하고 군영의 사(使)를 유수가 겸임토록 하였다. 광주목에서 광주유수부가 된 광주의 경우는 이미 수어청(守禦廳)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관직 간의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수어사가 광주유수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도성방위체제의 변화는 단순히 군사적ㆍ행정적인 변화에만 그치지 않고, 궁중과 한양의 문화가 경기지역에 유입되는 것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여 농성을 하다가 투항한 기간이 불과 두 달여 밖에 안 되지만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남한산성 인근 광주지역에는 도성의 문물이 전파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또한 정조가 현재의 수원시에 축조하였던 화성(華城)과 화성행궁(行宮)은 국왕이 설계하고 직접 공사를 주관한 조선 최초 최대의 ‘신도시 조성계획’ 이었으며, 화성에 전국의 문물과 경제력이 집결하고 궁중문화가 지방에서 그대로 재현되는 그야말로 작은 도성이었다.
조선시대 대개의 왕릉이 도성 주변인 경기도 구리시나 고양시 등에 위치하였던 것은 국왕의 능행(陵行)을 편하게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정조는 현재의 서울축별시 동대문구 전농동 배봉산에 있던 생부(生父)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인 영우원(永祐園)을 1789년(정조 13) 화성 신도시 근처로 이장하고 현륭원(顯隆園)으로 명명하여 재위기간 중 30여 회 이상의 장거리 능을 하였다. 또한 정조는 1795년(정조 19) 모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도성이 아닌 화성행궁에서 성대하게 연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정조도 사후에 부친의 묘인 현륭원 근처 건릉(健陵)에 안장되었고, 정조의 아들인 순조(純祖)대 이후로도 수원 능행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정조의 신도시 화성 건설로 인한 행행(行幸)과 현륭원으로의 능행은 조선후기 한양과 도성의 궁중문화가 경기지역에 확산되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현재 경기 도정(道政)의 중심지인 수원시가 오래전부터 소갈비를 양념에 재워 구워먹는 ‘수원갈비’로 유명한 지역이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조선시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원칙적으로 소를 임의로 도살하는 것을 국법으로 엄금하였다. 소를 잡아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해당 관아의 수령에게 타당한 사유를 신고한 후 허가를 받아야 가능했다. 농경국가인 조선에서 소는 국가적인 생산수단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잡아먹을 수 없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일반 민인들은 닭이나 개, 돼지 등을 주로 식용하였다. 그런데 수원의 경우에는 궁중음식이었던 소갈비구이가 민간에 전파되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상품화된 식품으로 판매되는 수원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으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육회와 같은 생고기를 식용한 역사는 비교적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근거로 유교의 사서삼경 중 하나인 『맹자』 진심하(盡心下)편에 회자(膾炙)라는 말이 언급될 정도로 오래되었다. 회자에서 ‘膾’는 생고기 음식을 이르며, ‘炙’는 익힌 고기를 뜻한다. 특히 남송(南宋)의 성리학(性理學)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고 개국한 조선에서는 『논어』에 공자도 즐겨 먹었다는 육회를 자연스레 먹는 것이 음식습속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조선시대 육회에 대한 기록은 18세기 무렵의 기록에서 집중적으로 관찰된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보면 1766년 유중림(柳重臨)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1797년의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1800년대 초 저자 미상의 『주찬(酒饌)』, 1815년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閨閤叢書)』, 1827년 서유구(徐有榘)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1800년 말 저자 미상의 『시의전서(是議全書)』 등이다. 이상의 기록에는 소뿐만 아니라 돼지ㆍ양을 비롯한 각종 어육의 고기와 가죽, 내장 등 특수부위까지 가공하여 회로 만드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에 눈길이 가는 자료는 『원행을묘정리의궤』이다. 정조가 화성행궁에서 열었던 생모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정리한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찬품단자에는 회(膾)가 무려 9회나 기록되어 있다. 그 중 소의 살코기를 간장 양념에 참기름, 후추, 깨 등으로 조리한 육회는 총 4회가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육회가 궁중음식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소고기 육회(肉膾)는 일반적으로 소고기의 우둔 부위를 잘게 썰어 계란 노른자와 참기름, 깨, 배 등을 버무려 먹는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육회는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육회와는 전혀 다른 육회를 맛볼 수 있다. 육회가 육사시미(肉さしみ)로도 많이 불리듯이 남쪽 지방의 육회는 소고기에 별다른 양념 따위는 하지 않고 신선한 소고기를 적당히 썰어서 기름장에 찍어 먹는 육회의 형태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 바로 대구의 ‘뭉티기’이다. 음식의 명칭이 특이하기도 하지만 대구 이외의 지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대구의 향토음식 중 하나이다. 뭉티기는 고기를 뭉텅하게 써는 모양의 의태어에서 유래한 경상도 방언이다. 말 그대로 뭉티기는 소의 생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짤막하게 잘라낸 것을 말한다. 이렇게 썬 소고기를 다른 양념 없이 기름장에 찍어 먹는다. 사실 대구 뭉티기는 생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 그대로 먹기 때문에 같은 생고기라도 잘게 썰어서 조미하는 육회와는 다르다.
어떠한 조미도 하지 않고 생고기를 그대로 썰어서 먹는 것을 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지의 의문이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음식은 가능하면 인위적인 조리 과정 없이 자연상태 그대로 섭취할 수 있는 식품을 최고로 여긴다는 데에는 별반 이의를 달지 않는다. 뭉티기는 두툼하게 썰어 먹는 고기의 형태도 그렇지만 별다른 조미 없이 먹는다는 점에서 만약에 고기의 품질이 매우 신선하고 우수하지 않으면 제맛을 느낄 수 없다.
대구에서 뭉티기와 같은 생고기를 그대로 먹었다는 것은 예전부터 이 지역에서 나는 한우의 품질이 우수했다는 방증도 될 것이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대구 약령시는 조선시대부터 경상북도 지역의 3대 시장의 하나로 역사가 오래되었고, 조선후기에도 서문시장과 같은 큰 시장과 함께 인근 두류동 일대에는 대규모 소시장이 섰다. 이곳에는 예로부터 청도 지역 등 한우로 유명한 고장의 소들이 집산되었고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 해에 수 만두의 소가 거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소고기와 소의 부산물을 이용한 대구의 다양한 향토음식들이 생겨났다.
소고기와 소의 부산물을 이용한 대구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에는 대구 육개장, 막창구이, 찜갈비, 뭉티기, 오드레기구이 등이 있다. 소의 양지머리나 사태고기를 이용하여 만든 대구 육개장과 소의 네 번째 위를 구워 먹는 막창구이, 소갈비를 이용한 찜갈비는 뭉티기와 더불어 이른바 ‘대구 10미(米)’에 꼽히는 음식이다. 그 밖에 대구 10미에 들지 못했지만 소의 힘줄을 구워 먹는 오드레기 구이도 소의 부산물을 이용한 대구의 향토음식이다.
대구 10미는 2006년 대구광역시가 지역 관광과 경제 활성화를 위해 지정한 대구의 10가지 향토음식인 대구육개장, 막창구이, 뭉티기, 동인동 찜갈비, 논메기 매운탕, 복어불고기, 누른 국수, 무침회, 야끼우동, 납작만두를 말한다. 대구광역시에서 지정한 10가지의 향토음식 중 소와 관련된 음식이 무려 4종이나 된다. 뭉티기는 먹을 것도 부족하고 주머니 사정 또한 넉넉지 못했던 1950년대 초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향촌동 일대에 들어선 실비집에서 만들어 팔기 시작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금도 향촌동에는 뭉티기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들이 여러 곳 있다. 그중에서 ‘너구리집’이라는 식당이 뭉티기를 처음 선보인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