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짜장면의 색은 검은색이 아니었어요”

    어릴 때, 필자의 시험성적이 좋은 날이나 상장을 받아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셨다. 나는 그때마다 ‘짜장면’을 외쳤다. 어머니의 허락이 떨어지면 벽에 적힌 중국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기하게도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철가방을 든 아저씨가 짠하고 나타났다. 정말 빨랐다. 아저씨는 한 손에는 철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자전거를 몰았는데 번쩍이는 네모난 함석 가방에는 붉은 글씨로 중국집 이름이 크게 쓰여 있었다.

    1936년 2월 16일 동아일보 「대회여록」을 살펴보면 "이분들은 그대들을 기러내인 직공(職工)이니라, 우동 먹구 짜장면 먹구 식은 변또 먹어가며 그대들을 가르쳤느니라"라고 기재되어 있다. 최초로 ‘짜장면’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기사로, 제3회 조선 남녀전문학교 졸업생 모임의 풍경을 다루었다. 선생님이 공장의 직공처럼 고생하며 학생을 가르치고 키웠다는 내용이다. 선생님의 노고는 우동과 짜장면, 식은 도시락으로 대변된다. 이와 함께 우동과 짜장면은 당시에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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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얀짜장면


    짜장면은 한국인에게 특별한 날의 음식이면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었고 배달음식의 대명사였다. 그 덕분에 한국을 대표하는 100대 민족문화 상징에 짜장면이 선정(2006년 문화체육관광부)될 만큼 한국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임오군란(1882년) 이후, 1883년에 인천항이 개항된다. 그 주변에 중국 산동성에서 건너온 화교들이 거주하기 시작했고 지금의 북성동, 선린동 일대에 중국인 거리가 형성되었다. 6·25 전쟁 이후, 서민들의 삶은 매우 어려웠다. 화교들도 마찬가지였다.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고 짜장면을 싸게, 많이 팔아야 했다. 화교들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춘장을 사서 조미료를 넣고 고기보다 야채를 큼직하게 썰어 물컹하게 조리를 했다. 그 시절에는 저렴했던 감자, 양파, 양배추를 더 많이 넣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에도 없는 한국식 짜장면이 탄생한 것이다.

    화교 2세인 서학전(남, 59세) 씨는 인천에서 태어났고 열네 살 때부터 중국집에서 일을 시작하여 이십 대 초반에 중국식당을 개업했다. 그는 짜장면이 차이나타운에서 변화된 과정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 짜장면의 시작은 중국의 산동지방과 연관이 있어요. 아버지는 산동 제성이 고향이에요. 중국의 짜장면은 돼지고기와 채소를 볶아서 중국식 장에 국수를 비벼먹는 음식이에요. 장은 짠맛이 나는 면장(面醬)인데 집집마다 다르고 지역에 따라 장의 차이가 있어요. 짜장면이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는 지금처럼 검은색의 춘장을 사용하지 않았어요. 중국식 면장은 검은색이 아니거든요. 한국 된장처럼 갈색이죠. 예전에는 돼지기름에 돼지고기를 큼직하게 썰어 넣고 볶았어요. 달콤한 춘장은 ‘사자표 춘장’이라고 1948년에 만들어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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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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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얀짜장면

    서학전 씨가 운영하는 만다복에는 하얀 백년짜장면과 그냥 백년짜장면이 있다. 한국에 짜장면이 처음 들어왔던 시절의 짜장면을 재현한 것이다. 하얀 백년짜장면은 검은색의 춘장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중국식 된장에 생 돼지고기와 야채를 볶고 닭 육수와 마늘, 오이를 넣어 비벼먹는 면이다. 반면, 백년짜장면은 춘장을 사용하여 고기와 야채를 볶는다. 간짜장면과 비슷하지만 걸쭉한 소스가 아니다.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익숙하지 않은 맛에 당황할 수도 있다. 맛있게 먹는 방법은 따로 있다. 따듯한 면 위에 닭 육수를 두세 숟가락 뿌려주어 면을 부드럽게 준비한다. 조미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 그 맛은 밍밍하다. 싱싱한 오이를 함께 넣는 것을 잊지 말고 다진 돼지고기와 야채볶음, 다진 마늘도 한 숟가락 넣는다. 이 모두를 면과 함께 비빌 때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이용하여 양손으로 풀어주면서 비빈다. 그리고 입맛에 맞게 마늘과 육수를 추가하면 된다. 신선한 돼지고기 덕분에 고기 맛이 풍부하고 다진 야채와 마늘이 느끼한 맛을 덜어준다. 게다가 오이의 아삭함이 입맛을 개운하게 한다. 백년짜장면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먹으면 된다.


    인천 차이나타운 중국 음식점 '만다복' 내부 이미지
    인천 차이나타운 중국 음식점 '만다복' 내부

    인천 차이나타운이 관광지로 알려지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2001년 근대유산들을 재정비하고 관광특구로 지정되면서 한국 속의 작은 중국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중국의 올바른 음식문화를 전파하고 싶다는 주인장은 하얀 백년짜장의 맛은 시골 할머니 집의 된장찌개 맛이라고 설명한다.

    할머니네 된장찌개는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고 건강한 맛이에요. 첫술은 특별하지 않은데 먹다 보면 냄비 바닥까지 먹게 되죠. 그 맛이 한국에 처음 들어온 짜장면과 같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음식 맛은 장맛이라고 하는데, 중국집마다 비슷한 춘장을 사용한다면 맛의 차이를 내는 비결이 있을까? 있다. 바로 재료의 신선함과 미묘한 면발의 차이이다. 특히 면을 만드는 밀가루와 물의 비율은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고 묻지도 않는 것이 불문율(不文律)이라고 한다. 이 비밀이 계속 지켜진다면, 짜장면의 행복한 시간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


    [도움 주신 분]

    만다복은 차이나타운이 개발될 당시 서학전(남, 60세) 씨가 중국의 건축과 음식문화를 알리기 위해 개관하였다. 현재(2018년) 12년째 아내와 운영 중이다.  

  • “칠분의 기다림, 숯불에 구워 불맛 나는 화덕만두”

    화덕만두는 옛날 호떡처럼 옹기 화덕에서 굽는 중국식 만두이다. 숯불에 잘 구워진 만두피는 구수한 소리를 내며 부서진다. 성급히 먹으면 고기 육즙에 입이 데일 수 있으니 호호 불어 열을 식힌 후 먹는 것이 좋다. 처음에는 맛이 좋아 한꺼번에 몇 개를 먹을 수 있다고 욕심을 내었다. 그런데 나의 작은 위를 탓할 수밖에. 만약 또다시, 줄을 서서 그것을 먹겠냐고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대답하련다.


    이른 아침부터 차이나타운을 찾았다. 다른 곳으로 얼굴을 돌리지도 않고 곧장 화덕만두를 파는 십리향으로 향했다. 화덕만두를 찾는 사람들의 줄은 언제나 길게 늘어져 있다. 운 좋게 차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많을 때는 두개 이상 살 수도 없다. 기다리고 있는 뒷사람에 대한 배려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옹기에서 굽는 화덕만두의 수는 기껏해야 사오십 개다. 그것이 다 팔리면 다시 칠 분을 기다려야 한다. 옹기 화덕 두 개를 번갈아 돌려도 몰려드는 사람들은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화덕 고기만두

    1924년 4월 17일 동아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일제시대는 호떡이 국민간식 겸 끼니를 해결해주는 음식이었다. 일제시대 호떡장수는 대부분 중국인들이었는데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온 중국인들 중 자본이 적은 사람들이 대부분 이 호떡장사를 하였다.” 같은 해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의하면, 경성부 내에 영업을 하는 중국 사람의 가게 485호 중에서 호떡가게가 150개나 있었다고 전한다. 당시에는 석탄을 때는 화덕에서 호떡을 구웠다. 커다란 철판에 기름을 두르고 튀겨내는 오늘날의 호떡과는 달랐다. 쇠로 만든 쟁반에 호떡 반죽을 놓고 화덕에 밀어 넣었다가 쇠꼬챙이로 꺼내는 것이다. 호떡은 밀가루와 소다로 반죽을 하여 뜨거우면 부풀고 열이 식으면 다시 줄어들었다. 설탕을 소로 넣어 달콤했다.


    옛날 화덕에 구웠던 호떡처럼 만두를 굽는 곳이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십리향은 옹기 화덕에서 숯으로 만두를 굽는다. 화덕만두를 11년째(2018년 현재) 만들고 있는 곡창준(남, 59세) 씨는 화교 2세이다. 중국문화에서 유래한 음식을 고민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대만의 화덕만두를 발견하였다. 그것을 한국에 들여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화덕을 제작하는 것과 한국 사람의 입맛에 맞는 조리법도 연구가 필요했다. 시행착오도 많았다. 가스 가마도 만들어보고 전기 가마도 만들어보았지만 역시 가장 맛있는 만두는 숯을 때는 옹기 화덕에서 나왔다. 가스 가마와 전기 가마는 일정한 온도에 고르게 구워져서 보기엔 좋았지만 불맛이 덜했다. 그래서 손이 많이 가더라도 옹기 화덕에 만두를 굽는다.


    옹기 안의 온도가 250도로 올랐을 때, 주먹 만한 만두 반죽을 뜨거운 옹기 벽에 딱딱 붙이면 쩍 달라붙는다. 붉은 숯불이 만두피를 까슬하게 익히면 육즙을 담뿍 먹었던 고기 속은 수분을 뱉어내기 시작한다. 뜨거운 숯불 위로 치직 거리며 육즙이 떨어진다. 칠 분이 지나, 잘 익었다 싶으면 손잡이가 긴 도구로 만두 옆을 톡톡 쳐서 떼어낸다. 이 모습도 볼거리이다. 그 모양을 보고 있자니 목에 걸려있던 침이 꿀꺽 넘어간다. 지루하지 않은 기다림 끝에 얻은 만두를 두 손으로 받아 들고 좋아라 했다.


    화덕만두
    만두화덕


    숯으로 굽는 화덕만두의 맛은 네 가지이다. 고기와 단호박, 고구마, 팥이 소로 들어간다.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당연히 고기 맛이다. 하루에 수백 개가 팔리는 그 많은 만두를 곡창준 씨와 아내가 손수 빚는다. 몸이 고단하여 그만두고 싶은 심정이지만 중국문화에 대한 애정 때문에 그러지도 못한다. 맘씨 좋은 그는 누구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화덕만두의 비법을 살짝 귀띔해 주었다.


     “화덕만두 하나에 이천 원이지만 저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하나하나 정성들여 손으로 만들었으니 잘 나오면 뿌듯하죠. 돼지고기는 잡내가 많이 나요. 잡냄새를 제거하기 위해서 고량주, 생강, 마늘, 파 등 열다섯 가지를 넣어요. 돼지고기는 주로 살코기 80%, 비계 20%를 섞어요. 오래 섞으면 고기가 수분을 먹어서 나중에 육즙이 생겨요. 가장 중요한 것은 밀가루 반죽이에요. 물의 양을 조절해야 하는데 날씨가 좋을 때와 나쁠 때가 물 양이 틀려요. 건조한 날에는 물을 좀 더 넣고, 우중충하고 비 오는 날에는 물을 덜 넣죠. 밀가루는 다루기 쉽지 않아요. 화덕만두를 만들기 시작한 지 2년 정도 되었을 때 밀가루가 예민하고 날씨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알았어요.”



    [도움 주신 분]

    십리향은 화덕만두의 맛있는 향이 십리를 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조리법은 곡창준(남, 59세) 씨와 그의 아내만 알고 있는 비밀이다.

  • 경력 67년의 주방장이 요리하는 판교 동생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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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생춘 외관(사진출처:월간토마토)

    판교 시장 근처의 중국집을 찾았다. 동생춘(同生春). 여태껏 만나 본 중국집 이름 중에 가장 특이하고 예쁘다. 간판에는 수타면 전문이라 쓰여 있다. 가게 앞에 사람이 북적북적하다. 출입문 앞에 주인아저씨로 보이는 캐리커처가 그려진 현판이 붙어 있다. 현판을 유심히 바라보다 출입문 앞에 서 있던 아주머니에게 “이게 뭐예요?”라고 물으니, “뭐긴 뭐여, 우리 아저씨지.”라는 간단한 답이 날아왔다. 알고 보니 아주머니는 동생춘의 주인이다.


    주방과 가까운 자리에 앉았는데, 창문을 통해 주방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주방에 있는 주인아저씨는 군밤 모자를 썼는데, 아저씨와 한 몸인 양 모자가 퍽 잘 어울린다. 오랫동안 중국집을 운영한 것 같아 이것저것 물었다. 독산리 굴이 최고라는 아주머니는 음식에 들어가는 해산물 사러 기차를 타고 대천이며 웅천이며 다닌다고 한다. 아저씨는 요리를 한 지 67년이 되었다. 고향이 예산이라고 한다. 아저씨는 10살이라는 어린 나이 때부터 예산에 있는 중국집에서 주방일을 했는데, 그 중국집 이름이 '동생춘'이었다고 한다. 예산에 있던 동생춘이 없어지자, 그 이름을 빌려와 서천에서 다시 열었다.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일을 했냐고 물으니, 아저씨는 말이 없다. 아저씨를 대신해 아주머니는 “그때 10살이면 으른이여. 아주 막 못 먹고 눈치로만 살은 사람이여.”라고 답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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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생춘 주방장(사진출처:월간토마토)


    주인아주머니는 예산 인근 지역에서 태어나 자랐다. 젊은 적에 미모가 빼어나 남자깨나 울렸다고 한다. 미스코리아였을 것 같다는 말에 “아휴 옛날에는 그랬는데 진에서 똑 떨어져서 말아 버렸지. 옛날에 인기도 많이 끌었어.”라며 농담을 던지곤 웃어 보인다. 아저씨도 젊었을 적엔 한 인기 했다고 말한다. 동생춘은 미남미녀가 하니 장사가 잘 안 될 수 없는 서천의 명물인 셈이다. 그렇게 선남선녀가 만나 연애하고 결혼해서 동생춘을 운영하며 아들 넷도 잘 길러 냈다.

     

    배도 든든히 채우고 한참 이야기를 나눈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은 어느새 추적추적 찬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잘 먹었다는 인사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주인아저씨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말없이 앉아 우릴 바라봤고, 아주머니는 “비와, 언능 가, 인제.”라며 배웅했다. 배나 채울 생각으로 들어갔다가 따끈하게 마음도 함께 채워 든든하게 길을 나섰다.

  • 평택시민들의 허기를 책임지는 지성원

    송탄에는 유명한 음식집이 생각보다 많다. 송탄 부대찌개로 유명한 김네집, 최네집 등이 있으며 방송 프로그램에서 몇 번 언급된 미스리 햄버거도 있다. 그 외에도 백종원이 방문해 유명해진 분식집도 있다. 그러나 송탄 토박이로서 송탄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는 음식집 중 하나는 지성원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성원은 평택시 지산동에 위치한 중국음식점으로 영업시간은 오전 10:30~20:50까지이며 매주 월요일은 휴무이다.

     

    지성원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13년이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배가 고팠는데 돈이 별로 없었다. 학교 앞 분식집에서 간단하게 배를 채울 수도 있었지만 그날따라 분식집에 가기 싫었고, 그러던 중 친구가 알바하는 지성원이 생각났다. 꽤 거리가 멀었지만 열심히 걸어서 지성원에 갔다. 당시 짜장면의 가격이 2,500원이었다. 가난하고 매일 먹어도 배고팠던 고등학교 시절 혜성같이 등장한 지성원은 혁명 같은 곳이었다. 가격도 저렴한데 맛도 있고 양도 많았다. 짜장면의 양은 항상 배고픈 고등학생의 배를 채우고도 남았다. 거기다가 갓 나온 따끈따끈한 탕수육은 얼마나 맛있는지! 저렴하다고 하지만 학생 입장에서는 탕수육 가격이 비쌌는데 갈 때 마다 친구들과 돈을 모아 사먹었던 기억이 난다. 

     

    지성원 탕수육 이미지
    지성원 탕수육
    지성원 짜장면 이미지
    지성원 짜장면


    지금은 가격이 조금 올라 짜장면 3,000원, 탕수육 9,000원, 짬뽕 4,000원이다. 여전히 저렴한 가격을 자랑하고 있다. 볶음밥 등 밥류는 5,000원에서 시작하며, 요리도 대부분 2만원 내외로 먹을 수 있다. 다른 요리 메뉴도 다른 중국음식 전문점에 비하면 저렴하다. 여러 명이 가면 다양한 메뉴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저렴하고 맛있는 음식 때문인지 지성원은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혼자 간단하게 식사를 하러 오는 사람, 가족끼리 먹으러 온 사람, 포장을 하러 온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방문한다. 배달을 하지 않아 방문해서 먹어야 하고, 매장이 넓지 않아 가게에 사람이 항상 가득해서 그런지 활기가 넘친다. 

    많은 평택시민들이 방문하는 지성원에서는 가끔 아는 사람을 마주치기도 한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과 음식점에서 마주치는 것은 뭔가 두근거리고 신기한 기분이다. 지성원이 평택시민들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짜장면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음식이다. 또 특별한 때에 먹는 음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지성원에 얽힌 추억 하나 없는 송탄시민은 없을 것이다. 혹시 오랜 시간동안 평택시민들의 허기를 책임지고 있는 지성원을 모르는 평택시민이 있다면 싸고 저렴한 가격에 맛도 있고 활기찬 기운이 넘치는 지성원에 꼭 방문하기를 바란다. 

  • 우짜면 이것은 통영 진미?

    짜장도 먹고 싶고, 우동도 먹고 싶을 때

    짜장도 먹고싶고 짬뽕도 먹고 싶으면 짬짜면을 시키면된다. 하지만 짜장도 먹고 싶고 우동도 먹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경상남도 통영시 통영항 앞에 자리 잡은 서호시장에 가면, 답을 찾을 수 있다. 남해 앞바다를 오가며 생업을 이어가던 어민들의 사랑을 받은 아주 독특한 별미, 이름도 독특하고 맛도 독특해서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그 별미의 이름은 ‘우짜면’이다.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 설은 우리가 중국집에서 흔히 시키는 ‘짬짜면’이 짬뽕과 짜장면의 앞글자만 따와 만들어진 것처럼, 우짜면도 우동과 짜장면의 앞글자만 따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두 번째 설은 지역 방언이 들어갔다는 재미있는 설인데, 우동도 먹고 싶고 짜장도 먹고 싶은데 ‘우짜노?’라고 했던 데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통영 우짜면
    통영 우짜면
    통영 우짜면
    통영 우짜면

    우동 위에 짜장소스를 얹어주는 우짜면

    한 그릇에 70원하던 시절이 있었을 정도라니, 꽤나 오랫동안 지역 어민들의 사랑을 받아온 음식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역 곳곳에 자리 잡은 포장마차들에서도 쉽게 맛볼 수 있다. 포장마차에는 대체적으로 신속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 위주로 판매된다. 허기진 배를 빠르게 달래줄 수 있는 그 특징은 우짜면에도 고스란히 녹아있다. 양은으로 만든 육수통에서 고아지고 있는 밴댕이(디포리)국물에 생우동면을 잠깐 삶으면 일단 우동이 완성된다. 그 다음 전기보온밥통에서 짜장소스를 한 국자 듬뿍 떠서 그릇 한 쪽에 담아준다. 여기에 고명만 살짝 얹어주면 벌써 완성이다. 

    통영 우짜면
    통영 우짜면

    우짜면 먹는 방법

    그 독특한 맛을 잊을 수 없기에, 통영에 갈 때면 항상 우짜면을 맛보게 된다. 그런데, 주문한 우짜면이 나오면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바로 섞어먹을까? 아니면 국물먼저 마실까?” 이것은 탕수육 소스를 “부어먹을까? 찍어먹을까?”에 맞먹는 진지한 고민이다.


    바다에 왔으면 뜨끈한 밴댕이 국물 맛을 먼저 봐야한다. 순수한 육수의 맛을 즐기기 위해 섞지 않고 국물만 쭉 들이킨다. 밴댕이를 우려낸 육수의 특징은 진한 맛으로 시작해서 끝으로 갈수록 은은한 단맛이 난다는 것이다. 은은한 단맛에 집중하면서 국물을 호로록 마시다보면 어느 순간 자장소스가 풀어지면서 자장소스의 향과 육수의 경계선이 무너진다. 육수에서 자장소스의 단맛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입을 뗀다. 그리고 젓가락으로 단무지를 하나 집어 먹음으로써 1막이 끝난다.


    이때 단무지를 집어먹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잘 생각해보면 전혀 다른 성질의 음식 같은 우동과 짜장면이 실은 단무지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살짝 느끼해질만하면 단무지를 먹어 달콤새콤한 맛으로 환기시키는데, 우동으로 시작한 1부의 끝에서 단무지를 먹는다는 것은 이제 새로운 맛이 찾아온다는 뜻이다.

    통영 우짜면
    통영 우짜면

    2막에서는 오로지 수저에 의존해야한다. 얼마 남지 않은 육수와 자장소스를 수저로 휘휘 저어주면 우동국물보다는 되직하지만 자장소스보다는 묽은 국물이 완성된다. 여기서부턴 도토리 묵사발을 먹는 느낌으로 국물과 우동을 떠먹는다. 자장소스만을 수저로 떠먹으면 너무 짜서 몇 번 먹지 못하지만, 밴댕이 육수와 섞은 우짜면의 국물은 짜다는 느낌 없이 진하고 달콤하다. 육수가 감칠맛을 극대화해 꿀떡꿀떡 잘 넘어간다. 


    매운맛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매운 태양초 고추장을 반 수저 떠서 국물에 말아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매콤한 맛을 즐기는 사람들은 우동이나 자장에 고춧가루를 풀어먹는데, 이때 고춧가루가 아니라 고추장을 풀면 국물이 한층 더 되직해지면서 수저로 떠먹는 풍미가 증가한다.

  • 100년 전통의 중국식 제과점, 인천 복래춘

    인천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복래춘

    인천 복래춘 외관
    인천 복래춘 외관

    인천광역시 중구 선린동 차이나타운에는 ‘복래춘’이라는 중국식 제과점이 있다. 복래춘은 4대째 100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 곡사충 씨가 복래춘의 4대 대표로서 가업을 잇고 있다. 곡사충 씨의 증조부 곡방주 씨는 중국에서도 과자를 만드는 일을 해왔다. 1920년대 초반 한국으로 이주하면서 서울 북창동과 소공동 일대에서 ‘유성항’이라는 가게를 열고 중국식 과자인 월병을 만들어 팔았다. 한국전쟁 이후 유성항을 팔고 인천으로 터전을 옮겼다. 다시 제과점을 열고 이름을 ‘복래춘(復來春)’이라 지었다. 다시 봄이 온다는 뜻으로, 제과점의 부활을 소망하는 의미였다.

     

    오랜 전통과 한결같은 맛으로 차이나타운의 대표 명소가 된 복래춘

    복래춘은 처음에 옛 공화춘 뒤편이었다. 제과점과 더불어 잡화점도 겸했다. 1961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곡방주 씨의 아들 곡계경 씨는 전병을 만들어 인천을 비롯해 서울까지 배달하였다. 당시 복래춘처럼 전병을 잘 만드는 제과점이 드물었기 때문에 서울에서도 주문이 들어왔다. 곡계경 씨는 아들 곡회옥 씨를 데리고 배달을 다니곤 하였다. 곡회옥 씨는 열세 살 무렵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일을 익히고 열일곱 살부터 본격적으로 과자 만드는 일을 배웠다. 50년이 넘도록 과자 굽는 일에 전념해온 곡회옥 씨는 건강이 좋지 않아 최근 아들인 곡사충 씨에게 가업을 물려주었다. 복래춘은 오랜 전통과 한결같은 맛으로 인천 차이나타운의 대표 명소로 자리 잡았다.

     

    복래춘에서 시작된 공갈빵

    인천 복래춘 내부
    인천 복래춘 내부

    중국에서 과자를 만드는 방식은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나뉜다. 북방식은 단맛은 덜하고 바삭바삭하며, 남방식은 단맛이 나고 말랑말랑하다는 특징이 있다. 복래춘은 북방식으로 과자를 만든다. 복래춘의 대표 메뉴는 공갈빵이다. ‘공갈빵’이라는 이름은 곡회옥 씨의 어머니의 일화로부터 탄생했다. 공갈빵은 중국식 호떡으로, 둥그렇고 커다란 겉모습에 속은 텅 비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곡회옥 씨의 어머니가 인천역에 나가 공갈빵을 팔았는데,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부서져 버리는 바람에 사 먹는 사람들의 핀잔을 받기 일쑤였다. 주로 “공갈친 것 아니냐”는 항의를 받게 되어 이로부터 ‘공갈빵’이라는 명칭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다양한 월병을 접할 수 있는 복래춘

    인천 복래춘 내부
    인천 복래춘 내부

    중국을 비롯한 중화권의 국가는 중추절에 월병을 챙겨 먹는다. 둥그런 보름달을 닮은 월병을 먹으며 복을 기원하는 문화를 갖고 있다. 그렇기에 중국인이 많이 사는 동네나 거리에는 월병을 파는 집이 많았다. 복래춘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월병을 맛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월병은 ‘팔보월병’이다. 건포도와 땅콩, 깨, 모과, 아몬드, 호두, 해바라기 씨, 박 씨 등 여덟 개의 재료를 넣어 만든 정통 산동식 월병이다. 견과류가 많이 들어가 있어 씹는 맛이 좋고 고소한 풍미가 일품이다. 복래춘은 10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4대째 가업을 이어오며 중국식 제과점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에 방문한다면 다양한 볼거리와 함께 복래춘에서 특별한 간식을 맛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 100년이 넘는 역사와 맛을 자랑하는 중화 음식점, 남원 경방루

    남원시에는 백 년 전통의 중화 음식점이 있다

    전라북도 남원시 하면 떠오르는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는 성춘향과 이몽룡의 러브스토리의 무대인 광한루(廣寒樓)를 중심으로 고전 소설 춘향전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또한 음식에 있어서 남원시는 남도식 추어탕의 본산지로도 이름난 곳이다. 미꾸라지를 통째로 끓여내는 서울·경기 지방과는 달리 푹 삶은 미꾸라지를 체에 걸러서 걸쭉하고 구수하게 끓여내는 것이 특징이다. 지금도 남원 광한루원 일대에는 추어탕 전문 식당이 모여 ‘남원 추어탕 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한편 남원시에는 남원 추어탕만큼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명물 음식점이 있다. 남원시 금동의 ‘경방루(慶芳樓)’라는 상호의 중국음식점이다. 우선 경방루는 그 역사에서 이목을 끈다. 경방루가 남원에서 가게 문을 처음 연 시기는 조선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기 바로 이전 해인 1909년이다. 2021년 현재 기준으로 무려 112년의 역사를 지닌 경방루는 현존하는 중국음식점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곳으로 기록된다.

     

    중국음식점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곳으로 알려졌던 1908년에 개업한 인천광역시의 공화춘(共和春)보다 1년 뒤진 것이다. 그나마 공화춘이 1983년에 문을 닫았으니 경방루는 남원시와 전라북도는 물론이고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음식점 중의 수위에 오를 만한 곳이다. 지난 2012년 농림수산식품부와 한식재단에서 수행한 ‘역사성 있는 한식당 조사 발굴 사업’에 의하면 현재 영업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음식점으로는 1904년에 개업한 서울특별시의 ‘이문설렁탕’으로 알려져 있다.

     

    남원의 경방루가 오래된 역사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마도 명성에 비해 전체 인구가 8만의 지방 소도시에 불과한 남원시에 자리하고 있는 것과 우리 전통 한식당이 아닌 중국음식점이라는 업종이 일종의 핸디캡으로 작용한 듯하다.

     

    진씨(陳氏) 4대가 이어오는 백년노점(百年路店)

    경방루는 현재 광한루원의 후문에 자리를 잡고 있다. 광한루원 후문 주변에는 전주시의 한옥촌과 같은 ‘남원예촌(南原藝村)’이 조성되어 있어 쾌적한 경관을 자랑한다. 경방루의 건물 정면에는 “百年老店 Since 1909”라는 별도로 설치된 간판 아래에 ‘慶芳樓’라는 붉은 글씨의 상호가 맞아준다. 가게 입구의 유리 벽에는 경방루의 역사를 소개하는 문구가 게시되어 있다.

     

    “경방루

    조상의 얼이 담긴 4代째

    장인의 혼(魂)이 살아 숨 쉬는

    100年의 가업승계!

     

    세상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는

    순리(純理)와 정도(正道)의 여정길로

    전통의 맛을 지켜 가겠습니다.

     

    남원에서 가장 오래된 중화요리

    음식점 경방루 1900년경 중국에서

    이주해 창업하신 故 진경방(陳慶芳)님

    부터 4대째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 있는 중화요리집!”


    경방루의 시작은 1900년대 초 남원에 정착한 중국 산둥성 출신의 화교 고(故) 진경방(陳慶旁) 씨가 당시에는 광한루의 정문이었던 현재 가게 위치에 중화요리 점을 개업한 것이 시초이다. 경방루라는 간판도 창업주 진경방 씨의 이름을 상호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개업할 무렵 경방루는 일본식 2층 건물에 입점하여 당시로서는 남원에 유일한 청요릿집으로서 주로 남원의 기관장이나 지역 재력가 등을 중심으로 한 유지들이 주된 고객이었다.

     

    경방루는 1908년 문을 연 이래 백 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창업주 진경방 씨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후손이 대를 이어 현재까지 4대에 걸쳐 이어오고 있다. 경방루의 매장 벽면에는 초대 진경방 씨와 경방루를 계승한 진경방 씨의 아들 2대 고(故) 진심일(陳心一) 씨, 진심일 씨의 아들 3대 고(故) 진학운(陳學運) 씨의 사진이 걸려 있어 진씨(陳氏) 가문의 오래된 가게임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진학운 씨의 장녀 진대자 씨와 막내아들 진가의 씨가 공동대표로 4대째 경방루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

     

    화교(華僑)라는 이방인에서 이웃으로 자리 잡기까지

    경방루의 진씨 일가는 1대 진경방 씨가 중국 본토에서 이주하여 정착한 이래 그 후손들이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귀화하지 않고 화교여권과 한국 영주권을 보유한 화교(華僑)이다. 현재 경방루의 4대 대표이자 초대 진경방 씨의 증손녀인 진대자 씨에 의하면 화교의 신분으로서 한국에 정착하는데 애환이 많았음을 증언하고 있다.

     

    “1900년도에 저희 할아버지 대가 오셨어요. 그때 처음에 산동성에서부터 인천을 통해 오셨는데 그분 성함이 인제 진경방 씨에요. 그래서 저희가 4대째 저희 가게를 운영하고 있어요. 대대로 진씨가 이어온 가게입니다. 화교들 같은 경우는 같은 한국에 살고 있지만, 태어날 때도 한국에 태어났지만, 항상 이방인 같은 느낌이에요. 한국 신분증도 없고 주민번호도 없으니까 어디를 갈 때도 항상 저희는 외국인 취급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처음에 화교들이 중화요리를 많이 하게 된 이유는 다른 게 할 게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만 해도 중국인이나 화교 또는 중국음식점을 비하하는 투의 ‘짱깨’라는 멸칭(蔑稱)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만큼 역사적으로 중국의 침략은 물론이고 근대 이전까지 중국에 사대(事大)하는 제후국이었던 역사의 기억이 중국과 중국인에 대해 경멸적으로 작용하였던 듯하다. 세계 어디서나 중국인들이 현지에 정착하면 ‘차이나타운’과 같은 화교 사회를 이룬 것에 비해 근현대기 우리나라에서 화교에 대한 처우는 좋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서만큼은 유독 화교 사회가 발전하지 못하였다.

     

    4대 진대자 씨의 증언과 같이 1900년대 초 중국 산둥성에서 인천을 통해 남하하여 남원에 자리 잡은 진씨 일가도 정착에 많은 애환이 있었다. ‘짱깨’라는 속어에는 대체로 중국인에 대해 이기적이고 인색하며 욕심 많다고 여기는 그릇된 인식이 녹아 있다. 한때 동양의 유대인이라 불릴 정도로 근면과 성실함으로 어디서나 잘 정착하여 경제적 부를 쌓았던 화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경방루가 오랜 세월 남원에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방인이 아닌 이웃으로서 주변의 한국인들과 동고동락하는 삶을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진대자 씨의 모친이자 3대 진학운 씨의 부인 소승아 씨에 의하면 예전과 같이 먹고 살기 힘든 시절 주위에 나누는 삶을 실천하였다고 한다. “나는 오늘 하루 힘들어도 남을 위해서 항상 식사도 대접하지만, 쌀도 갖다 드리고 연탄도 갖다 드리고 그랬거든요. 우리는 인자 장사니까 먹고살 수 있으니까 없는 사람 많이 도와주자.” 적어도 자신들은 음식점을 운영하므로 굶을 일은 없으니 주변의 어려운 이웃에게 눈을 돌린 것이다. 그러한 노력과 인심을 베푼 덕분에 경방루는 남원 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다.

     

    백 년째 고수하고 있는 맛의 전통

    중국 음식의 대표주자는 단연코 짜장면이라 할 수 있다. 개항 초기 인천에 이주해 온 중국인 노동자인 ‘쿨리(coolie, 苦力)’을 위한 요깃거리로 선보이기 시작했던 짜장면은 지난 2006년 외래음식으로는 유일하게 ‘100대 민족문화상징’에 선정될 정도로 한국화에 성공한 음식이다. 경방루에서 제공하는 짜장면을 비롯한 짬뽕, 탕수육 등과 같은 일반 식사류도 한국적인 맛을 지니고 있지만, 재료에 있어서 만큼은 창업주 이래로 전해져온 중국 전통 춘장과 조리법을 고수하고 있다.

     

    3대 진학운 씨의 부인 소승아 씨는 시집올 무렵 가게 뒤편의 마당에는 직접 만든 춘장이 담긴 15개의 대형 항아리가 있었다. 그런 춘장이 잘 숙성되도록 위아래로 잘 저은 후 햇빛에 쬐는 것이 경방루에 시집온 며느리의 가장 중요한 숙제였다고 한다. 또한 조리 방법에서도 생 춘장을 기름에 볶아 짜장을 만드는 것을 4대째 고수하는 것이 경방루 짜장면의 특징이다.

     

    경방루의 또 다른 별미로는 ‘물짜장’이 있다. 수년 전 모 방송사의 음식 탐방 프로그램에 소개된 이래 유명해진 경방루의 물짜장은 면에 붉은색의 소스를 얹은 매콤한 맛의 음식이다. 물짜장은 경방루 외에도 전주·군산·익산 등에도 오래된 맛집이 있을 정도로 전라북도 지역에서 발달한 특유의 음식이다. 군산과 익산 지역에는 주로 매콤하지 않은 ‘하얀 물짜장’이 알려져 있다.

     

    경방루는 남원시 금동 10-3번지에서 최초로 개업한 이래 1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세월의 부침을 겪으면서 부득이 지역 내에서 몇 번의 이전을 하였다. 최종적으로는 1995년 남원시 죽항동 134-1로 이전하여 24년간 운영하였다. 그러다가 경방루가 창업한 지 110년이 되던 지난 2019년 경방루가 처음으로 가게 문을 열었던 자리에 새로이 매장 건물을 신축하고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매장에 비치된 고풍스러운 중국식 목제 의자는 물론이고 매장 벽면과 개인실의 방문에 적용된 중국풍 격자무늬 장식이 오랜 역사를 지닌 중화 음식점의 품격을 풍긴다. 

     

    경방루는 오랜 세월 이방인 취급을 받으면서 달리 선택지가 없었던 한국에서 다른 화교들과 마찬가지로 중화요리를 생업으로 시작하였다. 3대 진학운 씨의 부인 소승아 씨는 그런 연유로 가게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각자 전문직에 있던 자식들이 “이렇게 오랜 세월 (가게를) 지켜왔는데 포기하면 아깝잖아요.”라는 마음으로 가게 운영에 나서자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2019년 경방루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면서 동시에 중소벤처기업부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에서 주관한 ‘백년가게’에 선정되었다. 실제로 경방루는 110년이 넘도록 영업을 하는 진짜 백년가게이므로 그에 걸맞은 영예가 아닐 수 없다.

  • 화상(華商)이 세운 제천 최초의 중국음식점, 제천 송학반장

    청풍명월(淸風明月)의 도시 제천

    충청북도 제천시는 강원도 영월군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 충북지역의 동북쪽에 위치하여 충북선과 태백선이 동서로 연결되는 지점이자 남북으로 중앙선이 교차하는 충청북도의 교통 요충지이다. 제천시 남쪽에 있는 충주호와 월악산국립공원과 같은 관광명소가 있어 청풍명월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또한 제천시 모산동의 제천 의림지(義林池)는 밀양 수산제(守山堤), 김제 벽골제(碧骨堤)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3대 저수지의 하나로서 우리나라 고대 농경문화의 소중한 유적이다. 의림지는 먼 옛날 서해의 회유성 바닷물고기인 뱅어가 금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와 담수어가 된 빙어(氷魚)로도 유명하다. 속이 비칠 정도로 투명한 빙어는 깨끗한 물에서만 서식하는 물고기여서 예로부터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빙어회나 빙어튀김이 제천시의 향토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제천시는 의림(義林)이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절개가 높고 의로운 선비가 많이 배출된 지역으로 명성이 있다. 1907년(광무 11) 일제의 농간으로 정미조약(丁未條約)이 체결된 이후 제천 출신의 의병장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이 이끈 제천의병의 활동은 널리 알려져 있다. 유인석과 제천의병은 당시 ‘호좌의진(湖左義陣)’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의병 연합의 위용을 갖추고 제천을 비롯하여 충주, 영월, 원주, 단양 등 충청북도와 강원도 일대를 장악하고 일제와 친일 관료를 응징하여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한편, 제천시는 근대 이후 인접한 강원도 영월군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석회암 지역이다. 1960년대에 경제개발과 산업화가 추진되면서 시멘트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제천시와 영월군은 우리나라 시멘트 산업의 메카가 되었다. 제천시에는 1966년부터 조업을 시작한 이래 연산 500만 톤 규모의 아세아시멘트공장이 있는 산업도시이기도 하다.


    제천에 최초로 들어선 중국음식점이자 가장 오래된 음식점

    청풍명월의 고장 제천시에는 여러 가지 향토음식과 이름난 맛집이 있지만, 제천에서 이름을 모르면 간첩 소리를 듣는다는 오래된 식당이 있다. 바로 제천시의 구도심인 명동(明洞)에서 7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중국음식점 송학반장(松鶴飯莊)이다. 송학반장은 충북연구원이 2018년 발간한 「충북 장소의 영혼 100년」이라는 보고서에 의하면 현존하는 제천 시내 음식점에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가게로 조사되어 있다.


    송학반장은 고(故) 기고봉 씨가 1954년 제천에서 식당을 열면서 시작하였다. 중국 산둥성 출신의 화상(華商)이었던 기고봉 씨는 대구에서 2년간 장사하다 1953년 제천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그는 1954년부터 명동에 단층 건물을 얻어 동명의 상호를 걸고 중국음식점을 열었다. 지금도 송학반장 건물의 정면 빨간색 바탕에 송학반장이라는 한자가 금색 글씨로 쓰인 간판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통상 중국음식점이라 하면 ‘반점(飯店)’이라는 식당을 뜻하는 중국식 표기를 떠올릴 것이다. 그에 반해 이 식당의 상호는 ‘반점’이 아닌 ‘반장(飯莊)’이라는 상호부터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런데 식당의 차림표와 영업신고증에는 ‘송학반점’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더욱 궁금해진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최초로 영업허가를 낼 때 담당 공무원이 ‘반장’을 ‘반점’으로 착각하는 실수로 인해 ‘송학반점’으로 허가가 났다고 한다. 하지만 송학반장은 그와는 무관하게 초기부터 사용한 ‘송학반장’을 그 이후에도 줄곧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한 ‘장(莊)’이라는 한자는 중국에서 ‘점(店)’보다 규모가 큰 가게나 집을 지칭하는 데 사용한다고 한다. 실제 우리나라에도 김구 선생이 서울에서 거주하였던 종로구 평동의 ‘경교장(京橋莊)’이나 이승만이 머물렀던 낙산(洛山)의 ‘이화장(梨花莊)’ 같은 규모가 큰 건물에도 ‘장(莊)’을 붙이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송학반장은 제천시에 처음으로 세워진 중국음식점이자 정통 중화요리를 하는 명소로서 1960년에 세워진 2층짜리 현재의 가게 건물은 당시 제천에서는 극히 보기 드문 2층 건물이었으니 ‘반장’이라는 호칭이 붙을 만하였다.


    못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먹어본 제천 사람은 없다는 송학반장 음식

    송학반장은 제천시의 오래된 식당으로서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이른바 “못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먹어본 제천 사람은 없다.”라는 말이 무방할 정도로 제천 사람에게는 유명한 맛집이다. 송학반장 중화요리의 특징은 조리법과 재료를 옛날 방식 그대로 고수한다는 점이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 어디에나 오래된 유명 중국음식점이 즐비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국 음식들은 전통에서 많이 벗어나 한국화된 중화요리로 재탄생하거나 최근에는 젊은 세대의 취향에 맞추어 변화를 준 음식이 대종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하지만 송학반장은 옛날 재료와 조리법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그중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송학반장에는 옛날 중국식당에서 내었던 독특한 향의 엽차를 그대로 내고 있다. 요즘 어지간한 규모의 중국음식점이 아닌 이상 엽차도 추억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다음으로 중국 음식의 중요한 메뉴인 면 요리에 들어가는 면발이 여타 중국식당의 노란색 면발과는 달리 새하얗다. 송학반장에서는 면발을 만들기 위한 밀가루 반죽에 소다를 일절 사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송학반장의 면은 소다를 사용하지 않는 전통적인 제조 방식을 고수한다. 밀가루 반죽에 소다를 첨가하는 것은 후대에 생긴 것이다. 밀가루에 소다를 섞어 면을 만들면 색깔이 노르스름해져서 보기에도 좋고 면이 질겨져서 탄성이 높아지고 잘 불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다. 배달이 많은 중국음식점에 소다는 천군만마와 같은 재료이다. 다만 소다를 넣어 만든 면은 잘 불지 않는 대신에 식감도 불편하고 특히 위장에 많은 부담을 준다고 한다.


    다음으로 송학반장의 깐풍갈비와 삼선짬뽕, 냉우동은 이 집 전통의 조리법과 맛을 각자 담고 있는 3대 시그니처 음식이다. 그중에 깐풍갈비는 중화풍 돼지갈비 튀김 요리로 이 집의 대표메뉴이다. 깐풍갈비는 돼지갈비를 뼈째 잘게 잘라서 튀긴 다음 마늘 맛이 강한 이 집 특유의 소스를 얹어내는 음식이다. 송학반장의 주방에는 바닥이 움푹 팬 둥그런 모양의 커다란 목제 도마를 볼 수 있다. 돼지갈비를 다루는 전용 도마인데 칼로 뼈를 내리치다 보니 패이게 된 것이라 하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변하는 세월 바뀌는 입맛, 노포 중식당의 미래

    송학반장은 제천 최초의 중국음식점이자 화상(華商)이 직접 음식을 만들어내는 중화요리 전문점으로 1950년대 개업 이후 승승장구하였다. 특히 1960년대 경제개발 및 근대화가 추진되면서 시멘트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제천시도 시멘트 공업도시로 변모하였다. 이에 송학반장도 1960~1970년대 말까지 일반시민은 물론 인근 시멘트 공장과 관공서, 학교 등에서 단체 손님이 많이 찾는 등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송학반장은 1970년대 말경 창업주의 사망과 사회적 혼란으로 일시 경영에 어려움이 닥쳤으나 이내 회복하였지만, 이후 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 이후로는 단체 손님이 대폭 감소하면서 운영이 어려워졌다. 그런데다가 2000년대 이후로는 제천시 주변 지역에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도심의 축이 이전하면서 송학반장의 명성은 예전과 같지 않다. 그러나 요즘 제천의 젊은 세대는 송학반장을 잘 모르더라도 몇 년 전 방송을 통해 소개된 이후로 오히려 전국 각지에서 소문을 듣고 손님이 찾아오는 맛집으로 새로이 주목받고 있다.


    현재 송학반장은 1대 창업주 기고봉 씨가 타계한 이후 아들 기수산(紀壽山) 씨가 가게를 물려받아 2대 대표로 식구들과 함께 운영해 나가고 있다. 송학반장의 3대 계승에 대해 기수산 씨는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라고 잘라서 대답한다. 음식을 옛날 방식을 고수해가며 만드는 일이 너무 힘들고 고되므로 자식에게 같은 고생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란다. 제천시는 제천의 전성기였던 1970년대와 그 중심지인 명동 일대의 쇠퇴한 구도심에 대한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1975년 향수타운’을 조성하여 관광명소로 변화시키고 있다. 송학반장은 길 건너편의 제천시 근대문화재인 ‘엽연초 수납취급소’와 더불어 제천시 명동의 중요한 명소로서 지속될 수 있도록 유무형의 지원이 필요해 보인다.

  • 1882년 임오군란 이후 한국에 들어온 자장면

    자장면은 작장면(炸醬麵)이라는 용어가 변화된 말이다. 작장면은 장을 튀겨 면에 비벼먹는 음식이라는 의미인데 중국 동북지방인 베이징, 산둥등 지방의 토속음식이다. 여기서 튀기는 장은 콩 70%와 밀 30%를 섞어 짜게 발효시킨 춘장이다. 춘장의 맛이 매우 짜서 한국에 비해 얹는 장의 양이 적고 구수한 맛이 없으며 기름기가 많아 느끼한 맛이 강하다. 중국 동북지역의 음식이 한국에 들어온 것인데 들어온 시기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이다.(박정배, 2013,『음식강산 2』,한길사.)

    짜장면
    짜장면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청나라가 개입하여 대원군을 청으로 끌고 가면서, 청나라의 장수인 원세개가 청나라 군인들을 한양에 주둔시키고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게 된다. 임오군란 후 청나라와 조선은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이라는 조약을 체결하는데, 이 조약으로 청나라와 조선의 상인들은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의 청나라와 조선의 무역은 사대무역으로 국가가 깊히 개입한 공무역의 성격이 짙었다.


    상민수륙무역장정에 따라 청나라 사람들이 조선의 개항장에 들어오면서 주로 중국 산둥 지방 사람들이 인천등 개항장에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도 주한 중국대사관 통계에서 한국 화교의 94%가 산둥성 출신이라는 사실도 임오군란이후 조선에 건너 온 화교의 대부분이 산둥성 사람이었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조선내 화교의 대부분이 산둥성 사람인 점에서 그들의 향토음식인 자장면도 같이 이 시기 들어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장면의 토착화에 대한 근대 신문기사는 단편적으로 서술하였다. 이에 이글에서는 김만태의 연구(김만태, 「‘짜장면’의 토착화 요인과 문화적 의미」,『한국민속학』50, 2009.)를 기반으로 자장면의 토착화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자장면이 개항기부터 한국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것이 곧 한국인들에게 사랑받는 음식이 된 것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신문을 검색해 보면 짜장면은 많이 검색되지 않는다. 현재 80대 이상 되신 분들은 1940년대 짜장면이 흔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1950년 5월 불법 금품선거운동을 고발하는 신문기사에서 선거운동원에게 하는 식사대접으로 빈대떡, 뎀뿌라, 잡채와 함께 짜장면이 등장하는 점에서 이 무렵부터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음식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짜장면은 더 한국사람들과 밀착된 음식이 되는데 이렇게 된 이유는 한국의 화교사회가 변화하고 밀가루가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한국과 공산화된 중국은 국교를 단절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에 살던 화교들은 중국의 무역거래처와 근거지가 단절되었다. 1922년 조선의 화교증 30%정도가 요식업을 하였는데 30%외 나머지 화교들은 중국과의 무역업을 하였다. 이러던 것이 중국과 국교단절 이후 한국의 화교들은 대부분 요식업을 하게 되었다.


    1950년대 이후 화교음식점은 증가하는데 화교인구나 중국에서 오는 관광객이 전무한 점에서 한국의 화교음식점은 한국인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증가하던 화교음식점은 1980년대 들어 급감한다. 1970년대 중반 서울의 중국음식점 중 65%가 화교가 운영하던 것에서 1993년에느 6%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화교의 수가 줄면서 결국 화교음식점 수도 줄은 결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인들이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에서 화교 주방장의 조수로 들어가게 되었고 이들이 후에 중국음식점을 차리게 된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은 점점 증가하는데, 중국음식점 전체 수가 1958년에는 1702개에서 2006년에는 22,653개였다. 화교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고려하면 대부분의 중국음식점을 한국인이 운영한다고 볼 수 있다.


    고객이 한국인이 다수가 되면서 짜장면은 좀 더 한국인의 입맛게 맞게 변화된다. 1960년대 이전에는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국집마다 고유한 면장이 있었으나 이후 화교들이 탄압받고 해외로 많이 떠나면서 면장을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게 되었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춘장은 중국식 면장에 설탕을 가열해 만든 캐러멀을 혼합한 것이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면장이 대량 유통되면서 짜장면 맛은 대부분의 가게가 비슷해 졌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춘장을 볶은 기름은 버려서 느끼한 맛을 줄였고, 춘장에 야채와 물녹말을 넣어서 걸쭉하게 만들었다. 양파가 대량 생산되면서 양파를 짜장면에 많이 넣었는데 양파의 단맛과 수분이 짜장면을 더 달짝지끈하고 걸쭉하게 하였다.


    한국은 해방 후 미국이 원조한 밀가루가 많이 들어왔고 쌀의 자급률이 부족했다. 정부에서는 분식을 권장했는데 이것은 중국음식점이 성장하는데 바탕이 되었다. 값싼 밀가루는 짜장면을 싼 가격에 판매하게 했는데, 중국음식점에서 하는 배달과 더불어 짜장면이 한국 대중음식으로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인천에 있는 짜장면박물관은 공화춘이라는 중국음식점을 보수하여 만든 것이다. 이 짜장면 박물관에는 자장면의 배달에 관해서도 보여주는데 1960년대 이전에는 판위에 음식을 올려 배달하였다고 한다. 1960년대 음식을 완전히 감싸는 형태의 나무배달가방이 등장하였고 양철가방이 개발된 것은 1970년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