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한국갤럽에서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음식’ 10가지를 분야별로 발표하였다. 2004년과 2014년에 이어 그간의 변동 폭을 반영한 자료에 의하면 10위권에 드는 음식 중 불고기(3위), 삼겹살(7위), 갈비(8위), 갈비찜(9위) 등의 육류요리가 전체 10개 중 4개를 차지하여 재료 분야별로는 가장 높았다. 시중에서 ‘등갈비찜’이나 ‘매운갈비찜’ 등의 음식상품으로 판매되거나 혹은 명절이나 잔치 등 특별한 때 주로 해먹는 비율이 높은 갈비찜을 제외한 불고기, 삼겹살, 소갈비나 돼지갈비는 음식상품 혹은 가정요리로 전국 어디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고기요리이다.
원래 불고기와 갈비구이, 갈비찜 등은 모두 궁중음식에서 전래된 것으로 본래는 소고기나 소갈비를 재료로 만들었다. 궁중음식이 차츰 민간에 전파된 이후에는 비싼 소고기 대신 돼지고기를 이용한 돼지갈비, 돼지불고기 등이 등장하였다. 삼겹살은 가장 늦은 시기에 등장한 음식으로 일본에 돼지고기를 많이 수출하던 198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중에 보편화된 음식이다. 일본에서 안심이나 등심 등 돼지의 좋은 부위만 수입해가는 바람에 기름기가 많은 돼지 뱃살이 국내시장에 대량으로 풀리면서 삼겹살의 전성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불고기를 비롯한 육류요리는 여러 지역에서 그 지역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경기도 수원시의 ‘수원 왕갈비’, 전라남도 담양군의 ‘떡갈비’, 경상남도 울산시의 ‘언양불고기’ 등은 궁중 또는 반가(班家) 음식문화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향토음식이다. 수원의 경우 1789년(정조 13)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현륭원(顯隆園)으로 이장과 국왕의 능행, 1796년(정조 20) 수원 화성(華城)과 행궁(行宮)의 건설 등의 과정에서 수원에 유입된 궁중음식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 ‘수원 왕갈비’이다. 그런데 현대시기에 이르러 서울에서는 기존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음식이 탄생하였다. 지금은 전국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마포돼지갈비’가 그 주인공이다.
‘마포돼지갈비’ 이전에도 돼지갈비를 음식으로 이용하였던 기록이 고문헌에서 간혹 확인된다. 유교의 고대경전인 『주례(周禮)』에는 제사 때 드리는 희생 중에 ‘돈박(豚拍)’을 언급하고 있는데, 돈박은 돼지의 갈비[脅]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돈박을 제수(祭需)로 정하면서 궁중을 비롯한 민간의 제사에서도 생돼지갈비를 사용하였다. 돼지갈비를 음식으로 이용한 사례는 『승정원일기』 1639년(인조 17) 6월 25일 기사에서 확인된다. 청나라의 칙사를 응접하는 영접도감(迎接都監)에서 소갈비 대신 돼지갈비 2짝에 내장을 얹은 음식을 마련할 것을 보고하여 윤허를 받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 돼지갈비가 어떠한 형태의 음식으로 조리되었는지 관련 내용이 기록되지 않아 알 수 없다. 1797년(정조 21) 화성행궁에서 열린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의 전말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찬품(饌品)조에는 노량참(鷺梁站)에 가설(假設)된 수라간에서 준비하는 윤2월 9일의 아침수라에는 혜경궁과 정조에게 올리는 찬품 중 구이 1기(炙伊 一器)에 대해서는 “황육(黃肉)ㆍ저갈비(猪乫飛)ㆍ우족(牛足)ㆍ숭어[秀魚]ㆍ생치(生雉)구이이다.” 라고 적고 있다. 재료 중에 ‘저갈비(猪乫飛)’는 돼지갈비가 구이로 조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포돼지갈비는 1950년대에 탄생한 음식이지만 그 발생배경에는 조선시대 경강(京江) 5대 포구(浦口) 중 하나였던 마포포구와 깊은 연관관계에서 비롯된다. 1392년 개국한 조선은 적의 침략에 방비(防備)하기 용이한 지세(地勢)와 국가운영의 기반인 세곡(稅穀)을 운송하는 조운(漕運)의 편리성을 고려하여 서울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였다. 산지지형이 많은 우리나라는 육로가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에 바치는 조세는 주로 수운(水運)을 통해 이루어졌다. 서울은 한강이 도성을 둘러싸고 흐르면서 바다로 연결되는 지세여서 조운선의 접근이 용이한 것이 천도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도성(都城) 일대를 흐르는 한강은 ‘경강(京江)’으로 불리면서 경강변의 마포ㆍ서강ㆍ용산ㆍ두모포ㆍ뚝섬 등 5곳의 포구가 수운의 중심지로 크게 번영하였다.
특히 경강 하류 쪽에 위치한 마포 포구(지금의 마포구 토정동, 마포동 일대)는 강폭이 넓고 수심이 깊어 삼남(三南)에서 올라오는 각종 물산이 모여 들었다. 그 중에서 가장 비중이 컸던 것은 곡식이었다. 조선이 개국하던 1392년부터 1896년(고종 33) 폐지될 때까지 504년간 조선 관원들의 녹봉 지급을 담당하였던 관청인 ‘광흥창(廣興倉)’이 지금의 마포 창전동 일대에 설치되었던 것도 삼남에서 올라온 세곡(稅穀)이 마포와 인근의 서강(西江)에 집하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마포구 창전동의 한자명인 ‘倉前洞’도 ‘광흥창 앞 동네’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마포는 17세기 후반 이후 국가의 세곡뿐만 아니라 미전(米廛)이 설치되면서 서울의 미곡 유통 중심지로도 성장하였다.
한편, 마포는 강원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한강을 이용해 뗏목 형태로 운송된 목재가 집하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도성에서 소비하는 목재는 마포로 모여 들었고 현장에서 가공되어 도성에 공급 유통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마포 일대에는 목재를 가공하는 제재소가 많았다. 지금의 마포구 도화2동 불교방송국으로부터 마포대교 북단지점에 이르는 일대가 모두 제재소였다. 조선시대부터 마포 포구에 도착한 무거운 목재를 이동하는데 드는 시간과 노력을 최소화하여 가공하기 위해 강변에서 가장 가까운 지대에 제재소가 밀집하였던 것이다. 마포의 제재소는 한국전쟁 이후 전후 재건사업과 경제개발에 따른 목재 수요의 증가로 1960년대 무렵에는 호황을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9년 강변북로가 개통되면서 제재소는 지금의 공덕동 로터리 일대로 밀려 난 이후 점차 사양화의 길을 걷다가 1980년대 후반 이후에는 마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마포 포구의 목재상과 제재소의 성장은 마포돼지갈비의 탄생과 깊은 인과관계를 맺게 된다.
그러나 마포는 근대 이후 경인선과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전국의 물화가 집산되었던 물류중심지로서의 기능이 점차 상실되었고, 새우젓 등 젓갈 종류의 집산 판매장소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현재 마포하면 연상되는 이미지 중 하나인 ‘마포 새우젓’도 결국 마포 포구가 퇴락할 무렵 주로 유통되었던 상품인 젓갈류에서 유래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새우젓은 돼지고기와 궁합이 맞는 음식인 관계로 마포돼지갈비 탄생 유래에 새우젓설도 관계를 갖게 된다. 이외에도 마포는 돼지갈비가 탄생하는데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는 다양한 역사적 요소들이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1849년(헌종 15) 홍석모(洪錫謨)가 편찬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3월편에는 “소주는 공덕과 옹막에서 삼해주를 수천 수백 독을 항아리에 빚는다(燒酒則孔德甕幕之間三亥酒 甕釀千百)”고 하였다. ‘공덕’은 지금의 마포구 공덕동이고, ‘옹막(甕幕)’은 ‘독막’ 또는 ‘독마을[甕里]’로 불렸던 지금의 마포구 대흥동의 옛 지명이다. 1935년 조선주조협회(朝鮮酒造協會)에서 발간한 『조선주조사(朝鮮酒造史)』에는 마포 삼해주를 생산하는 술도가가 100여 호 되며 연간 총 3,000석(약 54만 리터) 정도를 생산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즘 360㎖짜리 소주병으로 환산하면 1백50만 병에 해당하는 양이다. 삼해주(三亥酒)는 정월의 첫 해일(亥日)인 상해일(上亥日)에 빚기 시작하여 중해일(中亥日), 하해일(下亥日)의 세 해일에 단계적으로 빚어 익힌 소주로 현재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는 민속주이다. 현재는 대흥동과 공덕동 일대에서 삼해주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삼해주는 지금도 돼지갈비와 가장 잘 어울리는 주류인 소주와 같은 술이자 돼지를 뜻하는 한자 ‘해(亥)’자가 세 개나 들어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마포 포구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마포돼지갈비는 한국전쟁 이후인 1950년대 중반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마포 돼지갈비의 노포(老鋪)로 알려진 식당은 1956년 6월 공덕동 로터리에서 돼지갈비를 주종으로 장사를 시작한 ‘마포 최대포집’과 1959년 6월 창업한 ‘고바우집’, 1961년 마포에서 영업을 시작하다가 서대문구로 이전한 ‘서대문 원조 숯불 돼지갈비 통술집’이 있다. 그 중에서 연대가 가장 빠른 마포 최대포집의 창업주 고(故) 최한채 씨가 생전에 구술한 자료에 의하면 돼지갈비 구이는 이전에 없었던 음식이었고, 소고기보다 더 싸고 맛이 좋은 돼지고기도 갈비구이로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시작하였다고 한다.
옛날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독 속에 삶아서 썰어 먹었거든. 그리고 불고기는 소고기로 했고. 갈비라 그러면은 소갈비는 해 먹었지. 돼지갈비라는 것은 전혀 이름도 없었거든. 시작할 때부터 (돼지고기를) 대중적으로 갈비로 구이로 판매하면 어떨까 이런 것을 소고기가 했는데 돼지고기도 할 수 있다, 이런 이념으로 시작을 한 거지. (처음에) 손님들은 돼지고기는 돼지갈비나 (처럼) 구워서 먹는 걸 전혀 몰랐으니까. 그때 옛날 우리 의식구조는 전부 소고기. 고기라 그러면 소고기 구이를 말하고 소갈비를 연상했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더 좋은 싸고 맛있는 고기가 있는데 왜 이걸 왜 이용가치로 쓰지 않나 하는 이런 생각과 이념에서 돼지고기도 불고기 할 수 있고 돼지갈비도 불갈비 할 수 있다는 이념으로 더 열심히 했거든요.
마포는 돼지갈비 이외에도 ‘갈매기살 구이’와 ‘돼지껍데기 구이’, 마포구 용강동의 ‘한우 주물럭’ 등이 최초로 등장한 지역이기도 하다. 마포에 다양한 돼지고기구이 음식이 탄생하고 관련 식당들이 들어선 이유에는 새우젓설과 제재소설 등이 전한다. 새우젓은 돼지와 궁합이 맞는 식품인 것은 맞지만 돼지갈비와 같은 구이 종류에는 곁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다지 설득력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제재소설은 1950년대까지도 마포 포구를 통해 목재가 들어왔으며, 목재를 가공하는 일은 노동의 강도가 높고 가공과정에서 먼지가 많이 발생하는 직종이다. 기름기가 많은 돼지고기를 먹으면 몸 속에 있는 먼지를 기름기가 씻어 내린다는 민간의 속설에 따라 자연스럽게 돼지고기구이가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리하면 마포돼지갈비는 한양 최대 물류집산지였던 마포 포구문화의 역사적 배경 하에서 생겨난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현재 마포에는 예전 경의선 철도가 지나던 현재 전철 공덕역으로부터 도화주민센터에 이르는 도화동지역과 옛날 마포중고등학교 뒤편 용강동 일대에 마포고기구이골목이 형성되어 마포돼지갈비의 명성과 전통을 지켜나가고 있다.
소금은 인간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식품이다. 예로부터 바닷물을 말려서 소금을 생산해내는 방법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바다에 접하지 않은 내륙일수록 소금을 구하기가 힘들었으며 내륙에서는 소금값이 금값보다 비쌌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바닷가에서 생산된 소금을 내륙으로 운송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작업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해안에서 내륙으로 연결되는 고갯길에 소금이 이동했다는 데에서 유래한 ‘염티’ 또는 ‘염치’라 불리는 고개가 많다. 뿐만 아니라 소금이 다니던 길목에는 소금 염(鹽)자를 포함한 마을도 많이 있다.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자리한 염리동 역시 소금 염(鹽)과 마을 리(里)가 합해진 이름으로, 과거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았던 데에서 생겨난 지명이다. 염리동은 서해에서 들어온 바닷배가 물건을 부리던 마포나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다. 마포나루는 한양 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포구로, 조선 전기부터 서해안의 어선은 물론 전국의 소금배가 겨울철의 결빙기를 제외하고는 수시로 드나들던 한양 남서부의 대표적인 포구이자 관문이었다. 마포나루는 한양 도성과의 거리도 가까웠기 때문에 항상 많은 물량이 모여들었고, 마포나루에서 하역된 물건은 염리동을 거쳐 만리현(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만리동 고개)이나 애오개를 넘어 한양 도성으로 운송되었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마포구 대흥동 일대는 과거 동막리로 편제되어 있었는데, 동막리에서는 조그마한 하천이 한강으로 흘러들었다. 이 하천을 따라 마포에서 소금을 실은 배가 동막리로 들어왔으며, 동막리에는 소금창고가 생겨나게 되었다. 서해의 염전에서 거둬온 소금을 보관하기 위한 소금창고는 지금의 염리동 일대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 동막리는 마포나루로 들어오는 소금이나 젓갈류를 보관하는 데 필요한 옹기를 구워 팔던 마을이어서 독막 또는 동막으로 불렸다. 이 자리는 지금의 서울 지하철 6호선 대흥역 부근이다. 이 일대는 고려시대부터 운영되었던 광흥창(廣興倉)이 있던 곳이다. 광흥창은 한양 서쪽의 와우산 아래에 있던 것으로 전국에서 올라온 세곡을 모아두고 관리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던 곳이다.
마포나루와 가까운 곳에 소금창고가 있으나 그곳에서 소금을 떼어다 한양에 파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소금장수들은 비탈지고 경사진 곳에 움막집을 짓고 살았고, 이로부터 염리동이라는 마을이 생겨났다. 염리동은 마을의 역사가 오래되었고 재개발 사업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함에 따라 점차 주거환경이 열악한 슬럼으로 변화했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범죄가 발생하기 좋은 환경이 되자, 마을 골목길에 소금길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해 외지인들이 과거와 현대의 조화를 구경하고 체험하는 장소로 탈바꿈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면서 근래 염리동 소금길이 탄생했다. 지금의 염리동 소금길은 골목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노란색의 전신주를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인적이 드문 1.7㎞ 구간의 골목길을 하나의 동선으로 연결하여, 1번부터 69번까지의 번호를 부여했다. 소금마을로 잘 알려진 염리동에서는 마을의 정체성을 찾고 주민 간 화합을 위해 염리동 소금축제가 개최된다. 이 축제는 주민들이 소금을 활용한 축제를 기획하면서 대표적인 마을 행사로 자리 잡았다.
엄격한 의미에서 염리동 소금길은 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부터 마포나루에서 염리동 일대까지 소금이 운송되었고 염리동의 소금장수들이 주변 지역으로 소금을 팔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염리동의 소금길 역사는 상당히 오래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