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실의 계절 가을은 오곡과 과실이 무르익어 수확하는 시기이다. 가을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과실 중 하나가 밤이다. 봄에 흰 밤꽃을 피우고 한여름의 뜨거운 햇빛 아래 무럭무럭 자라나 가을이 되면 쫙 벌어진 밤송이 안에는 토실토실하게 영근 알밤이 열린다. 어린 시절 대바구니나 키를 뒤집어쓰고 기다란 장대로 밤나무를 털던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과실이기도 하다.
밤은 우리나라의 전통 과실로 비교적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밤을 식품으로 이용했는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다만 경상남도 창원시 다호리 고분군의 다호리 1호 무덤에서 출토된 사각형과 원형의 그릇에 밤과 감이 각기 담겨진 부장품에서 그 시기를 가늠할 수 있다. 다호리 1호 무덤은 원삼국시대의 고분으로 지금으로부터 대략 2천여 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밤을 식용한 역사도 그 정도로 오래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 밤 생산량의 약 22%를 차지하며 그 다음인 중국과 수위를 다툴 정도로 세계 주요 밤 생산국 중 하나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의 밤은 옛날부터 그 명성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마한(馬韓)조에는 마한에서 “큰 밤이 나오는데 크기가 배와 같다(出大栗 大如梨)”고 하였다. 또 1123년(인종 원년) 북송(北宋)의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의 풍속을 기록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제23권 ‘잡속(雜俗)’편에는 “그(고려) 과실 중에 밤은 크기가 복숭아만 하고 달고 맛이 있어서 좋아할 만하다(其果實 栗大如桃 甘美可愛)”고 하였다.
밤은 현재 우리 식문화에서 쪄먹고 구워먹는 간식 정도로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우리 전통문화에서는 다양한 용도로 이용되는 중요한 식품 중 하나였다. 우선 밤은 옛날부터 관혼상제에서 제사상이나 혼례상에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었다. 다음으로 밤은 중요한 구황식품이기도 했다. 과거에는 흉년이나 재해가 들면 밤이 구황식으로 이용되었다. 밤은 견과류에 속하지만 단백질과 지질의 함량이 다른 견과류에 비하여 매우 낮은 대신 탄수화물의 함량이 매우 높아서 쌀이나 보리와 같은 곡식대용으로 적격이었다. 이외에도 밤은 궁중에 바치는 진상품이나 왜(倭)에 하사하는 외교물품으로도 사용되었다.
고려 후기의 문인 이규보(李奎報)는 「율시(栗詩)」라는 작품에서 전통시대에는 밤이 사람에게 여러모로 이로움이 많다(栗實利人多矣)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잎은 여름철에 나고 열매는 가을철에 익네. 틈이 딱 벌어지면 방울 같고 껍질은 흰 살덩이를 겹으로 감싸네. 제사상에는 대추와 함께 놓이고 여자의 폐백에는 개암과 짝지어지네. 손님만 대접할 뿐 아니요 우는 아이조차 그치게 하는 재주가 있네. 천호의 제후보다 나아서 만인의 굶주림도 구제하기에 족하네. 맛을 탐내어 한 움큼 쥐고 껍질을 쉬 벗기고자 앞니를 날 세우네. 화롯불에 굽고 솥에도 삶는다네(葉生朱夏候 實熟素秋時 罅發呀鈴口 苞重祕玉肌 饋籩兼棗設 女贄與榛隨 不但供來客 偏工止哭兒 堪將千戶等 足濟萬人飢 握重緣貪味 牙銛易褫皮 煨憑爐底火 烹代竈中炊)
충청남도 공주시는 백제의 두 번째 왕도로서 동성왕, 무열왕, 성왕의 삼대에 걸쳐 백제의 중흥을 일구어낸 발판이 되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도읍한 기간은 서기 475년부터 538년까지 63년 정도에 불과하였지만, 이 기간 중에 화려한 백제문화의 정수를 꽃 피운 웅진백제시대를 이루었다. 또한 공주시는 조선시대에도 지금의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를 관할하는 충청감영이 주재하였고, 정3품 당하관인 목사(牧使)가 다스리는 대읍(大邑)이었다.
백제시대 이래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공주시는 오래전부터 ‘알밤의 고장’으로 유명한 지역이기도 하다. 밤은 전국적으로 생산되었던 과실이지만 밤나무는 조선 초기부터 공주 지역의 주력 유실수였다.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 편 공주목(公州牧) 조에는 공주 땅은 “오곡과 닥나무, 왕골, 밤나무, 뽕나무를 심기에 적합하다(土宜 五穀 楮 莞 栗 桑)”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공주 알밤’이 공주시의 명산물로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70년대 이후부터이다.
1960년대 경제개발이 진행되는 가운데 당시 정부에서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여파로 황폐해진 전국의 산에 식목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미국의 원조물자로 들어 온 밀가루를 농민들에게 품삯으로 나누어 주면서 단기적으로는 가장 시급한 땔감용 나무로 아카시아를 심었고, 중장기적으로는 농가소득증대를 위해 유실수를 권장하였다. 1960년대 말부터 공주지역에서는 정안면 일대를 중심으로 밤나무를 중점적으로 식재하면서부터 공주시는 명실 공히 알밤의 고장이 되었다.
밤이 공주시의 명산물인 만큼 다른 지역에 비해 밤을 이용한 향토음식도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현재 일반에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알밤 막걸리’가 있다. 약 20여 년 전부터 공주시의 양조업자들이 고된 연구와 개발과정을 거쳐 만들어낸 알밤 막걸리는 ‘공주 알밤 막걸리’라는 상표로 출시된 이래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인기와 수요를 일으켰다. 심지어 공주시가 아닌 여러 지역에서 제조한 유사상품까지도 날개 돋친 듯 팔릴 정도였다. 비록 공주시의 양조업자들에게는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입혔지만 이 또한 공주 알밤의 높은 명성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밤을 이용한 음식으로는 밤갈비ㆍ밤국수ㆍ밤냉면ㆍ밤두부전골ㆍ밤만두ㆍ밤묵무침ㆍ밤묵밥ㆍ밤묵잡채ㆍ밤밥ㆍ밤전 등 실로 그 종류가 다양하다. 이 중 유독 눈길 가는 식품이 있는데 바로 밤묵이다.
묵은 전통적으로 녹두ㆍ메밀ㆍ도토리ㆍ올방개와 같은 구황작물이나 해초나 생선껍질 등으로 만든 식품이다. 묵은 재료가 단일하고 제조과정도 간단하여 옛날부터 만들어 먹은 우리나라 특유의 전통식품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묵이라 하면 도토리묵과 메밀묵, 청포묵을 떠올리게 된다. 이에 비해 밤묵은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밤묵은 사촌지간인 도토리묵이 탄닌 성분이 많아 떫은맛이 강한 반면에 고소한 맛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밤묵은 그 자체로 식용하거나 밤묵말랭이로 가공되어 묵밥ㆍ묵무침ㆍ전골ㆍ잡채 등 다양한 음식의 재료로도 활용되고 있다.
밤은 탄수화물ㆍ단백질ㆍ지방ㆍ무기질ㆍ비타민 등 다양한 영양소를 고르게 함유하고 있다. 탄수화물은 전분 함량이 높지만 소화가 잘 되어 노약자나 환자를 위한 보양식으로 이용가치가 높다. 비타민 B1은 쌀의 4배, 비타민C는 과일류를 제외한 과실 가운데 함유량이 가장 높고 비타민D도 많이 들어 있다. 또한 무기질은 철과 칼슘의 함량이 높아서 특히 여성들에게 좋은 건강식품이다. 밤묵은 밤의 영양성분을 고스란히 응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섭취가 용이하고 소화도 잘 되므로 건강다이어트식으로도 손색이 없는 식품이다.
밤묵은 다른 묵과 같이 재료도 단일재료이고 만드는 과정도 간단하다. 하지만 준비과정은 여느 묵처럼 녹록지 않다. 일반적으로 많이 식용하는 묵의 재료인 도토리나 녹두, 메밀 등은 껍질이 단단하여 껍질과 알맹이를 분리해 내는 과정이 꽤 번거롭고 힘든 일이다. 밤묵도 도토리처럼 껍데기와 보늬(속껍질)를 일일이 분리해야 하므로, 사실상 묵을 만드는 과정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행히도 요즘은 상품화된 밤묵가루를 구입할 수 있으므로 준비과정을 생략한 채 바로 편리하게 밤묵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
밤묵 만드는 법
준비과정
1) 껍질을 제거한 밤을 믹서나 분쇄기에 갈아서 자루에 넣고 물을 부어가면서 전분을 짜낸다.
2) 짜내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면 뽀얀 전분이 빠져 나오는데 물과 전분이 분리되도록 가라앉힌다.
3) 윗물이 말갛게 될 때까지 여러 번 물을 갈아 준 후 전분을 분리하여 건조시키면 밤묵가루가 완성된다. 밤묵가루 제품을 사용하면 준비과정은 생략한다.
제조과정
4) 밤묵가루와 물을 1:5의 비율로 잘 섞어 주걱으로 저어가면서 묵을 쑨다.
5) 센 불에서 20분 정도 저어가면서 끓이다가 묵이 응고가 되면, 불을 중불로 줄이고 10분 정도 저어주면서 더 끓인다.
6) 불을 끄고 10분 정도 뜸을 들인 후 그릇에 옮겨서 식힌다.
‘묵’은 곡식이나 나무 열매를 갈아서 앙금을 가라앉힌 다음 물에 섞어 풀처럼 쑤어서 굳힌 음식을 말한다. 주된 재료는 녹두, 도토리, 메밀, 옥수수 등의 나무열매나 곡물 등을 이용한다. 묵은 우리나라의 고유한 식품으로 그 자체로는 특별한 맛은 없지만 채소 등의 부재료를 넣고 양념으로 무쳐서 먹는 음식으로 이용된다. 우리나라에 묵을 만드는 방법이 고문헌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에 들어서이다.
1737년(영조 13) 서명응(徐命膺)이 저술한 농서(農書)인 『고사십이집(攷事十二集)』에는 녹두묵 만드는 법을 “청포는 녹두로써 두부처럼 만든다. 그러나 자루에 넣고 누르는 것이 아니라 목기에 담아서 응고시킨 후 이용한다. 가늘게 썰어 초장에 무쳐 나물로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묵이나 묵으로 만든 음식(청포채, 탕평채) 등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1800년대 초 서유구(徐有榘)가 저술한 『옹희잡지』에는 “(황포묵은) 반드시 녹두로 만드는데 치자 물로 빛깔을 내면 맑은 노란색이 나므로 매우 아름답다”고 하여 황포묵 만드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 1885년 김병규(金炳圭)의 『사류박해(事類博解)』에서는 녹두부(綠豆腐), 청포(淸泡), 황포(黃泡) 등을 묵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1800년대 말엽의 전통조리서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는 묵이나 묵을 이용한 음식들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그 종류로는 창면, 탄평채, 묵볶이, 녹말편, 복분자편, 살구편, 앵두편, 메밀묵법, 제물묵법, 녹말수비법을 수록하고 있다. 또한 앞 시대의 묵 조리법을 보완하여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근대문헌에서는 1917년 방신영이 저술한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에 황포묵을 비롯한 다양한 묵과 묵 음식이 소개되어 있다.
황포묵은 전라북도 남원시의 향토음식으로 녹두묵을 만들 때 노란색을 내는 천연색소인 치자로 물들인 묵의 명칭이다. 녹두묵에 치자로 물들인 것을 황포묵이라 하고 물들이지 않은 녹두묵은 청포묵이라 한다. 예로부터 남원의 황포묵은 인근 지리산의 고산지대에서 나는 녹두로 만들기 때문에 맛이 좋아 최고로 쳤다고 한다. 한편 황포묵의 노란색은 우리나라 전통 색상인 오방색(五方色) 중 ‘중앙’의 방위(方位)에 해당하고 땅을 상징하는 색이다. 그래서 황포묵은 전라북도의 대표적인 향토음식 중 하나인 전주비빔밥에 노란색을 구성하는 고명으로 반드시 넣는 재료이다. 황포묵은 조선후기 영조 임금이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던 탕평책을 상징하는 음식이었던 탕평채의 주된 재료로도 사용되었다. 남원시에는 소복순(蘇福順)씨가 3대에 걸친 제조법을 전수받아 만든 황포묵이 유명하였지만 1989년 소복순씨가 사망하면서 명맥이 끊겼다고 한다.
황포묵의 재료인 녹두는 콩과에 속하는 1년생 초본식물로 단백질과 지방의 함량이 낮은 대신 전분의 함량이 높다. 1827년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녹두는 “맛은 달고 성질은 차며 독이 없다. 원기를 돋우며 오장을 조화롭게 한다. 정신을 안정시키고, 12경맥을 잘 돌게 하고, 풍을 제거하고 피부에 윤기가 나게 하므로 항상 복용하면 좋다. 또한 열을 내리게 하고 독을 풀어주니 약을 먹고 있는 사람은 약효를 없애기 때문에 먹어서는 안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방에서 녹두는 소염과 혈압 치료에 이용되고 있으며, 이외에도 해열과 해독의 약리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료
녹두, 치자, 물
조리과정
묵은 녹두, 메밀, 도토리, 옥수수 등 전분이 있는 열매를 물에 불려 맷돌에 갈아서 가루를 낸 후 풀로 쑤고, 그 풀을 틀에 넣고 굳힌 것이다. 묵은 굉장히 오랜 옛날부터 먹었다. 도토리묵의 재료 도토리는 선사시대 유적에서도 유물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도토리는 떫은맛이 강하므로 물에 불려 떫은맛을 뺀 후 가루를 내어 먹었을 것인데, 그 경우 묵으로 만들어 먹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녹두로 만든 묵은 원래 색이 하얗다. 하얀 녹두묵을 청포묵이라 하고, 청포묵에 치자로 노란물을 들인 것을 황포묵이라고 한다. 청포묵도 전근대시기부터 먹어왔는데 그 대표적인 요리가 탕평채다.
『동아일보』1931년 3월 3일자 「자랑거리 음식솜씨」기사에서는 녹두묵과 도토리묵 만드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 녹두를 물에 불려 맷돌에 간 후 다시 물을 부어 윗물은 따라 버리고 아래에 가라앉은 가루에 물을 넣고 끓여 풀을 쑨 후 틀에 굳힌다. 노란색으로 물들이려면 치자를 불린 물을 풀을 쑤기 전에 섞으라고 하였다. 도토리묵은 우선 도토리를 여러 날 물에 불려 떫은맛을 빼야 한다. 여러 날 물을 갈아 주어 떫은맛을 뺀 후 맷돌에 갈아 가루를 내고, 가루 낸 물에서 윗물을 따라 버리고 가라앉은 가루에 물을 넣어 끓여서 풀을 쑤라고 하였다. 갓 만든 묵을 오래 두면 상하고 맛이 변하는데 이를 막기 위해 ‘묵지짐’도 소개하고 있다. 묵을 두부 부치듯이 부친 후 양념장에 찍어먹는다.
녹두묵으로 만든 대표적인 요리가 탕평채인데 『동아일보』1931년 4월 24일 「자랑거리 음식솜씨」에는 탕평채를 소개하고 있다. 탕평채는 초나물에 녹두묵을 넣은 것이다. 초나물은 나물을 식초에 무친 것이다. 탕평채는 『동국세시기』 등 조선시대 사료에서도 만드는 법이 나오는 전통음식이다. 탕평채는 일제 강점기를 지나 1970년대에도 손님상에 내놓거나 향토음식으로 소개되고 있다.(『경향신문』 1971.03.18 「입맛 돋워주는 토속요리」 ; 『동아일보』1971.03.29. 「금주의 식탁」)
해방 후 식량이 부족한 때 녹두죽 만드는 법이 소개되었는데 녹두묵 만드는 공장을 알아 두었다가 저녁마다 녹두묵 만들고 남은 녹두풀을 5인분에 20원에 사다가 죽을 쑤면 맛있고 경제적인 녹두죽을 쑬 수 있다고 하였다.(『경향신문』1950.02.05. 「경제적인 녹두죽」) 조선시대에도 녹두묵을 가게에서 만들어 파는 경우가 많았는데 해방 후에는 묵종류 등 식품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공장이 많이 생겼다. 이런 공장이 마포구 공덕동, 동대문구 제기동 등 서울 변두리에 있었다. 공장에서 유해색소를 묵에 섞어 검찰에 고발당했는데, 녹두묵의 경우 노란색을 내기위해 타르색소를 첨가하거나 밀가루로 묵을 만들고 색소를 입히기도 했다.(『매일경제』1973.03.08 「유해색소 섞어 묵 제조」)
도토리묵은 오랜 옛날부터 먹었던 묵이면서 또 주변 산에 떡갈나무가 늘 있는 관계로 가정에서 쉽게 해먹을 수 있는 묵이었다. 도토리의 떫은맛이 강해서 묵으로 해먹으려면 보통 20여 일 동안 물에 담궈 놓아야 하는데 불과 하룻동안의 약품처리로 도토리의 떫은 맛을 없애서 특허를 출원한 경우도 있었다.(『동아일보』1972.10.04 「정사길씨 특허 도토리의 떫은 맛 단 하룻만에 없애」) 주변 산에 떡갈나무가 많으면 도토리를 따기 위해 떡갈나무가 피해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 1980년 무렵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 지산리 좌동 파라다이스 공원 안 천여평의 야산에 자라고 있는 수령 20~30년의 떡갈나무 1천여그루는 해마다 9월하순쯤 이면 송탄읍내 도토리묵 장수와 동네사람들이 메나 도끼를 둘러메고 공원으로 모여들어 마치 나무를 부러뜨릴 것처럼 두들겨 도토리를 따갔다. 두들겨 맞은 떡갈나무는 움푹 패인 상처를 입어 고사 직전에 이르고 상처 부위에 해충들이 달라들어 병들어 갔다.(『경향신문』1980.07.05. 「평택군 송탄읍 야산 5000평 1000여그루의 떡갈나무 폭행 중환」)
도토리묵을 집에서 쉽게 해먹을 수 있도록 가루를 만들기도 했다. 전라북도 진안에서는 1972년 농협에서 진안읍에 융자하여 도토리분말 가공공장을 세웠다. 도토리분말 10만 부대를 생산하여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 판매하여 주민 소득증대에 이바지한다는 것이다.(『매일경제』1972.11.13 「진안에 도토리 분말공장 농협서 지원 올 안에 건립」) 현대의 묵은 가정에서 만드는 음식을 벗어나 대규모 제조의 길에 들어섰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식품인 '묵'은 곡식이나 열매에서 추출한 전분을 끓인 후 식혀서 굳힌 음식이다. 묵의 재료로는 전분이 함유된 녹두, 메밀, 도토리, 옥수수 등이 사용된다. 묵은 계절에 따라 혹은 각 지역의 특산물로 만들어 먹었다. 청포묵이라 불리는 녹두묵은 봄에, 여름에는 옥수수로 만든 옥수수묵, 가을엔 도토리묵, 메밀묵은 겨울에 주로 만들어 먹었다. 이 중 가장 대중화된 묵이 바로 쌉쌀한 맛을 내는 도토리묵이다.
상수리과 나무의 열매인 도토리는 예로부터 흉년이 들었을 때 끼니를 잇게 해주던 중요한 구황식품이었다. 한 예로, 조선 숙종 때에는 흉년이 든 지역에 도토리를 보내어 백성들을 도왔다는 기록도 나타난다. 도토리 열매를 맺는 상수리나무에 관련되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 선조가 임진왜란 때 북쪽으로 피난을 갔는데 난리 중에 먹을 것이 부족했다. 당시 북녘에서는 상수리나무를 토리나무라 했다고 한다. 선조 일행이 묵게 된 마을 사람들이 황송한 마음에 도토리로 묵을 쑤어서 그쪽 말로 토리묵을 수라상에 올렸다. 그 맛을 잊지 못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선조 임금은 옛날 고생을 잊지 않을 겸, 토리묵을 상에 올리라고 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토리묵이 수라상에 자주 오르는 귀한 음식이 된 것이다. 수라상에 올린다(上) 해서 도토리를 상수라라 했고 세월이 흐르면서 상수리가 됐다.
도토리에는 타닌과 사포닌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 그 맛이 떫고 쓰기 때문에 그대로 조리할 수 않고 물에 충분히 우려낸 후에 사용해야 한다. 도토리묵을 만드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은데 우선 가을에 거둬들여 껍질을 제거한 후 잘 말려둔 도토리를 가루로 만들어 물에 담가 놓는다. 시간이 지나 앙금과 물이 분리되면 물만 따라내는 과정을 반복해 떫은맛과 쓴맛을 우려낸다. 가라앉은 앙금을 잘 말려 그 가루로 묵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전분이 주성분인 묵은 그 자체로 별다른 맛이 없고 식감이 독특해 채소를 곁들여 양념으로 무쳐 먹는 음식이다. 도토리묵은 오이나 쑥갓 등의 채소와 섞어 양념간장을 뿌려 먹는다. 『동의보감』에는 "늘 배가 부글거리고 끓는 사람, 불규칙적으로 또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대변을 보는 사람, 소변을 자주 보는 사람, 몸이 자주 붓는 사람은 도토리묵을 먹으면 좋다"라고 나온다. 또한, 도토리묵을 먹으면 심한 설사도 멈춘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토리묵은 포만감보다 칼로리가 적고 타닌성분이 지방의 흡수를 억제해 다이어트 식품으로 적합하지만, 타닌성분을 과다 섭취하면 변비를 유발할 수도 있다.
도토리묵, 오이, 미나리, 고춧가루, 김, 풋고추, 홍고추, 소금, 설탕, 다진 마늘, 깨소금, 참기름
조리과정우리의 전통음식 종류 가운데 묵이라는 음식이 있다. 묵은 식물성 재료의 녹말 성분이나 동물성 재료의 단백질의 일종인 콜라겐 성분을 젤라틴으로 변화시켜 굳힌 음식이다. 전자는 도토리묵, 메밀묵 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후자는 우족, 소꼬리, 소대가리 또는 돼지머리 등을 고아서 만든 족편이 유명하다. 한편 바다에서 나는 재료로도 이러한 묵과 같은 음식을 예로부터 만들어 먹었는데 식물성으로 대표적인 것이 지금도 다이어트 식품으로 인기 있는 우뭇가사리묵이 있고, 동물성으로는 박대라는 생선의 껍질을 끓여서 묵처럼 만든 박대껍질묵이 유명하다.
박대는 군산, 부안, 보령, 인천 등 우리나라 서해 연안에서 많이 잡히는 바닷속 개펄에 서식하는 물고기이다. 생김새는 가자미와 비슷하지만, 껍질이 매우 거칠고 질겨서 그대로 먹지 않고 껍질을 벗겨서 조리하거나 말려서 먹는다. 이때 나온 껍질을 버리지 않고 따로 모아서 말려 두었다가 끓여서 식힌 후 묵처럼 만들어 먹었던 음식이 바로 박대껍질묵이다.
경기도에서는 박대껍질묵을 벌버리묵 또는 벌벌이묵이라고도 하는데, 묵을 썰어서 그릇에 담아 놓으면 탄력 때문에 묵이 부들거리는 거리는 모습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한편 박대껍질묵은 높은 온도에서 녹기 때문에 주로 추운 겨울에 해 먹는 음식이었는데, 추운 겨울에 벌벌 떨면서 먹는 음식이라 하여 그러한 이름이 유래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본래 군산은 예전부터 다양하고 고급스러운 생선이 많이 잡혔던 곳으로 아귀와 물메기는 너무 흔해서 버려졌고 박대도 제대로 된 생선 취급을 받지 못하였다. 그나마 박대는 맛이 고소하고 담백하여 군산 서민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던 생선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박대는 가자미목 참서대과의 어종으로 서대, 개서대, 참서대, 용서대, 흑서대 등의 형태적으로 유사한 어종들이 많다. 산란 시기는 6~7월로 수심 80m 이내의 모래가 섞인 펄에서 서식한다. 박대의 생김새는 가자미와 유사하면서도 몸은 마치 소의 혓바닥처럼 생겼고 가자미보다 더욱 납작하다. 참서대과의 대표적인 어종으로는 박대와 참서대가 있는데 외형상으로는 거의 구분하기가 힘들다. 또 일부 지방에서는 서대를 박대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자세히 참서대는 성체의 길이가 30㎝를 넘지 않는 반면에 박대는 최대 길이가 60㎝ 정도에 이를 정도로 참서대에 비하여 큰 편이다.
박대는 전라북도 군산을 비롯한 서해안에서 주로 많이 잡히고, 참서대는 남해안 일대에서 많이 잡히는 어류이다. 그래서인지 서대회, 서대회 무침 등이 예로부터 전라남도 여수시의 향토 음식으로 유명하다. 박대가 참서대 등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눈치만 보다간 박대눈 된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양쪽 눈의 폭이 서대보다도 매우 좁은 편이다.
박대에 관한 옛 문헌을 살펴보면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광어, 설어는 모두 가자미류이다”라고 하였고,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지금 서해에는 설어(舌魚)란 고기가 있는데, 눈은 등에 있고 입은 옆에 있는 것이 가자미와 비슷하고, 기다란 모습이 비장(脾臟, 지라)과 같다”라고 하여 참서대과의 물고기를 설어(舌魚)로 표기하였다.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에는 마치 소의 혓바닥과 같이 생겼다 하여 우설접 (牛舌鰈)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 옛날 가죽신의 밑창과 같이 생겼다 하여 혜대어(鞵帶魚)라 불리는 장접(長鰈)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장접은 지금의 참서대에 해당한다.
박대는 함황아미노산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피로 회복과 간 기능 개선에 도움이 된다. 또한, 단백질이 풍부하고 지방함량이 낮아 소화가 잘 되고 맛이 담백하여 노인이나 회복기의 환자에게 좋다. 특히 6~7월이 제철인 박대는 찜이나 양념구이 등으로 조리되어 여름철 무더위에 잃었던 입맛을 돋우어 주는 별미로도 사랑받고 있다.
족편은 주로 소족을 주재료로 하여 만들기 때문에 발 족(足) 자를 사용하여 족편이라고 부른다. 족편은 곡물의 전분을 사용하여 만든 묵처럼 그 특성과 모습이 닮았기 때문에 종종 묵 종류로 분류되기도 한다.
소머리나 소족, 껍질과 힘줄 부분에는 콜라겐 성분이 많아 오래 끓이면 액체 상태로 되었다가 식히면 마치 묵처럼 응고되는 특성이 있다. 이러한 성질을 이용한 음식이 족편이다. 족편은 부스러기 고기나 내장, 또는 소족, 머리 고기, 소가죽처럼 콜라겐이 풍부한 부위를 장시간 푹 고아낸다. 죽과 같은 상태가 되면 먹을 수 없는 뼈나 가죽을 걸러낸 후, 틀에 부어 굳힌다. 탱글탱글하게 굳은 족편은 얇게 썰어서 초간장이나 다른 양념장을 곁들여 먹는다.
족편과 유사한 방법으로 만드는 음식 중에는 전약이 있다. 소가죽과 소머리, 소족 부위를 고운 후 여기에 마른 생강, 꿀, 정향, 후추 등의 약재를 넣어 다시 푹 고아서 굳힌 족편의 일종이다.
족편은 설날 무렵에 즐겨 먹던 겨울철 음식이다. 밖에 내놓았다가 살짝 얼린 다음 얇게 썰어 먹는데, 사각거리면서 젤리처럼 보드라운 감촉이 별미였다. 노인들이나 아이들도 먹기 편하게 부드럽고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하여 보양식으로도 즐겨 먹었다.
족편의 재료로 민가에서는 가죽, 꼬리 등과 맛을 더하기 위해 사태고기, 꿩고기 등을 쓰기도 했다. 한편 궁중 잔칫상도 빠지지 않고 오르는 족편의 주재료는 쇠족을 사용하였고 닭고기나 숭어, 마른 대구, 마른 전복 등의 부재료를 추가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달걀, 표고버섯, 석이버섯, 고추, 잣 등이 고명으로 사용되었다.
근래에 들어 족편은 우리의 입맛이 변해가면서 시중에서 판매하는 곳도 찾기 힘들고 집에서 만들기에는 많은 번거로움이 있어 점차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가는 음식이 되었다.
우족, 쇠고기(사태), 생강, 마늘, 양파, 달걀, 석이버섯, 대파, 실고추, 후춧가루, 간장, 식초, 물, 잣가루
조리과정탱글탱글한 젤리같이 생긴 귀여운 도토리묵은 우리나라에선 흔한 음식이지만 의외로 세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음식이다. 도토리는 사실 ‘도토리나무’라는 어떤 특정한 한 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참나무속에 속하는 나무들의 열매를 일컫는다. 참나무속에는 크게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갈참나무, 굴참나무 등 6종류의 나무가 있다. 산과 나무가 많은 우리나라 전역 곳곳에 분포되어있는 참나무들은 옛날부터 흉년을 버티도록 도움을 준 고마운 나무들이다.
『고려사』에서 충선왕이 흉년에 몸소 자신부터 반찬 가짓수를 줄여 도토리를 맛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산림경제』나 『목민심서』등을 통해 구황식품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조선의 숙종은 흉년이 든 지역에 도토리를 보내어 백성을 도왔다는 기록도 있다. 즉 도토리묵은 먹을 것이 부족할 때마다 먹던 음식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 전쟁 직후에도 다시 반복되었다. 물자와 식량이 극도로 부족해지고 먹을것이 귀하던 1960년대, 대전시 봉산동 구즉마을의 강태분 할머니가 뒷산에 있는 도토리를 주워다가 묵을 쒀서 팔고, 묵을 국수처럼 썰어서 육수에 말아 사람들에게 대접했다. 할머니의 묵은 10년만에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을 주민들도 너도나도 묵집을 차리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반 10여개 가게에서 90년대 초에는 30여 곳으로 늘어났다.
그러다가 1993년 대전엑스포가 개최되었다. 으레 국제적인 행사를 개최할 때에는 방문객들에게 지역만의 음식을 대접하는데, 대전시는 그때까지 어떤 음식을 선정해야 할지 몰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설렁탕이나 삼계탕 같은 음식으로 유명한 식당들이 있었지만, 이런 음식은 전국 어디에 가든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구즉묵 마을이 떠올랐다. 도토리묵 역시 전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음식이지만, 도토리묵으로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있는 곳은 대전 뿐이었다. 구황식물로 만든 것이라 가격도 저렴했고, 박람회장에서도 5km 안팎의 가까운 거리라서 손님들이 방문하기도 쉬웠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맛에 감탄한 손님들이 줄을 설 정도로 많아지자 일일이 칼로 썰 시간도 없어서 낚싯줄을 팽팽하게 묶은 틀로 위에서 찍어 눌러 채 써는 방법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도토리묵을 채 썰어 밥처럼 먹는 묵밥은 여름철엔 시원하게, 겨울철엔 뜨끈하게 나온다. 김치와 김가루만 곁들여 먹을 뿐인데 맛이 짜거나 포만감이 무겁지 않다. 묵밥은 재료가 아주 간단하다. 멸치와 다시마 우린 물에 도토리묵과 고명을 넣고 내오는 것이 끝이다. 음식의 간을 김치와 김가루, 단 두 가지의 보조재료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 보조재료에 따라 음식의 승패가 결정된다. 남도식의 진한 양념이 배어있는 김치의 맛과 고소한 김이 어우러지면 성공. 자칫 맹맹하고 떫은맛이 날 수도 있는 묵밥의 균형을 잘 잡아준다.
요즈음에는 맛도 좋은데다가 칼로리가 낮고 포만감까지 충분히 주어서 웰빙식품으로 재조명받고 있다. 최근에는 요식기업에서 대전의 향토음식 구즉묵을 동치미국물에 말거나, 비빔면 위에 구즉묵을 올려내는 방식 등 여러 방법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늘 우리의 곁을 지켜주었던 소중한 도토리는 세계박람회에서 구즉묵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사람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는 대전의 도토리묵밥은 오래도록 우리의 자랑거리로 남을 것이다.
에잇, 말짱 도루묵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많이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 말이다.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은 열심히 공들이고 노력한 일이 아무런 보람도 쓸모도 없어졌을 때 하는 말이다. 여기서 도루묵은 바다에 살고 있는 물고기 이름이다. 이 물고기의 이름에 대해 옛날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시대 선조때 이야기다. 1592년(선조25)부터 약 6년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으로 왜군을 피해 피란을 떠나는 것은 왕도 마찬가지였다. 피란을 떠나는 길에 먹을 것은 당연히 부족했고, 수라상 역시 점점 부실해졌다. 그렇다보니 식재료를 현지에서 급하게 구해야 했고, 선조가 함경도에 갔을 때 한 어부가 바다에서 잡은 ‘묵’을 진상했다. 힘든 상황에서 맛본 묵이라는 물고기는 너무나 맛있었다. 그래서 선조가 생선의 이름을 묻자 신하들이 ‘묵’이라 답했다. 맛에 감동한 선조는 천하일미인 생선에게 묵이라는 이름은 너무 하찮으니 더 좋은 이름이 필요하다며 그 자리에서 ‘은어(銀魚)’라는 이름을 새롭게 지어 주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궁으로 돌아온 선조는 고된 피란때 맛있게 먹었던 ‘은어’가 떠올랐다. 수라간에 이야기해 은어를 다시 먹었는데 그때 그 맛이 아니었다. 실망한 선조는 “은어라는 이름이 아깝다. 도로 묵이라 하여라”라고 했다. 그래서 묵은 은어에서 도로 묵이 되었다고 하여 ‘도루묵’이라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선조 임금 외에도 고려시대의 왕, 인조 등으로 바뀌는 경우가 있지만, 묵에서 은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가 다시 묵이 된다는 전체적인 내용은 똑같다. 원래 생선의 이름이 묵이 아니라 ‘목(目, 木)’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따라서 ‘도루묵’이 아니라 ‘도루목’이기 때문에 한문으로 ‘환목(還目)’ 또는 ‘환목(還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도루묵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알려주는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는 나중에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16세기 문헌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도루묵이 ‘돌목’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돌목’이 ‘도루묵’의 이전 어원이라면 ‘도로’라는 부사가 붙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상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돌목’이 사람들이 입에서 전해지면서 ‘도루묵’으로 변화한 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경도에서는 아직도 ‘은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또한 ‘돌목’의 어원을 밝히는 것은 더 어려운 일로 현재 여러 가지 가설이 나오고 있다.
도루묵은 급류를 거슬러 올라와 알을 낳는 생선이다. 힘이 쎈 물고기의 살이 맛이 없을리 없다고 하지만 실은 도루묵은 별로 인기 있는 생선이 아니었다. 비린내는 적지만 감칠맛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도루묵은 15~25cm 정도의 크기로 등쪽에 흑갈색 혹은 황갈색의 반점이 있고, 배쪽은 은백색이다. 비늘이 없고 입이 크다. 알이 뽀득뽀득 소리가 나는 식감으로 별미로 꼽히는데 그 이유는 난막이 유난히 두껍기 때문이다. 주로 동해에서 잡히고 11월에서 12월 사이가 제철이다. 겨울철 동해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지역별미로 꼽히고 있다. 도루묵이 감칠맛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냥 구워먹기 보다는 절여두었다가 기름에 바싹 지져서 먹거나 양념을 더해 조림을 해서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