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도 ‘감자바우’의 감자 시루떡, 평창 감자뭉생이

    우리나라 전통음식문화 중에서 가장 독특한 음식을 꼽자면 김치와 더불어 떡을 들 수 있다. 떡은 2006년 당시 문화체육부에서 지정한 ‘100대 민족문화 상징’에 포함된 식생활 분야 11개 음식 중에 선정될 정도로 우리 전통음식문화의 역사성과 고유성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식품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보다 농경문화가 시기적으로 앞선 중국에서도 밀이 많이 나는 북부지역의 ‘빙(餠)’이나 쌀이 많이 나는 남부지역의 ‘까오(糕)’와 같은 떡문화가 발달하였다. ‘빙’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중국인들이 중추절에 먹는 ‘월병(月餠)’이 있고, ‘까오’는 ‘니엔까오(年糕)’라 하여 우리의 설날에 해당하는 춘절(春節)에 먹는 찹쌀로 만든 흰떡이 대표적이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일본도 떡은 ‘모찌(もち, 餅)’라는 보통명사로 불리며, 찹쌀떡에 팥소를 넣어 빚은 ‘다이후쿠(だいふく, 大福)’나 우리의 경단에 해당하는 ‘당고(だんご, 団子)’ 등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영토가 작지만 산지와 평야가 적절하게 발달한 지형과 국토의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기후적으로는 사계절이 명확하여 예로부터 농수산물과 임산물이 풍부하였다. 이러한 식생환경을 바탕으로 오래전부터 지역과 문화별로 매우 다양한 떡이 만들어지고 발달하였는데, 그 종류와 가짓수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많고 다양하다. 떡은 만드는 방법에 따라 찌는 떡, 치는 떡, 빚는 떡, 지지는 떡으로 크게 나뉜다. 찌는 떡은 시루떡ㆍ송편ㆍ증편 등이 대표적이다. 시루떡에서도 재료를 무더기로 쪄낸 백설기와 같은 떡은 ‘무리떡’이라 하고, 재료를 시루에 켜켜이 앉혀서 쪄낸 팥시루떡과 같은 떡은 ‘켜떡’이라고 한다. 치는 떡은 곡물가루를 찐 다음에 안반이나 절구에 넣고 쳐서 만드는 떡으로 가래떡과 인절미가 대표적인 떡이다. 지지는 떡은 부꾸미ㆍ전병ㆍ빈대떡 등과 같이 곡물가루를 반죽하여 모양을 만들거나 묽게 만든 반죽을 기름에 지진 떡을 말한다. 빚는 떡은 경단ㆍ단자ㆍ송편과 같이 곡물가루를 익반죽하여 빚은 떡을 찌거나 삶은 떡이다.

     

    다양한 종류의 떡 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에서 떡의 역사 또한 매우 오래되었다. 떡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조 서기 24년 9월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의 2대 임금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이 사망한 후 왕위계승과정에서 아들인 유리(儒理)가 사위인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이에 탈해가 떡을 씹어서 떡에 잇금이 많이 난 사람을 왕으로 받들자고 제안하여 시행한 결과 유리의 치아가 더 많은 것으로 판명되어 신라 3대 임금인 이사금에 오르게 되었다. 이 기사 가운데 "떡을 씹어 시험해보자(試以餠噬之)"는 내용에 떡이 등장한 것이다. 시기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부터 이미 떡을 만들어 먹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융성하여 도살(屠殺)을 금지한 반면에 채식이나 곡식을 이용한 음식문화가 발달하였다. 『고려사』 서기 968년(광종 19년) 기사에는 고려 4대 국왕 광종(光宗)이 고려의 기틀을 다지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인 것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홍화사(弘化寺)ㆍ유암사(遊巖寺)ㆍ삼귀사(三歸寺) 등의 사찰을 창건하여 재회(齋會)를 열었다. 이때 떡과 경단, 쌀, 콩, 땔감을 서울과 지방의 백성들에게 길거리에서 나누어 주었다고 하였다(或以餠餌米豆柴炭 施與京外道路).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세종실록』 1423년(세종 5) 3월 13일 기사에 흙으로 떡을 빚어 먹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함길도의 화주(和州, 현 함경남도 금야군)에 흙이 있는데, 빛깔과 성질이 밀랍과 같아서 굶주린 백성들이 이 떡과 죽을 만들어 먹고 굶주림을 면했는데, 그 맛이 메밀 음식과 비슷하였다(咸吉道 和州有土 色性如蠟 飢民掘而作餠與粥 食之免飢 味與蕎麥食略同)

     

    비록 기근에 처한 백성들의 참담한 상황에 대한 묘사이기는 하지만 떡의 재료로 심지어 흙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다양한 우리 떡 문화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떡은 문화적으로도 오래전부터 우리의 일상 언어생활에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우선 속담 분야에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떡 주무르듯 한다’, ‘누워서 떡먹기’ 등 우리의 일상에 교훈내지 경계가 되는 말을 떡에 빗댄 격언은 지금도 적지 않게 사용되고 있다. 또한 전통시대부터 근현대시기에 이르기까지 명절 때가 되면 ‘떡값이나 해라’ 하면서 소정의 금전을 건네는 이른바 지금의 상여금과 유사한 풍속이 있었다.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불과 십 수 년 전만해도 ‘떡값’은 명절 때 인정(人情)을 나누는 소통수단이었다. 또한 떡값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는 것에서 떡이 우리 고유 명절의 가장 중요한 절기음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랜 역사와 더불어 다양한 종류의 떡을 만들어 온 우리의 떡 문화는 지역별로도 고유한 풍속과 환경에 따라 지역 특유의 떡이 만들어져 왔다. 전통적으로 넓은 평야가 발달하였던 황해도와 경기, 삼남(三南) 지역은 풍부한 물산을 이용한 다양한 종류의 떡이 만들어졌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산지가 많고 토질이 나쁜 평안도, 함경도, 제주도, 강원도 지역에서는 평야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특이한 재료로 만든 떡 문화가 발달하였다. 그 중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 이남의 내륙지역에서는 강원도 지방의 떡 문화가 매우 독특하다. 강원도는 전체 면적 중 81.7%가 임야인 반면 농경지는 9.7%에 불과하다. 그나마 농경지 면적의 64.1%도 밭이며 나머지 35.9%가 논이다. 즉 강원도에서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경지면적은 총면적의 2.8% 정도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자연환경에서 강원도는 전통적으로 임야나 밭에 재배가 용이한 메밀ㆍ옥수수ㆍ감자ㆍ수수 등이 주요 작물이었다. 따라서 강원도의 식생활문화도 당연히 이러한 밭작물 중심으로 발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떡 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국립농업과학원의 농식품종합정보시스템에서 파악된 지역별 전통음식 중 강원도의 떡 종류는 약 43종이다. 우선 떡의 재료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메밀 6종, 감자 7종, 옥수수 8종, 기타 잡곡 4종으로 전체 43종 가운데 25종으로 약 58%를 차지하고 있다. 쌀은 멥쌀 15건, 찹쌀 3건으로 42%에 해당한다. 그나마 강원도의 쌀떡은 동해안의 ‘용떡’을 제외한 나머지는 강원도에서 풍부하게 나는 산채나물이나 약재 등을 섞어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만드는 방법에서는 주된 재료로 사용하는 메밀ㆍ옥수수ㆍ감자의 점성이 쌀보다 현격하게 떨어지기 때문에 치는 떡이나 빚는 떡보다는 찌는 떡이 67.4%로 비중이 제일 높다. 또 찌는 떡 중에서도 여러 가지 재료를 켜켜이 쌓아서 찌는 켜떡보다는 떡재료를 버무려서 통으로 쪄내는 무리떡이 찌는 떡의 80%를 차지한다. 요약하자면 강원도 떡의 특징은 주된 재료가 감자ㆍ메밀ㆍ옥수수ㆍ수수 등이며, 만드는 방식은 떡 중에서 가장 간편한 무리떡이 주종이다. 쌀을 이용한 떡도 산채나물이나 약재 등을 섞어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강원도의 떡으로 대중에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메밀전병ㆍ감자범벅ㆍ옥수수증편 등이 있다. 그런데 강원도 인제군부터 평창군, 영월군, 정선군 등 강원도 산간지역에서 거의 주식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많이 만들어 먹은 떡이 있는데 바로 ‘감자뭉생이’이다. 감자뭉생이는 감자를 갈아서 물기를 짜낸 다음 체에 받혀 가라앉힌 감자전분에 감자 건더기를 섞어서 반죽한 것에 강낭콩과 밤을 넣고 소금간을 하여 시루에 앉혀 쪄낸 떡이다. 감자뭉생이와 비슷한 떡으로는 흔히 감자범벅으로 알려진 ‘감자붕생이’와 ‘감자투생이’가 있다. 이 두 가지 떡은 무리떡 형태로 쪄내는 감자뭉생이와는 달리 반죽을 적당한 크기로 떼어내어 찌는 점에서 감자뭉생이와 차이점이 있다. 부재료에도 차이가 있어서 감자투생이는 감자에 녹말가루를 섞어 찌는 것이 다르다. 강원도 영월지역에서는 감자뭉생이를 감자붕생이라고도 하며, 감자뭉생이에 들기름과 설탕, 소금을 넣어 다시 한번 찐 뒤 호박잎에 싸서 고추장을 찍어 먹기도 한다.

  • 뱃사공들이 이른 아침 과음으로 쓰린 속을 달래던 충주 해장떡

    우리나라 사람들의 음주를 애호하는 문화는 최근의 일이 아니고 오랜 역사를 지녔다. 중국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고구려ㆍ동예ㆍ마한ㆍ부여ㆍ신라의 풍속을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 조상들이 음주가무를 즐긴 민족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마한(馬韓)의 경우에는 파종을 마치는 5월과 추수를 마치는 10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주야로 쉬지 않고 술 마시고 춤을 춘다(群聚歌舞飮酒 晝夜無休)”고 기록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음주전통은 예외가 아니어서 음주에 대해 상당히 관용적인 사회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한 요인 중 하나로 조선이 성리학 국가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유교적 이상사회를 추구하였던 조선에서는 인간과 인간이 사회관계망을 형성해 가는 규범으로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을 중시하였다. 봉제사는 조상에 대한 제례를 통해 혈통과 혼인으로 맺어진 친인척과 같은 내부관계망을 규제하는 것이었고, 접빈객은 손님으로 표상되는 인적 네트워크의 외연을 넓히고 외부관계망을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사와 손님 접대에 공통적으로 빠져서는 안 될 요소가 바로 술이었고, 사실상 조선의 지배계층이었던 양반사대부들이 음주문화를 주도하였다. 

     

    1924년 이용기(李用基)가 저술한 우리 전통음식 조리서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는 술 담그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 호산춘(湖山春)•송순주(松荀酒)와 같은 전통주는 무려 46가지를 기록하고 있고, 소주특방(燒酒特方)•감홍로(甘紅露)와 같은 소주 종류도 9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국가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제사를 중시하였던 조선에서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안에서는 거의 모든 가호마다 술을 빚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이런 탓에 흉년이 들면 주금령(酒禁令)이 일시적으로 시행되기도 했고, 조선 제21대 국왕 영조(英祖)는 이례적으로 52년의 재위 기간의 약 80%에 해당하는 40여 년에 걸쳐 강력한 주금령을 펴기도 하였다.

     

    바늘에 실 가듯이 술을 좋아하게 되면 반드시 해장음식도 있게 마련이다. 술을 과음한 다음날이면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집에서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콩나물국이나 북엇국을 먹거나 음식점에서 복국이나 대구탕 등으로 속을 푼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얼큰한 라면이나 짬뽕으로 해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술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우리 조상들은 과연 무엇으로 해장하였을까?

     

    가장 쉬운 방법은 술로 술을 푸는 방법 즉 해장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여말선초의 학자인 이색(李穡)의 『목은집(牧隱集)』에 ‘도중에(途中)’라는 시에는 “해장술은 자연스레 깰 수가 없는 것이라(卯酒自然醒不得)”라는 표현이 있다. ‘묘주(卯酒)’는 묘시(卯時)에 마시는 술을 말한다. 묘시는 십이시진(十二時辰)의 네 번째에 해당하는 오전 다섯 시부터 일곱 시까지의 시간을 가리킨다. 즉 아침에 먹는 술이라 하여 당시에는 해장술을 ‘묘주’로 불렀다. 1688년(숙종 14) 소론(少論)의 영수였던 윤증(尹拯)이 지은 「지돈녕부사이공신도비명(知敦寧府事李公神道碑銘)」에는 이석(李晳)이 1651년(효종 2) 임금과 야대(夜對) 중에 함께 술을 마시다가 크게 취했는데, 임금은 환관을 시켜 이석을 부축하여 바래다주고 심지어는 해정주(解酲酒) 1병까지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해정주’도 해장술을 뜻하는 한자어이다.

     

    해장을 위한 음식으로는 단연코 국과 탕을 들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이용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의도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공교롭게도 술 제조법 다음에 국과 탕을 소개하고 있다. 기록된 국과 탕의 종류는 대구국ㆍ명탯국ㆍ민엇국ㆍ배춧속대국ㆍ육개장ㆍ홍합탕 등 무려 59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물론 우리 전통 상차림이 국과 밥을 위주로 하는 음식문화의 특징을 지니기도 했지만, 국과 탕의 가짓수가 많은 것은 술을 많이 마셨던 음주 풍속과도 무관치 않은 것이다.

     

    국과 탕이 주된 해장음식이었던 조선시대 해장음식의 백미는 효종갱(曉鐘羹)이었다. 1925년 최영년(崔永年)이 저술한 『해동죽지(海東竹枝)』에 소개된 효종갱은 해장국의 일종으로 우리나라 배달음식의 효시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남한산성 일대의 해장국이 유명했는데 밤새 끓인 해장국을 항아리에 넣고 보온한 다음, 지금의 새벽 4시경에 해당하는 오경삼점(五更三點)에 통행 금지를 해제하는 파루(罷漏) 종이 치면 서울로 보낸다고 하여 효종갱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해장음식 중에 특이한 음식이 있었으니 바로 ‘해장떡’이다. 해장떡은 인절미에 붉은 팥고물을 묻힌 떡으로 술국과 함께 먹는 충청북도 중원군[현재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목계나루의 향토음식이었다. 목계나루 건너편 충청북도 중원군 가금면 가흥리에는 가흥창(嘉興倉)이라는 세곡(稅穀)을 보관하는 조창(漕倉)이 있었다. 가흥창은 조선전기만 하더라도 충청도 내륙지방의 세곡과 경상도 지역의 세곡까지 수납하고 남한강의 수운을 통해 한양 용산의 조창까지 운송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조세가 쌀에서 전포(錢布)로 바뀌거나 다른 지역에 조창이 설치되면서 다소 규모가 줄기는 하였으나 조선시대 충주지역은 내륙물류의 최대 중심지였다. 

     

    목계나루는 가흥창의 세곡을 한양으로 실어 나르고, 다시 한양의 문물을 싣고 오는 남한강 수운교통의 요지였다. 전성기에 목계나루는 800호 이상이 거주하는 대형취락이었고, 100여 척의 상선이 집결하였다. 국토의 70%가 산지인 우리나라는 육로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대신에 선박을 이용한 선운(船運)이 국가의 물류교통을 담당하면서 옥계나루와 같은 취락이 물류의 거점지역으로 성장한 것이다. 당시 남한강의 선운업을 담당하였던 경강상인(京江商人)과 조운선(漕運船)에 종사하는 뱃사공들은 거친 뱃일에 지친 육체적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을 과음하였다. 그들은 숙취에 시달리기 마련이었고, 이때 뱃사람들의 해장용으로 애용되었던 음식이 해장떡이다.

     

    해장떡은 이른 아침에 술국과 함께 먹으면서 속도 풀고 배도 든든하게 채우는 효과를 제공했다. 인절미는 숙취로 인해 꺼끌꺼끌하게 느껴지는 밥에 비해 섭취가 용이하였다. 또한 재료인 찹쌀은 쓰린 속을 달래주고 위장병을 치료하는 효능도 지녔다. 그런 탓인지 해장떡은 목계나루뿐 아니라 남한강 일대의 다른 나루에서도 확인된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되어 ‘두물머리’로 불렸던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와 그 맞은편에 다산 정약용의 생가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도 뱃사공들에게 해장떡을 제공하던 지역이었다.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 뚝섬지역에는 껍질을 벗긴 팥앙금을 묻힌 인절미를 배추우거지로 끓인 된장국에 넣어 먹는 ‘국말이떡 해장국’이라는 향토음식이 전한다. 

     

    목계나루는 1900년대 초까지 수운과 육로의 요충으로 문물이 집산되는 충주지역의 상업중심지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근대적 철도와 자동차의 등장으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1930년대 충북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충청도 내륙지역의 물류 주도권을 상실하였다. 그나마 소금교역으로 명맥을 이어가던 남한강의 수운은 1948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중단되었다. 동시에 목계나루의 해장떡과 술국의 명성도 역사 너머의 기억이 되었다.

     

    흔히 숙취를 풀기 위해 음식을 섭취하는 행위를 ‘해장’이라고 한다. 과연 해장이란 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해장은 본래 ‘해정(解酲)’이라는 용어가 변형된 것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해장(解酲)’으로 표기되어 있다. 즉 해장이 표준말로 수록되었지만, 한자는 ‘解酲(해정)’으로 표시하고 있다. 흔히 해장을 일컬어 ‘속을 푼다’는 의미에서 ‘해장(解腸)’이라는 한자로 이해하거나 쓰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한자를 직역하면 “장기를 해체한다”는 끔찍한 말에 더 가깝다. ‘解腸’은 한자사전과 국어사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정체불명의 조어(造語)일 뿐이다.

     

    해정(解酲)은 사전적 의미로 “아침 식전에 숙취를 풀기 위해 조금 마시는 술”을 뜻한다. 해장술도 ‘해정주(解酲酒)’, 해장탕은 ‘해정탕(解酲湯)’이라 불렀다. ‘酲’은 ‘숙취 정’자로 파자(破字)하면 酉(유)자와 呈(정)자가 된다. 酉는 흔히 12간지의 ‘닭 유’ 자로 많이 알고 있지만, ‘술 또는 술 담는 그릇’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呈은 증정(贈呈)과 같이 ‘드릴 정’자로 많이 쓰이지만, ‘(한계를) 드러내다, 드러내 보이다’의 뜻도 가지고 있는 글자이다. 즉 숙취를 나타내는 한자 ‘酲’은 술독이 바닥을 드러낼 때 까지 마셨다는 뜻을 가진 한자어이다.

     

    해장의 본래 용어였던 ‘해정(解酲)’은 근대시기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다. 충청북도가 낳은 문호 홍명희(洪命熹)가 일제강점기에 저술한 대표작 『임꺽정』에는 “삼봉이 형제는 해정술에 다시 취하야 배고픈 줄을 모르고 자는 손가가 제풀에 일어나도록 아침밥을 먹지 않고 기다렸다”는 표현이 나온다. 또한 염상섭(廉想涉)이 1933년에 저술한 『삼대』에도 “너는 지금 앓는 아비를 보러 온 게 아니라, 해정을 하려고 술친구를 찾아다니는 거냐”는 표현이 나온다. 해장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군사쿠데타와 같은 대한한국 현대사의 우여곡절을 겪는 과정에서 파생한 자조(自嘲)적인 표현이 아닌가 한다.

  • 보릿고개의 비상식품, 칠곡 송기떡

    우리나라 전역에 서식하는 소나무는 봄철이 되면 속껍질에 살이 오른다. 이것을 삶아 곱게 찧은 다음 멥쌀과 섞어 반죽을 하여 솥에 쪄낸 것이 송기떡이다. 송피(松皮)떡•송기병(松肌餠)•송지병(松脂餠)이라고도 부른다. 송기떡은 이른바 ‘보릿고개의 초근목피’를 실제 음식으로 만든 구황식품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봄에 벼를 심고 가을에 보리를 파종하는 이모작(二毛作) 형태의 농사를 지어왔다. 그런데 이모작 농사의 취약점은 봄철이 되면 식량이 부족해지는 보릿고개라 하는 춘궁기(春窮期)가 도래하는 것이었다. 가을에 수확한 벼를 겨우내 식량으로 삼다가 떨어질 무렵인 봄부터 지난가을에 파종한 보리를 수확할 때까지의 기간에 해당하는 음력 4~5월경이면 식량부족의 공백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환곡(還穀)’을 비롯한 다양한 진휼제도를 마련하여 춘궁기에 대비하였다.


    그나마 재해로 인해 흉년이라도 들면 국가의 진휼마저 여의치 않게 되어 양민들은 허기를 달래기 위해 초근목피까지 식량으로 활용하였다. 송기떡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 먹기 시작한 구황식품에서 출발하여 일제가 쌀을 공출해가던 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인해 국토가 파괴된 1950년대까지 지속되었던 보릿고개 시절까지 만들어 먹었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송기떡은 별미로 먹는 향토음식이 되었다.


    고문헌에는 송기떡의 다양한 명칭과 조리법이 수록되어 송기떡의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문헌인 『산가요록(山家要錄)』에는 송고병,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송기떡이라는 이름으로 기름에 지져내는 떡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는 송피떡, 『시의전서(是議全書)』에는 송피절편, 일제강점기에 나온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에는 송기떡, 『조선무쌍신식 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는 송피병이라는 이름의 시루에 찌는 떡으로 소개되어 있다.


    한방에서 송기는 성질이 따스하고 단맛을 지녀서 이것을 날것으로 먹으면 가래를 삭이고 가슴 통증과 쓰린 속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소나무 속껍질은 섬유질이 워낙 질긴 데다가 체내에서 소화가 되지 않기 때문에 송기를 양잿물에 담가 불린 후 방망이로 두드려 곱게 찧어야 먹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기떡을 먹으면 변비에 걸려 일을 볼 때 애를 먹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라는 말도 먹을 것이 없어 만들어 먹은 송기떡의 부작용에서 비롯된 말이다.


    광해군 때에는 역적의 옥사가 여러 번 일어나자 그때마다 가혹한 형벌과 혹독한 고문을 시행하였던 모양이다. 이를 두고 이항복(李恒福)이 “송피(松皮)를 두드려 떡을 만드는 것처럼 사람을 매질하여 역적을 만든다”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명언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소나무 껍질을 섭취하기 위해 방망이로 얼마나 두드려댔는지를 증명해주는 웃지 못할 일화이다.


    재료

    소나무 속껍질, 멥쌀, 찹쌀, 팥고물, 설탕, 소금, 중조(탄산수소나트륨)

    조리과정
    1. 1. 멥쌀과 찹쌀은 물에 불렸다가 건져 물기를 뺀다.
    2. 2. 소나무 속껍질을 솥에 넣고 '베이킹소다'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중조를 풀어 넣고 삶아낸 후 24시간 정도 찬물에 담갔다가 꺼내어 물기를 뺀다.
    3. 3. 삶은 송기에 불린 멥쌀과 찹쌀, 소금을 넣고 찧은 후에 시루나 찜통에 20분 정도 쪄낸다.
    4. 4. 쪄낸 재료에 설탕을 넣고 치대다가 길게 모양으로 만든 다음 적당히 썰어 팥고물을 묻혀서 먹는다.
  • 모양은 작지만 큰 정성으로 만드는 고유의 떡, 쑥구리단자

    단자는 찹쌀가루로 빚은 떡 안에 소를 넣고, 고물을 입힌 우리 고유의 떡을 말한다. 단자 만드는 방법은 인절미와 비슷하지만, 찹쌀을 그대로 찌지 않고 가루를 내어 찐다는 차이가 있다. 모양이 비슷한 경단과도 만드는 법이 약간 다르다. 애초에 반죽을 둥글게 빚은 후 삶아 내어 고물을 묻히는 경단과 달리 단자는 찹쌀가루에 부재료를 섞어서 쪄낸 다음 잘 치대어 도마에 놓고 소를 넣고 작게 끊어서 고물을 입힌다.


    쑥구리단자는 단자를 만들 때 봄철 산과 들, 도심의 공원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식물인 쑥을 삶아 다져서 넣은 떡이다. 쑥굴리단자, 보풀떡이라고도 부른다. 예로부터 봄에는 쑥구리단자, 여름에는 승검초단자, 가을에는 은행단자, 유자단자, 밤단자, 겨울에는 감단자, 대추단자, 석이 단자 등 계절을 대표하는 식자재를 가루로 만들거나 곱게 다져 넣어 단자를 만들었다.


    맛이 좋은 만큼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단자는 보통 적은 양만 만들어 각색 편과 같은 고임떡의 웃기로 장식하거나 다과상에 차와 함께 올렸다. 고물은 한 가지 색만 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삼색을 마련하였다.

    쑥구리단자


    재료

    찹쌀가루, 쑥 데친 것, 물, 소금, 고물(거피팥), 소 (팥고물, 꿀, 계핏가루, 소금)

    조리과정
    1. 1. 찹쌀가루에 소금을 넣어 체에 거른다.
    2. 2. 쑥은 손질하여 데쳐낸 후 절구에 찧는다.
    3. 3. 찹쌀가루에 물을 조금 부어 쪄낸 다음 쑥과 함께 절구에 넣어 곱게 친다.
    4. 4. 거피팥은 물러지게 쪄내 잘 찧은 다음 계핏가루와 꿀을 섞어 소를 만든다.
    5. 5. 3의 찹쌀을 펴고 가운데 팥소를 넣고 오므린 후 새알 모양으로 자른다.
    6. 6. 꿀을 발라 팥고물을 묻힌다.
  • 소복히 쌓여있는 주홍색 호박이 탐스러운, 물호박떡

    시루떡은 예부터 집안의 경조사 때나 이사한 다음 이웃과 돌려 먹던 친숙한 떡이다. 시루떡의 떡가루는 멥쌀이나 찹쌀, 또는 이 둘을 섞어 사용하고 고물로는 주로 사용하는 팥 외에 녹두나 깨 등을 얹기도 하였다. 물호박떡은 얇게 저민 늙은 호박이나 썰어 말린 호박고지를 물에 불려 쌀가루와 섞어 만든 시루떡이다.

    물호박떡
    물호박떡

    임진왜란 이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진 호박은 성장 정도에 따라 구별하는데, 여름철 애호박일 때 반찬으로 많이 쓰이고, 씨를 받을 용도로 두었다가 늦가을에 수확하는 것이 늙은 호박이다. 크고 껍질이 단단하지만 속이 비어 있는 늙은 호박은 맷돌 호박 또는 청동 호박이라고도 불린다. 단맛이 많은 늙은 호박은 호박고지를 만들거나 겨우내 저장하여 죽이나 떡, 나물 등의 재료로 활용하였다. 한방에서는 늙은 호박을 남과(南瓜), 호박씨는 남과인(南瓜仁)이라는 이름의 약재로 사용했는데 허약한 소화 기능을 돕고 영양을 보충하며 기운을 나게 한다고 알려졌다.


    찹쌀가루에 호박고지와 팥, 풋콩을 찹쌀가루와 섞어 찐 시루떡은 찰호박떡이라 부르고 늙은 호박을 저며 쌀가루에 섞어서 팥고물을 켜켜로 안쳐 쪄낸 시루떡은 물호박떡이라 부른다. 물호박떡은 주황색 호박이 흰떡 사이사이에서 흐를 듯이 부드럽게 수북하게 쌓여 있어 탐스럽고 보기에도 좋다. 물호박떡을 만들 때는 호박에 수분이 함유되어 있으므로 다른 떡보다 쌀가루에 물을 적게 쓰고, 단맛이 적으면 맛이 덜할 수 있으므로 호박에 설탕을 뿌려 두었다가 사용하는 것이 좋다. 물호박떡은 다른 시루떡처럼 단정해 보이지는 않지만 썰었을 때 푸짐하고 예쁜 호박색의 층이 마치 서양의 케이크처럼 입맛을 자극한다.

    재료

    멥쌀, 늙은 호박, 거피팥, 설탕, 소금

    조리과정
    1. 1. 쌀을 씻어 충분히 불린 다음 잘 빻아 가루로 만들어 체에 친다.
    2. 2. 껍질을 벗기고 속을 파낸 늙은 호박은 길이 5㎝ , 두께 0.5㎝로 납작하게 저며 설탕에 버무린다.
    3. 3. 쌀가루와 설탕에 버무린 호박을 잘 섞는다.
    4. 4. 팥은 불려 껍질을 제거한 후 쪄서 고물을 만든다.
    5. 5. 시루에 한지나 면포를 깔고 그 위에 팥고물을 두툼하게 펴고 쌀가루와 호박 섞은 것을 3㎝두께로 덮은 다음 다시 팥고물을 넣어 층층이 안친다.
    6. 6. 면포를 덮고 찐다.
  • 자연산 굴과 까나리액젓으로 만든 김치의 깊은 맛, 짠지떡

    백령도의 하루는 짧다. 배가 들어오는 시간이면 소란스럽다가도 오후 5시쯤이면 오가는 사람이 없다. 이 시간에는 대부분의 식당이 문을 닫는다. 늦은 시간까지 낯선 손님을 기다려준 칼국숫집. 그곳의 부엌 이야기가 재미있다.


    백령도에서도 손꼽는 두메식당. 군인들이 지나칠 수 없는 방앗간이며 주민들이 추천하는 곳이다. 긴 부엌 끝에는 혼자 서서 일할 수 있는 만큼의 공간이 있다. 그곳에서 메밀 반죽을 만들어 국수를 뽑고 만두를 빚는다. 칼 손잡이에는 메밀가루 반죽이 거북이 등처럼 말라붙어있다. 주인아주머니와 30년을 같이 늙었다. 얼마 전만 해도 칼국수의 면을 직접 썰었다. 힘 안 들이고 하던 일들이었는데 이제는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은 제면기로 면을 뽑는다.

    육지에는 나간 적이 없어. 여기는 그전에 두레박으로 물 길어 물지광 지고 다니고 그랬어. 그땐 먹을 게 없으니까 메밀가루만 해서 뻣뻣하게 해 먹었지. 굴은 흔하게 바데(바다)에서 캐서 신김치 넣고 해 먹었지. 우리 자랄 때는 뜩(떡)도 못해 먹었어. 쌀 없어서. 생일 때나 돼야 보리 끓여 가지고 우에 쌀 한쪽으로 읁었다가 읃어먹었지. 쌀 없으면 노란 조 있잖아. 그거만 떠서 주고. 뜩이 어딨나? 구경하기도 어려우니까 짠지 만들어서 그걸 뜩이라고 했는지도 몰라. 그때 너무 귀하니까 소리라도 흔하게 불러 먹으라고.

    짠지떡
    짠지떡

    짠지떡에는 백령도에서 흔한 자연산 굴이 들어있다. 그리고 까나리액젓으로 만든 깔끔한 김치가 그 맛을 좌우한다. 짠지떡을 처음 맛본 이들은 김치만두를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짠지떡의 피는 만두처럼 얇지 않고 두껍고 쫀득하다. 두부나 채소 없이 굴과 삭은 김치 딱 두 가지로 맛을 낼 수 있다니 놀랍다. 게다가 김칫국물을 얼마나 손으로 짜댔는지 굴이 있어도 무르지 않고 먹기에 알맞다.


    이곳 할머니들은 물 빠지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하늬바다로 나간다. 바위의 굴을 호미로 톡톡 캐서 플라스틱 물병에 담아 칼국수 집에 판다. 그러니까 칼국수의 굴은 그녀들의 수확물인 셈이다. 배를 타고 오면서 식사를 걸렀을 것을 염려하여 칼국수에 일부러 굴을 많이 넣었다는 주인아주머니의 친절에 코끝이 찡해진다.


    굴 향기 가득한 칼국수는 그냥 먹어도 좋은데 백령도의 까나리액젓이 유명하다고 하니, 반 숟가락을 떠서 국물에 섞어본다. 아니 이런! 갑자기 입천장에서 콩을 볶듯이 난리가 났다. 청양고추가 들어간 것이다. 이 맛을 다른 이들은 칼칼하고 개운한 맛이라고 하는 걸까?


    백령도에서 맛보아야 할 음식이 또 있다. 메밀 냉면이다. 가을 하늘 아래 널려진 반짝이는 메밀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이곳 메밀 냉면은 돼지 사골을 푹 고아 생강 물을 섞는다. 생강의 따듯한 기운이 메밀의 찬 기운과 만났다. 면을 풀기 전에 육수에 달걀노른자를 풀어 까나리액젓으로 간을 맞춘다. 이것이 백령도 냉면을 먹는 방법이다. 육지의 메밀 냉면과는 다른 맛이다. 생강 향과 까나리액젓 향이 입안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메밀 칼국수
    메밀 칼국수
    메밀 물냉면
    메밀 물냉면

    하루에 두 번 육지의 발길이 닿는 곳, 백령도. 인천에서 쾌속선으로 4시간을 달려야 한다. 배를 탈 수 있는 날보다 그렇지 못한 날이 더 많다. 겨울이 되면 이곳은 겨울잠을 자듯 조용하다. 백령도에서 북한 옹진반도까지의 거리는 12km이다. 걸어서 3시간이 채 안 된다. 백령도는 울릉도보다 큰 섬이다. 인구도 오천칠백 명이 넘는다(‘17년 12월 기준). 전쟁 통에 터를 잡은 이들과 그들의 자손들이 산다. 그리고 군인들의 수가 그만큼 더 있다. 그곳을 나와 콩돌 해변을 밟는다. 버적버적 세월의 흔적은 섬을 이루고, 섬은 그들의 삶을 만들었다. 다행히 맑은 날에 백령도를 다녀왔다.


    ■ 도움 주신 분

    '두메칼국수' 이영숙(여, 64세) 씨는 31년째 칼국수와 짠지떡을 만들고 있다. '사곶냉면'은 메밀 냉면으로 유명하다.

  • 설날하면?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떡국!

    세배떡국
    세배떡국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명절 설날 하면 떠오르는 음식이 바로 떡국이다. 떡국은 설날 아침, 밥을 대신해 차례상에 오르고 차례 후 떡국으로 식사를 한다. 새해를 맞아 나이를 물을 때 “떡국 몇 그릇 먹었냐?”는 질문은 떡국을 먹어야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떡국은 흰 떡을 사용했다고 하여 ‘백탕(白湯)’ 또는 떡을 넣어 끓인 탕이라는 의미의 ‘병탕(餠湯)’으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소개되어 있다.


    새해 첫날인 설날에 떡국을 먹는 이유에 관해 설명하는 문헌은 없지만, 그 의미는 찾을 수 있다. 먼저 새해 첫날이므로 밝음의 의미로 흰 떡을 사용하였고 떡을 길게 늘여서 가래로 뽑는 것은 재산이 늘어나기를 바라는 의미이다. 가래떡을 엽전 모양과 같이 둥글게 써는 이유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떡만두국
    떡만두국
    조랭이떡국
    조랭이떡국

    과거 떡국 국물의 재료로는 쇠고기, 꿩고기가 주재료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쇠고기나 꿩고기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 닭고기를 국물 재료로 이용하였다.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의 유래가 바로 떡국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에는 꿩고기나 닭고기 대신 주로 쇠고기를 국물 재료로 사용한다. 특이한 이름의 떡국으로는 개성지역에서 흰떡을 눈사람처럼 가운데를 잘록하게 만들어 끓인 떡국인 '조랭이 떡국'과 충청도 지역의 떡국인 '생떡국'이 있다.


    재료

    가래떡, 달걀, 쇠고기(양지머리), 다진 마늘, 간장, 대파, 소금

    조리과정
    1. 1. 핏물을 뺀 쇠고기를 덩어리째 삶는다.
    2. 2. 삶아진 쇠고기를 건져 적당한 크기로 썰거나 결대로 찢어 국물에 넣는다.
    3. 3. 가래떡을 어슷하게 썬다.
    4. 4. 2에 떡을 넣고 익어 떠오르면 달걀을 풀어 채썰은 대파, 다진 마늘과 함께 넣는다.
    5. 5. 국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 사흘을 밤낮으로 정성들여 빚어낸 떡, 전라도 감단자

    전라도 지방은 예로부터 전라북도의 김제와 전라남도의 나주를 중심으로 대규모 평야에서 나는 쌀을 비롯한 곡물은 조선 시대 국가재정의 상당 부분을 담당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또한, 전라도 지방은 덕유산, 내장산, 지리산 등의 산지와 서해안과 남해안을 아우르는 바다에서 나는 풍부한 물산을 바탕으로 화려하고 맛깔스러운 다양한 종류의 음식문화가 발달하였다. 우리 전통음식의 독립된 한 분야를 이루고 있는 떡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전라도에서는 다양하고 화려한 모양의 떡을 만들어 먹었다. 전라도의 대표적인 떡에는 감고지떡, 감시리떡, 경단, 고치떡, 나복병, 복령떡, 섭전, 송피떡, 수리취떡, 우찌지, 차조기떡, 호박고지 시루떡, 호박 메시리 떡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전라도 지방에는 감고지떡, 감시리떡, 감설기, 감인절미, 감단자, 건시단자와 같이 감을 재료로 한 떡의 종류가 많은데, 그 이유는 예로부터 전라도는 감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일례를 살펴보면 전라북도 완주군은 조선 시대부터 감의 명산지로 유명한 지역이다. 완주군 동상면에서 생산되는 곶감은 왕실에 진상할 정도로 맛이 뛰어나서 ‘고종시(高宗柿)’라는 이름을 얻기도 하였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전라도 지방에서는 감으로 만든 떡의 종류가 다양하게 발달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떡은 만드는 방법에 따라 찌는 떡, 치는 떡, 빚는 떡, 지지는 떡으로 구분한다. 찌는 떡은 시루떡과 같이 시루에 떡살을 안쳐서 쪄내는 떡을 말하고, 치는 떡은 쪄낸 떡살을 떡메로 쳐서 만든 것으로 인절미가 대표적이다. 지지는 떡은 전병이나 빈대떡과 같이 기름에 지져 만든 떡이고, 빚는 떡은 멥쌀가루나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모양 있게 빚어 만든 떡을 말한다.


    감단자는 빚는 떡에 속한다. 빚는 떡은 떡살을 빚어서 찌거나 빚어서 고물을 묻히기도 하는 등 만드는 법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송편처럼 빚은 다음 찌는 떡, 단자처럼 쪄서 다시 빚은 후에 고물을 묻히는 떡, 경단처럼 빚어서 삶은 다음 고물을 묻히는 떡 등이 대표적이다. 감단자는 전라도의 떡 중에서 단연코 재료와 만드는 방법에 있어서 고급스러운 떡이라 할 수 있다.


    단자는 본래 궁중에서 다과로 내거나 ‘웃기떡’이라 하여 잔치상 등에 올리는 고임떡의 맨 위를 장식하는 떡이었으나 차츰 궁중에서 민간으로 퍼진 떡이다. 19세기 조리서인 빙허각 이씨가 지은 『규합총서(閨合叢書)』와 1919년경 심환진(沈晥鎭)이 상주 군수로 부임하였을 당시 며느리인 홍정(洪貞)이 필사한 조리서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 말린 감을 재료로 사용한 단자를 만드는 방법을 기술하고 있다.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에 있는 해남윤씨 녹우당(綠雨堂)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고택으로 오래된 역사만큼 감단자가 문중의 내림 음식으로 유명한 집안이다. 이곳에서는 감을 가마솥에 사흘 동안 푹 고아낸 다음 체에 걸러서 찹쌀가루와 섞은 후 다시 고아서 식힌다. 식힌 반죽을 잘 빚어서 콩고물이나 검정깨 등 갖가지 고물을 묻혀서 감단자를 만든다. 그야말로 사흘 밤낮을 뜨거운 불 앞에서 지키는 정성과 수고가 베인 떡이다. 그래서인지 감단자는 다른 떡들과 달리 입안에 넣으면 스르륵 녹을 정도로 맛이 좋아 인기가 높고 많이 먹어도 체하거나 배탈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 이름과 달리 궁중에서 먹는 두텁떡

    두텁떡의 유래는 고려 시대 말기부터 만들어 먹은 것으로 추측되는데, 정조의 화성 행차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따르면 1795년 정조대왕이 그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칫상에 올린 바가 있어 정조대왕의 효심이 담긴 떡으로도 알려져 있다. 두텁떡은 궁중에서 내려오는 떡으로 일반 백성들이 먹지 못할 만큼 재료가 비싸며 공을 듬뿍 들인 떡이다. 기록을 보면 찹쌀가루에 소금 대신 진간장으로 간을 맞추어 연한 갈색이 나게 했다. 고물로는 볶은 팥고물을 준비하는데 찐 팥을 간장(진간장), 설탕, 계핏가루로 양념하여 넓은 철판에 보슬보슬하게 볶아서 체에 내린다. 그다음 소를 넣는데 볶은 팥에 다진 유자와 밤, 대추, 잣 등을 넣어서 만든다. 이처럼 여러 가지 과일 향과 꿀, 간장(진간장), 계핏가루가 한데 어울려서 향이 진하고 흩어지는 고물 맛이 아주 좋다.

    두텁떡
    두텁떡
    두텁떡
    두텁떡

    이 떡은 다른 떡과는 달리 고물을 볶는 데 끈기가 필요하다. 또 유자를 미리 설탕에 재웠다가 다져서 섞어야 향기가 난다. 미리 준비하지 못했을 때는 병에 들어 있는 유자차를 이용해도 된다. 밤은 껍질을 벗기고, 대추는 씨를 빼고 갈라서 잘게 썰고, 잣은 고깔을 벗겨 놓는다. 만드는 데 공이 무척 많이 드는 떡이다.

    두텁떡은 궁중에서 임금 탄신일에 반드시 만들던 것으로, 『정례의궤』 , 『진찬의궤』 등에 그 만드는 법이 기록되어 있다. 요즘에는 결혼한 신부가 시부모님께 보내는 이바지 음식으로 쓰이기도 한다.


    재료

    찹쌀가루, 간장, 설탕, 꿀, 푸른 거피팥, 간장, 설탕, 꿀, 계핏가루, 후춧가루, 밤, 대추, 호두, 잣, 유자청 건더기, 유자청

    조리과정
    1. 1. 찹쌀은 깨끗이 씻어 6시간 정도 충분히 불려 물기를 빼고 간하지 않고 가구로 빻는다.
    2. 2. 1의 쌀가루에 간장을 넣고 고루 비벼 중간체에 내라고 설탕과 꿀을 섞는다.
    3. 3. 팥을 충분히 불려 껍질을 벗기고 씻어 물기를 뺀 후 찜통에 젖은 면포를 깔고 푹 무르게 찐다.
    4. 4. 익은 팥을 큰 그릇에 쏟아서 절구로 대강 찧은 후 중간체에 내리고, 남은 무거리는 맷돌이나 믹서에 갈아 섞는다.
    5. 5. 체에 내린 팥고물에 간장, 설탕, 꿀, 계핏가루, 후춧가루를 넣어 고루 섞은 후 팬에 보슬보슬 볶아 식혀 다시 체에 내린다.
    6. 6. 잣은 고깔을 떼고, 밤과 대추는 잣 크기로 자르고, 호두는 속껍질을 벗겨 잘게 썬다. 유자청 건더기는 다진다.
    7. 7. 6의 재료에 유자청을 잘 섞어 1㎝ 완자를 빚어 살짝 누른다.
    8. 8. 큰 시루에 5의 팥고물을 깔고 2의 찹쌀가루를 한 숟가락 올린 후 7의 완자를 놓고 다시 찹쌀가루를 얹어 덮은 다음 팥고물을 뿌려 덮고 우묵한 곳을 골라 다시 놓기를 세 켜 정도 해서 김이 오른 찜통에 올린다.
    9. 9. 15분 정도 찐 후 불을 줄여 5분 정도 뜸을 들인 후 한 켜씩 납작한 숟가락으로 들어내 쟁반에 담고 남은 팥고물을 덮고 다시 면포를 덮어 식힌다.
  • 노비를 위해 만든 특별한 음식, 영광 모싯잎송편

    우리 전통 세시풍속에는 음력 2월 초하루를 ‘중화절(中和節)’ 또는 ‘노비일’이라고 한다. 이날 농가에서는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면서 떡을 빚어 노비들에게 먹였는데, 이를 ‘노비송편’이라고 불렀다. 또한 2월 초하루는 삭일(朔日)이므로 ‘삭일송편’이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1849년 홍석모(洪錫謨, 1781~1857)가 지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이 지은 『경도잡지(京都雜誌)』에도 “이월 초하루에는 대보름날 세워 두었던 화간(禾稈)을 풀어내려 솔잎을 깔아 떡을 만들어서 노비들의 나이만큼 먹인다”고 하였다. 또한, 노비일은 “농사가 이때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그들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노비 송편을 머슴의 나이 수대로 먹인 의도는 나이가 어리거나 연로한 노비들보다 농사의 성패를 좌우할 왕성한 노동력을 지닌 성인 노비들을 고려한 것으로 여겨진다. 과거에는 먹을거리가 변변치 않았던 겨울을 지낸 노비들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다가올 농사일을 잘 부탁하기 위해 떡과 술을 준비하여 대접하였다. 이러한 풍습은 그해의 농사가 파종부터 추수까지 모두 잘 되기를 바라는 기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라남도 영광군의 모싯잎송편도 2월 초하루에 만들었던 떡으로서 다른 지역과는 달리 떡쌀에 모싯잎을 갈아 넣어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떡의 재료가 되는 모시풀은 쐐기풀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주로 습기가 많고 더운 지역에서 식생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남부 지방에서 많이 재배된다. 모시풀은 독특한 맛과 향이 있어 어린잎은 주로 나물로 먹고, 자란 잎은 떡의 재료로 사용한다.

    모시송편
    모시송편

    모싯잎송편의 또 다른 특징은 별칭이 노비 송편인 만큼 일반적인 송편보다 두 배가량 크게 빚는다. 이 또한 고된 농사일에 많은 노동력을 소비할 노비들의 체력보충을 위해 배려한 것이다. 모싯잎을 이용한 떡은 남부 지방에서 여러 곳에서 만들어 먹지만 그 중 전라남도 영광군의 모싯잎송편은 예로부터 유명하였다. 현재 모싯잎송편은 전라도민이 가장 사랑하는 떡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최근에는 영광군의 대표적인 특산물로 자리하고 있다.


    재료

    멥쌀가루, 모싯잎, 팥고물, 소금

    조리과정
    1. 1. 모싯잎을 끓는 소금물에 삶아낸 다음 물에 헹구어 물기를 짜낸 후 잘게 다진다.
    2. 2. 다진 모싯잎을 멥쌀가루에 섞은 후 더운 물로 익반죽한다.
    3. 3. 떡 반죽을 떼어 원모양으로 평평하고 빚은 다음 팥고물을 넣고 송편 모양으로 오므린 후 시루에 쪄낸다.
  • 찹쌀떡을 구워 만든 떡국, 울산 굽은떡국

    떡국은 흰 가래떡을 얇고 어슷하게 썰어서 장국에 끓인 전통음식이자 정월 초하루에 만들어 먹는 시식(時食)으로서 조선시대의 고문헌에는 ‘병탕(餠湯)’으로 표기하고 있다. 19세기 중반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정월(正月)조에는 떡국의 조리법과 용도에 대해 자세하게 수록하고 있다.


    흰떡[白餠]을 엽전 두께만큼 썰어 장국에 넣고 끓인 다음
    소고기나 꿩고기를 넣고 후춧가루를 쳐서 조리한 것을 떡국[餠湯]이라고 한다.
    이것은 제사에도 쓰고 손님접대에도 사용하므로 세찬에 빠져서는 안 될 음식이다


    홍석모는 중국 송나라 때 동혼돈(冬餛飩)이라 하여 설날에 끓인 떡을 먹는 풍습이 있었던 것을 참작하면 우리나라에서도 정월에 떡국 먹는 풍속이 오래되었을 것이라 하였다. 떡국은 정월 초하루 제사상에도 반드시 올리는 중요한 음식이었다. 관혼상제의 사례(四禮)를 중시했던 조선에서는 많은 학자와 문인들이 예법에 관한 저서들을 남겼는데, 이들의 저술에는 떡국을 정월 초하루의 중요한 제사음식으로 규정하고 있다.


    조선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兪拓基, 1691~1767)는 그의 문집인 『지수재집(知守齋集)』에 수록된 유계(遺戒)라는 글을 통해 자손들에게 “정월 초하루 차례상에는 떡국과 만둣국 각기 1그릇, 과일 4그릇, 포육과 식혜, 탕은 각기 2그릇, 산적은 세 접시를 올리라(節日正朝 餠湯饅頭湯各一器 果四器 脯醢湯二器 炙三串)”고 당부하였다.


    떡국은 오랜 역사만큼 지역별로 특유의 재료와 조리법으로 만든 떡국이 발달하였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서울의 소고기육수로 끓인 떡만둣국, 경기도는 개성의 조랭이떡국, 강원도의 멸치육수로 끓인 떡만둣국, 충청북도의 미역생떡국, 충청남도의 닭생떡국, 전라북도의 두부떡국, 전라남도의 꿩떡국, 제주도는 ‘칼국’이라 하여 멸치육수에 끓인 떡국, 경상북도의 태양떡국, 경상남도의 굽은떡국이 각 지역을 대표하거나 특색 있는 떡국이다.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등의 북부지방은 예로부터 쌀농사를 많이 짓지 않았기 때문에 떡국 대신에 만둣국을 주로 끓여 먹었다.


    굽은떡국은 찹쌀가루를 뜨거운 물에 익반죽한 다음 반대기로 만들어 구운 후 골패 모양으로 썰어서 굴과 소고기 등과 함께 멸치장국에 끓여낸 울산광역시의 향토음식이다. 반대기는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가루를 반죽하여 평평하고 둥글넓적하게 만든 조각’을 말한다. 음식이름에서 ‘굽은’의 뜻은 ‘굽다’라는 동사의 활용형인 ‘구운’의 경상도식 발음이다. 굽은떡국은 ‘꾸분 떡국’이라고도 부른다. 굽은떡국의 가장 큰 특징은 멥쌀로 만든 가래떡을 사용하는 보통 떡국과는 달리, 찹쌀가루로 만든 생떡을 구워서 떡국을 만든다. 또한 해산물이 풍부한 경상남도 해안지방에 위치한 특성상 굽은떡국에는 굴이 들어간다.


    원래 떡국에 사용하는 떡은 멥쌀로 만든 가래떡을 꾸들꾸들하게 건조시킨 후에 어슷하게 썰어서 사용한다. 지금은 방앗간에서 기계를 이용해 가래떡을 뽑거나 아예 떡국용으로 썰어져 있는 떡 제품을 손쉽게 구할 수 있다. 지금처럼 기계시설을 갖춘 방앗간이 없었던 옛날에는 가정에서 손수 가래떡을 만들었다. 『동국세시기』 정월조에는 “멥쌀가루를 쪄서 안반 위에 놓고 떡메로 무수히 쳐서 길게 늘려 만든다”고 하여 가래떡 만드는 법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형편이 여의치 않아 떡국을 끓여야 하는데 가래떡을 준비할 수 없거나 또는 적은 양의 떡국을 끓일 때에는 ‘생떡국’을 만들었다.


    찹쌀이나 멥쌀가루를 뜨거운 물에 익반죽하여 가래떡 모양이나 반대기로 만든 것을 생떡이라 하는데, 생떡국은 생떡을 썰어서 장국에 끓여내는 일종의 인스턴트 떡국이다. 굽은떡국도 재료나 만드는 법에 있어서는 생떡국의 일종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생떡은 떡쌀을 찌지 않고 떡메로 치지도 않기 때문에 쫄깃하지가 않아서 육수에 오래 끓이면 풀어지기 쉽다. 특히 굽은떡국은 점성이 높아 풀어지기 쉬운 찹쌀이 재료여서 생떡을 굽는 이유도 바로 떡의 표면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떡을 구운 다음에도 육수가 끓을 때 떡을 넣자마자 불을 끄고 간을 해야 한다. 굽은떡국은 구운 찹쌀의 고소한 맛이 살아 있고, 떡이 부드러워 노인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정월 초에 만들어두었다가 보름까지 먹는다.


    재료

    찹쌀가루, 소고기, 멸치, 다시마, 계란, 김, 참기름, 국간장

    조리과정
    1. 1. 물에 불린 찹쌀에 소금을 넣고 가루를 내어 익반죽한 다음 주먹 크기로 반대기를 만든다.
    2. 2. 팬에 기름을 둘러 반대기를 넓게 펴서 구워낸다.
    3. 3. 다시마와 멸치로 육수를 만든다.
    4. 4. 곱게 다진 소고기에 갖은 양념을 한 다음 골패모양으로 썰어 놓는다. 구운 떡도 같은 모양으로 썬다.
    5. 5. 계란은 지단을 부쳐 채로 썰고, 김도 구워서 썰어 둔다.
    6. 6. 끓는 육수에 구운 떡을 넣자마자 불을 끄고 간장과 참기름으로 간을 맞춘 뒤 그릇에 담아낸다.
  • 쇠고기와 각종 채소가 어우러져 품위 있는, 궁중떡볶이

    길거리나 분식집에서 편하고 쉽게 즐길 수 있는 떡볶이는 원래 궁중에서나 먹는 귀한 음식이었다고 한다. 쇠고기나 쌀떡을 이용한 떡볶이는, 먹거리가 귀했던 시절 일반 서민들과는 동떨어진 음식이었다.

    떡볶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9세기 말의 요리서인 『시의전서』에서 볼 수 있는데, "궁중에서 흰떡과 쇠고기, 참기름, 간장, 파, 석이버섯, 잣, 깨소금 등으로 떡볶이를 만들어 먹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궁중떡볶이가 그 시작이다.

    궁중떡볶이
    궁중떡볶이

    기록에는 떡볶이라는 이름 대신 떡 찜, 떡 전골, 떡 잡채 등으로 불렸다고 되어 있으며, 이후 1942년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에 떡볶이라는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 이 책에서는 떡과 함께 고기, 채소 등을 간장으로 조려서 만드는 조리법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고추장을 넣어 빨갛고 매콤한 떡볶이가 등장한 시기는 1950년대이고, 본격적으로 우리의 입맛을 사로잡기 시작한 시기는 1970년대에 들어서이다. 간장으로 조리된 떡볶이를 궁중떡볶이나 간장떡볶이라고 부르고 고추장으로 만든 떡볶이를 일반적으로 떡볶이라 부르고 있다. 이러한 음식명의 구별은 별도의 유래나 기록은 없지만, 현대에 유행하는 고추장 떡볶이와 구분하기 위해 궁중떡볶이란 이름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궁중에서 떡볶이를 만들 때 고추장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매운맛이 사람을 흥분시키는 특성이 있어, 나랏일을 돌보는 왕에게는 될 수 있는 대로 매운맛의 음식을 올리지 않은 데서 찾을 수 있다.

    궁중떡볶이는 고기와 채소가 어우러져 영양학적으로도 균형 잡힌 음식이다. 영양을 보충해주는 쇠고기와 궁중떡볶이에 들어가는 당근과 양배추로 인해 비타민이 풍부해지며, 피부미용에 도움이 된다. 궁중떡볶이를 조리할 때 당근은 기름에 살짝 볶아 사용하는데 이러한 방법은 당근의 베타카로틴 성분의 소화흡수를 돕는다.


    재료

    흰떡, 쇠고기, 양파, 당근, 미나리, 숙주, 표고버섯, 소금, 설탕, 간장, 깨소금, 참기름

    조리과정
    1. 1. 살짝 굳은 흰떡을 적당한 길이로 자르고 반으로 가르거나 하여 물에 담가둔다
    2. 2. 쇠고기는 곱게 다져 놓는다.
    3. 3. 미나리와 숙주는 데쳐서 찬물에 헹군 다음 물기를 털어낸다.
    4. 4. 당근 양파, 표고버섯은 사각형 모양으로 썰어 소금으로 간하여 참기름에 볶아 놓는다.
    5. 5. 재료를 섞어 양념장을 만들고 흰떡과 다진 고기에 각각 양념하여 둔다.
    6. 6. 냄비에 고기를 먼저 볶다가 흰떡을 넣고 준비한 채소들을 함께 섞어 참기름, 간장, 깨소금, 설탕을 넣어 간을 맞춘다.
  • 손으로 빚어 만든 전통시대의 인스턴트 떡국, 생떡국

    떡국은 흰 가래떡을 얇고 어슷하게 썰어서 장국에 끓인 전통음식이자 정월 초하루에 만들어 먹는 시식(時食)이었다. 19세기 중반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정월(正月)조에는 가래떡과 떡국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멥쌀가루를 쪄서 안반 위에 놓고 떡메로 무수히 쳐서 길게 늘려 만든 가래떡을 흰떡[白餠]이라고 한다. 이것을 얇게 엽전 두께만큼 썰어서 장국에다 넣고 끓인 다음 소고기나 꿩고기를 넣고 후춧가루를 쳐서 조리한 것을 떡국[餠湯]이라고 한다. 이것은 제사에도 쓰고 손님접대에도 사용하므로 세찬에 빠져서는 안 될 음식이다.

    또한 홍석모는 중국 송나라 때 동혼돈(冬餛飩)이라 하여 설날에 끓인 떡을 먹는 풍습이 있었던 것에 미루어 우리나라에서도 정월에 떡국을 먹는 풍속은 오래되었을 것이라 하였다. 떡국을 정확히 언제부터 만들어 먹기 시작하였는지 확인할 수 없으나 조선시대의 고문헌에는 떡국을 ‘병탕(餠湯)’이라고 하여 그 역사가 짧지만은 않다.


    떡국은 정월 초하루에 먹는 시식일뿐만 아니라 이 날 조상에 올리는 차례상에도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제사음식이기도 했다. 특히 관혼상제의 사례(四禮)를 중시했던 조선에서는 많은 학자와 문인들이 예법에 관한 저서들을 남겼다. 이들의 저술에는 떡국을 정월 초하루의 중요한 제사음식으로 규정하고 있다. 예를 들면 조선 중기의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이 저술한 『제찬(祭饌)』에는 “정월 초하루 차례상에 떡국과 만둣국 각 1그릇, 삼색 과일, 포육과 식혜 각 1그릇, 적(炙) 1접시를 올린다”고 하였고, 영조(英祖) 때 소론(小論)의 영수였던 오천(梧川) 이종성(李宗城, 1682~1759)이 저술한 『가범(家範)』에는 정월 초하루 차례상에 올리는 시식(時食)으로 떡국을 최고로 꼽았다.


    지금은 방앗간이나 공장에서 기계를 이용하여 뽑아낸 가래떡이나 이미 썰어진 떡국용 떡을 손쉽게 구입하고 떡국을 만들어 먹는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기계장비가 없었던 전통시대에는 가래떡 만드는 일은 어려운 작업에 속하였다. 『동국세시기』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떡살을 떡메로 친 다음 손으로 일일이 길게 늘리면서 원통형으로 빚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런 여건조차 갖추지 못하면 가래떡을 접하기가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떡국은 가래떡이 없거나 또는 적은 양의 떡국을 빨리 만들 필요가 있을 때를 위해 고안된 전통음식이다. 일반적으로 생떡국을 만드는 방법은 멥쌀을 가루 내어 뜨거운 물로 익반죽한 것을 손으로 가래떡 모양으로 빚은 다음 동전 모양으로 썰어 장국에 끓여낸다. 멥쌀을 쪄내어 떡메로 쳐서 쫄깃하게 만드는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에 생떡국은 ‘날떡국’이라고도 하였고, 한자로는 ‘생병탕(生餠湯)’으로 불렀다. 생떡국을 요즘 말로 표현하면 인스턴트 떡국이라 할 수 있겠다. 전라북도 지방의 생떡국은 닭육수에 무와 토란을 넣고 끓이다가 생떡을 넣어 끓인 다음 하여 닭살을 고명으로 얹어낸다.

  • 밥이 아니라 떡이에요, 약식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紀異)」편, 사금갑조(射琴匣條)에, 신라 21대 소지왕이 제위에 오른 지 10년 되는 해, 정월 대보름에 까마귀가 재앙을 미리 알려 왕의 목숨을 구했고, 이에 대한 보은으로 이날을 까마귀 제삿날(烏忌日)로 정하고 찰밥을 지어 까마귀에게 제사 지냈다는 고사가 나온다. 이처럼 정월 대보름에 찰밥을 짓는 풍습에서 약식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약식
    약식

    고려 시대에는 찰밥에 꿀과 기름을 섞고 밤이나 잣, 대추 등을 넣는 약식으로 발전하였다. 이색의 『목은집(牧隱集)』에 “찰밥에 기름과 꿀을 섞고 다시 잣·밤·대추를 넣어서 섞는다. 천문만호(千門萬戶)의 여러 집에 서로 보내면 새벽빛이 창량(蒼凉)하매 갈까마귀가 혹하게 일어난다.”라는 약식을 노래한 시가 있다. 조선 시대에 편찬된 『동국세시기』, 『열양세시기』 등의 각종 세시기와 『임하필기』, 『동국여지승람』, 『오주연문장전산고』, 『용재총화』, 『지봉유설』 등의 각종 문헌에서도 약식에 관한 설명이 나오고 이를 읊은 시도 많이 보인다. 이러한 풍습이 지금까지 내려와 약식은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나 만들어 먹는 정월 대보름의 별식이 되었다.


    우리 조상들은 음식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의식동원(醫食同源)’ 또는 ‘약식동원(藥食同源)’ 이라 생각하는데 이는 “의약품과 음식은 몸에 이롭고 보완해주는 것으로 그 근원은 같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 음식 중에는 약주, 약과, 약식, 약고추장 등 ‘약(藥)’ 자가 붙은 음식이 많다. 정약용이 지은 『아언각비(雅言覺非)』를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꿀을 흔히 약이라 하여 밀주(蜜酒)를 약주(藥酒)라 하고, 밀반(蜜飯)을 약반(藥飯)이라 하며, 밀과(蜜果)를 약과(藥果)라고 한다”고 씌어 있다. 그러므로 약식의 약(藥)자는 몸에 이로운 음식인 동시에 병을 고쳐주는 음식이라는 뜻을 함께 지니고 있다.

    재료

    찹쌀, 찹쌀가루, 잣, 밤, 대추, 설탕, 소금, 황설탕, 계핏가루, 진간장, 대추, 캐러멜소스, 꿀, 참기름, 유자청, 유자청 건지

    조리과정
    1. 1. 깨끗이 씻은 찹쌀을 깨끗이 씻어 3시간 이상 충분히 불린 후 건져내 물기를 뺀다.
    2. 2. 베보자기를 깐 찜통에 약 40분~1시간 정도 찌는데, 도중에 위아래를 한두 번 고루 뒤섞어 골고루 익힌다.
    3. 3. 속껍질을 제거한 밤은 2∼3등분 하고 유자청 건지는 곱게 다진다. 씨를 발라낸 대추는 깨끗이 씻은 후 2∼3조각으로 자른다. 잣은 먹기에 편하게 고깔을 제거한다.
    4. 4. 찰밥이 뜨거울 때 반으로 나누어 각각 커다란 그릇 위에 펼쳐 놓는다. 하나는 꿀과 설탕, 계핏가루, 캐러멜소스, 간장, 참기름을 넣고 고루 섞는다. 다른 하나는 꿀, 유자청, 유자청 건지, 소금을 넣어 고루 섞어 충분히 간에 배게 기다린다.
    5. 5. 양념한 각각의 찰밥에 참기름과 잣과 밤, 대추를 넣어 잘 섞어 버무린 후 센 불에서 익히다가 시간이 흐르면 보통 불에서 은근히 중탕하여 쪄낸다.
  • 임진 의병의 휴대용 전투식량을 계승한 의령 망개떡

    망개떡은 경상남도 의령군의 향토음식으로 떡의 형태와 만드는 법은 송편과 유사하지만 떡을 청미래덩굴의 잎으로 감싸서 쪄내는 것이 특징이다. 떡의 명칭은 경상도 지방에서는 청미래덩굴을 ‘망개나무’라고 부르기 때문에 망개떡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망개떡
    망개떡

    청미래덩굴은 백합과의 활엽 덩굴성 관목으로 뿌리에는 녹말성분이 많이 들어 있어서 흉년에는 구황식품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잎에는 특유의 향을 내는 방부제 성분이 들어 있다. 망개떡은 상하기 쉬운 떡을 청미래 덩굴의 잎으로 싸서 잎의 향과 성분이 떡에 베어들게 하여 무더운 여름철에도 잘 부패하지 않는 특징을 지닌다. 경상남도 의령군의 진산(鎭山)인 해발 897m의 자굴산에는 청미래 덩굴 군락지가 발달되어 있어 예로부터 의령지역에서는 구하기 쉬운 식재료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의령지역에는 망개떡의 유래와 관련한 두 개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첫 번째는 이바지 음식 유래설이다. 삼국시대에 경상남도 의령군은 6가야 중 아라가야(阿羅伽倻)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어느 날 백제의 한 귀족이 사냥에 나섰다가 이 지역까지 들어왔다가 길을 잃고 말에서 떨어져 사경을 헤매었다. 때마침 지나가던 심마니가 그 귀족을 구하여 자신의 집에서 딸에게 돌보도록 하였다.

    귀족은 몸을 추스르는 동안 자신을 정성껏 돌본 심마니의 딸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백제로 돌아온 이후 심마니의 딸에게 청혼하였다. 이때 딸의 집안에서는 혼인을 맺으면서 망개떡을 이바지 음식으로 백제에 전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역사적으로 친선관계를 유지해왔던 가야와 백제의 관계를 상징하는 이야기로서 망개떡은 화친의 상징이자 매개체로 등장하고 있다.


    망개떡
    망개떡
    망개떡
    망개떡

    두 번째는 전투식량 유래설이다. 경상남도 의령군은 임진왜란 개전 초기 왜군이 부산진에 상륙한지 불과 열흘 만에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던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1552~1617)를 낳은 충절의 고장이다. 당시 곽재우의 의병들은 청미래덩굴 잎에 밥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먹었는데, 청미래덩굴 잎으로 싼 음식은 쉽게 상하거나 부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소규모의 비정규 전력인 의병은 수시로 지역을 이동하면서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매복하였다가 적을 기습공격하는 유격전을 수행하는 탓에 정상적인 식사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청미래덩굴 잎으로 싼 밥은 의병들의 훌륭한 전투식량으로서 왜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하는데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두 이야기는 비록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이지만 그 바탕에는 충절의 고장답게 나라의 안위를 염려하는 의령 사람들의 충정심이 부패를 방지하는 망개잎을 이용한 음식을 매개로 표출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재료

    찹쌀, 팥, 꿀, 설탕, 소금, 계핏가루, 청미래덩굴잎

    조리과정
    1. 1. 물에 불린 팥을 쪄낸 다음 소금을 넣고 잘게 으깬 후 체에 내린다.
    2. 2. 1에 계핏가루와 꿀, 설탕 등을 넣고 소를 빚는다.
    3. 3. 물에 불린 찹쌀을 쪄낸 후 소금을 넣고 찰기가 돌 때까지 찧어 반죽을 만든다.
    4. 4. 반죽을 조금씩 떼어 평평하고 둥글게 빚어 준비한 소를 넣고 사각 모양으로 빚는다.
    5. 5. 청미래 덩굴 잎 두 장 사이에 빚은 떡을 넣고 쪄낸다.
  • 찐빵? 술빵? 막걸리로 발효, 숙성시킨 술떡! 방울증편

    증편은 막걸리를 넣고 반죽하여 숙성, 발효시켜 만든 일종의 술떡이다. 술을 이용하여 발효시키는 것을 ‘기주(起酒)’라고 하여 기주떡이라고도 불리며 그 밖에 기증병, 상화, 상애떡이라고도 한다. 증편은 은근한 술 향과 달콤하면서도 부드럽고 새큼한 맛이 특징이다.

    방울떡
    방울떡

    증편은 고려 말 원(元)나라에서 전래된 상화(霜花)라는 음식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상화는 술로 밀가루를 반죽하여 발효시킨 다음 소를 넣고 만든 떡으로 지금의 찐빵과 유사한 음식이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밀가루가 귀한 재료였기에 쌀가루를 대신 사용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기온과 습도가 높은 여름철에는 떡과 같은 음식물이 쉽게 상하기 마련인데 술을 이용하여 발효시킨 증편은 쉽게 상하지 않아 여름에 주로 만들어 먹은 별식이다.

    방울떡
    방울떡
    방울떡
    방울떡

    한편 강릉지방의 방울증편은 일반 증편과는 달리, 찐빵처럼 보풀려 쪄낸 방울 모양의 증편이다. 둥근 틀에 반죽을 붓고 거피팥고물을 위에 얹은 다음 팥고물 위에 다시 반죽을 덮고 여러 고명을 올려 두텁떡 모양으로 만든다. 고명으로는 맨드라미꽃이나 대추채, 오이꽃, 흑임자, 석이버섯, 밤, 잣 등을 이용하여 색과 모양을 조화롭게 장식하였다. 또한, 단호박이나 말차가루를 섞어 만든 색 방울증편은 아름다운 빛깔과 풍부한 맛을 더하여 준다.


    재료

    멥쌀, 소금, 대추, 석이버섯, 막걸리, 설탕, 물

    조리과정
    1. 1. 충분히 불린 쌀에 소금을 넣고 빻거나 갈아 고운체로 몇 차례 거른다.
    2. 2. 대추는 가늘게 채 썰고, 따뜻한 물에 불린 석이버섯은 물기를 빼고 가늘게 채 썬다.
    3. 3. 막걸리에 설탕을 넣고 60℃ 정도로 중탕한 후 더운물을 섞는다.
    4. 4. 체로 거른 멥쌀가루에 3을 부어서 묽게 반죽한다. 그릇에 반죽을 담아 뚜껑을 덮어 따뜻한 곳에서 1차 발효를 시킨다.
    5. 5. 반죽이 부풀어 오르면 공기를 뺀 후 다시 덮어 둔다. 이 과정을 반복하여 충분히 발효시킨다.
    6. 6. 발효시킨 반죽을 증편틀에 면포를 깔고 2~3㎝ 두께로 부은 다음 대추채와 석이버섯채 고명을 얹는다.
    7. 7. 김이 오른 찜통에 넣어 20~40분간 찐다.
  • 고구마를 떡으로 빚어 먹다, 경상남도 감제떡

    감제떡은 고구마를 썰어 말린 것을 가루로 낸 전분으로 송편처럼 빚어 찌는 떡으로 빼대기떡이라고도 불리는 경상남도의 향토음식이다. 고구마는 1763년(영조 39)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었던 조엄(趙曮)이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얻어와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래 일대에서 재배를 시작하였다.

    1765년에는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가 전라도와 제주에 고구마를 보급하면서 경상도와 전라도를 비롯한 남해안 일대와 제주의 주요 작물로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비옥하지 않은 거친 땅에서도 생육이 잘 되는 고구마는 북부지방의 감자와 더불어 조선 후기 남부지방의 구황식품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감제떡의 이름은 고구마의 한자명인 감저(甘藷)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구마는 본래 감저, 남감저(南甘藷) 혹은 조엄이 들여온 작물이라 하여 조저(趙藷) 등의 명칭이 있었지만 일반에서는 고구마로 불리게 되었다. 고구마를 감저라 하지 않고 고구마로 부르게 된 연유는 조엄이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오면서 기록한 『해사일기(海槎日記)』에서 찾을 수 있다.

    『해사일기』의 1764년(영조 40) 6월 18일 기사에 조엄은 고구마에 대하여 “이름은 감저라 하는데 혹은 효자마라고도 하고, 왜인들은 고귀위마로 발음한다(名曰甘藷。或謂孝子麻。倭音古貴爲麻)”라고 언급하고 있다. 즉 고구마는 보통 고구마를 지칭하는 일본어 ‘코코이모(孝行芋)’와 대마도에서 부르는 명칭인 ‘고귀위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경상도와 제주지역에는 감저 또는 감제라는 고구마의 명칭이 남아있다. 특히 제주도에서는 고구마를 이용한 향토 음식에는 감저밥, 감저범벅, 감저저베기, 감저구이, 감저침떡, 감저돌레떡, 감저술 등과 같이 감저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냉장보관시설이 없었던 옛날에는 당분과 수분의 함량이 높은 고구마를 상온에서 장기간 보관하기는 곤란하였다. 그러다 보니 부패하기 쉬운 고구마를 오래도록 보관하는 방편으로 건조하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고구마를 통째로 깨끗하게 씻은 다음 둥글고 얇게 썰어서 햇볕에 바싹 말린 후 보관하였다가 필요한 만큼 꺼내어 쓰는 방법이다.

    이렇게 썰어서 말린 고구마를 ‘빼대기’라 부른다. 빼대기는 경상남도 지역 외에 전라도와 제주도에서도 만들어졌는데, 경상도 지역에서는 빼대기 외에 빼떼기, 뺏대기 등으로 불리며 제주에서는 ‘뺏떼기’, 전라도에서 ‘빼깽이’ 등으로 불렸다. 또한, 빼대기는 ‘절간 고구마’라고도 불리는데, ‘절간’은 자른다는 뜻을 지닌 한자 ‘切干’의 한글 표기이다.

    말린 고구마를 빼대기로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썰어서 말린 고구마의 모양이 비틀어졌기 때문에 삐뚤삐뚤하다 하여 불렸다는 설과 말린 고구마가 뼈다귀처럼 단단해서 불렸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빼대기는 일반 고구마보다 수분이 현격히 낮은 대신 녹말의 함량이 높아 음식으로 조리하면 달고 맛이 좋아서 옛날부터 보릿고개를 넘기는데 매우 중요한 식품으로 이용되었다.

    고구마로 만든 떡에 관한 고문헌의 기록을 살펴보면 1809년 빙허각 이씨가 지은 『규합총서(閨閤叢書)』에 감저병(甘藷餠)을 만드는 방법이 소개되고 있다. 또 19세기 중엽 실학자 이규경이 편찬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인사편(人事篇) 복식류(服食類)에 수록된 산구준여변증설(山臞餕餘辨證說)에서는 다양한 떡의 종류를 소개하면서 “그 밖에 감저떡, 토란떡, 율무질경이떡, 옥수수떡, 잡병은 수시로 만들어 먹는다(此外 甘藷餠 土蓮餠 薏苡餠 玉蜀黍餠 雜餠 隨時造食)”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미루어 보아 18세기 후반에 보급되기 시작한 고구마는 19세기 초에는 떡을 비롯한 다양한 음식의 식재료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후반의 조리서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도 감저병은 “고구마를 껍질까지 씻어 말린 후 가루로 만들어 찹쌀가루와 섞어 찐 떡으로 맛이 꿀맛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부인필지(婦人必知)』,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 등 20세기 초반에 발간된 조리서에도 감제떡의 이름과 만드는 법이 소개되고 있다.

    감제떡은 기본적으로 빼대기를 가루로 내어 송편 모양으로 빚은 다음 쪄서 만든다. 이 밖에도 빼대기 가루를 시루에 넣고 설기떡처럼 쪄내거나 돌레떡, 개떡 형태로도 만들기도 한다. 특히 빼대기 가루에 생고구마를 얇게 썰어 함께 버무려 찐 떡은 감제침떡이라 하여 12월의 절식(節食)으로 만들어 먹는다.

  • '석탄(石炭)으로 만든 떡'이 아닙니다, 석탄병!

    석탄병은 조선 시대 이전부터 궁중이나 반가에서 해 먹었던 떡이다. 그 맛이 너무 좋아 아낄 석(惜) 자에 삼킬 탄(呑) 자, 떡 병(餠)을 써서 차마 삼키기가 아까운 떡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이다.

    처음으로 석탄병의 조리법이 기록된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수시(水柿:물기가 많고 연한 종류의 감)는 잘 익고 단단한 것으로 골라 껍질 벗겨 한 접을 생률 치듯 깎아 널어 말려 가루로 만든다. 멥쌀가루를 반반 섞고 사탕 가루를 많이 넣는다. 맛을 보아 달지 않으면 좋은 꿀 더 섞고, 귤병과 민강(생강을 사탕에 조린 과자)을 얇게 저며 무떡 섞듯 섞는다. 안칠 때 잣가루, 계핏가루 섞어 안치고 대추와 황률 삶은 것을 가늘게 채 쳐 잣가루를 섞어 위에 가득 뿌리고, 백지로 씻은 후에 또 종이를 덮고 다른 가루로 위에 덮어 찌면 그 맛이 차마 삼키기 아까운 고로 석탄병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부인필지』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우리 음식 만드는 법』 등에서는 모두 아주 얇게 감을 쳐서 말리기를 당부하고 멥쌀가루에 섞는 것으로 되어 있다. 쌀가루와 김가루가 같은 분량으로 들어가는 것도 특이하다. 멥쌀가루와 섞어 켜켜로 고물을 하여 찌므로 설기떡이라 할 수 있으며, 간간이 밤, 대추를 섞는 것은 떡의 모양이나 맛을 위해서이고 고물은 흰빛의 팥고물이나 노란빛의 녹두 고물이 자줏빛 떡에 잘 나타난다.

    석탄병은 감의 은근한 단맛과 잣가루의 고소함이 잘 어우러져 서양의 케이크처럼 폭신하고 맛있는 떡이다.


    재료

    멥쌀가루, 꿀, 물, 김가루, 잣가루, 밤, 대추, 유자청, 유자, 계핏가루, 생강정과, 녹두 고물

    조리과정
    1. 1. 멥쌀은 깨끗이 씻은 후 물에 6시간 정도 담갔다가, 소쿠리에 건져서 소금을 넣는다.
    2. 2. 가루로 빻아 체에 내린다.
    3. 3. 멥쌀가루에 김가루, 계핏가루를 섞고 끓여 식힌 설탕물을 넣어 골고루 비빈 후 다시 한번 체에 내린다.
    4. 4. 밤은 껍질을 까서 8조각 정도로 썰고, 대추는 씨를 발라내고 3∼4등분 하고, 잣은 고깔을 떼어놓는다.
    5. 5. 밤, 대추, 귤병, 생강정과 썬 것과 잣가루를 멥쌀가루와 함께 섞는다.
    6. 6. 녹두는 물에 하룻밤 충분히 불렸다가 돌 없이 깨끗이 씻어 찜통에 찌고 소금 간을 한다.
    7. 7. 절구에 찧어 체에 내린다.
    8. 8. 젖은 베보자기를 깔고 녹두 고물을 충분히 펴서 덮은 다음, 준비한 떡가루를 4∼5㎝ 정도로 편편이 얹고 그 위에 다시 녹두 고물을 얹는다.
    9. 9. 김이 오른 솥 위에 시루를 올리고 센 불에서 찌다가 김이 오르면 뚜껑을 덮어 약 20분 정도 더 찐 뒤 꼬챙이로 찔러보아 흰 가루가 묻어 나오지 않으면 불을 끄고 5분간 뜸을 들인 뒤 식힌 후 썬다.
  • 고려 때 전래된 제주도판 쌍화점(雙花店), 제주 상애떡

    상애떡은 보릿가루에 보리밥을 발효시킨 보리술을 넣고 반죽하여 팥소를 넣고 네모난 모양으로 쪄낸 제주특별자치도의 향토음식이다. 상애떡은 상외떡, 삼메떡, 상화병, 쌍화병 등 별칭이 많은데, 떡의 이름에서 제주 상애떡이 고려가요 『쌍화점(雙花店)』의 ‘쌍화’에서 유래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즉 상애떡의 명칭이 쌍화에서 상화(霜花)로, 상화에서 상애떡으로 변화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주도의 일부 지역에서는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떡이라 하여 상애떡을 ‘상외떡’으로 부른다고도 한다. 이때의 ‘상외’는 ‘床外’의 의미로 쓰였을 것이다.

    상애떡

    상애떡의 유래는 고려 후기 원나라 간섭기에 몽골인이 제주도에 목장을 경영하면서 휴대용 음식으로 먹던 것이 제주인에게 전해져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제주에서 성행했던 민간신앙에서 무속신에게 대접하는 떡에도 상애떡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외부에서 들어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제주에서 예전에는 상갓집이나 제삿집에 부조하는 풍속이 있었는데 부조음식으로는 주로 상애떡을 지참하였다. 장지(葬地)에서도 친족들이 부조한 상애떡으로 상여꾼들에게 식사대용으로 대접하였다. 또한 제사나 대소사의 일을 도와준 사람에게 사례비를 주면 사양하고 받지 않으므로 상주들이 큰 바구니에 상애떡을 담아 사례하였다고 한다.


    상애떡은 발효과정에서 각종 유기산과 알코올이 생성되어 여름철에도 잘 변질되지 않아서 여름철 제사나 추석명절 음식으로도 널리 쓰였다. 조선후기 홍석모(洪錫謨)가 저술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상화병(霜花餠, 상애떡)을 유두(流頭)날에 먹는 절식(節食)으로 기록하고 있다. 유두날은 음력 6월 15일이므로 양력으로 환산하면 7월의 무더위가 한창일 때이다.

    상애떡
    상애떡

    상애떡은 1970년대까지 상례나 제사시 부조 음식으로 널리 사용되었으나 제과점이 등장하면서 점차 사라졌다. 그런데 최근에는 웰빙 바람을 타고 ‘제주보리빵’이라는 이름으로 변형된 형태의 상애떡이 판매되고 있다. 하지만 제조과정이 밀가루에 보릿가루를 약간 혼합하여 막걸리나 이스트를 넣어서 발효시키는 점과 떡의 외형이 원래 직사각형에서 원형으로 바뀐 데서 보리찐빵의 형태에 가깝게 변화했다.


    상애떡의 주된 재료인 보리는 섬유소가 풍부하고, 비타민 B1과 나이아신, 무기질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서 심혈관계 질환 개선, 변비 해소, 암 예방에도 효능을 발휘한다. 또한 발효과정 중에 생성된 유기산은 한국인에게 부족한 철분과 칼슘 등의 무기질을 잘 흡수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재료

    보리쌀, 보리술, 팥, 소금

    조리과정
    1. 1. 삭힌 보리밥에 누룩가루를 섞어 끓인 다음 항아리에 넣고 2~3일 발효시켜 보리술을 만든다.
    2. 2. 보리쌀을 하룻밤 정도 물에 담가 불려두었다가 빻아 고운 보릿가루를 만든다.
    3. 3. 보릿가루에 보리술을 부어 반죽한 후 그릇에 담아 따뜻한 방안에서 5시간 정도 발효시킨다.
    4. 4. 반죽을 직사각형 모양으로 만들어 팥으로 만든 소를 넣고 봉한다.
    5. 5. 찜통에 빚은 떡을 넣고 더운 김이 오르기 시작하면 그로부터 약 20분간 쪄낸다.
  • 감의 고장 전라도의 감고지떡과 감시리떡

    예전에 시골 마을마다 가을이 되면 붉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에 올라 장대로 감을 수확하던 정경과 하늘에 나는 새들도 소중한 생명으로 여기고 ‘까치밥’이라 하여 감을 다 따지 않고 남겨 두었던 따뜻한 인정이 추억으로 떠오른다. 전라도 지방은 예로부터 평야가 발달한 곡창지대로 물산이 풍부하여 다양하고 화려한 떡을 만들어 먹었다. 전라도의 대표적인 떡에는 감고지떡, 감시리떡, 감설기, 감단자, 감인절미, 건시단자, 경단, 고치떡, 나복병, 복령떡, 섭전, 송피떡, 수리취떡, 우찌지, 차조기떡, 호박고지시루떡, 호박메시리떡 등이 있다.


    특히 전라도 지방의 떡 중에는 감을 재료로 한 떡의 종류가 많았다. 그 이유는 예로부터 전라도는 감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은 옛날부터 품질이 우수한 감을 생산한 지역으로 그 명성이 높았다. 이 곳에서 생산되는 감으로 만든 곶감은 왕실에 진상할 정도로 맛이 뛰어나고 씨가 거의 없어 고종황제 때에 이르러서는 ‘고종시(高宗柿)’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자연환경에서 감을 재료로 만든 떡의 종류도 다양하게 개발되었던 것이다. 그중에서 감고지떡과 감시리떡은 감을 이용한 전라도 지방의 대표적인 시루떡이다.


    우리나라의 떡은 만드는 방법에 따라 찌는 떡, 치는 떡, 삶는 떡, 지지는 떡으로 구분한다. 치는 떡은 쪄낸 떡살을 떡메로 쳐서 만든 것으로 인절미가 있고, 삶는 떡은 경단이나 단자와 같이 떡 반죽을 빚어 물에 삶아낸 떡을 말하며, 지지는 떡은 빈대떡과 전병처럼 기름에 지져 만든 떡을 말한다. 감고지떡과 감시리떡이 해당하는 찌는 떡은 재료를 켜로 얹어 시루에 쪄내는 ‘켜떡’과 백설기처럼 재료를 섞어 한 덩어리로 시루에 쪄내는 ‘무리떡’의 두 종류가 있다.


    감고지떡은 감을 깎아서 말린 ‘고지’를 쌀가루에 섞어서 팥고물로 켜를 내어 쪄내는 시루떡이다. 감시리떡은 감가루에 쌀가루를 넣고 팥고물을 켜로 얹어 쪄내는 시루떡이다. 감시리떡의 ‘시리’는 시루의 전라도 방언이다. 감고지떡과 감시리떡은 말린 감을 재료로 하여 시루에 쪄내는 켜떡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비록 같은 재료이지만 감고지떡은 말린 감을 넣기 때문에 떡을 먹을 때 감과 떡을 동시에 먹는듯한 식감을 즐길 수 있고, 감시리떡은 감을 분말로 만들어 떡에 넣으므로 부드러운 식감과 감의 향취를 느낄 수 있다.


    교통과 물류가 현대사회보다 상대적으로 발달하지 못하였던 옛날의 음식문화는 주로 지역에서 나는 한정된 재료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재료라도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시키거나 가공하여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만들어 냈다. 그러한 실례(實例)를 감시리떡과 감고지떡이 보여주고 있다. 두 가지 떡 모두 감을 이용한 시루떡이면서도 차별화된 재료가공과 맛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선인들의 삶의 지혜가 돋보인다.


    감시리떡 재료

    감가루, 멥쌀가루, 팥, 소금

    조리과정
    1. 1. 물에 불렸다가 건져낸 멥쌀에 소금을 넣고 빻아 가루로 만들어 체에 내린 후 감가루를 섞는다.
    2. 2. 팥은 삶아낸 후 소금을 넣고 절구에 찧어 고물을 만든다.
    3. 3. 시루에 시루밑을 깔고 감가루를 섞은 멥쌀가루를 3~4㎝ 두께로 팥고물과 번갈아 켜켜로 안쳐 솥 위에 올린 다음 밀가루로 시루번을 붙인다.
    4. 4. 물에 적신 면포를 시루 위에 덮은 다음 센 불에서 찌다가 김이 오르기 시작하면 15분 정도 더 쪄 낸다.
    감고지떡 재료

    감고지, 멥쌀가루, 팥, 소금, 설탕물

    조리과정
    1. 1. 감은 껍질을 벗겨내고 0.5㎝ 두께로 썰어 말린다.
    2. 2. 설탕물을 멥쌀가루에 넣어 고루 비빈 다음 체에 내린다. 팥고물 만드는 법은 감시리떡과 같다.
    3. 3. 멥쌀가루에 말린 감고지를 섞어 놓는다.
    4. 4. 시루에 시루밑을 깔고 감고지를 섞은 쌀가루와 녹두고물을 켜켜로 안친 다음 김이 새지 않게 밀가루로 시루번을 붙여 김이 오른 후 20분간 쪄낸다.
  • 안동의 '명품' 소울푸드, 버버리찰떡

    버버리 찰떡은 큰 찰떡에 고물을 묻혀낸 떡으로 경상북도 안동지역 주민들이 주된 간식으로 애호하는 향토음식이다. 떡의 유래는 1920년대부터 김노미 할머니(1978년 타계)가 가난을 타개하기 위해 지금은 사라진 안동시 안흥동의 경북선 철길 밑에서 팥고물을 묻힌 찰떡을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안동 버버리찰떡
    안동 버버리찰떡

    1960년대에는 안동시 옥야동에 매점을 내고 영업하였다. 1970년대에는 김노미 할머니의 외손녀 천영조 씨가 가게를 물려받았다. 한편 가게에서 일을 돕던 김동순 할머니(76)가 이어받아 ‘두꺼비 찰떡’으로 이름을 붙여 판매하였다. 2001년의 불황으로 폐업을 하는 바람에 명맥이 끊어졌다가 3년이 지난 2004년에 김노미 할머니의 외증손이 가게를 내면서 재개되었다.


    떡의 ‘버버리’라는 명칭이 매우 특이하다. 마치 외국의 어느 유명 브랜드를 연상하게 하기도 한다. ‘버버리’는 벙어리를 뜻하는 안동지역의 사투리이다. 떡에 이러한 명칭이 붙게 된 데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첫 번째는 처음으로 찰떡을 만들어 팔던 김노미 할머니의 둘째 아들이 청각장애라서 지역주민들이 ‘버버리’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두 번째 설은 찰떡을 한입 베어 먹으면 말을 못 할 정도로 입안이 꽉차고 맛이 좋아서 '버버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두 가지의 유래설은 그 내용이 다르지만 버버리 찰떡이야말로 백여 년에 걸친 격동의 세월을 견뎌내면서 강인하게 삶을 이어온 안동 어머니들의 애환과 자식에 대한 정성이 가득 담긴 소울푸드라 할 수 있겠다. 일반적인 찰떡은 형태를 둥글게 하여 떡 전체에 고물을 입혀 만든다. 이에 반해 버버리 찰떡은 떡을 장방형으로 크게 썰어서 떡의 윗면과 아랫면에 고물을 입혀 만드는 점이 일반 찰떡과 다르다.


    재료

    찹쌀, 팥

    조리과정
    1. 1. 찹쌀을 6시간 이상 물에 불렸다가 쪄내어 쫄깃한 식감을 위해 떡메로 친다.
    2. 2. 찰떡을 일정한 크기로 보통 찹쌀떡보다 크게 잘라준다.
    3. 3. 고물로 쓸 팥은 맷돌로 갈아 물에 10시간 정도 불렸다가 팥 껍질을 벗긴 후 약 1시간 가량 삶는다.
    4. 4. 삶은 팥은 약 30분 정도 식힌 후에 팥고물을 만든다.
    5. 5. 일정한 크기로 잘라낸 찰떡 양면에 팥고물을 두껍게 입힌다.
  • 음력 10월 상달고사에 올리던 떡, 안동 무설기

    경상북도 안동시는 예로부터 퇴계 이황으로 상징되는 한국유학의 고향이자 양반의 고장으로 이름난 지역이었다. 지금도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의성 김씨, 진보 이씨, 풍산 류씨를 비롯한 유명 성씨와 종택, 관련 유적이 이어져 오고 있다. 양반의 고장이니만큼 안동에서는 많은 제사와 고사가 행해졌다. 그러다보니 무를 많이 재배하였던 안동에서는 무설기떡과 무가 들어간 붉은팥 시루떡은 제사상이나 고사상에 반드시 올리는 음식이었다.

    무시루떡
    무시루떡

    우리나라의 떡은 만드는 방법에 따라 삶는 떡, 지지는 떡, 치는 떡, 찌는 떡으로 나뉜다. 삶는 떡은 경단이나 단자와 같이 빚어 만든 떡이고, 지지는 떡은 빈대떡이나 전병처럼 재료를 기름으로 지져서 만든 떡이다. 치는 떡은 인절미와 같이 떡살을 쪄낸 다음 떡메로 쳐서 만든 떡을 말한다. 찌는 떡은 떡 중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떡으로 떡반죽을 시루에 넣고 쪄내는 떡이다. 백설기, 송편, 증편 등이 대표적인 쪄내는 떡이다.


    찌는 떡 중에 시루를 사용하여 쪄내는 시루떡에는 떡 재료를 앉히는 방법에 따라 ‘무리떡’과 ‘켜떡’의 두 종류로 구분된다. 우선 무리떡은 찌는 떡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떡으로 쌀가루만 통으로 쪄내거나 쌀가루 외에 재료가 있더라도 그 재료를 쌀가루와 섞어서 떡 전체를 한 덩어리로 쪄낸 떡이다. 무리떡은 다른 말로 ‘설기떡’이라고도 하는데, 백설기가 무리떡의 대표적인 떡이다.


    안동 무설기도 쪄내는 떡 중에서 무리떡에 속하는 떡이다. 켜떡은 무리떡과 같이 시루에 쪄내는 떡이지만, 떡 재료를 한데 섞지 않고 시루에 켜켜이 얹어서 쪄낸 떡을 말한다. 지금도 고사에 많이 쓰이는 붉은팥시루떡이 대표적인 켜떡이다. 한자어로 나복병(蘿葍餅)이라 부르는 무떡도 무설기와 무시루떡의 두 종류로 나뉜다. 무설기는 멥쌀가루에 채 썬 무를 섞어서 쪄낸 떡이고, 무시루떡은 채 썬 무를 섞은 멥쌀가루와 팥고물을 켜켜이 앉혀서 쪄낸 떡이다.

    무시루떡
    무시루떡


    무떡은 음력 10월의 대표적인 시절식(時節食)이기도 하다. 서울 지역에 전래하는 떡타령에 음력 10월의 대표적인 떡으로 무시루떡으로 노래하고 있다.


    상달(上月)이라고도 하는 음력 10월에는 ‘상달고사’라 하여 가을걷이를 마친 후 말일(午日) 또는 길일(吉日)을 택해서 집안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성주신, 조왕신, 삼신 등 집안에 머물며 길흉을 주관하는 가택신(家宅神)들에게 고사를 지냈다. 이때 팥고물을 얹은 무시루떡을 만들어 고사상에 올렸다. 무떡은 제례음식뿐만 아니라 손님접대, 부조, 선물 등 다양한 용도로도 만들어졌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1818년 강진에서 18년에 걸친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 1820년경 춘천 여행 중에 무떡을 대접받았다는 내용을 「경의시(經義詩)」에 남겼다.



    또 조면호(趙冕鎬, 1803~1887)라는 인물은 흥선대원군의 장남이자 고종의 형인 이재면(李載冕)이 보낸 무떡을 선물로 받아 온 가족이 배부르게 먹었다는 내용을 「흥친왕 이재면 대감이 보내준 떡에 사례하다(謝又石 李輔國載冕 饋餠)」는 시로 남기기도 했다.


    무설기의 주재료 중 하나인 무는 우리나라에서 재배된 역사가 오래되었다. 무는 한자로 나복(蘿蔔), 만청(蔓菁)이라고 하는데, 나복은 ‘큰 무’, 만청은 ‘순무’를 말한다. 1527년(중종 22) 최세진(崔世珍)이 지은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무의 종류로 나복과 만청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 중기에 편찬된 『역어유해(譯語類解)』의 「소채(蔬菜)」조에는 나복을 ‘댓무우’, 만청을 ‘쉿무우’로 한글로 번역하였다.


    무는 비타민 C와 디아스타제를 다량 함유하고 있어 소화를 돕는 대표적인 채소로 알려져 있다. 1433년(세종 15)에 간행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는 “무를 먹으면 여러 가지 열로 피를 토하고 코피가 나는 증상을 치료한다”고 하여 무가 해열효과가 탁월한 음식임을 밝히고 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흰 무는 만성 설사와 목구멍에 질환이 생겨 음식을 내려 보내지 못하는 것을 치료한다”고 하여 소화기 관련 질환에 좋은 식품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무는 매운 맛이 강하여 기를 내려주고 각종 출혈과 편두통 치료에 좋다고 하였다.


    무떡을 언급한 고조리서로는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閨閤叢書)』와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가 있다. 두 문헌 모두 만드는 방법은 켜떡인 무시루떡의 제법을 기록하고 있다. 무설기의 조리법을 직접적으로 소개하는 문헌은 없지만 궁중이나 민간을 막론하고 잔치와 제사에 들어가는 음식의 종류를 정리한 목록이었던 발기[발기는 한자로 ‘件記’라 한다]가 많이 남아있는데, 여기에는 ‘설고(雪糕)’ 또는 ‘설고병(雪糕餠)’이라는 이름으로 설기떡을 기록하고 있다.

  • 메밀과 무의 환상적인 궁합, 제주 빙떡

    메밀은 척박한 토양에서 잘 자라는 작물이다. 화산섬인 제주도는 토질이 투박하고 물이 고일 수 없어 논농사가 발달하지 못한 대신에 예로부터 메밀을 재배했다. 2014년 제주특별자치도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제주 메밀 재배면적은 전국 재배면적의 24.5%인 622㏊, 생산량은 29.7%인 473톤으로서 메밀의 전국 최대 주산지”로 조사됐다고 한다.


    메밀의 생산량이 높은 만큼 예로부터 제주도에는 메밀을 이용한 향토 음식이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메밀 칼국수, 메밀조베기(메밀 수제비), 메밀 범벅, 메밀묵, 메밀 만두, 빙떡 등이 대표적이며, 이 중 가장 유명한 음식이 바로 빙떡이다.

    제주 빙떡
    제주 빙떡

    빙떡은 제주를 대표하는 떡인 만큼 그 명칭도 빙떡 외에 정기떡, 쟁기떡, 전기떡, 멍석떡으로 다양하다. 우선 빙떡의 ‘빙’은 떡을 뜻하는 한자 ‘병(餠)’이 빙으로 되었다는 설과 메밀 반죽을 국자로 빙빙 돌리면서 부치거나 둘둘 말아서 먹는 모양에서 유래됐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정기떡은 ‘정지’(부엌의 방언)에서 만들어 먹는 떡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제주도 내에서도 빙떡을 부르는 명칭이 지역마다 다양하다. 옛 제주목(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과 대정현(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덕면, 중문 일대) 지역에서는 빙빙 돌려 말거나 빙철(번철의 제주방언)에 지진다고 해서 ‘빙떡’이라 하였다고 한다. 정의현 남원(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지역에서는 빙떡의 모양이 말아 놓은 멍석의 모습과 같다 하여 ‘멍석떡’이라고도 불렀고, 정의현 서귀포(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지역에서는 전기떡 (쟁기떡)이라 불렀다고 한다.


    제주에는 메밀의 전래에 관한 설화가 전한다. 고려 시대 몽골인들이 제주도에 메밀을 전했다는 것이다. 삼별초의 마지막 항전지였던 제주도를 침공한 몽골군이 삼별초의 전력을 약화시켜 섬멸할 의도로 독성이 있는 메밀을 퍼뜨린 것이 제주에서 메밀을 재배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제주에서는 친족 또는 이웃에게 경조사가 생기면 부조 음식을 ‘차롱’(대나무로 짠 바구니 형태의 뚜껑이 있는 납작한 그릇)에 담아 보내는 풍습이 있었는데, 빙떡은 제주도의 관혼상제에 빠지지 않는 부조 음식이었다.


    빙떡의 주재료인 메밀은 루틴이라는 성분이 함유되어 있는데 동맥경화를 비롯한 혈관계통 질환과 당뇨병을 예방하는데 효능이 있다고 한다. 반면에 메밀은 그 성질이 차고 껍질이 단단하므로 소화가 잘되지 않는 단점이 있다. 또한 메밀은 해충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껍질에 벤질아민과 살리실아민이라는 독성물질이 있다. 도정(搗精)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예전에는 메밀의 독성과 차가운 성질을 보완하기 위하여 성질이 따뜻하고 해독작용이 있는 무를 이용하였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메밀을 이용한 음식에는 무를 많이 사용한다.


    재료

    메밀가루, 무, 쪽파, 깨소금, 소금, 돼지기름, 참기름

    조리과정
    1. 1. 메밀가루는 소금 간을 하여 미지근한 물로 묽은 반죽을 만든다.
    2. 2. 무는 채 썰어 데쳐낸 다음 물을 짜내고 깨소금과 소금, 참기름으로 버무려서 무채를 만든다.
    3. 3. 달군 번철에 돼지기름을 두른 다음 국자로 메밀 반죽을 떠서 번철에 빙빙 돌리면서 얇고 넓게 지진다.
    4. 4. 지져낸 전 위에 무채를 가지런히 얹은 후 돌돌 말아 남겨둔 양쪽 끝은 접히도록 눌러준다.
  • 피난민들을 먹여 살린 등겨수제비와 보리개떡

    피난민들을 먹여 살린 등겨수제비와 보리개떡

    음식은 맛의 즐거움만 선사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맛보는 훌륭한 재료가 되기도 한다. 해방의 벅찬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6·25전쟁으로 정든 고향을 떠나야했던 아픔과 굶주림과 전쟁을 치러야 했던 피난민들의 허기를 채웠던 음식이 있다. 거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등겨수제비와 보리개떡이다.

    6·25전쟁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수진이었던 낙동강방어선까지 밀려나자 경남 곳곳은 스며든 피란민들로 넘쳐났다. 다행히 보리농사를 많이 지었던 터라 보리 속 등겨로 만든 수제비, 개떡을 나눠먹으며 어려운 시절을 극복한 지혜의 음식이었다. 등겨수제비는 현재 성주향토음식으로 알려져 있으며, 보리개떡은 서울ㆍ경기, 강원도, 전북, 제주도 등지에서도 만들어 먹었고, 경북에서는 개떡, 등겨떡 이라고도 한다. 보릿겨란 보리에서 보리쌀을 뻬고 남은 속겨로 맥강 혹은 대맥강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보리등겨에 베타클루칸이라는 항암 물질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고 알려져 건강식 재료로 사용되고 있다.


    재료

    재료 : 풋고추 30g(2개), 멸치장국국물(멸치, 다시마, 물, 무, 대파) 1.6L(8컵), 다진 파 1큰술, 고춧가루 1큰술, 다진 마늘 1작은술, 소금 1작은술 <수제비 반죽> 보리등겨가루 500g, 소금 2작은술, 물 150ml(3/4컵)

    조리 과정

    1. 보리등겨가루에 소금과 물을 넣고 반죽한다.

    2. 풋고추는 0.3cm크기로 송송 썰어준비한다.

    3. 멸치, 다시마, 물, 무, 대파를 넣고 끓여 재료를 우려낸 후 넣은 재료를 건져내어 멸치장국국물을 준비한다.

    4. 멸치장국 국물에 준비된 분량의 다진 마늘, 다진 파, 고춧가루를 넣고 끓이다가 1의 반죽을 적당한 크기로 떼어 넣어 끓인다.

    5. 수제비 반죽이 떠오르면 소금으로 간을 하고 준비된 2의 풋고추를 올려 완성한다.


    보리개떡 조리 과정

    보리개떡은 보릿가루에 다진 파, 간장과 참기름으로 반죽하여 둥글고 납작하게 빚어 쪄낸 떡이다. 각 지역마다 조리방법에 있어 들어가는 재료의 차이가 있다. 강원도에서는 보릿겨에 설탕과 소금을 섞어 반죽하고, 경북에서는 보리등겨가루에 설탕, 소금, 물을 넣고 반죽하고 삶은 콩을 박아 찐다. 전북에서는 보릿겨에 찢은 호박잎과 감자 간 것을 섞어 반죽한다. 제주도에서는 풋보리를 가루내어 반죽한다.

  • 떡에 무늬를 찍어내는 도구, 떡살

    떡살
    떡살(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떡살은 떡에 눌러 찍어 여러 가지 아름다운 문양을 만들어내는 도장이다. 떡손, 떡본, 병형(餠型)으로도 부른다. 떡살은 누르는 면에 음각이나 양각 문양이 새겨져 있어서 떡에 눌러 찍으면 문양이 생긴다. 사용방법은 간단한데 적당한 크기로 자른 말랑말랑한 떡의 표면에 살짝 물기를 묻혀 떡살로 찍어 누른다. 떡이 어느 정도 굳으며 문양이 선명하게 보인다.


    재질에 따라 목재(木材)떡살과 자기(瓷器)떡살로 나눌 수 있다. 나무로 만든 떡살은 주로 재질이 단단하고 질기며 결이 적고 탄력성이 있는 대추나무·감나무·박달나무·은행나무·참나무 등으로 만든다. 보통 긴 나무에 각기 다른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크기는 15~30cm 정도부터 긴 것은 1m까지도 있다. 자기떡살은 백자·사기·옹기 등으로 만들며 형태는 보통 손잡이가 있는 둥근 도장모양이 많고 크기는 5~11cm 정도이다. 궁중에서는 백자로 만든 떡살을 많이 썼다.


    떡살의 문양은 상당히 다양한데 크게 식물문, 동물문, 문자문, 자연 산수문, 종교문 등으로 구분된다. 문양은 백일·혼례·회갑·상례·제사 등의 용도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었다. 백일에는 기쁨을 의미하는 물고기나 파초, 혼례에는 다산을 상징하는 석류·원앙·꽃과 나비, 회갑에는 장수를 의미하는 잉어나 거북이·壽福(수복)자문 등의 무늬를 새겼다. 또한 떡살의 문양은 지방에 따라 특색이 있는데, 산간지방에서는 노루나 토끼, 해안지방에는 가재나 새우가 문양으로 새겨지기도 한다.


    떡살은 부녀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살림도구로 조선시대 사대부 여인들은 혼숫감으로 떡살을 마련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떡살의 뒷면에는 제작연대, 사람 이름, 주소 등이 음각된 경우가 있는데 이는 마을에서 서로 떡살을 빌려가며 사용하다가 바뀌거나 잃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새겨둔 것이다.

    떡살
    떡살(사진출처:국립민속박물관)
    떡살
    떡살(사진출처:국립민속박물관)

    호남지방은 우리나라 곡물생산의 중심지로 예로부터 식문화가 발달하여 다양한 형태의 떡살이 제작되었다. 영남지방은 유림의 중심지로 고급스런 떡살이 많았는데 특히 경북 예천 떡살은 깊고 정교한 조각 솜씨가 훌륭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현재 떡살을 만드는 기능은 2013년 시도무형문화재 제56호 목조각장(木彫刻匠)으로 지정되어 김규석이 목재떡살 목조각의 유일한 기능전승자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우리조상들은 한번 먹고 나면 없어져 버릴 떡 하나에도 아름다운 문양을 더해 즐거움을 돋구었다. 떡살은 생활의 사소한 것 하나에도 아름다움과 의미를 부여하던 우리 선조들의 격조높은 음식문화를 대변하고 있다.

  • 강원도 홍천의 별미떡, 승검초잎떡

    강원도는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영서와 영동, 즉 산악지방과 해안지방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자연적인 환경의 차이는 음식으로 연결된다. 산악이나 고원지대에서는 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도토리, 상수리, 칡뿌리, 산채, 나물 등의 음식이 발달했다. 떡을 만들 때도 다양한 산야에서 자생하는 식물들이 활용된다. 승검초잎떡도 그중 하나다. 


    당귀의 다른 이름, 승검초  

    승검초는 당귀의 다른 이름이다. 미나릿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높이는 8~9cm 정도로 자라난다. 여름철에 백색의 작은 꽃이 핀다. 향기가 강하면서도 특이하다. 잎은 가장자리에 뾰족한 톱니가 있는 피침형이다. 흰색의 꽃이 8, 9월에 피고, 열매는 가장자리에 날개가 있고 타원형이다. 뿌리에도 특유의 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뿌리를 술로 담아 먹기도 하며, 한방에서는 승검초 뿌리를 당귀라 하여 보혈제로 쓴다. 허리와 사지의 냉증, 여성의 경우에는 월경이상, 불임증, 갱년기장애 등에 처방된다. 하지만 당귀는 독성은 약하지만 오래 복용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으며, 대변이 묽거나 설사하는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다. 또한, 발열이 있는 사람은 사용하는 것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승검초 잎을 넣은 일종의 시루떡  

    승검초잎떡은 당귀잎떡이라고도 부른다. 주로 강원도 홍천 지역에서 집안 행사가 있는 날이나 특별한 날 만들어 먹는 떡이다. 이른 봄 채소가 아직 자라기 전에 당귀 고유의 은은한 향이 나는 떡을 먹으면 겨우내 잃었던 입맛을 찾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승검초입떡 만드는 법이다. 쌀을 물에 충분히 불려서 소금을 넣고 빻아 체에 내린다. 가루로 준비할 경우에는 멥쌀가루로 준비한다. 멥쌀가루에 단맛을 내기 위해 설탕을 골고루 섞고, 팥은 푹 삶아 건져 준비한다. 쌀가루에 승검초잎을 잘게 잘라넣고, 팥도 함께 혼합한다. 시루에 젖은 보자기를 깔고, 쌀가루를 평평하게 깔아 떡을 안친다. 익은 것은 젓가락으로 확인한다. 젓가락으로 떡을 찔렸을 때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으면 다 익은 것이다. 익은 후 김이 나가면 비로소 맛있는 떡이 완성된다.

  • 부기를 빼주고 영양을 보충하는 호박꿀단지

    충청도는 과거부터 농업이 성했던 지역이다. 삼국시대 때 고구려에서는 조, 백제에서는 쌀, 신라에서는 보리가 주곡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그만큼 충청도는 오래전부터 쌀이 풍부했다. 곡식이 풍부하니 죽, 범벅, 수제비, 국수와 같은 음식이 발달하였고, 특히 호박이 활용되는 음식이 많다. 호박범벅과 꿀단지가 그 대표적인 음식이며, 떡에도 호박이 많이 활용된다.


    동양계호박인 청둥호박  

    호박꿀단지를 만들 때는 청둥호박이 사용된다. 청둥호박은 주로 한식에서 많이 활용하는 겉이 굳고 씨가 여문 호박이다. 청둥호박은 늙은 호박, 맷돌호박, 숙과용 호박이라고도 부른다. 늙은 호박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애호박이나 풋호박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늙은 호박은 “성숙하였다”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맷돌 호박이라는 이름은 모양이 꼭 맷돌과 같이 둥글고 납작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호박은 동양계호박과 서양계 호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호박은 동양계호박으로 언제부터 재배가 되었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조선 후기부터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 전부터일 것으로 추측만 되고 있다. 동양계호박은 꽃이 피고 나서 약 50일 정도 지나서 열매가 완전하게 황색으로 익은 것을 수확한다. 호박은 겉이 단단한 것이 큰 특징이다. 단단한 표면 덕분에 저장성이 좋아 가을부터 겨울까지 먹을 것이 부족한 시기에 좋은 구황식품이 되어주었다. 호박은 보기보다 고열량의 식품이다. 하지만 그만큼 영양가가 풍부하다. 특히 호박의 당분은 소화흡수가 잘되는 것이 특징이라 회복기 환자에게 좋다. 


    산모들을 위한 보양식 호박꿀단지 

    충청도에서는 이런 호박을 활용한 향토음식이 많이 발달했다. “호박꿀단지”가 그 대표적인 음식이다. 호박꿀단지는 호박의 꼭지 부분만 약 5cm 정도 동그랗게 잘라내 그 속의 씨를 긁어낸 후 꿀을 한홉쯤 넣고 다시 막는다. 꿀을 품은 호박을 통째로 큰 솥에 쪄낸 후 한김 식힌다. 막은 부분을 제거하고 속에 고인 물을 따라내 마시는데 이것이 바로 호박꿀단지이다. 호박꿀단지는 옛날부터 산모에게 특히 많이 먹이던 음식인데 산모의 산후 부기를 빼주고 부족한 영양을 보충해주는 데 효과적이다. 그래서 충청도에서는 집에 산모가 생기면 집에 미리 호박을 준비한다. 


    쪄서 물을 따라낸 후에는 호박을 잘라 떠먹거나 범벅을 만들기도 한다. 혹은 따라내지 않고 삶은 호박 통째로 베보자기에 싸서 큰 양푼에 체다리를 걸치고 호박이 들어갈만한 소쿠리를 놓고 무거운 맷돌로 눌러서 국물을 짜내 먹기도 한다. 

    최근에는 꿀을 넣고 찐 호박을 블렌더로 갈아서 먹기도 한다.

  • 귀한 날 먹는 제주도 쌀떡, 절변

    쌀이 귀해 잡곡으로 떡을 만든 제주도

    제주도는 화산섬이라 물이 고이지 않는 사질토와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토양으로 인해 물이 머물러있지 못하고 빠진다. 그렇다 보니 논농사가 가능한 지역이 드물어 쌀을 육지에서 배로 실어와야 했다. 그 정도로 쌀이 귀한 지역이다. 그래서 제주도에선 육지에서 쌀로 만들어 먹는 떡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제주도에서는 다양한 잡곡류 즉 보리, 차조 등을 사용해서 떡을 만들어 먹었다.

    제주 솔변
    제주 솔변
    제주 절변
    제주 절변

    제주도 사람들에게 떡은 ‘기원’을 의미한다. 제주도의 척박한 토양으로 곡식이 넉넉지 못했음에도 떡을 만들어야했던 이유는 굿, 제사, 영장 등 무속의례나 집안 의례를 치르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행사에 떡은 빠지지 않는 음식이었는데 동촌과 서촌, 혹은 집안에 따라 그 모양과 의미를 달리하여 만들었다.


    귀한 날 먹는 쌀떡, 절변

    제주 솔변
    제주 솔변


    제주도에서 쌀로 떡을 해 먹는 날은 정말 특별한 정성을 들이는 날이다. 명절이나 ‘큰일’(잔치, 상례)이나 제사에는 ‘곤떡’(쌀떡) 또는 ‘곤밥’(흰쌀밥)이라 해서 평소에 구하기 힘든 귀한 쌀로 만든 음식을 먹었다. 그렇게 먹는 대표적인 제주도 향토떡이 절변과 솔변이다. 절변은 절편의 제주도 방언이다. 절변은 만들기 하루 전에 쌀을 깨끗하게 씻어 물에 불려 두었다가 연자방아로 빻아 합체로 쳐서 고운 떡가루를 준비한다. 떡가루를 익반죽해서 동그랗게 빚거나 오메기떡처럼 빚는다.



    솥에 댓잎을 깔고 물을 넉넉히 넣어서 끓이다가 물이 끓으면 떡을 넣고 삶는데 떡이 떠오르면 바로 건져낸다. 계란 노른자 정도의 크기로 둥그렇게 2개씩 빚어서 서로 겹치게 해서 빗금 친 부채꼴 혹은 국화 모양의 절변 떡본에 눌러 모양을 만든다. 떡본이 맞닿는 떡 표면에는 참기름을 바른다. 완성된 절변은 표면이 마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름을 발라가며 차곡차곡 떡차롱에 담아 둔다.


    다른 방법은 떡가루를 시루에 쪄서 ‘떡도고리’(함지박)에 비워서 방애기로 열심히 찧는다. 쫀쫀하게 찧은 떡덩이를 양손에 참기름을 발라가며 손으로 밀어서 가래떡처럼 만든 다음, 손날을 세워 위 아래로 움직여 4~5㎝ 정도로 잘라낸다. 잘라낸 떡을 두개씩 포개서 떡본으로 눌러 예쁘게 무늬를 낸 다음 참기름을 발라 완성한다.


    부부의 결합을 상징하는 두쪽 절변  

    절변은 두 개의 반죽을 한 떡본에 넣어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절변을 먹을 때는 주의해야 한다.

    제주 절변
    제주 절변
    제주 절변
    제주 절변

    절변은 상하 두 쪽이 떼어지지 않도록 먹어야 한다. 혹시라도 편의에 따라 졀변을 따로 떼어서 먹으면 부모님이 갈라서게 된다는 속설이 있다. 그래서 어쩌다가 절변이 식으면서 굳어 두 개가 똑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상태로 먹는 모습을 본다면 주위에서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매우 긴장해서 절변을 먹었다고 한다. 이처럼 절변은 부모의 조화로운 결합을 상징하는 음식이다.


    또한, 쌀이 너무 귀했던 정의현(표선)같은 경우에는 반죽을 하나만 해서 외절변을 만들어서 먹었다고 한다. 또 정월 명절에는 절변을 비롯해 흰떡을 썰어서 떡국떡 대용으로 사용했다고도 한다. 부를 과시하는 집안에서는 절변 반죽을 두둑하게 해서 절변을 두껍게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사회활동을 하는 맞벌이 가정이 많아지면서 도시에서는 만들지 않고 따라서 제례상에도 절변을 올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절변 떡본이 없어 만들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럴 때는 떡 제조업소에 특별 주문해서 올린다.

  • 강원도 어린이들의 간식, 댑싸리떡

    강원도는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영서와 영동, 즉 산악지방과 해안지방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자연적인 환경의 차이는 음식으로 연결된다. 산악이나 고원지대에서는 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도토리, 상수리, 칡뿌리, 산채, 나물 등을 중심으로 한 음식들이 발달하고, 해안에는 멸치나 조개 등으로 맛을 낸 음식이 발달했다. 

     

    빗자루부터 약까지 활용도 높은 댑싸리

    댑싸리는 비싸리 혹은 대싸리라고도 부른다. 댑싸리는 일년생 풀로 들이나 산에서 많이 자란다. 길이는 1.5m 내외이고, 줄기는 곧고 단단하다. 꽃은 담녹색으로 7∼8월에 핀다. 꽃이 피고 약 한달쯤 지나면 열매를 맺는데 원반모양이다. 댑싸리 씨앗은 '지부자’라고 불리며 약재로 쓰인다. 주된 약효는 해열과 이뇨작용이다. 그래서 소변을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이나 방광염, 신장염, 요도염에 쓰이고, 임질치료효과도 있다. 여성들에게는 자궁내막염에 쓰인다. 옛날부터 민가에서는 오줌소태로 힘든 사람들에게 좋은 약으로 사용되었다. 


    댑싸리는 활용도가 높은 식물이다. 어린잎은 식용하며 씨앗은 약으로 활용하고, 마른 줄기는 빗자루 로 쓰인다. 이렇게 활용도가 높다 보니 산이나 들에서 많이 자라나기도 하지만 민가에서 키우기도 한다. 늦은 봄 어린잎일 때 나물로 해 먹거나 국거리로 활용했다. 쓴맛이 거의 없어 살짝만 데쳐서 찬물로 한 번 헹구기만 하면 다양하게 음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 명아주와 비슷하게 부럽고 담백하다. 


    댑싸리떡 만드는 법

    댑싸리떡은 강원도의 어린아이들이 배고파 보챌 때 어머니들이 만들어주던 별미음식이다. 댑싸리떡은 멥쌀과 함께 혼합해 쪄서 만든다. 그래서 맵싸리떡이라도고 부른다. 댑싸리떡을 만들 때 멥쌀은 물에 불려 채반에 건져 소금을 넣고 빻아 준비한다. 댑싸리잎은 연하고 어린잎으로 골라 씻어서 10cm 정도로 썬다. 멥쌀가루에 설탕과 엿기름가루를 섞은 다음 체에 곱게 쳐낸다. 곱게 준비된 가루에 댑싸리잎을 넣고 골고루 섞어서 면포 깐 시루에 골고루 펴 쪄내면 맛있는 댑싸리떡이 완성된다.

  •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 오메기떡

    차조의 제주도 방언, 오메기

    오메기떡과 오메기술
    오메기떡과 오메기술

    제주도는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토양이라 내륙에는 물이 부족하다. 그래서 제주도에서는 논벼 대신 제주도 방언으로 ‘산듸’라고 하는 밭벼와 차조, 콩, 감자, 보리, 메밀, 고구마, 팥 등의 밭작물이 주요 작물이다. 쌀이 귀했고, 쌀로 만드는 떡은 명절이나 제사와 같은 큰 행사가 있을 때만 먹는 음식이었다. 일상적으로는 잡곡으로 떡을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차조를 활용한 떡을 만들었다. 제주도에서는 차조를 ‘오메기’라 부른다.


    차조는 가장 오래된 곡물 중에 하나로 좁쌀의 한 종류이다. 좁쌀은 두 종류로 나뉘는데 노란 색깔의 '메조'와 짙은 녹색과 노란색이 혼합된 ‘차조’가 있다. 차조는 단백질과 지방의 함량이 높아 소화흡수율이 높은 곡물이다. 또한, 식이섬유가 풍부하여 변비 예방에도 좋고, 비타민E는 쌀의 5배가 넘고, 비타민B1도 풍부하다. 또한 좁쌀에는 베타글루칸이 풍부하게 들어있어 장내 유익균을 만들어 장을 건강하게 해준다.


    한방에서 차조는 비위가 허한 것을 보하고, 열이 나고 가슴이 답답한 것을 제거해주는 등의 효과가 있다고 했다. 환자에게 차조로 미음을 쒀서 먹이면 기력을 보충하고 신장기능을 원활하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예로부터 차조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랐다. 또한, 장기간 보관해도 해충의 피해가 적고 맛의 변화가 거의 없다. 그래서 장기간 보관해두었다가 흉년에 활용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밥, 죽, 엿, 떡, 과자, 술 등 다양한 음식의 원료로 활용되고 있다. 


    제주도 대표 기념품 오메기떡

    오메기떡
    오메기떡
    오메기떡
    오메기떡

    전통적으로 오메기떡을 만들 때는 ‘흐린 좁쌀’이라고도 부르는 검은색 차조를 사용한다. 반나절 가량 차조를 불린 후, 소금을 첨가하여 곱게 가루를 만든다. 따뜻한 물로 가루를 섞어 치대 익반죽을 만든다. 완성된 반죽은 둥글게 빚어 가운데에 구멍을 내서 도넛과 같은 모양으로 만든 뒤 물에 삶아낸다. 삶는 대신 찜통에 쪄내기도 한다. 고물은 콩이나 팥을 주로 사용한다. 콩고물을 묻히지 않은 떡은 오메기술을 만들 때 밑떡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오메기떡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형태와 재료가 변화했다. 과거에는 구황작물과 같은 차조였지만 점차 가격이 오르자 찹쌀을 섞어 반죽을 만들게 되었다. 또한 짙은 색깔을 위해 쑥이 첨가되면서 반죽이 진한 녹색을 띠게 되었고, 설탕으로 조린 팥소가 들어가면서 모양 역시 동그랗게 변했다. 이렇게 만든 떡의 겉면에는 고물로 팥이나 콩가루 이외에도 최근에는 호박씨, 아몬드, 땅콩과 같은 견과류로 장식하기도 한다. 해서 최근에는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 기념품으로 많이 구매하는 관광상품이 되었다. 오메기떡은 만들자마자 따끈할 때 먹는 게 가장 맛이 좋으며, 서늘한 곳에 밀봉하여 보관하거나 최근에는 냉동으로 장기간 보관하기도 한다.

  • 붉은 빛깔이 곱디 고운 곤떡

    지져먹는 충청도 떡 

    충청도 음식은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다. 양념도 많이 사용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가지고 있는 고유의 맛을 살려 담백하고 구수한 것이 특징이다. 충청도의 떡도 음식과 같이 화려하지 않다. 단순하며, 무나 쑥과 같은 채소를 섞어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의 떡은 치는 떡, 지지는 떡, 찌는 떡, 삶는 떡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곤떡은 그 중 지지는 떡에 속한다. 곤떡은 충청도 지역의 향토음식으로 찰진 찹쌀가루로 익반죽을 만들어 둥글게 빚어 지초를 추출한 기름으로 지져낸 특색 있는 떡이다. 곤떡이라는 이름은 ‘고운 떡’ 혹은 ‘고은 떡’에서 유래되었다. 색과 모양이 특히 곱다 하여 고운 떡, 고은 떡으로 불렸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곤떡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곤떡의 핵심은 바로 지초기름

    곤떡을 만들 때 사용하는 지초기름은 아름다운 붉은 빛이 특징이다. 지초는 산이나 들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지치과의 풀로 온몸에 털이 많이 붙어있다. 지초는 자초(紫草), 자지(紫芝), 지초(芝草)라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초의 뿌리인 자근에는 강한 붉은색을 띠고 있다. 그래서 곤떡과 약식의 착색제로 사용된다. 자근은 식품뿐만 아니라 염료로도 활용된다. 옛날부터 왕이 입는 옷이나 높은 사람의 옷은 자근으로 염색했다. 붉은 색이 높은 권위를 상징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피부에 바르면 창독(瘡毒)이 제거되면서 종물(腫物)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실제로 붉은 옷을 입으면 사람의 혈액순환에 좋아 심장이 약한 사람에게 좋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웃기떡으로 사랑받는 곤떡

    기름에 지초뿌리를 넣고 끓이면 색소가 우러나와 기름 빛이 감자주색이 된다. 이 기름에 찹쌀 반죽으로 빚어놓은 떡을 은은한 불에 지지면 붉은빛이 난다. 말 그대로 ‘고은떡’이 된다. 곤떡은 예쁜 붉은 색 덕분에 웃기떡으로 자주 활용된다. 웃기떡이란 잔칫상에 높게 쌓아올린 고임 떡의 맨 위에 얹히는 장식 떡을 말한다.

  • 좁쌀가루에 고구마를 섞어 만드는 조침떡

    제주도의 구황작물, 고구마 

    제주도 지역은 화산재,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토양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발달했다. 잡곡은 맷돌에 갈아 가루로 만들기에 적합하다. 그래서 제주도의 노동요를 살펴보면 70% 이상이 여성들의 맷돌 작업 등 제분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제주도의 전체 음식 중 부식이나 반찬을 제외한 나머지 음식의 30~40%는 가루 음식이다. 범벅· 수제비·칼국수·보리미숫가루·상용 떡 등이 바로 가루로 만든 음식들이다. 


    고구마는 조선 영조 39년(1763년)에 조엄이 구황작물로 활용할 목적으로 일본에서 들여온 작물이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실질적으로 고구마가 식량으로 대대적으로 재배된 것은 150년이 지난 일제 강점기 때부터이다. 일본인 제주도사(濟州道士)가 신품종 고구마와 재배 기술을 도입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그때부터 고구마가 서귀포에서 구황작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좁쌀가루와 채썬 고구마로 만든 시루떡

    조침떡은 좁쌀 가루에 채를 썬 생고구마를 섞어 팥고물을 층층이 안쳐서 시루에 쪄서 만드는 제주도 지역의 전통떡이다. 제주도의 지역특산물 중 조와 고구마를 활용한 향토색 짙은 떡이다. 좁쌀 중 차조나 흐린 조를 충분히 물에 불린 다음, 소쿠리로 건진다. 여기에 소금을 조금 넣고 빻아서 가루를 만든다. 팥은 깨끗이 씻어 삶은 후, 뜸을 들여서 절구에 소금을 조금 넣고 찧어 포슬포슬하게 준비한다. 고구마는 굵게 채로 썰어 떡가루와 골고루 혼합한다. 시루에 밑을 깔고, 팥고물과 고구마채와 섞은 좁쌀 가루를 3.5-4cm 두께로 한 켜를 놓는다. 


    그 위에 또 한켜를 쌓는다. 이렇게 여러 켜를 쌓은 후 젖은 베보자기를 덮고 찐다. 김이 오르고 난 후부터 15분 정도 더 쪄낸다. 익은 것은 긴 대꼬챙이로 찔러서 확인한다. 찔렀을 때 좁쌀 가루가 묻어나지 않으면 떡이 다 익은 것이다. 고구마 말고도 무나 호박을 이용해서 조침떡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고구마는 좁쌀가루의 고소한 맛과 어우러지는 은근한 단맛이 있어 주로 사용된다. 제주도에서는 시루떡을 ‘침떡’이라고 부른다. 침떡은 곧 찐 떡을 뜻한다. 1970년대 말 현대식 떡류 가공업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쌀로 시루떡을 만들다보니 좁쌀로 만든 시루떡은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

     

    떡을 만들기 위한 곤쌀계  

    육지에선 일반적으로 쌀로 떡을 찌지만, 제주도에서는 좁쌀을 썼다. 제주도에서 하얀 쌀시루떡은 정갈한 고급음식이기 때문에 신에게 올리는 정성스러운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주도 여성들은 마을에서 ‘곤쌀계’를 조직했다. 곤쌀계는 경조사에 쓸 쌀을 모으는 계다. 이렇게 모아도 쌀이 부족한 주민들은 위층에만 쌀가루를 얹고 밑층에는 좁쌀 가루를 쌓아 한 켜에 쌀과 좁쌀이 어우러진 시루떡을 만들어 제상에 올렸다. 따라서 조침떡은 의례용보다는 일상식으로 먹었거나 마을에서 사람들과 함께 나눠 먹기 위한 떡이라고 할 수 있다.  

  • 보릿고개를 버티게 해준 힘, 쑥개떡과 메밀 쑥죽

    보리 등겨로 만든 보리개떡

    흔히 모양새가 이상하거나 얼토당토않은 상황을 보고 “개떡 같다”라고 한다. 분명 음식인데, 이렇게 비속어로까지 사용될 정도라면 분명 사연이 있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전쟁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화되고 먹을 것이 귀해지자 총알을 피해 피난을 온 사람들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뭐라도 해먹어야 했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보리개떡과 쑥개떡이다.  

    보리개떡은 보리쌀로 만든 것이 아니라, 보리쌀을 도정할 때 나오는 보리 등겨를 갈아서 만들었다. 보리쌀이나 쌀은 너무 귀하고 값이 비쌌기에, 그 껍질인 등겨를 박박 갈아서 미지근한 물에 넣고 반죽을 해 먹었던 것이다. 등겨는 원래 돼지나 닭의 사료였는데, 이것으로 떡을 만들어 먹을 생각을 했다니,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보릿고개를 넘기게 해준 쑥개떡

    “한국 전쟁 전후해서는 누구누구 할 것 없이 모다 먹고 살기 힘들었어라. 특히 보리 나오기 전에 식량이 똑 떨어져분께 보릿고개라 했어. 그 전에는 고구마라도 묵고 그러다가 보리 나오는 유월 몇 달 전부터 하루하루 넘기기가 힘들었제. 그때쯤 들판 천지에 쑥이 나는디, 그 시절에는 하도 배고픈께 뭐든 묵어야 할 판에 쑥이 최고여라”

    보릿고개는 작년 수확한 식량이 바닥나고, 올해 곡물은 영글지 않아 먹을 수 없는, 배가 고픈 시기인 5~6월을 지칭한다. 쑥은 3~4월에 나기 시작하여 5~6월이 되면 완전히 성장하기에 보릿고개 때 먹을 수 있었다. 요즈음에야 쑥이 웰빙 식품으로 각광받고 있지만, 전쟁시기와 전쟁직후의 보릿고개 시절에는 먹을 것이 곡물의 등겨와 메밀, 쑥 정도밖에 없었으니 이것들로 뭐든 만들어야 했다. 전분이 될 만한 모든 것을 가루로 갈고, 들판에서 따온 쑥도 갈아 물에 타 반죽을 하여 먹으면 그것이 바로 쑥개떡이다.

    쑥개떡
    쑥개떡


    그림자가 비치는 말간 메밀 쑥죽

    보릿고개의 고마운 식물인 쑥이지만,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처럼 100일 동안 쑥만 먹을 수도 없어 나온 음식이 메밀 쑥죽이다. 사실 메밀도 꽤 귀했지만 메밀 가루가 조금 있으면 죽을 흉내라도 내보고자, 물에 타서 먹었던 것이 메밀 쑥죽이다.  

    “죽을 틉틉하게(텁텁하게) 쑨 것이 아니라 밀가게(맑게) 홀랑홀랑 하니 쒀. 그랗께 쑥죽에 내 그림자가 비친다 해. 얼마나 밀가면(맑으면) 그림자가 다 베이겠어(보이겠어).”

    할머니의 표현을 따라 생각해보면, 사실 이것도 죽이라고 할 수도 없는 형태였을 것이다. 개떡이 떡이라고 하기에도, 떡이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상태이듯 메밀 쑥죽 또한 죽이면서 죽이 아닌 상태의 음식이었다. 요즈음과 같이 음식이 넘치는 시대에는 쉽게 상상이 가지도 않는 음식들이다.  

     

    요즘 개떡은 쌀가루로 만들어

    그런데 전통시장에 가면 아직도 개떡을 팔고 있가. 오늘날 시장과 떡집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개떡은 쌀이나 보리의 등겨 가루가 아닌, 진짜 쌀 가루로 만든다. 여기에 갖가지 재료를 추가한다. 곤드레를 추가하면 곤드레개떡, 보리쌀을 추가하면 보리개떡, 쑥가루를 넣으면 쑥개떡이다. 여기에 참기름이나 꿀을 발라먹으면 담백하고 맛있다.  

    그래서 요즘 개떡을 사먹는 사람들은 이렇게 맛있는 떡의 이름이 왜 개떡인지 모르고, 또 쑥이 얼마나 몸에 좋은 웰빙 식품인지를 떠올리면 옛날 사람들의 보릿고개 음식을 오해할 수도 있다. 오늘날에는 다행스럽게도 맛있는 개떡을 먹지만, 옛날에 개떡은 정말 눈물서린 음식이었다.  

  • 둥그런 보름달을 꼭 닮은 달떡

    보름달 모양을 따서 만든 떡, 달떡

    과거 우리 민족의 가장 대표적인 생업은 농사였다. 이러한 농경생활에서 ‘달’은 중요한 상징성을 가진다. 달은 주기에 따라 그믐달에서 보름달이 되었다가 다시 초승달이 된다. 옛날 사람들은 이러한 달의 모습을 보고 달은 무한히 다시 생겨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달이 생산의 상징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달을 보고 풍농을 기원하고, 소원을 빌었다. 추석이면 달맞이를 했다. 달의 모양을 따서 만든 달떡에도 사람들의 염원이 깃들어 있다.


    달떡은 보름달 모양의 절편으로 크고 밝은 보름달이 어둠을 물리치고 빛을 멀리 비추는 것처럼 달떡을 먹는 사람도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들어있는 떡이다. 멥쌀가루에 뜨거운 물로 익반죽을 해서 둥글게 빚어낸다. 빚어낸 반죽을 끓는 물에 삶는다. 뜨거운 상태로 물을 묻혀서 한번 더 반죽하여 둥근 절편을 만든 후에 떡살을 이용해서 찍어낸다. 달떡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먹는 절편의 한 종류로, 혼례에서 초례상에 올라가거나 회갑연에 사용된다. 의례에서 사용할 때는 떡을 높게 쌓아서 올리기도 한다. 이렇게 떡이나 음식을 쌓아올리는 것을 ‘괸다’고 하는데, 음식을 괴는 이유는 음식이 많아 보이게 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의 바람을 쌓는 것이기도 하다.

     

    메밀로 만들거나 멥쌀로 만들거나 

    달떡은 제주도의 토속음식이다. 쌀이 귀한 지역이다보니 주로 명절이나 제사 때만 쌀을 이용해서 떡을 만들고, 일상적으로는 메밀을 주로 사용한다. 달떡도 메밀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달떡에 대한 기록은 1984년에 발간된 『한국민속종합보고서- 향토음식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록에는 달떡을 “멥쌀가루를 쪄서 절구나 떡판 위에 쳐서 달 모양으로 둥글게 빚어 줄무늬의 떡살을 찍어 참기름을 칠한 떡”이라고 소개한다. 또한, “함경도 지방을 비롯한 평안도 지방에서는 혼례 시 놋동이에 여러 켜 담고 그 위에 꽃을 꽂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제주도 지방의 달떡과 만드는 법에서는 동일하나,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에서는 혼례음식으로 많이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앙증맞고 노오란 호박송편

    추석명절의 상징, 송편

    송편은 추석에 먹는 떡이다. 그해에 추수한 쌀로 빚는다. 올 한해도 무사히 추수를 할 수 있도록 하늘에서 보살펴주신 조상님들에게 좋은 곡식을 올리는 차례상과 묘소에 빠지지 않고 송편이 올라간다. 지역마다 그 들어가는 재료와 모양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이렇듯 명절에 햅쌀과 햇곡식으로 빚은 송편을 ‘올송편(오려송편)’이라고 부른다. 추석 말고 특별하게 송편을 빚는 날이 있었는데 중화절(中和節 ,음력 2월 1일)이다. 중화절은 궁중에서 이제 겨울이 끝나고 새롭게 농사할 수 있는 시기가 왔음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날은 ‘삭일송편’, ‘노비송편’을 만든다. 노비송편은 커다랗게 빚고, 노비들에게 나이 수만큼 주었다. 이러한 의식은 농사를 시작하기 전, 노비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호박이 들어간, 호박과 닮은 송편

    충청도 지역은 서해안을 인접하고 있는 충청남도와 소백산맥의 끝에 위치한 충청북도로 구성된다. 서해안의 다양한 해산물과 많은 구릉지에서 풍성하게 나는 밭작물로 만든 충청도 음식은 순하고 꾸밈이 없지만 넉넉하고 담백한 것이 특징이다. 떡도 유사하게 화려하지 않지만 무, 쑥과 같은 채소를 섞는 것이 특징이다. 다양한 채소가 들어간 떡이 특징인 충청도에서는 송편에도 호박이 사용된다. 해서 호박송편이라고 부르는데 그 모양도 호박과 똑같이 만든다.


    우리에게 익숙한 작물이지만 사실 호박은 토종작물은 아니다. 호박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에 대해서는 고추와 함께 임진왜란 이후 들어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시아 남부 지역을 거쳐서 당나라를 통해 들어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지만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호박은 구수하고 은근한 단맛으로 많은 요리에 활용되고 있으며 소화가 잘되어 속을 편안하게 해준다. 또한 영양가가 높아서 환자의 회복식이나 임산부의 보양식으로 많이 활용된다. 당뇨나 비만에도 좋고, 부기를 빼는 데 좋은 음식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앙증맞은 모양의 노란 송편

    호박송편은 썰어 말렸던 가을 호박을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사용하거나 찐 호박을 으깨어 멥쌀가루와 섞어서 반죽을 만들기도 한다. 소는 볶은 통깨나 대추로 만들고, 반죽에 소를 넣어 호박모양으로 빚는다. 빚은 송편을 찜통에 쪄내면 완성되는데 호박의 달고 구수한 맛도 일품이지만 호박 특유의 선명한 노란색과 앙증맞은 모양이 단연 돋보이는 떡이다. 또한 섬유질과 카로틴(carotene)이 다량 함유된 호박으로 만들어 영양가가 높아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떡이다.

    호박송편
    호박송편

  • 삘기를 넣어 쫄깃한 삐삐떡(삘기송편)

    우리나라 추석명절의 상징, 송편

    대한민국에 살면서 송편을 모르기는 쉽지 않다. 송편은 우리나라 명절 중 추석을 대표하는 떡이다. 송편은 그 해에 추수한 쌀로 빚는 떡이다. 송편은 올 한해도 무사히 추수를 할 수 있도록 하늘에서 보살펴주신 조상님들에게 좋은 곡식으로 만들어 올리는 음식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송편은 서울 경기권의 송편이다. 송편은 지역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조상님에게 올리는 음식에는 정성을 들여야 한다. 그래서 송편을 단정하고 예쁘게 빚는 것에 대한 속설이 많다. 예쁘게 빚으면 시집 안 간 처녀는 좋은 남편감을 만나고, 결혼한 여자는 예쁜 딸을 낳는다고 전해진다. 또, 임산부가 완성된 송편을 깨물었을 때 덜익은 송편을 고르면 딸을, 잘 익은 송편을 고르면 아들을 낳는다고 믿었다. 

     

    전라도 음식문화의 특징

    전라도는 기름진 호남평야, 내포평야, 장흥평야, 군동평야 등이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이다. ‘호남에 가뭄이 들면 온 나라가 굶어죽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또한, 동북부의 고원지대에 다양한 밭작물과 채소의 재배가 활발하다. 이렇듯 전라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먹거리가 풍부하기에 음식문화 역시 발달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인 추석에 먹는 송편에서도 전라도의 특징이 나타난다. 전라도의 송편은 삐삐떡, 혹은 삘기송편이라고 한다. 삘기, 삐삐는 송편에 들어가는 재료 이름이다.  

     

    옛날 어린이들 자연 간식, 삘기

    삘기는 초가집과 같은 지붕을 만들 때 볏짚처럼 사용하는 띠의 어린 싹이다. 띠는 벼과의 여러해살이 식물로 우리나라 어디서든 들이나 산기슭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띠는 고려시대에는 모향(茅香)·치각유(置角有)라고 불렸고, 조선시대에는 백모향(白茅香)이라고 하였다. 띠에는 하얀 꽃이 핀다. 이 꽃 때문에 생긴 이름이 아닐까 싶다. 


    띠의 어린 새순은 삘기라고도 부르지만 지역에 따라 ‘삐비’, “삐삐”라고도 부른다. 삘기는 많은 어른들에게 추억이다. 지금보다 5, 60년 전만 해도 과자, 사탕과 같은 간식이 부족했다. 그럴 때 삘기는 정말 좋은 대체식품이었다. 띠의 새순인 삘기를 뽑으면 흰 부분이 나타난다. 흰 부분은 씹으면 달큰한 맛이 나고, 질겅질겅한 식감이라 껌처럼 씹을 수 있다. 그래서 옛날 어린이들, 즉 지금의 어르신들이 산과 들에서 쏙쏙 뽑아먹는 사랑받는 간식거리였다. 

     

    삘기가 들어가 쫄깃한 송편, 삐삐떡

    삘기를 송편에 넣을 때에는 삘기를 훑어 절구에 넣고 찧는다. 찧은 삘기를 멥쌀과 혼합하여 가루를 만든다. 곱게 만든 가루는 따뜻한 물을 넣어 익반죽을 만든다. 익반죽으로 피를 만들고 설탕, 소금, 참깨, 물 등을 섞어 만든 참깨소를 넣어 송편을 완성한다. 이렇게 완성된 송편이 전라도의 삘기송편, 즉 삐삐떡이다. 삐삐떡은 삘기로 인해 일반송편보다도 더 찰지고 쫄깃한 식감이 큰 특징이다.

  • 고급스러운 영양간식, 잣구리

    경상도의 떡, 잣구리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남북으로 길게 뻗은 지형적인 특싱과 뚜렷한 사계절의 구분으로 지역적으로 기후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이다. 따라서 각 지역마다 지역의 특산물을 활용하여 다양한 음식들이 발달해 있다. 떡에도 지역적인 특징이 나타난다. 그중 경상도에서는 주요 특산물인 감이나 밤을 활용한 떡이 많다. '잣구리'도 그 중 하나다. 잣구리는 상주와 문경에서 만드는 떡으로, 밤을 소를 만들어 넣고, 누에고치 모양으로 빚어 잣가루를 묻혀서 만든다.  

     

    잣구리 재료인 밤과 잣의 효능

    소에 들어가는 밤은 “장과 위를 든든하게 하여 신기를 보하고 배고프지 않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의학에서는 식욕이 떨어진 아이 혹은 위장이나 신장이 허약한 사람에게 회복하기위한 보양식으로 밤을 처방하기도 한다. 밤은 두꺼운 껍질과 전분 성분이 영양분을 보호하고 있어 가열해도 영양손실이 적어 겨울철에도 영양 간식으로 많이 활용된다. 고물로 묻히는 잣은 옛날부터 신선의 식품으로 불로장색의 열매로 알려져 있다. 잣은 고칼로리에다 비타민B와 철분이 풍부하여 빈혈에 효과적이다. 또한 리놀레산, 올레산 등의 불포화지방산 함량이 높아 피부를 윤기나게 해주며 탄력성을 높인다. 혈압을 내려주고 스테미너에도 도움을 준다고 한다. 밤과 잣의 효능으로 보아 잣구리는 보양식으로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잣구리 만드는 법과 응용

    잣구리는 찹쌀가루에 뜨거운 물을 넣어 익반죽을 한 후 밤으로 만든 소를 넣고 누에고치모양으로 빚어서 끓는 물에 삶고 잣가루를 고물로 묻혀주는 고급스러운 떡이다. 밤소를 만드는 법은 껍질을 벗겨 삶은 밤을 으깨서 체에 내린다. 체에 내린 밤에 꿀과 계핏가루를 넣어 혼합한다. 소는 대추만한 크기로 만들어 익반죽에 싼다. 고명으로 쓰는 잣가루는 잣의 고깔에 붙은 껍질을 일일이 떼어낸 후에 곱게 갈아서 준비한다. 잣구리와 똑같은 모양이지만 밤소 대신에 깨를 빻아서 꿀에 갠 것을 사용하고, 깨고물을 묻힌 경우에는 “깨구리”라고 부른다.

  • 구수한 된장의 향을 품을 장떡

    삼국시대부터 장을 빚은 민족

    우리나라의 기본 조미료는 “장”이다. "음식 맛은 장맛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장맛은 중요하다. 가정에서는 음식을 하기 위한 필수 재료였고, 장이 음식의 맛을 좌지우지했다. 우리나라에서 장을 만들어온 역사는 굉장히 오래되었다. 장의 주요 재료인 콩은 원시시대부터 재배되었던 작물이다. 덕흥리 고구려벽화무덤의 묘지명에 큰 공사로 집단 노동을 진행할 때면 사람들에게 흰쌀밥에 고기를 먹이면서 술과 장도 한 창고분이나 먹었다고 되어있다. 우리 민족은 장을 잘 빚는 것으로 유명했다. 중국의 『삼국지 위지동이전』 기록에는 “고구려인은 장 담그고 술 빚는 솜씨가 훌륭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의 기본재료가 되는 메주가 문헌에 가장 처음 나온 것은 『삼국사기』이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 신문왕 3년, 왕이 왕비를 맞이할 때 보낸 예물 중 '시(豉)'가 있는데, 이 '시(豉)'가 바로 메주를 의미한다. 


    장의 원료가 되는 콩 

    사실 장은 원래 간장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의미가 점점 넓어져 된장, 청국장, 막장, 고추장을 아우르는 명칭이 되었다. 장은 선조들의 지혜와 풍부한 경험을 밑바탕하고, 끊임없이 발전하는 음식가공 기술까지 더해져 날이 갈수록 그 종류가 늘어나고 맛도 또한 풍부해지고 있다. 장의 주요 재료는 바로 콩이다. 콩은 각광받는 뛰어난 건강식품이다. 콩의 주요 건강 효과에는 골밀도 증강, 급격한 혈당상승 억제, 유방암 발병률 감소, 당뇨병 예방, 체중감소 등이 있다. 또한 콩 속의 사포닌 성분이 비만 체질을 개선하고, 레시틴 성분은 치매예방에도 효과적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콩은 찬 성질을 가지고 있어  설사를 자주 하거나 소화기관이 연약한 사람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식은 후에 먹어야 더 맛있는 장떡

    이러한 장을 혼합해서 만드는 떡이 바로 장떡이다. 지역에 따라 방식이 조금씩 다르지만 전국적으로 많이 먹는 향토음식이다. 지역과 가정에 따라 장떡을 고추장을 활용하기도 하는데 그 경우에는 ‘고추장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된장을 이용한 장떡이다. 장떡은 간단하게 조리할 수 있는 영양가가 높은 음식이다. 장떡은 과거부터 막 만들어진 따뜻한 상태보다는 식었을 때 더 쫄깃한 식감이 있어 도시락 반찬으로 각광받았다. 과거에도 여행다닐 때 행찬(行饌)으로 많이 먹던 음식이다. 흔히 ‘장땡이’라고도 부르기도 했다. 장떡은 보통 찹쌀가루나 밀가루에 된장을 섞은 반죽을 다양한 부재료를 넣고 지져서 만든다.

     

    지역별 장떡의 특징 

    충청남도 지방에서 즐겨먹는 장떡은 마늘과 다진 파를 넣은 된장과 찹쌀가루, 고춧가루를 넣어 반죽을 만든다. 둥글게 빚은 반죽은 살짝 햇빛에 건조시킨다. 건조시킨 장떡을 30분간 찜통에서 찐 후에 형태를 손으로 예쁘게 다듬는다. 다음은 장떡을 햇빛에 다시한번 건조시킨 다음에 약 2-3mm 두께로 썰어 넉넉히 기름을 둘러 지져 먹는다. 경상남도 지방에서 즐겨먹는 장떡은 방아잎과 들깻잎을 깨끗하게 씻어 다듬은 후, 물기를 제거하여 곱게 다진다. 두부는 마른 행주에 넣고 꾹 짜서 물기를 빼고 곱게 으깬다. 곱게 다진 방아잎과 들깻잎, 으깬 두부에 된장과 밀가루를 섞어 반죽을 만든다. 동그랗게 반죽을 떠서 기름을 넉넉히 두른 프라이팬에 먹음직스럽게 지져낸다. 경상남도의 장떡은 방아잎의 향기로 더욱 짙은 향의 장떡이기도 하지만 두부와 된장을 함께 섭취하여 성인병 예방에도 효과적이다.

  • 누워서 먹기 어려운 떡, 부꾸미

    우리나라의 주식은 쌀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하는 식사에 가장 기본은 쌀로 만들어진 ‘밥’이기 때문이다. “밥 위에 떡”이라는 말도 있듯이 주식인 쌀을 활용한 가장 대표적이고 전통적인 별식은 떡이라고 생각한다. “밥 위에 떡”은 좋은 일에 더욱 좋은 일이 겹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떡이 나타난 시기를 오래 되어 많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수수부꾸미
    수수부꾸미

    우리가 현재 생활 속에서 먹고 있는 떡의 모습은 조선시대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농사법의 발전으로 농산물의 생산량이 늘어나게 되었다. 농산물이 풍요로워지면서 다양한 조리가공법이 생겨나게 되었고 떡 역시 그런 결과물 중에 하나이다.

     

    소가 들어가는 유전병 

    정선 수수부꾸미
    정선 수수부꾸미


    부꾸미는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1943)에서 처음 찾아볼 수 있다. 첫 기록에는 ‘북꾀미’라고 쓰여있다. 우리가 현재 부르고 있는 부꾸미라는 표현은 그 이후 『우리나라 음식 만드는 법』(1958)년에서 처음 등장한다. 부꾸미를 만드는 방법은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기록되어 있기를 ‘차전병 만드는 방법대로 만들어서 거피팥에 꿀과 계핏가루를 볶아서 계피떡과 같이 소를 넣고 반달처럼 떠서 꿀을 찍어서 먹는다.’고 한다.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부꾸미는 화전이나 주악과 같이 기름에 지져서 만드는 떡인 유전병(油煎餠)의 하나이지만, 화전이나 주악과 가장 큰 차이이자 부꾸미의 특징은 계피를 섞은 팥 혹은 견과류가 소에 들어간다는 점이다. 이러한 유전병은 주로 잔칫상에 떡을 높이 쌓아올리는(음식을 높이 쌓는 것은 괸다고도 표현한다.) 웃기떡으로 많이 사용되는데 부꾸미는 잔치와 상관없이 집에서도 많이 해먹는다는 것도 역시 특징이다.


    재료와 소가 다양해진 부꾸미

    북꾀미가 부꾸미로 기록되기 시작한 『우리나라 음식 만드는 법』에는 부꾸미를 만드는 재료와 그 안에 들어가는 소가 다양하게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반죽을 만드는 주재료는 찹쌀가루와 차수수가루, 밀가루, 녹말가루를 사용하고, 소에는 계핏가루·밤·팥·설탕·꿀 등을 넣거나 고기나 나물을 볶아서 넣는다고 전한다. 고기는 주로 소고기를 채썰어 볶은 것이 들어가고, 나물은 계절에 따라 다른데 여름에는 오이나 애호박을 꼭 짜서 볶은 것을 사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고기와 나물을 넣어서 만드는 부꾸미는 찾아보기 힘들다.


    부꾸미는 재료에 따라 이름이 붙는다. 찹쌀가루만 들어가면 찰부꾸미, 수수가루가 들어가면 수수부꾸미라고 부른다. 최근에는 지역에 따라 생산되는 농산물을 활용하여 호박부꾸미, 옥수수부꾸미, 결명자부꾸미, 칡부꾸미 등 그 종류가 훨씬 다양해지고 있다. 부꾸미는 전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별식이지만 주로 경기도의 전통떡으로 알려져 있다. 모양도 간단하고, 색도 자연스러워 누구나 쉽게 접해볼 수 있는 떡이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하고 달콤한 소가 들어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다. 

    수수부꾸미
    수수부꾸미

    한 김 식혀 먹으면 더 맛있는 부꾸미

    속담에 “누워서 떡 먹기”라는 속담이 있다. 너무나 쉬운 일을 표현하는 말이지만 사실 실제로 해보면 누워서 떡을 먹는 것은 생각보다 많이 어려운 일이다. 인절미의 경우에도 가루 때문에 기침이 나오는 경우가 많고, 시루떡 역시 팥고물이 떨어지기 때문에 누워서 먹기 어렵다. 그중 가장 어려운 떡은 단연 부꾸미가 아닐까 한다.


    부꾸미는 기름에 지져서 만들기 때문에 일단 다른 떡에 비해 뜨겁다. 거기에 찹쌀가루가 들어있는 찰떡이기 때문에 손으로 잡을 경우 손에 붙는다. 이러니 손을 데기 쉽다. 거기다 뜨거운 부꾸미를 바로 먹으면 안에 뜨거운 팥소와 찰떡으로 인해 입천장을 델 수 있다. 부꾸미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타이밍은 바로 지지고 난 후에 한 김 식은 후이다. 살짝 식은 상태여야 찹쌀의 쫄깃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 부산 포장마차의 별미, 물떡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긴 가래떡

    부산 물떡과 오뎅
    부산 물떡과 오뎅

    예전에 시장 나들이라도 하게 되는 날에는 방앗간 앞에 발걸음을 멈추기 마련이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떡을 보면 군침을 꿀꺽 삼키고는 했다. 저마다 다채로운 색깔을 뽐내는 떡 중에서 가장 탐이 났던 것은 다름 아닌 가래떡. 오로지 멥쌀가루로만 만들기에, 가장 기본이 되는 떡이었으면서도 가장 다양하게 요리해 먹을 수 있던 떡이었다. 갓 뽑은 가래떡을 꿀에 찍어 먹으면 문자 그대로 ‘꿀맛’이었고, 식었다 싶으면 겉이 살짝 타 고소한 냄새가 날 때까지 은은한 화롯불에 구워 먹었다. 티 한 점 없는 깨끗한 백색에 국수처럼 길게 뽑힌 가래떡은 무병장수를 뜻해 잔칫상에 빠지지 않고 올린 음식이자, 새해 음식으로서 이 땅에 살아온 사람들과 깊은 연을 맺고 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11월 11일을 두고 ‘가래떡 데이’로 기념할 정도로 계속해서 사랑받는 떡이다. 


    떡과 국물의 조합, 물떡

    부산 물떡과 오뎅
    부산 물떡과 오뎅
    부산 물떡과 오뎅
    부산 물떡과 오뎅

    사실 가래떡은 아주 일상적인 음식이다. 떡국, 떡볶이, 떡라면, 부대찌개, 김치찌개 등에도 빠지지 않고 들어가며, 입이 심심할 때에는 예전의 추억을 되살려 오븐에 살짝 구워 꿀을 찍어 먹는 간식거리이기도 하다. 가래떡의 변신은 무궁무진한데, 심지어 오뎅 국물에 말아 먹는 문화도 있다. 부산에서는 이를 두고 ‘물떡’, 혹은 ‘떡오뎅’이라고 부르는데, 가래떡을 어묵처럼 기다란 꼬챙이에 꿰어 오뎅국물에 끓여낸 독특한 음식이다. 

     

    학교를 마치고 학원 가는 길에, 혹은 일터에서 퇴근길에 들러 간식 한점 먹게 되는 포장마차에는 언제나 우리를 반기는 메뉴가 있으니, 바로 떡볶이와 오뎅이다. 매운맛 맛을 원한다면 떡볶이를, 국물을 원한다면 오뎅을 먹으라지만 사실 제일 좋은 선택은 둘 다 먹는 것이다. 어느 한쪽을 놓치기엔 너무 아쉽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을 알았을까, 부산에서는 둘의 조합을 기가 막히게 탄생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부산의 포장마차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물떡이다. 

     

    매운 맛을 못먹는 일본인 관광객을 위해 개발한 음식

    부산 시장 음식 가판
    부산 시장 음식 가판

    가래떡을 오뎅국물에 담궜다가 먹는게 뭐 그리 특별하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반대로 그렇게나 간단한데 왜 다른 지역의 포장마차에서는 물떡을 팔지 않느냐고 반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떡의 유래는 매운 맛을 잘 먹지 못하는 일본인 관광객들을 위해 고안해 낸 음식이라고 한다. 일본과 가까운 부산에는 많은 관광객이 오고, 부산의 길거리 음식을 시도해보는데, 고추장이 매워서 떡볶이를 잘 먹지 못하는 일본인들이 많았다. 이에 일본 관광객들에게 가래떡을 먹일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물떡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오뎅국물의 짭조름한 간이 떡에 배이고, 반대로 가래떡의 전분이 오뎅 국물에 퍼지며 독특한 맛을 만들어낸다. 

     

    떡의 탄력성을 높이는 기술

    부산 물떡과 오뎅
    부산 물떡과 오뎅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시간이다. 떡을 너무 오랫동안 국물에 담가 놓으면 떡이 다 풀어져서 탄력을 모두 잃고 퍼진다. 반대로 떡을 다 꺼내놓으면 표면이 말라 딱딱해진다. 포장마차에서 주인장의 손놀림을 유심히 보면 시간에 따라 떡이 불지 않을 정도로 국물에 넣어두었다가, 다시 꺼내 살짝 말리기를 반복해서 물떡 고유의 오묘한 탄력감을 잘 유지시키는 기술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풀어지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그 중간의 식감이야말로 물떡 장인들의 기술이니, 생각만큼 쉽지는 않은 것이다. 물떡을 파는 포장마차의 또 다른 별미는 바로 국물에 있다. 떡을 넣고 끓이면서 나오는 전분이 국물 맛을 더욱 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마치 라면국물이 먹고 싶을 때 라면스프만 넣고 끓이면 그 맛이 안나는 것처럼, 물떡의 전분은 부산 포장마차들의 비밀재료인 셈이다. 

  • 찹쌀떡의 건강한 맛을 한결같이 지켜온 대구 자인방앗간

    대구광역시 달서시장에 위치한 자인방앗간

    대구 자인방앗간 외부
    대구 자인방앗간 외부

    대구광역시 달서구 본리동에는 ‘자인방앗간’이라는 떡집이 있다. 자인방앗간은 달서시장 내부에 자리하고 있다. 달서시장은 달서종합상가 1차와 2차가 합쳐진 상가건물형 시장이다. 신선한 농산물을 비롯해 건어물, 반찬가게, 식당 등 다양한 품목을 취급하고 있다. 특히 여성 의류를 파는 점포가 많은 것이 특징적이다. 상점 간의 간격이 넓고 내부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 쾌적한 쇼핑 환경을 갖추고 있다. 시장 입구에 공영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어 주차가 편리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대구 지하철 1호선 서부정류장역이나 2호선 죽전역과 가깝다. ‘함께 미소를 나누는’ 달서시장을 구경하며 자인방앗간에 찾아가보자.

     

    건강한 먹거리로 고객 사랑을 실천한 찹쌀떡의 달인, 

    자인방앗간 박재홍 대표

    대구 자인방앗간 현판
    대구 자인방앗간 현판

    자인방앗간은 1985년 ‘자인상회’라는 상호로 시작되었다. 현재의 대표 박재홍 씨의 부모님이 개업하여 25년간 운영하였다. 박재홍 씨의 부모님은 손님을 가족처럼 사랑하고 건강한 맛을 선사하려는 선한 마음을 항상 잃지 않았다. 흔히 이야기하는 웰빙 재료, 즉 신선하고 질 좋은 재료를 사용해 떡을 만들어왔던 것이다. 오랜 세월 한결같은 정성으로 만들어진 자인상회의 떡은 달서시장의 명물이었다. 이후 2010년 박재홍 씨가 가게를 이어받았고, 2020년 ‘백년가게’로 선정되었다. 백년가게는 30년 이상 유지해오며 고객 사랑을 꾸준히 받아온 가게를 이른다. 또한 TV 유명 프로그램과 각종 매체에도 소개되어 명실공히 ‘찹쌀떡 달인’으로 인정받았다. 박재홍 씨와 부모님의 정성과 노력, 고객에 대한 애정이 만들어낸 결과물일 것이다.

     

    달지 않고 고소한 팥소의 맛이 일품인 자인방앗간 수제 찹쌀떡

    대구 자인방앗간 떡
    대구 자인방앗간 떡
    대구 자인방앗간 떡
    대구 자인방앗간 떡

    자인방앗간의 인기 메뉴는 단연 수제 찹쌀떡이다. 쫄깃한 떡의 식감과 함께 가득 들어있는 팥소의 맛이 일품이다. 팥소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과정을 거친다. 생강과 검은깨를 깔고 그 위에 껍질을 벗긴 도토리를 올린 후 쪄낸다. 찐 도토리를 절구에 넣고 빻은 뒤 물을 넣고 끓인다. 도토리 끓인 물을 채에 걸러 남은 물로 통팥을 삶는다. 삶은 팥에 직접 빻은 호두와 땅콩을 섞고 하룻동안 숙성시킨다. 이렇게 만든 팥소는 과하게 달지 않고 견과류를 넣어 고소하다. 이러한 방식은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이다. 


    배운대로 한결같이 유지해오며 정성껏 찹쌀떡을 만들고 있다. 방부제와 첨가제를 넣지 않기 때문에 유통기한은 당일 하루뿐이다. 하루를 지키지 못한다면 급속 냉동한 뒤 자연 해동해서 섭취하기를 권장한다. 냉동해 놓은 아이스 찹쌀떡도 판매하고 있다. 기본 찹쌀떡을 비롯해 쑥 찹쌀떡, 카스테라 찹쌀떡, 흑임자 찹쌀떡 등 다양한 종류의 찹쌀떡이 있다. 물론 영양떡, 약식 등 다른 떡들도 판매하고 있다. 우직하게 달서시장의 한켠을 지키며 맛 좋은 찹쌀떡을 만들어 온 박재홍 씨의 노력과 정성에 찬사를 보낸다. 달서시장의 푸근한 정을 느끼며 자인방앗간의 쫄깃하고 건강한 맛도 함께 즐겨보자.

  • 구황식품에서 향토별미음식이 된 강원도의 ‘감자송편’

    전통떡인 송편은 지역별로 달라

    우리 전통떡 중 하나인 송편은 멥쌀가루 혹은 토란가루를 익반죽하여 반달모양으로 빚은 후 소를 채워 넣어 찐 떡이다. 찐떡[增便]의 일종으로, 송편의 재료와 크기 등이 지역별로 차이가 난다. 이월 초하루에는 나이수 대로 송편을 만들어 먹었는데, 이 떡을 ‘송병(松餠)’이라 했고, 팔월 추석에는 아직 수확 철이 아니므로, 이른 벼를 심어 그것으로 송편을 빚었다.


    다른 쌀과 달리 일찍 수확하는 벼라 하여 ‘오려[이른벼]’라 부르며, 오려로 빚었다고 하여 ’오려송편’이라 불렀다. 내륙 지역에서는 햅쌀을 사용했지만, 도서지역에서는 쌀이 부족해 보리로 송편을 빚었다. 남쪽으로 갈수록 송편의 크기가 작고, 북쪽으로 갈수록 큰데, 경기도 이북 지역의 송편은 만두와 맞먹을 정도로 크다. 강원도에서는 쌀, 보리가 아닌 감자 전분을 이용해 송편을 빚는다. 


    감자를 삭힌 전분가루로 빚어 먹던 구황작물, ‘감자송편[감자떡]’

    강원도에서는 추석이 되어도 쌀을 수확할 수 없었다. 산이 높고 깊어 농지도 부족해 오려도 구하기 어려웠다. 1820년대에 북쪽에서 한반도로 종자가 들어온 감자는 1890년대에 이르면 강원도까지 보급되었다. 강원도는 산간지대가 드넓어 전국에서 35.9%의 감자를 생산하는 전국 최고의 감자 주산지가 되었다. 


    감자전분만을 넣어 떡을 만들면 떡이 질기지만, 전분과 감자 비지를 섞어 넣으면 쫀득하면서도 서걱서걱한 감자의 식감을 느낄 수 있고, 독특한 향도 지니게 된다. 감자를 갈아서 내린 전분과 감자 비지를 함께 넣어 반죽을 해 송편을 빚었다. 송편 안의 소는 콩, 팥, 깨 등을 넣었다. 감자반죽은 거칠어 곱게 빚어지지 않았기에 주먹으로 꼭 쥐어 ‘주먹송편’ 혹은 모양이 좋지 않다하여 ‘머슴송편’이라 불렀다.

    구황식품에서 향토별미음식이 된 강원도의 감자송편
    구황식품에서 향토별미음식이 된 강원도의 감자송편

    ‘썩힌 감자가 맛있다’

    강원도에서는 흔히 ‘썩힌 감자가 맛있다.’라고 한다. 썩은 감자의 맛과 향은 언 감자와 매우 유사한데, 두 종류의 감자 모두 특별한 향을 지닌다. 이 향과 맛이 약간의 중독성을 띤다. 삭힌 홍어와 마찬가지로 삭힌 감자의 아릿하면서 큼큼한 향에 중독되면 빠져나오기가 어렵다. 감자 생산량이 많은 강원도에서는 보관해 둔 감자가 얼기도 하고, 썩기도 하면서 자연스레 썩은 감자가 되었다.


    언 감자나 썩은 감자가 없다면 감자를 갈아서 상온에 놓아서 삭히면 된다. 갈색으로 변하면서 삭힌 감자 특유의 향이 발생하는데, 오래 둘수록 색과 향이 강해진다. 강원의 맛은 썩힌 감자로 만든 감자송편이다. 관광객과 인터넷 주문이 늘면서 강원도의 삭힌 감자 맛을 경험하지 않은 이들이 맛이 없다고 하여 지금은 감자를 갈아서 곧장 송편을 빚는다. 삭힌 맛과 향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쪄내면 투명해지는 감자송편 

    감자전분으로 만든 감자송편을 빚어두면 밀가루와 같이 불투명하다. 홍천지역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감자송편을 찐다. 물을 넣고 반죽한 전분 가루를 엄지손가락 보다 조금 크게 떼어낸 후 엄지손가락 끝으로 눌러 둥글게 만든다. 그것에 팥소나 콩소 등을 넣은 후 뭉친다. 손가락과 손바닥 사이에 놓고 움켜쥐면 송편이 완성된다. 떡을 찔때는 솔잎을 켜켜로 넣는데, 떡이 쉬지 않고, 솔향도 나서 먹기에도 좋다. 지역특산물 가공이 본격화되면서 감자송편은 ‘감자떡’ 혹은 ‘감자송편’이라 불리며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다. 홍천군의 ‘강원토종감자떡’, 영월군의 ‘감자떡마을’, ‘영월마루감자떡’, 춘천시의 ‘대관령감자떡’, 원주시의 ‘강원도감시기감자떡’, ‘감자바우감자떡’, 정선의 ‘아라리 감자송편’ 등등이 시판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