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방 현재 식용하는 다양한 천연 식재료와 그것들로 만든 음식은 짧게는 수백 년에서 길게는 수천 년 이상의 역사를 거치면서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인류의 조상은 최초 수렵과 채집을 통해 식생활을 영위하다가, 이른바 ‘신석기혁명’으로 알려진 농경과 사육을 시작하면서 주된 식량인 곡식과 채소, 육류 등을 인공적으로 조달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독 바다나 하천 등지에서 나는 수산물은 물에서 식생(植生)하는 관계로 지금과 같은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양식을 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바다나 하천 등지에서 나는 수산물은 그물ㆍ낚시ㆍ포획ㆍ채집 등의 어로(漁撈)작업에 의존하여 획득할 수밖에 없었다.
고대로부터 우리 조상이 어로를 통해 식품으로 이용한 수산물 중 특기할만한 것을 꼽자면 고래고기를 들 수 있다. 고래는 바다에 사는 생물이지만 어류가 아닌 포유류이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 가운데 가장 큰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고래 식용의 역사는 매우 오래된 것이어서 신석기시대의 패총에서도 그 유적이 확인된다. 기원전 6,000~2,000년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 부산광역시 영도구의 동삼동패총(東三洞貝塚)에서는 각종 조개류와 생선뼈 및 고래뼈가 출토된 바 있다. 이미 신석기시대에 고래를 식용하였으며 그 식용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지역이 바로 울산광역시라 할 수 있다.
울산광역시가 고래의 고장이라 할 수 있는 것은 1995년 국보 제285호로 지정된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의 ‘울주 대곡리 반구대암각화(蔚州大谷里盤龜臺巖刻畵)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71년에 발견된 반구대암각화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암각화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약 300여 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중에 여러 종류의 고래와 고래잡이를 하는 그림이 새겨져 있어 지구상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래잡이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2009년 울산항 도로공사 현장에서 출토된 신석기 유물 가운데 동물의 뼈로 만든 화살촉이 박힌 고래뼈가 발견됨으로써, 반구대암각화의 고래잡이 그림이 상상화가 아닌 실제 신석기시대 울산지역에 살던 원주민들의 일상이었음을 확증한 바 있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고래는 총 39속 101종이 알려져 있다. 고래는 입에 이빨이 있는 이빨고래 류와 이빨 대신 입에 수염을 가지고 있는 수염고래 류로 크게 나뉜다. 수염고래무리에는 밍크고래ㆍ수염고래ㆍ흰수염고래가 있고, 이빨고래무리에는 향고래와 오리부리고래 등이 있다. 우리나라 연안에 회유하는 고래 종류로는 수염고래ㆍ흰수염고래ㆍ풀고래ㆍ혹등고래ㆍ참고래ㆍ귀신고래ㆍ향유고래ㆍ돌고래ㆍ밍크고래ㆍ곱등이 등 10여 종류이다. 그중에서 밍크고래는 우리나라 근해 및 울산 앞바다에서 포획되는 대표적인 고래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울산이 근대적인 포경업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것은 구한말 때부터이다. 1891년 당시 러시아 황태자였던 니콜라이 2세가 장생포에 태평양어업 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이 시초였다. 러일전쟁 이후에는 해방될 때까지 일본이 포경업을 독점하였다. 그 당시 일본과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열강들이 우리 해역에서의 고래 남획이 지나쳐서 국가에서 제재하기도 하였다.
『고종실록』 1889년(고종 26) 10월 20일 기사에는 당시 조선과 일본은 지금의 어업협정에 해당하는 ‘통어장정(通漁章程)’을 체결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기록 가운데 조문 제4조에는 “양국 어선은 어업 허가증을 수령한 배라 하더라도 특별 허가를 받지 않고서는 양국의 해변 3리 이내에서 암수 고래를 잡을 수 없다(兩國漁船 雖領有漁業准單者 非得特准 則不准於兩國海濱三里以內捕獲鯨鯢).”는 규정을 명시하고 있다. 그 당시에 해리(海里) 계산법을 어떻게 적용하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현재의 미터법으로 환산한 길이를 적용하더라도 양국 해안으로부터 5㎞ 이내에서의 불법조업을 금지한 것이다. 실제로 우리 어선이 일본 연안까지 조업을 나가지는 않았으니 우리 연안에서 일본의 불법남획 방지를 염두에 둔 협정이었을 것이다. 예전에 울산 장생포항에는 한 달에 천여 마리의 고래가 반입될 정도였다고 하니 그만큼 우리나라 연안에는 고래자원이 풍부하였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해방 후에 울산은 근해 포경업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고래고기 음식점도 1970년대를 정점으로 호황을 누렸으나,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에서 상업포경 금지를 결정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연근해에서의 고래잡이가 중단되었고, 울산의 경기는 물론 장생포를 중심으로 성행하였던 고래고기 음식점도 퇴조하였다. 원래 고래고기는 울산을 비롯한 포항, 부산 등 경상도 동남부 연안지방 서민들의 소중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고래고기는 이른바 ‘바다의 소고기’라 할 정도로 맛과 영양가에서 육지의 소고기에 뒤지지 않으면서도, 그 잡히는 양이 풍부하여 소고기나 돼지고기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영양을 보충할 수 있었다. 현재 고래고기는 상업적인 포경이 금지된 이후로 매우 ‘귀하신 몸’으로 대접받고 있다. 요즘은 연안에 설치한 그물에 걸려 혼획된 돌고래나 밍크고래 등을 해경에 신고하여 허가를 받은 후 판매 및 공급을 하고 있다.
고래고기는 그 엄청난 크기만큼이나 부위별로 12가지의 맛을 제공한다. 그 종류를 살펴보면 갈빗살ㆍ껍질ㆍ고래잇몸(정술)ㆍ뱃살ㆍ살코기ㆍ위(胃)ㆍ오베기(고래꼬리)ㆍ우네(うね, 고래주름)ㆍ지느러미살ㆍ창자ㆍ콩팥ㆍ혀 등의 부위이다. 고래고기는 부위별로 육질에 따라 두루치기ㆍ불고기ㆍ수육ㆍ육회ㆍ찌개 등 다양한 음식에 이용된다. 고래고기 음식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수육이다. 고래수육은 고래 살코기를 제외한 모든 부위가 수육으로 만들어져 다양한 맛을 제공한다. 특히 우네(うね)는 고래의 아래턱으로부터 배꼽 위까지의 주름 부위인데, 생긴 모습이 마치 '밭이랑' 같다는 뜻을 지닌 일본말이다. 고래고기 중 가장 귀한 부위로 알려져 있다.
현재 고래고기는 울산광역시의 장생포항을 비롯하여 경상북도 포항시의 죽도시장, 부산광역시의 자갈치시장 등에서 취급되면서 명맥을 잇고 있다. 또한 공급을 예측할 수 없는 관계로 인해 상대적으로 고래고기 가격이 비싸지면서, 예전처럼 저렴한 가격에 맛 볼 수도 없게 되다 보니 젊은 세대에는 미지(未知)의 음식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울산광역시에서는 1995년부터 매년 고래축제를 열어 울산의 고래문화를 알리고 있다. 또한 2008년에는 장생포항이 ‘고래문화특구’로 지정되고, 장생포 고래박물관 및 고래생태체험관 등이 설치되어 지역경제 활성화뿐만 아니라 ‘고래의 고장, 울산’의 문화적 정체성과 어항(漁港)도시의 명성을 회복하고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고래는 포유동물 중 가장 큰 동물로 바다에 산다. 물고기 모양이지만 폐호흡을 하고 자궁 내에서 태아가 자라며 배꼽이 있는 포유동물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고래류는 전 세계에 약 100여 종이 분포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근해에는 긴수염고래·쇠정어리고래·흰긴수염고래·쇠고래를 비롯하여 약 40여 종이 있다. 신석기 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울주 반구대(盤龜臺)의 바위조각을 보면 고래와 관련된 장면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래의 존재를 알고 일찍부터 사냥을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시대까지는 고래를 잡는 포경업이 활발하지 않았다. 동력선에 일정 규모의 사람들이 타고 고래를 잡는 근대적 포경은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되어 일본에 도입되었다. 일본인들이 주로 일제강점기까지 한반도에서 포경을 하였다.
근대시기 고래잡이는 상당히 이익이 되는 일이었다. 고래고기의 수요가 있었고 고래지방도 공업원료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헐버트가 쓴 『대한제국멸망사』에 의하면 대한제국기 한반도 근해에서 고래잡이를 하던 사람들은 러시아인과 일본인이었다. 특히 일본인은 한국 정부로부터 연안의 어느 곳에서나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였다. 일본인들의 야만적인 어로로 한국의 어부들이 쫓겨났고, 한국 근해에서의 고래잡이로 러시아인과 일본인들은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1905년에는 노르웨이의 회사가 한반도 근해에서 211마리의 고래를 잡기도 하였다. 고래잡이는 주로 9월 초부터 11월 말까지 행해졌다. 고래 중 가장 큰 것은 길이가 21m에 달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가 되자 한반도의 바다는 일본인 어부들이 주로 일하는 곳이 되었다. 1922년 12월 2일 『동아일보』 「포경수 정한」을 보면 대정 6년 총독부 고시로 조선에서 포경선수는 10척으로 한정되었는데 12월 1일부로 개정하여 12척으로 하였다. 포경할 수 있는 회사는 일본의 동양포경회사였다. 일제강점기 한반도 바다에서 고래는 평균 100마리 이상이 잡혔는데 그 이하가 잡히면 불어년(不漁年)으로 보았다. 1925년에 고래가 70마리 정도 잡혔는데 이 때의 신문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연해의 포경사업은 총독부에서 동양포경회사가 일수획득권을 얻고 조선근해에 부유하는 고래를 잡는바 대정13년 중에는 포획된 고래가 70마리 정도여서 근년에 없는 불어년이다. ...’(『동아일보』1925.01.28. 「포경 70두 예년보다 불황」)
1922년 12척이었던 포경선은 1931년에는 4척이 되었다. 여전히 포경은 일본의 동양포경회사의 독점사업이었고 1931년의 포경의 산액은 36만원이었다. (『동아일보』1931.03.26. 「황해도 수산물과 해태양식업(1)」 1933년에는 153마리의 고래를 잡아 14만 9천원의 산액을 하였다. (『동아일보』1933.11.01. 「포경 153 14만 9천원」) 1930년 120만엔에 달했던 고래 어획고는 1935년에는 1/3로 감소하였다. 그 이후 고래 어획고는 통계에서 사라졌다.(헤르만 라우텐자흐 지음, 김종규, 강경원, 손명철 옮김, 『코레아 일제강점기의 한국지리』,푸른길, 2014.)
서귀포 고래잡이 전진기지도 동양포경회사 소유였다. 1995년 이 곳의 고래공장을 서귀포시가 복원한다는 계획을 내놓은 적이 있으나 고래공장이 특징적인 건축물이 아니어서 복원할 가치가 부족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이 고래공장터 인근에 일본동양포경주식회사가 1933년에 세운 ‘포경선 조난 추도비’가 남아있다.(『동아일보』1995.09.23. 「서귀포 고래공장 복원 논란」)
서귀포 이외 울산에도 고래공장이 있었다. 고래는 울산명물로, 1938년에는 8월초부터 포경선이 나가 8월말에 벌써 10여두의 고래를 포획하였다. 장생포항 향도(向島)에 있는 웅장한 일본포경회사의 고래공장에서는 수백명의 인부가 주야작업으로 고래를 해체하였다. 각지에서 운집하는 상인과 고래를 구경하고 모인 구경꾼으로 장생포항은 활기를 띠었다고 한다.(『동아일보』1938.08.31. 「울산명물인 고래 벌써 10여두 포획 상인, 구경꾼이 각처서 운집」)
해방 후 일본 포경회사가 한반도 바다에서 사라지자 한국인들이 포경을 했으나 실적은 크지 않았다. 서해와 남해안에서 고래를 잡았고, 장생포를 본거지로 포경어업협동조합이 만들어졌다. 장생포에는 1968년에 22척의 포경선이 있었는데 6월까지 45두밖에 잡지 못하였다. (『매일경제』1968.06.03. 「낮잠자는 고래잡이」) 1978년 우리 나라는 국제포경위원회에 가입하였으며 이때부터 고래의 포획대상 종류 및 조업시기 등에 제한을 받고 있다. 1985년 11월 1일부터 포경어업이 금지되어 장생포 어민들이 타격을 입기도 했다.
경상도 지역에서 고래고기는 제사상에 오를 정도로 유명한 음식이지만, 언제부터 먹었는지 정확한 유래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다만 보편화된 시기가 6·25전쟁과 복구기간으로 알려져 있다. 피란민들이 많았던 경남지방에서 고래고기는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유일한 포경항이었던 장생포는 경상도 일대에 고래고기를 공급하였는데, 해방 당시만 해도 장생포에서 고래고기를 삶아 지게에 짊어지고 멀리 대구까지 가서 팔았고, 그 외 부산, 울산 등지에서도 팔았다고 한다. 쇠고기가 귀했던 시절에 고래만 한 대체 고기가 없었다고 하니 ‘민중의 음식’이라 할만하다. 보릿고개를 넘기자면 단백질 공급원으로 고래고기를 먹어야 했다. 비싼 쇠고기를 먹을 수 없던 민중들에게 고래고기가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겨우내 비실비실하던 개에게 고래 연골을 먹이면 금세 털빛에 윤기가 흘렀을 정도라고 하니 그만큼 고단백에 불포화지방산이 많다는 증거다.
고래 고기는 식용 혹은 기름을 채취할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식용으로 이용되는 고래는 수염고래와 이빨고래가 있다. 이빨고래는 빛깔이 좋지 않고 왁스 질 때문에 식감이 떨어진다. 수염고래는 표피아래의 지방육과 다시 그 아래층의 적색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의 일부가 식용으로 사용된다. 또한 흉부로부터 복부에 걸쳐 있는 부분에 빛깔이 엷은 표피에 덮여진 지방육의 주름이 있다. 고래와 육상포유류의 조직을 비교해 보면 고래의 경우 지방 육을 구성하는 진피 층과 피하 지방층 사이가 명백하게 구별되지 않아 진피 층에도 지방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또한 고기 중 혈색의 함량이 많으므로 축육보다 한층 진한 선홍색을 띈다. 쇠고기와 비교하여 비타민류가 많고 지방이 적으며 지방산조성도 고도불포화지방산의 비율이 높다.
고래고기를 구입할 때는 붉은 것으로 살이 탄력 있는 것을 고른다. 유사재료로 돔배기가 있다. -20℃~0℃ 온도에서 15일동안 보관이 가능하며, 냉장고 보관시에는 비닐 포장하여 냉동실에 넣어 두는 것보다 마른 행주에 싸서 하루에 한 번씩 행주를 갈아 주면 고기의 맛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 고래고기를 손질할 때는 물에 담가 핏물을 제거한 후 요리에 이용한다. 핏물을 제거한 고래고기는 수육으로 먹거나 구이, 전, 탕으로 요리하여 먹는다. 고래고기에 부족한 탄수화물을 보충해주는 쌀과 함께 섭취하면 좋다. 불포화지방산이 풍부하여 혈액순환과 콜레스테롤 개선에 도움을 주고, DHA, EPA 성분도 다량 함유하고 있어 두뇌 영양공급에 좋은 식품이다. 다만, 지방이 많고 열량이 높아 다이어트에 유용하지 않다.
지금은 고래고기 공급 자체가 부족하다. 우연히 정치망에 혼획되는 밍크고래 정도가 들어올 뿐이고, 법적으로 고래잡이는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혼획되는 경우에 한하여 고의성이 없음을 검찰의 입회하에 확인하고 시판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민들 입장에서 밍크고래 같은 대형고래가 정치망에 걸려들면, ‘로또복권’으로 여길 정도이다. 한편, 포경업의 전진기지였던 장생포항이 있고 항 주변으로는 전국 고래전문점의 절반이 모여 있으며, 우리나라에 유입되는 고래의 80%가 울산으로 들어온다. 1980년대 중반까지 포경전진기지로 영화를 누렸지만, 포경금지로 쇠락의 길을 걸어왔던 울산 장생포 일대는 고래문화특구로 조성되면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매년 증가 추세에 있다. 장생포고래문화특구에는 국내 유일의 고래관광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고래바다여행선 운항은 물론 고래박물관과 고래생태체험관까지 갖추고 있어 테마관광으로 각광 받고 있으며 지역경제 활성화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작고 새카맣다.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한 동안 살피다 살며시 다가와 자리를 잡는다. 누군가의 손길이 그리워 처음 보는 이에게도 곰살궂게 어리광을 피운다. 고래잡이가 금지되고 사람들은 하나둘 장생포를 떠났다. 주인을 잃은 고양이도 생겨났다. 고양이는 주인이 그리웠다. 할머니 집으로 가는 도중에 만난 검은 고양이. 살며시 다가와 곰살맞게 어리광을 부린다. 덕분에 쉽게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잘 다듬어 올려졌을 것이다. 견고하게 세월을 이기던 흙담은 이제 조금씩 제 힘을 잃어간다. 그러나 가지런히 뻗은 나무와 기와의 모습과 어우러져 한국 양옥이 유행하는 시절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아직 그 나름의 운치를 보여주고있다.
할머니 집 주방 문 사이로 보이는 옆집 풍경이다. 빈 집 지붕에 올라가 울고 있는 고양이. 할머니는 고양이가 자꾸 주방으로 들어와 어쩔 수 없이 방충망을 달았다고 한다. 할머니의 말씀으로는 옆집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고래잡이가 금지되고 마을 사람들은 다른 삶을 위해 어디론가 떠났다. 장생포 마을에는 다른 삶을 위해 떠난 사람과 여전히 다른 삶을 위해 떠나지 않은 사람으로, 삶의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
할머니집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냉장고였다. 여행을 좋아하는 첫째 아들이 기념으로 모은 것이라고 했다. "아니, 아드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 거예요?"하고 물어보았다. "아, 우리 아들은 배를 타요." 하는 할머니 말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과연 장생포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할머니의 첫째 아들은 학교를 졸업하면서 병원 원무과에 취직을 했다. 몇 해를 근무하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힘들어하다 그만두었다. 그리고, 어느 날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돌아와서는 간간이 통역도 하고 영어 강사로 일을 했다. 그 일을 하면서 무선 통신 관련 자격증을 땄고 배를 타기 시작했다. 항해하는 배 안에서 무선통신 서비스와 장비 수리를 한다고 한다.
둘째 아들 역시 배와 관련된 일을 한다. 할머니는 그 직업적인 용어는 어려워서 잘 모르시지만,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비슷한 일이라고 이야기하신다. 아마도 이곳 장생포에서 익숙하게 배를 보고 자란 아들들이 오랜 시간 배를 타고 멀리 떠나는 일에 두려움이 덜한 까닭일 것이다. 얼마 후면 첫째 아들이 또 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라고 하니, 기념 자석붙이를 또 하나 구해 오지 않을까 한다.
할머니는 결혼하기 전부터 장생포에 살았다. 처녀일 적에 장생포로 와 살다가 결혼을 하게 되었고, 아이들을 낳아 길렀다. 그 세월이 벌써 38년이 되었다. 이제 장성한 아들들을 둔 중년이 훨씬 넘은 나이가 된 것이다. 처음에는 아랫마을에 살았다. 이 집으로 옮긴지는 27년정도 되었다한다. 처음 이사를 하고는 살림을 알뜰살뜰 썼지만 시간이 갈수록 무덤덤해졌다. 얼마 전에 들여온 주방 싱크대도 그렇다. 싱크대를 3백만 원 정도 들여 맞추었단다. 역시 처음에는 싱크대의 윤이 사라지지 않게 반질반질 닦았지만 이후에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게 되었다. 마을 도로공사가 결정되면서 부엌을 포함한 집의 일부가 도로에 편입될 예정인데, 그 후로는 전혀 애정이 가질 않는다고 하신다.
음식 솜씨가 좋은 할머니는 아침, 점심, 저녁을 꼭꼭 집에서 챙겨 드시는 할아버지때문에 가끔은 힘들다고 하셨다. 밖에 나갈 때도 할아버지를 위해 밥상을 차려두고 외출한다는 말씀에 깜짝 놀라면서도 한국 전형의 삼식(三食)이 할아버지이신가 보다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오랜 시간을 함께여서 길들여진 입맛 때문일 것이다. 할아버지는 큰 길 울산세관 통선장 앞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작은 골목에 있는 이발관을 운영하신다. '평 이발관'이 할아버지가 운영하시는 곳인데 그곳에 대한 호기심도 일었다.
때때로 계절과 날씨, 기분에 따라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 혹은 추운 날은 따뜻함을 채우기 위해 뜨끈한 국물을 생각하고, 무더운 날에는 더위를 이기려 시원한 국물을 찾는다. 기분 전환으로 비비거나 말거나 매콤하게 즐길 수 있는 면(麵)이라는 별식이 우리에게는 있다. 면은 무수한 종류와 다양한 조리 방법으로 요리가 가능한데, 그중에서도 국수는 특별한 음식이다. 국수는 예부터 결혼이나 생일, 회갑 등의 잔치가 있거나 돌아가신 조상을 추모하는 의미로 제사상에 올리기도 하였다. 특별한 날 국수가 통과의례에 빠지지 않고 올려지는 이유는 모양이 길게 이어진 것이 경사스러운 일 또는 추모의 의미가 길게 이어지기를 염원하는 뜻에 연유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할머니께서 오늘 만들어 주실 별식 요리는 잔치국수이다. 이 요리는 할머니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음식이라 한다. 또한 오늘 삶을 국수는 장생포에서 생산하는 것으로 그 특별함을 더 했다. 장생포 특산품 '고래고래 국수'는 장생포 옛 마을을 재현한 고래문화마을에서 생산한다.
이곳에서는 재래식 방법과 비율로 소량만 뽑아 판매하고 있는데, 제조 과정을 관람 가능할 뿐만 아니라 체험도 가능하다. 특히 '고래고래 국수'의 탄생과 국수 장인으로 있는 공장장의 일화도 눈길이 간다. 장생포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 곳이다.
파도가 출렁일 때면 바다에 떠 있는 배도 출렁거렸다. 배의 움직임에 갑판 위의 가만놓인 물건들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내들은 바다가 익숙했다. 그러나 익숙함으로 바다의 고요함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파도가 몰아치는 날에도 익숙함이 두려움까지 떨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날씨도 견디기 힘들었다. 햇볕이 내리쬐면 내리쬐는대로 비가 내리면 비가 내리는 대로, 육지와는 달랐다. 하지만 고래를 잡아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은 이 모든 것을 참아 낼 수 있게 했다.
일상에서 추억을 상기시키는 것은 우리 주변에 너무 많이 널려있다.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은 추억의 상념을 풀기에 아주 좋은 날이다. 할아버지는 어느 날부터 배를 타던 그 시절이 그리웠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고래잡이 배를 탈 때 먹었던 찌개 요리를 전수하였다. 할머니가 끓이는 고래 찌개를 먹으면 괜스레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도 들었고 입맛도 돌았다. "우중충한 날이나 비 오는 날에 우리 아저씨가 먹고 싶다고 이야기해요. '고래 찌개 좀 끓어 두가'하고요. 그렇게 한 그릇 비우고 나면 '아, 맛있다', '시원하다.' 하죠. 내가 만드는 고래 찌개는 우리 아저씨한테 배웠어요." 하신다.
할아버지가 전수한 '고래 찌개'는 고래 배를 타던 선원들이 끓이던 방식 그대로이다. 주로 선원들이 배에서 해 먹던 방식으로 할머니에게 알려주셨단다. 음식 솜씨가 좋은 할머니는 거기에 더 요리조리 맛을 내어 끓이는데, 할아버지가 아주 좋아하신다. 고래 고기는 다른 생선과 달리 부위별로 맛이 다르고, 모든 부위가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우네는 고래의 배 부분으로 배 쪽의 골이 진 조글조글한 부분이다. 최고로 맛있는 부위라고 한다. 이것은 찌개에 넣어도 맛있지만, 막 찍기로 젓갈에만 찍어 먹어도 맛있단다. "우네는 고래 배 쪽에 있는 부위로 속살이 뽀얀 부분과 살이 반지르르한 부분이 있어요. 생긴 모양이나 육질이 다른 부위하고 또 다르죠. 육질이 단단해 보이는 부위들은 구워 먹어야 맛있지만, 우네는 막 찍기로 젓갈에 찍거나 소금에 찍어 맛보면 구운 쇠고기 맛을 느낄 수 있어요.", "또 고래 고기는 콜라겐이 많아요. 레시피도 다양하죠. 고래 고기로 두루치기를 해서 먹어도 맛있어요."
그 다양하고 맛있는 고래 고기 요리방법 중에 오늘 선보일 요리는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고래 찌개'이다. 예전에는 바다에서 고래를 자유롭게 잡을 수 있었다. 저 멀리 도심에서, 바다에서 울리는 큰 뱃고동 소리가 들리면 자전거를 타고 장생포로 와 고래 고기를 얻어 갔단다. 조금만 안면이 있어도 소쿠리에 가득 담아 올 수 있는 넉넉함이 있었다한다. 그때의 고래 고기는 아주 신선했고 정겨웠다. 요즘은 고래잡이가 금지되어 귀한 음식이 되었다. 포경 금지로 그물에 걸린 것을 해양경찰청이 감식하고 경매로 넘겨진다. 경매에 넘겨진 고래는 해체 작업을 한 후 유통된다. 시민들은 경매 된 고래 고기를 시장이나 식당에서 구입해서 먹어야 한다. 공기가 들어가지 않게 잘 밀봉해 급속냉동 과정을 거치므로 식감이나 신선도에는 크게 예전과 차이가 없다. 오히려 예전보다 고래 고기를 시중에서 볼 수 있는 시간이 더 늘었다.
"고래는 자수(크기)에 따라 맛이 달라요. 23~24자의 고래가 제일 맛있죠. 아마도 장생포 마을에서 하는 고래 요리의 방법은 끓이고, 볶고, 지지고 하는 한국 기본 조리방법이라 다 비슷할 거예요. 하지만 요리 방법이 비슷하더라도 비법과 맛은 집집마다 다르죠. 삶을 때 소금 간을 하느냐 안 하느냐, 또 얼마나 끓이냐에 하는 여부에 따라 그 맛이 달라져요. 이 부분이 집집마다 다 달라요." 할머니의 요리방법은 냉동된 고래 고기를 요리할 때 먼저 해동을 시키고 핏물을 제거한 후에 요리한단다. 또 요리할 때 주 재료의 조리법에 따라 부 재료를 더하는 데, 할머니의 고래 찌개는 먼저 다랑어로 육수를 뺀 후에 고래 고기를 넣어 같이 끓인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원양어선을 타고 6개월쯤 또는 1년쯤 바다로 떠나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당시 할머니는 스물세 살이었고, 할아버지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밖에서는 왈가닥이었지만, 집에서는 조용하고 조신한 딸이었어요. 그 시절 학교 다니기가 싫었고, 공부가 싫었어요. 막상 결혼을 하고 내 자식을 길러보니, 그때 책가방을 던져버린 것이 아주 아쉬운 생각이 들었어요." 하고 말씀하신다. 나는 우리 엄마가 마흔이 넘어 낳은 늦둥이였죠. 아버지는 미군부대에서 모포나 군복을 얻어와서 시장에 내다 파셨는데, 그 언변과 수완이 좋았어요. 덕분에 그 시절에 유치원도 다니고, 빨간 구두, 빨간 가방, 드레스 같은 예쁜 옷도 입고 다녔고요. 친구들한테도 연필이나 과자도 마구 나눠주고, 어려움 없이 자라 철이 없었던 것 같아요. 자식에게 공부 계획을 세우는 방법도 가르쳐줘야 하고, 돈에 대한 가치 개념도 가르쳐줘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이 들었어요. 그건 다 결혼하고 생각했어요. 집안에 언니 오빠가 있었는데, 오빠를 제일 무서워했어요."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 부산에서 울산으로 올라왔을 때도 여전히 철없는 장난꾸러기였단다. 쪽지를 하느라 아이들이 전과며 책이며 훔쳐 가는 걸 몰랐다. 늘 잃어버리고 새로 사야하기에 집에서는 무척 공부를 열심히 하는 줄 알고 계셨단다. 할머니 말로는 '쌍코피 난 머스마'가 집으로 찾아오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어느 날, 동네 머스마의 쌍코피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전혀 티를 내지 않고 조용하게 방에 들어가 숨을 죽이고 있을 때, 머스마와 그 머스마의 어머니가 집으로 쳐들어오는 바람에 집안 어른들께 본색(?) 아닌 본색이 드러났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추억과 할머니의 추억이 무르익을 쯤, 할머니의 건강 비결을 물었다. 이제 예순이 조금 넘은 나이인데 너무 젊어 보인다. 그러자 할머니는 자신이 아직도 철이 없는 것인지, 고민이 없어야 한다고 하신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고민이 없이 살아야 한다며 그것이 자신의 가장 큰 건강 비결이라고 한다.
집안을 들어서자마자 향긋한 꽃향기가 가득하다. 벽 한 쪽 면을 보니 꽃을 말리고 손질한 여러 가지 꽃차를 담은 병들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다. 초봄의 기운이 만연하게 퍼져 있는 가운데 따뜻한 목련차를 건네며 환대해 주셨다. "목련은 일찍 피는 꽃이에요. 시기도 짧잖아요. 금방 피니까 따러가기도 바쁘고... 차를 만드는 과정도 쉽지는 않아요. 색깔 살아야지, 향도 살아야지, 약성도 살아야지 해서 만드는데 손이 많이 가요. 그래도 재밌어요." 취미로 다도 수업을 배웠던 그녀는 이제 어엿한 전문인이 되었다. 다도를 배웠다고 해서 차를 마실 때 너무 예의범절을 따지기 보다는,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편하게 생활처럼 즐기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런 소박한 멋이 한 잔의 차 안에 깊게 우려 나온다.
"처음 남편한테 물었어요. 당신 클 때 뭐 먹고 컸노? 특별한 게 없다 하더라고요. 근데 생각해보니까 고래 장조림이 있더라고요. 옛날에 우리한테는 고래 고기가 흔한 음식이었으니까 특별한 게 아니었어요. 그런데 시내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신기한 거더라고요. 애들 도시락 반찬으로 고래 장조림을 싸주면 시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어요." 장생포에서 고래 고기는 흔한 음식이었다. 지금이야 포경 활동이 금지돼서 고래 고기가 비싸졌지만, 그 옛날에는 고래 고기가 집집마다 식탁에 올라왔다. 그래서 장생포 아이들에게는 고래 고기가 특별하지도, 신기하지도 않은 음식이었다. 그런데 시내에 있는 학교로 나갈 때면 고래 장조림 도시락 반찬은 항상 인기 만점이었다. 그 당시에도 다른 동네 아이들 눈에는 고래 고기가 특별한 음식이었다. 그때 그 시절 추억을 소환하며 별 다른 고민 없이 고래 장조림을 선택했다.
쇠미역 이라고도 불리는 곰피는 바다의 봄나물이다. 다시마류의 해산물인 곰피는 겨우내 움츠렸던 입맛을 돋우고 간 기능을 개선하고 성인병을 예방하고 관절염의 완화에 탁월한 효력이 있다고 한다. "옛날에는 곰피가 장생포 앞바다에 흔했어요. 그 옛날 장생포 어른들도 다 먹고 살았던 음식이에요. 고래 장조림만 하기 그래서 한 번 준비해봤어요." 지금은 부두가 되어버린 해안가는 그 옛날 장생포 지역 주민에게 풍부한 먹거리를 제공해주는 귀한 장소였다. 홍합도 흔하게 구할 수 있었다던 장생포 앞바다는 이제 채집이 어려운 장소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봄이 오면 몸에 스며든 기억 때문인지 곰피밥을 찾게 된다. 곰피가 바다의 봄나물이면, 달래는 대표적인 육지의 봄나물이다.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고 봄의 기운을 가득 담아 돋아나는 향긋한 봄나물. 곰피밥에 달래장을 비벼 먹으면 특유의 맛과 향기로 일교차가 커 면역력이 떨어지는 날 체력을 보충하는데 제격이다.
40년 전, 온산의 앞바다는 언제든 생명력 넘치는 바다를 조우할 수 있는 풍요로운 곳이었다. 지금은 바닷가를 따라 공단이 들어서면서 바다의 모습이 거대한 공장 지붕에 가려졌다. 하지만 무한한 어자원의 보고였던 온산 바다는 아직도 이재선 씨의 기억 속에 푸르게 출렁인다. "나도 왕년에는 해녀였다. 장생포로 시집 와 가는 안 했지. 바닷가에 억수로 묵을 게 많아. 온통 나가면 먹을 거였다. 그래서 난 시금치 이런 거 많이 안 먹어. 바닷가 음식이 훨씬 맛있어서."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입맛마저도 육지의 것보다는 바다의 것과 훨씬 잘 맞는 궁합을 자랑한다. 아직도 시간이 나면 어릴 적 기억을 소환해 근처 바닷가에 나있는 해조류를 채취해온다. 바다에 오랫동안 몸을 담가왔던 그녀에게 해조류는 물질하고 난 뒤 입맛 없을 때, 반찬 없을 때 찾게 되는 향토음식이다.
"동생은 아직도 기장에서 해녀를 해. 이 미역도 동생이 해가 준거다. 까시리는 내가 해왔지. 저번에 가가 돌에 붙어 있는거 떼 왔다." 생소한 먹거리인 까시리는 '풀가시리'의 경상지역 말이다. 식감이 까실까실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까시리는 아직 양식도 안 되고 다른 해초보다 개체도 적어 소량 채취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해초류 중에서도 귀하신 몸으로 소문나있다. 해조류는 익히 장수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 미역은 비타민과 미네랄의 보고이며, 식이섬유가 풍부해서 변비와 정장작용에 도움이 된다. 신기한 것은 같은 미역이라 하더라도 맛이 다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그녀의 밥상에 차려진 미역, 미역줄기, 귀다리(미역귀) 장아찌는 같은 양념으로 만들어졌음에도 맛도, 식감도 각자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야들아, 밭에 가서 정구지하고 시나나빠 좀 뜯어 오니라. 그리고 배추하고 섞어 겉절이 해라." 마당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래 해체장에서 얻어 온 고래 고기를 내려놓고, 텃밭으로 간다. 추위를 이기고 잘 자란 정구지와 시나나빠를 뜯어 와 씻는다. 양념으로 오밀조밀하게 무쳐 어머니 앞에 내려놓는다. 어머니는 정재에서 밥을 안쳐놓고 쇠고기 국을 끓였다. 그리고 덩어리째 가지고 온 고래 고기를 썰었다. 정재에서는 국이 끓기 시작한다. 큼지막하게 막 썰어놓은 고래 고기와 금방 무쳐 온 겉절이를 식구들이 둘러앉아 먹었다. 칼칼하고 달큼한 쇠고기 국으로 저녁을 먹으며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는 한참동안 끝나지 않았다.
"옛날 텃밭에는 어지간하면 정구지를 다 키웠어요.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고래 고기파는 식당에는 밑반찬으로 정구지 무침이 꼭 같이 내와요. 나는 심부름으로 정구지를 꼭 베와가 무쳐서 내고, 우리 엄마는 쇠고기 국을 끓였어요. 그리고 고래 고기를 막 썰어서 한 상을 만들어 온 식구들이 둘러앉아 먹었어요. 지금과 달라 고래 고기가 비싸지 않은 흔한 시절이었어요. 고래 해체장에서 고래 고기를 얻어오는 것도 인심이 후해서 쉬웠죠. 넉넉하고 배가 부르게 온 가족이 먹을 수 있었어요." 그 시절 양념재료는 지금과 달랐다. 고춧가루, 설탕, 소금, 액젓만으로 부추와 동초, 배추를 썰어 버무렸다. 한 접시에 담았다. 고래 고기도 썰어 한 접시 담았다. 그것을 엄마는 어른 상에는 막걸리와 함께 내었고, 아이들 상으로 차려주었다. "어린 시절 장생포에 고래 배가 들어올 때, 뱃고동이 뿌웅-하고 길게 울리거나, 뿌웅! 하고 짧게 울리는 것에 따라 고래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었어요.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놀고 있다가도 뱃고동 소리가 멀리서 들리면 아이들하고 '와- 고래 잡았다!'하고 소리를 치며 뛰어 내려오곤 했어요." 할머니의 말씀에 아이들의 익살스러운 표정과 함성이 울리는 듯하다. 뱃고동 크기와 장단에 따라 고래의 크기가 달랐다. 아이들은 달음박질로 달려와 항구에 들어오는 배를 구경하였다. 그럴 때면 엄마는 어김없이 맏이인 할머니를 불러 돈을 쥐주었다. 그 돈을 가지고 얼른 식육점으로 뛰어가 그저 '한 근 주소. 두 근 주소.' 하면 식육점 주인도 알아서 주었단다. 그렇게 쇠고기를 사 오면 어머니는 국으로 끓였다.
"오늘 준비한 요리가 쇠고기 국인데, 언제 주로 끓여 드셨나요?"하고 물어보았다. 할머니는 "생각해보면 고래를 잡고 하면 힘드니까 뜨끈한 국물이 땡기고 하니, 끓였던 것 같아요. 우리 집 옆에는 '옥천탕(현재 항구탕이 있는 자리)'이라는 목욕탕이 있었는데, 그 옆에는 또 소를 잡던 곳이었어요. 가까운 곳에 식육점이 있으니까, 쇠고기 한 근에 삼천 원, 오천 원하니까, 엄마가 돈을 줘 심부름을 하곤 했어요." 맏이인 할머니는 아래로 동생들이 여섯이나 있었다. 흔히 말로만 들어 본 칠 공주를 여기서 만난 것이다. 놀라워하니 할머니는 그저 빙긋이 웃으신다.
"엄마는 쇠고기로 국도 끓이고, 찌개도 끓였어요. 그러다 먹는 게 질린다 싶으면 이번에는 고래 고기로 국을 끓이고, 찌개를 끓였어요." 고래 고기와 쇠고기는 요리 방법이 비슷하였다. 국으로, 찌개로 끓이는 방법이 있지만, 고기를 굽거나 생고기를 기름장에 다진 마늘을 넣어 찍어 먹는 방법도 있다. 그 시절 조미료나 양념도 넉넉한 집안에서나 볼 수 있었던 터라 굵은소금이나 왕소금 외에 간을 맞출만한 재료가 없었다. 할머니가 알고 있는 간단하지만 맛있게 국을 끓이는 비법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어머니에게서 배운 방법이다. 그러니까 오늘 할머니의 요리법은 그 예전 어머니의 요리 방법인 셈이다. 요즘 세대들은 불에 달군 프라이팬에 참기름을 먼저 넣고, 이어 쇠고기를 넣은 후 달달 볶기도 한다. 하지만 할머니의 요리 방법과 다르다. 간을 소금만으로 해도 맛있다. 칼칼하면서 담백한 쇠고기 국이다.
"어린 시절 엄마가 해 준 요리 중에 가장 기억이 남는 것은 고래 갈비예요. 장작불을 때 화로에 석쇠를 올리고, 양념을 재어 구워 먹었던 고래 불고기도 생각이 나고요. 또 우리 엄마는 학교 다닐 때 도시락 반찬으로 고래고기를 싸줬어요. 고래 고기 말린 것으로 찢어 멸치볶음처럼 볶아 도시락 반찬으로 넣어 줬어요. 그걸 학교로 가져가면 친구들은 '와-' 하고 와서 먹었죠. 그 반찬이 인기가 좋았어요. 그러면 나는 친구들이 싸가지고 온 계란 프라이, 미역귀다리 무침, 김치, 멸치와 고추장 이런 것과 바꿔 먹었어요." 학교는 교실이 모자라 아침반, 오후반으로 50명씩 다섯 반으로 나누어 다녔다. 할머니의 고향은 장생포 마을이다. 예순이 넘도록 장생포를 떠나 살아 본 적이 없다. 장생포 초등학교를 다녔고, 할머니의 동생들도, 딸도, 손주도 모두 장생포 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장생포에서 일어난 순간순간들을 기억하고 이야기하시는 데, 그 살아있는 이야기가 너무나 재미있다.
고래잡이배가 항구로 들어오면 뱃머리에서도 고래 해체작업이 이루어졌지만, 대게는 배에서 내려 해체장으로 가져가 작업을 했다. 해부장이 고래 등에 큰 칼을 들고 올랐다. 그는 둘레와 거리를 재고 칼로 그어 부위별로 해체했다. 고래 고기를 해체하는 작업에 있어 맨 처음으로 하는 일이 그 해부장이 날개같이 특별한 부위를 한 덩이 끊는다. 그것을 당산 마을 제당에 모셨다. 이어 경매 낙찰반은 순서나 조합원들에게, 고기를 얻으러 온 사람들에게 한 모퉁이씩 끊어줬다. 장생포에 있었던 해부장은 다섯 명이었다. 배가 바다로 나갈 때면 배마다 해부장이 한 사람씩 따라 나갔다. 그러니까 한 척의 배가 떠날 때면 선장, 기관장, 망통, 해부장, 선원, 화장, 남방, 보신 등이 함께 나갔다. 이때 망통은 눈이 밝은 사람으로 배 위에서 고래가 노는 것을 확인하는 사람이다. 화장은 배 위에서 밥하는 사람, 남방은 배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 보신은 기관장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배가 떠날 때, 이 여덟 명의 인원이 최소한으로 꼭 필요한 셈이다. "동방호는 1호~5호까지 있었고, 또 진양호, 청구호가 있었어요. 만약 고래잡이배 한 척이 방어진 앞의 등대를 지나 장생포로 들어오고 있다면, 꽃바위쯤에서부터 기적을 울리며 들어와요. 들어오면서 뿌-웅-하는 소리, 부우-옹-하는 소리. 뿌웅! 소리 등등 배마다 그 소리가 다 틀려요. 그럼 '저 배의 소리는 큰 고래 잡아온다. 아마 50자~60자짜리 참고래다. 저 배는 밍꼬(밍크고래)잡아온다.' 하며 그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다라이를 들고 해체장으로 달려갔어요. 모두 신이 났고, 다들 그렇게 지냈어요." 보통 28자~30자 되는 다 큰 고래를 잡았다. 20자 이하가 되는 작은 고래는 잡지 않았다 한다. 지금은 포경 금지로 고래 고기가 특별한 음식이 되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흔하고 넉넉하고 후한 인심이 있는 고기였다. 모두 70년대의 일이다. 그때 고래잡이가 가장 활성화됐던 시절이었고, 그 후로는 고래문화특구로 지정되면서 고래잡이가 금지되어 더 이상 활성화되지 못하였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어업조합에 다니셨다. 그곳에서 조합의 사무도 보고 경매일도 하셨다. 나중에는 준설공사 선장으로 건설부 배를 타고 다녀서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할머니가 결혼하신 후에도 아버지는 가끔씩 큰딸 네로 와서 월급봉투를 열어 일부를 떼 주고 가셨다. 아마도 큰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셨나 보다. 예전에 어업조합이 있던 주변에는 야간학교와 고래 고기 삶던 곳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자리는 우체국이 대신하고 있다. 이제 아쉬움이 가득한 추억의 장소가 되었다.
바닷 바람이 짜게 부는 날. 해풍에 의해 머리카락이 온통 소금기로 가득하다. 장생포 앞바다를 찾는 낚시꾼들의 걸음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보통 바다하면 지극히 먼 수평선을 떠올리는데 장생포에는 그런 것이 없다. 그저 줄지어 선 공단들이 보일 뿐. 바다를 담는 사진에는 온통 공장들이 걸쳐서 나온다. 이 씁쓸한 배경을 뒤로 하고 낚시하는 한 할아버지의 어깨가 보인다.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는 길고양이들이 유일하게 할아버지 옆에 서서 아양을 떤다. 낚싯대를 잡은 손이 시간과는 무심한 듯 여유롭게 보인다. 이윽고 할아버지가 손바닥만한 놀래기를 끌어올리자 고양이가 익숙하게 낚아챈다. 세상에서 가장 신선한 생선을 먹는 고양이. 할아버지와 고양이의 사랑스런 모습에 공단 배경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말없이 바다를 응시하며, 고양이를 이웃으로 삼는 할아버지의 삶이 여유롭게 느껴졌다. 할아버지의 정체는 알고 보니 장어배 선주. 장생포 앞바다에 낚시꾼들이 찾아오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장생포는 고래로 유명한 곳이지만 아는 사람들은 여기에 장어 먹으러 온다고 한다. 장어의 원산지라는 이 곳. 그러고보니 주변 환경을 조금만 관심을 갖고 돌아보면 아나고를 잡는 주낙이 이리저리 보인다. 가장 신선한 생선을 먹는 고양이처럼 장생포에서는 갓 잡아올린 장어를 먹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할아버지에게 뱃일은 운명이었다. 조부는 손자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아끼던 배를 내주었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가업을 이어 어부가 되었다. "그때는 하고 싶고 안하고 싶고 그런게 어딨노. 무조건 하는거지. 우리 할아버지가 선주였어. 할아버지한테 배를 물려받았지. 그때 기분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어." 처음 뱃일을 어떻게 시작했냐는 물음에 할아버지는 당연하듯 대답하셨다. 바다는 소년이었던 그를 시린 겨울 바다 안에서도 굳세게 키웠다. 아버지와 함께 어장을 관리하고 바다에 나가는 것은 10대의 그에게 당연한 일과였다. 그렇게 어언 50년의 시간을 철썩철썩 두들기는 파도에 제 몸을 새기며 어엿한 어부가 되었다. 어딘가 응시하는 할아버지의 눈빛이 어쩐지 서글퍼보였다. 온산서 태어났다는 할아버지는 1980년경 공단편입으로 마을이 철거되자 장생포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실향의 아픔을 딛을 수 있었던 건 지금의 아내 덕분이었다. 중매가 당연시했던 시절 자유연애 주의자를 고집하며 지금의 할머니를 만났다. "남사스럽게 그런건 왜 물어보노. 아무나 들을 수 없는 얘기다. 집사람 만난 얘기는 알아서 뭐하려고. 우리는 데이트고 뭐고 다 어려웠다. 배 없는(안 나가는) 날이 언젠 줄 알고 맞쳐가 노나. 그래도 가끔씩 한 달에 한 번씩 여는 가설극장은 가봤지." 전형적인 경상도 사람답게 구태여 사랑 얘기는 낯간지럽다는 할아버지. 말은 그러하나 할머니와 내내 붙어 계신걸 보면 평생 짝지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장어는 수온이 차면 안 움직여. 따뜻할 때 잡히지. 저녁 5시쯤 통발 뿌려놓고 새벽에 확인하러 가면 잡혀있어." 여름철 보양식으로 손꼽히는 '붕장어'. 흔히 바다에서 나는 장어라 해서 '바닷장어'라고도 한다. 할아버지는 다른 생선에 비해 장어의 힘이 무지막지하게 좋아서 한 번 손질하는데도 여간 힘이 들어간다 했다. 그래서인지 장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성의 상징적인 음식이기도 하다. 일본 고대 의약서적에는 붕장어를 '밤의 귀족으로 스태미나 향상에 최고'라고 기록할 정도다. "날마다 돈이었다. 많이 잡을 때는 150kg, 평소에는 80~90kg는 잡았다. 수족관에 장어가 꽉 차있었어. 근데 지금은 안 잡혀. 기장 가면 큰 배들이 많다. 거기서 장어를 싹 쓸어가뿐다. 우리가 잡을게 없어. 심정이 많이 상하지.." 할아버지에게 장생포 앞바다는 땀 흘린만큼 그 수고로움을 알고 보답해줄 줄 아는 곳이었다. 삶을 지탱하던 무대가 한순간에 막이 내리자 그는 심정이 많이 상한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그를 알던 옛 고객들은 아직 발길이 끊이지 않는데, 예전처럼 잡히지 않아 예약만 늘어간다고 했다. 50년을 함께 했던 바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쩐지 낚시하는 뒷모습의 어깨가 무거워보였다. 그러나 이윽고 손주들이 할아버지를 찾아오자 할아버지는 금새 어두운 표정을 씻고 손주들을 향해 웃었다. 문득 이제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가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지식당은 ㅇㅇㅇ 할아버지의 오랜 단골이다. 바닷 마을인 장생포는 이상하게도 고래고기 집은 많은데, 생선을 파는 곳이 드물다. 토지식당도 원래는 고래고기를 팔았다가 손님들이 재차 장어탕을 찾자 메뉴에 넣었다고 한다. "바로 앞에 있는 장어배에서 공수해 와. 그러면 어느 곳보다 맛있는 장어탕을 끓일 수 있지. 신선함이 다르니까. 그래서 그런지 여기 찾아오는 손님들도 다른 곳보다 우리 집이 맛있다 해. 근데 요즘은 예전처럼 잡히지 않아 장어를 냉동 보관하니까 맛이 좀 달라졌어." 바닷장어는 살이 오른 여름철에 먹는 것이 가장 좋다. 특히 단백질과 불포화지방이 풍부해 기력회복에 좋고, 피부 노화를 예방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장어는 예부터 부부금실에 좋다는 이야기가 속설로 전해지는만큼 남성들의 정력 증강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무더운 여름 날. 뙤약볕에 노릇노릇 익어가는 마당 위로 분주한 손이 일렁거린다. 마당위에는 우뭇가사리가 한창 말려가는 중이다. 장생포 초등학교를 조금 지나다보면 오랫동안 마을 주민들이 밥숟가락이라 부른 길이 하나 있다. 밥숟가락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금방이라도 김이 모락모락 필 것 같은 이 길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이 근처 사는 사람들은 돈 벌어서 나가지, 절대 잃고 가진 않는다는 이야기다. 밥숟가락길에 놓여져 있는 아담한 마당 사이에 인심 좋은 문상라 할머니가 있다.
대부분의 장생포 할머니들과 마찬가지로 문상라 할머니도 남편을 따라 장생포에 들어오게 되었다. "내 포항 사람이다. 포항도 좋았다. 앞에는 바다고, 뒤에는 산이고. 그래가 바다 음식도 먹지만, 나물같은 요리도 많이 해먹는다. 우리 아저씨도 나도 나물을 더 좋아라한다." 고기보다는 나물을 고집하신다는 할아버지는 10대 때부터 배를 탔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배를 타며 자연스럽게 장생포에 들어오셨고 어느새 70세를 훌쩍 넘기셨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여전히 배를 타고 계신다. "배는 글타. 나이가 먹어도 늦게까지 탈 수 있다. 그래도 대단하지. 남들 다 은퇴하는 나이에도 일하니까. 요즘에는 그라대. 배 탄다고 자기 청춘 다 버렸다고." 청춘을 배 위에서 보낸 까닭인지 할아버지에게 보리밥은 매우 지겨운 음식이다. 배 타면서 보리밥을 원체 많이 먹어 그렇다고 한다. 그렇게 배라면 신물이 나는 할아버지인데, 이상하게도 배를 만드는 일은 재미가 있으신 모양이다. 손재주가 많으신 할아버지의 취미는 목선 모형 만들기다. 바쁘신 와중에도 재료까지 직접 구해 만든다고 하신다. 할머니 집에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목선 모형이 할아버지가 직접 만드신 작품이다.
예나 지금이나 9살 나이 차이 극복이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할아버지는 아직까지 할머니 혼자 밖에 두는게 불안하다. 할머니가 모임 하나 나갈 때도 할아버지의 꼼꼼한 승인이 필요하다. "젊을 적에는 치마만 입고 다녔다. 이제야 통장도 하면서 바지 입고 댕기지. 내가 우리 아저씨랑 나이 차이가 좀 난다. 예전에는 모임도 못 다니게 했다. 화장도 당연히 못 했지. 진짜 고지식하다." 할아버지의 사랑에 못 이겨 외출도 제대로 못 해봤다던 할머니. 이제야 조금씩 시간을 내 동창회도 나가보고, 친구들과 모임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단다. "그래도 우리 아저씨 좋다. 우리 아들이랑 사위를 보면 안다. 우리 아들은 며느리가 뭐 좀 할라카면 다 지가 한단다. 다 아버지 배워서 글타. 사위는 그런거 없다. 내도 여태까지 방 쓸어본 적 없다. 다 우리 아저씨가 해주지." 뱃사람답게 겉으로는 무뚝뚝해보여도 할아버지는 말보다 행동으로 할머니에 대한 사랑을 아낌없이 보여주시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우뭇가사리는 그리움이 담겨 있는 음식이다. 어렸을 때 엄마가 자주 해주던 요리임과 동시에 지금은 세상에 없는 남동생이 가장 좋아했던 요리다. 남동생의 아내였던 올케는 여름이 되면 늘 우뭇가사리를 보내준다고 한다. 제주 해녀 출신이라 생활력이 강해 일도 야무지게 한다는 올케다. 그런 올케에게 할머니는 항상 미안한 마음, 고마운 마음이 있다고 한다. 결국 할머니에게 가족을 잊지 않는 마음. 잊을 수 없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 우뭇가사리다. 그래서 보통 정성으로는 못 만드는 우뭇가사리를 여름마다 만드신단다. 보통 냉국으로 시원하게 먹는 우뭇가사리는 뜨거운 여름의 고통을 맛봐야만 나올 수 있는 음식이다. 만드는 사람은 과정 내내 불판 옆에 서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끓이는 과정도 여러 번 손이 가기 때문에 한 여름날에는 고통스럽다. 할머니의 수고를 알아서인지, 할아버지는 자꾸 옆에서 '그런 거 왜 만드노?'하며 핀잔을 두신다. 핀잔보다는 사랑의 표현이라 하는 것이 더 맞겠다. 할아버지의 핀잔은 더운 날 할머니가 고생하시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각별한 마음이다. "이거는 만드는 비결같은게 없어. 그냥 불판 옆에서 내리 휙휙 저어주면 돼. 땀이 많이 나는 작업이지. 언제는 만드는게 고돼서 사먹어 봤는데 안 되겠더라고. 내 가족 먹인다고 생각하니께 힘들어도 하는 거야. 노는 사람들이나 해 먹지, 일한다고 생각하면 절대 못 해먹어."
몇 번을 햇볕에 말리고, 끓여야만 하는 우뭇가사리, 식구들 먹이는데는 손이 많이 가야 좋다는 할머니의 확고한 지론을 들을 수 있었다. 할머니의 맛의 비결은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에 있지 않을까.
실선을 이어 그은 듯 높낮이가 다른 담은 원근감을 자아낸다. 키가 낮은 평상은 까치발로서 보지만 담장의 두 뼘을 넘기지 못한다. 나무의 눈길은 먼바다를 향해 있다. 쓸어보아도 제대로 빗질이 되지 않아 체념이라도 한 듯 바람에 머리카락을 맡겼다. 머리칼이 제 마음대로 날린다. 미루나무가 있는 풍경은 골목 입구에서부터 호기심이 일었다. 굵은 몸통과 무수히 뻗은 수령(樹齡)이 만만찮음을 알 수 있다. 가만 나무 아래에 서본다. 그리고 해를 향해 눈을 감아본다. 김춘자 할머니의 집은 큰 길 마트와 식당사이로 꺾어 안쪽으로 들어간다. 그곳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것이 이 미루나무이다. 미루나무가 점점 가까워질 때면 언덕으로 오르는 또 다른 골목이 있는 데, 이 작은 골목을 이어주는 첫 번째 집이다. 낡은 대문을 열고 들어선다. 현관 앞에 놓인 화분들이 보인다. 봄을 울리고 화려함을 뽐내던 계절의 여왕은 발악하듯 다시 한 번 완숙한 기운으로 자신을 뽐냈다. 이 모습에 스스로도 자신의 도도함이 민망할 즈음 다행히 가을이 찾아왔다. 이제야 죽담 위 화분에서 여름을 보냈던 자신의 거만함을 살며시 내려놓는다. 신발을 벗고 평상에 올라 일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가만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빨간 입술이 눈에 띈다. 일흔넷의 연세가 무색할 만큼 머리카락과 입술이 젊다. "염색은 언제 하셨어요?"하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크게 웃으시며 "내는 염색 안 한다.", "에? 진짜요?", "내는 새치가 뿌리부터 올라오는 게 아이다. 머리가 다 올라와가꼬 하얗게 변한다." "예? 그건 또 어떤 거예요?" 알고 보니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종의 머리색만큼이나 흰 머리카락의 종류도 20종이나 있다. 뿌리부터, 그러니까 모근이 흰색이라 흰 머리카락으로 자라는 사람부터 머리카락이 다 자란 후에 염색소가 차츰 빠지면서 흰 머리카락이 되는 경우까지. 최근에는 염색을 하지 않으셨단다. 이런 모습을 찍겠다고 카메라를 내세웠다. 카메라가 다가서자 자꾸 얼굴을 가리신다. 사진 찍기가 부끄러워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내는 사진 찍는 게 와이리 부끄럽겠노." 하신다. 그래도 문화 공간 새미골 담장에는 예쁘게 자신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며 즐거워하신다.
머루 주스를 내어 준다. 진하게 우려낸 머루 향이 향긋하다. 맛도 달다. 직접 담근 주스란다. "주스도 직접 담그시고, 부지런하세요.", "여 바닷가에서 뭐 할 게 있나. 쪼매 농사지어가 반찬거리로 다 해 먹는다 아이가." 그러고 보니 마당에 빨간 고추며, 가을무를 썰어 말리고 시래기를 널어놓았다. 손이 바지런하신가 보다.
"농주는 언제부터 담그셨어요?", "내 시집오고 난 뒤부터 담갔다 아이가. 내도 요 옆에 용잠동 내하 마을이 친정이다. 우리 할매가 집에서 담그는 거 마이 봐가고, 이까지 거 내도 한 번 담가보자 싶어서 시작했다." 하신다. 어린 시절에 할머니가 담그는 것을 눈여겨보았단다. "여, 장생포로 시집오고부터. 우리 아저씨가 셋째 아들인데, 우리 시어마시가 자꾸 내하고 같이 살고 싶다고 해갖고 시집살이 안 살았나. 그러다 좀 있다가 시어마시 초상 치르고 시아부지가 손님을 대접해야 된다고 해갖고. 그래가 한 번 담가보자 싶어가지고, 했다." 하신다. "할아버지는 어찌 만나셨어요?", "뭐가 그리 궁금한 기 많노? 우리 아저씨는, 우리 아저씨가 내한테 연애 거는 거, 내가 인물 보고 깜빡 속았뿌다 아이가"하며 내하 마을에서 할아버지를 처음 만났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농주를 처음 담그고 시부 친구분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그날 할머니의 농주 맛에 시부와 친구분들은 다음 날 정오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주무셨단다. "너무 독하게 담가가 시아부지하고 친구들이 그날 밤에는 집에 못 가고 우리 집에서 다 잤다 아이가. 그래도 우리 시아부지가 머리는 안 아프고 맛있다 하데." 하며 밝게 웃으신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농주의 농도를 잘 맞추지 못했다. 그런 모습을 시어른은 별말없이 '맛있다'로 대답해주신 것이다. 자신을 위해 애쓴 며느리에 대해 경상도 사나이식의 표현인가 보다. 보통의 농주는 빨리 삭히기 위해 소주를 넣는데 할머니의 농주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처음 시어른을 위해 농주를 담근 이후로 여러 차례 담아보았다. 집 안에 손님을 치르거나 마을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농주를 담갔고, 그 맛을 사람들은 좋아했다. 가끔 주변 사람들이 맛있다는 소문을 듣고 얻으러 오기까지 했단다. 언젠가 사촌 조카가 그것을 알고 농주 만드는 비법을 배워 장사를 하는데 그 재미도 쏠쏠하단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술밥이 익는지 부엌에서 압력밥솥 종이 요란하게 울린다. 집 안 가득 술밥 냄새가 구수하게 퍼진다.
골목이 부산스럽다. 크게 드르렁 거리는 포클레인과 자박자박 걷는 바쁜 걸음이 골목 어귀까지 들려온다. 이따금 내려지는 지시에 포클레인은 더 크게 드르렁 거린다. 막바지 더위에 좁은 골목은 소란으로 메워진다.
장생포로를 따라 해양수산청 방면으로 얼마간 달리다보면 즐비한 공장과 컨테이너로 산업현장을 잠시 엿보게 된다. 길을 따라 또 얼마간 달리면 탁-하고 숨을 몰아쉬어야 하는 지점이 있는데, 멀리 가시수평선과 공장, 공장에서 뿜어지는 연기와 그 앞으로 정박한 배가 절묘하게 잘 어울리게 느껴진다. 길은 육지와 바다의 경계로 항과 부두로 이어져 있으며, 이쪽 인간의 삶과 저쪽 자연의 삶을 연결하고 있다. 이쪽에 늘어선 낮은 건물의 잡화점, 편의점, 빵 가게, 음식점, 은행 등을 보면 도시와 다를 것도 없이 '이곳 역시 사람 사는 동네이구나!'하는 새로운 감흥도 밀려오게 만든다. 큰 길에서는 우선 '어디 주차할 곳이 없나?'부터 찾아야 한다. 도로변에 주차된 차들이 많기도 하고 도로 폭이 좁은 이유이기도 하다. 도로의 안쪽에는 주택가가 모여 있는데, 말 그대로 그동안 주민들은 불편함이 많았다. 그래서 지지난해부터 소방도로 설비와 공영주차장 공사 등의 사업을 구청에서 진행 중이다.
김애자 할머니 댁은 주차장 공사가 한 창 진행되고 있는 골목 앞이다. 바짝 열이 오른 시월의 더위를 참아가며 바삐 움직이지만, 마음은 급하나 진행속도는 더디다. 오늘따라 더위가 야속하다. 그런데 웬일인지 할머니도 바쁘다. 그도 그럴 것이 남의 일도 애가 쓰여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성격 때문인 것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통장 일에 바쁘게 하루를 보냈단다. 그래서 올해에는 조금 시원섭섭해졌다. 잠시 후 방문하겠노라고 연락을 넣고 할머니 댁을 방문했을 때, 할머니는 무척 바빴다. 구청 직원의 요청으로 통장을 불러주었고, 택배를 보내려 짐을 만들고 택배 직원이 오기를 기다렸다. 며칠 전에는 더위가 안쓰러워 주차장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점심으로 국수도 삶아 내어 놓았다. 가끔씩은 시원한 커피도 타고, 음료수도 내어 준다. 귀찮지 않으시냐는 질문에 "내가 뭐 하는 게 있나요? 괜찮아요."라며 구수하게 웃으신다. 그러면서 요즘은 얼굴 마사지도 다니고, 동네 친구들도 만나러 다니느라 더 바빠졌다며 자랑이시다.
담장 한 장 사이로 안의 풍경은 밖과 다르다. 완전히 다른 세상인 듯하다. 대문을 들어섰을 때 마당은 고요함과 친밀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한눈에 들어오는 소박한 마당의 전경 때문이다. 두 그루의 석류나무와 한 그루의 한라봉 나무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놓았다. 주렁주렁 열매를 맺어 놓은 나무의 모습은 '가을이잖니!'하고 온전하게 말하는 것 같았다. 마당 한가운데 자리 잡은 새빨간 고추에도 한 해 동안 빚어낸 노력에 대한 기쁨이 묻어있다.
계단 위의 화분에는 커피나무를 심어 놓았다. 어디서 이런 나무들을 구해 심었는지 물어보았다. "우리 영감 짓이에요." 하신다. '짓?'하며 놀라자, 웃고만 만다. 현관을 들어서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정면에 보이는 큰 시계이다. 조타핸들을 이용해서 만들어 고풍스러운 멋을 자아낸다. 어디서 이런 멋진 장식 시계를 구했나 싶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할아버지 짓이란다. "할아버지는 도대체 뭐 하시는 분이세요?"하자 "우리 영감이요? 우리 영감은 선장이에요."한다. "와- 정말 멋있는 직업을 가지고 계시네요!"라고 말하니, "우리 영감이오, 아주 재밌어요."라며 겸연스레 웃으신다.
잠시 망망대해의 끝없이 펼쳐진 바다에서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 선장과 선장의 진두지휘 아래 일사불란으로 움직이는 선원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런 모습을 익숙하게 영화에서 보아오고 멋있게 느꼈던 터라 새삼 선장이란 직업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궁금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어떻게 만나셨어요?" 할머니는 특유의 시원한 웃음오로, "우리 아저씨요?"하고 말씀을 잇는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외동 삼사해상공원 근처의 한 동네의 윗집과 아랫집에서 한 날 한 시에 태어났다. "그러면? 가만, 생일이 같아요?" "예, 우리 아저씨랑 내랑은 생일이 같아요. 50년 12월 2*일. 주민등록번호도 50122*이에요." "우와- 정말요? 너무 놀라워요." 할머니의 웃음이 한층 커진다. "얼마 전에 우리 아저씨가 신용카드를 새로 발급받았는데, 받을 때 누가 받았는지 확인을 하잖아요? 그래서 카드 배달 온 사람이 내 주민번호를 불러달라캐가 불러주까네 아니라고 해요. 자꾸 할매 거 아니라고 해서, 그래서 내 주민등록증을 보여줬잖아요. 그 사람도 그리 신기해하고 놀랍디다." 설마? 하는 마음에 "어쩜, 아주 어릴 적부터 사귀었어요?" 어린 시절 두 분은 동네 동갑 친구로만 자랐고, 국민학교, 중학교를 같은 학교로 다녔지만 같은 반이 된 적은 없다. 동년배로 그저 소꿉으로만 20년을 넘게 살아오다가, 20살이 넘은 어느 날 남자 여자로 눈에 들어와서 그때부터 사귀게 되었단다. 어린 시절 할머니는 무남독녀로 친정에서 곱게 컸다. 그런데 직업이 선장인 할아버지 덕분(?)에 돌아가신 시부모님 봉양도 하고 시동생들 공부와 출가에도 힘썼다. 삼 남매가 태어나서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지내셨단다. "외롭지 않으셨어요?"하니, "이웃하고 어울려 우리 애들하고 여행도 다니고 좋았죠."하신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남편은 멀리 바다에 나가고 부모님 봉양과 집안 대소사며, 아이들 육아까지 힘들고 외롭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지금은 자녀들이 모두 출가하여 한 번씩 다녀가고, 바다로 나간 할아버지도 가끔씩 돌아오니 이제야 진짜 친구처럼 지낸다고 한다.
"오늘 만들어주실 요리가 가자미조림인데, 어떨 때 주로 하세요?", "그야 우리 영감 오는 날이지요. 아님 아이들이 놀러 오거나." 지당하신 말씀이시다. 멀리 바다에 나가 보름이나 한 달에 한 번 집으로 오시는 할아버지가 집에 올때면, "어디고? 내 집에 간데이" 하고 전화를 넣어준단다. 그럼 밖에서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와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가자미조림을 준비한다. "내는 우리 영감이 언제 올 줄 몰라서, 언제든지 할 수 있게 냉장고에 넣어 준비해둬요. 우리 영감이 좋아하니까 우리 아들도 좋아하고 딸들도 좋아하고, 며느리도 자꾸 먹어보니까 좋아하고, 그래요. 그리고 항상 가자미를 준비해두고 있으니까 갑자기 손님 올 때도 좋아요." 할머니의 요리법은 친정에서 익숙하게 해 오던 방식대로, 3월쯤 꽃샘바람을 맞고 잡은 것으로 시장에서 사와 꼽꼽하게 한 번 더 말려 냉장고에 넣어 둔다. 그것을 할아버지가 집으로 오실 때 양념만 재워 바로 해 드신단다. 온 가족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가끔씩 오는 아들과 며느리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딸과 손자들이 집에 올 때도 내어 놓는다. "아이고 마-, 우리애들은 밖에서 담근 젓국도 잘 안묵고 집에서 담근 거는 잘 먹어요." 들어보니 멸치나 새우도 직접 젓갈로 담그고, 간장도 오래 묵혀 숙성시켜 드신단다. 손이 부지런하고 솜씨도 좋으시다. "솜씨는 무신, 누구나 다 해 먹는 밥상 반찬이지요." 하시며 칭찬에 손사래를 치신다. 방금 따끈따끈하게 지은 밥에 양념이 잘 저민 가자미조림이 완성되었다. 직접 농사지은 고추와 가을무를 곱게 썰어 초고추장으로 버무려 무채 나물을 만들고, 콩나물과 고사리나물, 무 나박김치도 곁들였다. 그 모양과 맛이 좋다.
"우리 집 아저씨는 빠지지 않고 끼니마다 찾아와. 삼식이야 삼식이. 그래서 내가 죽을 판이야. 밥 먹을 시간되면 딱 오거든. 도대체 이해가 안 돼. 점심시간에 갑자기 회사 사람을 데리고 오질 않나. 근데 회사 사람들이 자꾸 우리 집 가자 칸대. 된장도 맛있고 반찬도 맛있고 그러니까." 꽃다운 나이, 25살. 송순화 씨는 결혼을 하면서 남편을 따라 장생포에 왔다. 충청도가 고향인 그녀는 서울에 있는 직장에서 남편을 만났다. "우리 아저씨가 날 계속 따라다녔어. 지금은 그라 하믄 절대로 아니라 그래. 근데 그 당시에는 일하고 있으면 뒤에 와 있고 그랬어." 안 만나려고 했던 그녀의 마음을 돌린 것은 남편의 한 마디였다. "한 날은 우리 아저씨가 날 양지다방으로 데려갔어. 하도 안 만나주니까 친구들이 한 번만 만나나보라 카대. 갔더니 자기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엄마만 계시는데 자기한테 잘 못해도 되는데 엄마한테만 잘 해주면 된대. 그래서 내가 와, 이런 세월에 저런 효자가 어딨노. 저리 부모님한테 잘 하는 사람이믄 마음도 괜찮겠다 했지. 그걸 난 몰랐다니까. 그게 시집살인 줄."
"우리 시어머니가 요리를 엄청 잘하시니까 나는 잘 하는 축에도 못 껴." 시집오기 전에는 요리를 못했다던 송순화 씨. 셋째 아들인 남편과 결혼하면서 시어머니와 같이 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녀는 시어머니를 37년간 모시면서 한 집안의 가풍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효자 아들과 결혼한 덕에 지금은 음식의 고수가 되었다. "우리 어머니가 원래는 고래를 삶아서 팔고 그러셨어. 그러다 포경이 금지되면서 장아찌를 팔게 된 거지. 혼자서 그렇게 4남 1녀를 키우셨으니 대단하시지." 시어머니의 손맛은 대단했다. 주로 뽕잎, 무, 미역 장아찌를 담으셨는데, 하루 장사 음식을 다 팔아도 사람들이 더 없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특히 뽕잎 장아찌는 봄철에만 나는 나물이기에 더 귀했다. 장아찌는 제철에 많이 나는 야채류를 이용하여 간장이나 소금에 절이거나 고추장에 넣었다 오랜 후에 먹는 전통발효음식의 대표로써 비타민과 무기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값싸고 영양 많은 저장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시어머니의 손맛을 물려받은 송순화 씨의 장아찌는 직접 담근 고추장과 된장을 이용해 맛을 낸다. 말린 무에 양념을 넣고 버리는 과정을 세 번이나 반복한다. 햇볕에 하루 동안 바싹 말리고도 무에서 물이 나오는 까닭이란다. 음식 하나에 기다림과 장성이 가득 담겨있다. 그래서인지 삼식이 남편은 오늘도 식당을 찾지 않고, 끼니때마다 집으로 온다.
장생포의 여름은 푸른 은빛이 출렁인다. 바다를 업으로 삼은 뱃사람들의 퇴근길이 강렬한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린다. 지금은 배가 나란히 정박해있는 이 곳은 장생포의 옛 나루터가 있는 곳이라 했다. 종종 장생포 초등학교 학생들이 뱃길을 이용해 등교했다는 이 곳은 이제 사람들이 들락날락 하는 소리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고요한 첨벙첨벙 소리만이 지배하고 있었다. 아나고를 잡는 주낙이 켭켭이 쌓인 이 곳에 언젠가 박영숙 할머니의 손길도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의 인생은 바다만큼이나 파란만장했다. "어렸을 때 엄마, 아빠 있어도 같이 못 살았어. 우리 집에 사연이 좀 있었거든. 나랑 동생 둘을 할머니한테 맡기고 돈 벌러 가셨어. 얼마간은 할머니랑 같이 지냈는데 큰 집으로 옮기면서 힘들어졌어. 큰집 식구가 우리까지 포함해서 11명이었거든. 근데 내가 어렸을 때부터 눈치가 좀 있었나봐. 큰집도 먹고 살기 바쁜걸 아니까 9살 나이에 동생들 데리고 엄마 찾아 목포로 떠났어."
엄마를 찾아 나서는 길은 모험이었다. 9살 어린 나이에 동생들을 이끌고 제주도에서 나오는 것 자체가 고난이었다. 파도가 넘실거릴 때마다 선박의 사무장은 애가 탈 것이 아니라고 으름장을 내놓았다. 도착한 목포역도 파라다이스가 아니었다. 엄마를 찾는 일은 9살 나이에겐 벅찬 높이였다. 그렇게 엄마를 찾겠다는 희망이 희미해질 때쯤 동생둘을 고아원에 떠나보냈다. "그렇게 동생들을 보내고 다시 제주도로 돌아왔어. 9살 나이인데도 먹고 살겠다며 온갖 밭일이랑 물질하기 시작했어. 14살부터는 해녀도 하고. 덕분에 이렇게 먹고 사는 법을 터득했지." 할머니는 지난날의 설운 마음을 물리치고자 고된 인생을 해학으로 넘기셨다. 그러나 꽃다운 청춘에 고생만 하신 것은 아니었다. 제주도에서 일이 지쳐 완도로 넘어갈 때, 할머니는 지금의 짝지인 할아버지를 만나셨다. 1살 연하라는 그. 27세 할머니의 눈엔 그가 누구보다 멋있어보였다고 회상하신다. "우리 아저씨는 굉장히 멋쟁이였지. 그런 사람과 같이 사니까 일은 힘들어도 행복했어." 할머니는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수줍게 고백하셨다. 그 당시 멋쟁이 연하의 남편과 함께 꿈 꿨을 할머니의 로망스는 뭐였을지 궁금해진다.
"우리 아저씨는 배 운전만 했지. 내가 다 낚싯줄 댕기고, 고기 따고..." 할머니의 바다 경력은 무려 25년. 태산 같은 일 앞에서 한 번도 수그라든 적 없었던 한 평생이었다. 선주인 할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며 장어, 갈치, 오징어를 잡았다 하신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어장이 풍부했던 장생포 바다였다. 깜깜한 밤의 바다는 무서웠다. 잔잔하게 흔들리는 먹빛 파도가 어느 순간 돌변하여 사나워지는 것이 밤바다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물때를 맞추기 위해선 새벽마다 어린 아이들을 집에 두고 나와야만 했다. 5개월 된 아들을 두었을 때도 매일같이 새벽 3시에 나와 오후가 돼서야 집에 돌아갔다. 낚시 갈고 손질하면 금방 해가 저물었다. "어릴 때 애들 소풍을 한 번도 따라 가주지 못했어. 그때는 먹고 사느라 바빴지. 힘들어도 배 나갔다오믄 돈이 생기니까, 애들두고 남편한테 '갑시다, 갑시다' 했어. 암만 힘들어도 무조건 가는기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마음 아픈 일이야. 그래서 지금은 우리 손주들 무슨 일 있다고 하면 다 따라가. 옛날에 우리 애들한테 못해준거를 손주들한테라도 해줄라고." 바다 위의 어미를 먹빛 파도 앞에서도 굳세게 하는 것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들이었다. 그 어미의 가슴을 찢긴 것은 새벽 바다의 칼바람도 아닌 본인 자신이었으리라. 할머니에게 바다는 가족을 맥여 살리는 직장이자 애린 마음이 온갖 담긴 눈물이었다.
한 평생 배를 타셨던 할머니에게 생선을 뗄레야 뗄 수 없는 훌륭한 식재료였다. 갓 잡아온 생선은 맛이 달랐다. 할머니에게 생선은 그 어떤 식재료보다 싱싱한 것이었다. "배 타고 오면 거의 생선 끓여서 먹었지. 양식장에서 파는 거랑은 맛이 달라. 비교할 수도 없어. 그 중에서도 우럭은 안 팔고 우리 식구 줬어. 좋은거일수록 식구 맥여야지."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그리 바다 비린내를 오래 맡으면 징할 법도 한데 할머니네 가족은 그게 아니였나 보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더 좋은 것을 먹이려고, 자식들은 또 그런 부모님의 정성을 알고 있어서 언제나 매운탕을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요즘에 우리 아저씨는 매운탕 안 잡숴. 갓 잡아온 걸 먹던 습관이 있으니까 아무리 횟집에서 제일 싱싱한 걸 사다줘도 맛이 없대." 갓 잡아온 것과 비교할 수 없다만은 할머니께 싱싱한 횟감 고르는 법을 여쭤보았다. 25년 경력 할머니의 눈이 예리하게 아가미를 가리켰다. 아가미를 들춰봤을 때 빨간 것, 몸에 상처가 없는 것이 좋은 재료라 한다. 매운탕을 많이 끓이셔서 그런지 요리 하시는 할머니의 손이 가벼워 보였다.
『고려사』에 고려 후기 전라만호였던 유탁(柳濯, 1311~1371) 장군이 장생포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다고 한다. 왜구는 토벌군의 위용에 두려움을 느끼고 스스로 철수했으며, 승리한 토벌군은 그 기쁨을 「장생포곡(長生浦曲)」에 담았다고 한다. 『고려사』 악지(樂志), 속악(俗樂), 『증보문헌비고』 악고(樂考)의 장생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에는 “시중 유탁이 전라도에 나가 주둔하면서 위엄을 갖춰 은혜를 베푸니, 군사들이 그를 어렵게 여기면서도 좋아했다.
왜적이 순천의 장생포를 노략질함에 미쳐 구원병을 이끌고 나아가자, 왜적이 멀리서 보기만 하고도 두려워하며 곧장 무기를 거두어 돌아가 버렸다. 군사들이 기뻐하며 이 노래를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만덕사(萬德社)에서 왜적을 격파한 유탁이 포로를 다 돌려보냈는데, 이후 다시 침범이 없어 유탁이 이 노래를 지었으며, 군사들이 부른 노래는 동동(動動)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장생포에 관한 고려시대 기록은 고려시대 선종(宣宗) 연간이라는 연호(年號)와 장생사(長生寺)라는 사찰 명칭이 기록되어 있는 동종(銅鐘)이 여수시 안골에서 발견됨으로써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장생포(長栍浦)라는 지명과 관련해 여수 지역에 장승이 많은 것과 연관 짓기도 한다. 남해안에 유독 벅수[장승]를 많이 건립했는데, 장생포라는 지명이 여기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왜적의 침입이 많은 장소에 눈을 부릅뜬 사람 모양의 장승을 세워둠으로써 왜적을 물리치고자 했던 선조들의 기원이 담긴 것이라 추측되기도 한다.
여수 선소는 이순신 장군이 배 만드는 기술을 지닌 나대용 장군과 함께 거북선을 만든 곳으로 유명하다. 거북선은 여수에 있던 본영 선소, 순천부 선소, 방답진 선소에서 건조되었다고 추정한다. 『여지도서』(1760년)에 “장생포는 부의 동쪽 60리에 있고, 본부 전선을 정박하는 선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순천부 지도에 선소라고 표시되어 있어 장생포가 순천부 선소로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