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밥 다음으로 가장 많이 먹는 음식은 아마도 국수와 같은 면(麵) 종류일 것이다. 면을 만드는 재료로부터 시작해서 국수에 들어가는 재료와 조리법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는 매우 다양하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가짓수에 있어서는 면 음식의 종주국이라고 알려진 중국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한국인의 국수에 대한 사랑은 조리법이 간단하여 요즈음도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는 인스턴트 라면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2018년 세계인스턴트라면협회(World Instant Noodles Association)의 자료에 의하면 2017년 한국인은 1인당 연간 73.7개의 라면을 섭취해 라면 소비량 세계 1위로 집계되었다.
사실 인스턴트 라면을 최초로 개발한 나라는 일본이다. 1963년 삼양식품이 일본의 기술을 도입하여 국내에서 최초로 인스턴트 라면을 제조하여 판매하기 시작한 이래 불과 반세기 만에 종주국 일본을 넘어서는 라면 대국이 되었다. 현재 한국의 라면제품이 종주국 일본을 제치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각광을 받으며 음식한류의 첨병역할을 하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라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의 국수문화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우리의 것만 고집하지 않고 외래의 음식문화까지도 과감히 수용하여 우리 것으로 재탄생 시키는 문화적 개방성과 창의성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단적인 예를 하나 더 들자면 자장면에서 확인된다. 자장면은 구한말 인천 개항장에 유입된 중국 노동자들인 쿨리(苦力, Coolie)의 식사로 출발한 음식이었다. 자장면은 본래 ‘작장면(炸醬麵, 자장미엔)’이라는 중국 산동지방에서 건너온 외래음식에서 비롯되었지만 10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한국인의 국민음식이 되었다. 심지어 지난 2006년 당시 문화관광부에서 발표한 ‘대한민국 100대 민족문화상징’에 우리 전통음식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국수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1123년(인종 원년) 북송(北宋)의 사신으로 고려에 체류하며 고려의 풍속을 기록으로 남긴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제33권 ‘궤식(饋食)’편에는 고려의 항구에 도착한 중국 사신에게 대접한 “10여 가지 음식 중에 국수가 으뜸이다(食味十餘品 而麵食爲先)”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사찰에서 국수를 만들어 파는 제면업을 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찰은 국수를 만드는 절이라 하여 ‘조면사(造麵寺)’로 불렸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세종(世宗) 때 어의(御醫)를 지낸 전순의(全循義)가 1450년경에 지은 『산가요록(山家要錄)』에 다양한 국수 조리법을 소개하고 있다. 『산가요록』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조리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면법(麵法)’이라는 항목에는 계란면(鷄卵麵)ㆍ만이창면(漫伊昌麪)ㆍ생치저비(生雉著飛)ㆍ세면(細麵)ㆍ육면(肉麵)ㆍ진주면(眞珠麵)ㆍ창면(昌麪) 등 다양한 종류의 면요리를 선보이고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도 국수문화가 가장 발달된 지역을 꼽는다면 어디일까? 그 대답은 단연코 경상북도 지방이며, 그중에서도 대구광역시일 것이다. 대구광역시는 근현대 시기 이후 경상도 지역의 국수문화 중심지 역할을 도맡고 있다. 이렇게 경상북도와 대구광역시가 국수로 이름난 것은 이 지역의 사회사와 지리적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이래 지금의 경상북도의 경주ㆍ대구ㆍ상주ㆍ성주ㆍ안동ㆍ예천 등 여러 지역에는 퇴계 이황을 종사(宗師)로 하는 영남유학을 추숭하는 지방사족들이 세거하였다.
특히 ‘안동국시’로 이름난 안동은 퇴계 이황을 배출한 영남 성리학의 본산지이자 안동김씨, 안동권씨, 진보이씨, 예안이씨, 풍산류씨 등 명문거족이 운집한 양반의 고장이었다. 또한 대구는 조선 중기 이후 경상감영이 주재하는 경상도 행정의 중심지였다. 한편 안동시를 비롯한 예천군과 영주시 등지의 경상북도 북부지역은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이 분기하는 산지 사이에 위치한 지형으로 예로부터 서늘한 기후와 습기가 적고 건조한 토양에서 잘 자라는 메밀이나 밀을 많이 재배하던 지역이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지방사족의 거주 비율이 높았던 사회적 배경과 메밀이나 밀의 산지였던 지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오래전부터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국수문화가 발달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전체 소비량 가운데 99%를 수입에 의존하는 밀가루는 쌀보다도 못한 흔해빠진 곡물 취급을 받지만 근대 이저까지만 해도 ‘진말(眞末)’이라고 불릴 정도로 귀한 고급식재료였다. 진말은 우리말로 해석하면 ‘진짜 가루’라는 말이 된다. 우리나라의 기후와 토질은 물론이고 쌀농사와 이모작을 할 수 없었던 밀은 고려시대에도 중국에서 수입해 먹을 정도로 귀하였다. 그러다 보니 전통시대에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매우 귀한 음식에 속했고 주로 왕실이나 여유가 있는 반가(班家)의 음식이었고, 민가에서는 잔치나 제사, 귀한 손님 대접 때나 맛볼 수 있던 음식이었다. 이러한 역사와 지리적 배경을 바탕으로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건진국시, 제물국시 등 다양한 국수문화가 발달하였다.
국수와 관련하여 “국수는 밀가루로 만들고, 국시는 밀가리로 맹근다”는 우스갯말이 있다. ‘국시는 국수, 밀가리는 밀가루, 맹근다는 만들다’의 경상도 방언인 것쯤은 누구나 알 법하다. 국수에 대한 경상도 사람들의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의미가 경상도 방언에 투영된 말이다. 경상북도 지역 국수의 역사는 경상북도 영양군 재령이씨 집안의 안동장씨(安東張氏)가 1670년경 저술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한글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통해 알 수 있다. 17세기 경상도 지역 양반가의 음식문화를 알 수 있는 『음식디미방』에는 ‘난면, 별챡면, 싀면, 챠면’ 등의 면을 만드는 방법과 그러한 면을 이용한 음식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에 한글로 ‘챠면’이라고 기록된 ‘착면(着麵)’의 조리법은 면을 만드는 방법에서 현재의 칼국수의 원형에 해당하는 음식이다.
근현대 이후로는 대구광역시가 경상도 국수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대구는 전국에서 밀가루 소비가 최고인 것은 물론이고, 1일 국수 소비량도 전국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다. 또한 대구광역시에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국수공장인 풍국면이 있고, 토종 국숫집 중 프랜차이즈로 성공한 업소도 가장 많은 지역이어서 이른바 ‘국수의 메카’로 불리기도 한다. 지방자치제 이후 각 지역마다 지역문화를 부각하여 관광산업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일환으로 해당지역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을 지정하여 홍보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대구광역시에서는 2006년 대구광역시를 대표하는 향토음식 10가지를 이른바 ‘대구10味’라 명명하여 지정하였다.
그 열 가지 대표음식 중 밀가루를 이용한 음식은 누른국수, 납작만두, 야끼우동 등 무려 3종이나 지정되었고, 그중에서도 국수 종류는 누른국수와 야끼우동 2종이 포함되었다. 그중에서 누른국수는 대구광역시의 10가지 대표음식 중 가장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닌 향토음식이다. 누른국수는 홍두깨로 반죽을 밀어 국수를 만든다는 의미로 경상도식 칼국수의 별칭이다. 칼국수는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까지 이어졌던 밀가루 무상원조와 1970년대 분식장려운동의 영향으로 인해 전국적인 분식으로 자리 잡은 음식 중 하나이다. 대구에도 1970년대 무렵 칼국수를 상품음식으로 만들어 파는 식당들이 생겼는데, 대구백화점 남문 맞은편의 ‘경주할매칼국수’, 명덕네거리 근처의 ‘명덕할매집칼국수’,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의 ‘동곡할매손칼국수’ 등이 대표적인 칼국수 노포(老鋪)이다.
칼국수는 만드는 방식에 따라 크게 건진국수와 제물국수의 두 가지로 나뉜다. 건진국수는 면을 따로 삶아서 찬물에 씻어낸 뒤 준비한 육수에 넣고 고명을 얹어 낸 국수를 말한다. 이에 반해 제물국수는 면을 따로 삶아 준비하지 않고 육수에 바로 삶아낸 국수이다. 즉 제물은 ‘음식을 익힐 때 처음부터 부어 둔 물’을 의미한다. 제물국수는 건진국수에 비해 조리과정이 간편하고 면을 익힐 때 우러나는 밀가루와 육수가 혼합되면서 약간은 걸쭉하면서도 국물 맛이 깊은 특징이 있다.
그래서 예전부터 깔끔한 건진국수는 양반의 국수이고, 걸쭉한 제물국수는 서민의 국수로 여겨지기도 했다. 대구 누른국수는 제물국수에 속하는 칼국수이다. 멸치와 다시마로 진하게 우려낸 멸치육수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원래는 반죽을 칼로 얇게 썰어 멸치육수에 끓이다가 야채를 넣어서 한소끔 더 끓여 먹는 음식이다. 그런데 최근의 누른국수는 직접 면을 만들기보다는 제면소의 면을 받아서 사용한다. 일반 칼국수의 면이 거친 반면에 누른국수의 면발은 좀 더 가늘고 곱다. 채소는 얼갈이나 청방배추를 쓰고, 고명으로는 김, 볶은 쇠고기, 호박채 등을 올린다.
칼국수는 밀가루를 반죽하여 칼로 얇게 썰어서 장국에 끓인 음식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칼국수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자료가 없어 정확한 연대를 확정하기는 어렵다. 칼국수는 우리나라에서 한글로 표기된 조리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1670년경 안동장씨(安東張氏) 부인이 저술한 『음식디미방』에 메밀가루를 재료로 만든 절면(切麵)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음식디미방』 이후 『주방문(酒方文)』과 같은 조선후기의 조리서에 소개된 칼국수의 주재료는 모두 메밀가루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칼국수 재료로 점성이 떨어지는 메밀가루를 사용한 것은 밀가루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123년(고려 인종 1) 북송(北宋)의 사신 서긍(徐兢)이 기록한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나라(고려) 안에 밀이 적어 모두 상인들이 송나라 수도의 동쪽 지방[京東道]에서 사온다. 그러므로 면(麵)값이 매우 비싸서 큰 의식[盛禮]이 아니면 쓰지 않는다(國中少麥 皆賈人販自京東道來 故麵價頗貴 非盛禮不用)”고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밀 재배에 적합한 지역이 아니어서 밀이 귀했고, 밀가루로 만든 국수도 오래전부터 귀한 음식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요즘도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미혼 남녀에게 결혼의사를 타진할 때 “언제 국수 먹여 줄거야?”라는 말을 심심찮게 듣는다. 이 말은 긴 국수가락이 무병장수를 상징하는 동시에 부부가 오래도록 해로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깃든 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래서 국수는 옛날에는 혼례나 회갑잔치 같이 경사스럽고 특별한 날의 잔치에서나 맛볼 수 있는 고급음식이었다.
칼국수를 비롯한 밀가루 식품이 저렴하고 흔해 빠진 서민음식으로 대중화 된 것은 현대에 들어서의 일이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미국에서 밀가루가 무상원조품목으로 대량 유입되면서부터 밀가루는 가난한 서민의 식재료가 되었고, 칼국수를 비롯한 분식문화가 본격적으로 발달하였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칼국수뿐만 아니라 짜장면, 떡볶이 등 분식류가 전국음식으로 퍼지게 된 것도 미국에서 무상으로 원조한 밀가루가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녹차칼국수는 밀가루에 녹차가루를 넣어 반죽하여 만든 면을 멸치장국에 넣어 끓인 경상남도 하동군의 향토음식이다. 전통적으로 녹차의 산지인 하동군에 소재한 쌍계사를 비롯한 불교사찰에서는 다도(茶道)문화와 더불어 녹차를 이용한 다양한 음식이 발달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녹차칼국수였다. 사찰에서도 차밭을 만들고 찻잎을 따 차를 제조하였다. 사찰에서는 육식을 하지 않기 때문에 표고버섯과 다시마를 이용하여 우려낸 장국에 녹차가루와 밀가루를 섞어서 만든 면을 넣어 끓인 국수가 바로 녹차칼국수의 원형이다. 그래서 사찰에서 유래된 음식이라 하여 사찰국수로 불리기도 한다.
녹차칼국수의 주재료인 녹차에는 레몬의 5배에 해당하는 비타민C와 카테킨이라는 떫은맛을 내는 폴리페놀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는 식품이다. 카테킨은 몸 안의 유해한 활성산소를 제거하는 강력한 항산화작용이 있어 심혈관 질환과 암 예방에 효능이 크고, 노화방지와 면역력 증강에도 도움이 된다. 또한 카테킨은 지방분해기능이 있어서 기름진 음식을 먹은 후 녹차를 마시면 지방질이 몸속에 축적되는 것을 방지한다. 중국인들이 주로 기름에 볶거나 튀긴 음식을 섭취하면서도 살이 찌지 않는 것은 차를 물처럼 많이 마시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에서 차의 효능이 드러난다. 또한 녹차에는 칼륨을 비롯한 아연, 철, 구리, 망간과 같은 무기질을 함유하고 있어 체내 신진대사에 여러 가지 유익한 작용을 한다.
팥칼국수는 이름에서도 짐작되듯이 팥죽과 비슷한 팥 국물에 칼국수의 면을 넣어 익힌 전라북도의 향토음식이다. 그런데 팥칼국수라고 하면 왠지 추운 날씨나 겨울에 먹어야 제격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팥칼국수와 관련된 음식인 팥죽은 대대로 12월 동지(冬至)에 먹는 절식(節食)이었고, 칼국수도 뜨거운 장국에 끓여 내기 때문에 더운 여름보다는 추운 겨울에 더 어울려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고문헌을 들여다보면 팥죽과 칼국수가 더운 여름철의 피서음식이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철종(哲宗) 때 좌의정을 지낸 박영원(朴永元, 1791~1854)의 『시곤록(示昆錄)』에 의하면 정월 초하루와 대보름, 삼짇날, 유두, 중양절, 동지 등을 조선시대의 6대 명절이라 하였는데, 해당 명절에는 차례상에 시식(時食)을 올렸다. 그 중 6월 15일에 지내는 유두(流頭)제사에는 수단(水團)을 올린다고 하였다(正朝 上元 三月三日 六月望日 九月九日 冬至六節日 以殷奠行茶禮 … 流頭之水團 … 從時食也). 수단은 쌀가루나 밀가루를 경단으로 빚어 꿀물이나 오미자물에 넣어 먹는 우리 전통음료의 한 종류로 유두날의 절식(節食)으로 알려져 있다.
유두 무렵은 밀 수확이 끝난 시기이므로 수단 외에도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많이 해먹었다. 홍석모(洪錫謨)가 저술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유두날에는 지금의 찐빵에 해당하는 상화병(霜花餠)을 만들어 먹는다고 하였다. 특히 전라도 지방에서는 복달임음식으로 팥칼국수를 해먹었는데, 이는 삼복더위에 먹는 ‘복죽(伏粥)’이라고도 불리던 팥죽을 먹는 습속에서 이어져 온 것이다. 그 역사와 유래는 고려 말의 문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지은 ‘두죽(豆粥)’이라는 시에서 확인활 수 있다.
팥을 삶아 쑨 죽의 붉은 빛이 짙은데, 가을이 왔어도 날은 여전히 무덥고 바람 한 점 없이 쪼이는 햇볕에 온 몸의 열기를 식혀 주고 기운을 통하게 해주는 것이 맛도 석청보다 더 달콤하다(小豆烹爲粥 光浮赤面濃 秋回天尙暑 日照晝無風 淨掃三焦熱 淸凝九竅通 微甘生齒頰 崖蜜謝黃蜂)
한방에서 팥은 성질이 차가운 곡물로 해열효과가 커서 열을 내리는 약재나 음식재료로 많이 쓰였던 점에 미루어 보면, 팥죽은 아주 오래전부터 무더위에 지친 몸을 식혀주고 원기를 북돋아 주는 음식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요즘과는 달리 옛날에는 밀가루가 귀한 음식재료여서 오래된 역사에도 불구하고 팥칼국수는 근현대시기에 들어와서 서민들의 음식으로 대중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건조한 지역에서 잘 자라는 밀은 비가 많은 우리나라 풍토에서는 경작이 제한적이었다. 무엇보다도 보리보다 생장속도가 느려 초여름에 추수하기 때문에 쌀과 이모작을 할 수 없었고, 쌀보다 면적당 생산량이 훨씬 떨어지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결정적으로 밀 재배가 활성화되지 못한 이유이다.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온 북송(北宋)의 서긍(徐兢)이 고려의 문물과 풍속을 기록한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나라(고려) 안에 밀이 적어 상인들이 모두 송나라 수도의 동쪽 지방[京東道]에서 사온다. 그러므로 면(麵)값이 매우 비싸서 큰 의식[盛禮]이 아니면 쓰지 않는다(國中少麥 皆賈人販自京東道來 故麵價頗貴 非盛禮不用)”고 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부터 밀가루와 밀가루로 만든 면이 귀한 식재료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절면(切麵) 또는 도면(刀糆)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칼국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조리서로서 안동장씨(安東張氏) 부인이 1670년경 저술한 『음식디미방』에 제면법과 조리법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밀가루가 귀하였기 때문에 『음식디미방』에서도 면의 재료는 대체로 메밀, 녹두, 칡 등을 주로 언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칼국수를 비롯한 분식문화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고 저렴한 서민의 음식으로 자리 잡았던 시기는 한국전쟁 이후이다. 1950년대는 해마다 보릿고개가 존재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전쟁 이후 식량사정은 극도로 악화된 시기였다. 그러나 미국이 무상으로 원조한 밀가루가 1960년대 말까지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우리 음식문화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전통시대에는 잔칫집에서나 얻어먹을 수 있었던 국수가 대량으로 보급되면서 대중적인 서민의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팥칼국수는 팥물을 끓인 후 가라앉은 앙금에 밀가루나 밀가루에 콩가루를 섞어 만든 면을 넣고 끓여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하여 만든다. 팥칼국수를 먹을 때 전라도 방언으로 ‘싱건지’라 불리는 동치미와 묵은 김치를 곁들여 먹어야 제 맛이라고 한다. 전라북도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부안군의 팥칼국수가 유명하였다. 지금도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에 위치한 부안상설시장과 주변 동중리에는 팥칼국수로 유명한 맛집들이 모여 있어 진한 팥 국물에서 제대로 우러난 팥칼국수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동지(冬至). 이십사절기 중 스물두 번째 절기이다. 우리 조상들은 동지를 기준으로 해가 차츰 움직여 봄기운이 시작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동지는 작은설이라고 부를 만큼 중요한 명절이었다.
동지에는 팥죽을 먹는다. 어른들은 팥죽을 먹어야 겨울철에는 감기에 걸리지 않고 여름에는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했다. 필자가 어릴 때는 동지 전날, 온 가족이 상 끝에 둘러앉아 동지팥죽에 들어갈 새알심을 빚었다. 어머니는 한 살을 더 먹고 싶으면 나이만큼 새알심을 예쁘게 만들어야 한다며 검수를 하셨다. 어린 필자는 작은 손으로 예쁜 새알심을 만들어보려고 찹쌀 반죽을 굴리며 꽤 애를 썼다. 어머니는 늦은 밤까지 팥을 삶으셨다. 팥죽이 완성되면 장독대와 대문 앞에 가져가 가정의 화목을 기원하셨다. 그때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 마음을 이해한다.
민주중보(民主衆報)의 1949년 12월 22일 기사를 살펴보면 ‘오늘이 동지, 연중제일 밤이 길다. 찹쌀팥죽에 일가화목’이라는 동지에 대한 기사를 볼 수 있다.
(중략) 이십사절기도 오늘로써 사분지삼을 지내왓고 이제압호로 소한대한만 넘기면 입춘이다. 오늘은 오래 동안 내려오는 풍습으로 찹쌀새알든 팥죽을 가득히 장독위에다 놓고 동지할머니 시(時)에 마쳐 문판(門板)에 뿌리어 부정을 예방한다는 것이다(기사 그대로 인용, 중략).
동지는 한 해의 시간을 돌아보며 숨을 고르는 시간이다. 작은설, 동지에는 붉은팥의 기운을 빌어 벽사(辟邪)의 예를 갖추고 가족의 평안을 기원했다. 먹을 것이 흔하지 않던 시절에는 겨울 동안 부족해진 영양을 동지팥죽으로 보충했다. 새알심을 빚을 찹쌀이 있는 집은 그래도 풍요로운 동지를 맞을 수 있었다.
물길을 따라 내린 어둠을 더듬어 찾은 곳은 전라도 화순이다. 도곡온천 근처에서 고부(姑婦)가 함께 운영하고 있는 ‘엄마손 팥죽’. 먼저 자리를 잡은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팥죽을 드신다. 전라도에서는 팥죽과 동지팥죽이 다르다. 팥죽은 칼국수를 넣고 동지팥죽에는 새알심이 들어간다. 다른 지역과 달리 전라도에서는 더운 여름에도 팥죽을 먹는다.
“여기선 팥죽에 칼국수를 넣어 먹어요. 새알을 넣은 팥죽은 동지에 많이 먹죠. 그래서 동지팥죽이라고 해요. 팥에 칼국수를 넣어 먹은 지는 오래되었어요. 여름에 많이들 드시는데 팥이 몸의 열을 내려주고 갈증을 해소해 준다고 해서 그런가 봐요. 요즘은 동지 준비하느라 바빠요.”
며느리 김영호 씨 덕분에 팥죽과 동지팥죽을 구분하여 부르는 이유를 대강 알게 되었다. 먹기 전에 식성에 따라 설탕이나 소금을 넣어 간을 맞추면 된다. 팥죽의 칼국수를 한 젓가락 먹어본다. 구수한 팥죽과 쫄깃한 면발이 조화롭다. 아린 맛이 없는 팥죽이 면에 잘 스며들었다. 그리고 보석처럼 빛나는 새알심을 한 숟가락 떴다. 찹쌀 반죽이 부드럽고 쫀득하다. 이제 설탕을 풀어 어린 시절의 아이가 되어 단팥죽으로 만들어 먹을 차례이다. 구수함과 달착지근한 맛이 유쾌한 추억을 떠올리며 넘어간다. 반찬은 시원한 물김치면 충분하다.
동짓날 준비로 바쁜 부엌. 커다란 바구니에는 깨끗하게 씻은 팥이 가득 담겨있다. 손 빠른 여주인(시어머니, 정수임)은 주문이 들어오면, 그 즉시 칼국수를 촘촘히 썰어 끓는 팥물에 칼국수 면을 풀어 넣는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렇게 해야 맛이 있다.
불빛 없는 밤하늘에 제법 큰 달이 떴다. 나이만큼의 새알심도 먹고 팥죽도 든든히 먹었으니, 나무 아홉 짐을 할 만큼의 건강도 얻은 셈이다.
전라남도 화순 ‘엄마손 팥죽’은 시어머니 정수임 씨와 며느리 김영호 씨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 고부(姑婦)의 부지런함과 정성이 음식에 그대로 담겨있다. 며느리는 새알심을 빚는 비법을 알려줄 만큼 친절하고 상냥했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동의 대부도(大阜島)는 서해안에서 강화도를 제외한 가장 큰 섬으로 섬의 명칭도 ‘큰 언덕’을 뜻하는 ‘大阜(대부)’라 하였다. 대부도는 선감도ㆍ불도ㆍ탄도ㆍ풍도ㆍ유도 등 5개의 유인도와 중유도ㆍ장도ㆍ큰가리섬ㆍ작은가리섬ㆍ할미섬 등 12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도에는 남사리를 비롯하여 섬 전역에 분포된 패총유적을 통해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였고, 개펄에 서식하는 굴이나 조개, 그 외의 다양한 해양생물들을 채집하면서 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대부도는 매우 넓은 개펄이 발달해 있어서 인근의 오이도갯벌, 시화갯벌 일대와 더불어 우리나라 서해안 조개의 최대 주산지 중 하나였다. 대부도에서는 바지락ㆍ동죽ㆍ대합ㆍ맛조개 등 다양한 조개류가 생산된다. 이렇게 대부도 갯벌에서 풍부하게 채취하는 조개류를 재료로 이용하여 만들어진 대부도의 대표적인 명물이자 향토음식이 바지락칼국수이다.
칼국수는 우리나라에서 한글로 기록된 조리서 중 가장 오래된 17세기 경상도 영양의 안동 장씨가 쓴 『음식디미방』에 ‘차면법(着麵法)’으로 소개될 정도로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면음식이다. 칼국수는 만드는 방식과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우선 만드는 방식은 ‘건진국수’와 ‘제물국수’의 두 가지로 크게 나뉜다. 건진국수는 면을 따로 삶아서 물에 헹군 다음 준비된 육수를 붓고 고명을 얹어 내는 국수이다. 제물국수는 칼국수 면을 따로 삶지 않고 육수에 함께 끓여 낸 국수를 말한다. 제물은 음식을 익히기 위해 처음부터 끓여 둔 국물을 말한다. 지역적으로 살펴보면 내륙지역에서는 지역에 따라 닭 육수ㆍ사골 육수ㆍ멸치 장국 등으로 칼국수를 끓인다. 해안지역에서는 바지락 장국을 비롯하여 다양한 어패류를 이용한 육수로 칼국수를 끓이기도 한다.
바지락칼국수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원조 밀가루가 대량으로 보급된 이후 대부도와 같이 바지락이 많이 생산되는 해안지역에서 만들어 먹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대부도에서는 시화방조제가 한창 건설 중이던 1980년대 후반 대부도의 시화방조제 연결지점 인근에 위치한 방아머리를 중심으로 바지락칼국수 전문식당이 들어서면서 대부도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등장하였다. 바지락칼국수가 점차 유명해지면서 소문이 퍼지자 1990년대 이후에는 경기도, 충청남도, 전라남도 등 서해안의 연안지역에서도 각기 고유한 조리법과 맛을 지닌 바지락칼국수들이 등장하였고 현재에 이르러는 전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안산 대부도의 바지락칼국수는 다시마와 멸치를 우린 육수에 바지락을 넣고 끓이다가, 바지락을 건져내어 살을 분리해 내고 국물을 걸러 바지락육수를 만든다. 칼국수 면은 밀가루ㆍ 날콩가루ㆍ계란ㆍ소금ㆍ물을 섞어 만든 반죽을 얇게 썰어 육수에 넣고 끓인다. 준비해 둔 바지락살과 납작하게 썬 호박, 굵게 채 썬 양파, 실파 등을 넣고 끓이다가 다진 마늘과 국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이에 비하여 충청남도와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북어ㆍ다시마ㆍ대파ㆍ양파 등으로 육수를 만든다. 우려낸 육수에 바지락, 채 썬 당근과 애호박 등을 넣고 끓이다가, 밀가루로 반죽한 면을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하여 익혀낸 다음 양념장을 곁들인다.
바지락칼국수의 주재료인 바지락은 백합과의 연체동물로서 하천과 바다가 만나는 갯벌에 주로 서식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천광역시 선재도ㆍ충청남도 안면도ㆍ전라북도 줄포만ㆍ전라남도 강진만ㆍ경상남도 사천만 등지가 바지락의 주산지로 유명하다. 바지락은 지역에 따라 바지라기ㆍ반지락ㆍ반지래기ㆍ빤지락ㆍ빤지래이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바지락이라는 이름은 바닷가에서 바지락 껍데기가 켜켜이 쌓인 곳을 밟을 때, 바지락 껍질이 서로 부딪치며 나는 소리 때문에 ‘바지락’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혹은 바지락이 모여 있는 바닷가에서 밤새 바닷물이 출렁일 때에도 바지락들이 서로 부딪치며 나는 소리 때문에 ‘바지락’이란 이름이 유래했다고도 한다.
바지락은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 ‘천합(淺蛤)’, 속명으로는 ‘반질악(盤質岳)’으로 소개되어 있다. 바지락은 살이 풍부하고 맛이 좋다고 하였다. 바지락을 껍데기째 삶으면 시원하고 감칠 맛이 나는 뽀얀 국물이 우러난다. 바지락 국물의 감칠맛은 글루탐산ㆍ베타인ㆍ이노신산ㆍ호박산 등의 아미노산 성분이 어우러져 내는 맛이다. 바지락은 예로부터 간의 기능이 약해서 황달기가 돌거나 쉽게 피로를 느끼는 사람을 위한 식품으로 권하였다. 이는 바지락에 다량 함유되어 있는 타우린과 함황아미노산 성분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의 월곶포구와 오이도해양단지를 지나면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동에 속한 대부도까지 연결되는 총연장 12.7㎞에 이르는 시화방조제가 놓여있다. 1987년부터 1994년까지 7년에 걸친 공사기간을 통해 건조된 시화방조제는 2010년 새만금방조제가 완공되기 전까지 동양 최대의 방조제였다. 옛날에 섬이었던 대부도는 시화방조제의 건설로 연륙지화 되면서, 1990년대 이후 시화방조제와 대부도를 연결하는 관광코스를 많은 외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2005년 경기도는 대부도 방아머리 먹거리타운을 음식문화 시범거리로 지정하여 바지락칼국수를 비롯하여 생선회, 조개구이 등 이 지역에서 나는 다양한 수산물을 맛볼 수 있다.
화산토양으로 이루어진 제주도는 벼농사가 적합하지 않아 메밀, 조, 보리 등 잡곡의 밭농사가 행해졌고, 이를 이용한 조배기(수제비의 제주방언) 형태의 분식문화가 발달하였다. 꿩메밀칼국수는 이러한 제주의 풍토를 배경으로 탄생한 꿩고기 특유의 고소함과 메밀의 조화가 잘 어우러진 향토음식이다.
예로부터 제주도 서귀포 지역에서는 메밀 수확을 마친 늦가을이나 겨울에 마을 남자들이 함께 모여 꿩 사냥을 나가는 풍속이 있었다. 제주 사람들의 가을철 꿩사냥이 오래되었다는 것은 옛 문헌에서도 확인된다. 1702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은 제주도 전 지역을 순력한 사실을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라는 화첩으로 남겼다. 그 중에 「교래대렵(橋來大獵)」이란 그림에는 1702년 10월 11일 지금의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橋來里) 일대에서 산짐승을 사냥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과 포획한 산짐승의 종류와 숫자를 열거하였는데, “꿩은 22마리를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주의 꿩은 산란기인 봄부터 여름까지는 맛이 떨어지다가 가을로 접어들면 맛이 있어진다. 예전에는 겨울에 꿩을 잡으면 눈 위에서 그대로 얼렸다가 가슴살은 육회로 먹고, 다른 부위는 포를 떠서 건조시켜 육포로 만들어 먹었다. 그 외 꿩고기는 만두나 칼국수, 수제비 등을 만들어 먹었고 제주도의 특산품인 꿩엿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메밀은 추운 지방과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랄 뿐만 아니라 파종하고 나서 다른 작물보다 비교적 짧은 60∼100일이면 수확을 할 수 있는 곡물이다. 거친 환경과 특히 재해에도 강한 특성 때문에 메밀은 옛날부터 구황작물로 많이 재배되었다. 그런 까닭에 전통적으로 쌀이 부족했던 제주의 음식은 구황식품의 특징을 많이 지니고 있다. 제주의 메밀 재배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을 살펴보면 15세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제주목」편에 기장, 밭벼, 보리, 피와 함께 메밀을 재배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제주 한라대학교의 오영주 교수에 의하면 꿩메밀칼국수의 원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제주도 음식에서 칼국수는 없고 칼국이 있다. 보통 칼국수와 만드는 방법은 같지만 칼국수 보다 두껍고 넓으며 길이는 짧다. 즉, 육지의 수제비와 칼국수의 중간 형태이다. 먹을 때도 젓가락으로 먹지 않고 국처럼 숟가락으로 떠서 먹는다.
엄밀하게 말하면 꿩메밀칼국수는 ‘칼국수’가 아니라 ‘칼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꿩을 사냥하는 풍속이 없어지면서 농장에서 사육한 꿩고기를 사용하여 일부 향토 음식점에서 판매되는 정도이다. 면의 형태도 밀가루와 메밀을 혼합하여 만든 육지식 칼국수로 변하였다.
꿩메밀칼국수는 저지방 고단백 식품인 꿩고기, 칼슘이 풍부한 꿩뼈에서 우려낸 육수, 루틴 성분이 풍부한 메밀의 전분과 단백질 그리고 비타민이 풍부한 무 등으로 구성된 음식이다. 풍부한 단백질과 더불어 현대인의 영양에서 부족하기 쉬운 칼슘과 비타민을 보충할 수 있어 성장기의 어린이, 노약자 등에게 적합하다.
꿩, 메밀가루, 물, 계란, 깨소금, 무, 소금, 참기름, 청장, 파
조리과정칼국수는 조선시대 가장 오래된 한글조리서인 『규곤시의방(閨壼是議方)』에서는 절면(切麵)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하고 있다. 절면은 주재료로 메밀가루를 사용하고 찰기를 주기 위해 밀가루를 섞고 있다. 이처럼 메밀가루를 주로 사용했던 조선시대의 칼국수는 오늘날의 칼국수와 재료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밀가루 구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밀은 주로 남부지방에서 재배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메밀은 흉년으로 기근이 들면 심는 구황작물로 척박한 땅에서도 재배가 가능했기에 우리나라에서는 밀가루 보다는 메밀을 이용하여 만든 국수가 일반적이었다.
조선시대에 국수는 양반들이나 먹을 수 있는 고급음식이었다. 일반 서민들은 평소에 국수를 쉽사리 먹지 못했지만, 6월 15일(유두)을 전후로 밀을 수확했던 까닭에 햇밀로 부침과 국수를 만들어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즉 한 여름에나 먹을 수 있었던 별미가 칼국수였으며 긴 국수 가락이 장수를 의미한다고 믿고 무병장수를 기원하였다. 칼국수에는 각 지역의 특산물을 장국재료로 이용했기에 그 종류도 다양하고 국수 맛을 살려주는 감자와 애호박은 여름에 풍성한 맛이 드는 작물이기 때문에 칼국수의 부재료로 애용되었다.
현재의 칼국수처럼 밀가루 반죽을 이용하는 조리법은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 나타나 있다. “양밀가루를 물에 반죽할 때에 장을 조금 쳐서 주무르고 여러 번 친 뒤에 방망이로 얇게 밀어 잘게 썬다. 밀가루를 뿌려 한데 붙지 않도록 한 뒤에 끓는 물에 삶아내어 물을 다 빼버리고 그릇에 담은 뒤에 맑은장국을 끓여 붓고 국수장국에 얹는 고명을 얹는다.”고 하였다.
칼국수는 6·25전쟁 이후 대량의 밀가루가 미국의 구호품으로 들어오면서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값싼 밀가루의 보급과 정부의 혼분식 장려정책으로 조선 양반가 음식이던 칼국수가 국민음식으로 변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밀가루, 장국용멸치, 애호박, 건표고버섯, 실고추, 식용유, 설탕, 참기름, 간장, 소금, 고춧가루, 대파, 마늘, 깨소금
조리과정모래가 많고 산세가 험하며, 겨울에는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바람이 부는 강원도는 군부대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자 농산물을 기르기 척박한 지역이다. 그렇기에 강원도에는 보존식이 발달되어 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장류다. 장기간의 저온숙성을 통해 맛이 배가되는 장류는, 강원도의 서늘한 기후에 의해 독특한 맛으로 탄생한다. 그렇기에 고추장, 된장, 간장 등 강원도의 장류는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강원도의 국수라고 하면 대체로 ‘춘천막국수’를 가장 먼저 떠올릴텐데, 춘천막국수의 비결은 양념에 있다. 막국수 맛의 핵심은 강원도 고추장이다. 더위를 물리치기 위해 먹는 강원도 막국수가 있다면, 겨울의 추위를 물리치는 국수는 강원도 장칼국수이다. 강원도 여행은 속초, 양양, 강릉을 차례로 내려오면서 완성되는데, 횟집만큼이나 장칼국수 맛집을 찾아가는 재미도 있다. 반죽을 칼로 직접 썬 티가 팍팍 나는 투박한 두께의 칼국수와 걸쭉한 빨간 국물을 맛보면, 어느 매운탕 못지않은 매콤 칼칼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매운탕이 시원 칼칼한 동해안 바다의 맛이라면, 장칼국수는 걸쭉 칼칼한 태백산맥의 맛이라고 비유해 볼 수 있겠다.
태백산맥의 특산품인 감자, 호박, 달래를 썰어넣고, 멸치와 다시마를 넣어 끓이고, 마지막에는 제일 중요한 재료인 저온숙성 고추장과 된장을 풀어 넣고 끓여내면 걸쭉하고 풍미가 깊은 국물이 우러나는데, 그 맛을 한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다. 자극적이고 새로운 맛이라기보다는, 어딘가 포근한 정이 느껴지는 맛이다. 걸쭉하게 풀어진 뜨끈한 국물 한 숟가락을 떠서 호로록 맛본 후 투박한 국수를 젓가락으로 건져 호호 불어 한입 먹으면, ‘한국인의 맛’이 떠오른다.
달콤매콤한 떡볶이도 생각나고, 해물칼국수의 시원함도 느껴진다. 자칫 텁텁할 수 있는 고추장의 맛을 된장의 구수함이 잡아주어 매콤달콤한 밸런스가 훌륭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어느 재료 하나 특별하지 않다. 한국인의 밥상에서 가장 기본적인 재료들만으로 만들어진 장칼국수! 그 흔하디흔한 재료로 만든 국수 속에 오묘한 맛의 비법이 녹아있다. 우리가 무언가 잘 안될 때면, “초심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을 떠올리듯, 온갖 화려한 재료로 만든 음식이 판치는 오늘날의 식탁에서, ‘별 볼일 없는 재료’로 만들어 투박한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겨 나오는 장칼국수야말로 음식에 있어 기본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음식이라고 생각된다.
울산광역시에는 던지기탕이라는 독특한 메뉴가 있다. 던지기탕은 밀가루 반죽을 수제비처럼 찢어 던져 넣어 만든 음식이다. 반죽을 찢어 던져 만든 국물음식이라 던지기탕이라고 한다. 수제비와 조리법이나 맛이 비슷하다 보니 수제비의 사투리쯤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수제비와는 유래가 전혀 다른 울산광역시에서 자생한 음식이다. 던지기탕은 1980년대 울산중앙시장 새치굴다리인 칼국수골목에서 처음 등장했다. 울산중앙시장은 1922년 개설된 울산광역시 최초의 상설시장이다. 1970년 6월 울산중앙시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울산중앙시장 칼국수골목의 칼국수는 다른 지역 칼국수 집보다 값도 싸고 양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울산대학교 학생들은 새치굴다리에 있는 값싼 칼국수를 즐겨 먹었다.
울산 토박이인 최흥규 박사는 던지기탕이 처음 등장한 시기를 1983년 여름으로 보고 있다. 당시 울산에서는 울산공업축제가 열렸다. 울산공업축제는 1967년에 처음 개최되었고, 1994년부터 처용문화제로 이름을 바꿔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울산광역시의 큰 축제다. 최흥규 박사에 따르면 당시 울산대학교 민속극연구회 ‘얼쑤’ 동아리 학생들이 던지기탕을 처음 먹었다고 했다. 이들은 공업축제에서 길놀이로 참여하였고, 태화강 고수부지에서 민속극 공연을 하였다. 약 50명 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했던 큰 공연이었다.
당시 공연 후에 많은 학생들이 칼국수 골목에 집결했지만 단시간에 많은 학생들에게 칼국수를 빚어 줄 수가 없었다. 칼국수집 주인은 칼국수 면을 뽑는 대신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떼어서 길가에 놓여있는 솥에 던졌다. 이날 한 학생이 이를 보고 던지기탕이라고 불렀고 그때부터 던지기탕이 되었다고 한다. 학생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던지기탕은 정식 메뉴가 되었다. 칼국수보다 양이 많아서 배고픈 청춘들에게 인기였다. 던지기탕은 칼국수골목뿐만 아니라 울산 지역의 명물이 되었다.
던지기탕은 언뜻 보면 만드는 방법부터 수제비와 비슷하다. 밀가루에 물과 소금을 넣고 손으로 치대어 반죽을 만든다. 반죽은 실온에서 30분 숙성시킨다. 멸치, 북어대가리를 넣고 끓인 육수에 밀가루 반죽을 자유롭게 뜯어서 던져 넣는다. 감자, 대파, 양파 등을 함께 넣어 끓이고 소금으로 간을 한다. 고명으로 볶은 애호박과 김을 얹고 깨를 뿌린다. 반찬으로 무석박지 등을 곁들여 먹는다. 수제비와 던지기탕은 반죽에서 뗀 덩이 모양에서 차이가 난다. 수제비 반죽덩이는 일정한 크기인 반면 던지기탕의 반죽 덩이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입안에 가득 찰 정도로 두꺼웠다고 한다. 또한 반죽을 냄비에 넣는 것이 일종의 퍼포먼스가 되어서 손님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울산광역시의 중심지였던 옥교동과 새치마을을 연결하는 새치굴다리 앞 중앙시장까지 던지기탕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10여 곳이 영업을 하다가 2000년 번영교 공사와 함께 철로가 이전하고 도로가 생기면서 중앙시장 칼국수골목의 던지기탕 가게는 하나 둘씩 자취를 감췄다. 지금은 몇몇 가게가 다른 장소로 이전하여 던지기탕의 이름만 이어오고 있는 형편이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수성동 2가에는 ‘본전식당’이라는 음식점이 자리하고 있다. 본전식당이라는 상호는 본전식당의 사장 최복향 씨가 젊은 시절 다른 지역에 갔을 때 ‘본전다방’이라는 다방에 손님이 많은 것을 보고 자신의 식당도 잘 운영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지은 것이라 한다. 본전식당은 칼국수를 비롯해 돼지고기 수육, 돌문어 숙회, 빈대떡 등을 파는 음식점이다. 야들야들한 수육과 쫄깃쫄깃한 문어, 부드러운 맛이 일품인 칼국수까지 본전식당은 이미 맛집으로 유명하다. 1988년 개업한 이래 35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한결같은 맛을 유지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본전식당은 주차장이 없어 자동차보다는 대중교통 이용을 추천한다. 대구 지하철 2호선 대구은행역, 3호선 수성시장역에서 도보로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1980년대 후반, 회사를 다니던 최복향 씨의 남편이 갑자기 일을 할 수 없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최복향 씨는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자신이 직접 음식점을 운영해 보기로 결심하였다. 살고 있던 가정집을 개조하여 칼국수 음식점을 연 것이 본전식당의 시작이다. 하지만 장사 경험이 전혀 없었던 탓인지 개업 초기에는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인건비라도 아끼기 위해 쉬는 날도 없이 혼자서 매일 식당을 열고 음식을 팔았다. 아침 9시부터 저녁 11시까지 쉼 없이, 한결같이 식당을 운영했다. 20년쯤 지나서부터일까. 그간의 노력에 보상이라도 하듯, 입소문을 타고 손님이 몰리기 시작하며 이른바 ‘대박식당’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최복향 씨의 본전식당은 늘 사람이 붐비는 수성동의 맛집이 된 것이다.
본전식당 운영이 잘 되기 시작하면서 최복향 씨는 ‘기부’를 결심하였다. 힘들게 지내왔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중요성을 느꼈다.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에게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었던 것이다. 2010년 무렵부터 매달 백미 20㎏짜리 10포대를 주민센터에 보내 어려운 이웃에게 전하고, 돼지고기 20㎏을 홀트복지관으로 보내고 있다. 또한 대구공업고등학교와 대구일마이스터고등학교, 홀트아동복지회 등에 매달 140만원 정도의 금액을 기부하고 있다. 이렇게 10여 년간 기부해 온 금액이 1억 6천만 원을 넘어섰지만, 최복향 씨는 그 돈이 아깝기는커녕, 자신이 기부한 돈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즐거운 일이라며 미소 지을 뿐이다.
최복향 씨는 도움을 받은 학생들로부터 감사하다는 손편지를 받곤 하는데, 학생들의 진심어린 마음이 너무 기특하다고 한다. 최복향 씨는 자신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 기부를 이어가고 싶다는 소망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고 있는 최복향 씨는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에 선정되었으며 자랑스러운 구민상을 수상하는 등 그녀의 숭고한 봉사와 기부 정신을 인정받고 있다. 이웃에게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는 최복향 씨의 따뜻한 마음과 구수한 칼국수를 맛보러 대구광역시 수성구 본전식당에 가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