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지역의 향토음식은 20세기 초부터 193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당시 인천만의 독특한 여건 속에서 형성되고 일반화되었다. 1883년 인천항 개항과 동시에 인천에는 이른바 ‘제물포 드림’을 이루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개항장에는 각종 건설, 토목공사, 항만공사 등을 위해 많은 노역자와 부두노동자들을 필요로 했다. 이 과정에서 음식업과 숙박업이 번창하였다. 특히 1896년 인천에 요즘의 주식시장처럼 곡물(穀物)을 중개하고 거래하는 선물(先物)시장 역할을 하였던 인천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가 설립되면서 전국의 쌀과 사람들이 인천으로 몰려들었다. 이 무렵부터 인천에 등장하기 시작한 대표적인 음식으로 냉면과 해장국ㆍ짜장면ㆍ추어탕 등이 상품화된 인천의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1897년 경인선이 부설되면서 돼지뼈를 넣고 끓인 감자탕이 인천지역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냉면은 인천과 같은 연안에 위치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서 유입되어 인천지역의 음식으로 정착하였다. 짜장면은 인천개항 이듬해인 1884년 중국 산동에서 건너온 화교노동자인 쿨리(苦力]들과 부두인부들의 간편식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던 짜장면이 120년이 지난 2006년 ‘대한민국 100대 민족문화상징’에 선정될 정도로 인천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추어탕은 인천이 도시화되면서 명맥이 사라졌다가 1990년대 이후 인천광역시 남동구 운연동에서 추어탕음식점들이 하나 둘 들어서면서 추어탕거리를 형성하였고 인천 추어탕의 명성을 지키고 있다. 감자탕은 1897년 경인선 철도를 부설할 때 인부들에게 제공하였던 음식에서 비롯되어 현재는 전국적인 음식이 되었다.
인천의 냉면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1.4후퇴 때 황해도와 평안도의 실향민들이 현재의 인천광역시 중구 만석동 일대에 정착하면서 본격적으로 전파되고 자리 잡게 되었다. 후일 인천광역시 동구 화평동에서 세숫대야냉면이 탄생한 것도 화평동이 바로 만석동 옆에 위치하였기 때문이다. 1950~1960년대에는 인근 공장과 부두의 노동자를 상대로 한 냉면집들이 냉면거리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화평동에 냉면을 파는 가게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1980년대 초부터는 본격적인 냉면거리를 형성하였다. 화평동 냉면은 황해도나 평안도식과는 사뭇 다르다. 면발은 이북식 냉면에 비해 굵고 식감도 다소 거칠다. 더구나 냉면사리에 올리는 고명도 열무 중심으로 단순한 편이다. 일명 ‘세숫대야 냉면’이라는 별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질이 아니라 양으로 승부하는 냉면인 것이다.
처음에는 화평동의 냉면도 일반 냉면과 같은 양을 판매했는데, 주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냉면 사리를 더 달라고 하는 요구가 늘어나자 아예 냉면을 푸짐하게 담아주기 시작하면서 자연히 냉면그릇도 커지다보니 자연스레 세숫대야냉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사는 게 팍팍하고 고달팠던 시절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헤아리고 주린 배를 채워주면서도 가격이 저렴하고 양이 많은 화평동냉면은 마음까지 배불려 주는 소울푸드였다.
한편 화평동냉면거리가 위치한 인천광역시 동구는 제철의 도시이기도하다. 한국전쟁이 종전되던 해인 1953년 6월 한국중공업공사가 설립된 이래 인천중공업, 인천제철 등으로 상호가 변경되었다가 1978년 현대그룹이 인수한 이래 오늘날의 현대제철에 이르고 있다. 당시 뜨거운 용광로 및 쇳물과 씨름하는 제철공장 노동자들에게 회사 근처의 화평동 냉면은 열기로 달구어진 심신을 식혀주는 별식이었다. 더군다나 젓가락질 몇 번에 금방 없어지는 다른 지역의 감질 나는 냉면에 비해 화평동냉면은 이른바 ‘세숫대야냉면’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푸짐한 양을 제공했다.
극한의 작업환경에서 높은 강도의 육체노동과 사고위험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일상적으로 안고 사는 제철노동자들에게 화평동냉면은 힘겨운 노동의 열기를 식혀주는 동시에 배까지 든든히 채울 수 있는 고마운 음식이었다. 제철공장 주변에는 화평동냉면 외에 ‘냉라면’이라는 제철노동자들의 별식도 있었다. 냉라면은 라면을 끓인 후 찬물에 헹군 사리에 찬물을 넣은 다음, 라면스프를 풀고 얼음을 넣어서 김치를 곁들여 막걸리와 먹는 별식이다.
현재 인천광역시 동구 화평로 일대는 ‘화평동 세숫대야 냉면거리(화평동냉면거리)’로 지정되어 인천관광의 명소로도 역할을 하고 있다. 1978년에 문을 연 아저씨냉면을 비롯하여 기와집냉면, 냉면천국, 삼미소문난냉면, 세수대야고향냉면, 왔다냉면, 일미화평동냉면, 화평동할머니냉면 등이 화평동냉면의 맛과 후한 인심을 지키고 있다.
냉면(冷麪) 은 글자그대로 차가운 국수라는 뜻이다. 전근대시기 국수는 주로 메밀로 만들었다. 밀의 생산량이 적었고 그나마 생산한 밀로 주로 누룩을 만들었기 때문에 밀로 국수를 만드는 일은 거의 없었다. 반면 메밀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 산속 화전민의 주식이 되는 곡물이었다. 이런 이유로 전근대시기에는 밀보다 흔한 메밀로 국수를 만들었다. 조선시대에는 메밀국수를 차갑게 해서 먹는 것을 냉면이라 불렀다. 차가운 냉면의 최고는 겨울에 먹는 냉면인데 특히 동치미국물에 말아먹는 겨울냉면은 일품이라고 일제강점기 신문에도 소개될 정도였다.
이러한 냉면이 근대 이후 음식점에서 판매되는 외식으로 각광받았다. 물론 전근대시기에도 냉면이 음식점에서 팔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음식점이 얼마 없었다. 일제시대에 관공서가 많이 생기고, 이 관공서에 사람들이 매일 출근하여 하루 8시간 이상을 일하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점심은 필수적인 식사인데, 이 점심을 파는 음식점이 도시에서 발달하게 된 것이다. 도시의 음식점에서 파는 대표 메뉴 중 하나가 냉면이 되었다.
일제시대 냉면은 평양냉면이 유명하였다. 냉면의 원료인 메밀이 많이 생산된 평양에 외식할 수 있는 계층이 있어 끊임없이 맛을 개발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평양냉면은 평양에서 갈고 닦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서울로 진출하였다. 그리하여 일제시대 서울의 냉면집은 거의 평양냉면집이었다. 『매일신보』 1936년 7월 23알 「냉면 반죽하는 솜씨 여하가 국수맛을 결정」이라는 기사의 앞부분에서 알 수 있다.
‘평양냉면, 해주냉면 다음으로 서울냉면을 손꼽을 만큼 이제는 서울냉면이 냉면 축에서 뻐젓하게 한몫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성냉면은 말하자면 평양냉면의 연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입 까다로운 서울사람들의 미각을 정복해보려고 평양냉면 장사들이 일류 기술자(냉면의 맛은 그 기술 여하에 달렸습니다)를 데리고 경성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이제는 움직일 수 없는 굳은 지반을 쌓아놓았습니다. 여름 한철 더군다나 각 관청 회사의 점심시간이 되면 냉면집 전화통에서는 불이 날 지경입니다.’
냉면이 외식메뉴로 자리잡는 데는 얼음도 한몫하였다. 인공 얼음을 만드는 제빙기술은 1875년에 독일인 린데와 미국인 보일이 암모니아 압축식 냉동기를 개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에는 1910년 부산에 제빙공장이 세워졌고, 연이어 제물포와 원산·군산 등지에도 세워졌다. 이러한 기반으로 여름에 빙수장사가 영업을 시작했는데 빙수에 얼음이 쓰이는 것과 같은 용도로 냉면집에도 얼음이 쓰였다. 1926년, 얼음 한관에 7전씩이라고 하였는데(『동아일보』1926.05.24. 「여름은 어데서」), 이러한 얼음을 냉면집에서도 구입하였을 것이다.
서울의 냉면집은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사는 종로쪽에 있었는데 그래서 위생관리도 주로 종로경찰서가 담당했다. 서린동 89번지 평양냉면옥에서 냉면배달부들이 파업을 벌이면서 임시배달부와 싸운 배달부를 취조한 것,(『동아일보』1931.06.01. 「평양냉면옥 배달부 맹파」), 냉면에 사람의 몸에 해가 있는 나쁜 탄산소다를 사용하였다는 이유로 벌금 15원과 10원을 매긴 것(『동아일보』1934.08.05. 「인체에 유해한 약품사용 냉면업자 엄중단속」)등은 다 종로경찰서 담당이었다.
냉면이 서울과 평양 등 도시에서 유명한 외식메뉴였지만 여름철에는 대형식중독사고의 진원지가 되기도 했다. 냉면에 반드시 들어가는 돼지고기와 쇠고기 편육이 여름철에 상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앞의 『매일신보』기사에서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해마다 여름이면 냉면중독 사건이 처처에서 일어납니다. 사실 여름철 냉면은 까딱하면 배탈을 일으키기 쉬웁고 심하면 중독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냉면이 나쁜 것이 아니라 고명으로 얹는 도야지고기가 나쁜 것입니다. 도야지고기는 원체 상하기가 쉬운 고기이고 조금만 간수를 잘못하면 ‘푸도마인’중독을 일으키게 되는 것으로 냉면중독사건의 십중팔구는 대개 이 도야지고기로 인한 ‘푸도마인’중독 까닭에 생기는 것입니다.‘
잦은 냉면식중독 사고로 평양에서는 경찰서에서 평양부내 모든 냉면업자들에게 당시에는 상당한 고가였을 냉장고 등의 설비를 완비하라고 엄명하기도 하였다.(『동아일보』1933.07.13. 「냉면업자에 냉장고시설 엄명」) 오늘날 냉면집은 냉장시설이 보편화되고 개량된 제면기의 설치로 위생적이고 편리하게 냉면을 만들고 있다. 지금도 냉면은 일제시대를 이어 가장 대표적인 외식메뉴이다.
함흥냉면의 원형인 농마국수의 면은 감자전분으로 만들었다. 감자전분은 감자를 갈아 짜낸 녹말 물을 가라앉혀 전분만 거두어 말려 분쇄한 것이다. 처음부터 감자전분을 국수용으로 개발한 것은 아니었다. 한반도에서 고구마와 감자 재배 역사는 길지 않으며, 일제강점기에 구황 작물로 널리 보급되면서 흔해진 것이다. 감자는 한반도 북부 산간지, 고구마는 따듯한 남부 구릉지에 주로 재배되었다. 일제는 감자주산지로 함경도를 주목하여, 1920년대 개마고원개발을 시작하면서 이 지역에 감자재배 면적을 넓혀 가공 산업용 감자전분을 생산했다.
가공한 감자전분은 함흥 등 항구로 옮겨져 일본과 한반도 전역으로 운송되었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해낸 감자전분은 가격도 저렴해졌다. 그래서 감자전분을 이용한 국수 요리가 발달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함흥냉면도 이 때 생겨난 음식으로 본래 함흥이 아닌 가까운 신포에서 시작된 냉면이다. 함흥에는 함흥냉면이 없으며, 감자전분만으로 만든 물냉면인 ‘감자농마국수’와 생선회에 맵고 칼칼한 양념장을 넣어 비벼낸 ‘회국수’ 가 있다. 농마는 녹말의 함경도 사투리이다.
이 농마국수의 탄생은 감자 전분의 대량 생산과 기계식 국수틀이 보급되어 가능해진 일이다. 나무 국수틀로 메밀 반죽을 눌러 내려도 장정 두서넛의 힘이 필요할 정도인데, 감자전분 반죽은 돌 반죽이라 할 만큼 딱딱해서 전통적인 나무 국수틀로는 면을 내리기 어려웠다. 그런데 1920년대에 기계식 국수틀이 개발된 것이다. 냉면집에서 기계식 국수틀의 사용은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인건비를 줄였고 딱딱한 반죽도 빠르고 쉽게 면으로 내릴 수 있게 되었다.
감자전분의 돌 같은 반죽도 이 기계식 국수틀에선 문제될 게 없었다. 지금의 함흥냉면을 있게 한 것은 이 기계식 국수틀의 역할이 매우 컸다. 감자전분 냉면은 100년도 안 된 근대음식이다. 6·25전쟁 중 1·4후퇴 때 흥남 철수작전으로 피난 내려온 함경도 출신의 실향민들은 서울, 부산 등지에 정착하거나 고향과 가까운 강원도 동해안의 속초에 많이 정착하였다. 함경도 피난민들이 고향의 음식을 판매하는 식당을 열면서 상호에 '함흥'이라는 지역명을 사용했고 회국수가 냉면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어 함흥냉면이 되었다.
함흥냉면은 고구마, 감자, 옥수수 전분 등을 섞어 쫄깃한 탄성의 면발을 특징으로 한다. 전분은 아무 맛이 없으므로 양념을 해야 하는데, 함경도 지역에서 많이 잡히는 가자미로 만든 회와 양념 등을 곁들여 맵게 비벼먹는 면요리이다. 남한에는 감자가 많지 않아 감자 전분 대신 고구마 전분을 사용하게 되었고, 가자미회 대신 명태, 홍어나 간재미(가오리), 간혹 꿩고기 회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흔히 먹는 음식이 아니었으며 평양냉면과 대비되어 대중적 인기를 얻은 것은 근래의 일이다.
동치미는 무를 주재료로 사용하여 오랫동안 저장하여 먹을 수 있는 물김치이다. 반면 나박김치는 주재료인 무와 배추 외에 쪽파, 그리고 약간은 달달한 국물 맛을 내기 위해 사과와 배를 첨가하여 바로바로 담가 먹는 물김치의 일종이다. 필요할 때마다 만들어 먹는 김치이므로 특별히 계절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나박김치의 특징 중 하나는 고춧가루를 풀어 붉고 칼칼한 국물을 들 수 있다. 시원하면서도 새콤 칼칼한 국물의 나박김치는 식사 때 반찬뿐 아니라 다양한 음식과 곁들여도 잘 어우러진다. 떡이나 다과와도 어울리고 국수나 냉면의 육수로도 손색이 없다.
북부 지방에서 메밀로 반죽하여 면을 만들어 동치미 국물에 말아 먹던 겨울철 별미 냉면은 충청도 지역에서는 동치미 육수 대신 나박김치 국물을 사용하여 냉면을 만들어 먹었다. 젓갈과 고춧가루의 양을 줄여 슴슴하게 만든 김칫국물에 육수를 섞어 만든 나박김치 냉면은 재료의 맛을 살린 순하고 담백한 맛이 특징이다.
냉면 사리, 나박김치, 양지머리, 무, 마늘, 파, 양파
조리과정
냉면은 메밀가루에 녹말을 섞어 만든 면을 동치미 혹은 소고기나 해물로 낸 육수 등에 말아 먹는 국수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규곤요람(閨壼要覽)』, 『시의전서(是議全書)』, 『규합총서(閨閤叢書)』 등 고문헌에 냉면에 관한 기사나 조리법이 많은 것을 통해 조선시대에도 즐겨 먹었던 음식으로 추정된다. 『규합총서』에는 “동치밋국에 가는 국수를 넣고 무, 오이, 배, 유자를 저며 얹고 돼지고기와 달걀 부친 것을 채 치고 후춧가루와 잣을 뿌리면 냉면이 된다”라고 냉면의 조리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냉면은 조선시대부터 "냉면 중에 최고로 여기는 것은 진주냉면과 평양냉면이다"라고 할 정도로 진주와 평양은 지명 자체가 냉면의 이름에 붙을 정도로 냉면이 발달하였다. 진주에서 냉면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지정학적 요인에 크게 영향받은 것으로 보인다.
진주는 고려시대부터 군사와 행정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조선 시대에도 진주목과 경상 우병영이 주재하였고 1896년 경상도가 남북으로 분리된 이후 진주는 경상남도의 첫 도청 소재지이기도 했다.
지리적으로는 바다와 가깝고 강을 끼고 산지에 둘러싸인 평지에 위치한다. 진주는 산과 강, 바다 등지에서 나는 풍부한 물산과 조세가 집합되는 지정학적 배경으로 인해 냉면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냉면의 주원료인 메밀은 조선 시대부터 진주 인근 산청군, 의령군, 함안군 일대가 전통적인 메밀 재배 지역이었던 것도 진주냉면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평양도 진주와 비슷한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해 평양냉면이 발달할 수 있었다.
진주냉면은 메밀가루에 고구마 전분을 섞고 각종 해산물로 끓여 만든 장국과 쇠고기 육수를 배합해서 채 썬 배추김치, 소고기 육전, 배, 오이, 석이버섯, 전복, 계란지단을 고명으로 올린다. 반면에 평양냉면은 메밀가루에 감자전분을 섞고 꿩이나 쇠고기 육수와 동치미 국물을 배합해서 동치무채, 돼지고기 편육, 배채, 달걀을 고명으로 사용한다.
메밀면, 계란, 뭋절임, 배, 소고기, 잣, 육수(멸치, 바지락, 새우, 석이버섯, 전복, 홍합)
조리과정아바이순대와 속초냉면은 6·25전쟁으로 함경남도에서 이주해온 피난민들에 의해 전파된 음식으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다.
속초 청호동은 6·25전쟁 이전만 해도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바닷가 땅이었다. 6·25전쟁 중 1.4 후퇴로 함경남도에서 피난 내려온 실향민들은 잠시 기다리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식수 확보도 쉽지 않고 집짓기도 어려운 모래사장에 임시로 정착했다. 같이 피난 나온 고향 출신끼리 모여 신포마을 등의 집단촌을 이루며 살았고, 고향음식인 아바이순대를 만들어 먹었다.
아바이순대는 함경도 지역의 향토음식으로 돼지대창에 돼지 선지, 찹쌀밥, 배추우거지, 숙주, 배춧잎 등의 재료를 함께 버무려 대창 속을 채운 후에 찜통에 쪄낸 것이 순대이다. 대창으로 만들기 때문에 왕순대라고도 한다. 하지만 대창은 돼지에서 많이 나오는 부위가 아니므로 겨울에는 명태, 여름에는 오징어처럼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에 속을 채워 순대를 만들었다.
6·25전쟁으로 생겨난 속초의 음식으로 아바이순대와 함께 속초냉면이 있다. 속초냉면은 함흥냉면을 기본으로 한 것이지만 재료가 약간 다르다. 이북에서 흔했던 감자 전분대신 하여 고구마전분을 사용하고 명태회 혹은 황태식혜를 고명으로 올린다. 명태회냉면, 코다리냉면이라고도 불린다. 보통 비빔냉면으로 먹다가 육수를 부어 물냉면처럼 먹기도 한다.
돼지대창을 뒤집어서 밀가루와 소금를 넣어 깨끗하게 씻어내고 다시 뒤집어 놓는다. 찹쌀은 깨끗이 씻은 다음 물에 충분히 불렸다가 건져서 찜통에 쪄낸다. 배춧잎과숙주는 끓는 물에 데쳐내고, 배추우거지는 쌂은 후 깨끗이 씻어 잘게 다져 물기를 꼭 짠다. 찹쌀밥은 큰 그릇에 펴서 식힌다. 여기에 신선한 돼지선지를 넣어 버무린 후 준비한 배춧잎, 숙주, 배추우거지, 다진파, 다진 마늘, 다진 생강, 소금, 간장, 후춧가루, 참기름 등을 넣고 버무린다.
돼지 대창의 한쪽 끝을 실로 묶고, 다른 한쪽 끝은 깔때기를 끼운 다음 준비된 순대 속을 밀어 넣어 속을 다 채운다음 창자 끝을 실로 묶는다. 물에 생강과 된장을 넣고 끓으면 순대를 넣고 약한 불에 삶는다. 순대가 익으면 꺼내서 식혀 둥글게 썬 다음 소금이나 초간장을 곁들여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