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 년대 들어서 우리나라 음식이면서도 이전에는 도무지 생각조차 못했던 파격적인 모습으로 등장하여 시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음식이 있다. 바로 ‘누드김밥’이다. 김밥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검은 김에 둘러싸인 쌀밥 속에 각종 김밥 재료들이 있는 음식이다. 이에 비해 누드김밥은 밥 위에 김을 깔고 그 위에 김밥재료를 얹은 다음 말아낸 형태이다. 혹자는 누드김밥이 1990년대 우리나라에 상륙한 ‘캘리포니아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누드김밥은 김밥은 검은 색깔이라는 기존의 통념을 깨면서 다양한 재료와 형태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전통음식을 살펴보면 수 백 년 전부터 누드김밥과 같은 음식이 존재하였다. 요즘 김밥ㆍ떡볶이 · 어묵 · 순대와 더불어 분식집 단골메뉴 중 하나인 만두가 그러하다. 만두는 일반적으로 밀가루반죽을 얇게 펴서 만든 만두피에 각종 재료를 섞어 다진 만두소를 얹은 다음 만두피를 밀봉하여 조리한 음식을 말한다. 만두의 종류도 재료에 따라 고기만두·김치만두·야채만두 · 잡채만두 · 해물만두 정도 알고 있다. 또 조리법에 따라 찐만두 · 군만두 · 물만두 정도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누드만두’가 있었다. 즉 만두피가 없는 만두를 만들었다는 말이다. 누드김밥은 사실상 밥과 김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김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므로 만두피가 아예 없는 누드만두는 더욱 파격적이다. 그러한 만두의 이름은 바로 ‘굴린만두’이다. 명칭에서조차 어떠한 만두인지 알쏭달쏭하면서도 흥미로운 이름이다. 굴린만두는 ‘굴리다’라는 동사의 활용형인 ‘굴린’과 만두가 합쳐진 명칭이다. 만드는 방법 또한 의외로 어렵지 않다. 굴린만두는 돼지고기 또는 소고기를 섞은 돼지고기를 다져서 양념을 한 후 만두소를 완자와 같이 빚어서 밀가루나 녹말가루에 여러 번 굴려 막을 입힌 다음 장국에 끓여 그대로 만두탕으로 먹거나 건져내어 양념장에 먹는 음식이다.
굴린만두는 재료나 만드는 방법이 완자의 형태를 따르고 있지만 완자라고 하지는 않는다. 소고기나 두부 등을 다져서 모양을 만들고 녹말가루와 달걀물을 씌워 기름에 지진 음식인 완자는 저냐 혹은 전유화(煎油花)로 불렸던 전(煎)류에 속하는 음식으로 만두와는 다르다. 비록 만두피와 같은 껍데기가 없어도 굴린만두가 만두에 속하는 것은 만두소가 익히는 과정에서 풀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점성이 높은 녹말가루를 여러 번에 걸쳐 얇으면서도 치밀하게 도포해주기 때문이다.
굴린만두와 같이 만두피가 없는 만두가 생기게 된 연유는 두 가지 정도로 추정된다. 우선 옛날에는 만두피의 재료인 밀가루가 매우 귀한 식재료였기 때문이다. 여름에 비가 많이 오고 기온이 습하고 높은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쌀농사에 최적화 되어 있었던 반면 서늘하고 건조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밀농사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123년(인종 1) 북송(北宋)의 사신으로 고려에 온 서긍(徐兢)이 고려의 풍속을 기록으로 남긴 『고려도경(高麗圖經)』 잡속편(雜俗篇)에는 “나라(고려) 안에는 밀이 적어 모든 상인들이 산동성(山東省) 일대에서 온 것을 판다. 그러므로 밀가룻값이 매우 비싸서 성대한 예식이 아니면 쓰지 않는다.(國中少麥 皆賈人販自京東道來 故麵價頗貴 非盛禮不用)”고 한데서 오래전부터 밀가루가 귀한 식재료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밀가루는 ‘진짜가루’라는 뜻을 가진 ‘진가루(眞末)’로 불렸고, 일반적으로 메밀가루를 많이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전통조리서를 살펴 봐도 만두를 비롯하여 국수 등 음식의 주된 재료는 거의 메밀가루를 사용하거나 그 다음으로 녹두가루 등이 이용되었다. 현재 고문헌 가운데 밀가루를 뜻하는 한자인 ‘면(麵)’이 그냥 밀가루로 해석되어 통용되지만 옛날에는 특별한 언급이나 단서가 없는 한 메밀가루를 지칭하는 것이었음에 유의해야 한다.
굴린만두가 생긴 연유 중 다른 하나는 밀가루로 만든 만두피의 식감과 섭취문제이다. 예전에는 밀가루가 귀하기도 하였지만 밀가루로 만든 만두피는 조리하는 과정에서 수분을 흡수하면 부풀게 되고 텁텁하여 자칫 만두의 식감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또한 지금이나 예나 밀가루에 함유되어 있는 글루텐 성분이 체질에 맞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소화장애를 일으키기도 한다. 물론 반드시 이러한 요인으로 굴린만두와 같은 음식이 생겼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건강과 맛, 경제성까지 고려한 조상들의 복합적인 배려가 반영된 음식임에는 틀림없다 할 것이다.
굴린만두는 지역과 장소, 재료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만들어졌다. 우선 조선의 궁중만두 가운데 굴린만두가 있다. 1270년(원종 11) 무신정권이 종식되고 원나라의 간섭을 받기 시작한 고려에 ‘쌍화(雙花)’라는 이름의 만두가 전래된 이래 만두는 궁중음식으로 발전하였다. 궁중만두 가운데 숭어나 민어 등 생선을 이용한 어만두(魚饅頭)가 있는데, 그중에서 준치만두는 ‘썩어도 준치’라는 속담처럼 너무 맛이 좋아 진어(眞魚)로도 불렸던 준치라는 바닷물고기로 만든 만두이다. 재료로 보면 어만두에 속하지만 만드는 방법에서는 굴린만두에 가깝다. 어만두는 얇게 포를 뜬 생선살을 만두피로 사용하지만, 준치만두는 준치를 쪄서 가시를 발라내고 양념하여 완자처럼 빚은 소에 녹말가루를 입히는 것이 서로 다르다. 준치만두는 차츰 민간에 전해져 반가(班家)에서도 만들었는데 궁중의 것보다 더 화려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19세기 빙허각이씨(憑虛閣李氏)가 지은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쪄낸 준치살과 볶은 소고기에 양념을 하여 완자 형태로 빚은 소에 잣을 하나씩 박아 녹말가루에 굴려 찐다”고 준치만두 조리법을 소개하고 있다.
굴린만두는 여러 지방의 향토음식으로도 전승되었다. 1880년대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음식방문』이라는 조리서는 경기지방의 전통음식을 살펴 볼 수 있는 문헌이다. 『음식방문』에는 두 가지의 굴린만두가 소개되어 있다. 그 한 가지는 준치만두이고, 다른 하나는 ‘석화만두(굴만두)’이다. 껍질을 까서 물기를 뺀 생굴을 간장에 담갔다가 소쿠리에 건져 간장물을 뺀 다음 메밀가루에 굴려서 끓는 물에 익힌 후 건져내어 간장 · 식초 · 설탕 · 다진 마늘 · 다진 파 · 다진 생강 · 후춧가루를 섞어 만든 장에 찍어먹는 음식이다.
19세기 후기 저자가 ‘단양댁’으로 알려진 한글필사본 『음식책(飮食冊)』에 소개된 생치만두(生雉饅頭)도 굴린만두의 형태로 조리법을 소개하고 있다. 꿩고기로 만드는 생치만두는 꿩고기를 다져서 양념하여 만든 소를 메밀가루나 밀가루로 만든 만두피에 싸서 익혀먹는 음식이다. 『음식책』에서는 삶은 꿩고기 · 삶은 무 · 두부 · 마늘 · 파 · 생강 등에 소금간을 한 다음 다져서 마름풀이나 괴불주머니 모양으로 빚어서 녹두가루에 두어 번 묻힌 후 삶아내면 노인들의 보양식과 주안상의 안주로 좋다고 하였다.
굴린만두는 오래전부터 평안도지방의 향토음식으로도 알려져 있다. 평안도는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까워 예로부터 중국의 사신의 행차와 사행(使行)의 통로였으며,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하여 조선시대 최대 상단(商團) 중 하나였던 만상(灣商)의 활동무대이기도 했다. 따라서 평안도는 다른 지역보다도 중국음식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지역으로서 만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발달한 지역이었다. 평안도의 굴린만두는 추운 지방답게 고지방 고단백 식재료인 돼지고기나 소고기 등에 물기를 짠 두부, 숙주, 배추김치를 섞어 양념을 한 다음 다져서 완자 모양으로 빚은 것을 밀가루에 굴려 소고기 육수에 끓여 먹는 음식이다. 해산물이 많이 나는 강원도 주문진 지방에서는 명태살과 오징어를 다진 다음 쪽파와 표고버섯 다진 것을 섞어서 양념하여 동글게 만들어서 밀가루에 굴린 다음 계란물을 입혀 조개육수에 넣고 끓인 굴린만두가 향토음식으로 전한다.
현전하는 만두를 소개한 옛 문헌 중에 1449년의 『산가요록(山家要錄)』으로부터 1957년의『이조궁중요리통고(李朝宮廷料理通攷)』에 이르기까지 전통조리서에 실린 만두 종류는 대략 78가지에 이른다. 만두피의 재료만 하더라도 다른 나라의 경우는 대개 밀가루 같은 곡물재료를 만두피로 사용한다. 그 반면에 우리나라는 곡물가루 · 생선살 · 육류 · 조류 · 채소 · 김치 등 다양한 식재료를 만두피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만두문화의 독창성과 발달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아예 만두피를 제거하고 만두소에 녹말가루를 입혀서 익힌 굴린만두는 그야말로 만두에 대한 통념을 깬 만두음식의 백미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2003년 방영되어 공전의 시청률은 물론이고 대중의 사랑과 인기를 독차지한 드라마가 있다. 바로 ‘대장금(大長今)’이다. 이 드라마는 국내는 물론이고 체제와 문화, 종교를 초월하여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아직까지도 사랑받는 드라마로 기억되고 있다. 숱한 역경을 헤치고 선한 심성으로 국왕의 의녀에 오른 성공담과 권선징악 스토리, 민정호와의 로맨스, 모녀지간을 필적하는 상궁 한백영과 장금의 의리 등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심성에 부응하기에 충분한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드라마의 백미라 할 수 있는 화려하고 다양한 궁중음식 상차림은 지구촌에 우리 전통음식문화를 전파하고 한류열풍을 일으키는 주역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드라마 ‘대장금’에서는 어린 나이에 궁궐에 들어온 생각시들이 정식 궁녀가 되기 위한 어선(御膳)경연을 펼친다. 경연에 앞서 생각시들에게 유의사항과 함께 경연주제를 알려주는데, 바로 “머리이되 머리가 아니며, 옷이되 옷이 아니고, 사람이되 사람이 아니다(頭不頭 衣不衣 人不人)”로 표현된 만두였다. 경연 전날 장금이는 음모로 인해 미리 받아 두었던 만두재료인 진가루(眞末, 옛날에는 밀가루가 귀하여 진가루라 불렀다)를 분실 당하자 기지를 발휘하여 박껍질과 순채로 만두를 만들어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출궁 당한 위기에 처한다. 이때 지나가던 대왕대비가 장금의 만두를 먹어보고 훌륭하다는 칭찬과 함께 궁에 남게 된다. 이 경연 장면에서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만들었던 어만두ㆍ규아상ㆍ편수 등의 다양한 궁중만두가 선보였다.
비록 드라마의 대사이지만 ‘머리이되 머리가 아니고, 옷이되 옷이 아니다’는 말은 만두를 개념적으로 가장 정확하게 의인화하여서 표현한 말일 것이다. 만두는 한자어로 ‘饅頭’로 뜻을 풀어보면 ‘饅(만)’자는 밥 식(飠)변에 ‘아름답다’는 뜻을 지닌 ‘曼(만)’자로 이루어진 글자이다. ‘頭(두)’는 머리를 뜻하므로, ‘머리처럼 생긴 맛있는 음식’ 정도의 뜻을 지닌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만두에 사람의 머리를 뜻하는 말이 들어가게 된 기원은 촉나라의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위수(渭水, 지금의 웨이허강)에 이르러 49명의 머리를 희생으로 바치라는 용신(龍神)의 요구에 밀가루 반죽으로 사람머리를 흉내 낸 음식을 만들어서 제사를 지내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결국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만두는 중국에서 유래한 음식인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 원나라에서 전래된 것으로 알려진다. 고려시대의 연애풍속을 담고 있는 유명한 고려가요 '쌍화점(雙花店)'이 바로 그 증거이다. 쌍화점은 지금의 만둣가게에 해당하며, 쌍화(雙花) 또는 상화(霜花)로 불렸던 음식이 만두의 원형이다. 원나라가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라는 직할 통치기구를 두어 지배하였던 제주도는 몽골 풍습의 흔적이 비교적 많이 남은 지역이다. 제주도의 향토음식 중 발효시킨 보릿가루를 반죽하여 팥소를 넣고 쪄낸 ‘상애떡’이라는 음식도 쌍화에서 유래된 음식으로 만두의 사촌에 해당한다. 형태는 요즘 찐빵과 유사하지만 재료와 만드는 방법이 다르다. 명칭에서도 ‘쌍화 → 상화 → 상외’의 형태로 음운이 변화한 이름을 지닌 음식이다.
고려말에 전래된 만두는 조선시대에 들어서 궁중음식으로 화려한 꽃을 피우며 우리 고유의 전통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조선시대 궁중의 각종 연회와 잔치행사를 기록한 궁중의궤에는 다양하고 진귀한 만두 종류가 기록되어 있다. 그 종류는 골만두(骨饅頭)ㆍ규아상ㆍ동과만두(冬果饅頭, 동아만두)ㆍ병시(餠匙)ㆍ생치만두(生雉饅頭)ㆍ생합만두(生蛤饅頭)ㆍ양만두(羘饅頭)ㆍ어만두(魚饅頭)ㆍ육만두(肉饅頭)ㆍ준치만두(俊致饅頭)ㆍ천엽만두(千葉饅頭)ㆍ채만두(菜饅頭)ㆍ침채만두(沈菜饅頭)ㆍ편수(片水) 등으로 실로 다양하다. 궁중만두는 재료 및 만드는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그중 특이한 것은 ‘옷인데 옷이 아닌’ 만두피의 재료가 다양하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만두피는 반죽한 밀가루를 얇게 펴서 만든 것을 연상한다.
궁중에서 만들던 만두에 사용되던 만두피에는 밀가루와 메밀가루를 비롯하여 어류나 육류 등 다양한 재료가 사용되었다. 그 종류를 살펴보면 숭어[秀魚]나 민어 살을 얇게 포를 떠서 간을 한 다음 만두피로 이용하는 어만두, 소의 첫 번째 위인 ‘양’과 세 번째 위인 ‘천엽’을 가공하여 만두피로 하는 육만두와 양만두 등이 있다. 심지어는 만두피가 없는 ‘누드만두’도 만들어낼 정도였는데, 다진 꿩고기나 생선살을 반죽하여 전분에 살짝 굴려서 쪄낸 꿩만두나 준치만두가 이에 해당하는 음식이다.
드라마 ‘대장금’의 요리경연에서도 다양한 궁중만두가 소개되었는데 그중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겨진 음식은 단연코 어만두이다. 밀가루와 같은 곡물재료로 만든 만두피는 재료도 구하기 쉽고 만들기도 쉬운 편이다. 또한 육류나 조류를 재료로 이용한 만두피는 얇게 포를 떠도 육질이 단단하기 때문에 쉽사리 찢어지거나 하지 않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어만두의 재료인 숭어나 민어와 같은 생선은 살에 결이 있고 육질이 약하여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찢어지거나 부서지기 쉽다. 그 대신에 생선살로 만든 만두피는 생선 자체의 담백한 맛과 아울러 식감이 좋고 소화도 잘되는 장점 때문에 궁중에서 가장 선호하던 만두음식 중 하나였다.
어만두의 재료는 크게 만두피에는 숭어 살ㆍ전분ㆍ생선밑간, 만두소에는 소고기ㆍ목이버섯ㆍ숙주ㆍ양념, 그리고 만두를 찍어 먹는 양념인 초간장으로 구성된다. 얼핏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만두피와 소에 들어가는 양념이 각기 달라서 종류가 많고, 만드는 과정에 여간 정성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우선 숭어 살은 칼을 뉘어 손바닥 반만 한 크기로 얇게 포를 뜬 후 밑간을 해둔다. 목이버섯은 뜨거운 물에 담가 불린 다음 곱게 채로 썬다. 숙주는 끓는 물에 데쳐 잘게 썰어 물기를 짜낸다. 목이버섯과 쇠고기를 합하여 중간 불에 볶은 후 숙주와 섞어 만두소를 만든다. 밑간한 생선에 물기를 닦고 준비한 소를 한 큰술씩 얹고 전분가루를 묻히면서 꼭꼭 쥐어 만두모양으로 만든다. 찜통에 면보를 깔고 생선살이 투명해질 때까지 찐 다음 꺼내어 식힌 다음 그릇에 담아 초간장을 곁들여 낸다.
완성된 어만두는 초간장에 찍어서 그냥 먹기도 하지만 만두피가 생선재료인 만큼 생선에 잘 어울리는 ‘어만두탕’으로도 많이 조리되었다. 어만두탕이 수라상이나 잔칫상에 자주 오른 메뉴 중 하나였다는 것은 각종 궁중의궤에서도 확인된다. 궁중에서 만들기 시작한 어만두는 차츰 궁궐 담을 넘어 반가(班家)의 음식으로 전파되면서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어만두의 조리법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각종 조리서에 소개되어 있다. 현존하는 조리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1450년경 어의(御醫) 전순의(全循義)가 지은 『산가요록(山家要錄)』에 어만두 조리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만드는 방법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산가요록』의 저자 전순의의 직업이 임금과 왕실의 건강을 책임지는 어의였으므로 궁중음식에도 정통하였을 것이다. 『산가요록』이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1450년경은 세종(世宗)이 즉위한 지 32년 정도가 되는 해이므로 어만두는 이미 조선 국초부터 궁중에서 만들어진 음식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어만두는 19세기 말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1919년 경상북도 상주군(현 상주시)의 한 반가에서 발견된 『시의전서是議全書』라는 조리서에도 어만두법이 소개되어 있다. 만드는 방법은 450년 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왕조는 지구상에서 유례가 드물 정도로 500여 년이라는 오랜 기간 지속된 왕조였는데, 어만두는 그러한 왕조의 역사와 함께하였고, 왕조가 사라진 현재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살아있는 역사로서 서울과 경기지방의 향토음식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른바 ‘맛집’을 즐겨 찾는 식객(食客)들 사이에는 부산에 가면 반드시 먹어보아야 할 부산에서만 맛 볼 수 있는 향토음식이 전하고 있다. 바로 완당이다. 완당이 식객들에게는 부산의 명물로 알려져 있으면서도 일반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은 부산에서도 완당을 만드는 식당이 몇 곳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완당은 우리 고유의 전통음식은 아니다. 중국 광동지역의 음식이 일본을 거쳐 바다 건너 부산에 와서 정착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백여 년 전 중국 산동성의 ‘작장면(炸酱面)’이 인천에 전래되어 지금은 대한민국의 대표음식 중 하나인 ‘짜장면’이 된 것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유입경로로 따지자면 1899년 일본의 화교 천핑순(陳平順)이 개발한 나가사키짬뽕으로 잘 알려진 ‘잔폰(ちゃんぽん)’이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고춧가루와 만나 얼큰한 ‘짬뽕’이 탄생한 것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완당은 중국에서 아침식사로 차리는 만둣국의 일종인 ‘훈뚠(渾沌)’에서 유래되었다. 홍콩을 비롯한 광동지역에서는 ‘완탐’으로 불리던 것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식 명칭인 ‘완탕(ワンタン)’으로 정착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에서 완탕 만드는 법을 배워온 이은출 씨가 1947년 중구 보수동에서 포장마차를 열고 완당을 만들어서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경상남도 양산군(현 양산시] 출신인 이은출 씨는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야간공업학교에 다니면서 낮에는 일본식당에서 일하면서 완당 만드는 기술을 익혔다. 해방 후 귀국하여 몇 번의 사업실패 끝에 일본에서 배운 완당기술을 살려 포장마차를 연 것이 현재까지 3대를 잇는 가업이 되었다.
완당은 두께가 0.3mm 정도 되는 얇은 밀가루 피에 고기와 계란노른자ㆍ부추ㆍ파ㆍ양파ㆍ양배추 등을 다져 만든 소를 새끼손톱 크기로 넣어 빚는다.
완당은 얼핏 보면 물만두와 비슷하기도 하지만 보통 1~2mm 하는 두께의 만두피에 속을 많이 채워 넣는 만두와는 엄연하게 다르다. 육수는 닭고기를 사용하는 일본 완탕과는 달리 부산과 인근 기장군의 특산물인 멸치와 다시마를 주재료로 만들어서 시원한 맛을 낸다.
중국에서는 완당이 국물에 떠있는 모습이 마치 하늘에 떠 있는 흰 구름과 같다고 해서 구름을 삼킨다는 뜻을 지닌 ‘운탄(雲呑)’으로 불렸다는 점에서, 부산의 완당은 운탄의 근사한 뜻을 가장 제대로 반영한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완당의 차림새는 그릇에 육수를 붓고 따로 삶아 놓은 완당을 넣은 다음 당근ㆍ쑥갓ㆍ어묵 등을 고명으로 얹어 낸다. 매우 얇은 밀가루 피에 소의 양도 적은 완당은 목 넘김이 부드러운 데다가 시원한 멸치육수와 어우러진 깔끔한 맛으로 인해 오래전부터 부산의 주당(酒黨)들이 애호하는 해장음식이기도 하다.
보수동에서 포장마차로 시작했던 이은출 씨는 1956년 서구 부용동 전차역 인근에 ‘18번완당’을 개업하였다가, 1972년에는 현재의 위치인 부용동 1가 69번지로 이전했다. 이은출씨는 1981년에 작고하였지만 장남 이용웅 씨와 손자 이상준 씨가 3대에 걸쳐 가업을 계승하고 있다.
눈발이 한가롭게 날리는 초겨울, 바람이 차다. 양지바른 산간과 넓은 평야가 있는 충주는 온천과 꿩요리로 유명하다. 얼마 전만 해도 함박눈이 내리는 농한기가 되면 남자 어른들은 삼삼오오 모여 꿩을 잡으러 나갔다. 꿩을 잡는 법은 생각보다 간단한데 불린 콩과 작은 덫만 있으면 되었다. 불린 콩을 꿩이 다닐만한 길목에 뿌려서 덫을 놓은 곳까지 유인하여 꿩을 잡는 것이다. 그렇게 잡아서 요리한 꿩고기 국과 꿩만두는 배고픈 겨울의 보양식이자 별미였을 게다.
꿩은 한양의 왕실에 보내는 특산품이었다. 임금님께 진상하는 음식 중에 물선진상을 삭선(朔膳)이라 하는데 제철에 나는 음식 중에는 살아있는 꿩(生雉)도 포함되었다. 신라 29대 왕인 무열왕 김춘추(654~661년)는 꿩고기를 좋아했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는 "김춘추는 하루에 쌀 서 말과 꿩 아홉 마리를 먹었고,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는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었는데 하루에 쌀 여섯 말과 술 여섯 말, 꿩 열 마리를 먹었다."라고 기록한다. 조금은 과장되어 보이지만 무열왕의 풍채가 보통 사람과 다름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꿩을 사육하는 농장은 10곳 정도이다. 성질이 예민하고 경계심이 많아서 닭처럼 길들이기가 쉽지 않고 기르기가 어렵다. 꿩은 찬 바람 부는 10월부터 살이 오르기 시작하여 이듬해 4월부터 6월 사이에 알을 낳는다. 따라서 복란(福卵)이라고 부르는 꿩알을 먹을 수 있는 시기는 3개월이 채 못 된다.
충주 수안보 인근에는 꿩 전문 식당이 꽤 많다. 그중 30여 년간 꿩요리를 전문으로 하고 있는 ‘꿩요리 기능보유자’의 집을 찾아가 보았다. 충주 월악산으로 가는 방향의 대장군식당이다. 기능보유자 박명자 씨, 그녀의 사위 차봉호 씨(52세), 딸 고향순 씨(46세)가 꿩고기의 맛을 지키고 있다. 부지런한 사위 차봉호 씨의 하루는 새벽 3시부터 시작한다.
새벽에 일어나서 그날 사용할 꿩을 미리 준비해야 해요. 재단 가위로 꿩의 날개와 다리를 자르고 가죽은 손으로 벗겨내요. 한두 마리는 할 만한데 오십 마리, 육십 마리 벗기면 힘들죠. 손작업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한 마리 작업하면 약 500g 정도밖에 안 나와요.
꿩의 뱃살을 가위로 잘라내면 쉽게 가죽이 벗겨진다고 한다. 가죽을 벗긴 꿩은 스스로 열이 나서 하얗게 변하는데 즉시 찬물에 담가 열을 식혀야 맛이 변하지 않는다. 고기는 부위별로 작업을 한다. 앞 가슴살, 속 가슴살, 날개살, 등살, 염통, 모래주머니, 허벅다리 살 등을 사용하여 여덟 가지 요리를 만든다.
꿩회, 꿩생채, 꿩꼬지, 꿩불고기, 꿩만두, 꿩사과초밥, 꿩산나물전, 꿩수제비. 꿩의 가슴살로 만드는 꿩회는 선홍빛 육질에 윤기가 흐른다. 마치 생선회의 뱃살처럼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차봉호 씨는 신선한 회는 십분 안에 먹어야 한다며 아우성이다.
꿩은 신선도가 가장 중요해요. 제대로 맛을 즐기시려면 신선할 때 드셔야죠. 그래서 단체 손님의 수를 25명으로 제한합니다.
그의 운영철학은 이러하다. 단체 손님의 인원수가 많으면 서비스에 대한 시간이 길어지고 요리를 준비하는 시간도 길어져서 꿩의 신선도가 변하여 제맛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꿩고기에서 꼼꼼한 냄새가 나거나 육질이 질겨지는 원인은 신선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6개월 이상 사육한 꿩을 요리로 사용하는데요, 꿩은 잡는 방법에 따라 맛이 다르고 신선도가 가장 중요해요. 신선한 꿩은 무향무취로 부드럽고 담백함 그 자체죠. 영하 45도, 50도에서 숙성과 살균을 하니까 안심하고 드실 수 있어요.
고향순 씨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일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그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다. 남편이 하자고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생각도 못 했던 일이지만 가족이 함께 어머니의 일을 지켜나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참, 이 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꿩요리가 있다. 충주의 사과와 꿩이 만나서 만들어진 꿩사과초밥. 사과의 새콤한 맛과 밥의 감칠맛, 꿩회가 어우러져서 새콤달콤하면서 차가운 맛이 조화롭다. 그리고 쫀득한 꿩고기가 꽉 찬 꿩만두와 꿩엿을 사 들고 귀가하면 한동안 이곳의 즐거움을 추억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 박명자 씨의 꿩요리에 대한 자부심을 차봉호(남, 52세), 고향순(여, 46세) 부부가 뒤를 잇고 있다. 온 가족이 대장군 식당을 운영하여 그 전통과 맛이 한결같다.
겨울철 별미로 즐겨 먹었던 만두는 만두피의 재료나 만드는 모양, 삶는 방법에 따라 그 종류가 다양하게 나누어진다. 만두피를 만드는 재료에 따라 메밀만두, 밀만두, 동아 만두, 어만두, 처녑 만두 등으로 나뉘고, 빚어 놓은 모양에 따라 사각 모양의 편수(片水), 해삼과 닮은 규아상, 골무 모양으로 작게 빚은 골무 만두, 석류를 본뜬 석류 만두, 큼직하게 빚어낸 왕만두 또는 대만두 그리고 만두피 없이 밀가루에 소 자체를 굴려서 만드는 굴림 만두 등이 있다.
꿩을 뜻하는 생치(生雉)로 만든 만두는 조선 시대 궁중과 서울지역에서 겨울철에 즐겨 먹던 음식이다. 한자로 치(雉)라고 하는 꿩은 닭과 비슷하여 산계(山鷄), 야계(野鷄)라고도 하였다, 순수한 우리말로는 ‘장끼’는 수컷, 암컷은 ‘까투리’, 새끼는 ‘꺼병이’라고 불렀다. 꿩은 육지와 멀리 떨어진 울릉도와 같은 섬 지역을 제외한 우리나라 전 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예로부터 다양한 음식의 식재료로 활용되었다. 특히 겨울철의 주된 단백질 보급원이기도 했다.
생치 만두는 꿩고기를 소로 사용했지만, 쇠고기와 꿩의 잔뼈를 잘게 다져서 꿩고기와 함께 섞어 사용하기도 했다. 꿩고기와 쇠고기가 들어가 단백질 함유량도 많고 꿩의 잔뼈를 다져 넣어 칼슘성분도 풍부한 생치 만두는 겨울철 영양식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음식이다. 꿩고기는 고단백 저지방 식품이며 칼슘, 인, 철 성분도 포함되어 있어 노약자는 물론 성장기의 청소년에게도 유용한 식품이다. 또한 꿩고기에 함유된 지방에는, 어류나 식물성 기름에 많은 불포화지방산이 포함되어 있다.
꿩고기, 쇠고기, 밀가루, 장국, 두부, 계란, 고기 양념(소금, 마늘, 참기름, 파, 깨소금, 후춧가루)
조리과정화덕만두는 옛날 호떡처럼 옹기 화덕에서 굽는 중국식 만두이다. 숯불에 잘 구워진 만두피는 구수한 소리를 내며 부서진다. 성급히 먹으면 고기 육즙에 입이 데일 수 있으니 호호 불어 열을 식힌 후 먹는 것이 좋다. 처음에는 맛이 좋아 한꺼번에 몇 개를 먹을 수 있다고 욕심을 내었다. 그런데 나의 작은 위를 탓할 수밖에. 만약 또다시, 줄을 서서 그것을 먹겠냐고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대답하련다.
이른 아침부터 차이나타운을 찾았다. 다른 곳으로 얼굴을 돌리지도 않고 곧장 화덕만두를 파는 십리향으로 향했다. 화덕만두를 찾는 사람들의 줄은 언제나 길게 늘어져 있다. 운 좋게 차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많을 때는 두개 이상 살 수도 없다. 기다리고 있는 뒷사람에 대한 배려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옹기에서 굽는 화덕만두의 수는 기껏해야 사오십 개다. 그것이 다 팔리면 다시 칠 분을 기다려야 한다. 옹기 화덕 두 개를 번갈아 돌려도 몰려드는 사람들은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1924년 4월 17일 동아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일제시대는 호떡이 국민간식 겸 끼니를 해결해주는 음식이었다. 일제시대 호떡장수는 대부분 중국인들이었는데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온 중국인들 중 자본이 적은 사람들이 대부분 이 호떡장사를 하였다.” 같은 해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의하면, 경성부 내에 영업을 하는 중국 사람의 가게 485호 중에서 호떡가게가 150개나 있었다고 전한다. 당시에는 석탄을 때는 화덕에서 호떡을 구웠다. 커다란 철판에 기름을 두르고 튀겨내는 오늘날의 호떡과는 달랐다. 쇠로 만든 쟁반에 호떡 반죽을 놓고 화덕에 밀어 넣었다가 쇠꼬챙이로 꺼내는 것이다. 호떡은 밀가루와 소다로 반죽을 하여 뜨거우면 부풀고 열이 식으면 다시 줄어들었다. 설탕을 소로 넣어 달콤했다.
옛날 화덕에 구웠던 호떡처럼 만두를 굽는 곳이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십리향은 옹기 화덕에서 숯으로 만두를 굽는다. 화덕만두를 11년째(2018년 현재) 만들고 있는 곡창준(남, 59세) 씨는 화교 2세이다. 중국문화에서 유래한 음식을 고민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대만의 화덕만두를 발견하였다. 그것을 한국에 들여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화덕을 제작하는 것과 한국 사람의 입맛에 맞는 조리법도 연구가 필요했다. 시행착오도 많았다. 가스 가마도 만들어보고 전기 가마도 만들어보았지만 역시 가장 맛있는 만두는 숯을 때는 옹기 화덕에서 나왔다. 가스 가마와 전기 가마는 일정한 온도에 고르게 구워져서 보기엔 좋았지만 불맛이 덜했다. 그래서 손이 많이 가더라도 옹기 화덕에 만두를 굽는다.
옹기 안의 온도가 250도로 올랐을 때, 주먹 만한 만두 반죽을 뜨거운 옹기 벽에 딱딱 붙이면 쩍 달라붙는다. 붉은 숯불이 만두피를 까슬하게 익히면 육즙을 담뿍 먹었던 고기 속은 수분을 뱉어내기 시작한다. 뜨거운 숯불 위로 치직 거리며 육즙이 떨어진다. 칠 분이 지나, 잘 익었다 싶으면 손잡이가 긴 도구로 만두 옆을 톡톡 쳐서 떼어낸다. 이 모습도 볼거리이다. 그 모양을 보고 있자니 목에 걸려있던 침이 꿀꺽 넘어간다. 지루하지 않은 기다림 끝에 얻은 만두를 두 손으로 받아 들고 좋아라 했다.
숯으로 굽는 화덕만두의 맛은 네 가지이다. 고기와 단호박, 고구마, 팥이 소로 들어간다.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당연히 고기 맛이다. 하루에 수백 개가 팔리는 그 많은 만두를 곡창준 씨와 아내가 손수 빚는다. 몸이 고단하여 그만두고 싶은 심정이지만 중국문화에 대한 애정 때문에 그러지도 못한다. 맘씨 좋은 그는 누구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화덕만두의 비법을 살짝 귀띔해 주었다.
“화덕만두 하나에 이천 원이지만 저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하나하나 정성들여 손으로 만들었으니 잘 나오면 뿌듯하죠. 돼지고기는 잡내가 많이 나요. 잡냄새를 제거하기 위해서 고량주, 생강, 마늘, 파 등 열다섯 가지를 넣어요. 돼지고기는 주로 살코기 80%, 비계 20%를 섞어요. 오래 섞으면 고기가 수분을 먹어서 나중에 육즙이 생겨요. 가장 중요한 것은 밀가루 반죽이에요. 물의 양을 조절해야 하는데 날씨가 좋을 때와 나쁠 때가 물 양이 틀려요. 건조한 날에는 물을 좀 더 넣고, 우중충하고 비 오는 날에는 물을 덜 넣죠. 밀가루는 다루기 쉽지 않아요. 화덕만두를 만들기 시작한 지 2년 정도 되었을 때 밀가루가 예민하고 날씨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알았어요.”
[도움 주신 분]
십리향은 화덕만두의 맛있는 향이 십리를 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조리법은 곡창준(남, 59세) 씨와 그의 아내만 알고 있는 비밀이다.
대구 납작만두는 부추와 당면으로 속을 채워 납작한 모양으로 만든 만두로, 대구광역시의 향토음식이다. 대구광역시 등지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이며, 대구 지역 내에서 직접 만든 납작 만두가 판매되는 곳은 서문시장과 교동시장이다. 현재 대구 서문시장과 교동시장에서 30년 이상 된 납작만두 가게 4~5곳이 성업 중이다. 일반 만두에 비해 납작만두는 속이 적고, 납작한 전 모양을 하고 있다.
‘납작’이라는 이름처럼 납작만두는 만두 속이 비치는 얇은 만두피에 부추·당면을 조금 넣고 부침개처럼 부친다. 만두피를 탈듯 말듯 노릇하게 굽는 것이 납작만두 맛의 비결이다. 간장과 대파를 만두 위에 넉넉히 얹어 먹기 때문에 톡 쏘는 대파향과 간장의 짭조름한 맛이 만두피와 어울린다.
6·25전쟁 당시에 처음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 물자가 귀하던 시절 밀가루 구호품에 당면만 넣어 만들어 먹기 시작한 것이 납작만두의 시초이다. 납작만두 자체로는 큰 맛이 없으나, 기름을 두른 팬에 튀기듯 지진 쫀득하며 바삭한 맛을 내는 만두피가 특색이 있다. 납작만두는 파를 띄운 간장과 고춧가루를 올려 먹는 것이 기본이고, 입맛에 따라 매콤한 맛의 떡볶이에 섞어 먹거나 쫄면과 함께 먹기도 한다. 대구광역시 등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볼 수 없는 음식이다.
납작만두를 만드는 방법은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다.
납작만두는 밀가루와 소금, 달걀, 물, 식용유를 넣어 반죽한 뒤, 한 시간 가량 숙성시킨다.
숙성된 반죽을 꺼내 밀대로 밀어 12~15cm 크기로 만두피를 만든다.
당면은 물에 불린 뒤 삶아서 물기를 제거한 후 잘게 자르고 부추도 깨끗이 씻어 잘게 자른다.
당면과 부추에 다진 마늘, 간장, 소금 등을 섞어 속을 만든다.
만두피에 속을 조금만 올린 뒤 가장자리에 물을 묻혀서 납작한 모양으로 빚어준다.
냄비에 물이 끓으면 납작만두를 넣어 살짝 데친다.
그 다음 팬에 기름을 넉넉히 두른 뒤 데친 납작만두를 올려 앞뒤로 노릇노릇하게 구워준다.
파는 잘게 썰어 간장 위에 띄운다. 파와 간장을 납작만두 위에 올리고 그 위에 고춧가루를 뿌려 먹는다.
준치는 청어과의 흰 살 생선으로 몸통은 옆으로 편평하며 밴댕이와 비슷하지만 몸집이 더 크다. 진어(眞魚), 시어(鰣魚), 준치어(俊致魚), 준어(俊魚) 등으로 불리는 준치는 생선들 중에서 두 가지로 유명하다. 첫째는 맛이다. 맛으로는 준치를 따를 수가 없어 진짜 생선이라는 뜻의 진어(眞魚)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둘째는 준치하면 생각나는 그것, 바로 가시이다. 준치는 유난히 가시가 많은 어종으로, 잔가시가 온통 살 틈에 박혀 있어 편히 먹기가 어렵다. 이렇게 가시가 많은 준치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먼 옛날에 준치는 맛이 좋고 가시가 없어 사람들이 준치만 즐겨 먹어 멸종 위기에 놓였다고 한다. 그러자 용궁에서는 묘책으로 물고기들에게 자기의 가시 한 개씩을 빼서 준치에게 박아 주면 사람들이 쉽게 잡지 않으리라는 의논이 모아졌다. 모든 물고기가 각자의 가시를 하나씩 빼서 준치의 몸에 꽂으니 결국 가시가 많은 생선이 되었고 아픔을 견디지 못하여 달아나는 준치를 뒤쫓아 가서 꽂기도 해 꼬리 부분까지 가시가 많다.
조선 후기 빙허각 이씨가 엮은 여성 생활 백과,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준치 가시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토막 낸 준치를 도마 위에 세우고 허리를 꺾어서 베나 모시 수건으로 두 끝을 누르면 가는 뼈가 수건 밖으로 내밀 것이니 낱낱이 뽑으면 가시가 적어진다"라고 상세히 적어 놓기도 하였다. 또한, "예부터 새가 물에 빠져 조개가 된다"라는 말이 있는데 준치도 새가 변하여 준치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준치를 먹은 다음, 대가리 뼈를 모아 새의 형상을 만들고 앵두를 주둥이에 물려 처마 끝에 매달아 두면 새가 된다는 풍습이 전해 내려온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은 준치가 썩었다 해도 그 진가를 간직하고 있다는 뜻으로 귀한 물건이 아무리 오래되고 손상되었다 해도 그 값어치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월~6월이 제철인 준치는 국, 자반, 찜, 회, 만두 등 다양한 형태의 요리재료로 이용되었다. 특히 준치만두는 만두피에 소를 넣어 빚는 일반 만두와는 달리 둥근 완자를 만들어 전분을 입힌 뒤 쪄내는 일종의 굴림 만두인데, 주로 더위가 시작되는 단오에 만들어 먹었던 음식이다, 잔가시를 세심하고 정성껏 발라 만드는 준치만두는 맛도 뛰어나지만, 기력을 회복시켜 주는 보양식이기도 하다.
준치, 쇠고기우둔살, 쑥갓, 전분, 생강즙, 잣, 대파, 마늘, 생강, 소금, 후춧가루, 고기 양념(간장, 설탕, 다진 마늘, 깨소금, 파, 참기름)
조리과정편수는 시원한 장국에 네모지게 빚어 쪄낸 만두를 띄워 먹는 여름 음식을 말한다. ‘편수(片水)’라는 이름은 마치 물 위에 조각이 떠 있는 모양이라고 하여 붙여졌다. 음력 6월 15일 ‘유두절(流頭節)’에 먹는 대표적인 별미 음식이다.
『시의전서(是議全書)』에는 밀만두를 설명하면서 “이것은 편수라고도 하는데, 밀가루 반죽을 네모반듯하게 베어 네모나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편수를 ‘변씨만두’라 칭하면서 “밀가루 반죽을 밀어 귀 나게 썰어 소를 넣고 귀로 싸고, 닭을 곤 물에 삶아 초장에 쓰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옹희잡지(雍熙雜誌)』에는 “변씨만두는 메밀가루로 만든 삼각형의 만두로서 변씨가 처음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편수에 관한 설명은 문헌에 따라 이름과 모양의 차이가 있다.
개성에서는 초례(혼인을 지내는 예식) 후 임매상(국수장국상)에 편수를 올린다. 속이 꽉 차고 잘 살라는 의미에서 신랑에게 먼저 편수를 먹이고 신부에게도 먹인다고 한다. 편수는 시원한 장국에 띄워 먹기도 하고 찜통에 찌거나 삶아 낸 다음 국물 없이 그대로 초장에 찍어 먹기도 한다. 여름에 주로 먹는 음식인 편수는 쇠고기와 표고버섯, 호박 등 더운 날씨에 잘 상하지 않는 재료로 소를 만든다. 채소 주로 사용해 소를 만들기 때문에 맛이 담백하며 한입 물었을 때 아삭하게 씹히는 식감은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에 청량감을 느끼게 한다. 원래 편수는 여름철에 시원하게 먹는 음식이지만 개성지방에서는 편수를 육수에 넣고 끓인 ‘편수탕(片水湯)’을 먹으며 ‘이열치열(以熱治熱)’을 즐기기도 하였다.
밀가루, 소금, 물, 쇠고기(양지·사태), 간장, 후춧가루, 참기름, 표고버섯, 다진 파, 다진 마늘, 깨소금, 숙주, 호박, 잣, 달걀, 미나리, 식용유
조리과정임금님 드시던 쌀로 유명한 이천은 쌀의 고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풍요로운 음식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볏섬만두도 있다. 지역민들이 매해 정월에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며 만들어 먹었다는 이 음식은 벼 가마니에 곡식을 가득 넣은 모양이라 볏섬만두라고 불린다. 과연 벼농사로 유명한 지역에 걸맞은 이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옛날 식문화와 오늘날의 식문화가 많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오랜 세월동안 우리 곁을 지키고 있는 음식이 있다. 바로 만두다. 만두피를 정성스레 빚어 만두소를 꾹꾹 눌러 채워 쪄내면 각양각색의 만두가 탄생한다. 요리 방법에 따라 물만두, 찐만두, 군만두가 되기도 하고 만두소를 어떤 재료로 채웠느냐에 따라서도 이름이 바뀐다. 수많은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애용되어왔다는 뜻이다. 한국인의 만두사랑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당장 집 앞의 편의점만 가더라도 적지 않은 종류의 만두를 만나 볼 수 있다.
특별한 날 먹는 음식은 저마다의 상징이 있다. 매년 설이 찾아오면 떡만둣국을 먹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 가래떡은 오래오래 살라는 뜻이고 만두는 복이나 재물을 가져온다는 의미다. 쌀이 주식이었던 남쪽지방은 떡으로, 고기를 즐겨먹었던 북쪽지방 유목민들은 만두로 한해의 복을 기원을 했다. 음식이 풍요로워진 최근에는 떡과 만두를 모두 먹어 양쪽의 복을 기원한다.
이런 만두의 상징성을 생각해보면 볏섬만두의 의미가 한층 더 깊게 다가온다.
벼 가마니에 곡식을 가득 넣은 것 같은 보자기 모양을 하고 있다는 데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다섯 가지의 색깔로 빚었다는 데에서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오복을 상징하는 다섯가지 빛깔, 그 빛깔만큼이나 다양한 복이 들어오기를 기원했다는 것이 직관적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볏섬만두의 만두피는 치자(연두색), 당근(주황색), 적채(보라색), 시금치(녹색)로 색을 낸다. 흰색은 따로 색을 낼 필요가 없으므로 밀가루 반죽 그대로 사용한다. 동글동글한 반죽을 밀대로 펴내어 이천의 특산물인 게걸무로 만든 무청 시래기와 고사리, 나물, 두부 등을 만두소로 넣는다. 다른 재료들이야 일반적인 만두에 넣는 것과 비슷하지만, 볏섬만두에는 무청 시래기가 들어간다는 게 특징이다. 게걸무 잎사귀는 시금치보다 철분과 칼슘이 많아 빈혈에도 좋고, 시래기로 만들어 먹을 때 식감이 우수한 웰빙 재료이다.
만두를 쪄 낼 때에는 처음부터 만두를 찜기에 넣지 말고, 물이 끓어 뜨거운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상태에서 넣어주는 것이 좋다. 그래야 만두피가 퍼지지 않고 예쁜 모양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특히 벼 가마니 속에 다양한 곡물이 들어있는 것을 형상화한 볏섬만두의 경우에는 만두피의 모양새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만두피의 크기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략 15분여간을 쪄 내면 완성. 접시에 낼 때는 만두피 속에 복이 들어있음을 시각화하기 위해 큰 만두피를 살짝 열어 담아낸다.
직접 해먹어도 좋지만, 드라이브삼아 이천을 방문한다면 농촌진흥청에서 선정한 ‘농가맛집’의 목록을 보고 찾아가보는 것도 추천한다. 만두를 만드는 체험학습 뿐만 아니라 볏섬만두가 들어간 만두전골을 먹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