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통음식문화 중에서 가장 독특한 음식을 꼽자면 김치와 더불어 떡을 들 수 있다. 떡은 2006년 당시 문화체육부에서 지정한 ‘100대 민족문화 상징’에 포함된 식생활 분야 11개 음식 중에 선정될 정도로 우리 전통음식문화의 역사성과 고유성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식품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보다 농경문화가 시기적으로 앞선 중국에서도 밀이 많이 나는 북부지역의 ‘빙(餠)’이나 쌀이 많이 나는 남부지역의 ‘까오(糕)’와 같은 떡문화가 발달하였다. ‘빙’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중국인들이 중추절에 먹는 ‘월병(月餠)’이 있고, ‘까오’는 ‘니엔까오(年糕)’라 하여 우리의 설날에 해당하는 춘절(春節)에 먹는 찹쌀로 만든 흰떡이 대표적이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일본도 떡은 ‘모찌(もち, 餅)’라는 보통명사로 불리며, 찹쌀떡에 팥소를 넣어 빚은 ‘다이후쿠(だいふく, 大福)’나 우리의 경단에 해당하는 ‘당고(だんご, 団子)’ 등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영토가 작지만 산지와 평야가 적절하게 발달한 지형과 국토의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기후적으로는 사계절이 명확하여 예로부터 농수산물과 임산물이 풍부하였다. 이러한 식생환경을 바탕으로 오래전부터 지역과 문화별로 매우 다양한 떡이 만들어지고 발달하였는데, 그 종류와 가짓수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많고 다양하다. 떡은 만드는 방법에 따라 찌는 떡, 치는 떡, 빚는 떡, 지지는 떡으로 크게 나뉜다. 찌는 떡은 시루떡ㆍ송편ㆍ증편 등이 대표적이다. 시루떡에서도 재료를 무더기로 쪄낸 백설기와 같은 떡은 ‘무리떡’이라 하고, 재료를 시루에 켜켜이 앉혀서 쪄낸 팥시루떡과 같은 떡은 ‘켜떡’이라고 한다. 치는 떡은 곡물가루를 찐 다음에 안반이나 절구에 넣고 쳐서 만드는 떡으로 가래떡과 인절미가 대표적인 떡이다. 지지는 떡은 부꾸미ㆍ전병ㆍ빈대떡 등과 같이 곡물가루를 반죽하여 모양을 만들거나 묽게 만든 반죽을 기름에 지진 떡을 말한다. 빚는 떡은 경단ㆍ단자ㆍ송편과 같이 곡물가루를 익반죽하여 빚은 떡을 찌거나 삶은 떡이다.
다양한 종류의 떡 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에서 떡의 역사 또한 매우 오래되었다. 떡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조 서기 24년 9월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의 2대 임금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이 사망한 후 왕위계승과정에서 아들인 유리(儒理)가 사위인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이에 탈해가 떡을 씹어서 떡에 잇금이 많이 난 사람을 왕으로 받들자고 제안하여 시행한 결과 유리의 치아가 더 많은 것으로 판명되어 신라 3대 임금인 이사금에 오르게 되었다. 이 기사 가운데 "떡을 씹어 시험해보자(試以餠噬之)"는 내용에 떡이 등장한 것이다. 시기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부터 이미 떡을 만들어 먹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융성하여 도살(屠殺)을 금지한 반면에 채식이나 곡식을 이용한 음식문화가 발달하였다. 『고려사』 서기 968년(광종 19년) 기사에는 고려 4대 국왕 광종(光宗)이 고려의 기틀을 다지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인 것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홍화사(弘化寺)ㆍ유암사(遊巖寺)ㆍ삼귀사(三歸寺) 등의 사찰을 창건하여 재회(齋會)를 열었다. 이때 떡과 경단, 쌀, 콩, 땔감을 서울과 지방의 백성들에게 길거리에서 나누어 주었다고 하였다(或以餠餌米豆柴炭 施與京外道路).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세종실록』 1423년(세종 5) 3월 13일 기사에 흙으로 떡을 빚어 먹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함길도의 화주(和州, 현 함경남도 금야군)에 흙이 있는데, 빛깔과 성질이 밀랍과 같아서 굶주린 백성들이 이 떡과 죽을 만들어 먹고 굶주림을 면했는데, 그 맛이 메밀 음식과 비슷하였다(咸吉道 和州有土 色性如蠟 飢民掘而作餠與粥 食之免飢 味與蕎麥食略同)
비록 기근에 처한 백성들의 참담한 상황에 대한 묘사이기는 하지만 떡의 재료로 심지어 흙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다양한 우리 떡 문화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떡은 문화적으로도 오래전부터 우리의 일상 언어생활에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우선 속담 분야에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떡 주무르듯 한다’, ‘누워서 떡먹기’ 등 우리의 일상에 교훈내지 경계가 되는 말을 떡에 빗댄 격언은 지금도 적지 않게 사용되고 있다. 또한 전통시대부터 근현대시기에 이르기까지 명절 때가 되면 ‘떡값이나 해라’ 하면서 소정의 금전을 건네는 이른바 지금의 상여금과 유사한 풍속이 있었다.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불과 십 수 년 전만해도 ‘떡값’은 명절 때 인정(人情)을 나누는 소통수단이었다. 또한 떡값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는 것에서 떡이 우리 고유 명절의 가장 중요한 절기음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랜 역사와 더불어 다양한 종류의 떡을 만들어 온 우리의 떡 문화는 지역별로도 고유한 풍속과 환경에 따라 지역 특유의 떡이 만들어져 왔다. 전통적으로 넓은 평야가 발달하였던 황해도와 경기, 삼남(三南) 지역은 풍부한 물산을 이용한 다양한 종류의 떡이 만들어졌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산지가 많고 토질이 나쁜 평안도, 함경도, 제주도, 강원도 지역에서는 평야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특이한 재료로 만든 떡 문화가 발달하였다. 그 중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 이남의 내륙지역에서는 강원도 지방의 떡 문화가 매우 독특하다. 강원도는 전체 면적 중 81.7%가 임야인 반면 농경지는 9.7%에 불과하다. 그나마 농경지 면적의 64.1%도 밭이며 나머지 35.9%가 논이다. 즉 강원도에서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경지면적은 총면적의 2.8% 정도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자연환경에서 강원도는 전통적으로 임야나 밭에 재배가 용이한 메밀ㆍ옥수수ㆍ감자ㆍ수수 등이 주요 작물이었다. 따라서 강원도의 식생활문화도 당연히 이러한 밭작물 중심으로 발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떡 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국립농업과학원의 농식품종합정보시스템에서 파악된 지역별 전통음식 중 강원도의 떡 종류는 약 43종이다. 우선 떡의 재료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메밀 6종, 감자 7종, 옥수수 8종, 기타 잡곡 4종으로 전체 43종 가운데 25종으로 약 58%를 차지하고 있다. 쌀은 멥쌀 15건, 찹쌀 3건으로 42%에 해당한다. 그나마 강원도의 쌀떡은 동해안의 ‘용떡’을 제외한 나머지는 강원도에서 풍부하게 나는 산채나물이나 약재 등을 섞어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만드는 방법에서는 주된 재료로 사용하는 메밀ㆍ옥수수ㆍ감자의 점성이 쌀보다 현격하게 떨어지기 때문에 치는 떡이나 빚는 떡보다는 찌는 떡이 67.4%로 비중이 제일 높다. 또 찌는 떡 중에서도 여러 가지 재료를 켜켜이 쌓아서 찌는 켜떡보다는 떡재료를 버무려서 통으로 쪄내는 무리떡이 찌는 떡의 80%를 차지한다. 요약하자면 강원도 떡의 특징은 주된 재료가 감자ㆍ메밀ㆍ옥수수ㆍ수수 등이며, 만드는 방식은 떡 중에서 가장 간편한 무리떡이 주종이다. 쌀을 이용한 떡도 산채나물이나 약재 등을 섞어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강원도의 떡으로 대중에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메밀전병ㆍ감자범벅ㆍ옥수수증편 등이 있다. 그런데 강원도 인제군부터 평창군, 영월군, 정선군 등 강원도 산간지역에서 거의 주식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많이 만들어 먹은 떡이 있는데 바로 ‘감자뭉생이’이다. 감자뭉생이는 감자를 갈아서 물기를 짜낸 다음 체에 받혀 가라앉힌 감자전분에 감자 건더기를 섞어서 반죽한 것에 강낭콩과 밤을 넣고 소금간을 하여 시루에 앉혀 쪄낸 떡이다. 감자뭉생이와 비슷한 떡으로는 흔히 감자범벅으로 알려진 ‘감자붕생이’와 ‘감자투생이’가 있다. 이 두 가지 떡은 무리떡 형태로 쪄내는 감자뭉생이와는 달리 반죽을 적당한 크기로 떼어내어 찌는 점에서 감자뭉생이와 차이점이 있다. 부재료에도 차이가 있어서 감자투생이는 감자에 녹말가루를 섞어 찌는 것이 다르다. 강원도 영월지역에서는 감자뭉생이를 감자붕생이라고도 하며, 감자뭉생이에 들기름과 설탕, 소금을 넣어 다시 한번 찐 뒤 호박잎에 싸서 고추장을 찍어 먹기도 한다.
일제시대에도 홍수와 가뭄이 자주 있었는데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농작물 수확에 타격을 받아 농민들은 구황식품으로 연명해야 하였다. 특히 농지가 척박한 강원도와 충청도 산간지방에서 피해가 컸다. 일제강점기 신문을 보면 충청도와 강원도에서 홍수와 가뭄으로 고생하는 농민의 기사가 많이 보인다. 식량이 부족해 농민이 벼도둑질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중외일보』1930.04.24.「생활난으로 유랑군이 격증」, 충북 충주 『조선중앙일보』, 1936.07.26.「극도의 생활난으로 아들딸을 투강 참살」, 강원도; 『매일신보』1933.11.02.「굶어앉은 아이들의 밥달나는 소리」, 강원도)
단양과 제천에서는 겨가 주식이다시피 했는데, 그것도 1일 1가족에 1홉으로 연명하여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정도였다.(『매일신보』, 1935.02.23. 「단양,제천의 이재동포, 미강이 식량」,) 일제강점기 기근 기사는 강원도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 신문기사들과 제천지역을 중심으로 1936년 이후의 시기를 훑은 김재영의 연구(김재영, 「일제시기 제천지역 구황식품의 식용양상」,『역사민속학』19, 2004.)를 중심으로 구황식품을 알아본다.
일제강점기 홍수와 가뭄이 해마다 반복되어 보릿고개가 매년 이어졌다. 다른 지역이 평작일 때도 토질이 좋지 않고 화전이 많은 제천지역은 기근이 심화되었다. 1936년 병자년 대수재 후 생산기반을 놓친 제천주민들은 임산물과 같은 구황식으로 연명했다. 1939년의 흉년은 전국적으로 ‘대흉년’으로 불릴 정도로 심각해 이후 1944년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자연재해와 더불어 일제의 공출은 주민들을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게 했다.
일제가 공출의 반대급부로 1940년 시행한 정책이 ‘식량 배급제’이다. 농진흥회, 정동부락연맹이 중추가 되어 보리쌀·북간도 좁쌀·기장·콩깻묵 등을 1호당 잡곡 2홉 2되 정도 배급했다. 이중 주민들이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콩깻묵이다. 콩깻묵은 콩기름을 짜고 남은 껍질로 흔히 ‘두박(大豆粕)’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콩깻묵을 소여물로나 쓰지만, 당시에는 이마저도 절박한 구황식이었다. 콩깻묵도 배부르게 먹을 수 없어 밥을 뜸들일 때 같이 쪄서 양을 늘려 먹었다.
거듭되는 식량사정의 악화로, 일제는 식용야초를 많이 먹도록 장려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매일신보』에서는 ‘풀뿌리, 나무껍질로 끼니 대신 해먹는 법’ 등을 연재하여, 칡뿌리·마뿌리·나리·송피껍질·느릅껍질·개암·머루·다래 등 대용식량과 그 저장법을 소개하였다.(『매일신보』 1942.08.23. 「풀뿌리 나무껍질로 끼니대신 해먹는 법」) 1930년대 후반 제천의 구황음식으로는 우선 된장을 들 수 있다. 된장은 부족한 영양을 보충해주고 익숙하지 않은 구황식품의 맛과 냄새를 중화시켰다.
그 다음이 죽이다. 기근이 시작되면 곡물을 적게 넣고 보리와 나물을 많이 섞어서 죽을 끓여 먹었다. 그러나 일제의 보리공출(『매일신보』 1943.06.10. 「보리공출에 만전을」)로 보리도 구하기 쉽지 않아 감자를 먹었다. 감자와 보리는 추수시기가 유사했기 때문이다. 감자는 보리밥에 으깨서 먹거나, 국이나 죽에 넣어 먹었다. 나물은 죽의 주재료이지만 한 종류만 먹으면 안되고 곡식 비중이 나물의 10%를 넘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독성에 중독되거나 부황이 생겼다. 냉이·달래·씀바귀·쇠비름·고들빼기 등을 먹었다.
쑥은 영양이 많으면서 부황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메밀가루 등 곡식에 섞어 ‘쑥버무리(쑥꾸미)’ 등으로 자주 활용하였다. 고사리나 고비는 녹말이 함유되어 있고 영양가도 높았지만 오랫동안 먹으면 다리와 눈을 약하게 했다. 질경이는 삶아서 국이나 장, 나물밥을 해먹었다. 호박도 자주 이용되었는데, 호박은 토질을 가리지 않고 기근에도 잘 자랐고, 보관도 쉬웠다. 제천에선 ‘호박범벅으로 겨울을 난다’고 할 정도로 범벅을 자주 먹었다. 소나무 껍질로 죽이나 떡을 하기도 했다. 떡은 송기떡이라고 했는데, 소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속껍질만 벗겨 내서 잘게 찢어 물에 우린다. 우려낸 껍질을 잿물에 삶아 빤 후 망치로 두드린다. 다시 맑은 물에 2, 3일 담가 빨간 물을 빼고, 쌀·수수·조·메밀 등의 곡식 가루에 버무려 시루에 넣고 찐 것이다.
산촌에서는 도토리밥을 해먹었는데 도토리를 가을에 따서 저장해 두었다가, 겨울에 말려서 먹었다. 도토리 가루는 낮은 온도에서 풀이 되었기 때문에 조리하기 편했다. 단 탄닌 성분으로 쓰기 때문에 물에 오래 담가야 쓴맛이 빠졌다. 도토리밥을 이 지역에서 ‘굴암꽁기’라고 하는데 도토리를 삶아서 콩가루나 수수가루, 사카린을 섞어서 먹는 음식이었다. 칡도 산간에서 많이 나서 구황식으로 이용되었다. 칡뿌리로 떡·국수·수제비 등을 만들었다. 칡뿌리로 가루를 만드는 과정이 번거롭고 양이 적어서 이 시기 하얀 칡뿌리 가루는 쌀과 동급으로 취급될 정도로 비싸고 귀했다. 흰색 칡뿌리 가루는 팔아서 다른 곡식을 사는데 썼다. 산촌에서는 옥수수 농사도 많이 지었는데 옥수수가 풍족한 때에는 통째로 쪄 먹기도 했다. 그러나 기근에는 양을 늘려 먹기 위해 옥수수를 가루내어 먹었다. 대표적인 옥수수 음식이 옥수수묵인 올창묵인데 옥수수 가루를 끓는 물에 끓여 풀이 되면 밑에 구멍이 많이 뚫린 묵틀에 부어서 국수모양으로 뽑은 것이다. 이것을 김치 국물, 양념장을 넣어 먹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감자는 19세기(1824 ~ 25년) 경에 청나라를 통해 전래되었다고 한다. 청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조선에 직접적으로 전해졌다는 설도 있고, 청나라 사람들이 조선에 인삼 서리하러 넘어왔을 때 먹고 버티려고 감자를 심었던 게 전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당시 감자가 조세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너도나도 감자를 심자 정부에서 금령을 내린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함경북도 무산군의 수령 이형재가 감자를 보급하려 할 때도 감자를 심던 사람들이 벌 받을까봐 시치미를 떼며 씨감자를 주지 않아, 많은 양의 소금과 교환하고 나서야 얻을 수 있었다 한다.
이렇게 도입되어 감자는 한반도 북방 지역과 강원도 산간까지는 빠르게 전파되었다. 하지만 한반도 남부까지 전해지는 데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일례로 1832년에 전라북도 지방에 머물렀던 영국인 암허스트 호가 감자 재배법을 알려주었다는 기록이 있고 서울에서 감자가 공식적으로 처음 재배된 것은 1883년 선교사에 의해서였다.
감자는 당분은 적으나 단백질이 고구마보다 많으며, 흔히 쪄서 먹는데 산간지방에서는 주식으로 이용하나 평지에서는 보조식량으로 이용한다.특히, 강원도 지방은 감자밥 · 감자수제비 · 감자범벅 · 감자조림 · 감자부침개 등 다양하게 조리하여 먹는다. 이 밖에 통조림 · 녹말 · 엿 · 주정 · 당면 등 각종 가공식품을 만들어 이용하고 있다.
감자는 서늘한 곳에 보관하는 것이 좋다. 또한 감자의 싹에는 식중독을 일으킬 수 있는 솔라닌이 함유되어 있어 싹이 튼 경우, 싹이 난 부분은 도려내고 먹어야 한다. 평창・정선과 같은 강원도 등지에서는 땅을 파 구덩이를 만들어 감자를 보관했다. 이렇게 만든 구덩이를 감자 두덩이, 감자움이라고 부른다.
한자로는 북저北藷・토감저土甘藷・양저洋藷・지저地藷・마령서馬鈴薯라고 하며, 방언으로는 하지감자・디과라고 한다. 학명은 Solanum tuberosum L.이다. 원산지는 칠레・페루 등 남아메리카로, 우리나라에 전래된 경로에 대해서는 북방설과 남방설이 있다. 전래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24년과 1825년 사이에 산삼을 캐러 함경도에 들어왔던 청나라 사람이 가져왔다고 기록되었다. 또는 1832년 영국의 상선이 전라북도 해안에서 약 1개월간 머물고 있을 때, 배에 타고 있던 선교사가 씨감자를 나누어주고 재배법을 가르쳐주었다고 하였다. 김창한金昌漢・이형재李亨在 등의 노력으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고구마와 함께 중요한 구황작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이후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에도 새로운 품종과 재배법이 보급되었다.
뿌리줄기 끝에 둥근 덩이줄기가 발달한다. 줄기는 곧추서며, 가지가 갈라지고, 높이 30-60cm이다. 잎은 어긋나며, 깃꼴겹잎으로 갈라져 잎줄기 끝에 커다란 잎이 하나 있고 그 아래에 작은 잎이 3-4쌍 붙어 있다. 잎자루는 길이 3-5cm이다. 잎 양면은 털이 있다. 꽃은 가지 끝에 취산꽃차례로 달리고 지름 2-3cm이며, 흰색 또는 연한 보라색이다. 꽃받침은 종 모양으로 5갈래로 갈라진다. 화관은 위쪽이 5갈래로 얕게 갈라지며, 갈래는 삼각형이다. 수술은 5개이며, 수술대는 짧다. 꽃밥은 길고 둥글며, 노란색이다. 열매는 장과이며, 둥글고 지름 1-2cm이며, 노란빛이 도는 녹색으로 익는다.
감자는 서늘한 기후에 알맞은 식물로, 덩이줄기로 번식한다. 3월 하순부터 4월 하순에 걸쳐 파종하는데, 씨감자는 2등분하거나 4등분하여 적당한 간격으로 한쪽씩 심는다. 싹튼 뒤에는 두어 차례 싹을 솎고 2, 3회 김을 매면서 북주기[培土]를 하는데, 6월 하순부터 9월 상순에 걸쳐서 수확한다. 여름에 심어 늦가을에 수확하는 가을재배도 있다. 수확한 것은 서늘하고 직사광선이 들지 않는 곳에 간수해두며, 겨울에는 움 같은 곳에 저장한다.
감자는 비타민을 비롯한 각종 영양과 칼로리를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어 자체로도 완전한 식량이 될 수 있다. 단백질 함량의 경우 주요 식량작물인 밀의 2.02배, 쌀의 1.22배, 옥수수의 1.20배나 된다. 흔히 쪄서 먹는데 산간지방에서는 주식으로 이용하나 평지에서는 보조식량으로 이용한다. 특히, 강원도지방은 감자밥・감자수제비・감자범벅・감자조림・감자부침개 등 다양하게 조리하여 먹는다. 이 밖에 통조림・녹말・엿・주정・당면 등 각종 가공식품을 만들어 이용하고 있다.
감자에는 솔라닌이라는 알칼로이드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 아린 맛이 있다. 이 성분은 덩이줄기보다 줄기・잎에 많지만, 덩이줄기에도 껍질과 눈에는 함량이 높다. 덩이줄기를 햇볕에 쬐면 솔라닌 함량이 높아져, 이를 먹으면 식중독을 일으키게 되므로 싹이 튼 감자는 싹 부분을 도려내고 먹어야 한다.
추석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음식 송편은 송병(松餠) 또는 송엽병(松葉餠)이라고도 부른다. 송편은 우리나라 전 지역에서 추석에 빚는 떡으로 조상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차례상에도 올린다. 특히 추석 때 먹는 송편은 올벼(그해 심은 벼)를 수확한 쌀로 빚어 오려송편(올해 송편)이라 한다.
전국 대부분 가정에서 빚어 먹는 송편은 다양한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기도 한다. 강원도에서는 감자녹말을 뜨거운 물에 익반죽하여 빚은 쫄깃한 감자송편과 매콤한 무생채를 소로 넣은 무 송편을 먹는다. 일반 송편보다 크게 만드는 무 송편은 채 썬 무를 소금에 절이고 물기를 뺀 후에 얼큰하게 양념을 하여 소로 사용한다. 감자송편은 감자를 갈아 물에 침전시켜 만든 감자녹말로 만든다. 감자송편은 빚을 때 손가락으로 눌러 손자국을 만드는 특징이 있다.
소박한 모양의 감자송편은 구수하면서도 쫄깃쫄깃한 맛이 일품이다. 감자송편은 강원도뿐만 아니라 함경도, 충청도, 경상도에서도 빚어 먹는다. 지역에 따라 송편의 크기도 다르게 나타나는데, 북부지방의 송편은 대체로 크고 서울, 경기지방은 작게 빚는다.
강원도 감자의 특징은 파삭거리면서 하얀 분이 많고 맛이 좋다. ‘밭의 사과’라고 불릴 정도로 감자는 비타민C의 함량이 많다. 감자에 함유된 비타민C는 조리해도 잘 파괴되지 않는 특성이 있다. 이처럼 감자는 겨울철에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의 좋은 공급원이기도 하다.
수분함량이 많은 감자는 저장성이 뛰어나지 않다. 그래서 저장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감자의 부패가 시작되면 녹말을 추출하여 보관, 사용하였다.
감자녹말, 소금, 강낭콩, 완두콩, 설탕, 참기름
조리과정감자를 골라 껍질을 벗긴 감자를 강판에 간 후 건더기를 베보자기에 싸서 물기를 짜낸다. 그 물을 침전시켜 웃물은 따라내고 가라앉은 앙금을 말려 가루로 만들어 사용한다.
감자는 우리에게 굉장히 친숙한 식재료다. 우리나라에서 감자가 제일 유명한 곳은 단연 강원도이다. 강원도의 여러 지역에서 감자골이라는 지명을 볼 수 있고, 타지역 사람들이 강원도 사람을 감자골 사람이나 감자바우라 부르기도 하는 걸 보면 강원도 감자의 위상을 알 수 있다. 감자가 강원도에서만 재배되는 것은 아니다. 제주도, 충청도, 전라도 등에서 재배되고 있고, 출하하는 시기가 모두 달라 거의 1년 내내 햇감자를 맛볼 수 있다. 다른 지역에서도 많이 재배되고 있는 식재료이지만 강원도의 특산물이 감자가 된 이유는 바로 환경 때문이다. 감자는 본래 남미 고산지대의 서늘하고 건조한 기후에서 재배되었다. 강원도는 해발 600m 이상의 고랭지이다. 고랭지라는 지리적인 조건상 일교차도 커서 감자가 성장하기에 좋은 환경이다. 강원도 감자는 9월 중순에서 말쯤 출하된다.
강원도를 포함하여 국내에서는 곳곳에서 감자가 재배되기 때문에 1년 내내 맛있는 감자를 먹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1년 동안 1인이 소비하는 감자는 8.7kg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낮은 편에 속한다. 소비량이 적은 이유는 감자를 부식으로 인식하며, 다양한 요리방법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전국적으로는 감자를 활용한 요리가 외국에 비해 많이 없는 편이지만 강원도는 예외다. 다른 지역에 비해 감자가 많이 생산되다 보니 다른 부족한 음식을 감자로 대체한 요리가 많다. 감자떡, 감자탕, 감자 송편 등 다른 재료를 감자로 대체한 음식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중 사람들이 가장 생소해할 수 있는 음식 중 하나가 감자옹심이가 아닐까한다. 감자옹심이는 수제비에 들어가는 밀가루를 대신해서 감자를 갈아 반죽을 만들어 끓이는 강원도식 수제비라고 할 수 있다.
‘옹심이’는 ‘옹시미’라고도 부른다. 옹심이든 옹시미든 모두 새알심의 강원도 사투리이다. 새알심은 일반적으로 팥죽에 들어가는데 찹쌀가루나 수수가루를 익반죽하여 동그랗게 빚어서 새알만하게 만든다. 찹쌀가루나 수수가루를 구하기 어려운 강원도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감자를 이용해서 새알심을 만든 것이다. 옹심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 감자를 곱게 갈아서 자루에 넣고 물을 뺀다. 이때 알맞게 빼야 아린 맛을 없애고 빛깔이 고와진다. 그 이후 1시간쯤 가라앉혀 물을 따라내고 감자건더기와 함께 반죽해 앙금을 만든다. 전분과 건더기가 조화롭게 들어가서 탄력이 있고 씹는 맛이 쫄깃한 것이 옹심이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과거에는 동그랗게 빚어 새알심 같은 모양이었으나 최근에는 수제비와 유사한 모양으로도 만들어지고 있다.
장국을 만들고 옹심이를 넣어 끓인다. 끓는 장국에 애호박채, 어슷하게 썬 붉은 고추와 풋고추를 넣는다. 고명으로는 깨소금과 황백지단을 올린다. 이러한 요리법은 일반 수제비와 비슷하다. 감자옹심이는 원래 강원도의 정선과 영월군에서 시작된 요리인데, 현재는 강릉시의 전통음식으로 선정되어 있다. 강원도에 가거나 강원도 전통 음식을 파는 곳이라면 감자옹심이를 맛볼 수 있다.
감자로 빵을 만든다고 하자 주변에서는 “맛있는 고구마로 하지, 왜 감자로 해?!”라는 질문이 쏟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달달하고 부드러운 고구마가 지닌 극강의 맛을 거부하기 어렵다. 설컹거리고, 아린 맛이 나는 감자는 못생겼다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그런 감자가 고구마를 재끼고 빵으로 재탄생해 춘천의 명물이 되었다. 어린 시절 설탕이나 사카린을 넣어야 단맛이 나던 감자이지만 껍질을 까서 솥에 넣고 굴리면 파근파근한 분이 일어나 별미로 먹었다. 파근파근하며 부드러운 감자를 먹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제철 감자가 지닌 극강의 부드러움을 기억할 수 있다. 감자를 연구하던 농부가 지역 특산물인 홍감자를 이용해 감자를 재현하기 위해 감자빵을 만들었다. 감자맛을 내는 빵이 아니라 실제 감자를 주재료로 재해석된 감자맛을 재현해 낸 빵이다.
춘천의 한 제과점에서 감자로 만든 감자빵이 연 200억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감자와 동일하게 생긴 감자빵의 겉면은 쫄깃하고, 내부는 촉촉하고 달콤하다. 본래 감자의 다양성을 연구하던 연구자의 감자밭에서 감자 모양의 감자빵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감자와 같은 모양이지만 감자빵에는 4~5가지 맛이 다른 감자가 들어간다. 감자의 씨눈을 파고, 세척 후 200도의 오븐에서 100분 이상 굽는다. 감자빵의 겉면은 청강감자라 하여 붉은 색이 나는 감자로 만든다. 오븐에 구워 수분이 날아간 감자에 쌀가루를 섞어 쫄깃한 감자빵의 피를 만든다. 빵의 안쪽은 맛이 다른 감자를 섞어 부드럽게 완성한다. 부드러운 감자를 쫄깃한 피에 싸서 둥글게 만든 후 겉면에 인절미, 흑임자 가루를 입혀 감자의 겉면을 완성한다. 1일에 감자 3t을 사용하고, 해마다 140억 정도의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감자빵을 만들게 된 계기는 한 해에 생산된 감자의 양이 수십 톤인데, 그것들 중 판매가 되지 않아 다시 땅에 매장해야 하는 감자도 수십 톤이었다. 개발을 통해 생산한 로즈홍감자는 다른 감자와 달리 단맛이 좋아 고가로 팔아야 하지만 시장에서는 다른 감자와 동일하게 거래되었다. 감자를 팔지 않고 오히려 땅에 묻는 것을 택한 농부의 고집이 로즈 홍감자로 새 상품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서 흔한 수미감자가 아니라 한국 품종의 감자인 로즈홍감자, 청강감자, 흰감자 등을 사용했다.
강원도의 주 작물인 감자는 식사대용으로 먹던 작물 중 하나이다. 단맛이 없어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아 주식으로 먹었다. 감자빵의 인기몰이로 미국산 분말 감자가 동이 났다. 국내산 감자도 많은데 미국산 감자가루가 동이 나는 까닭을 춘천 감자빵 생산자는 이해하지 못한다. 국내산 감자만을 고집해 감자빵을 만든다. 감자를 구워 정성껏 감자 본연의 맛을 낸다. 강원도에서 생산한 토종 로즈홍감자, 설봉 감자, 흰감자 등을 사용하지만 여의치 않으면 국내생산 감자로 생산지를 넓히기도 한다. 감자밭 카페 옆에는 1000평의 감자밭이 있다. 청년 스타트업 ‘밭’이 운영하는 카페로 감자빵을 생산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 전통떡 중 하나인 송편은 멥쌀가루 혹은 토란가루를 익반죽하여 반달모양으로 빚은 후 소를 채워 넣어 찐 떡이다. 찐떡[增便]의 일종으로, 송편의 재료와 크기 등이 지역별로 차이가 난다. 이월 초하루에는 나이수 대로 송편을 만들어 먹었는데, 이 떡을 ‘송병(松餠)’이라 했고, 팔월 추석에는 아직 수확 철이 아니므로, 이른 벼를 심어 그것으로 송편을 빚었다.
다른 쌀과 달리 일찍 수확하는 벼라 하여 ‘오려[이른벼]’라 부르며, 오려로 빚었다고 하여 ’오려송편’이라 불렀다. 내륙 지역에서는 햅쌀을 사용했지만, 도서지역에서는 쌀이 부족해 보리로 송편을 빚었다. 남쪽으로 갈수록 송편의 크기가 작고, 북쪽으로 갈수록 큰데, 경기도 이북 지역의 송편은 만두와 맞먹을 정도로 크다. 강원도에서는 쌀, 보리가 아닌 감자 전분을 이용해 송편을 빚는다.
강원도에서는 추석이 되어도 쌀을 수확할 수 없었다. 산이 높고 깊어 농지도 부족해 오려도 구하기 어려웠다. 1820년대에 북쪽에서 한반도로 종자가 들어온 감자는 1890년대에 이르면 강원도까지 보급되었다. 강원도는 산간지대가 드넓어 전국에서 35.9%의 감자를 생산하는 전국 최고의 감자 주산지가 되었다.
감자전분만을 넣어 떡을 만들면 떡이 질기지만, 전분과 감자 비지를 섞어 넣으면 쫀득하면서도 서걱서걱한 감자의 식감을 느낄 수 있고, 독특한 향도 지니게 된다. 감자를 갈아서 내린 전분과 감자 비지를 함께 넣어 반죽을 해 송편을 빚었다. 송편 안의 소는 콩, 팥, 깨 등을 넣었다. 감자반죽은 거칠어 곱게 빚어지지 않았기에 주먹으로 꼭 쥐어 ‘주먹송편’ 혹은 모양이 좋지 않다하여 ‘머슴송편’이라 불렀다.
강원도에서는 흔히 ‘썩힌 감자가 맛있다.’라고 한다. 썩은 감자의 맛과 향은 언 감자와 매우 유사한데, 두 종류의 감자 모두 특별한 향을 지닌다. 이 향과 맛이 약간의 중독성을 띤다. 삭힌 홍어와 마찬가지로 삭힌 감자의 아릿하면서 큼큼한 향에 중독되면 빠져나오기가 어렵다. 감자 생산량이 많은 강원도에서는 보관해 둔 감자가 얼기도 하고, 썩기도 하면서 자연스레 썩은 감자가 되었다.
언 감자나 썩은 감자가 없다면 감자를 갈아서 상온에 놓아서 삭히면 된다. 갈색으로 변하면서 삭힌 감자 특유의 향이 발생하는데, 오래 둘수록 색과 향이 강해진다. 강원의 맛은 썩힌 감자로 만든 감자송편이다. 관광객과 인터넷 주문이 늘면서 강원도의 삭힌 감자 맛을 경험하지 않은 이들이 맛이 없다고 하여 지금은 감자를 갈아서 곧장 송편을 빚는다. 삭힌 맛과 향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감자전분으로 만든 감자송편을 빚어두면 밀가루와 같이 불투명하다. 홍천지역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감자송편을 찐다. 물을 넣고 반죽한 전분 가루를 엄지손가락 보다 조금 크게 떼어낸 후 엄지손가락 끝으로 눌러 둥글게 만든다. 그것에 팥소나 콩소 등을 넣은 후 뭉친다. 손가락과 손바닥 사이에 놓고 움켜쥐면 송편이 완성된다. 떡을 찔때는 솔잎을 켜켜로 넣는데, 떡이 쉬지 않고, 솔향도 나서 먹기에도 좋다. 지역특산물 가공이 본격화되면서 감자송편은 ‘감자떡’ 혹은 ‘감자송편’이라 불리며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다. 홍천군의 ‘강원토종감자떡’, 영월군의 ‘감자떡마을’, ‘영월마루감자떡’, 춘천시의 ‘대관령감자떡’, 원주시의 ‘강원도감시기감자떡’, ‘감자바우감자떡’, 정선의 ‘아라리 감자송편’ 등등이 시판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