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을 만드는 방식 중에서 ‘구이’는 아마도 인류가 불을 발견한 이래 가장 최초로 터득한 조리법일 것이다. 음식을 삶거나 끓이고 튀기는 등의 조리법은 그릇이 필요하지만, 구이는 그럴 필요 없이 음식 재료를 직접 불에서 조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정조지(鼎俎志)에는 고기를 굽는 방법으로 번(燔)과 적(炙)의 두 가지 방식을 소개하고 있다. 고기를 가까운 불에 굽는 것을 ‘번(燔)’이라 하고, 먼 불에 굽는 것을 ‘적(炙)’이라고 설명하였다.
우리 전통음식 중에서 고기와 야채 등의 재료를 양념하여 익히거나 또는 생것을 꼬챙이에 꿰어 조리한 음식을 산적(散炙)이라 한다. 산적도 본래는 구이에서 비롯된 음식이다. 산적은 그 명칭 중에 ‘적(炙)’자를 파자(破字)하면 ‘月+火’로 이루어진 글자이다. 여기에서 월(月)은 달(month)을 의미하지 않고, 고기를 의미하는 말로 ‘달 월’과 구분하여 ‘육달 월’로 뜻을 새긴다. 즉 ‘육달 월’로 쓰이는 ‘月’은 ‘肉’의 약자로 고기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적(炙)은 불 위에 고기를 올려놓고 굽는 모습에서 온 글자이다.
산적은 재료에 따라 크게 어산적ㆍ육산적ㆍ잡산적 등이 있고, 조리법에 따라 지짐누름적ㆍ누름적ㆍ산적이 있다. ‘지짐누름적’은 생재료를 꼬챙이에 꿴 다음 물에 갠 밀가루 즙을 입히거나 달걀과 밀가루를 입혀서 지진다. 요즘 가정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 먹는 조리법이다. ‘누름적’은 양념하여 익힌 고기와 버섯, 채소 등을 꼬챙이에 번갈아 꿴 다음 지져 만든다. ‘산적’은 가장 원형에 가까운 음식으로 생고기와 채소 등을 꼬챙이에 번갈아 꿴 다음 불에 직접 굽는다.
산적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단연코 화양적(華陽炙)이다. 1800년대 말에 저술된 것으로 알려진 『시의전서(是議全書)』 에서는 화양적을 ‘화양누르미’라고 표기하고 있다. 우선 화양적은 여러 가지 산적 요리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특히 조선시대 궁중음식 중에서도 대표적인 음식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만드는 방법은 ‘화양누르미’라는 별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각기 양념을 하여 익힌 재료를 꼬챙이에 끼워서 지진 ‘누름적’에 속한다.
조선시대 궁중의례나 연회에 관련된 모든 내용을 후세에 참고하기 위하여 기록한 기록물을 ‘의궤(儀軌)’라고 하는데, 그 중 연회와 관련이 있는 ‘진연의궤(進宴儀軌)’ 등에서는 다양한 화양적을 확인할 수 있다. 궁중의궤에서 기록된 화양적의 종류에는 화양적(花陽炙)ㆍ양색화양적(兩色花陽炙)ㆍ각색화양적(各色花陽炙)ㆍ생복화양적(生鰒花陽炙)ㆍ낙제화양적(絡蹄花陽炙)ㆍ어화양적(魚花陽炙)ㆍ천엽화양적(千葉花陽炙)ㆍ양화양적(羘花陽炙)ㆍ압란화양적(鴨卵花陽炙)ㆍ동과화양적(東瓜花陽炙, 冬苽花陽炙) 등이 있다.
궁중의궤에 나타난 화양적은 길경(桔莄)ㆍ생총(生蔥)ㆍ우둔(牛臀)ㆍ계란ㆍ진유(眞油), 실임자(實荏子), 간장, 호초말(胡椒末) 등이 재료로 기록되어 있다. 즉 도라지ㆍ파ㆍ소고기ㆍ달걀ㆍ참기름ㆍ깨소금ㆍ간장ㆍ후춧가루 등이 재료로 사용되었다. 궁중음식이 민간에 전파되면 재료가 궁중보다 더 화려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시의전서』의 화양누르미 조리법에서는 “꿩고기ㆍ전복ㆍ해삼ㆍ생선ㆍ표고ㆍ박오가리ㆍ돼지고기ㆍ소고기 등에 녹말을 묻혀서 기름에 지지고, 계란 부친 것을 비슥비슥 썰어서 꿰고 즙을 잘 만들어 쓴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반에서 명절이나 잔치에서 쓰던 화양적은 고기ㆍ도라지ㆍ미나리ㆍ파를 꼬치재료로 하고, 석이버섯와 계란지단을 채쳐서 고명으로 올린 형태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조리형태였다.
화양적은 화려하고 고급스런 맛 외에도 ‘화양(華陽)’이라는 이름에는 매우 아름답고 심오한 뜻을 지닌 음식이다. 본래 ‘화양’이라는 말의 출전(出典)은 중국고대경서인 『書經(서경)』으로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닌 단어이다. 『서경』 무성편(武成篇)에 “말을 화산남쪽으로 돌려보내고, 소를 도림의 들에 풀어놓아 천하에 무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다(歸馬于華山之陽 放牛于桃林之野 示天下弗服)” 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중국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이 은(殷)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을 멸한 뒤에 화산남쪽에 말을 돌려보내서 다시는 전쟁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인 언행에서 비롯된 말인 것이다.
후대에 이르러서 ‘화양’은 평화를 추구하는 염원을 담은 한자성어로 사용되었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에는 지명이나 장소, 사람의 호(號)에 ‘화양’이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었다. 현재 서울특별시 성동구의 화양동(華陽洞)과 이곳의 오래된 정자인 화양정(華陽亭), 충청북도 괴산군 화양동에 건립되었던 화양서원(華陽書院)과 명승지인 화양구곡(華陽九谷)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조선후기의 성리학자인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은 만년에 스스로 화양노부(華陽老夫)라 칭하였고, 주변에서는 송시열을 화양선생(華陽先生)으로 호칭하기도 하였다. 여러 가지 각기 다른 재료를 균일한 크기로 조화롭게 꿰어 조리하는 화양적은 곧 위로는 궁중으로부터 아래로는 만백성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역할과 분수를 지키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고 평화로운 세상을 추구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사상철학이 반영된 음식이었던 것이다.
최근 한국 가정에서는 명절이나 생일음식으로 햄, 게맛살, 단무지, 오이, 대파 등을 꼬챙이에 꿴 후 달걀을 입혀 기름에 지져낸 산적을 흔히 볼 수 있다. 비록 햄이나 게맛살과 같은 인스턴트식품을 재료로 쓰지만, 전통 ‘누름적’의 만드는 방법과 형태를 따르되 요즘 시대에 맞춰 간편하게 개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행이나 캠핑에서 여러 가지 재료를 꼬챙이에 꿰어서 직화로 구워먹는 바비큐구이에서도 ‘산적’의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이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정보통신사회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삶으로 인해 예전 조상들이나 어른들이 하던 대로는 할 수 없지만 화양적은 또 다른 창의적인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화양적은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서 명실상부한 우리 전통음식으로서 여전히 건재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1970년대 청소년 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는 학창시절 공유하는 추억이 하나 있다. 경제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기는 하였지만 국가정책으로 혼분식 장려운동을 시행할 만큼 식량사정이 넉넉하지 못했던 시기였다. 그 당시 좀 사는 집 아이들은 3단 보온밥통을 도시락으로 가지고 다녔다. 특히 도시락 반찬통에 가지런하게 담긴 분홍색 소세지 반찬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생선살에 전분과 발색제를 배합하여 그저 소시지 흉내를 낸 식품에 계란옷을 입혀 부친 음식에 불과했는데, 그때는 참으로 고급스러워 보이기만 했다.
그런 시절이 지나 그 아이들이 이제는 어른이 되어 진짜 햄과 소시지에 밀가루와 계란옷을 입혀 부친 것을 그때 자기만 했던 자식들에게 간식이나 반찬으로 먹이고 있다. 그런데 소시지나 햄에 밀가루와 달걀옷을 입혀 지져내는 것은 의아스러운 일이다. 그냥 익혀 먹어도 될 서양식 가공육을 굳이 전처럼 부쳐내니 말이다. 이는 우리 전통음식 중 하나인 전(煎), 그중에서도 육전(肉煎)을 흉내 낸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육전은 재료도 비싸고 평상시 만들기도 쉬운 것이 아니어서 육전을 대신하는 ‘소시지전’이 탄생했던 것이다.
한국의 음식문화는 주식과 부식으로 나누어진다. 주식에는 밥과 면(麵) 종류가 있고, 부식은 국을 비롯하여 구이ㆍ나물ㆍ느르미ㆍ무침ㆍ볶음ㆍ선ㆍ전ㆍ자반ㆍ조림ㆍ찜ㆍ편육ㆍ포ㆍ회 등의 종류가 있다. 그 가운데 전은 한국 특유의 전통음식 중 하나로 땅과 바다에서 나는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색이 고운 음식으로 가공할 수 있어서 명절은 물론이고 잔칫상과 제사상에도 오르는 귀한 음식이었다.
전(煎)자는 ‘달이다, 지진다, 졸이다’의 뜻을 지닌 말이다. 일반적으로 전은 고기, 생선, 채소 등의 재료를 얇게 저미거나 다져서 모양을 만든 후 밀가루와 달걀로 옷을 입혀 기름을 두른 번철에 납작한 모양으로 양면을 지져내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은 것이다. 왕조국가였던 조선시대의 궁중에서는 전을 ‘전유화(煎油花)’라 명칭하고, ‘전유어ㆍ전유아’라 발음하였다. 전유화의 한자를 풀어보면 ‘기름에 지져낸 꽃’이 된다. 다양하게 부친 전이 꽃처럼 아름답다고 해서 붙은 명칭이다.
궁중에서 전이라 하지 않고 굳이 전유어라고 한 것은 군민(君民)이 함께 하는 여민락(與民樂)의 왕도정치를 추구하면서도, 수분(守分)을 중시하였던 유교적 신분질서에 따라 음식 명칭에도 차이를 둔 것이었다. 깍두기를 궁중에서는 굳이 ‘송송이’라 호칭한 것도 같은 이치에서이다. 민간에서는 전을 저냐ㆍ부침개ㆍ지짐개라고도 부른다. 또한 전을 제수(祭需)로 사용하면 ‘간납(肝納)’이라고 하였다. 전의 별칭 가운데 저냐는 아마도 ‘전유화 → 전유아 → 저냐’의 순으로 용어가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진연의궤(進宴儀軌)ㆍ진작의궤(進爵儀軌)ㆍ진찬의궤(進饌儀軌) 등 궁중의궤에 기록된 전의 종류는 수십 종에 이른다. 그 재료 또한 각종 육류, 조류, 해산물 등으로 다양하다. 육류를 이용한 전은 양(羘: 소의 위)ㆍ간(肝)ㆍ양지두(陽支頭: 양지머리)ㆍ저육(猪肉: 돼지고기)ㆍ두골(頭骨) 등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육류로 만든 전유화 중에서 양지머리로 만든 편육전유화(片肉煎油花)가 지금의 소고기 육전에 해당하는 음식이다. 1902년 『임인진연의궤(壬寅進宴儀軌)』에 기록된 편육전유화의 재료는 양지머리ㆍ업진살ㆍ숭어ㆍ계란ㆍ참기름ㆍ밀가루ㆍ소금 등으로, 숭어를 제외하면 요즘의 육전과도 재료에 큰 차이가 없다.
이러한 육전은 궁중뿐 아니라 민가에서도 만들어져서 명절, 잔치, 제사음식으로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특히 주자가례(朱子家禮)를 표준으로 한 관혼상제의 사례(四禮)를 중시하였던 조선후기에는 각종 예서(禮書)에 수록된 제물(祭物) 가운데 육전을 언급하고 있다. 19세기 실학자 정약용이 저술한 『상의절요(喪儀節要)』에는 “주례(周禮)의 이식과 삼식은 제수이며 모두 쌀가루와 고기를 합하거나 섞어서 지져낸 것이다. 지금 세상에서 어전, 육전이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속명으로는 간남(肝南)이라고 한다. 따라서 마땅히 어전과 육전을 사용하여 두 그릇의 제수를 준비하여야 한다(禮 有酏食糝食 亦豆實也 皆以膏肉米粉 或和或糝 而煼煎之 今俗之魚煎肉煎 是也 俗名曰肝南 宜用魚煎肉煎 以備二豆)”고 하여 육전의 재료와 만드는 방법, 명칭에까지 간략하지만 명확하게 설명하였다. 정약용이 표기한 간남(肝南)은 간납(肝納)과 같은 말이다.
조선시대부터 왕실에서 민간에 이르기까지 사랑받았던 육전이 현재에 이르러 ‘멋과 맛’의 고장 광주광역시의 향토음식으로 재탄생하였다. 남도한정식으로 대표되는 광주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특색 있고 맛깔스런 음식들이 즐비한 지역이다. 2005년 광주광역시는 광주의 다양한 음식 중에서 김치ㆍ무등산보리밥ㆍ송정떡갈비ㆍ오리탕ㆍ한정식을 ‘광주 5미(味)’로 선정하였다. 그 후 10년이 지난 2019년에는 무등산보리밥ㆍ송정떡갈비ㆍ오리탕ㆍ한정식에 새로이 상추튀김ㆍ육전ㆍ주먹밥을 추가하여 ‘광주 7미(味)’를 발표하였다.
육전이 광주광역시를 대표하는 향토음식으로 지정될 정도로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배경에는 질 좋은 한우와 그러한 것을 즐겨 먹는 식문화가 있었다. 우선 광주광역시에는 1990년대까지 우시장으로 유명했던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송정장과 비아장 등을 통해 함평군 등지에서 자란 청정 한우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 광주사람들의 소고기에 대한 사랑은 육전과 더불어 송정5일장의 명물 송정떡갈비, 소의 생고기를 썰어서 기름장이나 된장에 찍어먹는 광주 육회와 같은 음식문화를 형성하였다. 이 세 음식은 다른 지역에도 있거나 있을법하지만 맛고을 광주이기에 또 다른 맛과 의미가 부여된다.
육전은 쇠고기를 얇게 떠서 갖은 양념이 들어간 간장으로 간을 해 두었다가 밀가루와 달걀옷을 입혀 지진다. 육전은 들깻 가루가 들어간 소금에 찍어 먹거나 파절이 무침과 함께 상추나 배추에 싸 먹기도 한다. 또는 갈치속젓이나 멸치젓에 먹기도 한다. 현재 광주광역시에는 육전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운영되고 있다. 1980년대 초부터 육전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 대광식당을 비롯하여 미미원, 육전명가 등이 육전으로 이름난 음식점이다. 광주의 육전식당에서는 주방에서 육전을 만들어 내오지 않는다. 얇게 저민 한우를 비롯한 재료를 식객들이 보는 앞에서 프라이팬에 직접 조리해 주는 것이 특징이다.
장김치는 소금과 채소, 젓갈을 주재료로 사용하여 발효시키는 일반 김치와는 달리 간장으로 김치를 담그는 색다른 김치이다. 채소와 간장 국물이 어우러져 발효된 장김치는 그 맛 또한 독특하다. 조선 후기 문헌에서는 장침채(醬沈菜), 장저(醬菹) 로도 소개되어 있다.
장김치는 젓갈이나 고춧가루, 소금 등을 사용하지 않고 맛이 잘 들은 무, 배추를 간장으로 간하여 필요할 때 먹을 만큼만 담가 먹는 김치이다. 본래 조선 시대 궁중에서 만들어 먹었던 김치로 배, 밤, 잣, 석이버섯, 표고버섯 등 일반 김치와는 다른 귀한 재료가 사용되었다. 여름철에 담가 먹기도 했지만, 숙성 기간이 짧고 장기간 보관이 여의치 않아 주로 가을, 겨울철에 담가 먹었다.
장김치는 특히 떡과 잘 어울려 떡국이나 떡이 올라간 주안상에 함께 곁들여졌다. 간장의 색과 향이 조화를 이루는 장김치는 일반 서민들에게는 호화로운 김치였지만, 설날 떡국 상이나 잔칫상을 차릴 때 올리기도 한 별미 김치였다.
석이버섯, 배, 배추, 무, 미나리, 갓, 말린 표고버섯, 밤, 대추, 단감, 마늘, 생강, 잣, 진간장, 쪽파, 국물(간장, 물, 꿀이나 설탕)
조리과정
일반적으로 편육은 고기를 덩어리째 삶아서 눌러 식혀 두었다가 얇게 썰어 낸 음식을 말한다. 고기를 삶을 때에는 우선 끓는 물에 넣어 표면의 단백질이 빨리 응고되게 하여 영양소들의 손실을 방지한다. 고기가 충분히 익으면 건져서 잠깐 찬물에 담갔다가 꺼내어 삼베보자기나 깨끗한 행주에 싸서 고기가 굳을 때까지 무게 있는 물건으로 눌러 놓는다. 뜨거울 때 눌러놓아야 모양이 반듯하고 썰기 쉽다. 고기를 편으로 썰 때는 고깃결과 칼로 써는 방향과 직각이 되도록 썰어야 식감이 좋아진다. 편육은 수분뿐만 아니라 지방도 빠져나간 음식이므로 오랫동안 공기 중에 내버려 두면 건조되어 맛이 없어진다. 또, 철분 성분이 지방의 산패를 촉진해 쉽게 변질되기 때문에 장기간 냉장보관보다는 바로 먹는 것이 좋다.
소의 혀를 뜻하는 우설은 살코기나 내장 부위와는 전혀 다른 조직으로 연하고 독특한 맛이 난다. 우설은 단백질 함량이 높고 철분과 비타민도 다량 함유하고 있다. 조선 시대 궁중음식으로 쓰였던 우설은 끓는 물에 삶아 혀의 껍질과 기름이 있는 부분을 제거하고 주로 편육이나 찜, 전골 등으로 조리한 고급 음식이었다. 편육으로 사용할 때는 푹 삶은 우설을 얇게 썰어 초간장이나 겨자장에 찍어 먹는다. 우설 편육은 절단된 단면이 넓은 것이 식감과 맛이 좋다.
그릇 이름이면서 동시에 요리인 신선로는 중국에서 수입된 훠궈르(火鍋兒)란 냄비를 잘 활용하여 한국의 최고 음식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처음으로 신선로의 모양과 조리법이 나타난 문헌은 1700년대 한문 요리서인 『수문사설(謏聞事說)』이다.
“끓이고 익히는 기구가 별도로 있다. 큰 합과 같은 모양에 발과 아궁이가 달려있다. 합 가운데에 둥근 통이 세워져 있는데 뚜껑의 바깥까지 높이 나와 있고 뚜껑은 중심에 구멍이 있어 원통이 위로 튀어나와 있다. 이 원통 안에 숯불을 피우면 바람이 아궁이로 들어가고 불길은 뚜껑 위의 구멍으로 나간다”라고 하였다.
신선로의 유래에 관한 다양한 내용 중 대표적인 것은 연산군 시대에 정희량(鄭希良)이란 선비가 세속을 떠나 산중에 은거하던 때에 화통이 달린 냄비에 여러 가지를 모아 끓여 먹었고 그 선비의 생활이 마치 신선과 같아 그 음식을 신선로라 하였다고 『조선요리학(朝鮮料理學)』에 나타나 있다.
궁중의 연회 음식을 적은 『진찬의궤(進饌儀軌)』나 『진연의궤(進宴儀軌)』에는 모두 열구자탕(悅口資湯, 悅口子湯)이 한자로 기록되어 있으며 신선로라는 표기는 나타나지 않으나 궁중의 음식 그릇 중에는 한글로 ‘신선로’란 표기가 나타나 있다.
궁중의 신선로는 탕신설로(湯新設爐)와 면신설로(緬新設爐)로 나뉘는데, 탕신설로는 열구자탕과 재료가 거의 비슷해 같은 음식으로 생각되지만, 면신설로는 간단한 국수장국 재료가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신선로 틀에 장국과 건더기를 끓이다가 메밀국수를 말아 먹은 음식으로 볼 수 있다.
신선로와 같이 여러 재료를 큰 그릇에 담아서 끓인 요리가 전골이다. 옛날의 전골그릇은 그릇 안 바깥쪽에서 고기, 채소, 조개류를 익히면서 그 국물이 중앙의 오목한 부분으로 흐르도록 하고 그 안에다 채소를 끓이면서 먹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신선로가 궁중과 양반가의 잔칫상이나 연회석상에 오르는 고급 요리라면, 전골은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음식이라 할 수 있다.
궁중음식 기록에 나타난 신선로 재료는 다음과 같다. 면신설로에는 목면, 도가니, 진계, 계란, 호초말, 간장이 사용되며, 열구자탕에는 우내심육, 양, 곤자손, 두 골, 저태, 우척골저각, 생치, 진계, 수어, 해삼, 전복, 표고, 계란, 청근, 수근, 생총, 진말, 녹말, 호초말, 실임자, 진유, 간장, 실은행, 실호도, 실백자, 염 등이 들어가고 탕신설로에는 우둔, 양, 곤자손, 두골, 저각, 생치, 수어, 해삼, 계란, 청근, 전복, 표고, 수근, 생총, 진말, 진유, 간장녹말, 임자, 실백자, 호초말, 실은행, 실호도가 사용된다.
신선로는 다양하고 진귀한 여러 음식을 하나의 그릇에 담아내기 때문에 신선로 자체가 작은 잔칫상이라 할 수 있으며, 여러 가지 맛과 영양소를 한 번에 섭취할 수 있는 음식이다. 색다른 형태와 맛 그리고 높은 영양가를 지닌 신선로는 한국 음식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음식이다.
죽은 주재료로 쌀, 찹쌀, 옥수수 등의 곡물과 고기, 채소, 및 해산물 등의 부재료에 물을 넣고 끓여 만든 음식으로 치료나 보양식 등의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죽의 종류에는 내용물 입자의 크기에 따라 옹근죽, 원미죽, 무리죽으로 나뉘고, 이중 곡물을 갈아 만든 무리죽은 곡류의 입자가 작아 섭취 후 소화, 흡수가 뛰어나 보양식이나 치료식으로 자주 이용되고 있다. 무리죽의 하나인 타락죽은 곱게 간 쌀과 우유를 재료로 만들었는데, 조선시대 왕실의 보양식으로 이용됐다. 조선 시대 궁중에서는 임금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초조반(初朝飯) 또는 자리 조반이라고 하는 이른 아침을 올렸다. 이때는 부담이 덜한 미음이나 죽을 올렸는데, 죽으로는 타락죽, 잣죽, 흑임자죽 등이 대표적 음식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유우소(乳牛所), 목우소(牧牛所)와 같은 국가기관을 설치하여 우유를 수집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타락색을 설치하고 지금의 대학로 뒤편 낙산에 목장을 운영하여 필요한 우유를 조달하였다. 일반 백성들은 우유를 먹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궁중과 특권 계층에서는 보양식으로 귀하게 여겨 낙(酪) 또는 타락(酡酪)이라 불렀다. 영조 때는 "사람이 먹기 위하여 송아지를 굶기는 것은 옳지 못하다"하여,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타락죽을 금한 기록이 남아있다.
우유에는 인체에 필요한 각종 영양소가 함유되어 있어서, 타락죽은 장기간 복용하여도 다른 죽과 달리 영양 결핍 증상이 덜하고, 기력회복에도 도움이 된다. 또한, 우유는 위산과다, 위궤양 증상을 완화하는 작용을 한다. 타락죽은 탄수화물을 함유한 곡류와 영양가 높은 우유를 재료로 만든 음식으로 자극적이지 않아 어린아이의 이유식으로도 좋다.쌀을 갈아 우유와 섞어 만든 타락죽은 보양식으로 취급되어, 10월부터 정월까지 음식을 담당하는 소주방이 아닌 내의원에서는 만들어 왕에게 올렸다.
우유에는 인체에 필요한 각종 영양소가 함유되어 있어서, 타락죽은 장기간 복용하여도 다른 죽과 달리 영양 결핍 증상이 덜하고, 기력회복에도 도움이 된다. 또한, 우유는 위산과다, 위궤양 증상을 완화하는 작용을 한다. 타락죽은 탄수화물을 함유한 곡류와 영양가 높은 우유를 재료로 만든 음식으로 자극적이지 않아 어린아이의 이유식으로도 좋다.
쌀, 우유. 물, 소금, 설탕
조리 과정떡갈비는 본래 궁중음식이었다. 음식 이름은 갈빗살을 곱게 다져 떡처럼 뭉쳐서 만들었다 하여 붙여졌다. 국왕과 왕실 사람들은 지엄한 체통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함부로 거동할 수도 없어 운동량이 많이 부족했을 것이다. 떡갈비는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여 질긴 고기를 섭취하기 좋고 소화도 잘 되게끔 잘게 다져 양념하는 조리방법으로 고안된 것으로 여겨진다.
구한말 궁내부(宮內府)의 전선사장(典膳司長)으로 있으면서 궁중요리를 담당하던 안순환(安淳煥)이 1909년경 명월관이라는 요릿집을 개설한 것과 1911년 이왕직의 설치로 궁내부에 소속되어 있던 많은 나인(內人)들이 해직되어 출궁 되면서 궁중음식이 대중에 알려지게 되었다. 시기는 대략 일제에 강제로 합병된 1910년경을 전후한다.
떡갈비는 경기 떡갈비, 담양 떡갈비, 송정 떡갈비의 세 종류가 알려져 있다. 경기 떡갈비는 1911년 궁궐에서 해직되어 출궁한 나인(內人)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궁에서 배웠던 음식을 만들어 판 데서 유래한다. 경기 떡갈비는 시루떡처럼 네모지고 납작하게 모양을 만든다. 담양 떡갈비는 610여 년 전 노송당(老松堂) 송희경(宋希璟, 1376~1445)이 1404년(태종 4) 담양에 유배와서 체류하던 기간에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담양 떡갈비는 궁중 떡갈비와 동일하게 소고기만을 사용하여 고기를 다진 후 동그랗고 두툼한 모양으로 만들어 소갈빗대에 붙여 만든다.
광주광역시의 송정(松汀)은 광주의 오미(五味) 중 하나로 손꼽히는 송정 떡갈비로 이름난 곳이다. 광주 광산구청 인근에는 송정 5일 장터에는 송정 떡갈비 거리가 있다. 송정 5일장이 서는 자리는 나주와 영광, 함평 등지에서 출발하여 광주에 이르는 길목이다 보니 예로부터 큰 우시장이 형성되었다. 그만큼 좋은 고기를 싼값에 구할 수 있었다. 1950년대에 이 시장에서 최처자 할머니가 탁자와 의자를 놓고 숯불에 구워낸 떡갈비와 비빔밥을 팔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광주 송정 떡갈비의 유래이다.
송정 떡갈비의 특징은 다른 지역의 떡갈비가 소고기만을 사용하는 반면에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섞어 쓴다. 모양에서는 담양 떡갈비가 두툼하고 동그란 모양에 갈빗대가 붙어 있는데 비해 송정 떡갈비는 경기 떡갈비처럼 얇고 네모난 모양으로 만들어 갈빗대는 사용하지 않는다. 송정 떡갈비는 소고기에 돼지고기를 섞기 때문에 풍미가 높고, 고기를 갈비뼈에 붙이지 않아서 저렴한 가격으로 대중에게 제공할 수 있었다.
궁중에서 귀하신 분들이나 먹던 고급스런 떡갈비가 광주의 송정에서 서민들을 위한 가장 서민적인 향토음식으로 거듭나면서, 현재는 다른 지역의 떡갈비를 넘어서 전국적으로 떡갈비의 대명사라는 명성을 얻기에 이르렀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2동 830-6 일대에는 '송정떡갈비거리'가 형성되어 있다. 송정 5일장이 열리는 3, 8, 13, 18, 23, 28일에 맞춰 방문하면 떡갈비와 함께 돼지 등뼈를 넣고 끓여낸 뼛국을 맛 볼 수 있다.
두텁떡의 유래는 고려 시대 말기부터 만들어 먹은 것으로 추측되는데, 정조의 화성 행차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따르면 1795년 정조대왕이 그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칫상에 올린 바가 있어 정조대왕의 효심이 담긴 떡으로도 알려져 있다. 두텁떡은 궁중에서 내려오는 떡으로 일반 백성들이 먹지 못할 만큼 재료가 비싸며 공을 듬뿍 들인 떡이다. 기록을 보면 찹쌀가루에 소금 대신 진간장으로 간을 맞추어 연한 갈색이 나게 했다. 고물로는 볶은 팥고물을 준비하는데 찐 팥을 간장(진간장), 설탕, 계핏가루로 양념하여 넓은 철판에 보슬보슬하게 볶아서 체에 내린다. 그다음 소를 넣는데 볶은 팥에 다진 유자와 밤, 대추, 잣 등을 넣어서 만든다. 이처럼 여러 가지 과일 향과 꿀, 간장(진간장), 계핏가루가 한데 어울려서 향이 진하고 흩어지는 고물 맛이 아주 좋다.
이 떡은 다른 떡과는 달리 고물을 볶는 데 끈기가 필요하다. 또 유자를 미리 설탕에 재웠다가 다져서 섞어야 향기가 난다. 미리 준비하지 못했을 때는 병에 들어 있는 유자차를 이용해도 된다. 밤은 껍질을 벗기고, 대추는 씨를 빼고 갈라서 잘게 썰고, 잣은 고깔을 벗겨 놓는다. 만드는 데 공이 무척 많이 드는 떡이다.
두텁떡은 궁중에서 임금 탄신일에 반드시 만들던 것으로, 『정례의궤』 , 『진찬의궤』 등에 그 만드는 법이 기록되어 있다. 요즘에는 결혼한 신부가 시부모님께 보내는 이바지 음식으로 쓰이기도 한다.
찹쌀가루, 간장, 설탕, 꿀, 푸른 거피팥, 간장, 설탕, 꿀, 계핏가루, 후춧가루, 밤, 대추, 호두, 잣, 유자청 건더기, 유자청
조리과정우리나라의 전통장은 다양한 생리 활성 물질을 함유하고 있고 단백질과 지질이 풍부하여 쌀이 주식인 우리나라 사람들의 부족한 영양분을 보완해주는 요긴한 식품이다. 우리나라 장은 크게 간장, 된장, 고추장과 같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장과 다양한 부재료를 첨가하거나 특수한 방법으로 띄운 메주를 사용하여 특유의 맛과 향을 지닌 특수 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통장류는 콩의 발효 과정을 통해 영양성분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용했던 식품으로 그에 따른 장점들이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동물 단백질 영양소는 식물 단백질 식품인 전통장류만으로는 충족시키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식물, 동물, 해산물로 제조되는 전통장류인 어육장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식품으로이라 할 수 있다.
어육장은 특수 장류의 하나로 육류와 어류, 메주를 항아리에 넣고 숙성시킨 장이다. 숙성된 생선에서 우러나오는 성분과 육류의 동물 단백질이 더해져 일반 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드럽고 진하고 구수한 맛을 내는 장이다.
궁중 장은 궁중에서 왕실을 위하여 담근 장으로 일반 장과는 재료와 제조방법이 다른 장류였다. 어육장에 관해서는 일부 문헌에 전해져 오고 있으나. 어육장의 제조법을 전통 계승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었다. 그러나 과거 흥선대원군 집안과 밀접한 관계였던 사대부가에서 태어나 어머니로부터 어육장 제조법을 전수한 권기옥 명인(전통식품명인 37호 지정)이 전통 어육장 제조방법을 계승하여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궁중장인 어육장은 과거 왕실 및 양반가의 식품이었던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장류로 동, 식물성 영양소를 충족할 수 있는 대표적인 발효식품이다. 특히 일반 전통장류에는 없는 오메가3 성분이 확인됨에 따라 전통장류가 가진 장점과 새로운 성분이 첨가된 우리 고유의 명품 발효식품이라 할 수 있다.
메주, 물, 소금, 쇠고기, 꿩, 닭, 소 내장·염통, 숭어, 도미, 광어, 조기, 낙지, 전복, 홍합
조리과정족편은 주로 소족을 주재료로 하여 만들기 때문에 발 족(足) 자를 사용하여 족편이라고 부른다. 족편은 곡물의 전분을 사용하여 만든 묵처럼 그 특성과 모습이 닮았기 때문에 종종 묵 종류로 분류되기도 한다.
소머리나 소족, 껍질과 힘줄 부분에는 콜라겐 성분이 많아 오래 끓이면 액체 상태로 되었다가 식히면 마치 묵처럼 응고되는 특성이 있다. 이러한 성질을 이용한 음식이 족편이다. 족편은 부스러기 고기나 내장, 또는 소족, 머리 고기, 소가죽처럼 콜라겐이 풍부한 부위를 장시간 푹 고아낸다. 죽과 같은 상태가 되면 먹을 수 없는 뼈나 가죽을 걸러낸 후, 틀에 부어 굳힌다. 탱글탱글하게 굳은 족편은 얇게 썰어서 초간장이나 다른 양념장을 곁들여 먹는다.
족편과 유사한 방법으로 만드는 음식 중에는 전약이 있다. 소가죽과 소머리, 소족 부위를 고운 후 여기에 마른 생강, 꿀, 정향, 후추 등의 약재를 넣어 다시 푹 고아서 굳힌 족편의 일종이다.
족편은 설날 무렵에 즐겨 먹던 겨울철 음식이다. 밖에 내놓았다가 살짝 얼린 다음 얇게 썰어 먹는데, 사각거리면서 젤리처럼 보드라운 감촉이 별미였다. 노인들이나 아이들도 먹기 편하게 부드럽고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하여 보양식으로도 즐겨 먹었다.
족편의 재료로 민가에서는 가죽, 꼬리 등과 맛을 더하기 위해 사태고기, 꿩고기 등을 쓰기도 했다. 한편 궁중 잔칫상도 빠지지 않고 오르는 족편의 주재료는 쇠족을 사용하였고 닭고기나 숭어, 마른 대구, 마른 전복 등의 부재료를 추가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달걀, 표고버섯, 석이버섯, 고추, 잣 등이 고명으로 사용되었다.
근래에 들어 족편은 우리의 입맛이 변해가면서 시중에서 판매하는 곳도 찾기 힘들고 집에서 만들기에는 많은 번거로움이 있어 점차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가는 음식이 되었다.
우족, 쇠고기(사태), 생강, 마늘, 양파, 달걀, 석이버섯, 대파, 실고추, 후춧가루, 간장, 식초, 물, 잣가루
조리과정
갈비찜은 명절상이나 잔칫상에 올리는 특별한 음식이다. 갈비는 늑골을 가리키는 말인데, 소의 갈비는 가리라고 불리어 옛 조리서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는‘가리찜'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갈비찜이라고 하면 소갈비찜을 가르킨다. 고기는 주로 구이로 많이 먹지만 한국음식 중에는 건강한 조리법인 찜요리가 많이 발달하였고, 그 중에서도 갈비찜은 가장 인기 있는 요리라 하겠다. 씹는 맛이 좋은 소갈비는 기름기가 많으므로 지방을 제거한 후에 은행, 밤, 당근 등을 넣어 간장 양념에 조려낸다. 윤기 나게 졸여진 갈비찜은 달콤한 양념 간장 맛이 배어 달콤하면서도 입에 착 감기는 감칠 맛이 난다. 고명으로 달걀지단과 표고버섯 등을 사용해 색감의 조화까지 갖춘 갈비찜은 단연 최고의 요리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웰빙 요리에 알맞은 조리법으로 갈비구이 못지않게 외국인들도 이러한 갈비찜을 좋아한다.
잘 조리된 갈비찜은 고기가 물러서 쉽게 떼어먹을 수 있고 양념이 잘 배어 살짝 거무스레한 빛깔을 내며 국물이 알맞게 남아 있고 슴슴한 단맛이 나야 한다. 본래 갈비찜은 궁중에서 즐겼던 고급 요리이고 명절이나 큰 잔칫상에 올렸던 귀한 음식이었다. 지금도 다른 부위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이 높아 고급음식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고급스러운 전통 갈비찜을 저렴한 가격에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다양한 변화가 시도하고 있고 수입육의 공급으로 예전보다 큰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쇠갈비, 밤, 은행, 무, 당근, 배, 대추, 표고버섯, 마늘, 대파, 청양고추, 통후추ㆍ청주, 설탕, 간장, 참기름, 깨소금
조리과정길거리나 분식집에서 편하고 쉽게 즐길 수 있는 떡볶이는 원래 궁중에서나 먹는 귀한 음식이었다고 한다. 쇠고기나 쌀떡을 이용한 떡볶이는, 먹거리가 귀했던 시절 일반 서민들과는 동떨어진 음식이었다.
떡볶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9세기 말의 요리서인 『시의전서』에서 볼 수 있는데, "궁중에서 흰떡과 쇠고기, 참기름, 간장, 파, 석이버섯, 잣, 깨소금 등으로 떡볶이를 만들어 먹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궁중떡볶이가 그 시작이다.
기록에는 떡볶이라는 이름 대신 떡 찜, 떡 전골, 떡 잡채 등으로 불렸다고 되어 있으며, 이후 1942년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에 떡볶이라는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 이 책에서는 떡과 함께 고기, 채소 등을 간장으로 조려서 만드는 조리법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고추장을 넣어 빨갛고 매콤한 떡볶이가 등장한 시기는 1950년대이고, 본격적으로 우리의 입맛을 사로잡기 시작한 시기는 1970년대에 들어서이다. 간장으로 조리된 떡볶이를 궁중떡볶이나 간장떡볶이라고 부르고 고추장으로 만든 떡볶이를 일반적으로 떡볶이라 부르고 있다. 이러한 음식명의 구별은 별도의 유래나 기록은 없지만, 현대에 유행하는 고추장 떡볶이와 구분하기 위해 궁중떡볶이란 이름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궁중에서 떡볶이를 만들 때 고추장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매운맛이 사람을 흥분시키는 특성이 있어, 나랏일을 돌보는 왕에게는 될 수 있는 대로 매운맛의 음식을 올리지 않은 데서 찾을 수 있다.
궁중떡볶이는 고기와 채소가 어우러져 영양학적으로도 균형 잡힌 음식이다. 영양을 보충해주는 쇠고기와 궁중떡볶이에 들어가는 당근과 양배추로 인해 비타민이 풍부해지며, 피부미용에 도움이 된다. 궁중떡볶이를 조리할 때 당근은 기름에 살짝 볶아 사용하는데 이러한 방법은 당근의 베타카로틴 성분의 소화흡수를 돕는다.
흰떡, 쇠고기, 양파, 당근, 미나리, 숙주, 표고버섯, 소금, 설탕, 간장, 깨소금, 참기름
조리과정
『동아일보』 1931년 2월 27일 「자랑거리 음식솜씨」에서는 신선로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 내용을 대략 살펴보면, ‘여러가지 전유어를 만듭니다. 전복, 해삼 불린 것, 미나리 부친 것, 석이, 계란 노른자를 부친 것, 완자, 은행, 호두 깐 것, 실백, 백파대가리 채친 것, 여러 가지를 깔끔하게 모두 썰어 신선로 그릇에다 넣되 먼저 쇠고기를 잘게 찢어 바닥에 깔고 그 위에다 여러 가지를 색을 맞춰 늘어 놓습니다. 먹을 때는 장국 국물을 들어 붓고 국수 등을 넣어 끌여 먹습니다. 아무 신선로도 가운데 화통이 있으니 거기다가 불을 피워 끓입니다. 그리고 신선로에는 온갖 것을 맘대로 넣습니다. 계란 삶아 썰은 것, 표고버섯, 삶은 무나 지진 두부, ... 신선로가 다 끓어 먹게 될 때 후추가루를 치고 퍼먹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처럼 쇠고기, 전복, 표고버섯, 해삼 등 귀한 재료들을 국물을 붓고 숯불에 끓여 먹으니 맛이 없을 수가 없는 음식이다. 신선로는 음식과 그릇 두 가지를 다 의미한다. 신선로로 만든 음식을 열구자탕(悅口子湯)이라고도 불렀는데, 입을 즐겁게 해준다는 의미이다. 열구자탕은 조선시대 문헌에 나오므로 전근대 이전부터 신선로가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폴란드 출신 민속학자인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는 『코레야 1903년 가을』이라는 책에서 한국에서 신선로를 맛본 경험을 적고 있는데, 신선로를 일종의 복잡한 스프요리라고 정의하면서 굉장히 맛좋은 음식이라고 하였다. 1904년, 일본인 우스다 잔운(1877~1956)은 『조선만화』에서 신선로를 조선요리 중 첫 번째 명물이라고 하면서 일본인의 입맛에도 맞는다고 하였다. 조선요리를 싫어하는 사람도 신선로만큼은 젓가락을 든다는 것이다.
서양인과 일본인이 좋아하는 이 음식을 한국인들도 상당히 좋아했는데 1929년 12월 1일자 잡지 『별건곤』 제24호에서 우보생(牛步生)이란 필명을 내세운 필자는 신선로를 다음과 같이 “찬바람이 높아가는 이때부터의 식탁에서 맛난 냄새를 물큰물큰 피우면서 자글자글 끓고 있는 신선로를 치워버린다면 그는 섭섭한 일이다. 순배가 느직이 돌고 이야기가 차차 운치있어 부펴갈 때에는 조치도 식어지고 국그릇에도 기름이 끼지만은 더욱 더욱 맛이 나는 것은 신선로 맛이다. 완자 한개 부침한 점의 따끈한 맛도 생색 나는 것이어니와 장국에 말아내는 한사래 온면은 별미 중의 별미다. 그대로 지나기는 약주맛 절미가 좀 부실하고 따로이 준비하기에는 어짓 빠른 때에 신선로 장국에 말아내는 온면은 주당에게도 마땅하고 또 비주당의 입에도 마땅한 것이다.” 해방과 함께 서울에 온 미군들도 신선로를 좋아했는데 미군들이 고향에 편지를 쓸 때, “궁전은 남향이고 성벽은 자취 없고 대감은 양반이고 제일 좋은 요리는 신선로라고 전한다. ... (타임지 10월호에서)”(『동아일보』1945.12.02. 「안(眼)에 비친 우리의 자태」)고 하였다.
신선로는 중국에서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연산군대에 정희량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지만(『동아일보』1939.01.05. 「세계에 자랑하고도 남는 조선음식의 재인식」),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의 『코레야 1903년 가을』에서 그는 몇 달후 상하이에서 광동요리를 대접받았는데 한국의 신선로와 같은 그릇에 똑같은 식으로 끓이는 음식이 있었다고 했다. 육당 최남선은 『세시잡기』와 『동경몽화록』을 인용하여 중국전래품임을 시사하기도 하였다.(『동아일보』1963.02.18. 「오묘한 아취의 기교」) 신선로가 들어온 시기를 고려말 원나라대로 보기도 한다.
신선로는 1970년대까지 가정에서도 해먹었지만 이후에는 가정에서 만들지 않게 되었다. 신선로가 가정에서 사라지게 된 것은 난방 연료가 연탄으로 바뀌면서부터다. 장작으로 난방을 하면 숯이 나오고 이 숯이 신선로에 들어가는데, 연탄으로 난방을 하면서 숯을 만들기가 어려워졌다. 요리만을 위해 가정에서 숯을 쓰는 것은 상당히 번거로운 일이었다. 1969년 전기신선로가 개발되기도 하였지만 숯을 넣지 않을 것이라면, 신선로의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독특한 형태는 의미가 없다. 그리하여 전기신선로는 대중화되지 못한 듯하다. 오늘날 숯이 들어가는 신선로는 한정식의 고급 메뉴로 남게 되었다.
전약(煎藥)은 쇠가죽으로 만든 아교에 한약재와 꿀을 넣고 끓여서 족편과 같이 굳힌 음식이다.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내의원(內醫院)에서 만들어 동지(冬至)의 절식으로 신하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쇠가죽대신 우무를 넣어 굳히기도 했다. 조선시대 문헌에 조리법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에는 일반 가정에서 거의 만들지 않는 음식이다. 전약에 관한 김호의 연구(김호, 「조선왕실의 약선 ‘전약’연구」,『진단학보』100, 2005.)와 근대 신문기사를 기반으로 전약에 대해 알아본다.
전약은 일제 강점기 신문에 만드는 법이 나온다.
전약은 먼저 소의 가죽을 삶아 털을 정히 긁고 다시 물을 만히 붓고 가죽을 집어넣은 후 주야로 고아서 물같이 다 되거든 체에 밧쳐노코 찌꺼기는 약념하야 족편으로 쓸 것입니다. 가량 가죽 고은 것이 한 말쯤 되면 조흔 꿀 한말과 건강가루 한량너돈중과 관계(官桂) 엿돈중과 호초가루 닷돈중과 정향가루 서돈중과 대추육을 씨빼고 짓익여 팔홉을 모도 한데 혼합하야 휘저어가며 한번 끓커든 소용대로 각 그릇에 담아서 식혀 굿친 후에 열십자로 갈으고 손으로 꺼내어 녹말편 써듯하여 생과(生果) 접시 위에 얹거나 그냥 접시에 담아 씁니다. 빛은 까맣고 맛이 기이하게 좋습니다.
(『동아일보』1931.10.29. 「요리편(36)」)
이 기사를 보면 일제 강점기까지 전약이 많이 조리된 것 같지만 그때도 전약은 사라져가는 음식이었다. 홍선표(洪善杓)가 신문에 쓴 글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전약이란 것은 과자용 약용 겸 반찬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가 겨울이면 보통 만들어 먹는 족편과 같은 음식이나 이것도 역시 옛날 임금이 가까운 신하들에게 겨울철이면 하사하시던 음식으로 사람에게 영양이 되도록 만드는 중에도 맛 좋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것도 근년에 와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게된 것이 한 유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아일보』1939.01.05. 「세계에 자랑하고도 남는 조선음식의 재인식」)
그런데 이 기사를 보면 궁궐에서 만들어 내려주는 전약을 민간에서 많이 만들어 먹었던 것 같다. 과연 조선시대 전약은 민간에서 많이 먹었던 것일까? 조선시대 문헌을 보면 광해군 대에 편찬된 『동의보감』부터 전약 제조에 관한 기록이 있다. 18세기 후반의 『제중신편』, 19세기 전반의 『규합총서』, 19세기 후반의 『의방촬요』에도 전약제조법이 나온다. 『규합총서』의 경우 저자가 빙허각 이씨로 여자인데, 이는 민감에서 많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규합총서』가 『동의보감』이나 『제중신편』과 같은 의서가 아니라 가정생활과 관련된 백과사전식 책이라는 점에서 전약을 의약품이 아니라 일반 음식으로 먹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전약의 재료 중 꿀은 시기에 따라 대체품이 쓰였다. 『동의보감』에서는 꿀을 넣으라고 했지만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설탕으로 대체되고 있다. 좋은 꿀을 1말 이상 구하기 힘들고 그러함에도 단맛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전약은 시기에 따라 맛의 변화가 있었다. 『동의보감』의 전약은 대추를 꿀에 버무리면서 정향과 후추를 듬뿍 넣어 만든 물렁한 ‘대추젤리’에 가까운 형태였다. 이에 비해 18세기말의 전약은 계피 맛이 강해지고 단 맛도 더 강해졌다. 19세기 후반의 전약은 계피맛이 약해지고 단맛이 강조되는 상태로 변화하였다. 후기로 갈수록 전약은 단맛과 아교(젤라틴) 성분이 많이 들어가 쫄깃한 젤리의 모습을 띠었다.
정향과 후추가 줄어들고 계피가 많이 들어간 것은 정향, 후추가 비싼 수입품이었던 반면 비싼 계피인 육계 대신 싼 계피인 관계(官桂)가 많이 수입되었기 때문이다. 내의원에서도 육계를 구하지 못해 관계를 사용하였는데 이 관계가 전약에도 들어간 것이다. 대체가 어려운 정향과 후추는 시기가 지나면서 양이 줄어들고 대신 계피량이 늘어났다.
비교적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관계를 사용하면서 전약의 약효는 떨어져갔다. 대신 민간에서도 쉽게 만들 수 있는 궁중하사품이 되었다. 약효가 떨어지는데도 오히려 전약이 19세기 말까지 민간에서 만들어진 것은 궁중하사품이라는 이름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전약은 궁중하사품이라는 이름과 달고 쫄깃한 맛으로 민간에서 소비되었다. 개항기 이후 설탕과 과자, 사탕 등 달고 맛있는 음식이 들어오자, 약효가 적고 맛도 없는 전약 대신 사탕과 과자가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동아일보』 1935년 11월9일자 「가을요리(6) 내 집의 자랑거리 음식 구절판, 배추무름」에는 ‘구절판’이라는 음식이 소개되었다. 구절판의 조리법은 ‘... 정육은 육회감으로 가늘게 썰어 물에 잠깐 담가 피를 빼서 꼭 짜 가지고 육회 재듯이 재놉니다. 그 다음에 콩팥은 가늘게 채를 썰어 조리에 담아가지고 펄펄 끓는 물을 끼얹어 축축 까부르면서 끓는 물에 빼어가지고 육회 재듯 재 가지고 잠깐 볶아 놓고 천엽은 소금을 쳐서 비벼 문대며 잘 닦아서 가늘게 채를 쳐서 꼭 짜 가지고 육회처럼 재 놓고 양은 뜨거운 물에 튀어서 거문 껍질을 베껴버리고 희게 만들어 가늘게 썰어 양념하야 잠깐 볶아놉니다.
이상 네가지 횟갓을 차례차례 만들어 놓거든 홍무와 오이(오이가 없거든 미나리 대용도 가능)를 채쳐서 소금에 잠깐 절여 물에 흔들어 꼭 짜서 기름에 볶고 표고를 불린 것을 채쳐서 기름에 볶아 논 후에 이상에 볶아온 세 가지를 각각 양념하야 노면 일곱가지가 준비된 것입니다. 배를 채쳐서 여덟가지 되거든 구절판이나 그렇지 않으면 큰 양접시 가장자리에 여덟가지를 각각 올려담고 횟갓에는 잣가루를 뿌려놉니다.
끝으로 할 것은 그림에 보이는 것과 같이 가장자리에는 여덟가지를 담었지마는 가운데 자리가 하나 남었는데 이 자리에는 또 담는 것이 있습니다. 계란(가운데 부분)에 밀가룰 섞어서 밀점병 같이 부쳐서 놓일만하게 둥글게 오리는데 둥근 쇠흥 뚜껑으로나 합 뚜껑같은 것으로 누르면 곱게 됩니다. 이 점병을 사람 수요대로 그보다 더 많이 만들어 가운데 감어노면 먹을 때는 이 점병에 여덟가지를 조금씩 놓아 싸서 초장을 찍어 먹게 됩니다.’
조리법이 상당히 복잡한 것 같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밀전병을 부쳐 놓고 밀전병 외에는 밀전병에 싸 먹을 재료를 준비하는 것이다. 구절판이라는 요리에 대해서 이 기사는 ‘옛날에는 구절판이라는 그림과 같은 그릇이 있어서 이 그릇에 아홉 가지를 담아서 쓰게 된 것이지마는 지금은 이 그릇을 파는 곳이 없는 만큼 큰 서양접시에 담아도 보기 좋습니다.’라고 하여 옛날부터 구절판이라는 음식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조리서나 의궤 등에 구절판은 나오지 않는다. 최초로 구절판이 나오는 기록은 이 기사이다.
홍선표는 1940년 3월14일자 『조선일보』 궁중요리 특집면에서 ‘구절포(九折包)’에 관한 칼럼을 썼다. 구절포는 구절판의 다른 이름이다. 이 기사 때문인지 1960년대부터 신문에서는 ‘구절판’을 궁중요리로 인식하였다. 『동아일보』1960년 12월 22일자 「구절판 음식」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구절판을 궁중음식이라고 소개한 이래 구절판은 ‘궁중요리’라는 수식어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조선시대 문헌에 근거가 있지 않다.
그렇다면 구절판은 조선시대 없던 음식이었을까? 조선시대 밀이 귀했고 왕가나 반가에서 특별한 날 밀요리를 해먹었으므로, 밀요리 중 하나였을 수는 있다. 구절판이 밀쌈과 같고, 밀쌈은 만두 속을 밀전병에 싸먹는 것이라고 하였는데(『경향신문』1968.07.29. 「무더위를 이기는 복중요리」), 전근대시기부터 만두가 있었으므로 만두 요리의 한 형태로 구절판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구절판이 궁중요리라는 수식어를 갖게 된 것은 구절판이 귀한 음식이라는 분위기를 띄기 때문이다. 구절판의 재료 중 어떤 것이 귀했을까? 밀전병의 재료인 밀이 전근대시기 상당히 귀한 재료였다. 당시 밀은 수입되지 않았고, 국내에서 재배한 밀은 주로 누룩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전근대시기 만일 구절판이 있었다면, 궁중에서 먹을 만한 귀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절판’ 조리법이 신문에 소개된 것은 이 당시 구절판이 상당히 대중화될 수 있는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밀가루가 흔해졌다. 만주와 호주, 캐나다 등에서 밀이 대량으로 수입되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1927년 9월 3일 「일주일간 식사품목」이라는 기사에서는 대인 4명, 소인 3명의 7인 가구로 소작농을 하는 집의 1주일간 식단을 보여주고 있다. 주로 잡곡밥에 된장찌개, 쇠고기를 약간 넣은 나물, 김치 등이 주요 식단인데, 점심으로는 별식으로 밀전병, 수수전병, 칼국수 등을 해먹는다고 하였다.
이 시기 밀가루가 상당히 보급된 것이다. 이렇게 밀가루가 보급되면서 구절판의 조리법이 신문에 소개될 수 있었다. 비록 밀가루가 대중화되어 구절판 조리법이 소개될 정도이지만, 구절판을 만드는 것은 정성이 필요한 일이다. 특히 밀전병을 얇게 부쳐 일일이 모양을 다듬는 것은 정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정성이야말로 궁중요리급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구절판이 한정식집에서만 판매되는 것은 구절판이 정성을 갖고 만드는 음식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준치는 청어과의 흰 살 생선으로 몸통은 옆으로 편평하며 밴댕이와 비슷하지만 몸집이 더 크다. 진어(眞魚), 시어(鰣魚), 준치어(俊致魚), 준어(俊魚) 등으로 불리는 준치는 생선들 중에서 두 가지로 유명하다. 첫째는 맛이다. 맛으로는 준치를 따를 수가 없어 진짜 생선이라는 뜻의 진어(眞魚)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둘째는 준치하면 생각나는 그것, 바로 가시이다. 준치는 유난히 가시가 많은 어종으로, 잔가시가 온통 살 틈에 박혀 있어 편히 먹기가 어렵다. 이렇게 가시가 많은 준치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먼 옛날에 준치는 맛이 좋고 가시가 없어 사람들이 준치만 즐겨 먹어 멸종 위기에 놓였다고 한다. 그러자 용궁에서는 묘책으로 물고기들에게 자기의 가시 한 개씩을 빼서 준치에게 박아 주면 사람들이 쉽게 잡지 않으리라는 의논이 모아졌다. 모든 물고기가 각자의 가시를 하나씩 빼서 준치의 몸에 꽂으니 결국 가시가 많은 생선이 되었고 아픔을 견디지 못하여 달아나는 준치를 뒤쫓아 가서 꽂기도 해 꼬리 부분까지 가시가 많다.
조선 후기 빙허각 이씨가 엮은 여성 생활 백과,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준치 가시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토막 낸 준치를 도마 위에 세우고 허리를 꺾어서 베나 모시 수건으로 두 끝을 누르면 가는 뼈가 수건 밖으로 내밀 것이니 낱낱이 뽑으면 가시가 적어진다"라고 상세히 적어 놓기도 하였다. 또한, "예부터 새가 물에 빠져 조개가 된다"라는 말이 있는데 준치도 새가 변하여 준치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준치를 먹은 다음, 대가리 뼈를 모아 새의 형상을 만들고 앵두를 주둥이에 물려 처마 끝에 매달아 두면 새가 된다는 풍습이 전해 내려온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은 준치가 썩었다 해도 그 진가를 간직하고 있다는 뜻으로 귀한 물건이 아무리 오래되고 손상되었다 해도 그 값어치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월~6월이 제철인 준치는 국, 자반, 찜, 회, 만두 등 다양한 형태의 요리재료로 이용되었다. 특히 준치만두는 만두피에 소를 넣어 빚는 일반 만두와는 달리 둥근 완자를 만들어 전분을 입힌 뒤 쪄내는 일종의 굴림 만두인데, 주로 더위가 시작되는 단오에 만들어 먹었던 음식이다, 잔가시를 세심하고 정성껏 발라 만드는 준치만두는 맛도 뛰어나지만, 기력을 회복시켜 주는 보양식이기도 하다.
준치, 쇠고기우둔살, 쑥갓, 전분, 생강즙, 잣, 대파, 마늘, 생강, 소금, 후춧가루, 고기 양념(간장, 설탕, 다진 마늘, 깨소금, 파, 참기름)
조리과정궁중 음식인 '선(膳)'은 오이나 두부, 가지, 호박, 생선 등에 버섯이나 고기를 채워 넣거나 섞은 다음 육수를 부어 익힌 음식을 가리킨다. 육류나 해산물을 주재료로 하는 찜 요리와는 달리 오이, 가지, 호박 등 식물성 재료를 주로 사용한다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선 요리 중에서도 해산물이나 육류를 사용한 요리가 있고, 찜 요리에도 식물성 재료를 사용하기도 해 그 구분이 명확하지는 않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주로 만들었던 선 요리로는 오이선과 두부선, 어선이 있다. 두부선은 곱게 으깬 두부를 짜내어 수분을 제거한 다음 다진 닭고기살을 섞어서 모양을 만든 후, 채 썰어 놓은 석이버섯이나 표고버섯을 얹어 쪄낸 음식이다. 어선은 담백한 생선살로 볶은 쇠고기와 채소를 싸서 쪄낸 음식이다.
오이선은 원래 칼집을 넣은 오이에 다진 고기소를 넣어 삶은 다음 식은 장국을 부어 만드는 음식이었다. 요즘은 오이를 익혀 먹는 조리법이 흔치 않지만, 예전에는 찌개나 지짐, 찜 등으로 조리하기도 하였다.
산뜻하고 아삭거리는 식감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기호에 맞춰 현재의 오이선은 소금에 절인 오이에 칼집을 내고 살짝 볶아 색을 더하고 소고기, 당근, 달걀을 소로 사용하여 만든다. 마지막으로 새콤달콤하게 조미한 식초 물을 부어 완성한다.
오이 본연의 향과 상큼하면서도 청량감이 가득한 푸른빛의 오이선은 전채 요리로도 좋고 입맛이 없는 여름에 어울리는 음식이다. 오이 그 자체로는 영양분이 높지 않지만, 고기볶음과 버섯, 달걀지단 등을 섞어 만든 오이선은 부족한 영양성분을 보충해 주는 영양식이다.
오이, 쇠고기, 달걀, 식용유, 소금, 표고버섯, 후춧가루, 깨소금, 참기름, 간장, 마늘, 설탕, 물, 식초
조리과정
조선시대 궁중음식이었던 육회가 경기도의 향토음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으로 경기도의 지역적ㆍ행정적 특수성에 기인한다. 조선시대에는 수도 한양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경기ㆍ황해도ㆍ평안도ㆍ함경도ㆍ강원도ㆍ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 등 팔도로 나누었다. 그런데 지금은 경기도라 부르지만 조선시대에는 경기도라 하지 않고 ‘경기’라 하였고, 나머지 일곱 개의 지역은 모두 ‘도’를 붙여서 구분하였다.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편찬한 법전을 비롯한 각종 문부를 보면 경기도라 하지 않고 ‘경기’라고 표기한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경기’라는 용어는 고대 중국의 『시경(詩經)』, 『맹자』 등에서 유래한다. 『시경』에는 ‘기내(畿內)의 땅이여 백성이 머물러 사는 곳이로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왕도(王都) 주변 사방 오백 리 이내의 땅을 경기로 획정하고 천자(天子) 직할지(直轄地)로 삼은 데서 비롯된다. 경기는 기내(畿內), 기전(畿甸)으로도 불리었다. 즉 조선에서의 ’경기‘는 도성인 한양을 둘러싼 인근 지역을 일컫는 것이었고, 다른 지방의 도와는 달리 군사적으로는 도성을 옹위하고 경제적으로도 가장 빨리 도성의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지역으로 기능하였다. 현재 경기도의 도청은 수원시에 있지만 조선시대의 경기감영은 지금 서대문이라 불리는 돈의문(敦義門) 밖에 바로 위치하였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교남동의 서대문 적십자병원 자리가 바로 경기감영 터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경기는 도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보니 한양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여건을 갖출 수 있었다.
실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17세기 중반 이후는 군사제도가 도성방위중심으로 개편되면서 한양에는 훈련도감과 금위영, 한양 이북은 북한산성의 총융청과 이남은 남한산성의 수어청 등 사영(四營) 방위체제가 구축되었다. 18세기 정조(正祖)대에 이르러서는 경기지역의 동서남북으로 개성ㆍ강화ㆍ광주ㆍ수원을 정2품 유수부(留守府)로 승격하고, 각각 경리영(經理營)ㆍ진무영(鎭撫營)ㆍ총리영(總理營)등 군영(軍營)을 설치하고 군영의 사(使)를 유수가 겸임토록 하였다. 광주목에서 광주유수부가 된 광주의 경우는 이미 수어청(守禦廳)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관직 간의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수어사가 광주유수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도성방위체제의 변화는 단순히 군사적ㆍ행정적인 변화에만 그치지 않고, 궁중과 한양의 문화가 경기지역에 유입되는 것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여 농성을 하다가 투항한 기간이 불과 두 달여 밖에 안 되지만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남한산성 인근 광주지역에는 도성의 문물이 전파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또한 정조가 현재의 수원시에 축조하였던 화성(華城)과 화성행궁(行宮)은 국왕이 설계하고 직접 공사를 주관한 조선 최초 최대의 ‘신도시 조성계획’ 이었으며, 화성에 전국의 문물과 경제력이 집결하고 궁중문화가 지방에서 그대로 재현되는 그야말로 작은 도성이었다.
조선시대 대개의 왕릉이 도성 주변인 경기도 구리시나 고양시 등에 위치하였던 것은 국왕의 능행(陵行)을 편하게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정조는 현재의 서울축별시 동대문구 전농동 배봉산에 있던 생부(生父)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인 영우원(永祐園)을 1789년(정조 13) 화성 신도시 근처로 이장하고 현륭원(顯隆園)으로 명명하여 재위기간 중 30여 회 이상의 장거리 능을 하였다. 또한 정조는 1795년(정조 19) 모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도성이 아닌 화성행궁에서 성대하게 연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정조도 사후에 부친의 묘인 현륭원 근처 건릉(健陵)에 안장되었고, 정조의 아들인 순조(純祖)대 이후로도 수원 능행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정조의 신도시 화성 건설로 인한 행행(行幸)과 현륭원으로의 능행은 조선후기 한양과 도성의 궁중문화가 경기지역에 확산되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현재 경기 도정(道政)의 중심지인 수원시가 오래전부터 소갈비를 양념에 재워 구워먹는 ‘수원갈비’로 유명한 지역이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조선시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원칙적으로 소를 임의로 도살하는 것을 국법으로 엄금하였다. 소를 잡아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해당 관아의 수령에게 타당한 사유를 신고한 후 허가를 받아야 가능했다. 농경국가인 조선에서 소는 국가적인 생산수단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잡아먹을 수 없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일반 민인들은 닭이나 개, 돼지 등을 주로 식용하였다. 그런데 수원의 경우에는 궁중음식이었던 소갈비구이가 민간에 전파되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상품화된 식품으로 판매되는 수원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으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육회와 같은 생고기를 식용한 역사는 비교적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근거로 유교의 사서삼경 중 하나인 『맹자』 진심하(盡心下)편에 회자(膾炙)라는 말이 언급될 정도로 오래되었다. 회자에서 ‘膾’는 생고기 음식을 이르며, ‘炙’는 익힌 고기를 뜻한다. 특히 남송(南宋)의 성리학(性理學)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고 개국한 조선에서는 『논어』에 공자도 즐겨 먹었다는 육회를 자연스레 먹는 것이 음식습속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조선시대 육회에 대한 기록은 18세기 무렵의 기록에서 집중적으로 관찰된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보면 1766년 유중림(柳重臨)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1797년의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1800년대 초 저자 미상의 『주찬(酒饌)』, 1815년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閨閤叢書)』, 1827년 서유구(徐有榘)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1800년 말 저자 미상의 『시의전서(是議全書)』 등이다. 이상의 기록에는 소뿐만 아니라 돼지ㆍ양을 비롯한 각종 어육의 고기와 가죽, 내장 등 특수부위까지 가공하여 회로 만드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에 눈길이 가는 자료는 『원행을묘정리의궤』이다. 정조가 화성행궁에서 열었던 생모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정리한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찬품단자에는 회(膾)가 무려 9회나 기록되어 있다. 그 중 소의 살코기를 간장 양념에 참기름, 후추, 깨 등으로 조리한 육회는 총 4회가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육회가 궁중음식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003년 방영되어 공전의 시청률은 물론이고 대중의 사랑과 인기를 독차지한 드라마가 있다. 바로 ‘대장금(大長今)’이다. 이 드라마는 국내는 물론이고 체제와 문화, 종교를 초월하여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아직까지도 사랑받는 드라마로 기억되고 있다. 숱한 역경을 헤치고 선한 심성으로 국왕의 의녀에 오른 성공담과 권선징악 스토리, 민정호와의 로맨스, 모녀지간을 필적하는 상궁 한백영과 장금의 의리 등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심성에 부응하기에 충분한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드라마의 백미라 할 수 있는 화려하고 다양한 궁중음식 상차림은 지구촌에 우리 전통음식문화를 전파하고 한류열풍을 일으키는 주역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드라마 ‘대장금’에서는 어린 나이에 궁궐에 들어온 생각시들이 정식 궁녀가 되기 위한 어선(御膳)경연을 펼친다. 경연에 앞서 생각시들에게 유의사항과 함께 경연주제를 알려주는데, 바로 “머리이되 머리가 아니며, 옷이되 옷이 아니고, 사람이되 사람이 아니다(頭不頭 衣不衣 人不人)”로 표현된 만두였다. 경연 전날 장금이는 음모로 인해 미리 받아 두었던 만두재료인 진가루(眞末, 옛날에는 밀가루가 귀하여 진가루라 불렀다)를 분실 당하자 기지를 발휘하여 박껍질과 순채로 만두를 만들어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출궁 당한 위기에 처한다. 이때 지나가던 대왕대비가 장금의 만두를 먹어보고 훌륭하다는 칭찬과 함께 궁에 남게 된다. 이 경연 장면에서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만들었던 어만두ㆍ규아상ㆍ편수 등의 다양한 궁중만두가 선보였다.
비록 드라마의 대사이지만 ‘머리이되 머리가 아니고, 옷이되 옷이 아니다’는 말은 만두를 개념적으로 가장 정확하게 의인화하여서 표현한 말일 것이다. 만두는 한자어로 ‘饅頭’로 뜻을 풀어보면 ‘饅(만)’자는 밥 식(飠)변에 ‘아름답다’는 뜻을 지닌 ‘曼(만)’자로 이루어진 글자이다. ‘頭(두)’는 머리를 뜻하므로, ‘머리처럼 생긴 맛있는 음식’ 정도의 뜻을 지닌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만두에 사람의 머리를 뜻하는 말이 들어가게 된 기원은 촉나라의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위수(渭水, 지금의 웨이허강)에 이르러 49명의 머리를 희생으로 바치라는 용신(龍神)의 요구에 밀가루 반죽으로 사람머리를 흉내 낸 음식을 만들어서 제사를 지내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결국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만두는 중국에서 유래한 음식인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 원나라에서 전래된 것으로 알려진다. 고려시대의 연애풍속을 담고 있는 유명한 고려가요 '쌍화점(雙花店)'이 바로 그 증거이다. 쌍화점은 지금의 만둣가게에 해당하며, 쌍화(雙花) 또는 상화(霜花)로 불렸던 음식이 만두의 원형이다. 원나라가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라는 직할 통치기구를 두어 지배하였던 제주도는 몽골 풍습의 흔적이 비교적 많이 남은 지역이다. 제주도의 향토음식 중 발효시킨 보릿가루를 반죽하여 팥소를 넣고 쪄낸 ‘상애떡’이라는 음식도 쌍화에서 유래된 음식으로 만두의 사촌에 해당한다. 형태는 요즘 찐빵과 유사하지만 재료와 만드는 방법이 다르다. 명칭에서도 ‘쌍화 → 상화 → 상외’의 형태로 음운이 변화한 이름을 지닌 음식이다.
고려말에 전래된 만두는 조선시대에 들어서 궁중음식으로 화려한 꽃을 피우며 우리 고유의 전통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조선시대 궁중의 각종 연회와 잔치행사를 기록한 궁중의궤에는 다양하고 진귀한 만두 종류가 기록되어 있다. 그 종류는 골만두(骨饅頭)ㆍ규아상ㆍ동과만두(冬果饅頭, 동아만두)ㆍ병시(餠匙)ㆍ생치만두(生雉饅頭)ㆍ생합만두(生蛤饅頭)ㆍ양만두(羘饅頭)ㆍ어만두(魚饅頭)ㆍ육만두(肉饅頭)ㆍ준치만두(俊致饅頭)ㆍ천엽만두(千葉饅頭)ㆍ채만두(菜饅頭)ㆍ침채만두(沈菜饅頭)ㆍ편수(片水) 등으로 실로 다양하다. 궁중만두는 재료 및 만드는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그중 특이한 것은 ‘옷인데 옷이 아닌’ 만두피의 재료가 다양하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만두피는 반죽한 밀가루를 얇게 펴서 만든 것을 연상한다.
궁중에서 만들던 만두에 사용되던 만두피에는 밀가루와 메밀가루를 비롯하여 어류나 육류 등 다양한 재료가 사용되었다. 그 종류를 살펴보면 숭어[秀魚]나 민어 살을 얇게 포를 떠서 간을 한 다음 만두피로 이용하는 어만두, 소의 첫 번째 위인 ‘양’과 세 번째 위인 ‘천엽’을 가공하여 만두피로 하는 육만두와 양만두 등이 있다. 심지어는 만두피가 없는 ‘누드만두’도 만들어낼 정도였는데, 다진 꿩고기나 생선살을 반죽하여 전분에 살짝 굴려서 쪄낸 꿩만두나 준치만두가 이에 해당하는 음식이다.
드라마 ‘대장금’의 요리경연에서도 다양한 궁중만두가 소개되었는데 그중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겨진 음식은 단연코 어만두이다. 밀가루와 같은 곡물재료로 만든 만두피는 재료도 구하기 쉽고 만들기도 쉬운 편이다. 또한 육류나 조류를 재료로 이용한 만두피는 얇게 포를 떠도 육질이 단단하기 때문에 쉽사리 찢어지거나 하지 않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어만두의 재료인 숭어나 민어와 같은 생선은 살에 결이 있고 육질이 약하여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찢어지거나 부서지기 쉽다. 그 대신에 생선살로 만든 만두피는 생선 자체의 담백한 맛과 아울러 식감이 좋고 소화도 잘되는 장점 때문에 궁중에서 가장 선호하던 만두음식 중 하나였다.
어만두의 재료는 크게 만두피에는 숭어 살ㆍ전분ㆍ생선밑간, 만두소에는 소고기ㆍ목이버섯ㆍ숙주ㆍ양념, 그리고 만두를 찍어 먹는 양념인 초간장으로 구성된다. 얼핏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만두피와 소에 들어가는 양념이 각기 달라서 종류가 많고, 만드는 과정에 여간 정성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우선 숭어 살은 칼을 뉘어 손바닥 반만 한 크기로 얇게 포를 뜬 후 밑간을 해둔다. 목이버섯은 뜨거운 물에 담가 불린 다음 곱게 채로 썬다. 숙주는 끓는 물에 데쳐 잘게 썰어 물기를 짜낸다. 목이버섯과 쇠고기를 합하여 중간 불에 볶은 후 숙주와 섞어 만두소를 만든다. 밑간한 생선에 물기를 닦고 준비한 소를 한 큰술씩 얹고 전분가루를 묻히면서 꼭꼭 쥐어 만두모양으로 만든다. 찜통에 면보를 깔고 생선살이 투명해질 때까지 찐 다음 꺼내어 식힌 다음 그릇에 담아 초간장을 곁들여 낸다.
완성된 어만두는 초간장에 찍어서 그냥 먹기도 하지만 만두피가 생선재료인 만큼 생선에 잘 어울리는 ‘어만두탕’으로도 많이 조리되었다. 어만두탕이 수라상이나 잔칫상에 자주 오른 메뉴 중 하나였다는 것은 각종 궁중의궤에서도 확인된다. 궁중에서 만들기 시작한 어만두는 차츰 궁궐 담을 넘어 반가(班家)의 음식으로 전파되면서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어만두의 조리법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각종 조리서에 소개되어 있다. 현존하는 조리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1450년경 어의(御醫) 전순의(全循義)가 지은 『산가요록(山家要錄)』에 어만두 조리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만드는 방법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산가요록』의 저자 전순의의 직업이 임금과 왕실의 건강을 책임지는 어의였으므로 궁중음식에도 정통하였을 것이다. 『산가요록』이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1450년경은 세종(世宗)이 즉위한 지 32년 정도가 되는 해이므로 어만두는 이미 조선 국초부터 궁중에서 만들어진 음식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어만두는 19세기 말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1919년 경상북도 상주군(현 상주시)의 한 반가에서 발견된 『시의전서是議全書』라는 조리서에도 어만두법이 소개되어 있다. 만드는 방법은 450년 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왕조는 지구상에서 유례가 드물 정도로 500여 년이라는 오랜 기간 지속된 왕조였는데, 어만두는 그러한 왕조의 역사와 함께하였고, 왕조가 사라진 현재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살아있는 역사로서 서울과 경기지방의 향토음식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갈증이 많이 나는 무더운 여름이면 민가에서는 오미자, 오미자, 맥문동, 인삼 등을 달여 마셨고, 궁중에서는 제호탕을 갈증 해소의 으뜸 음료로 꼽았다. 백단향(白檀香), 초과(草果), 사인(砂仁)과 오매육(烏梅肉) 등의 약재를 갈아 꿀에 재워 중탕한 후 항아리에 담아놓고 냉수에 타서 먹으면 가슴속이 시원하고 그 향기가 오래도록 가시지 않는다고 했다. 제호탕은 단오부터 여름내 마시면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하였고 여름에 어렵사리 구한 얼음을 더해 마시면 청량음료 그 자체였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단옷날(음력 5월 5일)에 내의원에서 제호탕을 제조하여 왕에게 진상하면, 이를 단오선(端午扇)이라 하는 부채와 함께 기로소(耆老所)에 하사한다고 하였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는 제호탕에 관하여 "서열(暑熱: 심한 더위)을 풀고 번갈(煩渴: 열이 나며 목이 마르는 증상)을 그치게 한다"라고 하였다.
제호탕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임금을 모시고 피난길에서 돌아와, 영의정으로서 전란의 피해를 복구하려고 매우 분주하던 때의 일이다. 집에 갈 시간도 없는 터라 대궐 가까이에 식사와 의복 시중을 들어줄 소실을 들였다. 정신없이 바쁘던 어느 날 옷을 갈아입으러 들렀는데, 마침 너무 더워서 제호탕이나 한 대접 마셨으면 하는 순간, 소실이 시원한 제호탕을 갖다 바쳤다. 제호탕을 마신 이덕형은 소실을 한참 쳐다보다가 그 길로 돌아 나와 다시는 찾지 않았다"라고 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친구 이항복(李恒福)이 그 여인을 버린 이유를 묻자, 이덕형은 “그날 더위에 지쳐서 제호탕 생각이 간절했는데, 그 마음을 어떻게 알아차리고 선뜻 내어주는 게 어찌나 어여쁘던지!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아녀자에게 빠져서야 되겠나? 그래서 그만 인연을 끊었네.”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오매육, 백단향, 초과, 꿀, 물, 사인
조리과정구절판은 아홉 개 칸으로 구분된 목기 그릇을 칭하는 말이다. 색색의 채소와 육류 등 여덟 가지를 둘레에 있는 칸에 담고 밀전병을 가운데에 담아 여러 음식을 싸 먹는 요리이다. 그릇으로 쓰이는 구절판은 주로 옻칠을 하고 자개를 박아서 다양한 문양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공예품이다. 이러한 그릇에 색색이 조화를 이룬 음식을 담아 전병에 싸 먹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오감을 만족시킨다. 최근에 만드는 구절판은 플라스틱이나 유리, 도자기 등의 다양한 재료로 만든다.
구절판은 밀쌈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동국세시기』에는 "궁중이나 반가(班家)에서 유월 유두의 별식으로 밀쌈을 즐겨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구절판 그릇으로의 사용 여부는 나타나 있지 않다. 궁중음식으로 알려진 구절판은 조선 시대 궁중의 잔치를 기록한 『진찬의궤』나 『진연의궤』에도 관련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1930년대 이후에 쓰인 『조선요리법』, 『이조궁정요리통고』 등에 조리법이 기록되어 있다. 구절판은 궁중식과 민간 식으로 구분되며 또한 육류와 채소 등을 밀전병에 싸 먹는 진 구절판과 마른 안주류를 담아내는 마른 구절판 두 가지로 구분하기도 한다.
구절판은 우리의 고유한 오방색(五方色)인 붉은색, 녹색, 노란색, 검은색, 흰색을 표현하는 음식이다. 이 구절판의 아름다운 색감에 반한 사람이 ‘대지’의 작가 펄 벅 여사이다. 1960년 우리나라를 방문할 당시 음식 대접을 받은 펄 벅 여사는 상 한복판에 놓인 팔각형의 구절판을 발견하였다. 뚜껑을 열어보니 까만 뚜껑과는 대조적으로 그 안에는 아홉 칸 빨간 틀 속에 색색의 음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나는 이 작품을 파괴하고 싶지 않다”라면서 끝내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쇠고기(우둔), 오이, 당근, 석이버섯, 숙주, 마른표고버섯, 달걀, 소금, 후춧가루, 참기름, 밀가루, 간장, 설탕, 다진 파, 깨소금, 다진 마늘
조리과정한국인의 전통적인 식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바로 쌀이다. 예로부터, 한 해의 벼농사가 잘 되지 않으면 그 책임을 임금에게 물어 임금이 직접 하늘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또한, 부정부패로 인해 군인들의 봉급에 쌀과 모래를 섞은 결과 임오군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옛날부터 농경국가였던 우리나라에서 쌀은 없어서는 안 될,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다.
너무나도 기본적인 것이었기에, 쌀을 빗대어 인생의 지혜를 가르치고자 한 속담들이 유독 많다. 몇 가지만 소개해보자면, “쌀독에서 인심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쌀은 쏟고 주워도 말은 하고 못 줍는다”등이 있겠다. 또한 쌀의 중요성은 우리의 일상 표현에서 쓰는 ‘밥’ 이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난다. “밥맛이 없다”, “찬밥 신세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 등의 표현도 많이 사용하는데, 여기서 ‘밥’은 주식인 동시에 건강, 삶, 형편 등의 비유법이다. 이는 우리의 음식문화에서 쌀이 기본 바탕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찬 없이 맨밥만 먹을 수는 있어도, 밥 없이 반찬만 먹을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쌀밥을 만든 것은 조선의 제 9대 왕 성종이다. 그가 세종대왕의 영릉에 성묘하고 궁으로 돌아갈 때, 이천에 들러 밥을 먹었는데 그 뛰어난 맛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환궁 후 이천 지역에서 나는 쌀을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라오는 진상미로 하게 되었고, 이것이 이천의 쌀밥이 유명하게 된 이유라고 전해 내려온다. 그래서 오늘날 이천쌀밥을 지칭할 때 흔히 ‘임금님표’ 쌀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당시 임금님의 수라상은 조선팔도에서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음식들이 모이는 최상급의 밥상이었는데, 밥상의 근간을 이루는 쌀밥이 이천 지역의 쌀이라는 점은 이천 농민들에게도 크나큰 자부심거리였다.
이천쌀은 임금님의 사랑을 받았듯, 오늘날에도 국민의 사랑을 꾸준히 받고 있다. 조선 성종실록(성종21년,1490)에 처음 등장한 이천의 쌀밥은 오늘날까지 무려 530년이라는 시간동안 그 사랑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이정도면 ‘임금님표’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과연 이천쌀밥의 숨겨진 맛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이 쌀의 품종이 우리나라에서도 극히 일부의 지역에서만 재배되었던 극조생종(極早生種:다른 품종보다 훨씬 빠르게 영그는 품종)이라는 데에 있다. 이천에서 재배되는 벼의 특성은 빠르게 영근다는 것 외에도, 이천과 여주일대에만 존재하는 아주 제한적인 면적의 비옥한 토지에서만 자란다는 것이다.
빠른 시간내에 영양분을 쭉쭉 흡수해서 그럴까? 쌀밥은 희다못해 푸른기가 돌며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또 한 가지의 비밀은 물에 있다. 비가 내려서 땅에 떨어지면 그것이 지표면을 통과하면서 지하수로 모인다. 이천의 농민 88% 가량이 지하수로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비옥한 땅을 통과한 빗물이 맛이 좋을 수밖에 없다. 정수기로 치면 필터가 좋으니까 물맛이 좋은 셈. 좋은 지하수로 길러낸 쌀은 자연스럽게 맛이 좋은 쌀로 탄생한다. 물이 얼마나 좋냐면, 국내의 내로라하는 식음료기업들이 이천에 위치해 있다. OB맥주, 진로소주, 해태음료, 샘표간장 등 물맛이 가장 중요한 식품기업들이 이천 지역에 보금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향온주(香溫酒)는 궁중에서 빚던 술이다. 조선시대 숙종이 지은 시를 보면 자신이 마시던 술을 언급는데 궁온(宮醞)이라고 표현한다. 궁궐 안에는 약국처럼 약재를 다루던 내국(內國)이 있었다. 임금의 건강을 위해 빚는 약주 역시 내국에서 관리했는데 내국향온과 내국법온이 있었다. 그중 내국향온이 바로 향온주이다. 그래서 향온주는 왕의 건강을 관리하던 어의(御醫)들이 빚은 어주(御酒)라고 전해진다. 이렇게 궁중에서만 빚어지는 약주인 향온주는 해독작용이 뛰어나고 독기를 제거해주는 효능이 있어 사신들에게 접대할 때도 많이 사용되던 술이었다. 사신들은 법주를 마시면 설사를 하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해독작용이 뛰어난 향온주를 대접한 것이다.
향온주가 해독작용이 뛰어난 이유는 ‘누룩’ 때문이다. 향온주의 누룩은 특별하다. 향온주는 향온곡(香醖麯)이라는 특수한 누룩을 발효제로 사용한다. 보통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누룩은 밀을 사용하는데 향온곡은 밀과 겉보리, 녹두가루를 사용한다. 겉보리는 술맛을 부드럽게 해주는 효과가 있고, 녹두의 경우에는 제독작용뿐만 특유의 향을 만들어준다.
또한 향온주 특유의 맛은 만드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보통 술을 만들 때 고두밥에 누룩과 날물(생수)을 섞어 버무려서 술독에 안친다. 그런데 향온주는 뜨거운 고두밥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고두밥이 물을 다 빨아들이게 한다. 그 이후에 차갑게 식혀서 술을 만든다. 또한 향온주는 덧술을 12번까지 한다. 마지막 덧술을 하고 보름쯤 지나야 비로소 향온주가 완성된다. 이렇게 만들기 때문에 독특한 향온주만의 맛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술 이름에 따뜻할 온(溫) 자가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온자가 들어가는 이유 역시 이러한 만드는 과정 때문이다.
향온주는 궁에서만 만들어지고, 사신을 대접하거나 국가적인 큰 행사가 있을 때만 사용했던 술이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에 맥이 끊겨 더 이상 맛볼 수 없는 술로 알려졌는데, 이 술을 민가에서 빚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궁중에서 빚던 술이 집에서 만드는 가양주로 전해지게 된 것은 바로 19대왕인 숙종의 왕비였던 인현왕후 덕분이다. 인현왕후가 사가로 유폐되어 있는 동안 궁중의 향온주가 전해졌다고 한다. 다른 일설로는 궁중에서 자란 공주나 대군이 시집을 가거나 장가를 가면서 민가로 전해진 것이라고도 한다.
어렵게 전해진 향온주는 1993년에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었다. 향온주의 1대 기능보유자인 정해중 씨는 황해도에 터를 잡고 살던 하동 정씨 가문의 사람이다. 하동 정씨는 8대조가 인현황후의 외할아버지였다고 한다. 따라서 향온주의 비법은 인현황후를 통해서 하동 정씨 집안에서 가양주로 8대를 거쳐서 전해내려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현재는 1대 정해중 씨가 작고한 이후에 2대 기능보유자인 박현숙씨가 빚고 있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현대적인 방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임금님이 마셨던 향온주를 즐길 수 있도록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맛에 있어서 가장 원초적인 맛을 꼽으라면 소금 맛을 꼽는다. 동물도 소금을 섭취하기 위해 바위를 핥고 가장 첫 번째 인류가 발견한 맛 또한 소금의 짠 맛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의 맛은 양념의 맛이다. 갖가지 재료와 소금, 물을 적절히 배합하여 만들어낸 양념은 소스(sauce)라는 외래어로 더 친숙하다. 마요네즈 소스, 케첩소스, 스테이크 소스 등 당장 동네 마트에만 가도 수십가지 양념이 진열되어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의 맛은 바로 발효의 맛이라고 할 수 있다.
식재료를 적정한 온도와 습도에서 일정기간 유지시켜 미생물들의 활동을 촉진하고 이를 통해 최고단계의 맛을 끌어내는 방법이다. 발효의 맛은 한단계 높은 차원의 맛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장성이 좋아 보관이 용이하다는 점이 장점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도 연중 내내 보관할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의 밥맛을 책임져왔다. 이러한 방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젓갈인데, 새우나 멸치, 조개 같은 작은 해산물이나 생선 내장, 알, 부속부위까지 소금에 절여 삭힌다.
젓갈의 대표격인 새우젓은 돼지고기를 먹을 때 곁들이거나 국의 간을 맞추기 위해, 그리고 김장할 때 사용된다. 우리는 흔히 새우젓으로 통칭하여 부르지만, 새우젓은 언제 잡은 새우로 젓갈을 담갔는지에 따라 풋젓, 오젓, 육젓, 추젓, 동젓과 같은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똑같은 새우라도 시기에 따라 그 맛과 향이 달라지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것이다. 새우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어종들도 젓을 담가 먹고는 했는데, 그중 하나가 곤쟁이다. 초가을 경에 잡히는 아주 작은 녀석들로, 이로 젓갈을 담근 것을 자하젓, 혹은 감동젓이라고 한다. 이 감동젓은 밥반찬뿐만 아니라 무김치를 담그는 데에도 사용된다.
감동젓무는 조선 시대 때 왕에게 진상될 정도로 아주 귀한 대접을 받는 궁중음식이면서, 동시에 양반집에서 새해 인사를 드리러 갈 때 가져갔던 선물이었다. 그 재료를 보면 상당히 다양하다. 밤, 배, 생굴, 낙지, 북어, 미나리, 오이, 실파 등이 들어간다. 젓갈과 소금만을 넣어 만드는 일상적인 김치가 아니라 땅이 선물한 열매들과 바다에서 내어준 보배들을 정성스레 무쳐 담근 김치라는 점에 있어서 아주 특별한 날에만 먹는 김치였다. 귀한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선물 포장 또한 특별했다고 한다. 청화백자 항아리에 잘 옮겨 담은 후 다시 붉은 보자기에 싸서 선물했다고 하니, 김치로서는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감동젓무의 조리는 무를 써는 것에서 시작하는데, 보통의 깍두기를 썰 때처럼 주사위 모양으로 써는 것이 아니라 나박김치처럼 썰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감동젓과 설탕을 버무린 후, 밤, 배, 오이, 생굴, 낙지, 북어 등을 골고루 섞어 마저 버무려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