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담백한 맛의 일품, 경기도 광주 소머리국밥

    한국인의 식단에서 밥과 김치, 국은 모든 음식의 근간을 이루는 우리 전통음식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쌀과 같은 곡식은 탄수화물이 풍부하여 훌륭한 식량원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지은 밥은 맛이 밍밍하기만 하다. 여기에 배추와 무 등을 소금에 절여 고춧가루, 젓갈을 비롯한 각종 양념과 야채를 넣어 발효시킨 김치는 쌀밥과 조화를 이루어 입맛을 돋워주고 소화를 돕는다. 또한 국(탕)은 동아시아의 이웃나라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매우 다양하고 가짓수가 많은 음식으로 우리 전통음식문화의 특징 중 하나를 이루고 있다. 

     

    특히 국(탕)은 쌀밥을 씹어 삼킬 때 목 넘김을 좋게 해주는 효과와 함께 적절한 수분과 염분을 제공한다. 지금과 같이 쌀이 넉넉지 않아서 좁쌀을 비롯하여 기장, 메밀, 보리 등 잡곡을 더 많이 섭취하였던 조선시대의 식탁에 국(탕)은 꺼끌꺼끌한 잡곡을 먹는데 도움이 되는 음식으로 발전하였다. 쌀 또한 지금과 같이 도정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당시의 환경에서 국(탕)은 우리 조상들의 식탁에 빠져서는 안 될 음식이었다. 심지어 임금의 밥상을 일컫는 ‘수라(水剌)’도 ‘탕(湯)’을 뜻하는 몽골어인 ‘슐렌(šülen)’에서 비롯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고려 후기에 몽골에서 전래된 곰탕을 비롯하여 불고기ㆍ순대ㆍ소주ㆍ만두 등은 조선시대 들어서 우리 고유음식으로 한층 더 발전하였다. 그 중심에는 고기로 끓인 국(탕)이 있었다.

     

    예로부터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우리의 기본식단인 밥과 국, 김치를 한데 아우른 대표적인 음식으로 ‘국밥’이 있다. 국밥은 조선후기 전국적으로 장시(場市)가 발전하고 증가함에 따라 장시를 중심으로 발달한 우리나라 최초라 할 수 있는 외식문화의 전형이 된 음식이다. 국밥은 지역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장시를 찾는 사람들과 상인의 배를 든든히 채워주었고, 장 볼 일이 없어도 국밥 한 그릇의 맛을 보기 위해 일부러 장을 찾는 별미였다. 

     

    농경국가였던 조선시대에는 국초부터 농사의 주요 생산수단인 소의 도살을 금지하는 금령(禁令)을 유지하면서 서울의 경우 제한적이나마 ‘다림방’으로도 불렸던 현방(懸房)이라 하는 푸줏간 영업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차츰 소의 식용이 일반에 보편화되면서 조선후기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소의 부산물을 이용한 국밥이 전국 장시의 명물음식으로 등장하였다.

     

    조선시대의 장시는 주로 교통의 요지이자 행정적으로 읍치(邑治)에 속했던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지역에 형성되었던 장시는 규모가 커서 인근에 우시장과 도살장을 겸하기도 했다. 현재도 해당 지역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으로 알려진 나주곰탕, 대구 따로국밥(육개장), 안성 소고기국밥, 영천 소머리국밥, 함안 소고기국밥 등도 조선후기 이후 지역의 장시문화가 만들어낸 오랜 역사를 지닌 향토음식이다.

     

    경기도 광주시는 남한산성이 위치하여 조선시대 한양의 남쪽을 방어하는 관방(關防)의 거점지역이었다. 또한 조선시대 내내 국가 주요 간선도로였던 영남대로(嶺南大路)가 경상도 동래(東萊)에서 출발하여 밀양, 대구, 상주, 문경, 충주, 용인 등을 거쳐 한양에 진입하기 전 마지막 경유지가 바로 광주였다. 지금 광주시는 골프장만 즐비한 수도권의 한적한 소도시에 불과하지만 예전에는 교통의 요지였다. 지방에서 영남대로를 타고 올라온 사람들은 한강을 도강하여 한양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여장을 풀고 정비하면서 쉬던 지역이었다. 

     

    광주는 조선시대 왕실의 음식을 전담하고 각종 그릇을 공급하는 일을 맡았던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이 현재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 설치되었던 지역이다. 조선시대 ‘분원백자’로 알려진 조선백자의 산실이 바로 광주시였다. 이와같이 조선시대 광주는 서울의 궁중문화가 자연스레 소통하는 지역으로 ‘작은 서울’이라고도 불릴 정도였다. 특히 병자호란 때 인조(仁祖) 국왕이 두 달간 남한산성에 피신한 이후 그 중요성이 재인식되면서, 광주는 남한산성의 수축(修築)과 함께 관찰사보다도 급이 높은 정2품 유수(留守)가 관할하는 도시로 성장하였다.

     

    조선시대에 음식문화에서도 광주와 서울이 밀접한 관계였다는 것은 ‘효종갱(曉鐘羹)’에서도 알 수 있다. 1925년 최영년(崔永年)의 『해동죽지(海東竹枝)』에 소개된 ‘효종갱’은 남한산성에서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배달음식으로 알려진 음식이었다. ‘효종갱’은 소갈비에 된장을 넣고 끓여 육수를 낸 후, 배추속대ㆍ송이ㆍ표고ㆍ전복ㆍ해삼ㆍ콩나물을 넣고 푹 끊인 해장국의 일종이다. ‘새벽종이 칠 때의 국’이라는 뜻을 지닌 ‘효종갱’은 밤새 만들어서 항아리에 담아 소달구지에 실어 서울로 배달하면 새벽종이 칠 무렵에 도착한다고 하여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효종갱’은 주로 서울의 대갓집 아침상이나 서울에서 술 좀 마신다 하는 양반들의 속을 풀어주는 별식으로 사랑 받았다.

     

    이러한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지닌 경기도 광주시에 1970년대 들어 새로운 향토음식이 등장하였다. 바로 ‘곤지암소머리국밥’으로 대중에 더 잘 알려진 광주시의 향토음식인 소머리국밥이다. 광주 소머리국밥은 역사가 매우 짧아서 일반적으로 장시에서 발달한 다른 지역의 국밥과 같은 개연성을 찾기는 어렵다. 일부 문헌에서는 “경기도 광주는 예부터 경상도 지방에서 과거 보러 한양에 갈 때 지나던 길목으로서 이 지방에서 숙식할 때 주식으로 먹던 소머리국밥”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증빙할 수 있는 관련 문헌이 없어 억측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역사는 짧지만 광주 소머리국밥의 유래에는 관련된 애틋한 일화가 전한다. 1970년대 중반 곤지암에서 포장마차 영업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부부가 있었다고 한다. 부인은 병치레가 잦은 병약한 남편을 위해 몸에 좋다는 약과 식품을 구해다 먹였다. 어느 날 그는 ”소머리를 달여 먹이면 오장육부의 기능이 활발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소머리를 구해서 남편에게 끓여 먹였다. 소머리만 고아서인지 누린내가 심해 남편이 국물을 입에 대지 않자 부인은 여러 차례 시도 끝에 소머리국의 냄새를 제거하고 풍미를 지닌 소머리국밥을 만든 결과 남편은 건강하게 되었다고 한다. 

     

    부인은 남편의 건강을 찾아주기 위한 보양식으로 만든 소머리국밥을 포장마차의 메뉴로 손님에게 내놓았는데 반응이 좋고 찾는 손님들이 늘면서 지금의 소머리국밥 식당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80년대 초부터 광주시 곤지암읍에 소머리국밥 식당이 하나둘씩 들어서면서 현재 곤지암읍 곤지암리 일대에는 소머리국밥 골목이 형성될 정도로 소머리국밥 식당이 성업 중이다.

     

    광주 소머리국밥은 핏물을 뺀 소대가리와 사골을 끓이다가 무 등을 넣고 푹 끓인 국물을 밥에 부어 머리고기를 썰어 얹어 낸 다음 양념장을 곁들여 먹는 음식이다. 예전 소머리국밥 식당에서는 소머리를 적당히 쪼개서 끓여서 다소 탁하고 특유의 냄새도 강했다. 현재는 전문 가공공장에서 소머리를 완전히 해체하여 뼈와 머리고기로 공급받기 때문에 요즘 소머리국밥의 국물은 예전에 비해 훨씬 맑고 담백하다.

     

    전통시대의 문헌을 살펴보면 조선후기 이후 근대시기까지 발간된 『동의보감(東醫寶鑑)』(1610)ㆍ『의휘(宜彙)』(1871)ㆍ『의방합부(意方合部)』(미상)ㆍ『식의심감(食醫心鑑)』(1924)ㆍ『의가비결(醫家秘訣)』(1928) 등의 의서(醫書)에서 소대가리의 효능을 언급하고 있다. 소대가리는 중풍으로 인한 반신불수, 만성두통, 각기병, 출산 후 산부의 원기회복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서에 실린 조리법과 효능의 예를 들면 소대가리를 중탕하여 익히거나(의방합부) 국을 끓인다든지(의가비결), 푹 삶아서 술과 함께 먹고 땀을 내면(의휘, 의방합부), 만성두통이나 각기병에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소머리국밥은 우리 전통어법대로 따르자면 ‘소대가리국밥’이 맞는 표현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대가리는 ‘동물의 머리’라 되어있고, 머리는 통상 사람에 국한하여 사용하였다. 생선의 경우에도 ‘생선대가리’라고 하지 ‘생선머리’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가리가 워낙 비하의 의미를 지닌 비속어로 사용되다보니 짐승인 소에게조차 차마 사용하지 못하는 ‘불인지심(不忍之心)’에서 소머리국밥으로 부르는 듯 하다.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할머니뼈다귀해장국’이라는 간판을 보고 기겁했다는 우스개를 연상케 하는 알고보면 재미있는 음식명이다. 만약에 조상들이 와서 보신다면 소대가리가 아닌 소머리에 기겁해 하실지도 모를 일이다.

  • 도적을 피해 8명의 행인이 서로 도우며 넘던 팔조령길

    팔조령(八助嶺)은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팔조리에서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삼산리를 잇는 높이 398m의 고개이다. 이서면과 가창면은 상원산(673.3m), 봉화산(473.5m), 삼성산(668.4m) 등이 연속되는 산줄기로 가로막혀 있으며, 이 산줄기를 넘어가는 고개는 모두 6개 있었다. 그 가운데 팔조령은 해발고도가 가장 낮은 고개이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많은 사람과 물자가 팔조령을 통과했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도에서 대구와 창녕을 잇는 고개 가운데 팔조령이 대표적으로 표기된 것도 일찍부터 팔조령을 통행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고개 이름은 고갯마루에 도적이 많아 최소한 행인 8명이 모여서 서로 도우며 고개를 넘어가야 한다는 데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고개 이름이 마을 이름인 팔조리가 고개 남쪽의 청도군에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도의 이서면에서 달성의 가창 방면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훨씬 험하고 도적 떼가 많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은 세 가지의 경로를 통해 팔조령을 넘을 수 있다. 하나는 조선시대에 영남대로의 한 구간으로 이용되던 길이고, 두 번째는 마을 주민들이 협력해서 신작로로 조성했다는 팔조령 구길, 마지막은 1998년에 터널이 개통되면서 자동차가 통행하는 국가지원지방도 제30호선 등이다.


    팔조령은 자동차 도로가 개설되기 이전까지 한양과 동래를 이어주는 가장 단거리의 영남대로 구간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팔조리의 깊숙한 곳까지 진입해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봉화산에 있는 봉수대를 돌아 대구 방면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팔조령을 넘는 옛길은 길이 험해서 도적이 많았다. 도적을 피할 수 있는 주막거리가 팔조령에서는 1~2㎞ 간격으로 형성되었는데, 이는 도적을 피하기 위한 최적의 방법이었다. 다른 구간에서는 보통 4㎞ 간격으로 주막촌이 생긴 것과는 사뭇 대조가 된다.


    팔조령을 통과하는 3개의 길 가운데 조선시대 영남대로 옛길은 당시 동래에서 한양을 오가던 주요한 구간이었다. 팔조령은 고갯길 입구에서부터 고갯마루까지의 거리가 짧다. 팔조리의 해발고도는 대략 140m 정도이므로, 고갯마루까지의 고도차는 그렇게 크지 않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그만큼 경사가 급한 길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에 걸어서 넘던 옛길은 험해서 화물은 소나 당나귀 등을 이용하거나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서 운송했다. 그러나 팔조령을 통과하던 영남대로 옛길은 팔조령을 넘는 신작로가 개통하면서 사람들의 통행이 뜸해졌다.


    팔조령을 넘는 신작로는 팔조리의 남쪽에 있는 목림교차로에서 분기한다. 교차로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길을 따라가면 구불구불한 도로를 통해 팔조령을 넘을 수 있다. 이 구간의 도로는 1998년 팔조령 터널이 개통하면서 쓰임새가 감소했다. 터널 개통 이전에 자동차가 통행하던 도로에는 팔조령길이라는 도로명이 부여되었다.


    1998년 개통한 팔조령 터널은 팔조리 북쪽의 해발 240m 정도 되는 곳에 자리한다. 본래 2차로로 개통되었다가 교통량이 증가함에 따라 2003년 4차로로 확장되면서, 상행선 터널과 하행선 터널이 분리되어 있다. 대구로 향하는 상행선 터널의 해발고도가 조금 더 높다. 팔조령 터널을 통과하는 도로의 도로명은 창녕군에서는 이서로이고 달성군에서는 가창로이다. 가창면의 진터교차로에서 터널을 통과한 도로와 고갯마루를 통과한 옛 자동차 도로가 만난다.


    팔조리의 팔조지 근처에는 수백 년 전부터 자리 잡은 성황당이 있다. 이 성황당은 지금 매우 낡았지만, 과거에 팔조령을 넘는 사람들에게는 듬직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고 한다. 고개를 넘는 사람들은 길이 험하고 도적이 해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팔조령을 무탈하게 넘을 수 있게 해달라고 성황당 앞에서 간절히 기원했다. 성황당 옆의 당산나무도 수백 년이 넘었으며, 마을 주민들은 지금도 당산나무에서 마을 제사를 지낸다.


    조선시대에 넘어 다니던 옛길에는 술이 나오는 샘인 주천당(酒泉堂)의 전설이 전해진다. 팔조령 동쪽의 산기슭에서 있는 주천당의 술은 한 사람이 딱 한 잔씩만 마셔야 샘이 마르지 않고 술을 마신 사람도 화를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한 군수가 고개를 넘다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두 잔을 마셨더니 금방 샘이 말라버렸고 그 군수도 고개를 내려가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 유곡도의 중심 유곡역

    유곡역(幽谷驛)은 조선시대 경상도 문경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유곡도의 중심이 되는 본역으로 찰방이 주재하던 역이었다. 조선시대 유곡도의 중심이었던 유곡역은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유곡동 299번지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주변에는 유곡역의 이름을 딴 저수지인 유곡지도 있다. 유곡역이 있던 곳은 점촌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점촌(店村)이란 그릇을 파는 가게가 있었던 데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유곡도는 문경에서 남쪽으로 뻗어 함창을 지나 상주와 선산 방면으로 이어지는 역로, 문경에서 동쪽으로 뻗어 용궁을 거쳐 비안과 군위 방면으로 이어지는 역로 등을 관할했다. 함창은 현재 경상북도 상주시에 속하지만 문경시청이 자리한 점촌과 경계를 형성한다. 유곡도에 속했던 역에는 유곡역을 비롯하여 문경의 야성역(耶城驛), 함창의 덕통역(德通驛), 예천의 수산역(守山驛), 상주의 낙양역(洛陽驛)·낙동역(洛東驛)·낙원역(洛源驛)·낙서역(洛西驛)·장림역(長林驛)·낙평역(洛平驛), 선산의 상림역(上林驛)·영향역(迎香驛)·구미역(仇彌驛), 비안의 쌍계역(雙溪驛)·안계역(安溪驛), 용궁의 대은역(大殷驛)·지보역(知保驛), 군위의 소계역(召溪驛) 등 18개가 포함되었다. 유곡도의 일부 구간이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던 영남대로에 속했던 만큼, 유곡역은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 기능했다.


    고려시대의 문장가인 이규보(1168~1241)는 29세 때 유곡역에서 하룻밤을 머문 뒤 여행의 정취를 읊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유곡역은 과거 영남지방의 사람들이 한양으로 향하던 중 문경새재를 넘기 전에 모여들었던 장소이며, 반대로 한양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경상도 각 지방으로 흩어지기 전에도 제일 먼저 모인 곳이다. 문경새재와 함께 영남에서 서울을 잇는 교통요지로 기능했기에 유곡역은 영남대로의 중요한 결절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교통기능이 중요했던 만큼 유곡역을 중심으로 한 주변 지역에는 상인이나 선비 등 길손들의 숙식을 위한 원(院)도 많이 설치되었다. 조선 연산군 때의 문신인 홍귀달(1438~1504)은 유곡역이 영남지방을 드나드는 중요한 길목이라는 데에서 유곡역을 사람의 목구멍에 비유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군사적·지리적으로 요충지인 길목을 인후지지(咽喉之地)라 표현했다. 한강 하류의 강화가 군사적 측면에서 인후지지였다면, 유곡역은 교통의 관점에서 인후지지였던 셈이다. 홍귀달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는 문경시 영순면 율곡리에 세워져 있다.


    문경이 육상교통과 관련하여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기에 문경 지방은 다른 지방에 비해 유곡역 찰방과 조령산성 별장(別將) 등 국가에서 파견된 관리 2명이 더 많았다. 임진왜란 때의 명장 곽재우도 유곡역 찰방을 역임했다고 하며, 옛 유곡역 자리에는 암행어사 박문수의 선정비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그러나 유곡역의 옛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한반도에서 역로가 사라진 조선 말기까지 남아 있던 역관을 비롯하여 역과 관련된 시설은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유곡역이 있던 자리의 서쪽으로는 중부내륙고속도로가 통과하며 문경휴게소가 양 방향에 설치되어 있고, 국도 3호선이 고속도로와 나란히 통과한다.


    그러나 마을 이름은 과거 유곡역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앗골이라는 불리는 마을은 관아가 있던 관아골의 줄임말이다. 그 북쪽으로는 본마, 서쪽으로는 큰 절이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한 한절골, 동쪽의 새마, 남쪽의 주막거리 등이 유곡역과 연관된 마을 이름이다. 이들 마을 이름은 현재 도로명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유곡역과 관련된 옛 문서인 『유곡역고문서(幽谷驛古文書)』는 1998년 4월 13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동국대지도 유곡역
    동국대지도 유곡역(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 왜군의 발목을 4일 동안 잡았던 작원관 전투

    까치가 날아온 마을, 작원

    작원(鵲院)이란 순수 우리말로 ‘까치원’이다. 이를 줄여서 ‘깐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옛날 신라시대 어느 임금이 ‘만어산만어사’에 행차하기 위하여 배를 타고 이곳 나루터에 내리면 깎아지른 절벽 위 하늘가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까치가 날아와서 임금 일행을 환영했다고 하여 유래한 ‘지명’이라고 한다. 하나의 설화로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백제의 군사와 싸울 때, 백제의 왕이 위기에 몰리자 종군(從軍)해왔던 공주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황금색 까치로 변신하여 김유신 장군의 영기에 앉았다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신라군사를 혼란하게 만들어 백제왕이 무사히 도망치니, 화가 난 김유신이 그 까치를 활을 쏘아 떨어뜨리자 백제 공주의 시체가 떨어졌다고 한다. 이 설화에 따라 ‘금새마을’로 불렀다가 지금은 ‘검세리’가 되었다는 유래도 전해온다.

     

    영남대로의 제1관문, 작원관 

    밀양의 작원관은 문경의 조령관(鳥領關)과 함께 조선 시대 ‘영남대로’의 제 1관문이었다. 총거리 380km에 달하는 영남대로의 중요한 역원인 작원은 『신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이 남아있으며, 육로(陸路)로서 관문 역할 뿐만 아니라 수로(水路)로서도 남북으로 밀양과 양산의 경계지역이므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교통의 요충지였다. 신라 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남해안을 통하여 침투해온 해적들의 출입 관문이라 군사적인 안보지역이기도 하였다. 범죄인이나 적색분자들을 검문하고, 불순한 물자와 첩자를 색출하는 검문소 기능을 19세기 후반까지 담당한 곳이다.

     

    700명 군사로 1만8천7백명의 왜군을 방어한 작원관 전투

    1592년 4월 12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동래성이 함락되고 양산이 무너지자, 양산 전투를 지원하러 출발한 밀양 부사 박진은 작원관에 진을 치고, 밀양 관군 300여 명과 인근 군현에서 온 지원군 400여 명으로 1만8천700여 명의 왜군을 방어했다. 양산의 황산잔도를 거쳐 작원잔도의 관문으로 밀려드는 왜군을 벼랑 끝에서 깊은 강물에 수장시키는 전략으로 항전했다. 

    4월 14일 작원관까지 진격한 왜구는 하룻밤 하룻낮을 공격해도, 박진 장군의 관문을 뚫지 못했다. 아무 방해 없이 순조롭게 통과해도 하루는 걸려야 통과할 수 있는 많은 병력이, 좁은 잔도에서 길이 막혀버리자 후발 부대가 야음을 틈타서 천태산 쪽으로 우회하여 산을 넘어와 밀양 관군의 뒤통수를 치기에 이르렀다. 이에 수많은 군사를 잃은 박진은 속수무책으로 남은 군사들에게 후퇴명령을 내리고 광탄 나루 쪽으로 강을 건너다가 강 깊이와 지형지세를 잘 모르는 지원군들이 깊은 강물에 많은 희생을 당하기도 하였다. 박진 부사는 먼저 적군의 군량미가 될 수 있는 곡물창고에 불을 지르고 적의 무기가 될 수 있는 병기창고도 불태운 다음, 충청도 쪽으로 후퇴하면서 고을마다 왜군의 상황을 알리고 전황을 병조에 보고하면서 피신했다. 비록 희생자가 많았던 전투였지만 한양으로 향하던 왜적의 발목을 3~4일간이나 묶어놓았던 전투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사(壬辰倭亂史)에서는 ‘밀양의 작원관 전투’가 부각되지 않고 있다. 당시 32세의 밀양부사 박진은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18,700여 적군을 700여 아군으로 감당해야 했던 피 끓는 청년이었다. 당시의 전황(戰況)을 상상도 해보지 않고 패장(敗將)으로만 낙인을 찍는 것 같아 마음 아프다. 갓 무과에 급제한 무인으로 전쟁의 경험도 부족했을 것이며, 군사력의 절대 부족으로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최선의 지혜를 내어 임무를 수행한 것만은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선조실록』에 기록된 박진 부사와 작원관 전투 

    『선조실록』의 선조 25년 4월 14일 자 기록에 의하면 “왜적이 밀양지방에 들어오니, 부사 박진이 작원의 잔교(배를 대기 위해 물가에 만들어진 시설)를 점거하여 활을 쏘면서 버티자 적이 여러 날 진격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뒤에 적병이 이웃 양산군을 함락시키고 우회하여 후면으로 쳐들어오니 지키던 병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이에 박진이 본부로 달려 돌아와 병기고와 창고 곡식을 태워버리고 도망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대목은 ‘적이 여러 날 진격할 수 없었다.’이다. 만약 박진이 4일간이나 싸워주지 않았다면 적군이 한양에 도달할 시간은 그만큼 단축되었을 것이다. 또 같은 해 6월 28일 기록에는 “밀양부사 박진은 2~3일간을 버틴 후에 패전하여, 4월 18일에 밀양으로 후퇴하여 병기를 불태우고 충청도로 도망가”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아군이 4~5백 명 전사하고 남은 군사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니, 작원관 전투를 결코 작은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작원관전투 위령탑
    작원관전투 위령탑
    작원관지 안내문
    작원관지 안내문
     


    공운루와 한남문이 복원되고 충혼탑이 선 작원관 

    작원잔도의 병목 지점에 세워졌던 관문은 경부선 철도 건설로 위쪽으로 옮겨졌다가 1936년 대홍수에 휩쓸려가고, 철도가 복선화된 후 1995년에 지금의 장소에 옮겨서 재건하였다.

    2층으로 된 공운루에 관문은 한남문이다. 당시의 '원' '관' '진' 의 시설을 모두 재현하지는 못했으나, 바다 건너 해적들이 쳐들어올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영혼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충혼탑이 낙동강 푸른 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작원관문
    작원관문

    위령탑 발치에 소박한 모습의 기와집은 비석들을 한자리에 모아서 보호하고 있다. 인근에는 4대강 사업 때 처자교의 원형이 발굴되어 세상의 이목을 모았다. 처자교는 그 자리에 잠들어 후세 사가들의 새로운 기술로 빛을 볼 수 있도록 보존하고 있다. 한편 천태산 허리춤을 밟고 넘어와서 우리 군사를 역습했던 안태리에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건설되었다는 삼랑진 양수발전소가 60만kW에 달하는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