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동네에는 오뎅공장이 있었다. 어머니는 내게 가끔 오뎅 심부름을 시키셨다. 골목을 나와 큰길을 건너면 오뎅공장이 보였다. 거대한 통의 흰 어묵을 반죽하던 장화 신은 키 큰 아저씨는 동그란 모양과 길쭉한 모양, 넓적하고 네모난 모양의 오뎅을 섞어 한 봉지 가득히 담아주셨다. 문 앞에 서 있던 나는 따듯하고 말랑한 기름진 오뎅을 가슴에 품었다. 심부름의 보상으로 신선하고 고소한 오뎅을 입에 오물거리면서.
필자와 오뎅과의 인연은 이게 다가 아니다. 도시락을 쌌던 초등학교 시절에는 소시지보다 오뎅 반찬을 좋아했다. 고등학생 때 학원에 다닐 때도 근처 포장마차에서 파는 오뎅을 사 먹었다. 포장마차의 주인아주머니는 손님이 없는 짬짬이 얇고 넓은 오뎅을 삼등분으로 접어서 대나무 꼬지에 주름지게 꽂았다. 그 손놀림이 놀라울 정도로 빨라서 넋 놓고 바라볼 정도였다. 자고로 오뎅은 쫄깃하고 살짝 오동통하여 국물 맛이 배어 있어야 하며 간장에 찍어 먹어야 제맛이다.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했던 그 분홍색 플라스틱 간장통. 지금은 솔을 사용하여 오뎅에 간장을 바르거나 스프레이로 간장을 뿌려 먹지만 그때는 그랬다.
오뎅 바람이 서울에서 강하게 불어댄 것이 1990년대 즈음이었던 것 같다. 종로와 을지로 등 거리마다 오뎅을 파는 포장마차가 줄지어 있었고 특히 붉은 페인트로 ‘부산오뎅’이라고 쓴 포장마차에서는 연실 흰 수증기를 뿜어댔다. 그런데 우리에게 추억이 되고 있는 ‘오뎅(おでん)’은 일본요리의 이름이다. 어묵과 우무, 무 등을 넣고 끓인 냄비 요리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뎅이 아닌 어묵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1935년 9월 18일 매일신보를 살펴보면 ‘「熬뎅」집 出入도 學生은 안된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중략) 최근 표면으로는 오뎅집이라고 하고 비밀히 二三명의 식녀급(女給, 카페나 다방, 음식점 따위에서 손님의 시중을 드는 여자)을 두어서 학생생도들을 끄터들이는 오뎅집들이 잇서서 오뎅집에도 학생생도들의 출입을 금하게 되엇다(기사내용 그대로 인용).
일제 강점기 시대에는 통영과 부산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어묵공장이 생겼다. 전문가들은 1907년 야마구치어묵제조소(山口 蒲鉾製造所)에서 시작되어 해방 직전까지 대략 15개 내외의 어묵공장들이 부산에서 운영되었다고 전한다. 이후 1940년대 말과 1950년대를 전후해서 동광식품과 삼진식품이 영도 봉래시장 입구에 들어선다. 한국인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어묵공장이다. 한국전쟁 이후 부산은 갈치와 조기, 노가리(어린 명태) 등 어묵의 재료 조달이 수월하여 호황을 맞게 되고 연이어 이와 같은 업체들이 생겼다. 그리고 공동 브랜드로 부산오뎅이 탄생한다.
2013년 12월 19일 본점 개장한 날이 제가 입사한 날이에요. 삼진어묵이 1953년에 설립했으니까 64년(2018년 기준) 됐지요. 삼십 년 전에는 어묵이 백 원도 안 했어요. 봉래시장에서 사 먹었지요. 여기서 배출한 상인들이 꽤 많아요.
삼진어묵 본점에서 흰 모자를 쓰고 어묵을 판매하는 황영옥(여, 60세) 씨의 이야기이다. 일하는 내내 웃는 얼굴인 그녀는 직장에 대한 자긍심이 높아 보였다. 3대를 이어 운영하는 이곳의 대표는 박용준 씨이다. 그는 어묵 경영에 새로운 변화를 이끌었다. 메뉴만 해도 40종이 넘는다. 예전처럼 국물에 불려 간장에 찍어 먹거나 반찬으로 먹는 어묵이 아니다. 빵처럼 음료수와 먹는 고급 간식이 되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시절, 사원 두 명이었던 삼진어묵은 현재 16개의 직영점을 운영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변함이 없는 것은 ‘좋은 재료’를 써야 한다는 할아버지, 아버지의 운영철학이다.
마감시간이 다 되어서인지 어묵의 종류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필자는 빵을 고르듯 신중한 고민 끝에 몇 가지를 쟁반에 담았다. 다양한 어묵의 모양만큼 맛도 가지가지이다. 제일 인기가 좋다는 어묵 크로켓(korokke). 소리까지 바삭한 크로켓의 표피가 부서지면서 신선한 생선살이 부드럽게 혀에 와 닿는다. “음~” 하고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삼진어묵은 1953년 박재덕 씨가 창업하여 박종수 씨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박용준 씨가 3대째 운영하고 있다. 삼진어묵의 영도 본점에서 사원으로 근무하는 황영옥(여, 60세) 씨가 인터뷰에 응해주셨다.
너른 논둑을 달려 명절을 앞둔 한과 마을에 도착했다. 한과는 명절의 차례상이나 잔칫상 등 집안의 대소사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다. 근래에는 야채나 과일즙으로 색을 들인 다양한 빛깔과 모양의 한과를 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과라 하면 전통음식의 한 가지로서 몸에 좋은 재료로 만든 고급 간식을 일컫는다.
한과는 가공하여 만든 과자라는 의미로 조과(造菓)라고 하거나 ‘과줄’이라 부르기도 한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중국 한대(漢代)에 들어왔다 하여 한과(漢菓)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그러다가 외래 과자와 구별하기 위해 한과(韓菓)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정월 초하루가 되면 민가에서도 해 먹었다. 그러한 풍습이 전해져서 농한기가 되면 농가에서는 강정과 산자를 만들어 친척들과 나누어 먹거나 내다 판 돈으로 겨울 한 철을 나기도 했다.
150년 동안 5대째 사천한과의 전통을 잇고 있는 최봉석(남, 75세) 장인은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23호이다. 16대째 같은 마을에서 살았고 장남으로서 수많은 제사를 지내면서 할머니에게 배운 한과 기술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기름이 귀하던 시절에는 바닷모래를 불에 달궈서 한과를 틔웠다. 기름을 바른 모래를 솥뚜껑 위에 소복이 담고 불에 달구어 그 속에 15cm 정도의 찰떡을 묻어놓는다. 그러면 납작했던 찹쌀 바탕이 금세 목화솜처럼 피어오른다. 하루 종일 300개를 그렇게 틔웠다. 기름을 바른 모래는 찰떡에 달라붙지 않는다. 한 사람은 옆에 앉아서 이불 꿰매는 긴 바늘로 튀겨진 한과를 부지런히 꺼내야 한다. 두 배로 튀겨진 바탕에는 잘 고아진 조청을 바른 후 ‘산’이라고 하는 튀밥을 살살 뿌려 붙인다.
장돌뱅이로 전국의 장터를 10년 넘게 돌 때도 한과에 대한 고민만 하였다. 한과를 만드는 일은 사계절 다르고 온도와 습도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진다. 저절로 손이 가는 한과를 만들고 싶었다.
한과를 만드는 데 최소 25일은 걸립니다. 번거로워서 보통사람들은 만들기도 어려워요. 어릴 때는 만든 한과를 지게에 지고 대관령까지 가서 명태와 바꾸기도 했습니다. 한과를 잘못 만들면 뼈가 배겨서 이에 달라붙고 씹히지도 않고 그래요. 우리는 손이 자꾸 가고, 씹는 듯 마는 듯해 자르르 입안에서 녹는 한과를 만들자 했어요.
그가 만든 한과는 싸락눈이 내리는 소리를 내며 입안에서 눈처럼 녹는다. 허탈하게 달콤함만 남긴 채 말이다. 과연 저절로 손이 가는 맛이다. 장인에게 이러한 한과의 비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마음씨 좋은 장인은 겸손히 손사래를 친다. 아무것도 없고, 정성을 다하는 것뿐이란다.
한과를 틔우는 공장은 고소한 기름 냄새로 가득하다. 새끼손가락 반만 하던 찹쌀 바탕은 320도 이상의 기름에 들어가자 요술처럼 펑펑 튀어 오른다. 달콤한 조청 향기에 취해 노을 지는 마을을 나섰다.
[도움 주신 분]
갈골한과마을 최봉석(남, 75세, 2018기준) 장인은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23호이다. 고집스럽게 5대를 이어 한과 만들기의 맥을 잇고 있다. 현재는 한과에 대한 그의 열정을 아내(김주희)와 아들이 함께하고 있다.
시장바닥이나 푸드트럭에서 너무나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호떡. 그 친근한 느낌을 생각하면 우리나라 음식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호떡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고, 우리나라에서 발명된 음식이 아니다. 기록을 찾아보면 중국에서 호인(胡人)이라고 불리던 중앙아시아의 아랍인들이 밀가루 반죽을 화덕에 구워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이름이 후빙(胡餠)이었다. 쌀보다는 밀가루가 더 많이 나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흉노족, 선비족, 돌궐족 등은 밀가루 반죽을 화덕에 구워 빵 형태로 먹었는데, 그들과 국경을 맞대고 문화교류를 하던 중국은 여기에 고기와 채소를 채워 넣어 황제 일행의 식단에 넣는 등 다양하게 즐겼다.
아랍 문명과 중국의 문명을 거쳐 19세기 말, 화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호떡이 우리나라에 퍼지기 시작했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육군 3천여 명을 파견했는데, 이때 청나라 상인들도 군인들과 함께 한반도에 상륙했다. 군사적 원조를 통해 확고한 경제적 지위를 자리 잡아가려는 계산이 깔린 행동이었다.
20세기 초, 청나라는 망했지만, 한반도에 자리 잡은 화교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증진해 나갔다. 그들이 만들어 소개한 호떡은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되었다. 호떡 안에 꿀이나 조청, 설탕 등을 넣어 달짝지근한 맛을 내는 호떡이 개발되었고 인천 지역을 넘어 서울 종로까지도 퍼져나갔다.
일제강점기 종로에서는 중국인 인력거꾼들이 주로 호떡을 사먹었는데, 값이 싸고 쉽게 상하지 않아 허기를 채우기에 꽤 괜찮은 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부산을 최후의 보루로 삼고 치열하게 저항했던 한국전쟁 기간에도 호떡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부산으로 모여든 피난민들은 다양한 종류의 곡물 씨앗을 넣고 호떡을 만들어 먹었다. 휴전 이후, 미국에서 우리나라에 밀가루로 대대적인 식량 원조를 해줬고, 이 밀가루로 만든 호떡은 대중화되었다.
당시 호떡은 지금처럼 기름에 튀긴 형태가 아니라 화덕에 구운 마른 형태였다. 가끔 길거리에 세워진 푸드트럭에서 ‘중국 호떡’이라는 이름으로 파는 호떡이 있는데, 가운데 속이 비고 바삭 담백한 빵의 형태로서 당시 호떡과 비슷하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호떡이 한 번 더 변신하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식용유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기름에 부쳐 먹게 되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기름지고 쫀득한 맛의 부산 씨앗호떡은 1980년대 남포동 거리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다. 화덕에 구울 필요 없이 밀가루 반죽을 식용유 두른 호떡 판에 눌러 튀겨낸 후, 가운데를 잘라 각종 견과류를 듬뿍 채워내면 부산 씨앗호떡이 완성된다.
오도독 씹히는 특유의 식감과 고소한 맛이 입소문을 타고 해운대와 같은 관광지구로 점차 퍼져나가, 이제는 부산을 방문하면 꼭 먹어봐야 할 부산의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혔다. 이제 호떡은 연중 어느 때나 먹어볼 수 있는 국민 간식으로 자리 잡혔지만, 겨울철 부산 앞바다에서 먹는 씨앗호떡은 아직도 특별한 지역 별미로 꼽힌다. 찬 바람 부는 항구도시에서 호호 불어가며 먹는 씨앗호떡은 6.25 전쟁 최후의 보루였던 부산에 모인 피난민들의 추억을 담은 식사이자 간식이기 때문이다. 전 국토가 함락될 뻔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무사히 빠져나온 안도감이 호떡의 온기를 통해 느껴진다.
요즈음에는 ‘빵지순례’라고 하여 전국의 유명한 빵집을 순례길 걷는 것처럼 돌아 방문하는 여행이 유행이다.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빵에 대한 사랑은 끊이지 않는다. 이 빵지순례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통영의 꿀빵이다. 통영을 대표하는 음식이 충무김밥과 우짜라면, 통영의 대표 간식거리는 꿀빵이다. 통영항을 둘러보고나와 통영해안로를 따라 걷다보면 충무김밥집만큼 많이 보이는 것이 꿀빵집이다. 통영중앙전통시장 주변으로 각기 저마다의 자랑거리를 달고 파는 꿀빵집들의 다채로운 색깔이 항구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통영시에서 꿀빵을 명물로 만든 곳은 오미사 꿀빵집으로서, 고(故)정원석 씨의 작품이라고 한다. 1960년대의 대한민국은 식량원조를 받는 나라였다. 국민에게 배급되던 밀가루 포대에는 성조기 문양이 그려져있고, ‘미국국민이 기증함’이라는 표시가 붙어있었다. 이 밀가루로 수제비나 칼국수 등을 만들어 끼니를 해결하며 자연스럽게 밀가루 음식이 많아졌다. 제빵사로 일하던 정원석 씨는 한국전쟁 이후 배급되던 미군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고, 1963년에는 꿀빵을 만들어 통영 시내 여학생들에게 판매했다. 원래는 간판도 없이 세탁소 옆에서 팔던 꿀빵을 사람들은 옆 세탁소의 이름을 빌려 ‘오미사 꿀빵’이라고 불렀다. 하굣길에 학생들이 가는 오미사는 세탁소가 아니라 그 옆에 위치한 빵집이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지역 학생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꿀빵은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자 오미사 말고도 다양한 상점들에 퍼졌다.
같은 음식을 파는데 간판이 다르다는 것은 음식의 맛에도 차이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원조 꿀빵은 제법 두툼하지만, 빵집마다 두께가 다르다. 빵을 얇게 만들어 제법 가벼운 식감으로 만든 꿀빵도 있는 한편, 속재료로 들어가는 앙금의 종류를 다양하게 하여 맛의 변화를 준 경우도 있다. 또한, 아몬드 후레이크나 견과류 고명을 더 얹어내는 경우도 있으니 이곳저곳 들러서 한두 개씩 사먹는 재미가 있다.
조청을 발라 굳혀 만드는 꿀빵의 특성상 시간이 지날수록 겉면이 닭강정과 같이 딱딱해진다. 부드러운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싫어하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이러한 특징 때문에 바다로 나가는 지역민들에게는 사랑받는다. 부드러운 빵을 조청으로 코팅함으로써 빵이 외부 환경에 의해 쉽게 변질되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긴 시간동안 바닷바람을 맞으며 일을 해야만 하는 어민들에게는 이만한 간식이 없다.
통영을 가면 반드시 먹어보아야 할 꿀빵이지만, 지역민들에게도 여전히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탓에 점심시간 전후로 동이 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때문에 통영 관광을 시작한다면 아침에 통영항을 구경하고, 곧바로 꿀빵집을 들러 맛을 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1960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안흥진빵은 심순녀 여사가 다섯 남매를 굶기지 말아야 한다는 일념하에 시작한 음식장사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미국의 식량원조를 밀가루 포대형태로 받았는데, 이 밀가루가 주요 식재료가 되자 수제비나 칼국수 등 밀가루 음식이 많아졌다. 밀가루를 반죽하여 만드는 빵 또한 이 시기의 히트상품이었다. 음식장사를 하면 남은 재고로나마 식구들 허기라도 달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시작된 찐빵장사는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여, 결국 동네의 허기를 달래어주는 음식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근방에 대형 스키장이 생기면서 관광객들에게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며 강원도에 들르게 되면 반드시 먹어봐야할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강원도뿐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안흥찐빵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조그마한 시골마을에 여러 개의 찐빵 전문점이 생겨나게 되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찐빵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판매되는 것을 보고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찐빵 만들기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오늘날에는 20여개가 되는 찐빵 전문점이 있는 ‘안흥찐빵마을’이 생겨나고, 횡성군에서도 지역 특산품으로 지원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한계 때문에 중국산 팥소를 부분적으로 사용했지만, 국산 농산물 애용하기 운동과 웰빙 운동이 확산됨에 따라 최근에는 안흥찐빵의 원료를 100% 자급화하는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횡성에서 생산된 팥으로 팥소를 만들면서 국산 100%라는 목표는 하루하루 가까워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특산음식이 외국 재료에서 독립하여 지역특산물로 만들어진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지역사회의 농산물이기 때문에 더 건강하고 품질이 좋고 맛도 더 좋다.
뿐만 아니라, 안흥면에서는 1999년부터 찐빵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팥 군’과 ‘빵 양’을 만나는 가을여행이라는 주제로 안흥 지역의 인심을 담아 찐빵을 정성스레 빚고 쪄내는 이 축제는 가을 여행객을 맞이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찐빵 빚기 체험이나 그 시절 영화를 보면서 찐빵을 호호 불어먹으며 옛 추억을 되새길 수 있다.
어린아이 주먹만한 찐빵에 가득 담긴 팥을 보니 왠지 모를 뭉클함이 생긴다. 손바닥에 쥔 찐빵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김을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산해진미는 못 차려줄지언정 팥이라도 조금 더 많이 먹으라고 꾹꾹 눌러 담은 팥소는 자식들 배곯는 것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보려던 어머니의 마음을 의미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안흥찐빵에는 별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밀가루 반죽과 팥이라는 단순한 재료를 얼마나 정성스럽게 빚고 쪄 내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것이다. 재료가 특별하지 않을수록 제작자의 정성이 맛을 좌우한다. 별난 휴게소 음식이 판치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안흥찐빵을 맛보러 오는 이유일 것이다.
예전에는 한국인의 주식이 쌀이었다지만, 요즈음에는 빵도 그에 못잖게 먹는다. 대형 프랜차이즈 베이커리부터 시작해서 소규모 동네 카페와 편의점의 진열대까지, 토스트빵에 갖가지 소를 채워 넣은 샌드위치는 어디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메뉴다. 다양한 속을 넣은 샌드위치를 판다지만, 이 모든 샌드위치의 할아버지뻘 되는 것은 바로 사라다빵이다.
'사라다(サラダ)'란 채소를 마요네즈나 케첩과 같은 소스에 버무려 내오는 서양식 요리 '샐러드(salad)'의 일본식 발음이다. 이제는 샐러드라는 단어가 너무나 보편적으로 통용되지만, 사라다빵이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했던 20세기 무렵에는 그 모양새도, 맛도 독특한 새로운 음식이었다. 사실상 샐러드 샌드위치라는 이름이 더 적합해보이는 이 음식이 아직까지도 일본어의 발음을 빌려와 사라다빵이라고 불리는 데에는 ‘그때 그 시절’이라는 추억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사라다빵은 크게 두 개의 유형으로 나뉜다. 속이 부드럽고 촉촉한 번에 으깬감자와 계란, 옥수수 알갱이 등을 넣고 마요네즈 소스로 버무린 샐러드를 넣은 고소한 사라다빵이 있는 반면, 빵을 한번 튀겨낸 크로켓 빵에 채 썬 양배추와 오이를 넣고 케찹과 마요네즈 소스를 한 번씩 뿌린 ‘단짠’ 버전도 있다. 늘 그렇듯이, “누가 원조냐”라는 질문을 피할 수가 없겠지만 명확한 사실은 없다. 다만 조리법의 특성으로 미루어 보건데, 빵을 튀겨내어 겉을 더욱 바삭하게 한 크로켓 버전이 조금 더 최신의 것이라는 점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표면이 바삭한 크로켓을 만들기 위해서는 빵가루를 입혀 기름에 튀겨내야 하는데, 이때 빵을 기름에 푹 잠기도록 해야지만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식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식용유가 일반인에게도 대량으로 보급된 때가 1970년대이니까, 그 이전에는 귀한 식용유를 대량으로 쓸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따라서 부드러운 번(Bun) 빵에 속을 채운 사라다빵이 아무래도 더 먼저 우리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은 아닐지 추측해볼 수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대한민국 각지의 시장과 빵집에서 맛볼 수 있었던 사라다빵은 요즘 대형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에서도 ‘추억의 사라다빵’이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팔리고 있다. 양배추뿐만 아니라 햄과 할라피뇨 등 각종 독특하고 이국적인 재료들이 앞다투어 빵 속에 들어가고 있는 이 풍요로운 시대에 이렇게 간단한 재료와 소스로 만든 사라다빵이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맛에 있어서 추억이 차지하는 비중을 가늠하게 해준다.
사라다빵의 변신은 진행형이다. 대구에서는 10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내세워 기본기에 충실한 사라다빵을 판매하고 있고, 서울에서는 소세지를 넣기도 한다. 강릉에서는 사과나 건포도를 넉넉하게 넣어 달콤새콤한 맛을 강화하는 반면, 포항의 경우 스팸이나 가공햄을 넣어 보다 풍부한 맛을 내기도 한다. 1970, 80년대에 시장에서 즐겨먹었던 사라다빵의 추억은 이제 지역에 따라, 또 빵집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 속재료보다 중요한 것은 추억의 사라다빵이라는 이름 속에 녹아있는 아련한 흔적이다.
미식가들 사이에서 “음식은 궁합이다”라는 말이 있다. 단독재료로 먹는 것도 좋지만, 적절한 음식 궁합을 맞추면 맛의 보완을 이루어 시너지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라면을 먹을 때에는 김치를 빼놓을 수 없고, 피자에 피클이 없으면 몇 조각 먹고도 금방 질려버린다. 일종의 공식처럼 자리 잡은 음식별 궁합은 우리 주변 갖가지 음식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딸기 또한 궁합이 있다. 근처의 베이커리를 가보면 딸기 타르트, 딸기 스콘, 딸기 크레이프 등 유독 딸기를 넣은 먹음직스러운 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정신없는 아침에 토스트에 딸기잼을 발라 먹는 것은 편리성과 맛을 모두 잡을 수 있는 방법이다. 이렇듯 밀가루와 딸기는 궁합이 맞다. 이 때문인지 딸기잼은 우리나라 대부분 가정의 냉장고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시중에도 딸기잼이 많이 유통되지만, 직접 만들어먹는 것만 못하다. 직접 딸기잼을 만들어 먹을 때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무르거나 달지 않아서 값이 싼 딸기를 재료로 쓰는 것이다. 어차피 잼에는 설탕을 넣으므로 달지 않은 딸기를 써도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맛으로 보나, 건강을 생각해보나 이는 큰 실수다. 한국식품조리과학회의 연구에 따르면 딸기 비율이 낮아질수록, 또 설탕 배합률이 높아질수록 유기산 비율이 적어진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보통 딸기로 잼을 만들 경우 통상적으로 과실과 설탕을 50:50의 비율로 사용한다. 품질이 떨어지는 딸기를 사용한다면 설탕의 비율이 60, 70%으로 더 올라간다. 이 경우 맛도 맛이지만, 유기산과 안토시안 함량이 떨어진다. 보통 가정집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백설탕, 황설탕, 흑설탕은 정제당인데, 이는 이당류라 몸에 쉽게 흡수되어 살을 찌우는 주범이다. 때문에 딸기잼에 설탕을 많이 넣으면 당도는 맞출 수 있을지 몰라도 건강에 안좋다. 자연당도가 높은 딸기를 사용해서 과실과 설탕의 비율을 7:3 정도로 맞추면 훨씬 건강하고 맛도 좋은 딸기잼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하려면 당도가 높고 품질 좋은 딸기를 사용해야 한다.
논산딸기는 1967년부터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하여 『다나』, 『보교조생』, 『여봉』, 『수홍』, 『장희』, 『도찌오도메』, 『레드펄』, 『사찌노까』 등의 품종이 재배되었다. 논산시 농업기술센터와 논산 농가가 함께 노력한 결과 현재는 우리나라의 풍토와 기후에 가장 알맞게 『설향』과 『레드펄』 품종 위주로 재배되고 있다. 전국으로 출하되는 논산딸기는 동네 슈퍼마켓에서부터 백화점에서까지 찾아볼 수 있다. 매년 3~4월에 개최되는 논산딸기축제에서는 제철 싱싱한 딸기를 눈으로 확인하고 구입할 수 있다. 우수한 품질의 딸기 뿐만 아니라 딸기잼, 딸기쿠키, 딸기 음료 등 딸기로 만든 다양한 제품도 접해볼 수 있다.
딸기잼의 경우 당절임 식품이라 한번 만들면 가정집 냉장고에서 족히 6달은 보관할 수 있다. 만들어놓기만 하면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꺼내 빵이나 샌드위치에 발라먹을 수 있다. 재배 방식과 품종에 따라 다르지만 자연 상태에서 딸기의 제철은 4월에서 5월 중이다. 일 년 중 이때가 가장 값이 저렴하기 때문에 고품질의 딸기를 가장 합리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기회다. 시기를 잘 맞춰 하루 날을 잡아 품질 좋은 논산딸기 한 박스를 들여와 딸기잼을 만들어놓으면 아침 식사 걱정은 덜 수 있을 것이다.
제주도는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토양이라 내륙에는 물이 부족하다. 그래서 제주도에서는 논벼 대신 제주도 방언으로 ‘산듸’라고 하는 밭벼와 차조, 콩, 감자, 보리, 메밀, 고구마, 팥 등의 밭작물이 주요 작물이다. 쌀이 귀했고, 쌀로 만드는 떡은 명절이나 제사와 같은 큰 행사가 있을 때만 먹는 음식이었다. 일상적으로는 잡곡으로 떡을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차조를 활용한 떡을 만들었다. 제주도에서는 차조를 ‘오메기’라 부른다.
차조는 가장 오래된 곡물 중에 하나로 좁쌀의 한 종류이다. 좁쌀은 두 종류로 나뉘는데 노란 색깔의 '메조'와 짙은 녹색과 노란색이 혼합된 ‘차조’가 있다. 차조는 단백질과 지방의 함량이 높아 소화흡수율이 높은 곡물이다. 또한, 식이섬유가 풍부하여 변비 예방에도 좋고, 비타민E는 쌀의 5배가 넘고, 비타민B1도 풍부하다. 또한 좁쌀에는 베타글루칸이 풍부하게 들어있어 장내 유익균을 만들어 장을 건강하게 해준다.
한방에서 차조는 비위가 허한 것을 보하고, 열이 나고 가슴이 답답한 것을 제거해주는 등의 효과가 있다고 했다. 환자에게 차조로 미음을 쒀서 먹이면 기력을 보충하고 신장기능을 원활하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예로부터 차조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랐다. 또한, 장기간 보관해도 해충의 피해가 적고 맛의 변화가 거의 없다. 그래서 장기간 보관해두었다가 흉년에 활용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밥, 죽, 엿, 떡, 과자, 술 등 다양한 음식의 원료로 활용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오메기떡을 만들 때는 ‘흐린 좁쌀’이라고도 부르는 검은색 차조를 사용한다. 반나절 가량 차조를 불린 후, 소금을 첨가하여 곱게 가루를 만든다. 따뜻한 물로 가루를 섞어 치대 익반죽을 만든다. 완성된 반죽은 둥글게 빚어 가운데에 구멍을 내서 도넛과 같은 모양으로 만든 뒤 물에 삶아낸다. 삶는 대신 찜통에 쪄내기도 한다. 고물은 콩이나 팥을 주로 사용한다. 콩고물을 묻히지 않은 떡은 오메기술을 만들 때 밑떡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오메기떡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형태와 재료가 변화했다. 과거에는 구황작물과 같은 차조였지만 점차 가격이 오르자 찹쌀을 섞어 반죽을 만들게 되었다. 또한 짙은 색깔을 위해 쑥이 첨가되면서 반죽이 진한 녹색을 띠게 되었고, 설탕으로 조린 팥소가 들어가면서 모양 역시 동그랗게 변했다. 이렇게 만든 떡의 겉면에는 고물로 팥이나 콩가루 이외에도 최근에는 호박씨, 아몬드, 땅콩과 같은 견과류로 장식하기도 한다. 해서 최근에는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 기념품으로 많이 구매하는 관광상품이 되었다. 오메기떡은 만들자마자 따끈할 때 먹는 게 가장 맛이 좋으며, 서늘한 곳에 밀봉하여 보관하거나 최근에는 냉동으로 장기간 보관하기도 한다.
충청도 음식은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다. 양념도 많이 사용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가지고 있는 고유의 맛을 살려 담백하고 구수한 것이 특징이다. 충청도의 떡도 음식과 같이 화려하지 않다. 단순하며, 무나 쑥과 같은 채소를 섞어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의 떡은 치는 떡, 지지는 떡, 찌는 떡, 삶는 떡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곤떡은 그 중 지지는 떡에 속한다. 곤떡은 충청도 지역의 향토음식으로 찰진 찹쌀가루로 익반죽을 만들어 둥글게 빚어 지초를 추출한 기름으로 지져낸 특색 있는 떡이다. 곤떡이라는 이름은 ‘고운 떡’ 혹은 ‘고은 떡’에서 유래되었다. 색과 모양이 특히 곱다 하여 고운 떡, 고은 떡으로 불렸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곤떡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곤떡을 만들 때 사용하는 지초기름은 아름다운 붉은 빛이 특징이다. 지초는 산이나 들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지치과의 풀로 온몸에 털이 많이 붙어있다. 지초는 자초(紫草), 자지(紫芝), 지초(芝草)라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초의 뿌리인 자근에는 강한 붉은색을 띠고 있다. 그래서 곤떡과 약식의 착색제로 사용된다. 자근은 식품뿐만 아니라 염료로도 활용된다. 옛날부터 왕이 입는 옷이나 높은 사람의 옷은 자근으로 염색했다. 붉은 색이 높은 권위를 상징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피부에 바르면 창독(瘡毒)이 제거되면서 종물(腫物)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실제로 붉은 옷을 입으면 사람의 혈액순환에 좋아 심장이 약한 사람에게 좋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기름에 지초뿌리를 넣고 끓이면 색소가 우러나와 기름 빛이 감자주색이 된다. 이 기름에 찹쌀 반죽으로 빚어놓은 떡을 은은한 불에 지지면 붉은빛이 난다. 말 그대로 ‘고은떡’이 된다. 곤떡은 예쁜 붉은 색 덕분에 웃기떡으로 자주 활용된다. 웃기떡이란 잔칫상에 높게 쌓아올린 고임 떡의 맨 위에 얹히는 장식 떡을 말한다.
제주도 지역은 화산재,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토양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발달했다. 잡곡은 맷돌에 갈아 가루로 만들기에 적합하다. 그래서 제주도의 노동요를 살펴보면 70% 이상이 여성들의 맷돌 작업 등 제분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제주도의 전체 음식 중 부식이나 반찬을 제외한 나머지 음식의 30~40%는 가루 음식이다. 범벅· 수제비·칼국수·보리미숫가루·상용 떡 등이 바로 가루로 만든 음식들이다.
고구마는 조선 영조 39년(1763년)에 조엄이 구황작물로 활용할 목적으로 일본에서 들여온 작물이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실질적으로 고구마가 식량으로 대대적으로 재배된 것은 150년이 지난 일제 강점기 때부터이다. 일본인 제주도사(濟州道士)가 신품종 고구마와 재배 기술을 도입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그때부터 고구마가 서귀포에서 구황작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조침떡은 좁쌀 가루에 채를 썬 생고구마를 섞어 팥고물을 층층이 안쳐서 시루에 쪄서 만드는 제주도 지역의 전통떡이다. 제주도의 지역특산물 중 조와 고구마를 활용한 향토색 짙은 떡이다. 좁쌀 중 차조나 흐린 조를 충분히 물에 불린 다음, 소쿠리로 건진다. 여기에 소금을 조금 넣고 빻아서 가루를 만든다. 팥은 깨끗이 씻어 삶은 후, 뜸을 들여서 절구에 소금을 조금 넣고 찧어 포슬포슬하게 준비한다. 고구마는 굵게 채로 썰어 떡가루와 골고루 혼합한다. 시루에 밑을 깔고, 팥고물과 고구마채와 섞은 좁쌀 가루를 3.5-4cm 두께로 한 켜를 놓는다.
그 위에 또 한켜를 쌓는다. 이렇게 여러 켜를 쌓은 후 젖은 베보자기를 덮고 찐다. 김이 오르고 난 후부터 15분 정도 더 쪄낸다. 익은 것은 긴 대꼬챙이로 찔러서 확인한다. 찔렀을 때 좁쌀 가루가 묻어나지 않으면 떡이 다 익은 것이다. 고구마 말고도 무나 호박을 이용해서 조침떡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고구마는 좁쌀가루의 고소한 맛과 어우러지는 은근한 단맛이 있어 주로 사용된다. 제주도에서는 시루떡을 ‘침떡’이라고 부른다. 침떡은 곧 찐 떡을 뜻한다. 1970년대 말 현대식 떡류 가공업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쌀로 시루떡을 만들다보니 좁쌀로 만든 시루떡은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
육지에선 일반적으로 쌀로 떡을 찌지만, 제주도에서는 좁쌀을 썼다. 제주도에서 하얀 쌀시루떡은 정갈한 고급음식이기 때문에 신에게 올리는 정성스러운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주도 여성들은 마을에서 ‘곤쌀계’를 조직했다. 곤쌀계는 경조사에 쓸 쌀을 모으는 계다. 이렇게 모아도 쌀이 부족한 주민들은 위층에만 쌀가루를 얹고 밑층에는 좁쌀 가루를 쌓아 한 켜에 쌀과 좁쌀이 어우러진 시루떡을 만들어 제상에 올렸다. 따라서 조침떡은 의례용보다는 일상식으로 먹었거나 마을에서 사람들과 함께 나눠 먹기 위한 떡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우리 민족의 가장 대표적인 생업은 농사였다. 이러한 농경생활에서 ‘달’은 중요한 상징성을 가진다. 달은 주기에 따라 그믐달에서 보름달이 되었다가 다시 초승달이 된다. 옛날 사람들은 이러한 달의 모습을 보고 달은 무한히 다시 생겨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달이 생산의 상징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달을 보고 풍농을 기원하고, 소원을 빌었다. 추석이면 달맞이를 했다. 달의 모양을 따서 만든 달떡에도 사람들의 염원이 깃들어 있다.
달떡은 보름달 모양의 절편으로 크고 밝은 보름달이 어둠을 물리치고 빛을 멀리 비추는 것처럼 달떡을 먹는 사람도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들어있는 떡이다. 멥쌀가루에 뜨거운 물로 익반죽을 해서 둥글게 빚어낸다. 빚어낸 반죽을 끓는 물에 삶는다. 뜨거운 상태로 물을 묻혀서 한번 더 반죽하여 둥근 절편을 만든 후에 떡살을 이용해서 찍어낸다. 달떡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먹는 절편의 한 종류로, 혼례에서 초례상에 올라가거나 회갑연에 사용된다. 의례에서 사용할 때는 떡을 높게 쌓아서 올리기도 한다. 이렇게 떡이나 음식을 쌓아올리는 것을 ‘괸다’고 하는데, 음식을 괴는 이유는 음식이 많아 보이게 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의 바람을 쌓는 것이기도 하다.
달떡은 제주도의 토속음식이다. 쌀이 귀한 지역이다보니 주로 명절이나 제사 때만 쌀을 이용해서 떡을 만들고, 일상적으로는 메밀을 주로 사용한다. 달떡도 메밀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달떡에 대한 기록은 1984년에 발간된 『한국민속종합보고서- 향토음식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록에는 달떡을 “멥쌀가루를 쪄서 절구나 떡판 위에 쳐서 달 모양으로 둥글게 빚어 줄무늬의 떡살을 찍어 참기름을 칠한 떡”이라고 소개한다. 또한, “함경도 지방을 비롯한 평안도 지방에서는 혼례 시 놋동이에 여러 켜 담고 그 위에 꽃을 꽂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제주도 지방의 달떡과 만드는 법에서는 동일하나,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에서는 혼례음식으로 많이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송편은 추석에 먹는 떡이다. 그해에 추수한 쌀로 빚는다. 올 한해도 무사히 추수를 할 수 있도록 하늘에서 보살펴주신 조상님들에게 좋은 곡식을 올리는 차례상과 묘소에 빠지지 않고 송편이 올라간다. 지역마다 그 들어가는 재료와 모양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이렇듯 명절에 햅쌀과 햇곡식으로 빚은 송편을 ‘올송편(오려송편)’이라고 부른다. 추석 말고 특별하게 송편을 빚는 날이 있었는데 중화절(中和節 ,음력 2월 1일)이다. 중화절은 궁중에서 이제 겨울이 끝나고 새롭게 농사할 수 있는 시기가 왔음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날은 ‘삭일송편’, ‘노비송편’을 만든다. 노비송편은 커다랗게 빚고, 노비들에게 나이 수만큼 주었다. 이러한 의식은 농사를 시작하기 전, 노비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충청도 지역은 서해안을 인접하고 있는 충청남도와 소백산맥의 끝에 위치한 충청북도로 구성된다. 서해안의 다양한 해산물과 많은 구릉지에서 풍성하게 나는 밭작물로 만든 충청도 음식은 순하고 꾸밈이 없지만 넉넉하고 담백한 것이 특징이다. 떡도 유사하게 화려하지 않지만 무, 쑥과 같은 채소를 섞는 것이 특징이다. 다양한 채소가 들어간 떡이 특징인 충청도에서는 송편에도 호박이 사용된다. 해서 호박송편이라고 부르는데 그 모양도 호박과 똑같이 만든다.
우리에게 익숙한 작물이지만 사실 호박은 토종작물은 아니다. 호박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에 대해서는 고추와 함께 임진왜란 이후 들어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시아 남부 지역을 거쳐서 당나라를 통해 들어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지만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호박은 구수하고 은근한 단맛으로 많은 요리에 활용되고 있으며 소화가 잘되어 속을 편안하게 해준다. 또한 영양가가 높아서 환자의 회복식이나 임산부의 보양식으로 많이 활용된다. 당뇨나 비만에도 좋고, 부기를 빼는 데 좋은 음식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호박송편은 썰어 말렸던 가을 호박을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사용하거나 찐 호박을 으깨어 멥쌀가루와 섞어서 반죽을 만들기도 한다. 소는 볶은 통깨나 대추로 만들고, 반죽에 소를 넣어 호박모양으로 빚는다. 빚은 송편을 찜통에 쪄내면 완성되는데 호박의 달고 구수한 맛도 일품이지만 호박 특유의 선명한 노란색과 앙증맞은 모양이 단연 돋보이는 떡이다. 또한 섬유질과 카로틴(carotene)이 다량 함유된 호박으로 만들어 영양가가 높아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떡이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송편을 모르기는 쉽지 않다. 송편은 우리나라 명절 중 추석을 대표하는 떡이다. 송편은 그 해에 추수한 쌀로 빚는 떡이다. 송편은 올 한해도 무사히 추수를 할 수 있도록 하늘에서 보살펴주신 조상님들에게 좋은 곡식으로 만들어 올리는 음식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송편은 서울 경기권의 송편이다. 송편은 지역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조상님에게 올리는 음식에는 정성을 들여야 한다. 그래서 송편을 단정하고 예쁘게 빚는 것에 대한 속설이 많다. 예쁘게 빚으면 시집 안 간 처녀는 좋은 남편감을 만나고, 결혼한 여자는 예쁜 딸을 낳는다고 전해진다. 또, 임산부가 완성된 송편을 깨물었을 때 덜익은 송편을 고르면 딸을, 잘 익은 송편을 고르면 아들을 낳는다고 믿었다.
전라도는 기름진 호남평야, 내포평야, 장흥평야, 군동평야 등이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이다. ‘호남에 가뭄이 들면 온 나라가 굶어죽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또한, 동북부의 고원지대에 다양한 밭작물과 채소의 재배가 활발하다. 이렇듯 전라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먹거리가 풍부하기에 음식문화 역시 발달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인 추석에 먹는 송편에서도 전라도의 특징이 나타난다. 전라도의 송편은 삐삐떡, 혹은 삘기송편이라고 한다. 삘기, 삐삐는 송편에 들어가는 재료 이름이다.
삘기는 초가집과 같은 지붕을 만들 때 볏짚처럼 사용하는 띠의 어린 싹이다. 띠는 벼과의 여러해살이 식물로 우리나라 어디서든 들이나 산기슭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띠는 고려시대에는 모향(茅香)·치각유(置角有)라고 불렸고, 조선시대에는 백모향(白茅香)이라고 하였다. 띠에는 하얀 꽃이 핀다. 이 꽃 때문에 생긴 이름이 아닐까 싶다.
띠의 어린 새순은 삘기라고도 부르지만 지역에 따라 ‘삐비’, “삐삐”라고도 부른다. 삘기는 많은 어른들에게 추억이다. 지금보다 5, 60년 전만 해도 과자, 사탕과 같은 간식이 부족했다. 그럴 때 삘기는 정말 좋은 대체식품이었다. 띠의 새순인 삘기를 뽑으면 흰 부분이 나타난다. 흰 부분은 씹으면 달큰한 맛이 나고, 질겅질겅한 식감이라 껌처럼 씹을 수 있다. 그래서 옛날 어린이들, 즉 지금의 어르신들이 산과 들에서 쏙쏙 뽑아먹는 사랑받는 간식거리였다.
삘기를 송편에 넣을 때에는 삘기를 훑어 절구에 넣고 찧는다. 찧은 삘기를 멥쌀과 혼합하여 가루를 만든다. 곱게 만든 가루는 따뜻한 물을 넣어 익반죽을 만든다. 익반죽으로 피를 만들고 설탕, 소금, 참깨, 물 등을 섞어 만든 참깨소를 넣어 송편을 완성한다. 이렇게 완성된 송편이 전라도의 삘기송편, 즉 삐삐떡이다. 삐삐떡은 삘기로 인해 일반송편보다도 더 찰지고 쫄깃한 식감이 큰 특징이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남북으로 길게 뻗은 지형적인 특싱과 뚜렷한 사계절의 구분으로 지역적으로 기후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이다. 따라서 각 지역마다 지역의 특산물을 활용하여 다양한 음식들이 발달해 있다. 떡에도 지역적인 특징이 나타난다. 그중 경상도에서는 주요 특산물인 감이나 밤을 활용한 떡이 많다. '잣구리'도 그 중 하나다. 잣구리는 상주와 문경에서 만드는 떡으로, 밤을 소를 만들어 넣고, 누에고치 모양으로 빚어 잣가루를 묻혀서 만든다.
소에 들어가는 밤은 “장과 위를 든든하게 하여 신기를 보하고 배고프지 않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의학에서는 식욕이 떨어진 아이 혹은 위장이나 신장이 허약한 사람에게 회복하기위한 보양식으로 밤을 처방하기도 한다. 밤은 두꺼운 껍질과 전분 성분이 영양분을 보호하고 있어 가열해도 영양손실이 적어 겨울철에도 영양 간식으로 많이 활용된다. 고물로 묻히는 잣은 옛날부터 신선의 식품으로 불로장색의 열매로 알려져 있다. 잣은 고칼로리에다 비타민B와 철분이 풍부하여 빈혈에 효과적이다. 또한 리놀레산, 올레산 등의 불포화지방산 함량이 높아 피부를 윤기나게 해주며 탄력성을 높인다. 혈압을 내려주고 스테미너에도 도움을 준다고 한다. 밤과 잣의 효능으로 보아 잣구리는 보양식으로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잣구리는 찹쌀가루에 뜨거운 물을 넣어 익반죽을 한 후 밤으로 만든 소를 넣고 누에고치모양으로 빚어서 끓는 물에 삶고 잣가루를 고물로 묻혀주는 고급스러운 떡이다. 밤소를 만드는 법은 껍질을 벗겨 삶은 밤을 으깨서 체에 내린다. 체에 내린 밤에 꿀과 계핏가루를 넣어 혼합한다. 소는 대추만한 크기로 만들어 익반죽에 싼다. 고명으로 쓰는 잣가루는 잣의 고깔에 붙은 껍질을 일일이 떼어낸 후에 곱게 갈아서 준비한다. 잣구리와 똑같은 모양이지만 밤소 대신에 깨를 빻아서 꿀에 갠 것을 사용하고, 깨고물을 묻힌 경우에는 “깨구리”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의 기본 조미료는 “장”이다. "음식 맛은 장맛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장맛은 중요하다. 가정에서는 음식을 하기 위한 필수 재료였고, 장이 음식의 맛을 좌지우지했다. 우리나라에서 장을 만들어온 역사는 굉장히 오래되었다. 장의 주요 재료인 콩은 원시시대부터 재배되었던 작물이다. 덕흥리 고구려벽화무덤의 묘지명에 큰 공사로 집단 노동을 진행할 때면 사람들에게 흰쌀밥에 고기를 먹이면서 술과 장도 한 창고분이나 먹었다고 되어있다. 우리 민족은 장을 잘 빚는 것으로 유명했다. 중국의 『삼국지 위지동이전』 기록에는 “고구려인은 장 담그고 술 빚는 솜씨가 훌륭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의 기본재료가 되는 메주가 문헌에 가장 처음 나온 것은 『삼국사기』이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 신문왕 3년, 왕이 왕비를 맞이할 때 보낸 예물 중 '시(豉)'가 있는데, 이 '시(豉)'가 바로 메주를 의미한다.
사실 장은 원래 간장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의미가 점점 넓어져 된장, 청국장, 막장, 고추장을 아우르는 명칭이 되었다. 장은 선조들의 지혜와 풍부한 경험을 밑바탕하고, 끊임없이 발전하는 음식가공 기술까지 더해져 날이 갈수록 그 종류가 늘어나고 맛도 또한 풍부해지고 있다. 장의 주요 재료는 바로 콩이다. 콩은 각광받는 뛰어난 건강식품이다. 콩의 주요 건강 효과에는 골밀도 증강, 급격한 혈당상승 억제, 유방암 발병률 감소, 당뇨병 예방, 체중감소 등이 있다. 또한 콩 속의 사포닌 성분이 비만 체질을 개선하고, 레시틴 성분은 치매예방에도 효과적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콩은 찬 성질을 가지고 있어 설사를 자주 하거나 소화기관이 연약한 사람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이러한 장을 혼합해서 만드는 떡이 바로 장떡이다. 지역에 따라 방식이 조금씩 다르지만 전국적으로 많이 먹는 향토음식이다. 지역과 가정에 따라 장떡을 고추장을 활용하기도 하는데 그 경우에는 ‘고추장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된장을 이용한 장떡이다. 장떡은 간단하게 조리할 수 있는 영양가가 높은 음식이다. 장떡은 과거부터 막 만들어진 따뜻한 상태보다는 식었을 때 더 쫄깃한 식감이 있어 도시락 반찬으로 각광받았다. 과거에도 여행다닐 때 행찬(行饌)으로 많이 먹던 음식이다. 흔히 ‘장땡이’라고도 부르기도 했다. 장떡은 보통 찹쌀가루나 밀가루에 된장을 섞은 반죽을 다양한 부재료를 넣고 지져서 만든다.
충청남도 지방에서 즐겨먹는 장떡은 마늘과 다진 파를 넣은 된장과 찹쌀가루, 고춧가루를 넣어 반죽을 만든다. 둥글게 빚은 반죽은 살짝 햇빛에 건조시킨다. 건조시킨 장떡을 30분간 찜통에서 찐 후에 형태를 손으로 예쁘게 다듬는다. 다음은 장떡을 햇빛에 다시한번 건조시킨 다음에 약 2-3mm 두께로 썰어 넉넉히 기름을 둘러 지져 먹는다. 경상남도 지방에서 즐겨먹는 장떡은 방아잎과 들깻잎을 깨끗하게 씻어 다듬은 후, 물기를 제거하여 곱게 다진다. 두부는 마른 행주에 넣고 꾹 짜서 물기를 빼고 곱게 으깬다. 곱게 다진 방아잎과 들깻잎, 으깬 두부에 된장과 밀가루를 섞어 반죽을 만든다. 동그랗게 반죽을 떠서 기름을 넉넉히 두른 프라이팬에 먹음직스럽게 지져낸다. 경상남도의 장떡은 방아잎의 향기로 더욱 짙은 향의 장떡이기도 하지만 두부와 된장을 함께 섭취하여 성인병 예방에도 효과적이다.
우리나라의 주식은 쌀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하는 식사에 가장 기본은 쌀로 만들어진 ‘밥’이기 때문이다. “밥 위에 떡”이라는 말도 있듯이 주식인 쌀을 활용한 가장 대표적이고 전통적인 별식은 떡이라고 생각한다. “밥 위에 떡”은 좋은 일에 더욱 좋은 일이 겹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떡이 나타난 시기를 오래 되어 많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우리가 현재 생활 속에서 먹고 있는 떡의 모습은 조선시대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농사법의 발전으로 농산물의 생산량이 늘어나게 되었다. 농산물이 풍요로워지면서 다양한 조리가공법이 생겨나게 되었고 떡 역시 그런 결과물 중에 하나이다.
부꾸미는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1943)에서 처음 찾아볼 수 있다. 첫 기록에는 ‘북꾀미’라고 쓰여있다. 우리가 현재 부르고 있는 부꾸미라는 표현은 그 이후 『우리나라 음식 만드는 법』(1958)년에서 처음 등장한다. 부꾸미를 만드는 방법은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기록되어 있기를 ‘차전병 만드는 방법대로 만들어서 거피팥에 꿀과 계핏가루를 볶아서 계피떡과 같이 소를 넣고 반달처럼 떠서 꿀을 찍어서 먹는다.’고 한다.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부꾸미는 화전이나 주악과 같이 기름에 지져서 만드는 떡인 유전병(油煎餠)의 하나이지만, 화전이나 주악과 가장 큰 차이이자 부꾸미의 특징은 계피를 섞은 팥 혹은 견과류가 소에 들어간다는 점이다. 이러한 유전병은 주로 잔칫상에 떡을 높이 쌓아올리는(음식을 높이 쌓는 것은 괸다고도 표현한다.) 웃기떡으로 많이 사용되는데 부꾸미는 잔치와 상관없이 집에서도 많이 해먹는다는 것도 역시 특징이다.
북꾀미가 부꾸미로 기록되기 시작한 『우리나라 음식 만드는 법』에는 부꾸미를 만드는 재료와 그 안에 들어가는 소가 다양하게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반죽을 만드는 주재료는 찹쌀가루와 차수수가루, 밀가루, 녹말가루를 사용하고, 소에는 계핏가루·밤·팥·설탕·꿀 등을 넣거나 고기나 나물을 볶아서 넣는다고 전한다. 고기는 주로 소고기를 채썰어 볶은 것이 들어가고, 나물은 계절에 따라 다른데 여름에는 오이나 애호박을 꼭 짜서 볶은 것을 사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고기와 나물을 넣어서 만드는 부꾸미는 찾아보기 힘들다.
부꾸미는 재료에 따라 이름이 붙는다. 찹쌀가루만 들어가면 찰부꾸미, 수수가루가 들어가면 수수부꾸미라고 부른다. 최근에는 지역에 따라 생산되는 농산물을 활용하여 호박부꾸미, 옥수수부꾸미, 결명자부꾸미, 칡부꾸미 등 그 종류가 훨씬 다양해지고 있다. 부꾸미는 전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별식이지만 주로 경기도의 전통떡으로 알려져 있다. 모양도 간단하고, 색도 자연스러워 누구나 쉽게 접해볼 수 있는 떡이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하고 달콤한 소가 들어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다.
속담에 “누워서 떡 먹기”라는 속담이 있다. 너무나 쉬운 일을 표현하는 말이지만 사실 실제로 해보면 누워서 떡을 먹는 것은 생각보다 많이 어려운 일이다. 인절미의 경우에도 가루 때문에 기침이 나오는 경우가 많고, 시루떡 역시 팥고물이 떨어지기 때문에 누워서 먹기 어렵다. 그중 가장 어려운 떡은 단연 부꾸미가 아닐까 한다.
부꾸미는 기름에 지져서 만들기 때문에 일단 다른 떡에 비해 뜨겁다. 거기에 찹쌀가루가 들어있는 찰떡이기 때문에 손으로 잡을 경우 손에 붙는다. 이러니 손을 데기 쉽다. 거기다 뜨거운 부꾸미를 바로 먹으면 안에 뜨거운 팥소와 찰떡으로 인해 입천장을 델 수 있다. 부꾸미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타이밍은 바로 지지고 난 후에 한 김 식은 후이다. 살짝 식은 상태여야 찹쌀의 쫄깃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스무 살의 기차는 붉은색 무궁화호였다. 유리로 만든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안개 자욱한 철로를 달리던 경춘선(1971년 개통). 청량리역에서 춘천역 사이에는 열여덟 개의 정류장이 있었다. 경춘선 복선 전철 건설이 끝나던 2010년 12월,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춘천행 무궁화열차는 사라졌다. 신상봉역에서 시발하는 경춘선 시대가 열린 것이다.
경춘선 무궁화호가 달리던 낡은 철로주변은 아이와 연인,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넘친다. 먼지 날리던 기찻길은 ‘경춘선 숲길’로 변해 공원이 되었고 주변은 카페거리로 유명해졌다. 철길 건너편에 날씨처럼 예쁜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다. 언제부터 우리가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을까?
아이스크림이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커다란 상자를 메고 다니며 ‘아이스께끼(ice cake)’를 팔던 행상이 등장한 시기도 이때이다. 아이스께끼는 어르신들의 소중한 추억이기도 하다. 엄밀히 따지면 아이스크림보다 셔벳(sherbet)에 더 가깝다. 함석판에 얼린 아이쓰케끼는 설탕물에 우유를 탄 것이고 가격은 1전, 2전. 1936년 8월 15일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아이스크림은 어떤 것이 조흔가>라는 기사가 있어 소개한다.
아이스크림은 얼른보아서 전체가 잘 석기고 빗도고른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찝질하거나 기음내가 나거나 혹은 특별한 다른냄새가 나는것은 모다 못씁니다... 그런고로조흔것일수록입에씹히지안코 입에 넛키만하면 향기롭게 스르르 녹는것입니다(기사 그대로 인용).
간혹 아이스크림을 만들 때 썩은 달걀을 사용하거나 상한 아이스크림을 판매하는 경우가 있어 구매할 때 조심해야 할 부분을 안내하는 내용이다. 대량생산이 어려웠던 당시에는 소규모 공장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위생과는 거리가 있었다. 예쁜 아이스크림 가게의 내부는 분홍색이다. 심지어 아이스크림을 푸는 커다란 숟가락 손잡이도 분홍색이다. 달달한 아이스크림 향기와 분홍색이 잘 어울린다. 이곳의 주인장은 터키에서 온 메흐멧 오즈데미르(Mehmet Ozdemir, 39세). 그는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와서 한국여인과 결혼을 하여 귀여운 어린 아들을 한 명 두었다.
“아이스크림은 손으로 저어 만들어요. 기계를 사용하지 않아요. 모두 손으로 직접 하니까 힘들죠. 많이 만드는 것보다 조금씩 만드는 것이 신선한 느낌이 있어요. 제가 만드는 것은 계절 과일로 매일 매일 만드는 신선한 젤라토(gelato)에요. 아기들이 먹을 수 있는 몸에 좋은 아이스크림이죠. 우리 손님 중 절반은 애기, 애기엄마들이 많아요. 애기들이 많이 오면 행복해요.”
엄마들은 아기가 먹고 사용하는 것에는 꼼꼼하며 이성적이다. 그러니 애기 엄마들이 선호하는 아이스크림이라면 맛과 재료에 대해서는 엄지를 ‘척’ 세울 수 있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 중 몇 가지를 추천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소금이랑 홍국쌀이죠. 홍국쌀이 제일 인기 많아요. 말차랑 얼그레이, 피스타치오도 좋아해요. 여름에는 딸기, 포도, 자두, 복숭아. 과일은 항상 맛이 다르니까 늘 개발해야 해요. 수박 아이스크림도 인기가 많아요. 우유가 들어가지 않은 셔벳, 수박, 포도가 많이 팔려요. 만드는 것은 힘들지만 재미있잖아요. 우유는 염소우유하고 산양우유를 사용해요.”
그는 한국말을 유창하게 한다. 결국은 자신이 만든 모든 아이스크림이 맛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필자는 골고루 다 먹어보기로 했다. 그가 자랑하는 홍국쌀 아이스크림은 고소한 쌀알의 맛과 꼬득꼬득한 식감이 살아있다. 소금 아이스크림은 진한 산양우유맛과 짭짜름한 소금 맛이 조화롭다. 소금 맛이 우유의 고소함을 상승시켜준다는 느낌이다. 피스타치오는 그냥 감동적이다. 피스타치오를 직접 볶아서 갈아 넣는다고 한다. 각각의 맛은 재료의 맛을 먼저 느끼게 하고 깊이 벤 우유의 맛이 순차적으로 잔향을 피운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렇게 좋은 공원과 맛있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다니 얼마나 행운인가. 그에게 터키 아이스크림과 직접 만든 아이스크림의 차이가 무엇인지 물었다.
“터키 아이스크림은 지방과 단맛이 더 강해요. 지금처럼 만들면 그곳에서는 잘 안 팔릴 거예요. 한국 사람들은 단맛이 강하면 좋아하지 않아요. 손님들이 원하는 맛을 찾고 재료의 맛을 살리기 위해 연구를 많이 해요. 새로운 것을 만들면 늘 물어봐요. 그러면, 손님들이 ‘사장님, 이거 좀 그래.’ 라고 하세요. 다시 재료의 비율을 조절하지요. 제 아이스크림은 80%가 노력인 것 같아요. 그리고 저희는 배달도 해요.”
겨울철에도 그의 가게 앞에는 손님들이 줄을 선다. 이유는 그의 아이스크림에 담긴 행복 때문이다.
메흐멧 오즈 데미르(메흐멧 오즈 데미르. 남, 39세)는 경춘선 숲길 근처에서 ‘달콤한 순간’이라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한다. 신선한 계절과일과 재료를 사용하여 맛이 좋고 건강에도 좋은 아이스크림이다. 포장을 원한다면 별도의 용기에 담아 준다. 물론 배달도 가능하다.
"뻐엉~"
맑은 목소리가 하늘에 퍼지자 저만치 무리 지어 있던 비둘기들이 먼저 날아든다. 힘차고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로 ‘뻥이요!’를 외치던 귀에 익은 소리가 아니다.
“저것들이 ‘뻥’하면 다 알아. 원래 기계가 이렇게 생겼는데 철판으로 뚜껑 집을 맨들어서 소리가 좀 작게 나지. 지금은 밧데리로 해서 모다(모터)가 돌리는 거라 쉽지. 손이로 돌려가며 하면 힘들어 못햐.”
최 씨 할머니(76세)는 하루 종일 뻥튀기 기계를 지킨다. 두되 정도의 곡물을 기계에 넣으면 열 배가 되어 나오니 정말 신기한 기계이다. 아침 열 시부터 어두워지는 시간까지 꼬박 하루를 목동 3단지 버스정류장 앞에서 지낸다. 곡물의 특성마다 튀기는 시간도 다르고 손님의 특성에 따라 요구도 다르다. 손님들의 입맛과 요구를 정성으로 대하기 때문에 한 번 찾은 이들은 단골손님이 된다.
뻥튀기 기계는 압력과 열에 의해 곡물이 튀겨지는 원리이다. 기계의 입구를 밀폐시켜 가열하면 기계 안의 압력이 올라가고 가열되었던 기계의 뚜껑을 갑자기 열면 압력이 급속히 떨어지면서 곡물이 부풀게 된다. 이 때 압력에 의해 엄청난 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 기계는 일제 강점기에 처음 출현하였고 일본의 철공소나 기계제작소에서 제작했다. 말하자면 일본에서 조선으로 들어와 전국에 판매가 되었던 것이다.
동아일보 1932년 1월 16일 광고를 보면, <실로 놀랬다, 7홉이 1말이 된다.>라는 광고문구로 곡물팽창기를 선전한다. 같은 신문 1월 28일 광고에도 <돈모으기의 제왕>이라는 카피와 함께 5홉의 쌀이 8되로 팽창한다는 문구가 있다.
백미, 현미, 수소, 조 등을 15배 이상으로 팽창한다. 시간은 3분 걸리고 비용은 5리(厘)가 든다. 제조원은 대판(大阪)시 항구 8번 옥원정 1정목으로 죽촌기계제작소가 만들었다(1월16일 광고, 기사 그대로 인용).
... 기계를 만든 곳은 대판(大阪)시 서성구 출성통 5정목 강부(岡部)철공소였다. 이 기계가 오늘날도 많이 먹는 강냉이와 튀밥을 만드는 기계의 원조이다(1월28일 광고, 기사 그대로 인용).”
“요즘에 농사를 져? 요즘 애들이 이런 거 안 먹어요. 옛날에는 군것질할 게 없으니까 먹었지. 이런 기계도 이젠 많지 않아. 나는 여기 한 지가 삼십 년도 넘었지. 여기 했던 이가 이십 년 넘게 했고 그전에 한 오 년 했고. 나는 우리 아저씨랑 둘이 했거든. 이제 아저씨가 힘들어서 못 하고 나 혼자 하려니 힘이 들지.”
최 씨 할머니는 기계에서 우르르 쏟아지는 강냉이(옥수수를 튀긴 것)를 커다란 고무 그릇에 담고 슬슬 뒤집어 준다. 가만히 보니 그릇 밑은 철망으로 되어있다. 튀겨지면서 벌어진 옥수수껍데기를 떨어내기 위함이다. 강냉이를 먹을 때 까끌거리지 않고 먹기 좋으라고 생각해 낸 것이란다. 옛날에는 강냉이에 붙어있던 껍데기도 그냥 먹었다. 그 껍질에는 옥수수의 달착지근함이 남아있어 나름의 맛이 있었다. 그러다가 얇은 껍질이 목에 달라붙어 넘어가지 않을 때는 그것을 떼어내느라 곤혹을 치르기도 한다.
강원도에서 직접 농사지은 찰옥수수를 들고 나온 어르신은 강냉이와 옥수수 껍질을 모두 챙기신다. 껍질로 무엇을 하실 것이냐고 물으니, 물을 끓여 드시면 고소하고 맛있다고 귀띔해주신다. 어르신은 구경하던 이들에게 한 줌씩 강냉이를 나누어 주셨다.
“살기 힘들면 다 하게 돼지는 거야. 정이 많이 들지. 이제 이거랑 나랑 같이 가는 거지. 고장 나면 쇳덩어리기 때문에 철물 고치는데 공장에 가서 고쳐야지. 여태 큰 고장은 없었어. 얘가 말 잘 들어주면 좋고. 비, 눈만 안 오면 항상 해야지.”
멀리서 온 아주머니는 한참을 기다리다가 떡과 쌀을 내민다. 어머니를 가져다드려야 한다며 커다란 봉지에 열 배 커진 행복을 담아간다. 최 씨 할머니가 이곳에서 수십 년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몇 푼의 벌이 때문만은 아니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한 오고 가는 이들의 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도 어머니께 드릴 검은콩을 튀겼다. 할머니는 고소하게 부푼 콩 한 봉지와 쌀 튀밥 한 봉지를 더 넣어주셨다. 열 배로 부푼 그녀의 정(情)이다. 가을햇살만큼 따듯한 콩을 들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했다. 할머니, 감사합니다.
바게트와 캉파뉴(Campagne, ‘시골, 농촌’을 뜻하며 팽 드 캉파뉴라 하면 ‘시골 빵’을 의미)는 시간의 지층으로 둘러싸인 빵이다. 유구한 발효의 시간으로 형성된 졸깃한 빵의 표층을 뚫고 들어가면 부드럽고 향긋한 속층과 만난다. 속층은 잠자리의 날개처럼 살랑인다. 정성껏 갈아낸 좋은 밀가루로 공을 들였다는 의미이다.
빵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에 들어온 음식이다. 그중에는 건빵과 단팥빵(안팡), 현미로 만든 겐마이팡이 있다. 건빵에는 보조개처럼 생긴 두 개의 구멍이 있는데 구울 때 반죽이 터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안팡은 1874년 일본에서 개발되었다. 당시에는 빵에 들어가는 효모(Yeast)가 없어 쌀누룩에서 얻은 주종(酒鍾) 반죽을 사용했다. 겐마이팡은 밀가루 대신 현미가루를 넣고 만든 빵이다. 다행히 겐마이팡은 부유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서민들도 살 수 있었다.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빵 상자를 어깨에 메고 팔러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밀가루가 흔치 않던 시절에는 캐나다, 호주에서 밀가루를 들여왔다. 그러다가 1935년 무렵에는 밀가루를 직접 생산하면서 수입을 금지하게 된다. 같은 해 12월 12일 동아일보의 신문을 살펴보면 <요새 식빵은 웨 맛이 없나?>라는 기사가 있다.
캐나다산이나 호주산 밀가루는 발효를 하면 많이 부풀어서 맛이 부드러운데 자급자족으로 만주산 밀가루를 쓰게 되면서 빵이 잘 부풀지 않았던 것이다(기사 그대로 인용).
직접 생산한 밀가루는 서양에서 들여온 밀가루보다 빵을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게다가 식빵이나 바게트는 천연 발효종을 사용하여 천천히 발효되어야 제 맛이 나는 빵이다. 그런데 제빵 시간을 줄이기 위해 빨리 발효되는 이스트를 사용하면서 빵 맛이 떨어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1971년 제2차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 삼립식품, 서울식품 등이 설립되었다. 식량 부족으로 정부에서는 분식 장려 정책을 실행했고 이로 인해 제빵산업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근래에는 맛과 개성을 살린 젊은 감성을 지닌 빵집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필자가 자주 찾는 골목 빵집은 화려하지 않고 크지도 않다. 빵만 판매를 한다. 특히 바게트와 캉파뉴를 잘 만들고 크루아상이 맛있다.
무엇이든 그렇다. 공을 들이고 시간을 들이면 견고해진다. 이른 새벽 어두운 골목을 환하게 밝히는 작은 가게에서 빵집 주인은 혼자 분주하다.
“바게트, 호두 바게트, 깡파뉴, 식빵, 잡곡식빵은 발효실에 들어가 있어요. 오늘은 반죽의 느낌이 좋아요. 마치 아기의 볼처럼 부드럽고 말랑하죠. 온도 습도에 따라, 물 온도와 반죽 온도가 중요해요. 기본적인 것을 지켜주면 반죽이 잘 나와요. 국내산 밀가루와 프랑스산 밀가루를 잘 조합해서 빵마다 이상적인 비율로 사용해요. 벌써 십여 년 넘게 빵을 만들었지만 그래도 어려운 것 같아요.”
어느새 나이를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빵집 주인 전지영(여, 40세) 씨는 아직도 수줍은 소녀의 모습이다. 그림을 그리던 그녀가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무작정 시작한 일이 제빵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려운 점은 제품이 생각만큼 나오지 않았을 때 의논할 누군가가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외로움일 수도 있다.
“이러한 삶을 후회하지 않아요. 골목에서 빵을 만들다 보니 단골손님도 생기고 그분들 때문에 빵을 만드는 것 같아요. 제 안부를 궁금해 하고 제가 만든 빵을 맛있다고 좋아하시니까, 이것저것 메뉴가 늘어나고 있어요. 돈은 많이 벌지 못해도 작은 보람이 있어요.”
하얗게 피어나는 밀가루반죽처럼 그녀가 배시시 웃는다. 그녀가 만드는 열두 가지 빵은 모두 맛있다. 필자는 그중 무화과 캉파뉴를 좋아한다. 그것에는 달콤한 무화과가 아낌없이 들어있고 버터향이 층층마다 스며있다. 비결을 물었더니 별거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재료를 풍부하게 사용하면 맛이 있다는 것이다.
처음 제빵을 시작할 때 샀던 스크래퍼(scraper)는 그녀의 좋은 친구이다. 손에 익숙하여 버리질 못하고 있다.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지금보다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스팀이 나오는 오븐기를 사고 싶다고 한다. 그녀의 낡은 중고 오븐기에서 금방 나온 바게트들이 휘파람을 불어댄다. 벌써 빵집 앞에는 손님들이 줄을 서있다. 빵 하나하나를 종이에 담아 손님에게 건네는 그녀의 손길이 참으로 곱다.
자전거를 타고 바람이 되어 섬진강을 건넌다. 출렁이는 금빛 갈대밭을 지나면 어느덧 그곳에 닿는다. 국내 최초의 치즈 생산지인 임실치즈마을.
치즈의 원료인 우유에 대한 기록은 고려 우왕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시에는 '유우소'를 설치하여 우유를 공급하였고, 조선시대에는 내의원에서 우유로 '낙죽'을 만들었다. 칠, 팔십 세의 노인을 관리하던 기로소에서는 유락(乳酪)을 노인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농민주보(農民週報) 1946년 10월 19일 자 2면에는 <낙농업을 적극 장려>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다.
... (중략) 우리나라에서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자양이 많은 우유와 우유로 만든 식료품을 많이 사용하기 위하여 유우를 많이 기르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론보다는 실행이 제일이다. 정부 당국과 민간에서 그 사육 장려에 노력하기를 바라는 바이다(기사 내용 그대로 인용).
낙농을 권장하여 우유와 그 식료품 소비를 확대하는 노력은 현재도 여전하다. 2019년을 기준으로 국내에서 치즈를 제조하는 업체는 11곳이며 임실마을에서 생산하는 치즈의 점유율은 26.5%로 연 매출이 270억 원이나 된다.
임실에서 치즈가 생산된 것은 벨기에에서 온 지정환(본명 디디에 세르스테반스, Didier t'Serstevens) 신부와의 인연 때문이다. 지정환 신부는 1959년에 임실마을로 왔다. 당시 임실마을은 몹시 가난했고 사람들도 지쳐있었다. 신부는 선물로 받은 산양을 이곳에서 키우기로 결심했다. 산양의 젖으로 마을 사람들의 건강을 챙기고 싶었던 것이다. 산양은 번식이 빨랐고 사람들은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다. 우유가 남아돌기 시작하자, 치즈를 만들자고 생각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고민 끝에 그는 유럽으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치즈 제조 기술을 배웠다. 1969년의 일이다. 그리고 임실마을은 한국 최초의 치즈제조와 판매라는 성공적인 업적을 이루게 된다.
임실마을에서 이십 년 가까이 두 마리 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심요섭(남, 58세) 대표는 지정환 신부가 만든 치즈의 맛을 기억한다.
“어릴 때는 밥에 치즈를 비벼 먹었어요. 김치에 싸 먹기도 했죠. 밥 가운데에 굴을 파고 그 속에 치즈를 묻어 두었다가 먹으면 다른 반찬은 필요 없어요. 김치만 있으면 됐어요. 뜨거운 밥에 치즈가 녹기 때문에 후딱 해야 해요. 치즈가 삭 녹아 ‘젓가락으로 설설 저어 먹던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죠.”
그가 ‘그 맛’을 추억하며 만든 것이 바로 ‘콜비치즈’이다. 치즈는 숙성기간이나 질감, 재료 등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그런데 그는 추억으로 치즈를 만든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김 대표가 산양 목장과 지하의 치즈 숙성실로 안내했다.
“산양유는 산양 특유의 노린내가 있어요. 그러나 고소하고 맛이 깊죠. 처음 산양 두 마리로 목장을 시작했어요. 일 년에 두 번 임신을 하니까 두 배수로 늘어나는 거죠. 우유생산은 정말 어려워요.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소젖을 짜야 해요. 하루에 두 번.”
지하 숙성실에는 치즈가 익어간다. 큰 사각형의 콜비치즈(Colby Cheese)는 자주 닦아주고 뒤집어 주어야 제대로 숙성되고 곰팡이가 피지 않는다. 소금물에 적신 면수건으로 한 덩이, 한 덩이 정성 들여 닦는 것이 일인데 그 무게가 상당히 무겁다. 이곳에서 생산하는 치즈는 베르크치즈와 스트링치즈, 복치즈, 구워 먹는 할루미치즈 등이 있다.
콜비치즈는 오렌지색이다. 부드럽고 수분함량이 높다. 유통기간이 짧아서 부지런히 먹어야 하는데 만약 그것이 어렵다면, 밀봉하여 냉장 보관해야 한다. 치즈를 먹을 때는 40분 전에 미리 냉장고에서 꺼내 나무 그릇에 올려놓았다가 먹으면 치즈의 깊은 맛과 향을 풍부하게 즐길 수 있다. 콜비치즈는 풍미가 깊어 곡물 빵과 먹으면 어울린다. 필자만의 치즈 활용법이 있는데 매운맛 라면에 이것을 넣어 먹는 것이다. 콜비치즈 한 조각이 매운맛을 구수하고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
마을에서 밝게 성장한 청년들을 만났다. 그들과 스트링치즈(String cheese) 만들기 체험도 했다. 임실마을이 풍요로운 공동체 마을로 성장할 수 있었던 시작은, 지정환 신부와의 귀한 만남 덕분이었다. 행복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뿌듯한 마음으로 저녁 안개 내린 임실마을을 나왔다. 임실마을이 세계적인 치즈마을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도움 주신 분]
두 마리 목장 심요섭(남, 58세) 대표는 건강한 먹거리와 땅을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부인과 함께 농가를 운영하며 낙농업을 시작한 세월동안 아이들은 훌쩍 커버렸다.
철컹. 철컹. 유리문 틈으로 쇠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내자땅콩’은 경복궁역에서 나오면 바로 보인다. 조금만 부지런하면 이곳에서 따끈한 센베이(전병 과자)를 맛볼 수 있다. 앉을자리도 없는 좁은 가게는 과자를 굽는 공간과 과자를 진열하는 공간뿐이다.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육중한 몸집의 과자 굽는 기계이다. 그보다 더 나이를 먹었을 법한 저울과 옆구리의 실이 삐져나온 커다란 채도 보인다. 오십 년이 넘었다는 저울은 1대 사장인 김종호(남, 83세) 어르신의 역사를 같이 한다. 묵직한 그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과자 한 봉지 400g을 정확히 잰다. 밀가루를 곱게 내리는 채도 반죽을 할 때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다. 모든 물건들이 그 자리에서 묵묵히 이곳을 지키고 있다.
사실 센베이는 한국의 전통과자가 아니다. 그러나 나이 사오십이 넘은 이들에게는 센베이 과자에 대한 추억이 하나쯤은 있다. 늦은 밤 술 취한 아버지의 옆구리에 있던 누런 봉투. 두껍고 큰 봉투에는 땅콩 센베이와 생강과자가 가득 있었고 졸린 아이들의 눈을 번쩍 뜨게 할 만큼 고소했다.
센베이(전병, 煎餠)는 중국의 과자 ‘토우가시(唐菓子)’가 일본에 전래되면서 우리나라로 전해졌다. 센베이의 기본재료는 밀가루 반죽이지만 국가나 지역에 따라서 재료와 만드는 방법에 차이가 있고 모양도 제 각각이다. 한국의 센베이는 밀가루와 설탕을 반죽하여 만들고 살짝 구부려진 둥근 모양이다.
“과자 반죽은 모두 특징이 있어서 하루에 한 가지만 만들 수 있어요.
주재료는 밀가루 한 포대에 설탕 한 포대, 20kg씩 1:1이에요.
땅콩 센베이는 땅콩이 밀가루와 설탕만큼 들어가서 고소하고 달콤하지요.
저희는 대량생산이 아니라 일정량만 만들게 돼요.
대량 생산하면 빨리 식혀야 되고 자연스러운 그 맛이 변하더라고요.”
고소한 땅콩들이 가지런히 박힌 땅콩 센베이. 아버지의 뒤를 이은 아들 김영남 씨는 아버지의 솜씨와 운영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벌써 4년이 되었는데도 아버지의 손맛을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밀가루를 다루는 사람들은 온도나 날씨에 민감하다. 센베이도 마찬가지이다. 과자가 눅눅해지지 않도록 그 맛을 유지하는 기술과 과자 굽는 판에서 모양을 잘 떼어내는 기술은 오랜 경험에서 나온다.
“옛날에는 연탄이었어요. 하루 여섯 개를 약하게 지피면 오래가지요. 한 달에 180장을 사용하는 거죠. 연탄보다 비싼 것은 재료비였어요. 밀가루, 설탕, 땅콩. 아무래도 먹는 거라 경기가 안 좋다 하면 간식을 줄이잖아요. 아버지는 이곳에 오실 때 과자 굽는 판, 세 개짜리로 작업을 하셨어요. 그 기계가 40년 동안 아버지와 같이 일했죠. 그러다가 제가 4년 전에 일을 받으면서 판 5개가 있는 기계로 바꿨어요. 이 기계는 저와 함께 늙어가겠지요.”
아들은 아버지의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많은 양을 만들지 않더라도 천천히 정성을 다해 과자를 굽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이곳 센베이가 맛이 있는 이유를 넌지시 물었다. 이미 구워진 땅콩을 과자를 구울 때 한 번 더 굽고, 땅콩의 고소한 맛을 살리기 위해 땅콩 을 부수지 않고 그대로의 크기로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들은 과자를 굽고 허리 굽은 노모는 모양 틀 위에 있는 과자를 조심스럽게 봉지에 담는다. 점심때가 되자 김종호 어르신이 나오셨다.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어느 날 문득, 옛날 과자가 생각이 난다면 이곳을 찾아가길 권한다. 파래, 생강, 땅콩 센베이가 있고 밤송이처럼 생긴 밤과자와 땅콩 범벅도 있다. 강정 종류도 다양하다. 들깨강정, 참깨 강정, 검정깨, 쌀강정이 있는데 4월부터 9월까지는 기온이 높아 강정을 만들기 곤란하다. 달콤한 강정을 맛볼 수 있는 시기는 10월 이후부터 3월까지로 더운 계절을 피해서 만든다. 고소한 냄새를 실컷 즐기고 나오는 길에 과자를 굽던 김영남 씨가 세상에서 가장 큰 땅콩 센베이를 손에 들려준다. 보름달만큼 큰 센베이는 따듯하고 고소했다. 아버지의 맛 그대로 거기에 남아있길 바란다면 욕심일까.
즉석 과자 전문점 내자땅콩은 50년이 넘도록 센베이를 만들고 있다. 1대 사장, 김종호(남, 83세) 씨와 그의 아내 김경순(여, 78세) 씨, 2대 사장인 김영남(아들) 씨와 막내 이모 김경현 씨가 함께 운영한다. 변함없는 그 마음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