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에 있는 신진도는 태안의 대표적인 항구 중 하나로, 이곳 주민들의 대다수는 어업과 해산물 운송을 생업으로 삼았다. 신진도에서는 매년 정월 열사흗날마다 안전, 풍어,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마을 제사를 지낸다. 마을 제사는 당제 또는 산제라고도 불린다. 원래는 산제가 끝나면 마을의 나루터 근처에 있는 서낭당과 제물을 씻는 곳인 아랫삼에서 서낭제와 샘제도 지냈다. 하지만 상수도가 보편화하면서 샘제는 폐지되었다.
제사에서 섬기는 신은 마을 인근의 제당에 모셔진 다섯 신이다. 그중 주신으로 모시는 신만 ‘수당’이라 부른다. 나머지 신의 이름은 밝혀진 바가 없다. 제당은 산의 중턱 즈음에 있으며 돌과 흙으로 벽을 만든 초가집 형태다. 1950년대에 제당 바깥쪽 벽에 시멘트를 발랐으나 안쪽은 예전 그대로다. 마을주민들은 이곳을 영험하게 여겨 제당과 제당 주변에 함부로 손대지 않는다. 초가지붕 위에 짚을 새로 얹을 때도 원래의 짚을 그대로 두었다.
제관은 산제의 당주와 하당주, 서낭제를 담당하는 제관까지 총 3명을 선출한다. 마을에서는 본래 제관을 맡는 것을 영광스러운 일로 여겼으나 엄격한 금기와 절차 때문에 제관을 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제의에 올라가는 제물은 쇠머리, 간, 천엽, 삼색 실, 백설기, 두부적, 쇠고기적 등이다. 원래는 소 한 마리를 통째로 올렸으나 비용 부담으로 인해 쇠머리, 간, 천엽을 올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제사 비용은 주민들이 모아서 마련한다.
신진도는 밀물을 기다리는 배들이 정박하던 곳이었기 때문에 신진도 주민들은 썰물 후에 밀물이 시작되는 시간을 중요하게 여겼다. 제의도 원래 물때에 맞추어 지냈으나 현재는 정월 열나흗날 오후 다섯 시 경에 시작한다. 시간이 되면 당주와 하당주는 제당으로 간다. 제당 앞에서 제물을 요리하며 요리가 끝나는 대로 제단에 올리고 제관은 절을 한다. 그렇게 마지막 제물까지 모두 올라가면 소지를 태우면서 제의가 마무리된다. 산제가 끝나면 당주와 하당주는 서낭제 제관에게 연락하여 서낭제를 시작해도 좋다고 전달한다.
신진도리 당제에서는 여성의 참여가 엄격히 제한된다. 많은 마을 제의가 남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최근 점차 여성들의 참여를 장려하고 있다. 그러나 신진도 당제는 제물 준비부터 제의까지 당제의 전 과정에서 여성을 배제하며 주민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긴다. 또한, 제의 시작 전에 제물을 모두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되는 대로 제단에 올리는 것도 신진도리 당제만의 독특한 점이다.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 옹암리에서는 매년 음력 정초에 마을 제의인 당산제가 열린다. 옹암리는 뒤로는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바다가 있는 작은 마을이다. 옹암리 당산제는 마을의 발전과정과 크게 관련되어있는데, 마을의 변화와 함께 제의의 목적과 규모도 변화했다. 옹암리는 천수만의 내륙 종점으로 배들이 마지막으로 정박하는 곳이기 때문에 서해에서 잡힌 해산물을 받아 광천읍에서 열리는 장에 공급하는 역할을 해왔다. 광천 장이 열리기 전에는 해산물을 사려는 인파로 인해 옹암리에는 사람들이 항상 붐볐다. 이때만 하더라도 당산제는 어민들의 안전과 풍어를 비는 목적을 가지고 큰 규모로 치러졌으나 1960년대에 포구의 기능이 약해지면서부터 당산제는 점점 쇠퇴하기 시작한다.
1970년대 중반 포구가 아예 폐쇄되기에 이르자 주민의 절반이 마을을 떠났고, 제의 절차와 기간이 줄어들었다. 또한, 산신도를 도난당하는 일까지 일어나면서 당산제는 아예 단절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옹암리 노인회를 중심으로 당산제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이후 신당 집을 건설하고 당산제를 다시 계승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마을의 안녕을 위해 당산제를 지낸다. 하지만 마을의 교회가 생겼기 때문에 마을주민들의 당산제에 관한 관심은 이전보다도 훨씬 줄어들었다. 마을주민들은 당산제의 쇠퇴, 소멸, 부활의 과정을 고려하려 1960년대 이전의 제의를 대제, 그 이후를 소제라고 칭하기도 한다.
제의 준비는 제관 선출부터 시작된다. 제관으로는 당주, 도화주, 부화주, 전화주, 무당이 있다. 제의를 총괄하는 이는 당주로써, 제물을 준비하며 제의 절차 전반을 담당한다. 제관은 부정 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제관 집 앞에는 황토를 뿌렸다. 제의가 치러지는 제당에도 금줄을 쳐서 부정을 막았다. 제의 비용은 본래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돈을 걷어 마련하기도 하였으나 마을이 흥하던 시기에는 선주들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현재는 노인회를 중심으로 제의가 진행되다 보니 규모가 축소되면서 비용 또한 크게 줄어들었다.
정월 초엿샛날 저녁이 되면 제관은 용대기와 뱃기와 풍물패를 앞세워 당산으로 간다. 기수들은 당집 앞에 있는 신수 주위를 다섯 바퀴 돈다. 무당은 나무 앞에 제물을 차리고 부정풀이를 진행한다. 당주와 도화주는 당집 안에 제물을 진설한다. 제물은 술, 포, 삼색 실, 미역국, 밥 등이다. 전체적인 제의는 유교식이다. 축문을 읽고 산신, 당 할아버지, 당 할머니에게 절을 올린다. 순서가 끝나면 무당이 굿과 축원을 한다. 이후에 소지하고 제관은 산에서 내려간다.
다음날 오전에 제관은 다시 당산으로 간다. 제물을 올리고 고사를 치른다. 고사 이후에 마을에서는 장승제와 거리제를 지낸다. 마을의 상거리에서는 장승제를, 중거리, 하거리에서는 장승제를 하는데 장승제는 거리제의 성격과 유사하다. 이튿날 밤에 무당이 당산으로 가서 마지막 고사를 올린다. 이는 ‘삼일 맞이’라고 부르며, 삼일 맞이가 끝나면 당산제는 모두 마무리된다.
낙지에 대한 속담은 꽤 많은데 그 중 오뉴월 낙지는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다. 초여름에는 어린 낙지를 키우느라 어미낙지의 살이 빠지기 때문이다. 어린 낙지는 어려서 살이 없고 성체(成體) 낙지는 살이 빠져 먹을 게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낙지의 맛을 제대로 보려면 무더위가 지난 9월은 되어야 한다. 여름을 지낸 어린 낙지들은 9월이 되면 제법 살이 오르고 크기도 크다. 이때의 낙지를 중낙지, 꽃낙지라고 하여 최고로 손꼽는다.
무더위로 온몸이 스물 스물 녹아내릴 때 낙지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대로 가을이 오면 후회할 테니 말이다. 낙지로 유명한 전라도가 멀다면 서울에서 가까운 충청남도 태안으로 달려도 좋다. 태안의 시내 중앙통 시장 뒤에는 박속에 낙지를 넣은 ‘박속밀국낙지탕’으로 유명한 식당이 있다. 주인아주머니가 시집와서 시작한 식당일이 그 자리에서 40년 되었다고 한다. 이름이 하도 길어 연유를 물었다.
박속은 박속이고 칼국수와 수제비를 넣으니 밀국이고 낙지는 낙지지.
그래서 이 모두를 합쳐 ‘박속밀국낙지탕’이 된 것이다. 명쾌한 작명이다. 처음부터 박을 넣은 것은 아니었다. 무와 감자를 넣어 탕을 끓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박속이 낙지와 더 잘 어울리고 맛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줄곧 박속을 사용하고 있다. 낙지는 달리 손질할 것이 없다고 한다. 갯벌에서 낙지를 잡기 때문에 커다란 물통이나 수족관에 바닷물을 담아 낙지를 풀어 놓으면 저절로 해감(바닷물 따위에서 흙과 유기물이 썩어 생기는 냄새나는 찌꺼기)이 제거된다. 그래도 12시간은 지나야 안심하고 손님상에 낸다.
낙지는 태안 근처의 갯벌에서 낙지만 전문으로 잡는 이들이 가져온다. 몇 년 전만 해도 잘 잡는 사람들은 하루에 70마리, 80마리를 잡아 왔다. 요즘은 예전만 못하다. 연세가 많아 돌아가신 분들도 있고 수확량이 줄어 잡는 사람도 덩달아 줄고 있다. 하루 종일 삽을 들고 갯벌을 파헤쳐도 열 마리도 못 잡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게다가 물때를 맞춰야 하기 때문에 날마다 잡을 수도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낙지가 없는 날에는 ‘오늘은 낙지가 떨어졌습니다. 다음에 찾아주시면 더욱 정성껏 모시겠습니다.’라는 문구를 식당 앞에 걸어둔다. 따라서 낙지가 있는지 확인 전화를 하고 방문하는 것이 현명하다.
산낙지는 즉석에서 익혀야 제맛이기에 주인아주머니께서 직접 다룬다. 파와 마늘, 청양고추, 네모지게 썬 박속이 동실 띄워진 육수가 맛을 찾는 동안 도마에 탕탕 쳐서 참기름에 버무린 산낙지를 먹어야 한다. 꼬물거리는 산낙지가 입안에 쩍쩍 붙어 떼어지질 않는다. 먹는 모양은 나도 상대방도 점잖지는 않다. 이 모양을 보며 한 말씀 하신다.
그러다 산낙지 다 죽어.
드디어 머리 굵은 낙지가 끓는 육수에 들어갈 차례이다. 살려달라고 온몸으로 요동치는 낙지를 팔팔 끓는 육수에 넣고 재빨리 뚜껑을 덮는다. 한편으로는 안쓰럽다. 그러면서도 입은 연실 기름 발린 산낙지를 오물거리고 있다. 핑크빛으로 낙지가 익으면 다리부터 잘라 먹는다. 부드럽고 야들야들한 다리의 식감을 그대로 맛본 후 이 집의 특급 소스에 찍어 먹는다. 1년 동안 숙성된 집간장에 파와 초로 양념을 하여 손님들에게 사랑을 받는 간장 소스이다. 다음으로 칼국수와 수제비를 넣고 낙지 머리가 익을 무렵 건져 먹으면 된다.
박은 촌에서 별도의 재배공간이 필요 없다. 올해는 힘이 들어 박을 심지 못했지만 그래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오늘 아침만 해도 이웃에서 한 아름 되는 연두색 박을 들고 왔다. 말린 박은 질겨서 연한 박을 사용해야 한다. 아주머니는 뒤란에 박이 더 많다며 박을 모아놓은 곳으로 안내했다. 싱싱하고 수줍은 박들이다. 필자가 직접 들어보니 ‘끙’ 소리가 절로 났다. 그렇게 큰 박은 처음 보았다.
예전에는 초가지붕마다 박이 있었고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시골풍경을 그릴 때는 초가지붕에 둥근 박이 한 장면으로 그려졌고 보름달이 뜨면 달마중을 하는 박을 옹기종기 그렸다. 그런데 이젠 그 흔한 풍경도 찾기가 어렵다. 가을이 성큼 오기 전에 부모님을 모시고 단걸음에 다시 와야겠다.
■ 도움 주신 분
원풍식당 목예균(여, 73세) 내가 못 먹는 것은 남 안 주고, 항상 같이 먹는다는 생각으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와인의 고장 이탈리아에서 최고의 샴페인을 선물 받으면 어떤 요리를 내올까? 이탈리아인 알베르토씨는 인기 TV프로그램 <수요미식회>에서 그 주인공으로 굴 요리를 꼽았다. 탱글탱글한 식감에 깊은 바다 향이 나는 고급 품종을 유럽에서 구하려면 비쌀 경우 1개에 만원까지도 하는 최고급 식재료다. 지난 겨울, 살얼음이 낀 동치미 국물에 굴을 풀어 말아, 개수도 세어보지 않고 후루룩 물회로 먹었었는데. 문득 한국에 사는 것이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값싸고 맛있는 굴을 먹을 수 있게 된 데에는 우리 어민과 국민의 노력이 있었다. 그 역사를 알아보기 위해 굴의 고장, 서해안의 태안 앞바다로 떠나본다.
2007년 겨울, 끔찍한 기름유출사고로 인해 태안의 푸른 바다가 황폐화 되었다. 시커먼 기름을 뒤집어 쓴 뿔논병아리의 사진과 검정색의 띠가 그려진 바다의 사진이 뉴스에 보도되자, 전국에서 123만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달려왔다. 빠른 시간 내에는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외신의 비관적인 전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민과 국민이 힘을 합치자 태안 앞바다는 빠르게 복원되기 시작하였다. 바다가 원래의 에메랄드빛을 회복하며 반짝이자, 바다를 떠났던 수십여 가지의 해양 생물도 태안으로 돌아왔다. 한때 높게는 500배까도 치솟았던 굴 오염도 또한 원상 복귀되었다. 이러한 기적을 증명이라도 하듯 2016년 1월, 세계 자연 보호 연맹(IUCN)에서는 태안해안국립공원의 등급을 5등급에서 2등급으로 상향 조정했다.
대체로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굴은 크기에 따라 두 종류로 나뉜다. 알갱이가 큼직큼직한 남해안 굴, 그리고 알갱이가 작지만 풍미가 더 좋은 서해안 굴. 두 종은 생식 환경에 따라 차이가 난다. 서해안의 굴은 갯벌에 살기 때문에 뜨거운 여름과 추운 겨울바람을 그대로 버텨내야만 한다. 몸이 클수록 더 많은 면적이 온도 변화에 노출되고, 이에 따라 칼로리가 많이 필요해진다. 그래서 서해안의 굴은 효율을 위해 자신의 몸을 작게 만든다. 이에 비해 남해안의 굴은 바다 밑에서 자라기 때문에 1년 내내 비교적 안정된 온도에서 살고, 몸집을 작게 만들 이유도 없다. 언뜻 보면, 음식의 재료로써는 서해의 굴이 많이 불리할 것 같다. 먹을 수 있는 살이 더 적으니까 품질도 떨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작은 고추가 매운 법. 알갱이가 작은 대신 맛이 농밀하고, 한입에 먹기가 쉬운 탓에 굴 물회, 어리굴젓, 굴 무침 등 다양한 요리에 쓸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동치미 국물에 말아 먹는 굴 물회는 전날의 숙취를 한방에 몰아내는 극강의 시원함을 자랑한다.
깜장굴을 사용한 어리굴젓이나 굴 무침은 유통기한이 비교적 긴 덕분에 수도권의 주요 마트에서 가끔 볼 수 있지만, 도심지에서 깜장굴 물회를 맛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굴 물회는 싱싱한 굴을 동치미 육수와 갖은 양념에 말아 먹는 음식으로, 현지에서만 정확한 맛을 볼 수 있는 특별한 향토음식이다. 오래 삭혀둔 시원한 동치미 육수에 자연산 굴을 말아 호로록 마시는 점심상은 술에 취해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오전을 깨울 수 있는 보양식이자 새콤달콤 시원한 일등 해장 별미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시원한 바다의 별미를 언제부터 즐겨왔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추측해 보건데, 해안가 지역에서 물회를 자주 해먹는 음식문화가 자리 잡혀 있다보니, 굴의 생산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굴로 물회를 해먹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회는 어부들이 배 위에서 빠르고 간편하게 후루룩, 후루룩 먹기 위해 고안된 음식이다. 따라서 깜장굴 물회 또한 지역 어민들의 허기를 달래주며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다. 현지의 손맛으로 그때그때 버무려 만들기 때문에 이렇다 할 지정된 조리법도 없다. 그때그때마다 지역에서 갓 잡은 재료를 활용해서 만드는 음식, ‘손 맛’이 듬뿍듬뿍 담긴 음식이다. 겨울철, 서해안 바다를 안주삼아 한잔 한 다음날에는 꼭 태안에 들러 깜장굴 물회를 먹어보자. 더부룩함을 말끔히 날려 보내는 시원함은 기본이고, 영양까지 풍족하게 채워 줄 것이다.
바다의 대표 보양식인 해삼은 문자 그대로 海蔘, 즉 바다의 인삼이다. 영어로는 Sea cucumber이라고 하는데, 겉면이 오이처럼 오돌토돌하고 길쭉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서해안, 남해안, 동해안 한반도 전 해안에서 잡힐 정도로 생각보다 쉽게 볼 수 있지만, 양식기법 등 수산물 관리 비법이 필요하므로 대량으로 양식해서 보급하는 것은 발전 단계에 있다.
충청남도 태안군의 경우, 해삼을 주요 수산 자원으로 설정하고 양식과 판매에 온 힘을 쏟고 있다. 2007년 태안반도 기름유출사고 이후 큰 피해를 보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바다를 기다려 다시 깨끗한 서해안 수산물의 보금자리를 회복했다. 2012년에는 제1회 태안 모항항 해삼 축제를 열어 태안 사고로 얼룩졌던 태안 바다의 이미지를 재고하고,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 인근 바다에 2015년도에 총 700ha의 수출전략 단지를 조성해 해삼을 수확하고 있다. 안면도는 낙조의 경관이 빼어나 전국의 사진작가들과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명소이면서 동시에 해삼 수출전략 단지인 셈이다. 태안 해삼은 수심과 수온이 최적인 환경에서 자라 단백질이 풍부하고 열량이 적어 비만 예방에 효과적이어서 국내에서 큰 인기고, 크기가 큰 해삼은 건해삼으로 가공하여 중국에 수출하는 중요 수산 수출품목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해삼은 말리거나 급속 냉동시켜서 먹기도 하지만, 해산물이 최고의 맛을 내는 때는 역시 바로 잡아서 회를 떠서 먹을 때다. 한 번도 못 먹어 본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놀라운 식감을 가지고 있다. 흐물흐물해 보이는 겉모습과 다르게 처음 씹을 때는 꼭꼭 씹어야 하지만, 오도독 들어가는 식감이 갈수록 좋아져 고급 횟감으로 통한다. 온도에 상당히 민감한 편이라 보통 얼음물에서 손질해서 살얼음을 밑에 깔아 냉기를 유지해주는 접시에 내놓는다. 싱싱한 해삼의 경우 별다른 누린내나 비린내가 없으며 계속 먹다 보면 바다의 향이라고 표현할법한 특유의 맛이 올라온다.
몸체를 씹을 때 맛볼 수 있는 특유의 꼬들꼬들한 식감을 제대로 내기 위해서는 해삼 두께가 중요하다. 너무 두껍게 썰거나 너무 큰 해삼을 사용하면 오히려 질겨서 먹는 데 애를 먹기 때문이다. 성인 남성이 주먹을 꽉 쥐었을 때 그 절반만 한 크기가 좋다. 중량으로 치면 1kg당 7~8마리 내외가 되는 녀석들이 손질하기도 쉽고 회로 먹을 때의 맛도 제일 좋다.
해삼은 그 내장까지도 상당한 진미로 알려져 있다. 해삼내장은 일본에서 ‘고노와다’라고 하여 해삼의 최고급 부위로 치고, 해삼 알은 일본에서 ‘고노코’라고 하여 말려먹거나 밥에 비벼 먹기도한다. 상당히 풍미가 진하고 여운이 오래 지속되는 최고급 식자재지만, 내장인 특성상 신선도 유지가 굉장히 까다로우므로 일반인은 쉽게 접하기 어렵다.
현재 태안군에서 양식하는 방법은 해삼의 종패를 특수 제작된 인공어초에 뿌린 후 2~3년 동안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 채취한다. 깊은 골이 파여 있어 해삼의 먹이활동에도 유리하고 어린 종패가 해류에 쓸려나가지 않도록 안전한 서식지 틀의 기능을 하고 있어 우리나라 해삼 양식 사업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황톳빛 땅 위에 백의민족이 모여 태극기를 흔들 듯,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 외벽에 걸린 새하얀 간판 위로 태극기가 힘차게 펄럭인다. 기념관 뒤로는 그들의 혼을 진호하듯 태안의 진산, 백화산이 자리한다. 언덕에 올라 출입문 앞에 선다. 130여 년 전,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에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서 있었을까. 묵념의 손길로 문을 밀며, 그 이야기를 들어보려 한다.
19세기 조선 후기. 백성들은 탐관의 부패와 삼정 문란, 그리고 열강의 침탈 등 혼란한 정세 속에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이런 난국에 위인들이 난다고 했던가. 1860년(철종 11), 사인여천(事人如天,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함) 등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동학이 창시됐다.
경상도에서 시작된 동학은 점점 충청도, 전라도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조정은 동학을 사회 혼란을 초래하는 불온한 종교로 판단해 전국적인 탄압에 나섰고, 1863년 창시자 최제우를 체포하고 이듬해 처형했다.
조정의 혹독한 탄압에도 동학은 2대 교주 최시형을 주축으로 교조신원운동(원한을 풀어줌)을 진행하는 등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890년대에는 호남과 호서 지방까지 동학이 전파되었는데, 후에 녹두장군이 될 전봉준도 이때 입도하였다.
1890년경 서산 지곡면에 거주하던 최형순에 의해 태안에도 동학이 전파되었다. 태안을 포함한 서해안 지역은 바다를 접한 지리적 특성으로 물산이 풍부해 탐관오리의 수탈이 유독 심했다. 이에 동학 세력이 다른 지역에 비해 빠르게 커졌고, 특히 원북면 방갈리, 이원면 포지리가 강한 교세를 보였다.
1894년 1월, 탐관오리 고부군수의 횡포로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일이 기폭제가 되어 전봉준과 20여 명의 동학도들은 격문이 적힌 사발통문을 돌려 농민들과 함께 고부관아를 점령했다. 한 달여 동안 봉기가 이어지자, 조정은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고부군수를 처벌하고 사건을 조사‧수습할 안핵사 이용태를 보냈다.
하지만 안핵사 이용태는 도리어 봉기에 참여한 농민군을 죽이고 탄압했다. 무장현(現 고창군)으로 피신한 전봉준은 결국 동학 지도부들과 농민들을 모아 봉기를 재정비할 것을 계획했고, 1894년 3월 20일 무장현 당산에서 거병하는 명분과 정당성을 알리기 위한 ‘창의문’을 포고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첫 함성이 울려 퍼진 것이다.
첫 항쟁지 고부를 시작으로, 동학농민군은 정읍 관아, 전주성을 점령했다. 항쟁은 전주화약(全州和約)으로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개입한 일본군이 철수하지 않고 되레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2차 농민혁명인 삼례 봉기가 일어났다. 1차와 달리 2차는 반침략 항일투쟁으로 통문을 날렸고, 전국 각지의 분개한 농민군 모두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났다. 그렇게 그들은 의병이 되었다.
1894년 10월, 일본군은 인천항에 상륙해 충청‧전라‧경상도로 진격했고,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 동학농민군은 논산에서 공주로 진격하고 있었다. 당시 이원면 포지리와 원북면 방갈리 지역을 중심으로 기포한 태안 동학농민군은 10월 1일 태안 관아에 쳐들어가 옥에 갇힌 동학 지도자 30여 명을 구출했다. 이후 후 태안 동학농민군은 태안 읍성을 점령했으나 홍주목(現 홍성군)에서 500여 명의 관군이 몰려와 탈환하였다.
하지만 들끓은 민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조직을 점검한 태안동학농민군은 10월 22일경 서산 해미로 넘어가 서산 동학농민군과 근동의 농민군까지 합류한 동학연합군으로 덩치를 불려 당진 승전곡으로 이동했다. 연합군은 그곳에 매복 중이던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잠시 후퇴했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승전곡 전투를 지휘한 태안 인물로는 태안 김병두, 안면도 주병도, 최동빈 등이 있다.
그 후 동학연합군은 예산 신례원 관작리 전투에서 연거푸 대승을 거둬 사기가 높아졌다. 그 기세로 홍주성으로 진군했으나, 그곳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 신식 무기를 지닌 일본군에 패하였다. 사기가 떨어진 농민연합군은 해미성으로 후퇴했다. 그들은 첫 기포의 마음을 되새기며 다시 항전할 준비를 했지만, 이두황이 이끄는 관군이 기습하자 무기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서산 매현(매봉재)으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11월 8일 저녁, 이두황의 관군이 다시 기습하던 그 날, 내포연합군은 사력을 끝내 수세에 몰려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최후의 전투가 된 매봉제 전투에서 이들 대부분은 태안 방향으로 몸을 숨겼고, 참혹한 결말을 맞게 되었다.
11월 중순, 관군과 유회군(양반 지배층이 조직한 부대)은 동학농민군 잔여 세력 토벌을 목적으로 태안지역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흩어졌던 농민군은 백화산에 집결했지만, 재기할 여력이 없어 다시 해산했다. 관군과 유회군은 마을마다 숨어있던 농민군을 잡아들인 후 무자비하게 총살하거나 생매장했다. 근흥면 수룡리 토성산에 몸을 숨긴 수많은 농민군도 이내 발각되어 학살당했다. 그때 목을 자르는 데 사용한 작두가 현재 천안독립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이외에도 작두로 목을 잘라 샘에 던져졌다고 전해지는 이원면 사창3리 ‘목네미샘’과 이원 관리 ‘통개’ 등에서 참극이 계속됐다. 지배층의 핍박에서 벗어나 그저 존중받고 평등하길 바라며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농민들. 그 소망과 기대가 담긴 궐기가 추운 눈밭에 덮여 붉게 물들어 갔다.
1964년 동학정신선양회 조직하고 2021년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열기까지, 동학농민군의 후손들은 민족운동을 펼쳤던 선조들을 기억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태안 지역 동학을 이끌며 여러 전투에 참전‧지휘한 낙암 문장로(1846~1919)의 손자 문원덕(1915~1986)은 충청서부지역의 동학혁명운동 사료를 발굴하고 순국자와 그 후손을 찾기 위해 역사 채록 등 선양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현재는 그의 자녀 문영식 회장(동학농민혁명태안군유족회)이 대를 이었다. 문원덕 선생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순도자 288명의 명단을 확인하여 기록했는데, 현재까지 440명이 추가 확인되었다. 지금도 참여자나 순도자를 찾는 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역사가 후대에 전해지는 데에는 기록물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가 태안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알 수 있었던 것도, 당시 인물들이 세밀하게 기록하고 유산으로 남긴 덕분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계승한 동학정신선양회는 1967년과 1973년에 「북접일기」의 일부인 ‘문장준 역사’와 ‘창녕후인 조석현 역사’를 연달아 발굴하였다. 이 두 권의 기록물은 충청도 서북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과 전투 상황,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이후 동학의 분화 과정과 천도교로 개칭‧성립하는 과정 등을 세세하게 담고 있다. 저자인 문장준과 조석현(파도접주) 선생은 태안군 원북면 출신이며, 동학도이자 서북구 지역 전투에 참전한 주역이었다.
1998년에는 체계적인 계승 사업을 목적으로 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다. 사업회는 지금까지 발굴한 유산을 수집하고 보관하며 역사를 차곡차곡 정리하는 한편, 2021년 태안군과 함께 내포동학농민혁명사의 중심 역할을 한 지역이자 동학농민군이 참혹하게 희생당한 흔적이 남아있는 태안 지역에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도 설립했다.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동학정신선양회가 보관하던 기록물과 유족들의 기증품을 전시 중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영상과 디지털콘텐츠도 제작하여 동학의 시작과 혁명의 과정을 한층 생생하게 보여준다.
1층 전시실 관람 후 2층 옥상정원으로 나가면 정원 뒤로 백화산 산길이 보인다. 오래전 보국안민을 외친 동학혁명군을 지켜봤을 백화산이 기념관 정원의 일부가 되어 그 애환의 터를 빛내고 있다. 산 중턱에 있는 탑은 1978년 동학정신선양회가 동학혁명군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갑오동학혁명추모탑이다. 건립 이후 현재까지, 추모탑 앞에서 매년 갑오동학혁명 순국선열 위령식이 열린다.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위해 밭을 갈고 소죽을 쑤던 농민들이 깃발과 총을 들었다. 그들은 두려움을 뒤로하고 목숨을 던져 싸웠다. 전봉준의 「창의문」에 담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쇠잔해진다’라는 메시지는 민중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그로부터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 민족은 이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항쟁을 이어왔다.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이념은 아직도 글 속에만 갇혀있다. 역사기념관은 단순히 역사 공부를 하기 위해 세운 곳이 아니다. 기억하고, 반성하고, 실현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역사기념관을 자주 찾아야 하는 이유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모래밭 위에 색색의 파라솔이 만개하고, 수많은 사람이 물속을 드나들며 더위를 날리는 곳. 이곳은 지난 2007년 사라질 뻔한 해수욕의 메카, 태안 만리포다. 이곳엔 유류피해극복기념관이 있다. 외벽 아래 물이 흐르는 모습이 마치 항해하는 건물을 보는 듯하다. 내부에는 봉사자들의 모습을 본뜬 하얀 조형물이 있다. 저 조형물처럼 태안이 깨끗해지기까지 얼마나 큰 노고가 있었는지, 이 공간은 말하고 있다.
2007년 12월 7일 새벽 6시 30분, 강한 풍랑이 서해를 어지럽혔다. 이때 거제로 향하던 예인선의 와이어가 끊어지면서 크레인 부선이 표류하기 시작했다. 표류하던 크레인 부선은 7시경 홍콩의 유조선인 허베이 스피리트호(이하 허베이호)와 아홉 차례 충돌했다. 허베이호는 서산 대산항에 정박하려 만리포 해변에서 9km 떨어진 해상에서 대기 중이었다. 푸른 바다에 퍼진 검은 기름은 삽시간에 학암포, 신두리, 만리포 등 해변까지 퍼졌다. 사고 발생 당일 등교하던 학생들은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에 멀미가 날 정도로 힘들어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의 심정은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태안 유류피해극복기념관 소개 영상, 유류피해극복기념관 유튜브 채널」
375km 해안선을 따라 19,000t 기름은 멈출 줄 모르고 퍼져나갔다. 검은 바다는 태안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검은 갯벌 생물들이 힘없이 움직였다. 바닷속 물고기들도 산소와 햇빛이 차단되면서 폐사했다. 바다생물뿐 아니라 해안에 서식지를 둔 새들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만 깜빡였다. 노랑부리백로, 검은머리물떼새 등 천연기념물 새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태안의 어촌도 직격탄을 맞았다. 해산물을 키우던 양식업자들, 매일 그물을 거두던 어민들, 깊은 바다로 거침없이 뛰어들던 해녀들, 다양하고 풍부한 어족 자원을 나르고 판매하고 요리하던 상인들, 그리고 해수욕장 관광업자들까지. 해안에서 9km 떨어져 있던 유조선 한 척이 셀 수 없이 많은 숨구멍을 막아놓았다.
「태안 유류피해극복기념관 소개 영상, 유류피해극복기념관 유튜브 채널」
정부는 사고 수습을 위해 12월 8일 재난 사태를 선포하고 7.7km 길이의 오일펜스를 설치했다. 9일에는 유조선 파공 부위를 응급 봉쇄하였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본격 방제작업에 들어갔다. 11일엔 충남 태안을 포함한 6개 인접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이날 모인 자원봉사자 수가 만 명에 달했다. 여름 휴가철에 물장구를 치던 추억의 장소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염려와 불안이 전국 각지 각국에서 발걸음을 모이게 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필자도 걱정이 되어 친구들과 함께 현장에 갔다. 나누어준 수건으로 고작 두세 번 돌을 닦았을 뿐인데 금세 새까만 기름걸레가 되는 모습을 보니 과연 이곳을 전처럼 되돌릴 수 있을지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열의를 다지던 움직임도 점점 더뎌졌다.
「대전 샘머리초등학교 5학년 김**, 유류피해극복기념관 내 전시 글」
그래도 사람들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자원봉사자도 한 달 만에 50만 명을 돌파했다. 한 사람의 작은 움직임이 모이자 새까만 기름이 벗겨지고 본연의 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 후, 정부는 연안과 도서 지역의 기본 방제가 완료되었다고 발표했다. 최종 집계된 자원봉사자의 수는 1,232,322명이었다.
수많은 봉사자의 도움으로 예상보다 빠르게 기본 방제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여전히 고통스러워했다. 양식업이나 자영업에 종사하던 주민들은 수입 없이 지출만 늘어나 빚이 생겼고, 해산물을 채취하던 어민들은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하루 방제 작업비인 6~7만 원을 받으며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하지 않아도 되었을 일이, 그들의 유일한 수입원이 된 것이다.
주민들이 종일 해변에 나가 기름을 닦는 동안 아이들은 혼자 남겨졌다. 피해 지역 아동의 70% 이상이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하고 어른들과 함께 생계에 대한 고통과 불안을 겪으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았다. 이들 대부분은 지금까지 제대로 된 심리치료도 받지 못했다.
자원봉사자들이 방제장비가 닿지 않는 곳까지 끊임없이 손길을 뻗은 끝에, 삶의 터전은 무사히 회복되었다. 해녀들은 다시 바다로 나갔고, 양식업자와 어부들도 제자리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몇 년간 적막하던 태안 수산시장에서도 오랜만에 웅성웅성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수조 안 물고기는 펄쩍펄쩍 뛰었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보호지역 카테고리 시스템에서 태안이 2016년 경관 보호지역(카테고리Ⅴ)에서 국립공원(카테고리Ⅱ)으로 변경된 것은 국제사회가 태안 바다의 생태계 복원을 인정했다는 증거다. 방제가 완료된 이후에도 정부와 전문가들은 유사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비상 대응 태세를 갖춘 110여 척의 방제선을 준비하고 기름 회수기, 자갈 세척기 등 방제장비를 연구, 개발하고 있다.
2017년 서해안 유류피해극복 10주년을 맞이해 만리포해수욕장 한쪽에 새로운 항해를 의미하는 배 형상의 기념관이 세워졌다. 1층 전시실 초입엔 123만 자원봉사자의 이름이 새겨졌고, 그들의 땀과 주민들의 눈물을 형상화한 조형물도 전시되었다. 내부에는 사고 발생부터 피해 상황, 주민들과 봉사자가 힘을 합쳐 진행한 방제 과정 등이 사진과 영상으로 전시되어 있다. 국내외 해상오염사고를 검색하고 바다 생태계의 중요성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블랙 아카이브 코너도 인상적이다.
2층 전시실에서는 인터렉티브 콘텐츠와 다양한 미디어 전시를 통해 더욱 쉽고 흥미롭게 방제에 관한 체험을 할 수 있다. 3층 전망대로 나서면 만리포 앞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당시 상황을 이해한 뒤 현재 눈앞에 펼쳐진 깨끗한 바다를 바라본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직접 경험해 보면 좋겠다. 시간에 맞춰 전망대에 오르면 찬란하고 아름다운 석양도 만끽할 수 있다. 노을이 내려앉은 주황빛 바다를 다시 볼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인류는 정착 생활을 하면서 소금을 직접 섭취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소금을 생산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구한 말까지는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만들었는데, 이를 자염이라고 한다. 모래가 조금 섞인 갯벌에 통자락을 설치하고, 이곳에 모인 염도가 높은 물을 염벗(가마터)에 옮겨 8시간 정도 끓이면 자염이 된다.
전통 방식으로 끓여 만든 소금이 자취를 감춘 건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천일염 방식이 들어오면서부터다. 일제는 부족한 소금양을 늘리기 위해 우리나라 바다를 대대적으로 막아 천일염전을 조성했다. 천일염전은 일제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오히려 해방 이후 민간에서 더욱 활성화되었다. 일본인이 운영하던 염전을 이어받아 운영한 사람도 있고, 생산법을 배운 뒤 직접 간척하여 천일염전을 조성한 사람도 있었다. 물때에 맞춰 함수를 모으고 일일이 옮겨 가마에 끓여야 얻을 수 있던 자염보다는 간척지에 염판을 만들어 바닷물을 가둬놓고 햇빛과 바람에 물을 증발시켜 소금 결정체를 얻어내는 천일염 방식이 생계가 시급했던 그들에게 더 유용했을 것이다.
돈이 있는 사람은 천일염전을 매매하거나 직접 조성해 사업주가 되었고, 사업할 돈은커녕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던 사람들은 염전에서 일하며 품삯을 벌었다. 1960년대 염부 새경(연봉)은 약 쌀 1가마의 반값 정도였고, 생계유지를 위해 급식비로 쌀 2말, 보리쌀 4말을 따로 받았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소금은 주로 평안도, 황해도 등 북쪽 지역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다 6‧25전쟁 이후 남한에 소금이 부족해지자 서해안 지역에 대규모 염전을 만들었다. 이때 생산된 소금은 정부가 모두 사들여 직접 관리하고 판매하는 전매품이었다.
천일염 작업은 겨울을 제외하고 봄부터 가을까지 8개월 정도 이어진다. 염전의 염판은 바닷물을 가둔 저수지, 증발지, 결정지로 구성되며, 증발지는 1차 증발지인 난치와 2차 증발지인 느테로 나뉜다.
작업 과정은 이렇다. 만조 때 저수지 수문을 열어 바닷물을 저장하고 한 계단 아래에 있는 난치에 물을 내려받아 수분을 증발시킨다. 난치는 보통 8~10칸인데, 저수지 바로 아래에 있는 난치가 가장 크고 한 계단씩 아래로 갈수록 100평씩 작아진다. 2차 증발지인 느테도 같은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저수지에 물을 가둔 지 20일 정도 지나면 소금 결정이 생긴다. 이때 염도는 3% 정도다. 그 물을 증발지(난치-느테)로 단계별로 옮기면 염도가 15%까지 오른다. 이 소금물은 해주라는 웅덩이에 모아두었다가 증발지로 다시 퍼 올려 염도를 더 높인다. 염부들은 이 작업을 구미야기, 또는 쌀난치라고 불렀다.
마지막 증발지인 느테에서 소금물 염도가 25%가 되면 결정지 염판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새벽에 소금물을 옮긴다. 그러면 오전 11시경 소금 결정이 엉기는데, 이를 ‘소금꽃이 핀다’, 혹은 ‘소금이 온다’라고 표현한다.
1980년대 태안의 안*염전(15,000평)의 1년 평균 소금 생산량은 50kg 포대 10,000개였다. 한 포대에 약 5,000원 정도로 값도 좋은 편이었다. 당시는 정부 수매가 주를 이뤘기 때문에 생산한 소금 소량을 가지고 정부로부터 등급판정을 받은 후에야 배에 실어 군산과 인천으로 팔 수 있었다.
정부는 국영 염전도 소유하고 있었는데, 직접 관리하는 것이 힘들어지자 1970년대 민간에 매각했다. 당시 안면도에서 화*사 염전을 운영하던 사업주가 국영 염전 회사인 ㈜대한염업을 불하받아 함께 일하던 염부들과 함께 인천의 남동‧군자‧소래염전을 운영관리하기도 했다. 국영 염전은 1990년대 인천 소래염전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췄다.
천일염전은 본래 갯벌 바닥을 다져 만든 토판염전이었다. 아무리 단단히 다져도 흙 위에서 증발하기 때문에 증발 효율은 낮고 불순물 혼입 가능성은 높았다. 1960년대 초반에는 깨진 옹기조각인 일면 깜파리를 깔았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이후 작은 타일이나 검은 비닐장판(PVC) 등을 깔았다가, 1980년대 들어서 큰 타일로 바꿔 현재의 염판과 유사한 모습이 되었다. 소금 포장도 1970년대부터는 가마니에서 PP 포대로 바뀌었다.
연중 소금이 잘 팔리는 시기는 가을이다. 김장도 해야 하고, 이듬해 봄에 장도 담가야 해서 미리 사 두는 것이다. 반면 6월은 판매량이 저조해 소금이 헐값에 팔린다. 소금 상태가 가장 좋을 때는 5월이다. 송홧가루가 날리고 찔레꽃이나 아카시아꽃이 필 때 생산된 소금을 최상품으로 친다. 반대로 해가 길어지고 일교차가 커지는 가을에는 소금 결정체가 물러진다. 결정체 모양이 사각형이 아닌 부스러진 먼지(탑새기)같이 생기면 식용이 어려워 보통 제설용으로 판다.
소나무가 많은 태안의 특산품은 송화 소금이다. 송화 소금은 봄철에 염전 주변에 있는 소나무에서 송홧가루가 날아와 염전에 떨어지면서 만들어진다. 태안군은 송홧가루 배합률에 따라 소금의 맛과 영양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특화에 나섰다. 따뜻한 봄날, 천연 송림에 열흘 남짓 날리는 송홧가루를 채취해 천일염과 혼합한다. 알맞게 배합한 송화 소금은 일반 천일염에 비해 단맛이 있고 미네랄이 더 풍부하다. 송홧가루가 들어간 소금은 옅은 금빛을 띤다. 작은 금, 소금이라는 이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소금은 송화 소금이 아닌가 싶다.
천일염은 1907년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전인 인천 주안 천일염전을 시작으로 110여 년 동안 이어져 왔다. 하지만 남해안과 서해안에 주를 이루던 염전이 점차 사라져, 현재는 전체 생산량의 80%가 전남 영광과 신안에서만 나오고 있다. 서해안과 맞닿아 있는 경기도, 충청남도의 수많은 염전이 폐쇄되었고, 태안 지역도 몇 해 전부터 폐염전 자리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기술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나타나고 사라진다.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왔을 전통 자염은 천일염이 등장한 이후 사라졌고, 이제는 천일염전도 태양광 패널에 덮여가고 있다. 하지만 최초의 조미료이자 작은 금덩어리인 소금이 사라지지 않는 한, 태안 바다 앞에서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염부들이 있는 한, 작은 파도 소리에 소금꽃이 모이는 장면은 눈앞에 계속 펼쳐질 것이다.
운여해변은 충청남도 태안군 고남면, 장포항과 장삼포해수욕장 사이에 있다. 태안읍내에서 차로 가면 약 1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다. 길이 울퉁불퉁하고 풀이 무성해 꽃지해수욕장이나 만리포해수욕장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사진작가와 캠핑족, 은하수를 찾는 이들 사이에선 오히려 유명하다.
운여해변은 구름 운(雲), 돌 이름 여(礖)자를 쓴다. 앞바다가 넓게 트여 있어 파도가 높고,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가 만들어내는 포말이 장대하여 마치 구름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운여의 '여'는 썰물 때 바닷물에 드러나고 밀물 때 바다에 잠기는 바위를 의미한다. 실제로 서해안은 간조와 만조의 차이가 극명하며, 운여해변 역시 간조와 만조의 풍경이 확연히 다르다.
간조 때가 되면 운여해변은 모래사장 위에 파도의 물결이 새겨진다. 축축한 대지 위로 물웅덩이가 고이고, 고운 모래사장 가운데 물길이 난다. 이때 갯벌에 살짝 고인 바닷물 위로 비치는 소나무의 모습을 보면 만조 때 찍을 반영 사진이 더 기대된다.
만조가 되어 차오른 바닷물은 커다란 거울이 되어 솔섬을 비춘다. 솔섬 뒤로 넘어가는 붉은 낙조도 근사한 배경이 된다. 운여해변은 일출 명소로 소문이 자자한 만큼, 휴대전화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도 명화처럼 나온다.
솔섬 너머 운여해변과 바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거칠게 밀려드는 파도와 바다 건너 마을의 반짝이는 불빛을 보며 걷다 보면 흑청색으로 변한 하늘에 하나둘 별이 떠오른다. 밝게 빛나는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이아, 하늘을 수놓은 별들과 휘영청 밝은 달은 도시에서 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전문가가 사용하는 카메라가 아니어도 운여해변의 아름다움이 사진에 잘 담기는 것을 보면, 이보다 깊은 밤에는 은하수도 볼 수 있겠다 싶다.
운여해변은 ’한국의 우유니 사막‘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답지만, 제2의 무언가로 불리기 아쉬울 정도로 충분히 매력적이다. 상업적으로 개발이 덜 된 탓에 찾아가는 길이 험한 편이지만, 덕분에 빛 공해 없이 별과 달이 뜨고 은하수가 흐르는 진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인상적인 풍경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캠핑족과 전문 사진작가들도 많다.
운여해변에서 은하수와 별을 관찰하려면 사전에 계절과 날씨, 물 때, 시간대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 게다가 만조 때 물이 가득 들어찬 운여해변에서는 완벽한 반영 사진도 찍을 수 있다. 물이 슬금슬금 들어차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묘하게 신비로운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운여해변에 방문할 예정이라면 ’한국판 우유니 사막‘이라는 별명보다는 반영 사진이나 별구경에 초점을 두어야 기대 이상의 감흥을 느낄 수 있다. ’일본판 우유니 사막‘이라는 후쿠오카현 우쿠쓰시의 미야지하마해변에 방문했을 때, 우유니 사막을 상상했던 터라 다소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조용하고 평화로운 바닷가와 높은 건물 없이 정갈한 마을의 풍경을 보면서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반영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한적하고 아기자기한 바닷가 마을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운여해변 또한 그런 마음가짐으로 접한다면 낭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