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의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 다산 정약용이 1820년(순조 20)경에 저술한 『이담속찬(耳談續纂)』은 명나라의 왕동궤(王同軌)가 편찬한 『이담(耳談)』에 우리 고유의 속담을 증보하여 엮은 속담집이다. 『이담속찬』에서 정약용은 “꿩을 잡을 수 없으면, 닭이 그 수효를 채울 수 있다(雉之未捕 雞可備數)”는 속담을 소개하면서, “인재가 없으면 그보다 못한 자가 자리를 채울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喩承乏則不肖者亦可充位)” 라고 해석을 달았다. 요즘 통하는 말로 바꾸면 ‘꿩 대신 닭’에 해당한다.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의 유래는 우리 세시풍속에서 유래하였다. 정월에 먹는 절식(節食)인 떡국은 원래 꿩고기로 국물을 내어 만들어 먹었다. 예로부터 꿩은 상서로운 기운을 지닌 동물로써 천신(天神)의 사자(使者)로 여겼다. 그래서 임금의 면복(冕服)과 왕비의 적의(翟衣)에도 상상의 동물인 화충(華蟲)을 상징하는 꿩의 무늬를 수놓아 왕실의 덕을 표징하는 동물로 삼기도 하였다. 그러나 야생에 서식하는 꿩을 그것도 한겨울에 잡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어서 민간에서는 꿩 대신에 집에서 기르는 닭을 넣어서 떡국을 만들어 먹었다. 여기에서 속담이 유래한 것이다.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은 대체재(代替財)에 대한 속담이지만, 차별을 지양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요즘과 같은 다양성의 시대라면 닭의 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할 일이다. 사실 꿩은 야생에 살면서 간혹 고기와 깃털 정도만 제공하는 데 반해, 닭은 오랜 세월 인간과 함께 생활해 온 동물이다. 그 수효 또한 꿩에 비해 엄청날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달걀과 고기는 물론이고 배설물인 계분(鷄糞)조차 거름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닭은 늘 '꿩 대신 닭'의 그늘에 가려져야했다. 그런데 ‘꿩 대신 닭’의 유래가 떡국이었다면 , 이번에는 ‘소 대신 닭’에 해당하는 음식이 있다. 바로 대구광역시의 향토음식인 닭개장이다.
닭개장은 대구광역시가 발상지로 알려진 육개장의 치킨버전이라 할 수 있다. 육개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무더운 지역으로 알려진 대구를 비롯한 경상북도 북부지역에서 여름철에 먹는 복날의 시절음식이었다. 육개장은 소고기에 고사리, 숙주, 토란대 등을 넣고 고추기름과 마늘, 파, 후추 등의 맵고 자극적인 양념을 하여 만든 이열치열의 음식이다. 본래 개고기 섭취를 꺼리는 사람을 위해 개고기 대신에 소고기를 재료로 하여 끓인 개장국 형태의 음식이 육개장이었다. 그런데 개장국에 쓰였던 개고기의 육질은 소고기보다 오히려 닭고기와 더 비슷했다. 삶은 닭고기는 소고기보다 육질이 훨씬 연하고 담백한 개고기와 비슷했던 것이다. 또한 가격이 비싼 소고기로 만든 육개장은 외식을 하든 가정에서 만들어 먹든지 간에 생활이 어려웠던 옛날에는 쉽사리 엄두를 낼 음식은 아니었다. 이때 소고기 대신 삶은 닭을 결대로 곱게 찢어 채소류와 함께 국을 끓여낸 것이 바로 ‘닭개장’이었다. 그야말로 ‘꿩 대신 닭’이지만 닭개장은 비용도 저렴할 뿐만 아니라 육개장에서는 느낄 수 없는 닭고기가 주는 특유의 풍미와 영양가 또한 뒤처지지 않았다.
대구지역에서 닭개장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대구에는 근대적인 양계산업의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 있었던 ‘신기부화장’은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병아리부화장이었다. 해방 이후에는 1960년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추진되면서 대구의 양계산업은 본격화되었다. 1960년대 계란의 특수가 일어나면서 대구 전역에 양계장이 우후죽순 들어선다. 당시에 대구 시내에는 농장형 양계장이 들어섰다. 특히 이 지역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대구의 닭과 계란이 서울로 연결될 수 있도록 ‘닭장열차’가 운행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구의 양계산업으로 생산된 닭과 대구의 향토음식이었던 육개장이 만나 ‘닭개장’이 탄생할 수 있었다.
닭개장과 같은 닭고기 국물요리가 대구광역시를 포함한 경상북도 지방의 향토음식으로 이어져 온 역사적 배경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닭개장과 같이 닭고기를 넣어 끓인 탕국음식은 ‘닭고기국’, ‘닭고음(닭곰탕)’ 등으로 존재하였다. 17세기 윤휴(尹鑴)의 『백호전서(白湖全書)』와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계갱(鷄羹)’이라 하여 국물이 있는 닭고기국이 확인된다. 15세기 김종직(金宗直)의 『점필재집(佔畢齋集)』과 19세기 정약용의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계학(雞臛)’으로 소개되어 있다. 계학에서 ‘학(臛)’이라는 한자의 뜻이 ‘국거리를 넣고 진하게 푹 고아서 끓인 국’ 즉 곰국을 의미하므로, 앞서 계갱이 맑은 닭국이라면 계학은 닭국물을 진하게 고아낸 곰국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18세기 실학자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과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는 ‘계고(鷄膏)’라 하여 마마(천연두)의 치료음식으로 소개되고 있다. 실제로 19세기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계고를 이용한 치료기록이 나온다. 조선 24대 국왕 헌종(憲宗)이 1843년(헌종 9) 마마를 앓자 이유원은 헌종의 장인인 풍은부원군(豐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에게 ‘계고’를 드시게 해보자고 의논한 후 이를 반대하는 궁인(宮人)을 꾸짖고 올려서 차도를 보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또한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중국의 산부(産婦)들이 닭고기국을 먹는다”는 『본초강목(本草綱目)』의 내용을 인용하였고, “출산 후에 닭고기국이 가장 알맞은 약제”라 하여 산후조리에 좋은 보양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19세기 들어서는 지금의 닭개장과 같은 형태의 음식이 고조리서에 등장한다. 1800년대 말엽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의전서(是議全書)』라는 조리서에 소개된 ‘연계국’이 그것이다. 연계국의 연계(軟鷄)는 ‘영계’ 즉 어린 닭을 이르는 말이다. 재료는 닭ㆍ고춧가루ㆍ다진 마늘ㆍ다진 파ㆍ소금ㆍ후춧가루 등으로 닭개장과 거의 같다. 조리법을 살펴보면 “연계개장은 연계를 백숙한 다음 건져서 뼈를 다 추리고 (살을) 뜯어서 육개장 하듯” 하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로써 적어도 19세기 무렵에는 닭개장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시의전서』가 발견된 지역이 경상북도 상주군(현 상주시)의 한 양반가였다는 점에서 당시 경상북도지방에서는 ‘개장’류가 보편적인 음식이었다는 것도 확인된다. 이러한 닭개장의 전통은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양계산업이 육계(肉鷄)를 대량으로 공급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음식상품으로 개발되거나 가정에서 만들어 먹는 별식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현재 대구지역에서 닭개장으로 대표적인 식당으로는 대구광역시 북구 고성동의 ‘진국닭개장’, 동구 불로동의 불로시장 입구에 있는 ‘경주보양탕’ 등이 있다.
대구광역시는 우리나라에서 기상관측이 시작된 1917년 이래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은 섭씨 40℃라는 1942년 8월 1일의 최고 기온 기록을 가진 지역이다. 대구가 여름에 무더운 날씨를 겪는 것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바람이 적은 탓에 태양의 복사열이 강한 전형적인 내륙분지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대구에서는 매년 무더위를 극복하기 위한 음식이 발달하였는데, 바로 이열치열로 이겨내는 지혜가 ‘육개장’이라는 형태의 독특한 향토음식으로 자리 매김하였다. ‘대구탕반’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육개장은 아마도 무덥고 습한 대구의 더위에 흘린 땀과 지친 몸을 맵고 뜨거운 음식으로 보양했던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전통시대에는 지방의 관아가 설치되었던 읍치(邑治)를 중심으로 대규모 장시가 발달하였는데, 경상도 감영이 주재하였던 대구에도 조선 후기에 서문시장(西門市場)과 같은 장시가 들어섰다. 또한 인근 두류동 일대에는 1950년대까지만 해도 한 해에 무려 수만 두에 이르는 소가 거래되는 우(牛)시장이 성업을 이루었고, 우시장에서 나오는 소의 부산물을 이용한 음식이 발달하였다. 대구 육개장도 이러한 배경 하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할 수 있었다.
지금도 지역 향토음식으로 전국적으로 알려진 경상북도 영천장의 소머리국밥, 전라남도 나주장의 나주곰탕, 경상남도 함안장의 소고기국밥 등도 모두 관아가 주재하였던 읍치의 장시와 우시장을 배경으로 탄생한 음식이다. 대구는 육개장뿐만 아니라 이제는 육개장과 더불어 전국적인 음식으로 알려진 ‘막창구이’를 비롯하여, 소의 힘줄을 구워먹는 ‘오드레기 구이’와 소의 생고기를 뭉텅하게 썰어 양념장에 찍어 먹는 ‘뭉티기’와 같은 대구 특유의 다양한 육류 음식문화가 발달하기도 했다.
원래 육개장은 무더운 여름철에 먹는 특히 복날의 시절음식으로 출발하였다.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육개장의 원형은 ‘개장[狗醬]’에서 비롯되었다. 개장은 개고기를 끓인 국을 말한다. 여기에 소고기를 뜻하는 한자 ‘육(肉)’이 붙은 것이다. 즉 개장국에 개고기를 넣지 않고 그 대신 소고기를 재료로 삼아 끓인 국이 육개장이다.
육당 최남선이 지은 『조선상식문답(朝鮮相識問答)』에 의하면 예로부터 복날에 개를 고아 얼큰하게 끓여낸 개장을 시식(時食)으로 먹었는데 “개고기가 식성에 맞지 않는 자는 쇠고기로 대신하고 이를 육개장이라 하여 시식을 빠뜨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19세기 말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전통 조리서인 『규곤요람(閨壼要覽)』에는 “고기를 썰어서 장을 풀어 물을 많이 붓고 끓이되 고기가 푹 익어 풀리도록 끓인다. 잎을 썰지 않은 파를 그대로 넣고 기름 치고 후춧가루를 넣는다”고 육개장 조리법을 소개하고 있어 오래전부터 먹어 왔던 시절음식임을 알 수 있다.
육개장은 복날의 시절음식 외에도 상갓집이나 잔칫집에서 많이 내놓은 음식으로도 유명하다. 육개장이 단체음식으로 선호된 요인은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위생상의 이유이다. 육개장은 매운 고추기름을 비롯하여 파, 마늘, 후추 등의 맵고 자극적인 향신료를 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잘 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음식들과 함께 먹음으로써 상갓집이나 잔칫집에서 음식을 먹고 탈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다음으로는 주술적인 이유이다. 빨갛게 끓여내는 육개장의 붉은 색은 귀신이 싫어하는 색깔이다. 그래서 육개장이 잡귀를 물리친다고 믿었기 때문에 특히 상갓집의 단골음식으로 선호된 것이다.
대구 육개장은 개벽사에서 1929년 12월 1일 간행한 대중잡지 『별건곤(別乾坤)』 24호의 ‘대구의 자랑 대구의 탕반’이라는 기사에 소개되어 있다.
대구탕반은 본명이 육개장이다. 대체로 개고기를 한 별미로 보신지재로 조아하는 것이 일부 조선사람들의 통성이지만, 특히 남도지방 촌간에서는 ‘사돈양반이 오시면 개를 잡는다’고 개장이 여간 큰 대접이 아니다. 이 개장 기호성과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정까지 살피고 또는 요사이 점점 개가 귀해지는 기미를 엿보아서 생겨난 것이 육개장이니 얼른 말하자면 소고기로 개장쳐럼 만든 것인데 지금은 대발전을 하여 본토인 대구에서 서울까지 진출을 하였다.
『별건곤』의 기사로 미루어보면 대구 육개장이 이미 20세기 초반에는 대구의 향토음식으로 정착하였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대구 육개장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대구로 몰려든 전국의 피난민들에게 알려졌고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대구 육개장은 그 종류도 다양한데, 대략 ‘육개장’과 ‘선지육개장’, ‘우거지선짓국’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육개장은 사골을 우려낸 육수에 양지머리나 사태와 무, 파 등을 넣고 끓인 국이다. 선지육개장은 선지가 들어가는 점에서 다르다. 우거지선짓국은 무와 파 대신에 우거지가 들어간다. 또한 대구 육개장은 ‘따로국밥’이라 하여 밥과 육개장을 따로 내놓는 메뉴도 파생하였다. 한국전쟁 중 각지에서 몰려든 피난민 중에 갓을 쓴 사람이 국에다 밥을 말아 내는 국밥은 상놈들이나 먹는 것이라며 나무라자 ‘밥따로 국따로’ 차려내는 메뉴를 별도로 추가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육개장은 푹 고아 삶은 고기를 찢어 파, 고춧가루 등 양념을 무친 후 고기를 고았던 국물에 다시 넣고 끓인 음식이다. 『경향신문』 1960.06.01 「육개장국」기사에서는 고기재료로 쇠고기 양지머리와 사태를 언급한다. 『동아일보』1939.07.08 「오늘 저녁엔 이런 반찬을」코너에서도 육개장국 만드는 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재료를 명확하게 지적하지 않고 갖은 곰거리라고 한다.
개고기로도 육개장을 만들었는데 조선시대 발간된 『경도잡지』라는 책에는 개고기 요리법을 두 가지 소개하고 있다. 한 가지는 개고기를 파의 밑통과 함께 푹 찌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개고기로 국을 끓여 고춧가루를 넣어 먹는 것이다. 개고기로 만든 육개장을 개장국이라고도 하였다. 개장국집은 조선시대부터 많이 있었는데 홍석모(1781~1857)의 『동국세시기』에서는 시장에서 개장을 많이 판다고 하였다. 육개장에 대한 조리법은 개장국보다 좀 늦은 1800년대 말의 책에서 보인다. 1800년대 말에 쓰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규곤요람』에서 1930년대 『동아일보』에 나오는 조리법과 비슷한 육개장 조리법이 나온다.
일제강점기 육개장은 식당에서 파는 음식 중 하나였는데 ‘대구탕반’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청진동 대구탕반집에서 드난살이를 하는 김모의 딸로서 4년전 장씨(기생)의 양딸로 있다가 자살한 소녀에 대한 기사(『동아일보』1925.08.23 「복술의 죽음」),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주산리 송성언(33)이라는 사람이 지난 4월 7일에 쌀값을 떼먹고 서울로 도망와 시내 공평동 64번지에 대구탕반집을 하다가 지난 11일에 시내 종로서에서 목포서의 의뢰로 검거되어 목포로 압송되었다는 기사(『동아일보』1926.05.14 「대구탕반주인 구죄가 발각돼」)에서 대구탕반집이 나온다.
대구탕반이 육개장인 것은 『별건곤』 1929년 12월 1일자에 실린 「대구의 자랑 대구탕반」이란 글에서 알 수 있다.
대구탕반은 본명이 육개장이다. 대체로 개고기를 한 별미로 보신지재(補身之材)로 좋아하는 것이 일부 조선 사람들의 통성이지만, 특히 남도지방 시골에서는 ‘사돈양반이 오시면 개를 잡는다’고 개장이 여간 큰 대접이 아니다. 이 개장은 기호성과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의 사정까지 살피고 또는 요사이 점점 개가 귀해지는 기미를 엿보아서 생겨난 것이 곧 육개장이니 간단하게 말하자면 쇠고기로 개장처럼 만든 것인데 시방은 큰 발전을 하여 본토인 대구에서 서울까지 진출을 하였다.
이 글을 보면 개장국과 같은 양념과 채소에 개고기 대신 쇠고기를 넣어 만든 것이 육개장이었다. 육개장이 나온 주 원인은 조선시대부터 개고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제시대 신문기사를 보면 경성부의 음식점 중에서 개장국의 가격이나 판매에 대한 구체적인 기사는 거의 없다. 일제시대부터 개장국은 양성적으로 광고하는 음식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시장에서 개장을 많이 팔던 것과는 비교된다
『동아일보』1925년 11월 13일「부민에게 헌신한 이천여두 육축」이라는 기사에서는 ‘지난 정월부터 10월까지 경성부민이 잡아먹은 고기는 소가 1688두, 말이 1두, 돼지가 584두, 전부가 2274두인데 소 중에는 일본인이 암소를 좋아하여 310두의 암소가 죽었다. ... 개장국 좋아하는 조선사람의 입맛이 변한것이라 할는지 금년에 이르러 개는 한 마리도 죽인 것이 없다고 하는 바 ...’라고 하여 1925년에 경성부에서 개가 도살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서울시내에 개장국집이 없었던 것일까?
『동아일보』1934년 7월 6일 「백만장자로 남의 개 도적」이라는 기사에서는 ‘4일 오전 11시경 서대문경찰서 앞으로 핏기없는 남자가 개 한 마리를 끌고 지나가는 것을 수상히 여긴 경찰이 취조한 결과 그는 남의 집에서 개를 훔쳐다가 개장국집에 팔아 넘기려던 계획이 탄로되었다 한다.’라고 하여 서울시내에 개장국집이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개의 도살은 공식적으로 행하기보다 밀도살로 행하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개장국은 일제강점기 들어서 언론에 의해 선전되는 음식이 아니라 조선사람들 사이에서만 먹었던 음식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언론에 의해 조명되는 음식은 개장국대신 육개장이었다.
육개장 즉 대구탕반은 『동아일보』1930년 11월 12일자 「시내 각 음식점 요리도 감하」기사에서 냉면, 장국밥, 어복장국, 떡국, 만두, 상밥비빔밥등과 같이 열거되었는데, 이들 음식은 종래 20전 하던 것을 모두 15전으로 내린다고 하였다. 육개장은 서민들이 많이 찾는 음식 중 하나로 국가가 가격을 조절하였다. 육개장 즉 대구탕반은 1970년대 후반 들어 대구에서 따로 국밥형태로 변형된다.(『경향신문』1980.02.18 「따로따로 주의」)
타지방과 달리 제주에서는 돼지고기로 국물 음식을 많이 만드는데 그 중 으뜸이 돼지고기 육개장이다. 소고기와 대파를 재료로 하는 일반적인 육개장과는 달리 제주도의 육개장은 돼지고기와 고사리를 주재료 하여 만든다. 재료의 이름을 빌려 고사리 육개장 또는 돼지고기 육개장이라고도 불린다.
산에서 나는 소고기라 불릴 정도로 영양소가 풍부한 고사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나물이다. 봄철에 어린 고사리를 삶아 떫고 쓴 맛을 제거한 후, 말려서 나물이나 각종 요리의 재료로 사용한다. 산에서 자란 고사리는 줄기는 통통하고 잎은 아기의 주먹 쥔 손과 같은 앙증맞은 모습이다. 녹색의 식물이지만 데치거나 삶으면 우리에게 익숙한 갈색으로 변한다. 제주도에서는 주로 한라산 근방에서 자생하는 고사리를 채취하여 사용해 왔지만 2006년부터 밭에서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고사리는 저열량 식품으로 식이섬유가 풍부하여 변비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 특히 무기질 중 칼륨과 인 성분이 풍부한데, 고사리를 말리면 철분, 칼륨, 마그네슘 등의 무기질이 더욱 풍부해진다. 고사리와 궁합이 잘 어울리는 식재료에는 마늘과 대파가 있다. 마늘과 파에는 알리신 성분이 풍부하여 영양 균형을 잡아주고 비릿한 냄새도 제거해 준다. 이러한 재료는 육개장이라는 음식에서 각각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주고 있다.
돼지고기 육개장은 주로 집안의 경사나 잔칫날, 돼지를 잡을 때 먹었던 음식이었다. 국물에 밀가루나 보릿가루, 메밀가루를 풀어 걸쭉하게 만든 육개장은 쉽게 식지 않고 누린내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최근 들어 방송 매체에서 돼지고기 육개장이라는 이름 대신 고사리 육개장으로 소개된 이후 제주 관광객들이 맛 제주의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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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과정1770년대 말엽에 나온 『경도잡지(京都雜志)』에는 복날에 선호하는 서울의 민간 음식 중에 개고기가 으뜸이라 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나오는 구장(狗醬)은 한결같이 ‘개를 잡아 흰 파를 넣고 국을 끓여서 고춧가루를 뿌리고 흰밥을 말아먹는다’라고 하였고 시장에서도 많이 팔았다고 하니 당시에는 아주 일반적인 음식이었던 것 같다. 『농가월령가』 ‘8월조’에는 “며느리가 말미 받아 본집에 근친(近親 : 며느리가 친정에 가서 부모님을 뵙는 일) 갈 때 개 잡아 삶아 건져 떡고리와 술병이라” 하였으니 개고기를 귀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예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장국을 더운 여름에 양기(陽氣)를 보충해 주는 음식으로 이해하였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개고기가 오장을 편안하게 하며, 혈맥을 조절하고, 장과 위를 튼튼하게 하며 골수를 충족시켜 허리와 무릎을 온(溫)하게 하고, 양도(陽道)를 일으켜 기력을 증진시킨다”라고 하였다. 『동국세시기』에는 개장국을 먹으면서 땀을 내면 더위를 물리쳐 기가 허한 것을 보충한다고 했으며, 『열양세시기(列陽歲時記)』에는 복날에 개장국을 끓여 양기를 돕는다고 했다. 특히 개장국의 주재료로 황구(黃狗)가 으뜸으로 쓰였다. 황구를 이용한 개고기찜[구증(狗蒸)]이 1795년 음력 6월 18일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상차림에 오르고 있고, 1795년 정조 때의 수라상 식단에도 구증(狗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궁중에서도 개고기를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개장국은 전골, 찜과 함께 삼복에 가장 즐겨 먹는 음식이다. 개장국을 끓이는 방법으로 쇠고기를 이용해 만든 음식으로는 육개장이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개장국은 야만적인 음식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그래서 1942년 무렵에 개장국이란 이름을 보신탕으로 바꿔 개고기가 주재료임을 숨기게 되었고, 그 이후에 다시 영양탕이나 사철탕으로 바뀌었다. 우리나라에서는 ’88 서울 올림픽 때 대외적인 이미지 때문에 사철탕(영양탕) 집을 집중적으로 단속하였다. 그에 따라 취급 식당들이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갔고 지금은 예전처럼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당국이 개고기를 식육으로 정식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아 도살이나 유통이 위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사회적 이슈로 제기되기도 한다.